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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신라어의 형성과 발전
진한어의 역사와 특징
신라어는 진한연맹체 중에서 경주분지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한 사로국斯盧國의 언어문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따라서 신라어의 형성 과정을 고찰함에 있어서는 진한의 역사와 그 언어 문화에 대한 이해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진한은 대체로 서기전 2세기~서기 3세기 후반까지 한반도의 동남단 지역에 자리하였던 12개국 정도의 읍락국가 연합체
로서 그 맹주국은 사로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진한 내지 사로국의 언어 문화를 직·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자료로는 국내외의 사서史書들에 극히 단편적으로
나타나는 기록들뿐이다.
우선 주목되는 자료로는 『삼국사기』·『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는 초기 신라의 다양한 왕호王號를 들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居西干(=居瑟邯; 박혁거세거서간)→차차웅次次雄(=慈充; 남해차차웅) →
이사금尼師今(=尼叱今; 유리~실성니사금) → 마립간麻立干(눌지~지증마립간) → 왕(법흥왕 이후)’으로 변천되고 있다.
‘신라’라는 국호가 처음 등장한 것이 기림니사금基臨尼師今 10년(307)의 일이니, 시기적으로 보아 진한의 왕호로는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의 셋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왕호 표기에서 눈에 띄는 점은 그 존칭 접미사의 다양함이다.
‘거서간’에서의 ‘-간~-한’, ‘차차웅’에서의 ‘-Ø[zero]’, ‘이사금’에서의 ‘-금’ 등이 그것이다.
‘-간~-한’은 군주를 의미한 중세몽고어 qaɣan, qan, qa와 비교될 수 있다.
동시에 부여 관명어 ‘- 가加’<‘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豬加’>, 왕을 뜻하는 고구려어 ‘皆’<왕봉현王逢縣 一云 개박皆迫>, 백제어 ‘하瑕’<어라하於羅瑕>와 계통을 같이 하는 것이다.
‘-금’은 중세국어 ‘님금’의 ‘금’과 같은 것임에 틀림없어 보이며, 고대일본어의 ‘kimi(君)’는 이의 차용일 가능성이 크다.
이와 같이 사로국의 왕호들이 다양하게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언어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정치 집단 간 세력 다툼에 따른 제도 교체를 의미하는 것일까?
전자보다는 후자의 가능성이 클 것이다.
왜냐하면 이처럼 단기간에 언어 교체가 이루어질 가능성도 희박하거니와, 최초 왕호 접미사 ‘-간~-한’이 그대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마립간’ 시대에 다시 살아난다는 점으로 보면 정치 문물 제도의 교체와 밀접한 관련성을 지닐 가능성이 더
크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진한의 주민 구성이 매우 복합적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즉 『삼국사기』의 시조 혁거세거서간조에서 “이에 앞서 조선朝鮮의 유민遺民들이 산골짜기(山谷間)에 흩어져 여섯
촌락을 이루고 살았다(…先是, 朝鮮遺民, 分居山谷之間, 爲六村…).”라는 기록과 관련 고고학적 증거들을 바탕으로
진한의 주민 구성에 대하여
① 서기전 195년 경 위만 세력에 의해 쫓겨난 준왕계準王系 고조선 이주민,
② 서기전 108년 한사군의 설치로 멸망, 남하하여 사로국의 출현을 주도한 위만계 고조선 이주민,
③ 사로국의 출현 이후 4세기 전반까지 주변의 읍락국가들을 흡수·병합해 가면서 마침내 신라라는 고대국가로 전환해
가는 과정에서 주민으로 참여한 여러 세력들, 즉 호공瓠公과 같은 왜계 세력, 변한이 가야로 전환해 나가는 과정에서
이탈하여 신라로 투항한 변한 계통의 세력, 외부세계로부터 바다를 통해 경주분지에 진입한 탈해脫解를 대표로 하는
석씨족단 등이 사로국 성립 이후 신라가 출현하기까지 주민으로 참여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사로국 내지 진한의 언어 문화도 복합적·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위에서 본 진한의 왕호 및 그 접미사의 다양함은 바로 이러한 주민 구성의 사정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진한의 언어 문화의 첫 번째 특징으로 복합성·융합성을 들 수 있다.
다음으로 진한의 역사와 언어 문화를 증언한 『삼국지』 위서魏書 동이전東夷傳(이하 동이전으로 줄임) 진한조의 기록
에도 주목해야 한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노인들은 대대로 전하여 말하기를 ‘옛날 망명인으로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한국
으로 왔는데, 마한이 동쪽 땅을 떼어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였다.
그 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 ‘나라(國)’를 ‘방邦’이라 하고 ‘활(弓)’을 ‘호弧’라 하고 ‘도적(賊)’을 ‘구寇’라 하고 술잔 돌리는 것
(行酒)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 부르는 것을 모두 ‘도徒’라 하여 진나라 사람과 흡사하니 단지 연나라 제나라의 명칭만은 아니었다.
낙랑 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였는데, 동방 사람들은 ‘나(我)’라는 말을 ‘아阿’라 하였으니 (낙랑인들은) 그 중에 남아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진한을) ‘진한秦韓’이라 부르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 여섯 나라이던 것이 차츰 12국으로 나누어졌다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自言, 古之亡人避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為邦, 弓為弧, 賊為寇, 行酒為行觴. 相呼皆為徒, 有似秦人, 非但燕 齊之名物也. 名樂浪人為阿).
위의 기록에서는
① 진한의 선조가 진역秦役을 피해 한 동안 낙랑 지역에서 머물다가 남하해온 망명 세력이라는 점, ②
진한의 언어가 진한을 ‘진한’으로 부를 만큼 진과 유사한, 의고적擬古的 언어 문화를 누리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로 ②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그것은 진한어, 그 중에서도 한자어 사용이매우 의고적이라는 점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진한은 양차兩次에 걸친 고조선 유민들이 주도하여 출현한 정치체이다.
이 고조선 유민들은 역사적으로 보아 한漢나라의 지배를 경험하지 않은 세력들이므로 한나라 이전의 언어적 특징을
보유하였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과 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나라(國)’를 ‘방邦’이라 한 기록은 한대漢代에 그들의 고조高祖인 유방劉邦의 휘諱인 ‘방邦’자를 피하여
‘국國’의 사용이 일반화되었다는 점과 비교하여 3세기 후반 기록인 동이전의 저자로 하여금 진한의 언어가 오히려 진대
秦代의 그것과 닮은 점이 있다고 한 사정을 이해 할 수 있다.
따라서 진한어의 또 한 가지 특징으로 이러한 한자어 사용에 있어서의 의고성을 들 수 있다.
신라어의 정립과 그 계통적 위치
신라는 진한의 주민 구성이 안정화된 4세기 초반부터 고대국가로 본격 발돋음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므로 4세기를 기점으로 신라어도 정립된 것으로 보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제 신라어의 정립 이전과 이후의 관련 언어들과의 관계를 살펴봄으로써 신라어의 계통적 위치를 가늠해 보도록 하자.
우선 진한의 성립에 고조선의 유민들이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진한 내지 신라어와 고조선어의 관계에 대
한 궁금증이 떠오른다.
그러나 고조선의 언어에 대한 출토 자료가 전무한 현재로서는 이러한 긍금증을 해소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실정에 있다.
우리에게는 다만 『삼국유사』 고조선조에서 전하는 ‘단군왕검檀君王儉’, ‘아사달阿斯達’, ‘기자조선箕子朝鮮’ 등의 단편
적 어휘들만 있을 뿐이다.
이 중에서 ‘단군왕검’의 ‘왕검’은 앞서 본 진한의 왕호인 ‘이사금’과 비교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왕검’은 차자표기의 원리에 비추어 ‘님금’이나 그 선행어인 ‘니림금’(‘니림’은 ‘님’의 선행어로서 『일본서기』의‘nirimu-
sema(主島)’ 기록에 남아 있다.)에 대한 표기로 볼 수 있고,
‘이사금’은 ‘닛금’을 표기한 것으로서, 중세국어 ‘님금’의 고대어형으로 보는 견해에 따르면 양자는 결국 동일한 대상에
대한 이표기異表記 관계에 놓이는 셈이 된다.
이로 미루어 진한어 내지 신라어가 고조선어와 동일한 계통 관계에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왕검’이 13세기 말엽에 성립된 『삼국유사』에만 있는 표기라는 점에서 그것이 반드시 고조선어를 기록한 것이
라는 보장이 없으므로 확정하기 어려운 가설이라고 보는 편이 안전할 것이다.
한편 ‘아사달’에서의 ‘달’은 고구려어의 ‘달’(山)과, ‘기자조선’에서의 ‘기자(긔)’는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는 ‘건길지
鞬吉支’의 ‘길지’와 닮은 점이 있다는 점에서 기록으로만 보면, 고조선어가 고대 삼국어에 일정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역시 『삼국유사』 기록의 신빙성 문제가 남아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과제로 넘길 수밖에 없다.
다음으로 진한어와 마한어의 관계이다.
앞서 본 동이전의 진한조에서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라는 기록이 있어서 양자간의 이동異同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기록이 진한과 마한 사이의 언어적 차이를 증언한 것으로 확대 해석될 여지가 있는가 하는 점이 핵심이다.
이 기록에 이어서 나타나는 진한어의 예시들이 모두 매우 의고적인 한자어들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이렇게 해석되기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된다.
이보다는 『삼국지』에 진한 12국의 국명이 마한과 동일하게 한자의 음으로 표기한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저국已柢國·불사국不斯國·근기국勤耆國·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염해국冉奚國’ 등), 각 소국의 지도자 칭호에
있어서도 ‘신지臣智, 읍차邑借’라는 명칭을 마한과 동일하게 쓰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므로 양자간에는 차이보다는 공통
점이 더 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로서는 진한·변한·마한의 한계어韓系語 상호간의 언어적 차이를 말할 만한 근거가 없는 셈이다.
오히려 당시 한반도 남방의 한계어韓系語에 상대되는 북방의 부여계어夫餘系語(부여·고구려·옥저·예 등)와의 관계에
관한 문제가 더 큰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고 할 수 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언 자료가 남아 있지 않은 이상 현재로서는 동이전에 보이는 양계어兩系語의 고유명사
표기자들을 분석함으로써 그 이동異同의 문제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최근의 연구 결과, 동이전의 고유명사 자료에서 양계어에 모두 어두의 /ㄹ/이 설 수 없는 제약이
존재하였다는 결론이 도출된 점이 주목된다.
앞의 <표 1>에서 보듯이 한자음에서 초성 /ㄹ/을 가지는 글자들이 어두에 오는 표기는 부여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
대신 한계에서는 ‘낙노국樂奴國’, ‘임소반국臨素半國’의 두 예가 보인다.
‘낙노국樂奴國’의 ‘낙樂’자는 그 한자음이 ‘악, 락, 요’의 세 음을 지니기 때문에 반드시 어두 /ㄹ/의 예로 볼 수는 없으
므로 ‘임소반국臨素半國’의 한 예만이 이러한 제약을 어기는 것이 된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아 이 예는 수적으로 매우 적다는 점에서 결국 부여·한 양계어에 어두 /ㄹ/이 설 수 없다는 제약은
유효하다.
이는 우리말의 두음법칙의 연원이 3세기까지 소급됨을 알려 주고 있다.
두음법칙은 알타이제어들이 가지는 공통적 특질의 하나이므로 결국 부여·한 양계어가 동일한 계통에 있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ㄹ/의 어두 제약이 다음의 <표 2>에서 보듯이 5세기 초의 자료인 광개토왕릉비문 자료에서도 관찰된다는 점
또한 중요하다.
표 1. 부여·한계 고유명사에서의 /ㄹ/ 초성자 분포(동이전)
어두 어중
부여계 - - - 慮1 依慮
麗2 高句麗, (下)句麗
盧1 對盧
婁2 桂婁部, 置溝婁漊1 (幘)溝漊
한 계 樂1 (弁辰)樂奴國 藍1 怒藍國
臨1 臨素半國 臘1 古臘國
來1 如來卑離國
廉1 狗邪秦支廉
例1 濆臣離兒不例
盧11 速盧不斯國, 咨離牟盧國, 莫盧國2, 狗盧國, 駟盧國, 邁盧國, 捷盧國,
牟盧卑離國, 斯盧國, (弁辰)瀆盧國
路4 冉路國, 戶路國, (弁辰)半路國, (弁辰)甘路國
利1 致利鞠國
離15 古離國, 咨離牟盧國, 卑離國, 占離卑國, 監奚卑離國, 內卑離國, 辟
卑離國, 一離國, 如來卑離國, 牟盧卑離國, 楚山塗卑離國, 楚離國,
難彌離彌凍國, (弁辰)彌離彌凍國, 濆臣離兒不例
林1 兒林國
위의 <표 2>에서도 /ㄹ/ 두음법칙을 어기는 예가 한계의 ‘林城’ 한 예에 그친다.
이는 ‘林’자가 훈독될 가능성마저 있기에 부여·한 양계어에 두음법칙이 존재하였음을 보여 주므로 고구려·백제·신라의
삼국어도 동일한 계통에 있었을 가능성까지 암시해 주고 있다.
결국 신라어의 계통적 위치는 진한어의 직접적 후계어로서 북방의 부여계어 와는 물론 고대 삼국어와도 계통적 위치를
같이 하였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표 2. 부여·한계 고유명사에서의 /ㄹ/ 초성자 분포(광개토왕릉비문)
어두 어중
부여계 - - - 盧1 鴨盧
婁3 味仇婁, 俳婁, 㙐社婁
流1 沸流谷
留2 大朱留王, 儒留王
利2 碑利城, 奄利大水
한 계 林 林城 羅6 古須耶羅城, 芬而耶羅城, 新羅, 新羅城, 安羅, 任那加羅
盧4 ▫古盧城, 各模盧城, 臼模盧城, 牟盧城
婁6 古牟婁城, 婁城, 婁賣城, 牟婁城, 燕婁城, 于婁城
利10 ▫利城, ▫▫▫▫▫▫▫利城, 幹氐利城, 古利城, 沸▫▫利城, 析支利城, 阿利水,
也利城, 於利城, 奧利城
신라어의 특징
음운체계
신라어의 음운은 주로 『삼국사기』·『삼국유사』의 고유명사 이표기 및 신라의 음운체계를 반영한 것으로 믿어지는
한국한자음 자료 등을 바탕으로 재구될 수 있다.
자음체계와 모음체계로 나누어 그 특징 또는 논란이 되는 문제들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표 3. 자음체계
순음 설음 치음 아음 후음
평 음 p t ts k
유기음 (ph) th tsh (kh)
마찰음 s (h)
비 음 m n ng
유 음 r, l
첫째, 파열음에 있어서 평음과 유기음 계열의 존재가 인정되는 반면, 된소리 계열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고 있다.
된소리 계열의 부재는 한국한자음에 된소리가 존재하지 않음이 가장 큰 근거가 된다.
또 한국한자음에서의 평음은 중국한자음의 무성음과 유성음을 포괄하고 있으므로 이에 따라 유성음 계열의 존재도
당연히 인정되지 않고 있다.
이 방면의 논의에서 가장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부분은 유기음 계열의 존재 여부이다.
학자에 따라 유기음 계열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의도 없지 않으나, 중세국어의 ‘거츨 → 거칠-’(荒, 萊)에 해당되는
단어가 ‘거칠居柒’로 표기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세국어의 ‘잋-’(困)에 해당되는 단어가 ‘이차異次~이처伊處’로 표기
되어 있는데,
이 표기들에서 /ㅊ/의 전사자轉寫字인 ‘칠柒, 차次, 처處’ 모두 중국한자음에서 차청자次淸字, 곧 유기음자에 대응되는
점에서 /ㅊ/의 존재는 부정되기 어렵다.
그리고 중세국어의 ‘부텨>부처’가 ‘불톄>불체佛體’로 표기되어 있고, /ㅌ/의 전사자 ‘체體’도 차청자이므로 /ㅌ/의 존재도
부정되기 어렵다.
다만, /ㅍ/과 /ㅋ/의 경우는 이러한 대응례를 보기 어려우므로 그 존재에 대해서는 확언하기 어렵다.
위의 표에서 이들에 해당되는 자리에 괄호를 둔 것은 이러한 의미이다.
표 4. 모음체계
i ü u
ɔ'' (ɔ)
ä a
또 하나 논란이 되고 있는 것으로는 치음 /ㅈ, ㅊ, ㅅ/의 독립적 존재 여부에 관한 것이다.
학자에 따라서는 세 음소가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고대에는 /ㅅ/ 하나로 통합된 상태에 있다가 후대에 세 음소로
분화되었다는 견해를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본 바와 같이 /ㅊ/의 존재가 분명히 확인된다는 점에서 평음 /ㅈ/과 마찰음 /ㅅ/의 존재를 부정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사실에 가까울 것이다.
둘째, 중세국어와 비교하여 유성 마찰음 계열인 ‘ㅸ[β], ㅿ[z]’의 존재는 인정되지 않음이 일반적이다.
‘ㅸ’이 한국한자음에서 전혀 나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ㅿ’자들이 신라의 고유명사 자료들에서 /ㄴ/ 초성자들과 동음
관계를 보이고 있음이 그 근거가 된다(‘奴(노)同覓縣[一云 如()豆覓], 朴弩(노)禮尼叱今[一作 儒()禮王]’ 참조).
또 향가에서 중세국어의 보조사 ‘-’에 해당하는 표기가 ‘사沙’자로 되어 있음도 또 다른 근거로 삼을 수 있다.
셋째, 유음에 있어서 /r/, /l/의 구분 여부도 논란 거리이다. 우리의 차자표기 자료들에서 ‘尸(r)’, ‘乙(l)’의 구별이 고려
시대 이전 자료들에서 거의 엄격하게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시대에는 두 유음(/r/, /l/)이 각각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모음체계에 있어서 전설(i ü ä) 대 후설(*ï u * a)의 수직적 대립축을 지닌 체계임에는 이견異見이 거의 없으나, 단모음의
숫자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최소 5모음 체계에서부터 최대 8모음 체계에 이르기까지 의견이 다양한데, 중세국어와 평행되게 7모음 체계로 잡음이
통설이라고 할 만하다.
첫째, 중세국어의 ‘ㅣ’에 대응되는 모음을 둘(/i/와 /ï/)로 잡음이 8모음 체계의 핵심인데, 다른 알타이들과의 비교에서
그 가능성은 충분하나, 이를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부족함이 문제이다.
향가 처용가에서의 ‘명기明期’를 ‘-긔>긔(p lkï)>밝은’으로 해독하여 동명사 어미 ‘-ï’를 재구함이 가장 큰 근거이나,
이 외에는 다른 확증이 없기 때문이다.
둘째, 중세국어의 ‘·’(아래아)에 대응되는 모음 / /의 존재에 대해서는 최근에 와서 부정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한자음에 ‘·’가 있는 글자들이 있으나(賜史, 紫, 次 등), 이들에서의 ‘·’는 신라 향가들에서 ‘시, 지, 치’로 해독
됨이 근거의 하나다(‘-시-賜’(존경법), ‘잣~자시柏史’, ‘지뵈紫布’, ‘가지枝次’, ‘다봊~다보지蓬次’ 등 참조).
다만, ‘*바>바>바다(海)’로 재구되는, 신라 관직명 ‘파진간지波珍干支’에서의 ‘파진’이 『일본서기』 등에서 ‘hatori’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가 / /로 재구될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점에서 신라의 모음체계에서 ‘·’의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을 듯 하다.
셋째, 이들을 제외한 중세국어 ㅏ‘ ’ 대응 모음 /a/, ㅓ‘ ’ 대응 모음 /ä/, ㅗ‘ ’ 대응 모음 /u/, ‘ㅜ’ 대응 모음 /ü/의 존재를
부정할 만한 어떠한 증거도 없다.
문법체계
신라어의 문법은 이두吏讀·향찰鄕札·구결口訣로 대표되는 차자표기借字表記(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한 우리말 표기)
자료를 바탕으로 재구될 수 있다.
여기에서는 주로 향찰 자료, 즉 향가鄕歌를 조사류, 대명사류, 활용어미류로 대별하여 예시를 중심으로 그 특징을 개괄
하고자 한다.
조사류
① 주격조사 : ‘-是[이]’ ▪ 民是 愛尸 知古如(民이 알고다 → 백성이 사랑을 알리라) 「안민가4」‘-+i只[익]’ ▪ 身靡只
碎良只 塵伊 去米(몸익 악 드틀뎌 가매 → 몸이 부서져 티끌되어 가매) 「상수불학가5」
② 목적격조사 : ‘-乙[을]’ ▪ 薯童房乙(薯童 방 → 서동 방을) 「서동요3」
③ 관형격조사 : ‘-叱[ㅅ]’ ▪ 栢史叱 枝次 高攴好(잣 가지 높오 → 잣나무 가지가 높아) 「찬기파랑가9」‘-衣[/의]’
▪ 今日 部伊冬衣(오 주비 → 오늘 部衆이)「칭찬여래가1」
④ 부사격조사 :
ㄱ. 도구격‘-以/留[로]’ ▪ 娚姉妹 三人 業以(오라비와 자매 세 사람의 선업으로) 「갈항사석탑기」
ㄴ. 처격‘-中[/]’ ▪ 蓬次叱 巷中 宿尸 夜音 有叱下是(다봇(/다보짓) 굴헝 잘 밤 이샤리 → 다복 굴헝에서 잘밤 있으리) 「모죽지랑가8」‘-良[아]’ ▪ 東京 明期 月良(東京 긔 아) 「처용가1」‘-良中[아]’ ▪ 千手觀音叱 前良中(千手觀音ㅅ
앒아 → 천수관음 앞에) 「도천수관음가3」ㄷ. 호격‘-良[아]’ ▪ 巴寶白乎隱 花良 汝隱(보보은 곶아 너는 →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도솔가2」
⑤ 보조사 : ㄱ. 주제‘-隱[은]’ ▪ 善化公主主隱(善化공주님(/니림)은 → 선화공주님은) 「서동요1」
ㄴ. 한정‘-沙[사]’ ▪ 毛冬 居叱沙 哭屋尸 以 憂音(모 잇사 울이 시름 → 살아 계시지 못하여 울어 말라버릴 이 시름) 「모죽지랑가2」
ㄷ. 첨가‘-置/刀[도]’ ▪ 倭理叱軍置 來叱多(여릿 軍두(/도) 왔다 →왜군도 왔다) 「혜성가3」▪ 病吟 禮爲白孫 佛體刀(아야,
졀손 부텨도→ 아아, 절하옵는 부처도) 「보개회향가9」
ㄹ. 각자‘-每如[마다]’ ▪ 刹刹每如 邀里白乎隱(刹刹마다 모리은 →절마다 뫼셔 놓은) 「예경제불가6」
ㅁ. 선택‘-那/乃[나]’ ▪ 紙作伯士那 經寫筆師那 經心匠那(제지사나사경사나 사경 축봉 제작자나) 「신라화엄경사경조성기」
▪ 念物 糸乃 綿乃 得(기억할 물건으로 실이나솜이나 얻은 것에) 「쇼소인 색모전 첩포기」
이상 조사류를 살펴보면, 그 형태 및 기능이 중세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격조사 중 목적격조사, 관형격조사는 중세국어와 다른 점이 드러나지 않는다.
목적격조사로 쓰인 ‘힐肹’자는 그 한자음으로 보아 기원적으로는 ㅎ-종성 체언에서 ‘ㅎ+-을/’을 담당한 글자였을 것이나, 점차 ‘을乙’자와의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관형격조사에서의 ‘-ㅅ’과 ‘-/의’의 구별 조건은 무정無情 체언 및 존칭의 유정有情체언(‘-ㅅ’) 대 비존칭의 유정 체언
(‘-/의’)으로 중세국어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다만, 주격조사에 있어서는 ‘-이’와 ‘-익’ 두 종류가 있었음이 중세국어와 다른데, 양자 간의 구별 조건은 분명치 않다.
둘째, 부사격조사의 경우도 대개 그 형태 및 기능이 중세국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처격의 경우는 이두 자료를 포함한 신라시대 자료들에서는 주로 ‘-中[/]’이나 ‘-良[아]’로 쓰이다가, 통일신라
이후 이들의 결합형인 ‘-良中[아]’와 그 변이형들이 등장하였다.
셋째, 보조사의 경우도 중세국어와 다른 점이 두드러지지 않는다.
다만, 한정限定 보조사 ‘-사’의 경우는 중세국어의 ‘-ㅿㅏ’와 비교할 때 ‘-사’가 중세국어와는 달리 동사류 어간에 직접
결합한다는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
대명사류
① 1인칭 : ‘吾[나]’ ▪ 吾肹 不喩 慚肹伊賜等(나 안디 붓그리시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헌화가3」
‘吾里[우리]’ ▪ 落句 吾里 心音水 淸等(아야 우리 믈아든 → 아아 우리 마음 물 맑으면) 「청불주세가9」
② 2인칭 : ‘汝[너]’ ▪ 巴寶白乎隱 花良 汝隱(보보은 곶아 너는 →솟아나게 한 꽃아 너는) 「도솔가2」
③ 3인칭(?) : ‘伊[뎌]’ ▪ 伊於 衣波 最勝供也(뎌를 닙어 最勝供이여 →저를 체득하여 최승공이여) 「광수공양가10」
대명사류에 있어서 1, 2, 3인칭 모두 중세국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볼 수 있다.
다만, 3인칭의 ‘뎌’는 최근의 향가 해독의 결과 학자에 따라서는 그 존재를 부정하기도 하므로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자칭自稱의 ‘의矣’,‘의내矣徒’(복수)의 존재를 이두 자료 등에서 찾기도 하나, 신라시대에는 그 분명한 존재를
뒷받침할 만한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듯하다.
활용어미류
① 동명사어미 : ‘-尸[ㄹ]’ ▪ 郞也 慕理尸 心未 行乎尸 道尸(郞여 그릴 녀올 길 → 郞 그리는 마음의 (모습이) 가
는 길) 「모죽지랑가7」‘-隱[ㄴ]’ ▪ 去隱 春 皆理米(간 봄 몯오리매 → 간 봄 못 오리매) 「모죽지랑가1」
‘*-ï’ ▪ 東京 明期 月良(東京 긔 아 → 동경 밝은달에) 「처용가1」
② 연결어미 : ‘-아/어’ ▪ 花肹 折叱可 獻乎理音如(곶 아 받오림다→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4」 (전후)
‘-良[라]’ ▪ 功德 修叱如良 來如(功德 닷라 오다 → 공덕닦으러 오다) 「풍요4」 (목적)
‘-米[]’ ▪ 此矣 有阿米 次肹伊遣(이에 잇아 머믓그리고 → 예 있으매 머뭇거리고) 「제망매가2」 (이유)
‘-旀[며]’ ▪ 膝肹 古召旀(무릎을 초며 → 무릎을 낮추며)「도천수관음가1」 (열거)
‘-如可[다가]’ ▪ 夜入伊 遊行如可(밤들이 놀니다가 → 밤 들도록 노니다가) 「처용가2」 (중단)
‘-遣[겨/고]’ ▪ 夜矣 卵乙 抱遣去如(밤애 알을 안겨(/고) 가다 → 밤에 알을 안고가다) 「서동요4」 (동시)
③ 어말어미 : ‘-如[다]’ ▪ 功德 修叱如良 來如(功德 닷라 오다 → 공덕닦으러 오다) 「풍요4」 (평서)
‘-齊[져]’ ▪ 心未 際叱肹 逐內良齊( 좇누아져→ 마음의 끝을 쫓고 있노라) 「찬기파랑가8」(평서)
‘-去[가]’ ▪ 四十八 大願 成遣賜去(四十八 大願 일겨(/고)실가 → 사십팔 대원 이루실까?) 「원왕생가10」(선택 의문)
‘-古[고]’ ▪ 於冬矣 用屋尸 慈悲也 根古(어들에 올 慈悲여 큰고 → 어디에 쓸 자비라고 큰고?) 「도천수관음가9」
(설명 의문)
‘-良[라]’ ▪ 彌勒座主 陪立 羅良(彌勒座主 모리셔 벌라 →미륵좌주를 陪立하라) 「도솔가4」 (명령)
‘-賜立[시셔]’ ▪ 慕人 有如 白遣賜立(그릴 이 잇다 겨(/고)시셔 → 그리는 이 있다 사뢰소서) 「원왕생가8」(청유)
④ 선어말어미 : ‘-賜-[시]’ ▪ 吾肹 不喩 慚肹伊賜等(나 안디 붓그리시든 →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면) 「헌화가3」
(존경법)
‘-白-[]’ ▪ 刹刹每如 邀里白乎隱(刹刹마다 모리은 →절마다 뫼셔 놓은) 「예경제불가6」 (겸양법)
‘-內-[]’ ▪ 吾隱 去內如 辭叱都(나 가다 맔도 → 나는간다는 말도) 「제망매가3」 (시상법)
‘-音叱-[ㅯ]’ ▪ 國惡 太平恨音叱如(나락 太平다 → 나라가태평할지니라) 「안민가10」 (양태법)
활용어미류에 있어서 부분적으로는 차이점이 드러나나, 크게 보아 중세국어와 차이가 그리 크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첫째, 동명사어미에 있어서는 ‘-*ï’의 존재만 다를 뿐 중세국어와 다른 점은 없다.
표면상 동명사어미 ‘-ㅁ’의 존재가 보이지 않으나, 일부 연결어미들(‘-, -며’) 속에 녹아들어 있다.(‘-<-ㅁ+-’, ‘-며
<-ㅁ+-여’ 등 참조.)
둘째, 연결어미류에 있어서도 중세국어와 다른 점이 많지 않다. 다만, 동시 표현의 ‘- 遣’의 경우는 과거 ‘-고’ 일변도로
해석되었으나, 최근에 와서는 ‘-겨’로 읽는 견해도 강하다.
이 점이 중세국어와 다른 점으로 지적될 정도이다.
셋째, 종결어미의 경우도 양상은 비슷하다.
평서법의 ‘-져’, 청유법의 ‘-시셔>-쇼셔’ 정도가 중세국어와 다른 점이 될 수 있다.
의문형에 있어서 선택 의문의 ‘-가’, 설명 의문의 ‘-고’의 교체 양상은 중세국어와 동일하다.
넷째, 선어말어미에 있어서 경어법의 공손법 ‘-이-’의 존재가 보이지 않음이 다를 뿐, 존경법과 겸양법의 체계는 중세
국어와 동일하다.
시상법에 있어서도 큰 차이는 보이지 않으며, 양태법의 ‘-ㅯ-’(당위 또는 의지)가 중세국어에 거의 보이지 않음이 가장
큰 차이점이라 할 만하다.
어휘체계
신라어의 어휘는 금석문·목간 및 국내외 사서류 등의 다양한 자료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다.
금석문 자료를 중심으로 고유어, 한자어, 혼종어로 나누어 예시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유어 : ‘글’(文尸)「43호 목간」, ‘마’(蒜尸)「84번 목간」, 이상 「함안 성산산성 목간」
// ‘-벌伐’(*블>벌(原)): 거벌居伐, 진벌珍伐 「포항중성리신라비」
// ‘-모라牟羅’(모라>Ø): 거벌모라居伐牟羅 「울진봉평리신라비」,
‘*바’(波旦) 「울진봉평리신라비」 등.
(2) 한자어 : ① 명사류
쟁인爭人(소송 당사자), 사인使人(직명), 도사道使*(지방관), 전서典書(직명) 「포항중성리신라비」
// 전사인典事人(직명), 촌주村主(지방관)「포항냉수리신라비」// 도사道使(지방관), 사인使人(직명), 군주軍主(지
방관), 서인書人(직명), 신인新人(직명), 입석비인立石碑人(직명), 박사博士(기술직) 「울진봉평리신라비」 등.
② 동사류
교敎(명령하다), 백白(사뢰다, 보고하다), 운云(이르다), 탈奪(빼앗다), 도噵(말하다, 트집을 잡다), 여与(주다), 기記
(기록하다) 「포항중성리신라비」
// 요작사了作事(짓기를 마치다) 「대구무술명오작비」 등.
③ 부사류
금今(지금), 갱更(다시) 「포항중성리신라비」
// 후後(후에), 별別(따로),갱更(다시), 고故(고로) 「포항냉수리신라비」
// 별別(따로), 본本(본래)「울진봉평리신라비」// 절節(이때에), 별別(따로) 「단양신라적성비」
//병幷(함께), 우又(또), 별別(따로), 선先(먼저) 「임신서기석」 등.
(3) 혼종어 : 감문성甘文城, 급벌성及伐城, 진성陳城, 이진지성夷津支城, 본파대촌本波大村, 매곡촌買谷村, 추문촌鄒文村,
이골촌伊骨村, 일고리촌一古利村,이지지촌伊智支村/ 나혜지羅兮智, 이식지伊息知, 지리지智利知, 내은지內恩知 「함안
성산산성 목간」 등.
신라어 어휘들 중 가장 특징적인 부류는 혼종어들이다.
이들은 대부분 ‘고유어 + 한자어’로 분석되는데, 이들은 진한어까지로 그 기원이 소급될 수 있다.
앞에서 본 「동이전」 진한조에서의 ‘아잔阿殘(낙랑인)’이 그 예이다, 이는 고유어 ‘아阿’에 한어계 후부요소(=접미사?) ‘
-잔殘’이 결합된 일종의 혼종어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어휘적 특징으로는 한자어에 있어서 ‘작성作城’과 같은 매우 의고적인 어휘의 사용도 들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언어 통일과 그 의의
서라벌 방언으로 출발한 신라어는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함으로써 한반도의 공용어(=표준어)로 발돋음
하게 된다.
이는 서라벌이 한반도의 라티움(Latium)이 된, 국어의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사건의 하나다.
마치 이탈리아 반도의 작은 라티움 지역의 방언이던 라틴어가 로마의 흥성과 함께 지중해의 중심 언어로 발달하여
마침내 로마제국의 공용어로 발전한 데에 비유됨직한 사건이 되기 때문이다.
삼국의 언어 통일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은 경덕왕대에 단행된 지명의 한자식 개명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통일 전 삼국의 지명은 각기 다른 한자의 음과 훈을 이용한 표기체계를 보이고 있었거니와, 이 상태가 통일 후에도
한동안은 유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표기체계는 언어 통일의 공고화를 더디게 하였을 것이다.
지명후부요소 ‘-성城’을 예로 들어보면, 삼국은 각기 이 글자를 ‘홀忽’(고구려), ‘기己’(백제),‘잣(城叱)’으로 읽음으로써
이를 통일하는 조치가 없이는 그 독법의 차이를 좁히기 어려웠으리라 판단된다.
한자의 음과 훈을 병용한 체계에서 통일된 한자음을 바탕으로 해서 한자음으로만 읽는 새로운 체계로의 전환은 ‘-城’을
더 이상 각기 다른 훈으로 읽을 수 없게 만듦으로써 마침내 항상 [-성]으로 읽는 독법으로의 통일을 이루었을 것이고,
이에 따라 삼국의 언어 통일을 촉진하였음에 틀림없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근 2백년 가까이 유지되었음은 그만큼 고구려, 백제의 옛 땅에 새로운 신라 공용어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밑바탕이 되었던 것이다.
10세기 초반 고려의 건국에 이은 후삼국의 통일로 한반도의 언어 중심지는 경주에서 개성 지역으로 옮겨가게 된다.
이로써 3백년 가까이 경주 중심의 언어 통일 상태가 깨지면서 한반도의 중심부에 위치한 개성이 새로운 언어 중심지로
등장하였다.
그러나 이는 언어 중심지 이동 이상의 의미는 지니지 않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수백 년에 걸쳐 서라벌 방언 중심의 공용어에 의한 통일 상태가 유지됨으로써 고려어가 신라어를 근간으로
하면서 부분적으로 고구려어적 요소를 통합한 새로운 공용어로 등장하였어도 그 언어적 근본 특징은 바꾸지 못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고려어는 통일신라기의 방언에서 표준어로 그 지위가 격상되었을 뿐 신라어적 전통은 그대로 유지된 것임에
틀림없다.
고려에 이은 조선도 동일한 방언권을 중심지로 유지함으로써 신라어는 마침내 우리말의 직계 조상으로서 빛나는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이다.
(권인한)
참 고문 헌
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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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2012, 「통일신라의 (능)묘비에 대한 몇 가지 논의」, 『목간과 문자』 9.
2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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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돈, 2013, 「삼한 관련 기본사서의 문제」, 『삼국지 동이전의 세계』, 성균관대학교출판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