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잡지의 설 명절 특집기사에서 명절직후의 이혼율에 대한 기사를 실은 것을 보았습니다. 소제목이『설날과 추석이 지나면 늘어나는 ‘이혼’』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이 기사에서는 설·추석 차례와 제사 문제 등 명절 갈등으로 인해 결국 부부 사이의 마침표를 찍게 된 이야기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라며 실제로 명절 직후 이혼율은 꾸준히 높아졌다는 통계를 실었습니다.
통계청의 혼인·이혼통계발표에 따르면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인 2019년까지 설날 등 명절이 지나면 이혼이 꾸준히 증가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2018년 2월 7724건이었던 이혼 건수가 3월에는 9117건으로 늘었고, 9월 7826건이었는데 10월에 1만 548건으로 증가했습니다. 2019년에도 2월엔 8204건, 3월에는 9071건으로, 9월 9010건에서 10월 9859건으로 증가하였습니다. 다수의 이혼 사건을 해결해온 이재용 변호사는 CBS 노컷뉴스와 서면 인터뷰를 통해 “실제 명절 직후 이혼 상담건수가 평소에 더 많다”며 “명절 스트레스 또는 시댁·친정 갈등 문제 등이 이혼을 결심하게 되는 큰 요인이 되기도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증가하던 명절 직후 이혼율 증가가 코로나19로 인해 귀성 자제령으로 왕래가 줄어든 2020년 ‘명절 증후군’이 줄어들고 이혼율까지 낮아지는 현상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2020년 2월에는 8232건, 3월은 7296건으로 줄어들었고 9월 9536건, 10월 9347건으로 명절 직후 이혼 건수는 과거 사례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줄어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성생명 인생금융연구소는 통계청 자료를 토대로 ‘지난 2년간 코로나19가 무엇을 바꿨는지’에 대해 분석을 내어놓았는데 그 결과를 보면 코로나 이후 직계 가족과의 관계는 ‘가까워졌다’는 응답은 12.9%, ‘멀어졌다’는 응답은 12.6%의 통계가 나왔습니다. 반면 친인척, 이웃, 절친한 친구와 ‘멀어졌다’는 응답은 각각 36.7%, 38.9%, 35.5%로 나와서 평균 37%를 기록했는데 이런 관계의 사람들과 오히려 ‘가까워졌다’는 응답보다 18배나 높았다고 합니다.
즉 지금 현재 함께 살고 있는 가족들은 코로나를 계기로 가까워졌고 일가친척, 고향친구, 이웃집 사람들과는 관계가 멀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특히 친인척과 가까워졌다는 응답은 2.0%, 멀어졌다는 응답은 6.7%에 달했는데요. 코로나 이후 명절 기간 귀성·귀경길 이동을 자제하면서 친인척과 만날 일이 줄어들었고 이에 고부갈등이나 부부 싸움도 줄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연스럽게 이혼율 하락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을 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설날과 추석 풍속도가 달라졌고 그로 인해 명절 직후 증가했던 이혼율도 뒤바뀌는 모양새라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인터뷰를 한 이재용 변호사는 말하기를 “코로나19로 인한 특수한 사정으로, 이혼 결심을 억제하는 효과가 작용했다”라고 판단하였습니다.
명절이 무엇이길래, 그리고 명절에 가족간에 어떤 분위기이었길래 명절에 일가친척과 만난 이후에 부부관계가 금이 가게 되는 것인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오늘도 2022년 설날연휴중에 맞이하는 주일인데 이번 설연휴에 고향방문이나 부모일가친척을 만나는 사람들이 명절이후 이렇게 관계가 나빠지지 않고 오히려 즐겁고 행복하고 좋은 시간을 보내시는 명절되시기를 기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이혼에 대해 질문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신앙적 결혼과 이혼에 대해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 대화를 통해 우리는 정말 신앙인이 가져야할 이혼에 대한 생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들과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혼에 대한 관점, 견해들을 살펴보며 우리는 정말 신앙적인 기준으로 부부생활을 하고 있는 지, 참된 가정생활을 하고 있는 지 점검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어떤 이혼에 대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살펴보고 참 신앙적인 결혼관과 이혼가치관을 정립하고 제대로 신앙생활하며 참된 부부관계를 꿈꾸고 참된 부부관계를 만들어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혼가치관을 통해 드러난 신앙 첫째는 전통을 앞세우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입니다.
“이르되 모세는 이혼 증서를 써주어 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이 완악함으로 말미암아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
오늘 본문에서 주제가 된 이혼 문제의 발단은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습니까?”라고 묻는데서 시작합니다. 이 질문을 하면서 바리새인들의 목적은 명확한 답을 받고 싶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에게 찾아오면서 했던 많은 질문들처럼 이 질문 또한 이 질문을 통해 예수님을 붙잡고 예수님에 대해 죄를 덮어 씌울 빌미를 만들어 보려고 던졌던 질문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정확히 그 의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가복음 10장 2절 중간쯤보니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을 떠보기 위해 묻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정확하게 답을 해주시면 그것으로 결국 예수님을 궁지에 몰아넣을 수단이 되도록 만드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일단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해 다시 질문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라는 질문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들이 잘못하고 있는 것을 지적하기 위한 질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지금까지 지켜왔던 규례, 전통을 우선시하며 그것을 종교적 철칙, 삶의 철칙으로 생각했던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무엇을 잘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가르침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즉, 율법으로 만들어진 규칙과 그 이후에 자신들이 해석이랍시고 갖가지 세부규칙을 만들어놓은 법칙을 더 중요시 한다는 말씀입니다.
즉 전례가 어떻고 그 전례에 따라 행해온 전통이 어떻고 그 전통대로 하면 맞는 것이고 그 전통에 어긋나면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전통이라고 하더라도, 이전에 그렇게 적용하며 살았다고 하더라도, 그게 옳은 일이 아니면 그만 두고 바른 것을 찾아야하는데 바리새인들은 언제부터인 지 모를 이전에도 그렇게 해왔다는 관습이나 전통을 더 중요시 했던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0절입니다.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우리는 인간이기에 사회적 관점,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생각해오는 상식이라는 차원에서의 윤리적 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회윤리를 기반으로 전통, 관습을 보편적 윤리 기준으로 삼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사회의 많은 구성원들이 생각하는 보편적 기준의 전통과 관습속의 윤리가 절대적인 선이라고 절대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20세기 초에 큰 부흥운동이 있었습니다. 1905년경부터 1910년경까지 이어졌던 큰 부흥운동의 정점은 1097년의 평양대부흥운동입니다. 이 때 우리나라 조선의 기독교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 규범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규범 중에는 살인이나 강간, 절도나 횡령 같은 인류 보편적인 죄도 있었지만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에는 죄의식 없이 행해지던 행위들도 포함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조혼(助婚)이나 축첩(蓄妾), 노비제도(奴婢制度)와 제사의식(祭祀儀式), 술과 담배 같은 것들입니다. 이런 행위들은 봉건 사회, 특히 양반 사회에서는 ‘당연지사’로 여기며 행하던 것들이지만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금기 사항’으로 분류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 경기도 지역을 거점으로 활동했던 S. F. 무어 선교사의 선교보고서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전에 김 씨는 농사를 지었는데 술을 즐겨 마셨고 예쁜 첩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개종한 후 첩을 내보냈고 술과 노름도 끊었습니다. 겨울 사경회 기간 중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 안에서 진보했음을 확인했고 매서인으로 활동해 주기를 요청하자 그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부흥회나 사경회에서 성령을 체험한 양반들은 첩을 내보내는 것으로 변화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초에 기독교가 정착하면서 이 땅에는 유교윤리, 전통사상이라고 불려지던 관습적 윤리가 점차 기독교윤리를 바탕으로 사회윤리가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사경회, 부흥회같은 것을 통해서 뜨거운 기도를 하며 성령충만을 경험한 사람들이 새로운 삶의 모습으로 바뀌었고 그것이 사회 또한 변화시켰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누가복음 5장 37,38절입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리라 /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할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신앙을 가졌으면서 전통과 관습, 우리의 이전의 가치관대로 우리의 삶을 판단하지 않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그들의 전통적 가치관으로 결혼의 문제, 이혼의 문제, 삶의 모든 문제를 해오던 대로의 사람들의 인식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고 죄벌을 판단했습니다. 우리 인간이 만든 체제와 조직, 윤리기준과 도덕적 의식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관습과 전통은 보전할 것이 있는 것도 있지만 정말 빨리 없애버려야할 것도 있는 불완전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것이 마치 인간이 보전하고 지켜야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역마다 기준이 다르고 역사적인 경험에 따라 기준이 다르고 절대적인 기준이 없는 관습과 전통으로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니 불협화음만 생기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혹여 저와 여러분 중에서도 우리의 가치판단을 유교적 전통이나 한민족의 역사적 기준이나 우리 사회의 보편적 합일점으로 만든 윤리기준에 따라서 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바리새인과 같은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런 것으로 우리의 기준을 삼지 않고 하나님께서 바른 기준으로 우리를 변화시켜주시기를 기도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혼가치관을 통해 드러난 신앙, 둘째는 본인의 감정이 신앙의 잣대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11,12절입니다.
“이르시되 누구든지 그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에 장가 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 /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 데로 시집 가면 간음을 행함이니라”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을 돌려보낸 뒤 제자들에게 집에서 세상 사람들의 이혼에 대한 잘못을 다시 지적하시며 세상의 이혼관을 책망하십니다. 그 말씀이 바로 지금 읽은 말씀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정에 눈이 어두워 아내를 버리고 다른 여자에게 장가를 가고 자신의 욕심대로 남편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런 행위 자체가 간음을 범한 죄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혼은 간음죄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을 자신의 느낌이 가는대로, 자신의 감정이 실리는대로 살아갑니다. 이혼이라는 것을 할 때도 보면 자신이 “이제 현 배우자에게는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고 자신의 감정이 끌리는 이성의 다른 존재를 만났으니 이제 그 사람과 함께 살겠다”며 이혼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이혼의 경우 결혼상태이며 배우자가 있으면서 다른 이성에 마음이 끌려 이혼을 하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사랑하는 감정을 줘서는 안되는 대상이 있음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감정을 이성에게 표현할 때 우리는 오로지 한 대상의 이성에게만 애정을 쏟아야하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사람은 이성적 사랑을 절대 혼외의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눈길을 줘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음란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시고 짝지어서 정결한 자손을 얻기를 원하셨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5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대할 줄을 알고 /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
천하를 호령하던 군주들이 갑자기 패망한 이유를 살펴보면 강력한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니고 거의 대부분 여인들과 관련된 문제 때문인 것을 보게 됩니다. 중국 고대 은나라의 주왕은 달기, 주나라의 유왕은 포사, 당나라 현종은 양귀비, 로마의 영웅 안토니우스는 애굽의 클레오파트라로 인해 인생을 망치고 권력을 잃었고 백성들의 원성을 얻었습니다. 다윗왕도 밧세바로 인해 하나님의 책망을 받는 큰 죄를 지었고 지혜롭던 솔로몬왕도 이방여자들로 인해 우상숭배에 빠지게 됐습니다. 삼손도 들릴라 때문에 몸도 망치고 자신의 나라 이스라엘을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성적인 문란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성경대로 자기의 아내를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취했다면 이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즘 현대인들이 생각하는 부부관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이어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무슨 일이 있어도 갈라서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해야할 것 같은데 현대의 부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부든, 신앙을 모르는 세상의 부부든 중요한 것은 서로간의 감정이라고 생각하고 애정이 식었다고 생각되든지 아니면 비록 결혼을 했어도 옆에 내 감정이 끌리는 다른 이성이 생기면 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본인이 느끼는 애정의 상대와 살고 싶은 감정, 현실에서 본인이 느끼는 행복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결혼서약이나 신앙적인 양심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결혼유지의 의무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대의 부부관이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음란한 세상의 풍조가 지금 온 세계를 뒤흔들고 있습니다. 문화적인 발달로 인간들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생활을 하게 되니까 자연히 방탕과 쾌락으로 인해 음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술집, 카바레, 각종 이성간의 사교모임등을 통해서 음란이 싹트고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과 함께 취미생활을 즐기고 동호회에서 만나면서 밀접한 관계까지 발전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요즘 사람들끼리 쓰는 흔한 말로 “결혼한 기혼남녀라고 할지라도 배우자말고 따로 애인이 있어야 성공한 사람”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이런 말은 농담으로라도 입에 올려서는 안될 것입니다. 세상은 타락의 길에 빠져서 결혼한 남녀가 배우자가 아닌 다른 이성에 대해 그냥 친구로 지내는 정도가 아닌 성적인 관계까지 가는 경우가 너무 많습니다. 이미 결혼 사람들이 이중 삼중으로 하는 관계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는 통계와 각종 언론기사로 보게될 때 이게 “정말 사람이 사는 세상”인지 “짐승들이 사는 세상”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 양심이나 윤리도덕보다 자신의 본성대로 살아가는 세상이다보니 “인간의 세계”가 아닌 “동물의 세계”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에베소서 5장 3절입니다.
“음행과 온갖 더러운 것과 탐욕은 너희 중에서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 이는 성도에게 마땅한 바니라”
히브리서 13장 4절입니다.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 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시리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자꾸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잘못된 일을 추구하는 지 아십니까? 우리의 기준이 자꾸 내 중심적으로 흘러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세상의 많은 일들을 판단하는 기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의 기준이 바로 이것에 따라 이랬다저랬다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감정, 우리의 느낌, 우리가 생각나는대로 행동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정확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없이 감정이나 느낌에 휩쓸리고 본성에 따라 살아가니 가정도 뒤죽박죽, 사회생활도 뒤죽박죽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느낌이 좋고 감정이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지만 내 느낌, 내 감정도 주관적이고 내 소견에 옳은 대로가 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사회의 혼란함속에 우리의 삶도 혼란을 따라가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리의 느낌이나 우리의 감정대로 살아서는 안됩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끌리는대로 살아가고 느낌대로 일을 행하지만 우리는 절대 세상과 구별되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바른 기준을 잡고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혼가치관을 통해 드러난 신앙, 마지막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신앙인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7~9절입니다.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하는 정확한 우리의 삶의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신 철칙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정해주시는 법칙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느낌, 우리의 생각, 우리의 관습, 우리의 전통 같은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바리새인들의 불량한 의도속에서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관습이나 전통으로 답을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속에서 답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뭐라고 하냐?”라고 물었을 때는 유대교의 전통속에서 만들어진 관습을 물었던 것이고 그들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모세의 명령으로만 생각하며 답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주시며 답을 주셨습니다. 율법과 규례를 살펴보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세워주신 법칙을 먼저 생각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창세기 12장 4절을 보십시오. 함께 읽겠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아브람의 진짜 인생은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제까지 아브람은 고향, 친척, 아버지의 집에 의지해서 그런대로 먹고 살았습니다. 성경은 아브람이 대도시에서 일가친척과 지내면서 어느 정도 재력을 가지고 살았던 그 때의 아브람의 삶이 성공적이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나이가 75세가 될 때까지 아브람은 일가친척이 대대로 살아왔던 그 땅에서 가족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았지만 하란을 떠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으로 떠나기전 75년의 삶에 대해서는 성경에서는 전혀 기록하고 있지 않고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오히려 아브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약속의 땅으로 떠난 그 때부터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살아가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 참 인생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 말씀대로 살다보니 사람들이 무시하고 외면하고 인간관계가 깨어지고 결국 그렇게 살면 ‘망한다’는 말을 들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혹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 때문에 망해도, 죽어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저와 여러분 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아브람은 가족, 고향, 일가친척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기를 다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지시하는 땅으로 갔던 것입니다. 온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온 땅을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대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며 발버둥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따르지못할까 노심초사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을 그냥 실패하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 말씀에 생명을 거는 사람을 죽도록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루하루 성경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속에서 특히 와닿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렇게 살아보려는 노력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설교를 듣거나 성경공부를 할 때 쉽게 지워지지않고 계속 마음속 걸리고, 머릿속에 떠오르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 말씀을 지켜보려고 몸부림치고 발버둥치는 삶을 살아보셨습니까? 그렇게 말씀 때문에 안절부절하지 못하고 그 말씀을 지켜보려고 노력하는 그 노력이 바로 순종을 이끌어내었고 그것이 바로 아브람을 아브라함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런 말씀에 대한 순종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 되고 온 열방의 아버지가 되었고 축복의 통로가 되도록 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 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시편 119편 9절입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는 우리 기준으로 살아가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전통이나 관습이라는 이름이든 본성이나 내 감정, 내 생각이라는 이름이든 나 자신이 우리의 삶의 기준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정말 제대로된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이혼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제대로된 이혼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라며 예수님께 물었지만 결국 그들은 이혼의 문제를 세상적 관점, 인간적 관점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모든 인간의 문제를 전통과 관습, 인간적 욕망으로 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인간의 문제, 세상의 문제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삶의 문제를 풀어야한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도 우리에게 놓인 문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풀어갈 수 있는 참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말씀을 맺을까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며 참 힘든 관계를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결혼이라는 것을 통해 생겨난 부부라는 관계, 시댁과 친정, 처가와 본가라는 얽매임속에서 말하나 행동하나도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께서 축복된 관계로 결혼을 허락하시고 부부와 가정을 허락하여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결혼이라는 관계는 인간의 욕심이나 의도대로 깨뜨려서는 안된다고 분명히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이 결혼이라는 관계를 통해 우리가 발견해야할 것이 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결혼을 통해서 가르쳐주시는 교훈은 하나님과 우리 인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와 성도, 그리스도와 교회를 신랑과 신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결혼이라는 것이 신앙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혼을 함부로 봐서는 안되고 이혼을 임의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정말 우리의 삶속의 신앙생활을 하면서 내 마음대로 내 느낌대로 신앙생활하지는 않습니까? 그래서 어쩌면 말씀을 무시하거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면서 다른 세상적인 것에 관심을 두고 세상과 교제하며 살아가는 영적 간음죄를 범하고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가정, 우리의 부부관계를 제대로 지켜야지라고 결단함과 동시에 우리 개인의 신앙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영적인 간음, 영적인 이혼, 영적인 타락을 돌아보고 하나님과의 결혼관계, 우리의 신앙을 제대로 지켜나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