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라고 생각하지 못한 폭력 이야기
『휘슬이 두 번 울릴 때까지』 / 이명애 글/ 사계절
현정란
『휘슬이 두 번 울릴 때까지』 책장을 덮고 피구 경기를 떠올려봤다.
피구 경기는 초등학교 고학년 체육 시간, 중학교, 고등학교 체육 시간이면 필수로 하는 운동이었다. 짝수번호 대 홀수 번호, 여자 대 남자, 번호에 맞춰서, 가위· 바위· 보로. 아무 생각 없이 했던 피구 경기. 두 편으로 나누어 마지막 한 명이 남을 때까지 상대편을 공격하는 피구 경기를 폭력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깜짝 놀랐다.
“아, 폭력으로도 볼 수도 있구나. 그렇다면 모든 운동 경기를 폭력으로 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구기종목의 운동 경기를 떠올려봤다. 사람들이 열광하는 야구는 공을 맞추는 경기다. 축구는 공을 차는 경기, 농구와 핸드볼은 공을 골대에 넣는 경기로 공을 활용한 경기 중 사람을 맞추는 경기는 피구뿐이었다. 마지막 한 명이 남든, 상대편보다 많이 남아야 이기는 경기라고 할 수 있다.
『휘슬이 두 번 울릴 때까지』는 인상적이었다.
피구 경기가 시작되고 제일 먼저 죽은 아이가 맨 앞에 선 최다. 그다음은 달리기가 느린 김, 눈이 나빠 안경 쓴 한, 겁이 많은 오, 모든 게 서먹한 전학생 곽, 공을 피하다 금을 밟은 황, 한 달 전 손을 다친 안, 무리에서 떨어진 조, 친구들의 인간 방패가 된 박, 상대팀에게 붙잡힌 민, 눈에 잘 띄는 유, 친구를 도우려다 잠시 멈칫한 강, 용기를 내서 손을 내민 솜, 살아남은 아이는 얼떨결에 공을 받는다.
여기에서 혼자 살아남은 아이는 자신이 ‘혼자 살아남은 것은 좋은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는다. 그 의문은 시사하는 점이 많다.
그 아이는 공을 던지지 않는다.
친구들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그 아이는 공을 던지지 않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다. 그렇게 경기는 끝나고 친구들은 교실로 들어간다. 그 아이를 남기고 가는 아이들, 그 아이는 ‘외톨이가 되는 것일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외톨이가 아니었다. 그 아이가 다른 친구의 어깨를 잡고 함께 교실로 향한다. 흑백이었던 그림은 색깔이 입혀진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책이다.
초등학교 때도,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피구 경기를 할 때면 살아남기 위해 온 힘을 다했다. 공에 맞아 죽게 되면 아쉬움에 탄식을 했었다. ‘좀만 더 잘 피했으면’, ‘공을 잘 잡았으면 ’ 하면서.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를 죽여야 내가 산다는 경기를 해온 것이다. 참 아이러니하다. 학교 공교육에서 친구를 죽여야 사는 게임을 했으니 말이다. 성인이 되면 경쟁 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간다. 자본주의 사회는 경쟁 사회라고 말하면서. 그 누군보다 우위에 서야 내가 잘 사는 경쟁 사회. 함께 잘 살 수는 없을까?
친구를 이기지 않고, 이웃을 이기지 않고, 또 그 누군가를 이기지 않고 함께 더불어 살아갈 수는 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책 속의 아이처럼 아무도 죽이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위해서 개개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 아이의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의문을 가졌고, 그 의문에 용기를 내 자신의 생각대로 한 그 아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