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림사 九龍, 천관산 九龍’/ 예강칼럼(137)/박형상/변호사/ 장흥신문
승인 2020.10.30 10:23:09
1. 보림구룡, 천관구룡 - ‘구룡토수(九龍吐水)’, 석가모니 출생 때 구룡(九龍)이 물을 뿜어 아기부처의 목욕을 시켰다는 설화도 있거니와, ‘九龍’은 불교신앙과 친밀하다. 그럼에도 ‘보림사 九龍’과 ‘천관산 九龍’은 그 차이가 상당하다.
보림사는 창건설화 또는 <사적기>에서 “원래 九龍이 살던 구룡연(淵/池) 연못을 메우고 九龍을 쫒아낸 자리에 절이 들어섰다”고 했다. 즉 청룡과 백룡 등을 쫒아냈으며, 그 퇴출돤 용들이 피를 흘린 ‘피재(혈치)’가 남았으며, 혹자는 그 쫒겨난 백룡이 ‘장흥읍 백룡(림)소’에 자리를 잡았다고 주장한다. ‘보림사 九龍’은 선주민 토착세력 또는 선정착한 외지세력일 수 있으며, 그러한 ‘九龍 퇴출’ 설화는 기실 정치적 투쟁의 산물일 수 있다. 보림사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선아(괴화, 매화)보살’은 九龍 축출을 후원한 反龍보살이었다. 반면에 ‘천관산 九龍’은 일응 숭배 대상이다. 우선 ‘九龍峰’이 있고, ‘九龍菴’도 있었다. (월출산에는 ‘九井峰’이 있고, ‘九龍峰’은 없다) 천관산 九龍峰 아래로 용지(龍池, 龍둠벙)가 있었으며, 기우제를 지냈다. 고려 문인 ‘김극기’가 읊은 천관산 ‘玉龍寺’도 있는데, ‘당동 옥룡사’와는 구별되었을 것 같다. 화엄사찰 부석사(676)와 통도사(646) 설화에 등장한 龍은 불법수호의 영물을 상징했고, 부석사의 후원자 ‘선묘보살’ 역시 親龍보살이었다. 요컨대 장흥에서 ‘보림사 九龍’과 ‘천관산 九龍’은 서로 퍽 달랐다. ‘보림사 九龍’은 박대 퇴출을 당한 부정적 龍이고, ‘천관산 九龍’은 기원의 대상으로 존숭을 받은 긍정적 龍이다. 훗날 보림사를 방문한 시인들은 ‘용거유허(龍去遺墟), 용거기년(龍去期年), 노룡음(吟), 구룡보(洑), 용리구굴(龍離舊窟), 용천(龍泉)’ 등으로 ‘쫒겨 떠나간 九龍’을 역사적 과거로 여기며 소극적인 회고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천관산을 찾은 시인들은 ‘九龍쟁주(爭珠), 구룡득주(得珠), 九龍입발(入鉢), 구룡외호(外護), 구룡잠처(潛處), 구룡興雲雨(흥운우)’ 등으로 적극적인 기원을 담아 노래했다.
천관산 ‘천관보살신앙’ 자체가 ‘관음신앙, 해수신앙’의 신통력과 상통하여 그랬을까? 그 가까이에 바다가 있고, 부석존자(의상,625~702)’의 설화가 깃든 ‘의상암’이 있다. 그러나 가지산 보림사의 주변에는 ‘의상암’이 없다. 그렇다면 정치적 투쟁성격에 다시 종교적 노선투쟁이 반영된 것일까? 보림사는 ‘스스로 자각하는 법당(法堂), 선종사찰’인 반면에, 천관산쪽은 ‘부처님께 귀의하는 불당(佛堂), 화엄사찰’이었다.
보림사도 애초에는 755년에 귀국한 ‘원표 대덕’이 세운 ‘화엄사찰’로 출발했었지만 그 100년 되는 무렵, 858년에 ‘체징 보조선사’에게 인수되어 ‘선종사찰’로 탈바꿈되었다. 장흥지방에서 통용하는 ‘남북백리(南北百里)’ 용어는 “크다, 멀다”는 뜻도 있지만 “대차 없다. 좁고 가깝다”는 뉘앙스도 있는데, ‘보림사 구룡’과 ‘천관산 구룡’은 “서로 한참 멀다”고 보아야 할 것.
2. 어느 쪽이 먼저 들어섰을까? - 북쪽 가지산에는 먼저 ‘古가지寺’가 있었고, 나중에 ‘보림寺’가 들어섰다. (‘古가지사’ 자리로는 ‘현 보림사’ 서쪽, ‘구석리(九石> 舊席)’의 ‘西부도’쪽으로 추정해본다.) 남쪽 천관산에는 ‘탑산寺’와 ‘천관寺’ 중에 어느 쪽이 어떻게 먼저 등장했을까? ‘통영화상 또는 영통화상’의 행로(行路)도 궁금하다,(‘동일인이 아니다’는 견해도 있다) 여하튼 그는 남하했는가? 북상했는가? “북쪽 장흥에서 ‘면치’와 ‘오도치’를 거쳐 남쪽 천관산에 이르렀다”는 전설도 있고, “남쪽 ‘탑산사’ 쪽에서 북쪽으로 석장을 날려 떨어진 곳에 ‘천관사’를 세웠다”는 언전도 있다. 몇 있는 <천관산 기문(記文)>에 의지하여 그 근거를 찾기에는 여러모로 부족하다. 그 궁금증은 오늘도 여전한데, 과연 천관산의 대표 사찰은 ‘천관사, 탑산사, 옥룡사’ 중에 어느 절이었는가? 정녕 천관산에는 그 어떤 <잃어버린 절(이청준, 1989)>’이 따로 있었던가?
3. 보림사에서 쫒겨난 九龍세력은 - 옛 ‘유치향(有恥鄕)’의 역사는 꽤 오래되었을 것. ‘오래 전에 다스림이 시작된 유치(有治)’였을 가능성도 크다. ‘빈재’를 넘어 ‘수인산’을 끼고 ‘예양강 상류’에 선주(先住)해온 집단은 어떤 세력이었을까? 신라 경덕왕이 759년에 ‘원표 대덕’에게 하사한 ‘가지산사 장생표주’는 정치적 세력권의 영역경계 표지일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 ‘龍’으로 포장된 부정적 외부세력은 중국에서 한반도로 이입한 ‘선비족, 모용씨’ 세력이다.
특히 ‘모용씨’는 ‘흑룡, 황룡’으로 표상되며, ‘모령리, 모라리’ 등 지표를 남겼다고 한다. 다른 한편으로 백제의 통치권역에 상관없는, ‘예(濊,穢)’ 또는 ‘왜(倭)’ 세력이었을지 모른다. 우리말 ‘예(濊, 汭)’와 ‘구(舊,九,仇)’가 서로 통하고, ‘장흥 九江포, 구주 구강포’가 상통했을지 모른다. 우리 장흥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 유물이 발견됨은 물론이지만, ‘백제권 영역에 귀속되었음을 실증해주는 표지 유물’의 발견은 그간에 없었다. 그렇다면 ‘그 당시 쫒겨간 선주(先住) 九龍세력’은 여러 불교사찰을 세우고 후원했던 정치적 주체인 신라 왕권세력과 대립하던 집단, 즉 ‘반(反)신라 세력’으로, ‘마한 잔존세력, 백제멸망 후의 유민세력’ 또는 ‘북방에서 오래 전에 쫒겨온 先이입세력’이었을지 모르겠다.
4. 덧붙이는 말 - ‘유치 피재’는 ‘혈치(血峙)’가 아닌 ‘피재(避재)’일 수 있고, ‘유치 빈재’ 역시 ‘손님을 맞이할 빈(賓)’이 아닌, ‘막을 빈(?)’의 ‘빈재’ 일 수 있다. 우리는 그간에 외지인(관료, 유람객, 유배객) 등이 ‘빈재’를 거쳐 ‘남북경로’로 장흥에 왔다고 생각해버리지만, 대부분은 ‘동서구간, 즉 벽사도 경로’를 통하여 오갔다. 또한 장흥의 1호선 남북경로는 ‘장흥부 치소 - 면치(자울재) - 남15리 불용산 -오도치(멍에재)- 고읍, 대흥(천관산)’이었다. 일제 시대에 개설된, 현재의 신작로 구간과 전혀 무관했다. 어쨌거나 ‘천관산 九龍’은 남쪽 바다 해로(海路)로 장흥 천관산에 당도했을 것으로 짐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