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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나팔의 서곡
(계 11: 14-19)
= 신앙의 완성론 =
요 약
일곱째 천사의 나팔이란 주님이 재림하시는 마지막 나팔이다.
영성적으로는 신앙을 완성시키는 성령 충만한 십자가 복음이다. 이런 능력의 메시지는 성도를 속히 온전케 하실 것이며, 복음의 완전한 적용을 가져다주며, 주님 주권 중심에 서게 하고, 겸손과 경배의 신앙을 수립시키며, 항구적인 임재 의식과, 강력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고, 죄의 잔재도 소멸되고, 상 받을 행함의 사람으로 만들며, 하나님과 막힘 없는 화목과, 신부로서 합당한 자격과,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이 형성된다.
설 명
<마지막 나팔>
(객관적) 구원의 완성의 날인 역사적 재림의 나팔이다.
(주관적) 신앙의 완성을 주는 성령 충만한 십자가 복음이다.
1. 성화에 속히 이르게 함(14)
2. 복음의 실재를 경험함(10:7)
3. 주님 주권 중심의 신앙이 수립됨(15)
4. 겸손과 경배의 신앙이 확립됨(16)
5. 항구적 임재 의식(17)
6. 강력한 성령의 열매(17)
7. 죄악 잔재 소멸(18)
8. 행함의 상 받을 자 되게 하심(18)
9. 하나님과 온전한 화목(19)
10. 신부로서 합당한 자격(19)
11. 경건 형성(19)
(본 문)
14 둘째 화는 지나갔으나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15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하니 16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17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19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계 11:14-19)
(강 해)
이 시간에는 “마지막 나팔”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일곱째 천사의 나팔은 대단히 의미 있는 나팔입니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나팔에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언제 재림하실지는 아는 사람은 없지만 확실한 것은 이 마지막 나팔에 재림하심입니다. 고전15:51-52에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나팔이 울려야 재림하시고 이 나팔이 울려야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온전한 나라가 옵니다. 이 나팔 소리는 역사적인 어느 순간에 우리에게 분명히 들려올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참고적으로 예수님의 오심은 요한복음에 분명히 나타나 있듯이(요14:16-23, 16:16) 이중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예수님은 성령으로 현재적으로 임하시고 계시며 또 미래에 역사적으로 나타나십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부활도 현재라는 영의 부활과 미래라는 육체 부활의 이중적입니다. 이 중에서 현재적이란 죄인이 복음의 나팔을 들을 때 영혼이 거듭나고 성화까지 되어지는 역사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요5:25에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이 구절은 현재적인 영적 부활을 말씀하신 구절입니다. 그러나 5:28-29의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하신 말씀은 미래적 육신의 부활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나팔이 울려 퍼지기를 학수 고대해야 합니다.
오늘은 현재적 복음 증거의 나팔 측면에서만 말씀하겠습니다.
이 나팔은 이 나팔 소리가 나면 일곱 대접재앙이 부어진다는 점에서 성령 충만한 십자가 복음의 나팔입니다. 즉 성령 충만의 최고봉인 일곱 인 상봉에서 불며, 나중 대접 재앙에 대해서 나오지만 예수 십자가 복음의 진수로 충만한 일곱째 나팔에서 울려 퍼지는 나팔입니다. 대체 일곱 째 나팔이 얼마나 중요하면 복음 나팔의 성격을 예시하는 서곡이 나올까요?
그럼 성령 충만한 십자가 복음 나팔의 성격이란 무엇일까요?
1. 이 나팔의 성격은 속성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14절에 “보라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했습니다.
여기 ‘속히’라고 한 것은 순서적인 ‘속히’만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 재앙의 속성을 풍자해 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즉 이제까지 이런 표현이 없었는데 여기 재림과 관련된 나팔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왜 ‘속히’라는 용어를 썼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계22:20) 하신 대로 예수 재림의 신속성을 암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2000년이 되도록 오시지 않으심은 무슨 이유입니까?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은 지금도 성령으로 오시면서 구원하실 자는 구원하시고 온전케 하실 자는 온전케 하시면서 진실로 속히 오시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오시고 계신 과정에서 주님처럼 바쁘신 분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복음 시대 이 자체가 속성적인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 완전한 복음 나팔을 듣게 되면 성도의 중생과 성화는 급속합니다. 오순절에 회개한 사람들도 보면 사도들의 말씀을 듣고 불과 며칠 사이에 예수가 구주임을 믿음은 물론 자기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예수를 위해 박해받음을 기뻐하기까지 성장했습니다. 역사적 재림의 나팔은 우리가 아닌 천사장이 불겠지만 신령한 의미에서의 십자가 복음의 나팔은 우리들이 불어야 합니다. 축복 설교도 좋지만 이제는 예수 십자가의 뜨거운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성도들이 영적으로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권능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살전 1: 5-6에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 또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 받은 자가 되었으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나팔 소리는 부는 자가 그렇게 불든지 아니면 듣는 자가 성령으로 받을 때입니다.
2. 일곱째 나팔은 복음의 완성적 성취와 관계가 있습니다.
계 10: 7에 “일곱째 천사가 소리내는 날 그 나팔을 불게 될 때에 하나님의 비밀이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했습니다.
그 동안 여섯째 나팔까지도 복음의 적용이 많이 되었지만 아직은 죽었다고 믿어도 덜 죽었고 살았다고 믿어도 덜 살았고 기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나팔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정말 온전히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예수와 함께 다스림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그 종 선지자들에게 전하신 복음과 같이 이루리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시기 직전 “다 이루었다”(요19:30) 하신 것처럼 예수 십자가 복음으로 은혜를 받을 때 그 신앙은 무르익어서 하늘에 있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더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성도가 됩니다. 그렇다고 십자가만을 전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신앙이 익는 것은 바로 십자가 복음의 말씀에서 깊이 깊이 은혜를 경험할 때입니다.
3. 심령이 온전히 주와 그리스도의 나라가 됩니다.
15절에 “일곱째 천사가 나팔을 불매 하늘에 큰 음성들이 나서 가로되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리로다” 했습니다.
여기 나라란 넓게는 이 세계를 좁게는 각인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내가 왕 노릇하며 내 뜻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사실상 세상 나라였습니다. 어느 정도 믿음이 들어가면서 그 자리를 주님께 내어 주었지만 그래도 내가 주장할 때가 더 많았고 극한 상황에서는 틀림없이 내가 주장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극한 환경이 와도 내가 왕 노릇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주권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십자가 고난에 동참함을 오히려 다행으로 알고 은혜로 받기 때문입니다.
4. 자기 위치에서 내려와 온전히 경배와 감사하게 됩니다.
16절에 “하나님 앞에 자기 보좌에 앉은 이십 사 장로들이 엎드려 얼굴을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여” 라고 했습니다.
여기 자기 보좌가 강조되면서 동시에 엎드려 경배했다고 했습니다. 문자대로 본다면 어떻게 앉아 있는 상태에서 엎드릴 수가 있을지 이해가 안됩니다. 그러나 묵시문학에서는 그것이 가능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늘 보좌에 계신 주님이시지만 동시에 이 땅에 우리와 함께 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들이 주의 은혜로 영광된 위치에 있으나 동시에 자기 위치에서 내려와 하나님께 온전히 경배와 감사를 드림을 암시합니다. 더구나 얼굴을 땅에 댔다는 것은 자신을 가장 낮추는 극도의 겸손입니다. 이렇게 일곱째 나팔 소리가 각인의 심령에 들려오면 이렇게 예수님의 마음을 닮은 마음을 갖게 됩니다.
빌2:5-8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퓸解?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한 그 말씀 대로입니다. 이 마음이 품어진다는 것은 기적입니다.
5.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 의식이 이젠 떠나지 않습니다.
17절에 “가로되 감사하옵나니 옛적에도 계셨고 시방도 계신 주 하나님” 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찬양은 일곱째 나팔소리를 들은 24장로들의 찬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찬양에 장차 오실 이라는 말씀이 빠져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일곱째 나팔에 될 일을 미리 찬양하는 것을 보아 그 나팔이 울려 퍼질 때 재림하실 것이 암시됩니다. 그 때 주님은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육신으로도 성도를 결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살전4:17에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했습니다.
신령한 의미에서도 일곱째 나팔의 신령한 의미인 십자가 고난의 사랑에 동참하면 항구적인 주님의 임재 의식으로 충만하게 됩니다. 우리가 중생 할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항구적으로 임재하신 것은 사실이나 그 임재적 경험은 항구적이지 않고 굴곡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임재 의식을 주셨다 빼앗으셨다 하심으로 우리를 당신의 의도대로 인도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전과는 달리 그 충만하신 임재의 경험이 한 순간도 떠나지 않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이 임재는 성령으로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6. 이젠 변화되지 않을 수가 없도록 전능으로 다스려 주십니다.
17절에 “곧 전능하신 이여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 하시도다” 했습니다.
여기 전능하신 이의 통치에서 엿보이는 것은 우리 심령이 완악하여 하나님 주권에 순복함에 얼마나 어려웠던가 함입니다. 그리고 친히 큰 권능을 잡으시고 왕 노릇하심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지는 불가항력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나팔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면 전에도 다스리셨지만 이제는 그 다스림이 얼마나 강하든지 사랑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고, 해와 같이 빛나게 살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으며, 주의 뜻대로 살지 않으려야 살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자신의 그 완악함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지고 풍성한 천국의 삶이 이루어짐에 놀랄 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야 합니다.
7. 죄악의 잔재를 온전히 청소하여 주십니다.
18절에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임하여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이 땅에 온전한 정의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 문자 그대로 영적으로 죽은 불신자들을 심판하시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을 상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진노의 신령한 의미는 성령을 주심입니다.
그래서 죄악을 소멸시켜 주십니다. 그래서 마 12: 18에 “내가 내 성령을 줄 터이니 그가 심판을 이방에 알게 하리라” 하였습니다. 이처럼 온전한 복음의 나팔이 우리에게 임하면 성령으로 죄악을 소멸하여 주십니다. 그 동안 주의 은혜로 많이 처리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남아 있는 죄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령으로 죄악의 잔재마저 처리하여 주십니다.
그리고 여기 이방이란 넓게는 “열방”(시 2: 1) 여러 나라들을, 좁게는 하나님을 멀리하는 죄악된 마음입니다.
이들이 분노하듯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대적했었습니다(갈 5: 17). 신앙적으로 상당히 성장한 후에도 마음 깊은 곳에 죄악의 잔재가 발견되는데 그것은 아직 내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으며 성령의 충만하신 지배를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8. 이 나팔을 경험하면 행함의 상 받을 성도로 만들어집니다.
다시 18절에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무론 대소하고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주시며” 라 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재림하시면 성도들에게 그 행한 대로 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문구는 일곱째 나팔이 임하면 모두가 상 받을 자로 변화한다는 의미가 암시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딤후4:6-8처럼 이제 의가 왕노릇하는 자이므로 의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당연하고, 계2:10처럼 이제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에 생명의 면류관을 받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이 충성된 신앙은 예수 십자가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입니다.
9. 그런가 하면 하나님과 온전한 화평을 누립니다.
19절에 “이에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이 열리니” 했습니다.
여기 성전은 ‘나오스’로서 성소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언약궤가 보인 것으로 보아 이제는 가로막힌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동안 늘 거리꼈던 양심도 온전히 화평을 찾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보혈의 공로를 믿었지만 확신 부족으로 온전한 화평을 누림이 어려웠으나 이제는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롬 5: 1-2에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했습니다.
10. 그리고 주님과 부부로서 인격적 일치점에 도달합니다.
19절에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이며” 했습니다.
이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버리지 않으신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과 아울러,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부부 언약을 맺을 때 좋은 신부로서 사랑을 다할 것을 다짐하는 십계명의 신부 서약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의 등장은 부부로서 진정한 연합의 일치점에 도달하였다는 증거입니다. 물론 주님보다 나을 수는 없지만 상당한 진보여서 그렇게 보아주신다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주님만 우리를 목숨 바쳐 사랑한 짝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형용할 수 없는 십자가 사랑을 깊이 깨달을 때 주님을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있게 되기 때문에 완전한 인격적 연합을 이루게 됩니다.
여기서 혼동해서는 안될 것은 생명적인 연합과 인격적인 연합은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생명적 연합은 믿을 때 이루어지며 세례로서 확증되지만 인격적 연합은 신앙의 성숙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마치 남녀가 결혼한다고 볼 때 결혼으로 법적 육체적 연합은 가능하지만 인격적 연합은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함과 같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고난의 사랑을 깨달아 그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기에 진정 주님과 인격적으로도 연합하게 되었습니다.
11. 경건히 하나님을 섬기는 믿음이 생겨납니다.
19절에 “또 번개와 음성들과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이 있더라” 했습니다.
이 현상이 있던 시내산에서 생명체들은 조금도 접근 할 수 없었습니다(출19:12). 출19:13에 “짐승이나 사람을 무론하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좋으신 아버지를 섬기지만 우리는 지상에 살 동안은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죄를 멀리 해야 합니다. 히12:28-29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심령 속에는 거룩한 번개와 거룩한 음성들과 거룩한 뇌성과 지진과 큰 우박의 현상이 존재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아는 경건입니다.
이 거룩한 경건은 온갖 교만과 죄악과 사단 등의 원수의 시험에서 우리를 견고히 지켜 줍니다.
나아가 이 경건은 주님의 붙드심을 목숨 바쳐 추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언제든지 주님을 멀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8:6에 술람미가 신랑에게 “너는 나를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했던 말씀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형성된 경건 그 자체가 곧 하나님께서 강하게 붙들어 주시는 견인 은총의 현재적 의미이기도 합니다.
<결론>
장차 재림의 나팔소리가 들릴 때 육체까지도 영화롭게 되는 구원의 완성이 있게 되듯이, 우리가 성령으로 충만할 때 십자가 복음의 온전한 나팔을 불게 되고, 또한 그런 나팔 소리로 들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온전한 복음 나팔 소리가 들려올 수 있도록 서로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안에서 더욱 온전해 질 수 있게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