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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기도] “성체성사 안에 담긴 그리스도의 사랑이 맺은 열매 - 콜카타의 성녀 마더 테레사”
지난 시간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겸손과 가난함에 대해 함께 묵상하며, 세속적 가치가 지닌 한계와 허무함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과 근원적인 가난함, 그리고 인간 존재의 연약함을 마주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은 프란치스코 성인이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복음의 길로 나아가도록 이끈 결정적인 은총의 순간이었습니다.
오늘은 스스로를 “저는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일 뿐입니다”라고 소개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삶을 묵상하고자 합니다. 수녀님께서는 1950년 사랑의 선교회를 창립하시고, 콜카타의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버려진 이들, 특히 죽음을 앞둔 이들을 돌보는 일에 평생을 바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분을 “콜카타의 성녀”라 부르며 기억합니다.
1969년 영국의 언론인 말콤 머거리지는 콜카타의 참혹한 현실을 취재하기 위해 그곳을 찾았습니다. 그는 거리마다 넘쳐나는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절망을 목격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곳은 희망보다 죽음의 그림자가 더 짙게 드리운 장소처럼 보였습니다. 그는 테레사 수녀님께 다음과 같이 물었습니다.
콜카타는 세상의 지옥이라고 할 만큼 아픔과 고통이 너무 많습니다. 여기에는 참혹한 가난이 있고, 기아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있으며, 뼈만 앙상하게 남은 이들로 가득합니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보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녀님의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는 미소가 피어나고, 절망이 아닌 삶의 기쁨이 깃들여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오늘의 기도』, 110-111)
그러자 수녀님께서는 매우 단순하면서도 강렬한 한마디로 답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지옥이 아니라 천국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같은 책, 111). 세상은 환경과 조건을 먼저 보지만, 성인은 사랑의 현존을 먼저 보았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은 풍요로워 보여도 공허할 수 있고, 사랑이 있는 곳은 가난하고 초라해 보여도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될 수 있음을 수녀님은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말콤은 더 깊은 궁금증을 품고 수녀님께 다시 물었습니다. “그 사랑할 힘과 웃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옵니까?”(같은 책, 111) 수녀님은 다음 날 새벽 6시에 수녀원으로 오라고 초대했습니다. 그는 약속한 시간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광경을 마주했습니다. 화려하거나 특별한 것이 아니라, 소박한 경당 안에서 검소한 복장을 한 수녀들이 바닥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며 미사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너무나 평범하고 단순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말콤은 그 침묵과 기도 안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누구와 대화하고 있는가? 저 작은 성체 안에서 무엇을 받고 있는가? 어떻게 저토록 큰 사랑의 힘이 여기에서 흘러나오는가? 미사가 끝난 뒤 수녀님은 곧바로 가난한 이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며 그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을 불어넣어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 사랑을 우리가 만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러 갑니다”(같은 책, 112-113). 바로 여기에서 수녀님의 삶의 비밀이 드러납니다. 그분의 봉사는 인간적인 의지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성체성사 안에서 받아 모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삶으로 흘러나온 열매였습니다. 기도와 전례, 성체와 봉사가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말콤 머거리지는 이 체험을 통해 깊은 감동을 받았고, 마침내 가톨릭 신앙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수녀님의 겸손과 사랑은 콜카타를 넘어 전 세계에 알려졌습니다. 1985년 유엔 창립 40주년 기념행사에 초대되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그분을 위대한 인도주의자로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수녀님은 자신을 높이지 않고, 여전히 “기도하는 가난한 수녀”라고 소개하셨습니다. 그리고 세상 지도자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여러분 곁에 있는 가난한 이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여러분의 집 계단과 집 안에서도 사랑을 기다리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 눈이 열리고, 마음은 사랑으로 가득 차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우리에게 참된 사랑의 시작은 거창한 능력이나 특별한 재능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사랑은 먼저 하느님 앞에 머무는 기도에서 시작됩니다. 주님 안에 머무는 사람만이 세상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고, 성체 안에서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그 사랑을 이웃에게 나눌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외로움 속에 있는 이들, 위로를 기다리는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이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멀리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 닫혀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의 눈은 사랑이 필요한 이를 알아보고,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은 연민으로 움직이며, 기도하는 사람의 손은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도구가 됩니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인간의 의지 동원한 자력 구원의 한계와 믿음
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지켰다. 율법을 지키면 구원받는다고 믿어 십계명뿐 아니라 613개의 율법 조항을 지켰다. 예수님 시대에는 1만633개의 율법 세칙을 지켰다. 그러나 당시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백성들 대부분은 그런 조항들이 있는지조차 몰랐다. 조항을 알았던 율법학자들도 사람들 앞에서는 율법을 지켰지만,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는 어김으로써 위선자가 되었다. 따라서 유다인들처럼 율법을 지킴으로써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 중에 구원받을 사람은 극소수일 것이다. 성직자라 하더라도 구원받을 사람들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고, 유혹에 쉽게 빠지는 존재이며, 하느님의 계명을 어길 수밖에 없는 사회구조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죄의 결과인 고통과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 사람들은 지혜(철학)를 찾았고 불교 스님들은 깨달음을 추구했다. 불교 스님들처럼 깨달음을 얻어야만 구원을 얻는다면, 구원을 얻는 사람은 1000만 명 중 한두 명 있을까 말까 일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스님이 많다. 조계종만 대략 2만여 명이라고 한다. 이 스님들에게 가서 물어보길 바란다. “스님!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고기도 안 먹고 홀로 독수공방하며, 30년, 40년의 세월을 수도생활하셨는데 과연 깨달음을 얻으셨습니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스님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아니, 못 얻었어. 수도하다 병만 났지 뭐야.” 또는 “깨달음을 얻기가 정말로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어.” 이것이 솔직한 대답이고 이것이 수도를 한 수많은 스님의 경험일 것이다. 수도를 한 수도승이 이러하다면 수도하지 않은, 세속 사회를 살아가는 일반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것은 돌을 다이아몬드로 바꾸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일본 정토진종의 창시자 신란이라는 수도승이 있었다. 그는 히에이산에 들어가 20년 동안 여러 가지 고행을 했으나 정욕이 줄어들지 않았다. 수도할수록 정욕은 더욱 불같이 치밀어 올랐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단념하고 하산하여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
그 깨달음이란 이것이다. “내 힘으로는 안 된다. 절대로 안 된다.” 그는 자기가 의인이 되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죄인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았다. 죄인인 그대로, 아직 정욕이 있는 그대로, 아미타불을 믿기만 하면, 귀의만 하면(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은 “아미타 부처님과 관세음보살님께 귀의합니다”라는 뜻이다) 구원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불교의 역사도 소승 불교에서 대승 불교로 그 역사가 넘어가는 것이다.
구원은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에게서 온다.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온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깨달음을 추구함으로써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사이비 교주가 아니라 참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진다. 이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바로 기쁜 소식이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신앙은 ‘고마운 돌’
박노해(가스파르) 시인은 그의 <고마운 돌>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아프리카의 어느 마을에는 강이 하나 흐르고 있는데 수심은 그리 깊지 않지만 물살이 무척이나 센 강이 있는데 사람들은 그 강을 건널 때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건넌다. 거친 물살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 지금 짊어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사람들은 무거운 돌을 하나씩 지고 강을 건너면서 어쩌면 그것이 거친 강물에 휩쓸리지 않게 해 줄 고마운 돌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신앙은 한마디로 고마운 돌이다. 신앙은 돌처럼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위기의 순간에 생명을 주는 고마운 돌이다. 인생을 살다 보면 거친 물살들, 예상치 못한 시련과 고통, 좌절과 절망의 순간들이 닥쳐온다. 이때 신앙이라는 고마운 돌은 우리가 그 물살에 휩쓸려 넘어지지 않도록 굳건하게 붙들어 주는 닻이 되어 준다. 특별히 죽음이라는 마지막 순간에, 가장 큰 고통과 위기의 순간에 그 죽음을 편안하게 넘어가게 해 준다. 신앙은 삶 안에서도, 죽음 앞에서도 고마운 돌이고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귀한 선물이다.
세례식 때 주례 사제는 세례받는 예비 신자들에게 묻는다. “여러분은 교회에 무엇을 청합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신앙을 청합니다.” 교회에 돈이나 부귀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를 청하는 것이 아니고 “신앙을 청합니다”라고 말한다. 육체와 영혼을 지닌 인간으로서 가장 좋은 것, 가장 최고의 것, 가장 귀한 것을 청하는 것이다.
이어 주례사제가 묻는다. “신앙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줍니까?” 이때 세례받는 예비신자들은 이렇게 대답한다.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돈과 부귀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권력과 명예도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오로지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은 신앙이다. 신앙만이 인간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고 인간을 참 진리와 참 행복으로 이끌어 준다. 따라서 신앙만큼 좋은 것이 없다. 신앙을 통해 인간은 구원을 받는다. 신앙이 없으면 인간은 구원될 수 없다.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가장 흔히 쓰는 말 중 하나이다. 너무나 많이 들어 왔기에 이미 이 의미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과연 그럴까? 우리는 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이 신앙이라는 말은 우리가 교회에 입문할 때 첫 번째로 청한 것이고 구원의 절대적인 요소이며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신앙은 가장 중요하고 귀중한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말하고 있는 ‘신앙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깊고 정확하게 알아 기쁘고 올바른 신앙생활 할 수 있는 디딤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살 때 행복하고 죽을 때 웃으면서 평안히 죽을 수 있도록 일반 가톨릭 신자들의 눈높이에 맞추어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라는 신앙 시리즈를 연재한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어떻게 해석하냐에 따라서 신앙이 달라진다
유명한 의사가 강의하던 중에 “이것을 먹으면 가장 오래 사는데 무엇일까요?” 하고 질문했다. 이 질문에 사람들이 “밥을 잘 먹어야 오래 산다”, “욕을 먹어야 오래 산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깔깔깔 크게 웃었다. 그러나 의사는 고개를 저으며 “나이”라고 대답했다.
이어서 의사는 다시 이렇게 질문했다. “이것을 먹으면 죽는데 무엇일까요?” 그러자 어떤 사람이 “나이요”하고 대답했다. 의사는 “정답”이라고 답했다. 인간은 나이를 먹어 오래 살기도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죽게 된다. 나이라는 것은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죽음도 마찬가지이다. 죽음도 늘 존재하는 것이지만 이방인들은 죽음을 모든 것이 끝장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이 두렵다. 그러나 신앙인은 죽음을 하느님과 만나는 날로 생각한다. 영원한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날,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날,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날로 생각한다. 그래서 죽음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이것은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신앙에 대해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달라질 수 있다. 신앙의 민족인 유다 민족이 바빌론 유배 사건에 대하여 어떻게 해석했는가? 기원전 6세기 유다 왕국의 유다 민족은 이웃 나라 강대국 바빌론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 유배 생활을 했다. 그 고난의 유배 생활 속에서 그들은 “우리가 왜 멸망했는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보통 다른 민족들이라면 멸망의 이유에 대하여 이렇게 해석했을 것이다. “우리보다 강한 바빌론이 쳐들어와 전쟁에 졌기 때문이다.” 맞는 해석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원인이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어서 “우리의 지도자들이 무능하고 부패했기 때문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 민족이었던 유다 민족은 이렇게 해석하지 않았다. 어떻게 해석했을까? 이웃 나라가 강해서도 아니고, 우리가 부패해서도 아니다. 그러면 왜 멸망했을까? “우리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우상을 버리고 하느님을 섬기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는 율법을 지키면 하느님께서 우리를 다시 살려 주실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이렇게 해석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오늘날 유다교가 탄생한 것이다.
하나의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 사건을 해석하고 난 뒤에 그 해석에 따라 얼마나 실천하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민족이 달라지고, 신앙이 달라지는 것이다.
[신앙에 주파수를 맞춰요]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란?
숲을 바라볼 때 숲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나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사물을 바라볼 때 전체를 바라보는 사람이 있고 부분을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 신앙을 바라볼 때도 마찬가지다. 부분적인 신앙의 나무들을 바라보다 보면 신앙이라는 전체 숲을 놓칠 수 있기 때문에 먼저 넓은 차원에서 신앙이 무엇인지를 소개한다.
첫 번째, 신앙(Fides)이 있기 전에 먼저 무엇이 있었을까? 계시(Revelatio)가 있었다. 계시가 없었다면 신앙은 존재할 수 없다. 계시와 신앙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느님의 계시가 있었기에 그 계시를 받아들이는 신앙이 생겨났다. 가장 넓고 본질적인 차원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대한 인간의 응답이 신앙’이다.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고 보여주시는 하느님께(하느님의 자기 전달, 자기 통교, 자기 증여) 그분을 받아들여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신다니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하느님께서 구약에서는 예언자를 통하여,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이렇게 당신 자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께 “예”라고 응답하는 것이 신앙이다.
두 번째, 그렇다면 계시의 원천(Fons revelationis)은 무엇인가? 그것은 계시하시는 하느님(Deus Revelans)이시다.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침묵만 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계시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 역사 안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구약에서는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이시다. 이렇게 역사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보여주시고 말씀하셨기에 신앙이 생겨났고 이 신앙으로 인하여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생겨났다.
세 번째, 그렇다면 계시는 어떻게 전달되는가? 계시의 전달은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 성경(Biblia Sacra)과, 기록되지 않은 하느님의 말씀인 성전(Traditio Sacra)을 통해서 전달된다.
네 번째, 성경과 성전을 통하여 전달되는 계시를 현실화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교의(Dogma)이다. 그리고 계시의 이해를 현실화 시킨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신학(Theologia)이다.
신학이란 ‘학문적 방법에 의한 계시와 신앙의 이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신학은 ‘학문적 방법에 의한 신앙의 이해(Intellectus fidei)’인 것이다. 결국 신학이라는 것도 거창한 것 같지만 신앙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인 것이다. 따라서 신학보다는 교의가, 교의보다는 계시와 신앙이, 계시와 신앙보다는 하느님이 더 큰 차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