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멍에와 자유
성경본문: 잠언 9: 1-12
1. 지혜가 그 집을 짓고 일곱 기둥을 다듬고
2. 짐승을 잡으며 포도주를 혼합하여 상을 갖추고
3. 그 여종을 보내어 성중 높은 곳에서 불러 이르기를 시
4. 무릇 어리석은 자는 이리로 돌이키라 또 지혜 없는 자에게 이르기를
5. 너는 와서 내 식물을 먹으며 내 혼합한 포도주를 마시고
6. 어리석음을 버리고 생명을 얻으라 명철의 길을 행하라 하느니라
7. 거만한 자를 징계하는 자는 도리어 능욕을 받고 악인을 책망하는 자는 도리어 흠을 잡히느니라
8. 거만한 자를 책망하지 말라 그가 너를 미워할까 두려우니라 지혜 있는 자를 책망하라 그가 너를 사랑하리라
9. 지혜 있는 자에게 교훈을 더하라 그가 더욱 지혜로와질 것이요 의로운 사람을 가르치라 그의 학식이 더하리라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11.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 날이 많아질 것이요 네 생명의 해가 더하리라
12. 네가 만일 지혜로우면 그 지혜가 네게 유익할 것이나 네가 만일 거만하면 너 홀로 해를 당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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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5: 1-12
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거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니라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
8. 그 권면이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케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고후8:22, 갈1:7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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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읽어 드린 갈라디아서 5장 1절을 다른 번역으로 보면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위하여 우리를 자유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죄와 죽음의 지배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을 뿐 아니라,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무지로부터 자유하게 하였으며, 사회적 압제와 종교적ㅗ 문화적 차별로부터 자유하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자유함을 받기 전에는 죄와 사망의 무거운 멍에를 메었고, 그 죄 때문에 율법의 멍에를 메어야 했으며,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무지의 멍에를 메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무겁게 멘 멍에
멍에란 달구지나 쟁기의 채를 잡아매기 위하여 소나 말의 목에 가로 얹는 도구입니다. 이것은 소나 말을 구속하는 것이며, 무거운 짐을 지게 하는 것이며, 그 삶을 제약하는 것입니다. 죄와 사망, 율법, 무지 등은 바로 인간을 구속하고 제약하는 멍에입니다. 그 멍에로 해서 우리는 나서부터 죽기까지 고통을 맛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소나 말이 늘상 그 멍에를 메기 때문에 그것을 자기의 운명으로 받아 드리는 것처럼 우리도 태어나면서 노예의 낙인이 찍히고 평생 그 낙인과 더불어 노예의 삶을 살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운명이려니 생각하며 거기에 순응하며 길들여지는 것입니다.
자유하게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하나님이 지으신 자연 속에서 야생의 말처럼 자유를 누리면서 살았는데, 악마에게 붙잡혀 그가 씌운 죄의 멍에 아래서 꼼짝 못하고 길들여져 그 멍에를 운명으로 여기며 살게 된 것입니다. 인간은 너무 쉽게 악마에게 굴복하고 만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쉽게 뱀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그만큼 인간이 보잘 것 없는 존재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마치 하찮은 당근에 이끌려 사람에 붙잡히는 말과 같이 우리는 악마가 내미는 달콤한 유혹에 이끌려 스스로 죄의 멍에 아래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악마는 우리가 멘 멍에를 운명적인 것으로 생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벗으려고 몸부림치지도 않고, 그저 순순히 그 멍에를 삶의 일부로 받아 드려 그것을 메고 일생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인간의 멍에를 벗기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셨고, 그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지배하던 악마로부터 우리를 자유하게 하여 그 메었던 멍에를 모두 벗기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멍에를 벗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멍에를 편한 것으로 생각하며 거기에 그대로 머물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이집트에서 430년간이나 노예로 지냈습니다. 그러다 보니 노예의 삶이 그들의 운명으로 여겨졌고, 너무나도 강대한 바로의 세력 때문에 한번도 그에 대항하여 자유를 찾으려고 해보지도 못한 채 그 노예의 삶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 드렸던 것입니다. 4백여년 동안 노예로 길들여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는 오히려 노예가 아닌 생활이 낯설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들이 모세를 따라 출애급하여 광야의 거친 생활을 하면서 몇 번이나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도 낯선 자유보다는 익숙한 노예 생활을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예를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도 반상제도에 의해 상민으로 태어난 사람은 언제나 그 신분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온갖 제약을 받으며 일생을 마쳐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운명으로 알고 그저 양반을 섬기며 그들이 베푸는 자그마한 자선에 만족하면서 굽실거리며 일생을 살아가는 것에 만족하는 것입니다. 가끔 임꺽정과 같이 그 신분제도에 항거하여 나선 사람들이 있었지만, 결국은 그 너무나 거대한 제도의 벽에 막혀 좌절하곤 했던 것입니다.
벗었다가도 다시 메는 멍에
이집트의 거대한 문명과 그 지배의 권력이 하도 커서 그것은 도저히 대항할 수 없으며, 넘어뜨릴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 명령에 순응하면서 그들의 최소한의 자비를 바라는 것으로 만족하며 살던 히브리들에게 새로운 의식을 불어넣어 준 것이 모세였습니다.
그들이 원래 노예가 아니었으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임을 일깨우고, 하나님이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시려고 광야로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거대한 바로의 왕국으로 열 가지 재앙으로 혼을 내주므로, 비로소 그들은 이제까지 벗을 수 없는 것으로 알았던 멍에로부터 자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모세를 따라 마침내 그 억압의 땅을 탈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노예 생활에 익숙한 히브리인들에게 광야의 자유는 너무 낯설고 힘이 들었습니다. 통치만 받던 그들에게 스스로 자신들의 길을 개척하고 새로운 삶을 이룩한다는 것은 너무 어렵고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번이나 포기하고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고자 했던 것입니다. 노예로 있을 때는 내가 무엇을 연구하고 결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위에서 시키는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유하게 되자 내가 생각해야 하고, 결정해야 하며, 무엇이 보다 나은 삶이며, 무엇이 선한 것인지, 무엇이 보다 올바른 것인지를 판단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새롭게 주어진 삶의 규칙인 율법은 그들에게 너무 어렵고 무거운 또 다른 멍에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었으나 너무나도 그들에게는 그것이 힘들었기에 차라리 노예 생활이 보다 편하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받아 오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그 율법에 의한 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율법의 내적 요구를 완전하게 따른 것이 아니고, 다만 그 형식만을 지켜 가는 일에 익숙해진 것입니다. 안식일의 근본 의도를 생각하고 지키기보다는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나열하고 그런 것들을 지키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때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예수님께 반발하였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여 버렸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율법의 틀 안에 안주하면서 거기서 벗어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무겁게 메어진 멍에였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 안에 안주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런 율법의 멍에를 벗겨 주신 스승의 뜻을 받들어 새로운 교회를 시작하였지만, 저들조차도 완전하게 그 율법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사도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하여 자유를 얻었으면서도 또다시 그 율법의 멍에를 다시 메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만큼 오랜 세월을 통해 그들을 지배하였던 사상이나 이념이나 신앙에서 완전하게 벗어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때에 사도 바울이 나타났고, 그는 초대 교회 어떤 사도들보다 자유한 신학과 신앙을 가진 사도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매임으로부터 완전한 자유를 부르짖었고, 그 때문에 그는 유대인들로부터 박해와 고초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굴하지 않고 끝까지 자유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였던 것입니다.
완전히 벗어야 할 멍에
오늘 우리도 편견과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전에 우리를 지배하던 모든 이념과 편견으로부터 자유하게 됨을 뜻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율법으로부터 자유하라고 가르쳤지만, 아마도 오늘의 크리스찬들에게는 모든 이념과 생활의 관습으로부터 자유하라고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의 삶을 바쳐 주던 이념과 관습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대단히 불안한 삶이 될 것입니다. 특히 그 사회가 지지하고 따르는 이념이나 사상으로부터 자유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늘의 이념들이 바로 우리를 얽어매는 새로운 멍에이며, 그래서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에 이제 우리는 이를 벗기 위한 투쟁에 발벗고 나서야 할 것입니다.
이념이라고 말했지만, 그것은 거창한 어떤 사상이라기보다는 보잘 것 없는 고정관념이라 하겠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일류 대학에 대한 집념에서 자유하지 못합니다. 일류 대학 출신이라야 똑똑하고 유능하다고 생각하는데, 오늘의 파국을 몰아온 사람들이 바로 일류 대학 출신들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일류 대학교 출신들의 사고 방식이 고정화되어, 창의적이고 기발한 새로운 생각들에 익숙하지 못한 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 사회가 강한 보수 성향을 띠는 것은 어쩌면 지도층의 사고방식이 열려 있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교회도 얼마나 보수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예배 순서 하나만 바꾸어도 무슨 큰 일이나 나는 것처럼 수군거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좀처럼 예배 순서를 바꾸지 않습니다. 그래야 말이 없으니까 수십년 전에 하던 그 순서 그대로를 계속하는 것입니다. 많은 교인들이 주일 오후예배에 나오지 않으면서도 오후 예배를 폐지하는 것에는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서양음악에 의한 찬송에 익숙해 있는 교인들에게 우리 가락에 의한 찬송은 오히려 낯설어 부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음악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모두 서양음악만 배운 사람들이어서 그 사람들에 의해서 우리 가락이나 악기들은 전혀 예배에 도입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4월 첫주일 저녁에 국악으로 드리는 시범예배를 준비하고 있는데, 여러분 모두가 한번 참여하셔서 어떤지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 동안 여성은 목사나 장로가 되지를 못하였는데, 작년부터 여성 목사와 장로가 함께 일하게 된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가운데 여성에 대한 편견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여성들 자신이 여성을 장로로 세우는 일에 소극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를 오랫동안 구속한 멍에들입니다. 이런 사회적인 멍에, 교회적인 멍에, 가정적인 멍에들을 일일이 다 열거하려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런 멍에를 메고 있으면서도 메고 있는 줄 모른 데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이념이나 관습에 머물러 있으면 편안하고, 큰 충돌이 없기 때문에 좀처럼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다의 게가 일곱 번 정도 허물을 벗는데, 그 허물을 벗지 못하면 게는 성장하지 못하고 죽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삶의 원리입니다. 우리 사회나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이나를 막론하고 허물을 끊임없이 벗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몸도 끊임없이 새로운 세포들을 만들어 내면서 낡은 세포들은 죽어 버리므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오늘 진통을 겪는 것은 허물을 벗기 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허물을 빨리 벗을수록 오늘의 위기를 빨리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일제 시대의 낡은 제도와 양식들을 아직도 바꾸지 못하고 있어서 겪는 혼란들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빨리 제거하지 않으면 우리 사회가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원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할 교회가 과거의 낡은 교리, 낡은 제도, 낡은 관습들을 빨리 빨리 고치고 바꾸어야 할 텐데, 그냥 그 허물을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멍에가 되어 우리를 짓누르고 있으며, 이로 인해 교회가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옛 허물은 벗어버리게 되어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더 딱딱하게 만들어 그 안에 안주하려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어 드린 잠언서에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이를 아는 것이 슬기의 근본이다. 나 지혜로 말미암아 네가 오래 살 것이요, 네 수명도 길어질 것이다."
지혜란 하나님을 알고 그가 창조하신 세계의 원리를 바로 알아 그것을 따르는 마음입니다. 허물을 벗어버릴 시기를 알고 제때 허물을 벗는 자가 지혜 있는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런 지혜를 가진 사람이 발전하고 오래 살 것입니다. 벗어야 할 멍에, 탈피해야 할 옛 허물을 아낌없이 벗어 던지고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열린 마음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지혜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에서, 율법에서, 사회적 편견에서, 그리고 모든 이념과 편견에서 자유함을 얻었습니다. 좀처럼 벗을 수 없던 무거운 멍에, 깨지지 않던 낡은 껍데기를 깨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는 그 종의 멍에를 메는 일이 없도록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지켜 가야 하겠습니다. 동시에 역사의 변화를 따라 계속해서 우리는 새로워지도록 낡은 허물들을 벗어 가야 하겠습니다. 사도 바울이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는데, 우리도 날마다 죽고 날마다 새로워지는 삶을 향해 전진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를 옛 허물 속에 가두는 온갖 악의 세력들이 여러 모양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용기 있게 이런 허물들을 벗어 던질 때 우리는 자라며, 우리의 영성이 깨어 일어나고,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며, 하나님이 우리 앞에 열어 두신 새로운 세계를 체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지키면서 그 자유 안에서 새로운 생각으로 새로운 생활을 개척해 가야 하겠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만난 지 20년이 되었기에 이제 또 한 꺼풀을 벗을 때가 되었습니다. 지난 날 이룬 것은 돌아보지 말고 우리 앞에 열린 새로운 세계를 향하여 새롭게 출발해야 하겠습니다. 실험실에서 새로운 진리를 찾아내기 위하여 끊임없이 연구하는 학자들처럼 우리도 새로운 세계에 펼쳐진 새로운 진리들을 찾아가기 위하여 계속 전진해 가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하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을 때 우리는 전에 맛보지 못하였던 새로운 영의 세계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낡은 꺼풀과 멍에들을 벗어 던지고 여러분을 감동케 하는 새로운 삶을 향해 전진해 가시는 여러분의 생활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펴온 글-)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