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중공군 5월 공세와 유엔군의 재반격
제 1 절 총개요(1.4후퇴부터 4월공세까지 요약)
1. 개 요
중공군과 북한군의 신정공세(제3차공세)는 '50.12.31일 시작되어 유엔군이 후퇴하였고, 중공군이 '51. 1월 4일 서울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은 전쟁 발발 6개월 만에 세번째 주인을 맞게 된다.
유엔군과 공산군이 남한의 중북부 지역인 원주에서 공방전을 벌이다가 '51.1월 중반, 지상군 전선이 서쪽으로는 평택에서 동쪽에서는 삼척선을 형성하게 된다.
가. 위력수색('51.1.152.8) 및 썬더볼트작전('51.1.25~2.9)
이에 미 제8군은 '51.1.15일부터 시작된 위력수색작전에 이어, 1월 25일부터 2월 9일까지 반격작전인 "썬더볼트 작전"을 실시하여 수원-원주-삼척 선으로 진격했다.
나. 라운드업 작전('51.2.9~2.10)
유엔군은 공산군의 새로운 공격 준비를 좌절시키기 위해 "라운드 업 작전"을 2월 5일 개시하였고, 미 제10군단이 중부지역의 횡성으로 진격한다. 유엔군은 2월 10일에는 인천항과 김포비행장을 점령하였으며 동해안의 국군이 38도선을 돌파하여 양양을 점령한다.
다. 중공군 2월공세(4차공세, '51.2.11~), 지평리전투, 횡성전투
그러나 중공군이 유엔군의 강력한 반격에 중공군은 서부전선의 위기를 돌파하고자 중동부 전선에 대한 집중 공격을 감행한다. 중공군은 횡성-홍천간의 삼마치고개와 지평리 일대에 9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여 2월 11일 일제히 공격을 개시, 소위 "중공군의 2월 공세(4차공세)"를 개시하여, 지평리 일대에서는 미 제2사단 제23연대 전투단(프랑스 대대 배속)의 전면 방어진지에 대한 공세에서는 실패하게 된다.
그러나 횡성 북방의 국군 제8사단. 제3사단 . 제5사단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협공에 전투력이 50%이하로 무력화 되고 특히 제8사단은 1명의 연대장을 포함 무려 장교 300여 명, 병 7,000여 명이 전사 또는 실종(포로)되는 대제앙을 맞이한다.
라. 유엔군의 38도선 진격작전
1) 중동부 지역의 킬러작전('51.2.21~3.4)
중공군 2월공세 후 유엔군 반격 작전인 제천-영월지역의 돌파구에 들어온 공산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킬러작전이 2월 21~3.4일간 실시된다. 이를 위해 '51.2.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에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단이 김포반도와 영등포 일대, 미 제3사단이 한강선을 따라 경안리 일대, 미 제25사단이 광지원리 남서쪽의 무갑산 일대를 방어 중이었다.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미 제24사단이 중공군의 한강교두보 남쪽과 남동쪽을 방어하고, 미 제1기병사단이 남한강 동쪽의 하진 일대, 영27여단이 주암리, 국군 제6사단이 판대리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그 우측 미 중동부 전선의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이 원주 서쪽 섬강, 제1878공정연대전투단(국군 제3사단 18연대 배속)이 원주, 국군 제3사단(18연대 결)이 성남리, 국군 제5사단이 입석리 일대에서 차단진지를 점령하고 있었다.
그리고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미 제10군단과 더불어 킬러작전의 한 축으로, 오대산을 중심으로 수도사단이 동쪽 삽당령에서, 제7사단이 서쪽 마차리에서 공격을 , 제9사단은 예비로 정선 송계리에 집결한다.
[중서부 지역 미9군단], '51.3.4일 횡성 점령
'51. 2. 21일 킬러작전이 개시되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사단 병진으로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이 중앙에서 횡성을, 나머지 3개 사단(미24사. 미 1기병. 국6사)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51.2.22~25일, 이상고온기상으로 도로상태 불량과 항공지원 제한]
그러나 기상이변으로 낮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올라가고 밤에도 0도를 웃돌며 22일부터 3일간 간헐적인 비까지 내려 악천후로 항공정찰과 항공지원이 제한되고 도로가 유실되고 곳곳에 산사태가 발생하여 군수지원이 제한된다.
특히 미 1기병사단이 진출하는 좌측이 어려움이 많았음며 24일 양평-홍천도로 북쪽의 469고지를 점령한다.
['51.2.24일 미 제9군단장 무어 중장의 헬기 남한강에 추락 전사]
미 1해병사단지역도 눈비로 뒤섞인 도로를 통과하는데 어려움이 많았고, 군단장의 전사로 25일 횡성 공격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스미스 사단장이 임시 군단장으로 가고 부사단장이 사단을 지휘하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해병사단의 횡성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미제9군단과 미 제10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조정]
우전방 미 제5해병연대지역을 미 제10군단에 인계하고, 좌인접 국군 제6사단지역을 미 제7해병연대가 인수하여 공격을 속개하여 3월 4일 횡성을 점령한다.
[중동부 지역 미 제10군단]
'51.2.21일 미 제7사단을 주공으로 우측에서 영월-평창간 도로따라 공격하고, 조공인 국군 제3사단이 신병 2,000명을 보충받아 미 제9군단의 제1해병사단을 엄호하면서 강림-안흥-봉화산으로 23일에 제18연대가 좌전방에서, 우전방에 23연대로 2개연대 병진공격하여 26일 횡성-안흥-평창 선에 진출한다.
여기서 군단은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우너하기ㅐ 위해 군단의 중앙으로 미 제2사단을 투입하게 되며, 2월 28일 미 제8군은 공격이 수조롭게 되자 군단 전투지경선을 횡성 동쪽 두곡리가지 확장하여 정암리 부근에서 국군 제33사단 제23연대가 미 제9군단의 우전방 연대인 미 제5해병연대지역을 인수하였다.
이 무렵 국군 제3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3군단 예하 제6. 제12사단의 5,000여 명으로 안흥리 북쪽의 봉화산(670)과 덕어산(664)일대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3월 1일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적의 저항으로 3월4일까지 봉화산을 점령하지 못했다. 이에 육군은 3월 5일 12시에 3월 7일부로 미 제10군단에서 배속을 해제하여 국군 제3군단으로 배속 전환한다고 작전명령을 하달하였다.
그런데 3월 5일 밤에 강력히 자항하던 북한군이 진지를 버리고 철수하여 3월 7일 사단은 원주-방림리 도로 복쪽의 목표지점인 아리조나선까지 진출하여 방어진지를 우측의 미 제2사단 제32연대에 인계하고 마차리-정선 일대로 철수하여 제3군단에 복귀한다
[중동부 지역 국군 제3군단]
킬러작전이 개시되자 제3군단은 수도사단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한다. 한편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진출을 지원하기 위해 좌전방 제7사단을 2월 25일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하였다. 군단은 제7사단의 공격이 순조롭게 되자 그 좌측 미 제10군단의 주공인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횡계리 부근에 대기 중인 제1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5일간의 대폭설('51.2.25~3.1), 속사리 지역]
가. 속사리 설한지 전투
그러나 5일간 지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되어 제설 작업 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1개 대대씩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영월 부근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발왕산.속사리.월정사 부근에 종심진지를 편성하고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는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군단에서는 거문리 일대에서 제7사단 제5연대와 교전 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월 1일 중으로 속사리에 진출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제설작업이 지연되어 3월 2일 하진부리에 진출하여 접적이 개시되어 속사리 하진부리간의 중간 지점인 발왕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한다.
그러나 22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던 제26연대 제3대대와 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이 3일 04시까지 유천리 일대에서 백병전을 치렀지만 다수의 피해를 입어 08시에 차항리로 철수한다. 이로써 제1기갑연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혹한 속에서 기갑연대는 여명을 기해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야음을 이용한 적이 연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자은 철수명려을 내리고 제26연대로 하여금 유천리오 재진출하여 기갑연대와 연결하도록 한다.
결국 기갑연대는 방어와 적진 돌파를 반복하며 월정동. 광천리를 경유하여 4일 자정경 적의 추격에서 벗어나 대관령 서쪽 가사두에 집결했다. 기갑연대는 철수 작전간 30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러나 전사 59명. 부상 119염. 실종 802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81mm박격포 11문. 60mm박격포 18문. 3.5인치 로켓포 10문 등 다수의 장비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실종자 대부분은 다음날 복귀하였다.
결국 적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실시돤 킬러작전은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악천후와 싸워나가는 힘겨운 진군이 되어 2.21~3.6일까지 14일간의 추격작전은 미 제9.10군단이 횡성-평창의 목표까지는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상의 내용에서 속사리와 하진부리, 차항리, 황계치의 주 격전 부대는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었고, 아군은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제26연대였으며 가문리 일대에서 전투한 제7사단이 일부 포함된다.
2) 중서부전선의 리퍼 작전('51.3.7~31일)
국군과 유엔군은 킬러작전으로 중공군 2월공세를 분쇄하고 '51. 3월 초에 한강 남안-횡성- 강릉 선을 잇는 선(아리조나 선)까지 진출하자 서울의 재탈환전이 유엔군의 증원이 없이 서둘러 진행하면 무리한 희생이 뒤따를 것이라 판단하여 현 전선의 중앙지역에 대돌파구를 형성해 서부지역의 중공군과 동부의 북한군을 분리시킨 후 남쪽에서 정면공격과 동쪽에서 측면공격으로 서울을 양익 ㅍ포위해 탈환한다는 전략을 수립헤게 된다. 이 작전을 "절단과 분리"라는 리퍼작전이라 명명하였다.
진행되는 리퍼작전(절단작전으로 아이다호선 확보(춘천선)으로 서울을 신속하게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3월 7일 08시를 기해 실시된다.
이를 위해 미 제8군사령부는 3개의 통제선(알바니선. 버팔로선.카이로선)을 설정한다.
알바니선: 제1통제선으로 미 제1, 제9, 제10군단 정면의 8~20km 북쪽에 위치한 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태기산-속사리를 연하는 선
버팔로선: 제2통제선으로 이선은 미 제1, 제9군단에만 적용하여 홍천부근을 통제할 수 있도록 미금리-홍천 북쪽-한계리 선으로 미 제9군단은 주공인 미 제1해병사단이 홍천을 목표로 진격하고 미 제25사단이 버팔로선까지 진격하여 서울 동쪽에 대한 포위망을 확대하도록 임무가 부여되었다.
카이로선: 제3통제선으로 가평-춘천 남쪽-한계리 북쪽을 연하는 선으로 미 제9군단에 국한하여 설정하였다. 이 선을 점령하면 최종선인 아이다로선까지 북진할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미 제9군단은 3월 7일 08시에 킬러작전을 종료하고 리퍼작전으로 전환, 4개 사단 병진으로 좌전방 미 제24사단(국군 제6사단 제19연대 배속)이 용문산으로, 중앙 미 제1기병사단(영 27여단 배속)과 국군 제6사단(19연대 결)이 홍천강 남쪽 산악지대로, 우전방 미 제1해병사단이 홍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조.중 연합사령부는 종심방어선을 설치하여 적극방어하고 양호한 지형을 이용하여 적을 축차적으로 저지 지체시키고 살상하여 시간을 획득하고, 후속부대가 도착하면 전역 반격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전역배치는 반드시 "전경후중(전경후중)" 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했다.
미 제9군단은 경미한 저항을 받으려 3월 13일까지 국군 제6사단을 제외하고 1단계인 알바니선(양수리-양덕원리-노천리 태기산-속사리)선에 진출한다. 여기서 미 제1해병사단을 동행한 미 제2사단 전장정리조가 횡성계곡에서 미 제10군단 소속의 미 제21지원부대원(중공군 2월공세시 전사)으로 보이는 시체 250구를 수습하고 각 부대들이 중공군 2월공세 당시 유기했던 무기들을 일부 수거한다. 국군 제6사단 제2연대 수색대도 횡성서북 초원리에서 국군 제8사단이 유기한 대전차포 7문과 105mm 곡사포 5문을 회수했다.
[3월 16일 해병이 홍천 점령, 텅빈 홍천시가지]
미 제8군사령부는 3월 13일 제2통제선인 버팔로선(미금리-홍천 북쪽-한계리선)으로 진출을 명하였다. 이에 제9군단은 제1기병사단과 제1해병사단을 좌우측으로 홍천 양익포위하고 미 제24사단과 국군 제6사단을 북한강 계곡의 청평호에서 홍천강 남쪽까지 진출하라 명령하였다. 하지만 동측의미 제1해병사단이 적의 저항에 홍천부근 진출이 저항을 받게되자 16일 홍천강을 연하여 중간선인 "버팔로선"을 설정, 홍천북방의 버팔로선과 연결하고 미 제24사. 국군 제6사. 미 제1기병사단에게 이 선으로 진출토록 통제한다. 하지만 제7해병연대 정찰조가 적진을 돌파 홍천에 진입하니 읍내는 아군의 폭격으로 페허가 되었고 방치되어 있어 홍천북방 고지군으로 진입하면서 17일 전 사단에게 마지막 카이로선으로 진출을 명하였다.
[국군 제6사 제2연대: 홍천 북쪽 구은동 부근 계곡에서 중공군 1개 대대 포위하여 231명 사살, 75mm야포 7문. 박격포 6문. 82mm 박격포 4문 등 노획한다.]
[3월 22일, 미 제1기병 7연대가 춘천점령]
하지만 최초 계획되었던 제187공정연대전투단의 춘천북쪽 공중 투하작전을 취소하게 된다. 적이 이미 춘천북쪽으로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미 제1기경사단 특수임무부대가 21일 오후에 춘천시가에 진입하여 탈환하고 22일 제7기병연대가 춘천시내로 진입함으로서 미 제1기병사단의 리퍼작전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된다.
[3월 24일, 국군 제1해병연대의 홍천 북방 가리산 점령]
한편 미 제1병사단은 미 제10군단지역 평창 여량리지역에서 사단으로 배속전환되어, 18일 도착한 국군 제1해병연대에게 중앙연대로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투입시켜, 24일 가리산을 점령하고 25일 동사단도 모든 공격제대가 공격목표인 카이로선에 도달하는데 성공한다.
3) 한강 도하와 서울 탈환작전
미 제9군단이 중서부전선에서 리퍼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도 서울 탈환작전을 전개하였다.
서울 탈환 작전은 '51.3.7일 미 제25사단이 한강을 도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단은 2월 28일 분원리 부근의 한강연안으로 진출한 후 6일간 도하공격을 준비해 왔다. 사단의 임무는 한강의 합류부근에서 도하하여 금곡리-청평에 이르는 경춘선으로 진출해 교두보를 확보하고, 경춘선의 차단과 서울을 동북방에서 포위할 태세를 갖추는데 있었다.
미 제25사단은 서쪽부터 3개 연대가 병행도하해 경춘선(알바니선)으로 진출한 후 배속된 터키여단이 청평을 점령하면, 미 제9군단의 좌측부대인 미 제24사단과 연결시킨다는 계획이다.
그러나 도하지점의 강폭이 150~370m나 되고, 눈이 녹아 도로망이 강우로 진흙탕으로 변했고, 대안에 대규모 중공군 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51.2.25일부로 킨사단장에 이어 새로 부임한 브래들리 준장은 면밀한 계획 주도자로, 광주군 남종면ㄴ 일대에 도하부대를 집결시켜 도하 예행연습을 시켰으며, 드디어 구실(정암산 정상 서북쪽 2.8km 지점으로 지금은 팔당댐에 수몰됨) 선착장 부근에서 3월 7일 공격준비사격으로 96문의 야포와 15문의 전차포, 48문의 박격포가 포탄을 퍼부은 다음 제35연대 제3대대 K중대 병사들ㅇ이 보트를 이용 도하를 감행하고 하늘에는 10여 대의 전폭긱가 대기하면서 근접항공지원을 맡았다.
국군 제1사단이 김포비행장 부근에서, 미 제3사단이 서울 남안에서 양동 작전을 실시해 중공군 제50군이 양수리 방면으로 전용되지 못하도록 하여 아침 07시 40분경에 도하를 성공하여 양수리 고지들을 확보한다.
중공군 저항이 둔화된 3월 10일부터 진격을 계속하여 15일 저녁무렵 서울-춘천간 도로까지 진출하고 터키여단이 경춘국도 북쪽 2마일까지 북상하여 우인접 미 제9군단 제24사단과 연결함으로써 동측방에서 서울의 적을 위햡할 수 있게 됐다.
한편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과 미 제3사단은 인천지역 경계와 한강남쪽의 진지를 방ㅇ어하다 적이 서울을 포기하는 징후를 발견하여 서울 탈환전을 개시하였다
서울 남쪽을 방어하고 있던 국군 제1사단 예하 5개의 정찰대가 14일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 시내(강북)를 정찰하여보니 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정철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내걸었다.
미 제3사단의 정찰대도 한강변의 매봉(175)과 용마봉을 정찰하였으나 적을 발견하지 목했다. 항공정찰결과 적은 서울 -의정부 중간지점부터 3번도로상 도로 주변에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이 무렵 공산군은 3월 9일 철수명령에 의거 10일부터 제1선 부대의 철수가 단행되고, 4~5일동안 고양-의정부-청평천-홍천강 북쪽- 풍암리에 이르는 선까지 철수하여 제2전선의 부대와 교대를 하게 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서울ㅇ에 적이 없음을 확인하고 3월 15일 미 제1군단장에게 서울 북쪽의 주요고지를 점ㅂ령하라고 명령하고, 그는 이를 위해 서울 북서쪽 한강변에서 북한산을 경유 용마봉을 거쳐 버팔로선과 연결하는 통제선인 (일명 링컨선)을 설정하였다.
따라서 미 제1군단장은 국군 제1사단이 1개연대로 북한산을 확보토록 항여 제1사단장은 영등포-한강철교에 배치된 제15연대를 공격부대로 선정 제6중대가 도하를 개시하여 적정을 탐지한 훙에 16일 제2대대를 선두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시내로 진출 장악한다. 미 제3사단도 용마봉을 점령하였다.
맥아더 원수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서울 복귀를 만류하고 본인ㄷ도 3월 17일 한국을 방문했을 때에 서울에 들어오지 않고 춘천을 향해 진격을 준비하는 미 해병 제1사단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4) 38선 진격작전
가) 서부. 중서부지역 진격작전
그리고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3월 21일 리퍼작전을 확대하여 임진강 하구-문산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하고 (1단계작전) 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하는 "용기 작전(courageous)"을 계획하고 3월 22일 08시에 10-16km전 방의 카이로선을 향해 진격한다.
여기서 후퇴하는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문산 북방에 제187공정단을 투하하는 "토마호크 작전"을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에 이륙하여 실시되며 여러 시행착오(비행기 고장 등)를 극복하고 낙하하게 되며, 그루우던 특수임무 부대가 23일 오전 카이로선의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 축선으로 진출 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당시 공산군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였으나 이미 많은 병력이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 투입 동두촌 서남단 신촌 부근 228고지 점령]
국군 제1사단이 경미한 저항속에서 임진강변으로 진출하는 동안, 우측의 미 제3사단은 의정부 일대로 진격중에 468고지와 북동쪽 천보산일대에서 적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더디게 되자 미 공정연대를 투입하여 27아ㅣㄹ 오전에 점령하여 오후에 미 제3사단과 연결하였다.
미 제25사단은 좌전방 제24연대가 소리봉-해룡산을, 중앙의 제27연대가 죽엽산-완방산을 , 배속되 ㄴ터키여단이 주금산-국사봉을 목표로 경춘국도에서 공격을 개시하여 적의 저헝을 극복하고 28일 포천을 점령한다.
나) 중동부지역 진격작전
당시 미 제10군단은 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제10군단장은 좌측 횡성-풍암리간 소로와 우측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토록 하고,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국군 제5사단을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간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를 하던 중에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36연대를 지구리에, 제35연대를 월암동에 배치하였다.
미 제10군단은 3월 7일 벌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3개 사단 병진을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제5사단은 횡성에서 사단을 공격했던 북한군 6사단으로서 이들은 북한군 제12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지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은 지대내 돈방내리 남쪽의 고지를 확보하고 자주봉(889) 등에서 격전을 치렀다. 사단은 우인접에서 진출중인 미 제7사단을 지원하기 위하여 미 제17연대의 대미산지역을 인수함으로써 작전지역을 동쪽으로 확장하였다.사단은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백운동 선으로 진출한 후 15일에는 북쪽의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 미 제2사, 우전방 미 제7사단도 13일 전후 공산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알바니선으로 진출하고 17일에 최종 목표선인 아이다호 선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을 종료하였다.
한편 리퍼작전의 또다른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목표선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약 16km가 남아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제7사단과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공격부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군단예비로 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9사단의 정선 일대를 인수하도록 했다.
국군 제7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를 상대화-백적산(1141)-잠두산(124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각각 진격하게 했다. 3월 6일 08시에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지역에 북한군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 중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해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여 해병연대는 발왕산과 봉산리 일대로 3월 6일까지 진출했다.
해병연대를 배속받은 제7사단은 3월 7일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백적산.백석산 일대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8일에는 예비인 제8연대까지 투입하여 결국 제3연대가 7시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백적산을 탈취하였다.
군단장은 하진부리를 조속히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목적하에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전방에 투입했디. 북한군이 3월 10일 2개 연대로 대규모 역습을 해왔으나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하고, 11일 속사리와 하진부리를감제할 수 있는 백적산이 확보되자 북한군의 공격지세는 현저히 둔화되고 12일에 최종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하고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의 제3대대가 국군 제7-5연대가 철수하여 적중에 고립되어 제3-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 보급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북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제1해병연대는 13일 09시를 기해 공격으로 전환하여 최종목표인 외차래지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한다. 그리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제3군단은 3월 25일 후방지역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목표로 공격을 게시하여 27일 카이로선상의 하서림을 확보하고 30일에는 제23연대가 조개동으로 진출한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전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제3군단으로부터작전지역 일부를 인수받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배속받았다. 이 당시에 이미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의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에도달해 있었다.
이 당시에 군단 작전지역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하여 북상 중이었다. 이에 군단장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패잔병을 소탕하게 하면서 18일에는 수도사단으로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명하였다. 이때 국군 제1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69여단으로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 병력을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진전 되자 수도사단장은 대관령 너머의 유천리와 차항리 일대에 배치한 제26연대를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이동시키고, 사단 예비인 제1기갑연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킨다. 사단은 27일 남대천을 도하해 양양으로 진출한 후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한계령에 이르는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 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제1연대의 공격이 실패하였다. 제1연대는 다시 동해안의 함포사격 지원에 387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한다.
이상의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에 이어 오이오밍선 확보를 위해 유엔군이 임진강 남안-화천저수지-동해안의 양양을 연하는 캔사스 선을 점령을 계획하고, 반면 공산군이 '51.4월 초 캔사스선 확보를 위한 전략적 요충지인 철원-평강-김화 일대에 중공군이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시켜 공격준비에 나서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다시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 저수지를 잇는 와이오밍선에 대한공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공산군은 제3차 및 제4차 공세에서 전쟁 수행의 어려움과 작전 지속성의 중요성을 인식한 중국 수뇌부는 1951년 3월 말경 "장기전을 준비하되, 최대한 단기전으로 군사작전을 실시한다'는 전쟁 수행 방침을 확정하였다. 이들은 무기 및 장비 수준의 현격한 격차가 작전수행에 있어 상당한 장애로 작용하여 단기간 내에 미군 병력을 대량 섬멸하여 한반도 문제를 신속히 해결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사상적으로 또는 기타 각종 준비에 있어 장기전에 대비하되 가능하면 전쟁기간을 최대한 단축하여 조기에 종결하려 하였다.
또한 이들은 "우세한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각개 섬멸한다"는 원칙에 따라 공세시 충분한 병력으로 전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분할함과 동시에 전술적으로는 대집단을 다시 수개의 소집단으로 분할하여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함으로써 신속히 섬멸한다는 작전지도 방침을 구체화 하였다.
이러한 방침 하에 국군과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재반격을 단행하고 중공군 증원부대가 한반도로 이동을 시작하자, 중공군 지휘부는 대대적인 공세를 통해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을 저지함은 물론 전장상황을 전환시키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국군 과 유엔군이 동부 산악지대를 점령한 후 서해안 진남포로 상륙한 병력과 연합하여 안주-원산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현실화될 경우, 중공군과 북한군간의 보급선이 단절되는 위기 상황이 초래될 것으로 분석하고 , 유엔군의 작전기도를 분쇄하고 신속하게 주도권을 회보하기 위해 제5차 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리고 중공군 3개 병단 11개 군과 북한군 4개 군단의 집결이 완료되면 동두천과 포천, 그리고 춘천 일대에서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기로 계획하고, 이를 위해 국군과 유엔군을 유리한 지역으로 유인해 운동전으로 저지하는 한편, 시간을 획득하기로 하고 5차공세(4월공세, 5월공세)를 단행하게 된다.
제 2 절 유엔군의 38도선 확보와 후방지역 작전
제 1절 개요
1. 전선 상황 요약
1951년 초엽의 전쟁 양상은 어느 일방에 의해서 주도되지 않는 시소게임 같은 공격과 반격의 반복이었다. 특히 4월 11일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한 맥아더 장군의 해임ㅇ은 전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중공군은 제4차공세(2월공세)이후 유엔군의 반격으로 후퇴만 하던 공산군이 대규모 공세준비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러나 신임 유엔군 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은 미 제8군사령관으로 재직하며 이미 지휘관들에게 충분한 대비를 지시하고 있어 중공군은 전처럼 기습효과를 발휘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제8군사령관으로 리지웨이 장군의 후임으로 임명된 벤플리트 장군은 전임사령관과 같은 전투지휘관으로 취임사에서 "중공군이 공격해 오면 물러나고 멈추면 반격해 나가는 방식은 이제 청산되어야 하며, 유엔군은 수세가 아닌 공세로 나가게 될 것이라 하여 공격 제일주의 지향했다.
벤플리트 제8군사령관은 철의 삼각지대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돈틀라스 작전의 연장이기도 한 이 작전은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협조하여 4월 21일 공격을 개시할 예정이었다. 이에 더하여 8군사령관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제1군단으로 하여금 화천호에서 간성으로 이어지는 선을 확보하여 동부전선의 주요 보급로인 간성-인제 간 도로를 점령하도록 한다.
드디어 4월 21일 국군과 유엔군은 전 전선에서 공격을 개시한다. 그러나 다음날 유엔군의 공격을예견하고 있던 중공군이 방어에서 공격으로 전환하였다.이른바 중공군의 4월 공세의 시작이다.
한편 이 시기에 후방지역에서 국군 제11사단이 지리산과 호남지구에서 , 국군 제2사단이 안동지구에서 , 제9사단이 정선지구에서 각각 게릴라 토벌작전을 수행한다.
제 2 절 38도선 확보작전
1. 개 요
유엔군의 38도선 확보작전은 1951. 4. 1일부터 21일까지 국군과 유엔군이 캔사스선과 철의 삼각지대로 진출하기 위해 전개한 공격작전이다.
리퍼작전으로 국군과 유엔군이 문산-춘천-양양 선까지 진출하자,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맥아더 장군의 승인하에 재북작전을 계획하였다. 그는 제한목표 공격방식으로 적에게 계속적인 압력을 가할 필요가 있다거 판단했다. 이러한 취지에서 계획된 것이 러기드 작전과 돈틀라스 작전이었다. 이들 작전의 목표는 각각 캔사스 선과 철의 삼각지대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4월 3일 러기드 작전을 개시하여, 미 제9군단은 수리산 줄기를 통과하여 화천을 향해 진격하고, 중공군은 화천댐의 수문을 열어놓는 수공작전으로 대응하였다. 이에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은 하천댐에서 격정을 벌였다. 그 동안 미 제1,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제3군단은 계획대로 진출하여 캔사스선에 도달하였다.
러기드 작전에 이어 미 제8군은 4월 11일부터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을 주축으로 돈틀ㄹ라스 작전을 개시하였다. 돈틀라스 작전은 철원 김화 평강으로 둘러싸인 소위 "철의 삼각지대"에 집결한 공산군의 대병력을 무력화 시키고 이 곳을 점령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엔군이 4월 21일 돈틀라스 작전의 목표지역인 철의 삼각지대를 공격하여 근접하게 되자 그 다음날인 4월 22일 이른바 중공군의 4월공세가 시작된다.
2. 상황평가 및 의도
가. 공산군측
국군과 유엔군이 러기드 작전과 돈틀라스 작전을 수행할 때 공산군은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조.중사령부는 4월 촊ㄱ가지 장연리-청석두리-백천리-삭녕-대광리-지포리-화천-양구-인제-양양을 잇는 선에 부대배치를 완료한 상태였다.
공산군은 유엔군이 공격을 개시하자 유엔군은 캔사스선을 넘어 철원.평강.김화 금성.토성지구에 중점을 두고 공격할 것이라 판단하고 최후 저지선을 서쪽에서 동쪽으로 금천-위천리-삭녕-장거리-문혜리-산양리 선이었다.이 계획에 의거 4월 17일 최후저지선으로 철수한 후 유엔군을 유인하는 작전으로 전환한다.
조.중사령부는 유엔군의 공격을 조기에 분쇄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38도선에서 유엔군의 주력을 격멸한 후 그 여세를 몰아 1차로 서을 점령하고 , 그 후 한강 이남으로 공격할 것을 결정하였다.
나. 유엔군측
유엔군 측은 '51년 1월 하순 반격을 재개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공격작전을 펼치자 지난 12우러부터 제기되었던 철군문제의 논의를 일단락 짓고, 다시 38도선에 관한 전쟁 지도전략을 다각도로 연구하게 된다.
그 결과 미 행정부와 합참은 3월 15일에 "한국문제를 정치와 군사 두가지 노선으로 구분하여 단계적으로 해결하되 , 정치적을고는 통일 독립국가를 이룩하고, 군사적으로는 침략을 격퇴하여 평화를 회복해야 한다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다라서 지상군의 작전은 전술상황에 따라 38도손 북쪽 16~32KM 내에서는 공세적 방어작전을 허용하여 적이 유엔의 잠정 휴전협정의 수락을 거부한다변 유엔군은 적에게 계속 해서 손실을 가하여 적의 균형을 파괴하고 적의 공격준비를 분쇄하기 위해 38도선 북쪽으로 제한된 기습을 가할 수는 있으나 전면적인 진격을 하여 북한 영토의 확보를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정립한다.
미 합참은 3월 20일 유엔군사령관에게 미 대통령이 휴전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음을 알렸다. 그러나 전쟁의 해결에 외교적 수단보다는 군사적인 방법을 선호하던 맥아더는 미 행정부와 협의 없이 중공군을 위협하는 발언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여 미 행정부와 마찰을 빗게 되고 대통령의 계획을 취소시킬 만큼 파장을 가져온다.
이 무렵 미 제8군은 개성지역을 확보하기 위해 철수중인 북한군 제1군단을 추격해 예성강으로 진출할 계획이엇다. 그러나 이미 적이 에성강 북쪽으로 철수하여 공격제대가 동측방에 배칟되 ㄴ중공군에 포위될 우려가 있어 이 지역 작전은 수색과 전투정찰대의 활동으로 제한하기로 한다
제8군사령부는 그 대안으로 중부전선의 평강-철원-김화를 공격하기로하고 "철의 삼각지대"라 명명한다. 당시 이곳은 전방지역 병참중심지로 공산군은 이 지역에 병력과 물자를 집중적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이대 선정한 방어선이 임진강 제방을 연하여 동쪽으로 뻗어 화천저수지-동해안 양양으로 이어지는 선으로 , 이를 캔사스 선으로 명명하였다. 이 선은 서부지역은 38도선에서 3.2~9.6km, 동쪽에서는 대체로 16km 북쪽에 위치한 고지군을 연결한 선으로 , 제8군은 탠사스선으로의 진출 작전을 러기드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제8군은 다음 단계호 미 제1, 9군단이 철의 삼각지대를 위협할 수 있도록 유타선과 와이오밍선(연천-고대산-와수리-대성산-화천저수지를 연결하는 선)을 설정하고 철원-김화까지 공격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만일 공격 중에 공산군으로부터 강력한 공격을 받으면 양개 군단은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도록 하고 , 제8군사령관은 이 작전을 불굴작전(돈틀라스)이라 명명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4월 11일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중서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1단계 통제선인 유타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한다.
이 무렵 전선에서는 접적을 단절하고 후퇴만 하던 중공군의 활동이 현저하게 증가하면서 공격징후가 포착되자 , 미 제8군은 서울을 고수한다는 방침아래 공산군에게 최대한의 손실을 강요하면서 축차적인 철수를 실시하기로 하고 군 예비로 언제든지 서울방어에 투입할 준비를 갖추도록 미 제1기병사단을 서울 외곾에 포진시킨다.
이런 상황에 4월 19일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1단계 목표선인 유타선에 도달하자, 미 제8군은 공격여세를 몰ㅇ아 공산군의 전략요충지인 철원. 김화를 위협할 수 있는 와이오임선으로 4월 21일 07시에 공격하도록 한다.
(당시 국군 제1사단장은 '51.4.5까지는 백선엽 준장, 4.6일부로 강문봉 소장이 보임된다)
3. 전투 경과
가. 캔사스선 진출 작전
1) 서부. 중서부전선 진출전
국군과 유엔군의 캔사스선 진출작전은 서울 탈환의 계기가 되는 리퍼 작전에 이어 4월 1일부터 4월 9일 가지임진강-연천-화천저수지-양양에 이르는 이른바 캔사스선에 진출하는 작전이다.
캔사스선 확보 작전은 전선의 요철을 정리한다는 뜻에서 러기드 작전이라 명명하였다. 4월 3일 공격을 개시하였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국군 제1사. 미 제3사(영29여 배속). 미 제24사. 미 제25사단을 전선에 배치하고, 이미 캔사스선을호 진출한 좌측의 국군 제1사단과 중앙의 미 제3사단을 임진강 방어에, 우측의 미 제24사단과 제25사단을 3번 국도(의정부-포천-김화)를 따라 북쪽으로 공격토록 계획하였다. 4월 3일 미 제25사단은 영평천과 한탄강 사이 계곡으로, 미 제24사단은 관음산과 국망봉으로 공격하여 6일 율우리-운산리-야미리-장암리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진출한다.
이 당시에 서부전선의 공산군은 증원군인 제60군이 4월 6일 이천과 신계에 도착하자, 전선을 조정하여 중공군 제19병단은 제63군이 예성강에서 임진강 사이를, 제3병단 제60군이 임진강 동쪽의 삭녕과 연천지구를 담당하게 된다.
중서부전선의 미 제9군단은 국군 제6사. 미 제1기병사. 영 제27여단으로, 좌전방에 영 제27여단. 중앙에 국군 제6사. 우전방에 미 제1기병사단을 배치하여 4월 3일 공격을 개시하였다.좌전방 영 제27여단과 중앙의 국군 제6사는 적의 경미한 저항으로 4월 6일 캔사스선에 돋달하지만 우전방 미 제1기병사단은 화천댐을 이용한 중공군의 수공작전에 지연된다. 이는 미 제8군사령부 공병참모의 잘못된 판단(수심이 얕고 18개 수문이 닫혀 있는 점, 그리고 재래식 폭격으로 댐을 폭파할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작전 목표에서 제외 함)때문이었다.
[중공군의 수공작전 논란과 실제 수공작전 발생]
그러나 작전이 진행되며 미 제9군단 공병부대장은 제8군의 평가와는 달리 화천댐의 수위가 최고일 대 수문을 동시에 개방하면 북한강 수위가 3~4m 정도 상승하여 캔사스선 주변이 범람하고 춘천지역이 큰 피해를 입어 아군의 횡적 기동은 물론 주보급로인 가평-춘천-화천도로의 이동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중공군이 계속 댐을 장악하고 있다면 이러한 상황이 반복된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다시 미 제8군사령관은 이를 받아들여 화천댐을 공격 목표에 포함하고, 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변경하여 제9군단이 화천댐을 파과하도록 하였다. 미 제9군단장은 특수훈련을 받은 제4특공중대가 4월 7일 군단에 배속되자 이들은 미 제1기병사단에 배속시켜 화천댐을 파괴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임무를 받은 제1기병사단장은 군단장의 의도를 잘못 받아들여 기습공격을 준비하지 않고 댐 바로 남쪽의 캔사스선 점령에만 주력하였다.
결국 군단에서 우려했던 것과 같이 중공군은 4월 8일 자정 경 수공작전을 전개하였다. 제39군 제115사단 4개 대대가 4개의 수문을 완전 개방하고 6개를 부분 개방하여전진하던 미 제1기병사단 제7기병연대의 진출을 저지하였다.수위가 2m 상승하고 춘천부근 가교들이 떠내려가는 등 피해가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중공군 주력은 9일 아침에 더나고 댐에 이르는 능선에 일부 병력을 남기게 된다.
중공군 주력이 떠나자 미 제1기병은 정오 경에 캔사스선에 진출하게 되고 제1기병사단은 미 제1해병사단에 작전지역은 인계할 준비를 하자 제9군단장은 미 제1기병사단이 화천댐을 확보하도록 명령하였다. 미 제1기병 사단은 제7기병연대로 4월 9일부터 11일 까지 3차에 걸친 공격을 개시하였으나 화력지원의 부족, 도하장비의 부족 등으로 화천댐 탈취에 실패한다.
결국 군단장은 불굴작전으로 화천댐을 탈취하기로 하고 미 제1기병연대를 미 제1해병사단 제1해병연대로 교대하도록 승인하였다. 이로써 미 제9군단은 석룡산-화악산-지암리-신포리-용화산을 연하는 캔사스선을 점령하고 차기 작전을 준비하게 된다.
2) 중동부전선 진출전(양구, 인제)
미 제9군단의 우인접,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 국군 제5사. 미 제7사) 작전지역내 도로망이 제한되고 지형이 험준하여 중서부부대들 보다 진출이 자소 지연되었다. 이에 군단은 4월 7일 부대배치를 조정하여 조공인 좌전방 미 제2사단이 화천저수지 남쪽을, 중앙의 미 제7사단이 양구를, 주공인 우전방의 국군 제5사단이 인제를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국군 제5사단은 태기산 전투를 종료하고 부대정비와 위렧색에 주력하던 중에 4월 7일 소양강 남쪽 남전리-원대리로 진출하여 인제방면으로 공격을 하게 된다.
당시 사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12사단이며 이를 증원하기 위해 제15사단 및 제45사단의 1개 연대가 소양강변에 배치되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은 제35연대가 선봉에 나서 4월 9일 강력한 공격준비 사격에 이어 청구리에서 소양강을 도하에 성공하고, 우전방 부대인 제36연대는 10일 01시경 가로리로 도하하게 된다. 이 과정에 소양강변에서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통제하고 있는 490고지에서 피아간에 승패를 좌우하는 격전이 오전내 계속되자 제36연대장 황엽 대령은 제2댇 주력을 도하시켜 주변고지를 탈취 확보하면서 인제와 그 서쪽 고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좌전방 제35연대는 양구와 인제로 통하는 도로를 감제할 수 있는 개운리 서쪽 542-637-711-742고지의 종격실 능선을 따라 공격했지만 북한군의저항을로 목표탈튀에 실패하였다.
사단의 우전방 제36연대와 좌전방 제35연대의 상황은 14일에 반전된다.
종격실 능선에서 일진일퇴의 공방전 속에 15일 제36연대 제2대대가 북한군 1명을 생포한 가운데 암구호(밤나무-소나무)를 알아내어 기습공격으로 적 100여 명을 사살하며 지대내 최고봉인 940고지를 확보하면서 공격 7일만인 4월 17일 원통 북쪽 481고지와 봉화봉, 월하리로 진출하여 캔사스선 진출을 마무리 한다.
한편 국군 제 5사단이 인제부근에서 북한군과 격전을 벌이는 동안 미 제2사단은 화천저수지로 진출하고, 미 제7사단은 양구 점령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구-양양에 이르는 캔사스선 진출에 성공한다.
한편 이미 캔사스선에 진출한 중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2사.제3사를, 예비로 국군 제7사를,동부전선의 국군제1군단은 수도사단을 공격제대로하고 제9사단을 예비로 하였다.
2) 철의 삼각지대 공격
미 제8군은 캔사스선 북쪽 10~20km 북방에 와이오밍선을 설정해 이를 확보하기 위한 작전을 계획하고 이를 "돈틀라스 작전"이라 명명했다. 돈틀라스 작전의 목표는 와이오밍선을 확보함으로써 캔사스선 방어를 위한 전초선을고 활용하고, 적의 집결지인 평강-철원-김화를 위협한다는 것이었다.
제8군은 와이오밍선에 이르기 위한 1단계 목표선으로 "유타선(캔사스선 북방 임진강-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설정"한다. 이 선은 활처럼 굽어진 선으로 이 작전에는 미 제1군단의 미 제3, 미제24. 미 제25사단이 공격제대로 나서고 , 제9군단의 좌전방 영 제27여단이 미 제1군단과 보조를 맞추어 단거리 진격을 실시할 계획이었다.
['51.4.11일 맥아더 연합군 사령관 해임, 리지웨이 등장!]
이 계획에 따라 4월 11일 돈틀라스 작전을 개시하였다. 제8군사령관 리지웨이가 연합군 사령관으로, 14일에는 벤플리트 중장이 새로 제8군사령관으로 부임한다.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은 돈틀라스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4월 14일 한국에서 마지막 군단장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서 적의 공세 징후와 공격이 있을 경우에 3개의 통제선을 설정하여 축차적 철수를 개시한다는 것으로 이 선은 중공군 신정공세 당시에 점령했던 B선(문산-화천-양양), C선(서울 남쪽-홍천-원포리), 서울 교두보선과 흡사하였다.
첫 번째 : 델타선은 춘천을 중심으로동서해안에 이르는 선
두 번째 : 네바다선으로 서울 남쪽의 한강변을 따라 북동쪽으로 뻗어 양양에 이르는 선
세 번째 : 골든선으로 서울 서북쪽 10KM의행주에서 네바다선상의 양평을 반월형으로 연결한 선
[1단계 유타선 진출]
제1단계 돈틀라스 작전이 진행되어 철의 삼각지대로 접근할 수록 적의 저항이 강화되고, 또한 폭우로 도로상태가 불량하여 진출이 느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 제3사단이 연천을, 미 제25사단이 금학사을, 미 제24사단이 문혜리를 그리고 여 제27여단이 사창리를 점령하여공격제대들 모두가 유타선에 도달하였다.
[2단계 와이오밍선 공격중 돈좌]
이렇게 되자 신임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는 와이오밍선으로 제2단계 작전을 개시하도록 명령한다. 이에 좌전방 미 제1군단의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이 철원-김화를, 우전방 미 제9사단의 국군 제6사단과 미 제1해병사단이 김화-화천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미 제9군단의 양 사단은 큰 접적없이 캔사스선 북쪽으로 3.2KM~8KM를 진출했다.
그러나 좌측 미 제1군단의 우전방 미 제24사단이 광덕산으로 진출하여 우전방 국군 제6사단과 연결되지만, 좌전방 보개산에서 철원으로 공격한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은 적의 포격으로 우전 중에 공격이 돈좌되어 결국 미 제1군단의 공격은 전진이 불가능해졌다.
바로 공산군은 4월 17일부터 유엔군을 유인하는 작전으로 전환하여 4월 22일을 기해 "4월 공세"를 감행하며 유엔군은 공격에서 방얼고 전환하게 된다.
제 3 절 후방지역 작전
1. 호남지역 게릴라 토벌작전
가. 작전 개요
호남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은 '50.10.4일붙너 ,51. 5. 11일까지 국군 제11사단과 제8사단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서 활동하던 게릴라들을 토벌한 작전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지리산을 중심으로 백운산. 덕유산.회문산.불갑산.백아산.화학산 일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거점을 둔 게릴라들이 유격활동을 기도하였다.
이에 따라 국군 제11사단은 제9연대를 전남, 제13연대를 전북ㄷ, 제20연대를 지리산 지구에 분산 배치하고, 그리고 배속된 일부 경찰 및 청년방위대에게 주보급로와 통신망 확보임무를부여하고 본격적인 토벌적전을 벌였다.
세칭 거창사건도 이 작전기간 중에 일어났다. 이는 1951년 2월 10~11일 어간에 거창군 신원면에서 사단의 제9연대 제3대대가 신원지서의 협조를 받아 게릴라와 내통하고 있다는 주민들을 살상함으로서 사회적 물의를 빚게 된다.
이에 육본ㅇ느 제11사단을 2월 횡성전투 이후 대구에서 재편성ㅇ을 완료한 국군제8사단으로 교대시켰다. 제8사단은 4웕 3일 전주로 이동하여 제1경비데데. 제18전투경찰대대. 충남 경찰토벌대. 청년 방위대 제153지대를 배속받아 금산. 정읍. 부안 등지에서 토벌작전을 전개한다.
나. 작전 경과
1) 호남지역 게릴라 형성과정
가) 북한군의 호남지역 강점과 점령정책
1950년 7월 초 한강을 도하한 북한군은 온양-예산-장항-군산을 거쳐 광주와 목포를 점령하는 남하계획에 따라 7월 11일 공주-대전축선으로 나하하던 북한군 제6사단을 호남지역으로 우회 기동항여 13일 예산을 출발하여 공주 금강을 건너 호남지방에 진입, 10일 여 만에 호남지역을 장악하였다.
이에 육군본부는 시급히 제5사단을 재편성하여 서해안지구 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호남지역 방어에 나선다. 하지만 주로 학도병으로 편성된 서해사는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대항하기는 역부족이었다. 제대로 전투한번 못해보고 23일 광주, 26일 여수를 거쳐 부산으로 향한다.
북한군은 호남지역을 점령한 후 조선노동당의 지역당 조직과 인민위원회의 복구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여, 이러한 당조직의 재건은 북한에서 교육을 받은 당 및 사회단체의 핵심요원들을 남한에 파견하게 되는데 이들 요원 대부분은 이전에 남로당원으로 활동하던 인물들이었다.
북한군은 당 간부의 인선은 대부분 중앙당 지시에 의해 이루어지며 군당까지 중앙에서 당책을 임명하였다. 당 간부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각 도에는 도당학교가 설치되었다. 도당 학교에는 약 100명 가량을 수용해 1주일간 단기교육후 당원을 배출하였다. 당시의 현황을 보면 군인민위원회는 108개 군에 3,878명, 면인민위원회는 1,186개 면에 22,314명, 리인민위원회는 13,654개 리에 77,716명이었다.
전라북도의 경우 도당 위원장에 방준표, 부위원장에 조병하가 임명된다. 전라남도는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었던 국기열이 도인민위원장에 부임한다. 그러나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4일 만에 해임되고 김백동이 임명된다. 김백도은 월북하여 있다가 북한군이 광주를 점령하자 내려왔다.
한편 여수는 7월 27일 북한군이 무혈입성 후에 약 400명의 북한군이 잔류하여 점령군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이렇듯 당조직과 인민위원회의 구성이 7월말경 완료되자 8월부터는 우익인사에 대한 철저한 검거령이 내려졌다. 그 대상에는 낙오된 군경이나 우익 정당 및 단체의 임원, 재산가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우익단체에 대한 검거와 탄압은 북한 내무성 산하의경찰조직인 정치보위부와 북한군 잠령 지역의 주민들로 구성된 자위대가 담당하였다.
당시 북한 내무성 정치보위부에서는 북한에서 훈련된 요원들을 시,도,군 단위까지 파견하여 도에는 내무성 도지부, 시.군에는 내무서을 설치하고 면단위가지 분소를 설치하였다. 면.리 단위는 민청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자위대 혹은 치안대라는 조직이 만들어졌다.
내무서와 자위대에 의한 우익인사 검거는 7월 중순 각 시. 군 내무서를 통해 하달된 검거 대상지 선정기준에 따라 이루어졌다. 그러나 여기에 면.리로 내려가면서 분소장 및 자위대원들의 자의적인 판단에 따라 검거하여 인민재판이나 즉결처분으로 학살을 단행했다.
일례로 전북 옥군에서는 9월27~29일 사이에소위 반동분자 및 그 가족 574명을 학살하고,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약 2,000명 중에 500여 명이 북한군 후퇴시 삻 당했다. 목포에서도 산전동에 구형무소와 목포역에 있는 미곡창고 드에서 1,000여 명이 수감되었다가 300여 명이 살해되고, 무안에서는 우익인사 80여 명이 불에 타 죽는 등 테러가 이어졌다.
결국 이러한 테러는 구군이 이 지역을 탈환 후에는 우익에 의한 보복 차원의 좌익에 테러가 이어졌다.
나) 북한군의 후퇴와 게릴라부대로의 전환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북한군은 게릴라전 준비를 골자로 하는 지시 사항을 하달한다. 지하당으로 개편하고, 군사시설로 이용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파괴하고 산간지역에 부락을 접수하여 식량을 비축하고 간부들은 남강원도까지 후퇴케하라는 등의 지시를 하달하였다.
이 지시로 각 도당위원회에서는9월 28일을 전후하여 조직들을 도내의 산악지대로 이동시키고 입산자들을 규합해 여러 개의 게릴라부대를 조직한다.
이러한 제2전선의 형성은 모택동의 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10월 2일 모택동이 스탈린에게 보낸 서신에서 "지금은 군대를 파견치 않고차후의 전투에 대비하여 준비를 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봅니다. 북조선은 패배를 겪는 당분간 투쟁방식을 빨치산 전투로 전환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밝힌 것에서 입증된다.
전라북도에서는 도당위원장 방준표의 지휘하에 회문산으로 당 조직들을 집결시켜 전북도유격대를 편성한다. 휘하에 이택부대. 보위부대. 백학부대. 돌진부대. 광산부대. 학도주대. 사령부 직속부대. 전주유격대. 김제유격대. 임실유격대, 완주군당유격대등이 편성된다.
전라남도에서는 도당위원장 박영발의 지휘하에 북부는 백운산, 남부는 월출산으로 입산 집결시켜 지역별로 전남도당유격대를 편성하고 백아산에 도당지휘부를두고 활동한다.
지리산지구에는 107부대. 605부대. 지리산유격대.백운산유격대가 편성되었다.
이렇듯 호남지역 게릴라들은 지리ㅣ산 부근의 운봉.곡성. 하동 등지에서 출몰하여 양민을 위협하고, 남원-구례-순천에 이르는 전라선 철도를 파괴하고 군용열차를 습격하여 무기와 보급품을 약탈하게 된다.
2) 국군 제11사단의 창설과 게릴라 토벌작전
당시 전선 상황은 북진하던 유엔군에 중공군이 '50. 10월 19일을 전후하여 은밀 기습 침투하여 통일의 목전에서 후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에 미 제8군은 후방지역의 게릴라 출몰과 관련하여 군 예비로서 후방지역에서 활동하던 미 제9군단을 청천강 전선에 투입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육군본부는 '50년 10월 15일 후방지역을 전담할 제3군단을 창설하고 6개의 유격대대로 구성된 유격사령부와 제2사단, 제5사단, 그리고 신편 중인 제9사단과 제11사단을 배속하였다. 이중 호남지역 게릴라 토벌작전은 제11사단이 전담하게 되었다.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1950년 10월 10일 대구를 출발하여 10월 14일 남원에 도착한다. 당시 제11사단은 제9연대(대령 김희준, 대구에서 9월 30일 2,979명으로 창설), 제13연대(유흥수 대령, 진해에서 9월 26일 3,000명으로 청설), 제20연대(대령 박기병, 삼랑진에서 육9월 25일 군 제6훈련소를 개편하여 창설한 후 제주도에서 10월 1일에 제5훈련소로부터 장교 87명과 사병 1,500명을 받아 편성 완료)와 제3.5.6.7.8경비대대 를 배속받았다.
당시 제11사단의 게릴라 토벌작전은 크게 3단계로 나누어 제1기는 '50.10. 1일~10.25일로 소규모 토발작전에 행정기관의 복구와 적정 수집에 중점을 두었다. 2기는 '50.11.1일~12.31일로 이때는 견벽청야 작전개념에 따라 산간벽지에 민간인을 소개하고 게릴라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을 기아상태로 몰아 넣는 한편, 유리한 거점을 확보하여 게릴라 소탕에 주력한다. 제3기는 '51.1.1일부터 4월 초까질고 이대는 중공군의 침입으로 게릴라들이 적극적인 활동으로 약탈.방화 기습을 감행학게 된다.
[주요 게릴라 테러 실태]
'51.1.16일 : 800명의 게릴라가 광양읍을 공격하여 경찰관 4명 민간인 11명 살상,
'51.1.22일 300명의 게릴리가 정읍의 운암발전소 공격 발전소 시설물 파괴
이에 '51.1.20일 유엔공군이 게릴라들의 주요 활동 근거지인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변 일대에 항공폭격을 가하여 511명을 사살하고, 제11사단이 지상작전으로 123명을 추가 사살하고 1월 31일은 회문산 일대에서 합동작전으로 총 429명을 사살했다.
또한 제9연대는 3월 17일 화학산 일대에서 게릴라들과 교전해 남해여단장. 부여단장. 참모장. 중앙감찰부장 등 거물급을 포함하여 86명을 사살한다.
한편 담양. 순창. 화순. 장성. 나주군 일대에서 작전을 전개한 제20연대는 1,500명의 게릴라가 회문산을 거점으로 활동한다는 첩보에 의해 소탕작전을 전개한다. 2월 20일 불갑산에서 350여 명을 섬멸하고 3월 30일에는 불갑산에서 대청산으로 이동한 게릴라를 격퇴하고 회문산 작전을 종결한다.
제11사단은 총 3기동안 사살 6,921명 생포 603명의 전과를 올렸다.
3) 국군 제8사단의 호남지구 작전 : '51.4.5~5.11일까지 약 1개월간 게릴라 535명 사살, 624명 생포, 제8사단은 전사 12명. 부상 21명이라 기록한다.
제8사단(최영희 준장)은 '51.2웕에 횡성지구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치룬 후 제천을 경유하여 대구에서 재편성을 살시한다. 육본 직할로 후방지역 경계임무를 부여받고 '51.4. 3일 제11사단과 임무교대하였다.
'51.4.6일 제11사단과 임무교대하여 4월 16일 금산지구에 활동중인 게릴라 토벌작전을 시작으로 5월 11일까지 금산, 국사봉, 부안등지에서 작전을 실시한다.
[금산지구 작전: 4.16~19, 38명 사살 37명 생포]
'51.4.16일 대둔산662고지 일원에서 100여 명 격퇴
'51.4.17일 대둔산 과 원동산 운대산 일대에서 250여 명 격퇴
'51.4.19일에는 운암산 일대에서 게릴라 격퇴
[국사봉지구 작전:'51.5.4~5.11]
'51.5.4~5.9: 국사봉, 장성의 백학산, 전북의 장군봉과 내장산 일대, 회문산 칠보발전소. 용추봉일대에서 410명 사살, 573명 생포
[부안지구 작전: 51.5.10~11]
백련리. 신전.사자동. 쌍선봉. 반화동.조운암.월명암 등에서 87명 사살, 17명 생포
이후 제8사단은 5월 19일 육본 지시로 전주를 떠나 전방으로 추진된다.
2. 태백산지구 게릴라토벌작전
가. 작전 개요
태백산지구 게릴라 토벌작전은 '51. 2월 13일부터 4월 8일까지 국군 제2사단이 태백산지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과 남파 유격대를 섬멸한 작전이다.
안동지구에서 활동하고 있던 게릴라들은 '51. 1월 중공군의 신정공세시 미 제10군단 지역을 돌파, 영월. 단양. 영주를 경유 안동까지 침투한 북한군 제10사단과 이현사의 남부군, 그리고 경북도당과 지역별 게릴라들이었다.
이들은 태백산, 일월산, 속리산을 위시하여 형제봉, 보현산, 동대산을 연하는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국군 제2사단은 '51. 2월 13일 미 제10군단에서 배속이 해제되어 육본 직할부대로 게릴라 토벌작전에 투입되어, 제6, 제7경비대대와 국민방위군 1개연대, 태백산지구 경찰 2개 대대를 작전통제하여 영남일대 군 보급로 경비와 지역내 공비를 소탕하게 된다.
제2사단은 제31연대와 방위군 제3연대를 주보급로 경계를 , 제17연대와 제32연대를 보현산 일대의 게릴라 소탕작전에 투입한다. 이후 4월 22일 속리산지역 소탕작전을 실시후 전방으로 이동한다
나. 작전 경과
국군 제2사단(함병선 준장)은 '51.2월 16일 제31연대를 안동-영주-단양 간 주보급로 경비에, 제17연대 , 제32연대를 보현산 공비토벌에 투입한다. 사단은 공비들이 북상중이라는 정보에 따라 일월산 ㅂ주근을 차단하도록 명령하였다.
이 방침에 제31연대가 일월산 남쪽의 장갈령을 차단하고 3월 1일 새벽에 북상중인 북한군 1,500여 명을 기습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었다. 이 무렵 제17연대, 제32연대로 보현산 일원에서 일월산 남단으로 이동한다.
사단은 일월산을 3중으로 차단선을 설치하였고, 북한군 제10사단은 800명과 400명으로 나누어 차단선을 돌파하려 하였다, 사단은 5일간 일월산-통고산 방면으로 적을 추격하여 사살 460명, 포로 40여 명을 획득한다. 이 작전에서 사단은 전사 4명, 부상 25명의 손실을 입게 되는데 제31연대장 박노규대령과 제3대대장 이오렬 중령이 일월산에서 전사한다.
북한군은 3월 초순에 유격전술에 능숙한 1,700명으로 편선된 제1지대와 제3지대를 이곳으로 남파하였다. 이들은 팔공산에 거점을 확보할 목적으로 침투하였다.
국군 제17연대는 3월 20일 통고산 지역에서 적 제1지대를, 제32연대는 양구동. 포도산. 명동산 일대에서 적 제3지대를 격멸하게 된다.제31연대는 안동-영주-풍기 도로를 경비토록 했다.
제17연대는 통고산 일대에서 시작하여 정선 동쪽 고양산까지 공비들을 추격하여 격멸하게 되고, 제32연대는 영양 남쪽 양구동 808고지 일대에서 대대장 강영훈 소령(후 국무총리)은 야간공격으로 적을 25명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한다.
이후 적은 민가에 잠입하는 등 도주하게 되며 주산을 거쳐 금장산-통고산으로 북상하여 오미산-연화산을 따라 북상하는 것으로 판단하고 1단계 작전을 종료한다.
다시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제17연대를 주추긍로 2단계 작전을 실시하여 통고산 북쪽 푱전지구에서 게릴라 120명을 사살하고 36명을 포로로 획득한 후 작전을 종료 하였다.
3. 유격대 편성과 활동
가. 활동 개요
국군은 적 주력에 대한 견제 전려\ㅑㄱ으로 주전선의 후방을 교란하는 제2전섲ㄴ 형성의ㅏ필요성을 인식하고서 "명유격대대", "백골병단", "백봉부대", "육군 을지병단" 등을 운용했으며 , 미군은 서해안에 존재하는 많은 의용군을 유격대로 활용하기 위해'51.1월에 "에이블 계획"을 수립하였으며 특히 미군은 무기. 통신장비. 보급지원을 통해 민간인 유격대원들을 북한지역에서 적을 공격할 수 있는 요원으로 발전시켰다.
이들 유격대원들은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 등지로 출동해 공산군 진지 습ㅈ격, 지하조직 구축, 피난민과 조종사 구출, 무기 노획 등 여러 작전을 펼쳤다.
이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는 등 활동으로 북한군과 중공군의 분산을 가져오는데 기여했다.
나. 활동 결과
1) 육군 통제 유격부대
가) 육군본부 결사유격대
중공군의 참전가 1.4후퇴로 한때 잠잠하던 적 게릴라 활동이 고개를 들어 군이 후방지역 게릴라 토벌적전을 벌일 무렵 국군 도 유격대를 조직하여 적 후방지역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국군이 정식으로 유격대를 편성한 것은 '50. 12월 중순이었다. 이 무렵 육본의 정보참모부 공작과가 중심이 되어 극비리에 유격대를 편성하였다. 청년단체의 협조를 구해 황해도, 평안도 피난 청년 중에서 인원을 선발하여 대대규모의 부대를 편성하고 훈련을 시켜 12월 말경 문산에서 임진가을 건너 적지에 들어가 활동을 개시했으나 곧바로 1.4후퇴를 맞아 전선이 남하함에 따라 통신이 두절되어 작전에 크게 기여하지 못했다.
이후 육본은 정보참모부와 작전참모부(편제과)가 협조하여 본격적인 "육군본부 직할 결사유겨ㅑㄱ대"를 편성한다. 당시 대구의 보충대에는 국민방위군 설치법과 국민통동원령 선포에 따라 청년, 학생, 의용경찰관, 철도경비경찰관, 현역병 낙오자 들이 몰려들어 있엇다. 유군은 이들 중에 애국심이 투철하고 신체조건이 우수한 700여 며을 1차 선발하여 '51.1.4일부터 유군정보하교에서 3주간 유격 특수교육을 실시하였다. 육군은 이들에게 정규군과는 다른 별도의 임시계급과 군번을 부요한 후 결사 유격 제11, 제12, 제13연대 순으로 편성했다.
결사유격대가 교육을 완료할 무렵 '51.1월 하순, 중동부 전선에는 국군 제1, 제3군단이 영월-삼척선에 방어선을 구축한 상황에 퇴로가 차단된 북한군 제10사단의 패잔병들이 안동일대에서 게릴라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육군에서는 게릴라 토벌작전을 지원하기 위해 결사유격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디.
'51.1. 30일 먼저 교육을 마친 결사유격 제11연대가 연대장 채명신 중령이 지휘하에 363명이 영월로 이동하여 청옥산-가리왕산-박지산-하진부리로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이어서 330명의 결사유격 제12연대가 2월 6일 연대장 이두병 임시소령의 지휘하에 묵호에서 양구 사명산-신고산-회양을 경유 통천을 목표로 침투하였다. 그리고 결사유격 제13연대도 2월 15일 횡계리에서 중부내륙을 목표로 연대장 김한철 임시대위의 지휘하에 침투를 개시하였다.
이때 제11연대는 적에게 노출되지 않고 주문진 서쪽 퇴곡리로 진출하였으나 제12연대는 하진부리 북쪽의 두일리에서 적에게 노출되어 공격을 받고 월정사로 이동한다. 게다가 유엔 공군의 오폭으로 다수의 피해를 입고 18일 퇴곡리로에서 제11여대와 합류한다. 이에 적의 경계가 강화되고 폭설로 기동이 제한되어 제13연대도 중부내륙 진출을 포기하고 월정사부근으로 이동하여 20일 퇴곡리에 도착하여 3개 연대가 집결하게 되었다. 이들 3개 연대는 이곳에서 통합하여 백골병단으로 창설된다.
이곳에서 백골병단은 2개월의 계획으로 유격전 기초지식, 군사훈련, 첩보수집, 보급투쟁방버 등 교육을 실시하던 중에 유엔군이 2월 3일을 기해 반격작전으로 전환함에 따라 교육을 2주일로 단축하고 긴급히 적정수집을 위해 적 전선 후방으로 투입된다.
200명의 유격대는 2월 3일 출동명령을 받고 북한군 복장과 무기로 무장하고국군 제3군단 에하 제7사단 제3연대 정면의 창리 북방에서 태백산맥을 따라 적 후방으로 침투 개시하였다.
그러나 당시 영하 20도 이하의 혹한과 1m이상의 적설로 대원들이 동상과 동사자가 속출하여 2월 8일 전지산에 도착할 때가지 44명이 낙오하여 복귇되고, 16일 오대산 비로봉에 이르렀을 때는 113명만이 적후방에 침투할 수 있었다.
[주요 작전]
'51.2.18 : 구룡령 계곡에서 북한군 연락군관단 5명 생포 / 국구 ㄴ제1군단에 정보 제공
'51.2.18~19 : 구룡령에서 매복하여 적 행군 병력 50명 습격, 적 제69여단 실체 파악 및 보고
'51.2.21 : 80여 명이 북한군 복장으로 적 군단사령부를 기습하기 위해 초계리로 출발 , 초소병 11명 사살후 적의 추격으로 내창도리로 철수, 이후에는 적의 계속적인 추격으로 엄동설한에 병력손실 과다 발생
'51.2.24 부터는 계속 적의 추격에 쫒기며 3월 24일 현리 남쪽계곡에 도착하여 국군 제3연대 수색대를 만나 귀환
이후 백골병단은 강릉의 육군전방사령부로 이동한 후 동해안의 을지 제1병단에 흡수
나) 육군 을지병단
육군본부는 결사유격대와는 별도로 작전참모부 심리전과 주관하에 철수작전시 북한지역에서 서해안과 동해안에서 탈출하여 자생적으로 유격활동을 전개하던 무장치안데. 반공청년단의 조직을 체계화 하고 그드르이 활동을 지원하는 형태로 을지병단이라는 유격대를 편성한다.
먼저 육군본부는 동부전선의국군 작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동해안 지역에서 활동할 을지 제1병단을 창설하였다. 하지만 동해안 지역에는 도서가 없어 인적자원이 부족하여 유격사령부로의 발전은 못했다.
이에 육군본부는 을지 제1병단에 이어 '51.3. 27일에 강화도에 서해안 도서를 중심으로 활동 중인 자생유격대조직과 청년들을 규합항여 을지 2병단을 편성한다.
그러나 을지 2병단은 창설된 그 다음날(3.28일) 앞서 백령도에서 창설되어 활동 중인 미 제8군의 표부대(레오파드부대)의 작전통제를 받게된다. 당시 을지2병단은 차동준 소려의 지휘하에 을지 제21, 제22, 제23, 제25, 제26특별연대로 편성되었다. 그러나 지휘 및 보급문제로 표부대와 마찰을 빚기도 하다 결국 미 제8군에 인계된다.
그 밖에도 같은 시기에 국군 제1사단은 사단 직속의 제5816부대를 강화동에 잠정 편성하여 운용하였다.
2) 유엔군 통제 유격부대
미 제8군은 '51.1.15일에 작전참모부 예하 기타 업무처에 유격대 업무를 관장하는 지구전과를 신설하여 유격대 조직에 착숳였다.
미 제8군은 우선 '51.2.15일에 부산 동래에 베이커기지를 창설하였다. 이는 장차 에상ㄷ되는 반격작전과 연관하여 공수 특수임무부대를 적 후방지역에 투입시켜 병참선 파괴활동을 전개할 목적이었다. 당시 대구에 집결해 있던 방위 사관후보생 중에서 대원을 선발하여 공수 및 특수전 훈련을 시켜 제1기생을 배출하였다.
[윌리엄 에이블기지-표부대-동키부대로 전환]
다음으로 서해안에서 활동중인 자생유격대를 통제하기 위하여 '51.2.15일에 백령도에 윌리엄 에이블 기지를 창설하였다. 이 부대는 3월에 표부대로 정식 공식 명명되었으며 4월까지 무장치안대를 유격연대로 개편하고 "동키부대"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동키부대는 6월 말 15개 연대로 증편되어 평안북도에서 황해도까지 전 서해안 지역의 도서를 중심으로 해안과 내륙으로 침투하여 작전을 전개 하였다. 부대의 규모는 소부대인 경우 270명에서 시작하여 많은 겨우는 870명에 이르는 등 각 유격대의 규모는 지휘관의 통솔능력에 따라 달랐다.
유격부대들은 15일에서 1개월 정도의 전투훈련을 받았다.
제 4절 중공군의 4월공세 요약
1. 개 요
국군과 유엔군은 킬러작전과 리퍼작전으로 38도선을 전술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캔사스선(임진강 남안-화천저수지-양양) 점령을 계획하였다. 이후 계획대로 '51.4월 초에 캔사스선을 확보한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의 전략 전술적 요충지인 철원-평강-김화 일대에 적이 병력과 보급품을 집결시켜 공격준비에 나서자, 이를 저지할 목적으로 다시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잇는 와이오밍선에 대한 공격을 지시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4월 20일 중서부전선에서 미 제1.9군단이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중동부.동부 전선의 부대들에게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간의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도로의 북쪽10~22km에 위치한 알라바마선(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작전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과, 국군 제3군단의 제3. 제7사단이 공격준비를 하는동안 공교롭게도 공산군측 4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선에서 22일 선제공격을 개시함으로서 국군 제3사단과 국군 제5사단이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펼치게 된다.
그러나 목표를 향해 진격하던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4월 22일 오후 공산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진출이 저지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예하 부대에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하도록 명령하였다. 중공군의 '51.4월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2. 피아의 상황평가 및 의도
가. 중공군측
1)상황평가
중공군 지휘부가 계획한 제5차 공세의 목적은 "유엔군 수개 사단을 섬멸해 유엔군의 작전기도를 분쇄하고 주도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작전 계획은 "김화-가평간 산악을 이용해 돌파구를 열어 국군과 유엔군을 동.서로 양분한 후 제9병단과 제19병단으로 서부전선의 유엔군을 양익 포위하며, 이때 제3병단이 정면공격을 실시하여 국군과 유엔군을 각개 분할하여 섬멸하고 38도선 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 수개 사단을 섬멸한 후 적의 종심을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었다.
4월 공세에 주요 작전지역은 서부전선의 문산에서 춘천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주요 공격 목표는 미 제8군이 지휘하는 5개 사단과 2개 여단이었다.
[ 미 제1군단의 미 제3사, 미 제24사, 미 제25사, 그리고 국군 제1사, 영국군 제29여단, 터키여단]
[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
2) 작전의도 및 전투편성
이들은 서부전선에 주공을 지향하고 동부전선의 인제지역에 보조적인 작전을 전개한다는 기존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북한군 제1군단 : 개성과 장단의 국군과 유엔을 섬멸한 후 주력은 임진강을 도하, 문산-고양-서울로 진격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방어 임무로 전환하도록 하였다. 이때 1개 사단은 연안-백천간 해안방어를 담당한다. 북한군 제6군단 주력은 사리원과 재령을 장악해 해안 상륙과 공수 강하를 기도하는 국군과 유엔군을 타격하며 , 1개 사단을 해주와 옹진반도의 해안방어를 담당한다.
2) 중공군 제19병단은 신속히 임진강 서안의 국군 제1사단 방어선을 돌파한 1개 군이 고랑포리 부근에서 임진강을 신속 도하한 후 의정부를 우회하여 국군과 유엔군의 티로 및 증원을 차단하고, 주력은 고랑포리.마전리.무등리 지역에서 임진강을 도하하여 영국군 제29여단을 섬멸한 후 동두천-왕방산-포천방향으로 진격, 제3병단 및 제9병단과 협동으로 영평-포천의 미 제24사단과 미 제25사단을 섬멸한다.
3) 제40군은 가평 방향으로 전진해 국군 제6사단을 섬멸한 후 춘천-가평간 도로를 차단해 동부 및 서부전선간 국군 및 유엔군의 연결을 차단한다.
4) 제39군은 일부 병력이 화천이북에서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는 한편 주력은 논미리-원천리- 방향으로 돌격하여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의 서쪽 증원을 견제, 병단의 좌측 안전을 보장한다.
5) 중공군 제3병단은 절대 우세한 병력과 화력을 집중해 연천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섬멸한 후 초성리 -종현산으로진격하여 제19병단과 제9병단과 협동으로 미 제24사와 미 제25사를 섬멸한다.
6) 조공으로 동부전선을 담당한 북한군 제3군단과 제5군단은 일부 병력이 양구이북에서 중공군 제39군과 연합해 미 제2사단과 국군 제7사단을 적극 견제하고, 주력은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의 전투지경선 부근인 서호리와 인제를 공격해 국군 1~2개 연대를 섬멸한 후 평창-강릉 방면으로 진격한다. 아울러 북한군 제2군단은 회양 일대에 머물려 일부가 해안경계를 담당하여 통천-양양 일대에서 국군 과 유엔군의 상륙을 저지한다.
나. 유엔군측
이에 반해 유엔군은 중공군의 3차 공세에 따른 1.4후퇴로 서울을 상실하였던 유엔군은 '51.3월 중순에 서울을 재수복하고 4월 초에는 주력부대들이 38도선 북쪽의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양양을 연하는 캔사스선까지 진출하는데 성공한다. 이때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은 임진강-한탄강 선에, 중부 전선의 미 제9군단은 석룡산-유촌리 선에, 중동부 전선의 미 제10군단은 소양강 북쪽에 주저항선을 편성하였다. 그리고 국군이 담당한 동부전선은 태백산맥을 경계로 제3군단이 내륙 산악지역에, 제1군단이 동해안 지역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당시에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은 수도권 지역으로 투입이 용이한 금곡 부근에, 미 제187공정연대는 대구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리고 육본 직할부대인 제8사단은 대전,광주,전주 부근에서 , 제2사단은 춘양. 제천. 안동 부근에서 연대별로 공비 토벌 작전을 실시 하고 있었다.
1)작전계획
미 제8군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중부전선의 캔사스선 방어종심을 깊게 하고 적의 공세준비를 차단할 목적으로 철원-김화를 통제할 수 있는 연천-고대산-와수리-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새로운 통제선인 와이오밍선을 설정하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이 이 선을 점령하도록 계획하였다.
그리고 동부전선에 배치된 적을 고착 견제하여 중부전선으로 증원을 차단함과 동시에 인제-간성 도로를 점령하여 군수지원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제3군단의 주보급로를 개선할 목적으로 화천저수지 동쪽에 배치된 중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미2. 미7. 국5)과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3.7사) 및 제1군단(수도.9. 11사)도 4월 24일부터 양구-가전리-송도진리를 연하는 알라바마선을 공격하도록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의거 제1단계 작전으로 미 제1군단 예하 3개 사단(미 제3. 미제24. 미 제25)과 제9군단의 영연방 제27여단이 4월 11일 캔사스선 북쪽 약 20km에 위치한 금학산-광덕산-백운산을 연하는 유타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4월 20일 유타선을 점령하였다. 제1단계 작전이 성공하자 미 제1군단(미25.미24)과 제9군단(국6.미 제1해병)은 공격부대를 재편성한 후 21일부터 다시 항공 및 포병의 엄호하에 최종 목표인 와이오밍선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국군과 유엔군은 공산군측의 한층 강홛된 저항으로 전방 진출이 어려위지면서 공산군의 대공세가 임박하였음을 알리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에 미 제8군사령관은 공격을 중지하고 신속히 방어태세로 전환하여 공산군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하게 되었다.
중공군이 '51. 4월 22일 "4월 공세(5차 공세)"로 사창리의 국군 제6사단이 무력화 되고, 서부전선 임진강변 설마리 일대에서 영국군 제29여단 황실대대인 글로스터 대대가 완전 무력화 된다. 한편 미제 1군단과 제9군단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로 공격을 개시할 무렵 중동부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군단, 제3군단은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도달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2) 지휘관계 및 전투 편성
가) 지휘관계
중공군 4월 공세기간 중 유엔군사령부 겸 극동군사령부는 미 제8군을 비롯해 미 극동해군과 극동공군, 주일군수사령부 등에 작전 지휘 및 통제 권한을 갖고 있었다. 이중 지상작전에 대한 지휘권을 부여받은 미 제8군사령관은 유엔군 소속의 미 지상군 부대는 물론이고 국군과 미 군사고문단에 대한 지휘를 관장하였다.
유엔군 사령부의 지휘부 구성은 먼저 사령관으로 지난 4월 11일 해임된 맥아더 원수의 후임으로 리지웨이 대장이 새로 부임하였다. 미 제8군사령관은 뱆플리트 중장, 극동공군 사령관은 스트레트메이어 중장, 극동해군사령관은 죠이 중장이었다.
서부전선의 임진강-한탄강선 방어를 담당한 미 제1군단은 미 제3사, 미 제24사, 미 제25사, 국군 제1사, 영 29여단, 터키여단으로 편성되었다. 이중 영 제29여단은 미 제3사단에, 터키여단은 미 제25사단에 배속되어 있었다.
국군의 주요지휘관은 미 제1군단의 국군 1사단은 사단장이 강문봉 준장. 제11연대장은 문형태 대령. 제12연대장은 김점곤 대령. 제15연대장은 김안일 대령이었다.
미 제9군단의 국군제6사단장은 사단장에 장도영 준장. 제2연대장은 김봉철 대령('51.5.1부로 차문호 중령). 제7연대장은 양중호 대령. 제19연대장은 임익순 대령이었으며, 국군 해병1연대는 대령 김성은 이었다.
미 제10군단의 국군 제5사단은 사단장에 민기식 준장. 제27연대장에 유의준 대령. 제35연대장에 홍순용 대령('51.5.1부 고백규 대령), 제36연대장에 황엽 대령이었다.
국군 제3군단은 군단장 유재흥 소장. 부군단장 강영훈 준장, 제3사단은 사단장 김종오 준장. 제18연대장 유양수 대령. 제22연대장 장춘권 대령. 제23연대장 김종순 대령이었다. 제7사단은 사단장 김형일 소장. 제3연대장 정진 대령. 제5연대장 대령 김인철('51.5.1부 조성화 대령). 제8연대장 대령 이현진('51.5.15부 변응오대령)
국군 제1군단장은 군단장 백선엽 소장. 부군단장 준장 이준식('51.4.27부 장창국). 참모장 준장 최홍희, 수도사단ㄴ은 사단장 준장 송요찬. 제1연대장 대령 한 신. 제26연대쟈ㅏㅇ 대령 서종철. 제1기갑연대장 중령 이용, 제9사단은 사단장 준장 이성가('51.4.27부 최석). 제28연대장 대령 이창정ㅇ. 제29연대장 대령 차갑준. 제30연대장 대령 손희선, 제11사단은 사단장 준장 ㅊ최덕신. 제9연대장 대령 오익경. 제13연대장 대령 최석용. 제20연대장 대령 박원근이다.
유엔군의 에비사단 및 부대는 미 제1기병사단. 미 제187공정연대전투단,
국군 예비사단은 제2사단(사단장 준장 함병선. 제17연대장 대령 이정석. 제31연대장 중령 조원영(대령 신동우).제32연대장 대령 조재미), 국군 제8사단(사단장 준장 최영희. 제10연대장 대령 이춘경. 제16연대장 대령 이석봉. 제21연대장 대령 김화산)이다.
3. 전투 경과
가. 서울 북방의 전투
먼저 중서부 전선의 서울 북방 전투로, 미 제1군단이 4월 22일부터 시작된 중공군의 4월 공세를 맞아 금굴산. 파평산. 설마리. 포천 등지에서 격전을 벌인 전투다. 4월 초 캔사스선까지 진출한 미 제1군단은 좌전방의 국군 해병5독립대대(제1사단배속), 국군 제1사. 영 29여(미 제3사 배속). 미 제3사)이 김포반도 -군자산에 이르는 주방어선에 , 그리고 군단의 중앙과 우전방에는 터키여단(미25사 배속), 미 제25사, 미 제24사단을 배치하여 미 제9군단과 함께 와이오밍선으로의 공격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4월 20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저항이 강력해지면서 공격기세가 둔화되자 급편방어로 전환하게 된다. 이때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미 제25사는 금학산-장흥리 일대의 분지에, 미 제24사는 신술리-문혜리에 각각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이 무렵 공산군측은 "서부전선의 유엔군 수개 사단을 격파하고, 주도권을 회복한다"는 목적하에 제5차 1단계(일명 4월 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4월 6일 중국인민지원군당위원회 화대회의에서 결정된 중공군 4월 공세 게획은 주요 공세지역을 서부전선의 문산에서 춘천 간으로 설정하고, 미 제1군단의 국군 제1사단, 영29여단, 미제3사단, 터키여단, 미 제25사단과 미 제24사단, 미 제9군단의 국군 제6사단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조.중 연합사령부는 4월 19일에 공격개시일을 22일 황혼으로 확정하고, 21일까지 공격부대들의 집결을 완료시켰다. 그리고 같은 날인 21일 조.중연합사령부 명의의 4월 공세 명려이 정식으로 하달되었다. 4월 22일 어둠이 깔리자 중공군의 주공부대인 제19병단은 개성-문산 축선의 국군 제1사단과 영국군 제29여단을, 제3병단은 연천-전곡-동두천 축선의 미 제3사단과 터키여단을, 제9병단은 김화-포천-의정부 축선의 미 제25사단과 미 제24사단을 야간 공격을 개시함으로서 4월 공세의 막기 올랐다.
종공군의 공격이 개시됨에 따라 적에게 최대의 출혈을 강요하며 캔사스, 델타, 골든선으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철수작전을 전개하여, 영국군 제29여단이(벨기에 대대 배속) 설마리와 금굴산에서, 국군 제1사단이 파평산에서 혈전을 벌였다.
1) 설마리-금굴산 전투
중공군 4월 공세가 시작될 무렵, 영국군 제29여단은 글로스터 연대 제1대대(글로스터 대대)를 적성 부근에, 푸실리어 연대 제1대대(푸실리어 대대)를 감악산 북쪽에, 그리고 배속된 벨기에대대를 금굴산에 배치하고 얼스터 소총연대 제1대대(얼수터 소총대대)를 봉암리에 예비로 확보하여, 마지리-도감포 간 11km 에 방어진지 편성하였다. 특히 4월 22일은 영국인들이 신성시하는 "성 죠지의 날"전야로 인해 전투준비태세가 느슨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2일 22시경 가여울 일대로 중공군 1개 연대가 도하공격을 개시하여, D중대를 제외한 전 대대원이 포로가 된 것을 포함해 전체 병력의 1/3이 중공군의 파상공세로 큰 피해를 입었으며, 특히 가여울 도섭장을 통제할 수 있는 중성산에서는 글로스터 A중대 중대장 안지어 소령이 전사하게 된다.
영29여단의 우측방 방어부대인 금굴산의 벨기에 대대지역에도 중공군 제188사단 병력이 투입되었으며, 전차를 이용하여 200여 명의부상자를 분승시킨 채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봉암리로 철수하기도 했다.
이 설마리 전투에서 고립방어로 3일간이나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침으로서 미 제1군단 주력이 철수와 함께 서울 방어를 준비할 시간을 획득하는데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2) 파평산 전투
미 제1군단의 좌전방인 국군 제 1사단은, 군단의 우측 미 제9군단이 4월 중순 철원 남쪽 와이오밍선을 공격하는동안 임진강 북쪽 대덕산-백학산-강정리를 연하는 선에 정찰활동을 실시하고 있었다.
중공군 4월 공세가 시작된 4월 22일 저녁 20시경에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4군 소속의 중공군이 임진강 북쪽에서 제1사단 수색대의 퇴로를 차단한 후 포위 공격을 시도하였고, 중공군 제192사단이 어둠을 이용해 임진강변으로 진출하였다. 중공군은 고랖포 자지포 일대에서 23일 02시 30분경에 도하공격을 개시하였고, 국군 제1-12연대의 완강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강 남쪽 장좌리에 교두보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이 무렵 사단의 우인접 영29여단을 공격하여 중성산을 장악한 중공군이 제12연대의 우측방 돌파를 기도하였다. 연대는 이들을 마지리 들판, 살상지대로 유인하여 보전포 협동과 항공폭격으로 무려 3,000명을 살상하게 된다. 사단장 강문봉 준장은 제12연대 지역에 제15연대 제2대대를 증원한다.
중공군은 돌파가 어렵게 되자 제192사단 외에 제190사단을 투입하여 파상공세를 강화함으로서 24일 새벽 국군 제12연대와 제11연대의 전투지경선으로 일부 돌파구가 형성된다. 이에 제15연대는 4월 24일 17시에 돌파구를 회복하게 되는데 제12연대 지역이 주 저항선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에 사단은 25일 06시 30분에 주저항선을 회복하기 위한 공격을 계획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은 북한군 제1군단(제8.제19.제47사)이 24일 자정에 제8사단이 철도로 도하하여 제11연대 좌전방을, 그리고 제47사단의 1개 연대가 청운동에서 임진강을 도하하여 제11연대 우전방을 각각 공격하게 되었다. 당시는 지척을 분간하기 힘든 짙은 안개속에서 주저항선으로 접근하였으나 날이 개이면서 항공지원과 포병화력이 불을 뿜자 북한군의 공격 기세는 둔화된다.
그러나 중앙지대로 진출한 중공군의 돌파구를 회복하기 위한 제15연대와 제12연대의 공격은 중공군의 저하으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이 무렵 파평산 동쪽의 북암리로 진출해 중공군과 대치하던 제12-3대대가 설마리의 영국군이 중공군 포위마을 탈출하고 있음을 통보받고 미 전차와 함께 구출작전으로 D중대원 40명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 틈을 이용하여 중공군이 제3대대의 우측방으로 우회하여 연대의 퇴로차단을 기도함으로서 제12연대는 공격을 중지하고 금곡리로 철수하였다.
한편 4월 25일에도 국군 제1사단의 반격작전은 별다른 진전이 없는 가운데 상황이 점점 악화되어 4월 25읽 정오경 미 제1군단의 철수명령이 하달되어 국군 제1사단은 3일간의 공방전을 종료하고 금촌과 문산 사이의 월롱산-부곡리-삼방리를 연하는 델타선으로 철수 하였다.
후일 중공군이 당시 이 상황에 대하여 국군 제1사단이 미타사 전방에서 완강하게 저항하여 주진지를 신속히 돌파하지 못했다고 전사에 기록하고 있다.
3) 김화-포천 축선 지연전
연천 동쪽에서 철원 김화를 목표로 공격하던 미 제1군단의 미 제25사단(터키여단 배속)과 미 제24사단은 4월 22일 중공군의 ㅇ완강한 저하에 부딪쳐 방어로 전환하였다. 이때 좌전방 터키여단은 대광리 남쪽 고지군에, 중앙의 미제25사단은 철원 남쪽의 금학산(947)에, 우전방 미 제24사단은 문혜리-신술리에 급편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터키여단의 좌인접에는 미 제3사단의 제65연대에 배속된 필리핀 제10대대가 유타선을 따라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중공군은 22일 19시에 터키여단이 배칟된 장승천 일대에 공격을 개시한다. 진내로 접근한 중공군 제179사단과 공방전을 벌이며 주저항선을 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정면공격에 이어 좌인접 필리핀 제10대대와 우인접 미 제25사단 제24연대와의 전투지경선 부근으로 1개 연대가 침투하여 포위공격을 시도하였다. 자정무렵 철수 명령에 따라 캔사스선으로 철수하던 터키여단은 나미현에서 중공군이 먼저 퇴로를차단하여 큰 피해를 입는다.
한편 터키여단 좌인접 율동의 필리핀 제10대댄믄 4월 22일 23시부터 중공군 제12군 제34사단의 파상공격을 받아 진내에서 근접전투가 시작되어 총력전으로 진지를고수하여 미 제3사단의 철수를 엄호하였다.
터키여단과 필리핀 대대의 선전에도 불구하고 23일 오전 미 제9군단 사창리 지역에 이어 미 제1군단의 감악산 지역에서도 부분적으로 진지가 돌파되자, 미 제8군사령관은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에 임진강-전곡-화천저수지를 연하는 캔사스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도록 명령하였다.
캔사스선으로 철수 명령에 따라 미 제1군단의 우전방지역의 미군 3개 사단(제3,제24,제25)은 진지 전방으로 중공군의 집결을 유인한 다음 항공지원과 포병의 집중사격으로 최대의 출혈을 강ㅇ요하면서 우세한 기동력을 이용하여 축차적인 지연전을 펼치며 캔사스선으로 철수하였다.
나. 중부 전선의 사창리-가평축선의 위기다
서부전선의 미 제1군단과 마찬가지로 중부전선을 담당한 미 제9군단도 4월 21일을 기해 국군 제6사단이 김화로,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배속)이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리고 미 제9군단의 정면에서도 4월 22일 중공군의 4월 공세가 시작되었다.
중공군은 4월 공세의 조공부대로 제9병단을 화천-가평 축선에 신속히 진출시켜 유엔군의 동서간 증원을 차단하고 주공부대인 제19병단의 동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주공부대에 앞서 제9병단을 미 제9군단 지역으로 투입하여 먼저 공세의 포문을 열었다. 이때 중공군은 미 제1해병사단에 비해 전력이 약하고 자신들의 장점인 산악기동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국군 제6사단 지역을 집중적으로 공격하였다.
1) 사창리 전투
국군 제6사단은 4월 21일 석룡산-화악산에서 와이오밍선의 육단리와 복주산(1057)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여 ㅈ좌전방 제19연대가 상해봉(1019), 우전방 제2연대가 백적산(883)을 점령해 중간목표를 확보하였다.
중공군이 4월 22일 17시경 방화동과 실내리 일대에 포격을 집중한 후 제20군 예하 제60사단과 제40군 예하 제120사단의 병력을 국군 제6사단 정면과 연대간의 공간으로 침투시켜 상해봉과 두류산으로 진출하였다.
사단은 이미 후방으로 진출한 중공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되고 통신마저 두절되면서 예하부대의 통제도 불가능한 혼란상태에 놓였다.이때 좌전방 제19연대는 적 중에 고립되었고, 우전방 제2연대와 예비인 제7연대는 차량과 장비를 포기하고 중공군의 포위망을 돌파하여 분산철수하였다.
사단이 주저항선에서 철수하게 되자 사단을 화력증원하던 미 포병부대들도 동쪽 북한강 지역으로 이동을 서둘렀다. 이에 따라 사창리에는 보병과 포병들이 뒤섞이며 큰 혼잡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때 중공군의 기습이 가해짐에 따라 미 포ㅓ병부대들은 다수의 화기를 유기한 채 철수해야 했다.
한편 국군 제6사단의 우인접 미 제1해병사단도 제5,7해병연대와 배속된 국군 제1해병연대가 화천저수지 북쪽의 와이오밍선을 목표로 공격을 개시하다가, 4월 22일 중공군의 역습을 받는다. 미 제1해병사단은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40군 주력의 정면공격과 국군 제6사단의 철수로 말미암아 노출된 좌측방을 통한 중공군의 포위공격으로 심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사단은 화력으로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면서 북한강 동쪽으로 철수하면서 춘천을 중심으로 한 캔사스선을 점령하였다.
4월 23일 날이 밝아 중공군의 공격이 둔화되자 미 제9군단장은 국군 제6사단에 신속히 재편성하여 캔사스선 방어짖지를 점령, 적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사단은 이날 오후 제19연대를 국망봉(1168)-석룡산에, 제2연대를 화악산-메봉일대에 각각 배치하였으나 적의 야간 공격을 받아 작전의 주도권을 상실한 채 가평 방면으로 철수한다.
국군 제6사단은 영연방 제27여단의 엄호하에 철수하여 24일 아침 가평 남서쪽 불기산(602)일대를 점령한다. 이때 제6사단은 소총 2,263정, 자동화기 168정, 2.36" 로켓포 66문, 대전차포 2문, 박격포 42문, 곡사포 13문 그리고 차량 87대의 손실을 입었다. 사단을 화력지원한 미 포병부대들도 105밀리 곡사포 15문을 비롯하여 4.2" 박격포 13문과 242대의 무전기 그리고 차량 73대의 손실을 입는다.
2) 가평전투
가평에서는 이곳을 방어하던 영 제27여단과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군 제9병단 예하 118사단 간에 결전이 전개되었다. 영 제27여단은 중공군의 4월러 공세가 있기전 4월 19일에 사창리 서쪽의 방어지역을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에 인계하고 군단예비로 가평에 집결한다. 이때 한국 파견 근무가 만료된 아길 대대의 홍콩 원대 복귀 문제로 여단의 분위기가 어수선하였다.
23일, 미 제9군단장은 저녁까지도 사창일대서 철수한 국군 제6사단의 캔사스선(석룡산-화악산) 점령이 불투명하자 영 제27여단 주력으로 하여금 제6사단 후방의 가평천 계곡에 방어진지를 편성하여 춘천-가평 도로를 목표로 진출 중인 중공군을 차단하도록 하였다.
이명령에 따라 영 제27여단은 캐나다 대대를 내촌 부근 677고지에, 호주 대대를 죽둔리의 504고지 일대에 배치하여 북동쪽에사 가평 계곡으로 접근하는 중공군을 저지하는 한편, 아길 대대를 에비로 가평 부근에 집결보유하였다 . 그리고 여단은 23일 중공군의 야간공격으로 국군 제6사단이 캔사스선에서 철수하자 사창리 부그에서 이를 지원하던 뉴질랜드 제16포병연대와 경게부대인 미들섹스 대대를 철수시켜 가평 북쪽 가평천변에 배치하였다.
국군 제6사단의 철수가 완료된 4월 23일 22시경 국군 제6사단을 추격한 중공ㄹ군 제118삳란의 선두 연대가 호주 대대의 배치상황을 모르는 채 신속히 가평을 점령할 목적으로 조애대형으로 접근하다 기습을 받아 물러났다.
이후 중공군은 24일 01시경 유엔군의 포위공격을 기도한다. 그리고 낡이 밝아 아군의 항공폭격과 포병사격으로 중공군은 공격을 중지하고 다수의 시체를 유기한 채 철수하기 시작했다. 영연방 부대들은 즉시 추격작전으로 40여 명의 포르를 획득한다.
4월 24일 22시경 중공군은 박격포와 자동화기의 지원하에 2개 제대로 나뉘어 677고지의 캐나다 대대를 공격하였다. 이에 제16포병대대와 캐나다 대대가 화력을 집중하여 25일 02시경 유인작전에 말려 큰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이로써 영연방 제27여단은 3일간의 혈전을 종료하고 4월 25일 밤 미 제5해병연대에 작전지역을 인게한 다음 양평으로 이동해 군단 에비가 되었다. 이후 신임 단장 테일러 준장이 취임하면서 부대명도 영연방 제28여단으로 개칭하였다.
다. 중동부 전선으로 달려간다
1) 소양강 부근 전투]
소양강 부근 전투('51.4.22~25)
펀치볼 서화리 간성
북5군단 매봉산
북45사 대암산 북12사 북6사
873 소양강
국5-35-3대
가아리 명당산
국35연 봉화산
국7-5연 한계리 안산
국3-22연
원통 미10=국3사 장수대
양구 미 제1해-5해병연 915 940 양양
1해병=국5사 639 한양동 1226 가리봉 국3-23연
국5-27연 국3-18연
인제 덕산리
개운리 국5-36연 한석산 국3-22연
관대리 검발리 매봉
국7- 3연 검우석
남전리
신남리 현리
미 제1군단과 제9군단이 캔사스선에서 철의 삼각지대로 공격을 개시할 무렵 중동부와 동부전선의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1, 제3군단은 화천저수지-남전리-한계령을 연하는 캔사스선에 도착하여 전선을 정비하고 있었다.
미 제8군사령관은 4월 20일 중부전선에 미 제1군단, 제9군단이 와이오밍선 공격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중동부와 동부전선 부대들에게 국군 제1군단과 제3군단의 주보급로인 홍천-인제-간성 간의 도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이 도로의 북족 10~22km 에 위치한 알라바마선(양구-대암산-가전리-사천리-고성 남쪽)을 목표로 24일부터 공격작전을 개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과 국군 제3군단에 배속된 제3, 제7사단이 공격준비에 주력하는 동안, 공교롭게도 공산군측 4월 공세의 조공인 북한군 제5군단이 양구-원통 선에서 22일 선제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중부전선에 이어 동부전선에서도 국군 제3사단과 제5사단이 북한군과 전투를 실시하게 된다.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사단은 4월 19일 소양강을 도하하여, 좌전방 제35연대가 가아리, 우전방 제36연대가 원통 북방 봉화산으로 진출하여 인제를 확보하게 된다. 이 무렵 전투지경선이 조정되어 인제 북쪽의 제36연대 지역을 제3군단 좌전방에 투입된 제7사단 제5연대에 인계하고, 양구 동쪽의 좌인접 미 제7사단 제32연대지역을 인수하게 된다.
제35연대는 22일 자정부터 정면돌파를 기도하는 북한군의 집중공격을 받았으나, 화력전과 백병전으로 돌파를 저지하엿다. 물러난 북한군은 일부 병력을 연대와 우인접 제7사닩 제5연대의 전투지경선 부근에 생긴 배치 공간으로 침투시켜 동측ㅇ레서 연대의 퇴를 차단하려 기도하였다. 이때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우측의 제3대대가 원통리로 철수하면서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 제35연대 주력도 주저항선에서 물러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4월 23일 중서부전선에 이어 중동부전선에서도 상황이 불리해지자 미 제8군사령관은 24일로 알라바마선 공격을 취소하고 적의 공세를 저지하도록 명령한다. 4월 24일 국군 제5사단은 인제를 피탈 당하게 된다. 이에 미 제10군단장은 25일 인제 탈환을 명령하여 제36연대 제2대대와 미 제7사단에서 배속된 전차 5대로 보전 협동작전을 개시하여 인제를 재탈환한다.
한편 미 제10군단의 우인접 부대인 국군 제3군단은 4월 22일 제3사단이 한계리-가리봉선에, 군단 예비로 후방지역 공비토벌작전 중인 제7사단이 알라바마선을 공격하기 위해 4월 22일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작전 중인 국군 제5사단의 원통지역을 인수한다.
그러나 알라바마선 공격계획 취소로, 23일 국군 제7사단의 제3.5연대가 제5사단에, 제8연대가 제3사단에 배속된다.
북한군 제6사단이 4월 22일 공격을 개시하여, 제3-22연대와 제5사단에 배속된 국군 제7-5연대 사이의 전투지경선으로 공격을 집중하여 국군 제3사단 제22연대는 한석산을 피탈당하고 10km를 후퇴하여 매봉일대로 물러나 다시 한석산을 탈환한다. 그러다 다시 한석산을 공격하여 재탈환하는데 성공한다. 북한군 제6사단과 국군 제3사단은 한석산을 확보하기 위하여 4일동안 한치의 양보도 없이 고지쟁탈전을 전개하엿으며 결국 국군 제3사단이 이 고지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다 다시 매봉으로 물러났다.
라. 서울 고수 방어작전
공산군은 주공으로 서부전선에 투입된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임진강변에서 국군 제1사단과 영29여단의 강력한 저항과 항공폭격 및 포병사격으로 막대한 인명 피해를 입었음에도불구하고 조금도 추격의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서울을 목전에 둔 4월 26일부터 공산군측이 과감하게 주간공격으로 전환하여 쌍방은 서울 외곾에서 이번 4월 공세의 분수령이 될 치열한 일전을 펴치게 된다.
1) 미 제1군단의 골든선 점령
중공군의 4월 공세가 개시되기전 미 제8군의 작전개념은 공산군의 공격으로 철수를 강요받게 되면 성동리-노고산-덕정-포천--가평을 연하는 델타선과 서울 외곾의 수색-북한산-덕소를 연하는 골든선, 그리고 한강-양평-횡성--양양을 연하는 네바다선으로 축차적인 철수를 하면서 공산군에게 최대의 출혈을 강요한 후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여 다시 캔사스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골든선을 점령하면 다른 군단들도 기 계획된 방침에 따라 네바다선으로 축차적인 철수를 해야하며, 상황에 따라서는 서울도 포기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사령관은 26일 미 제1군단이 골든선으로 철수할 직전에 이 작전개념을 수정하여 골든선 동쪽에서 연결되는 네바다선보다 30~40km북쪽의 용문산-홍천-한계령-속초를 연하는 새로운 방어선인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군단간 전투지경선을 일부 조장한 후 골든-노네임선을 방어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와 같은 작전방침에 따라 미 제8군은 미 제1군단이 서울 방어에 주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동안 우측방을 방호하던 미 제24사단을 미 제9군단으로 배속전환하여 제1군단의 방어정면을 축소 조정하고, 군 예비인 미 제1기병사단을 미 제1군단에 배속하여 강력한 예비대를 보유할 수 있게 하였다.
미 제1군단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식 파상공세에 밀려 4월 25일 성동리-덕정-포천을 연하는 델타선을 점령하였다. 이 델타선은 강력한 저항이나 지속적인 점려을 고려하지 않는 선으로, 다만 군단이 서울 외곾의 골든선으로 철수하는괴정에 부대의 철수를 조정 통제하고 ,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여 전진을 지연시킴으로서 군단의 방어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최대한ㄴ 획득하기 위한 톤제선이었다.
4월 28일 새벽에 미 제1군단자은 4월 공세가 개시된 이후 단 하루도 빠드리지 않고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던 공산군이 전날 밤만은 야간공격을 중지하자 이를 공산군이 대규모 공세를 준비하는 징후라 판단하고 예하 사단에 골든선을 점령하여 방어줁비를 조속히 완료하도록 명령하였다.
이에 따라 좌전방 국군 제1사단이 한강하구-구파발에, 중앙의 미 제1기병사단이 구파발-쌍문동에, 우전방 미 제25사단이 쌍문동-덕소간의 골든선을 점령하였다.
2) 화전리 전투
국군 제1사단은 4월 22일 파평산 일대에서 격전을 치른 후 4워 25일 델타서느로 철수하면서 북한군 제1군단의 제8사단과 금촌. 동거리 일대에서 치열한 지연전을 전개하여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군의 명령으로 골든선으로 철수하게 된다. 사단은 29일 제11연대는 화전리 일대 제15연대는 불광동 일대를 점령하였다.
이때 사단이 점령한 진지는 미 제8군의 예비계획에 따라 4월 초순에 은ㅁㄹ히 사단 작전요원들의 감독하에 지역 주민을 동원하여 유개호 진지롸 교통호르륵축하여 방어시설이 완벽하였다
문산-서울 축선으로 진출한 북한군 제8사단은 일산부근에서 재편성 한 후 28일 새벽에 1개 연대 규모로 행주나루터로 은밀히 침투하여 김포비행장 방면으로 도하를 기도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제1사단 수색애에 발견되어, 2시간 동안 인천 외하에 대지 중이던 순양함 툴레도호의 8" 함포사격을 받고 다수의 시체를유기한 채 북으로 철수하였다. 하지만 북한군은 야간에 다시 4시간 동안 10여차례의 돌격을 감행하게 되는데 국군 제1-11연대가 백병전으로 이들의 공격을 물리쳤으며 새벽에 900여 구의 시신을 유기한 채로 철수한다.
한편 국1-11연대가 북한군 제8사단과 혈전을 하고 있을 무렵, 중공군 제64군의 일부가 북한군을지원하기 위해 우전방 제15연대 지역으로 양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연대는 초기에 앵무봉을 피탈당했으나 30일 사단 에비인 제12연대 1대대와 미 전차중대를 투입하여 중공군을 격퇴하였다.
이 무렵 미 제1군단 제1기병사단은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에서 중공군을 격퇴하고, 미 제25사단 역시 퇴계원 부근에서 주저항선 돌파를 기도하던 중공군 제65군을 상대로 포병사격과 항공 폭격으로 1000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리며 방어선을고수하였다. 이로서 중공군 제19병단이 마지막 승부수로 시도한 골든선 공격은 실패로 끝나고, 중공군 4월 공세는 막을 내리게 된다.
마. 정찰기지 확보 작전
중공군의 4월 공세를 격퇴한 국군과 유엔군은4월 30일을 기해 골든-노네임선에서 부대 재배치와 방어진지 보강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 5월 1일 을 기준으로 한 포로들의 진술과 정보판단 결과 공산군측이 4월 공세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오 아직도 전체 병력규모가 73만 9천여 명(중공군 54만 2천, 북한군 19만 7천)에 달하고, 만주지역에 이들을 증원할 수 있는 병력이 75만여 명이 주둔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에 비해 유엔군은 병력 50만 3천 명(유엔군 26만 9천, 국군 23만 4천)으로 숫적인 열세를 보이고 있었다. 따라서 공산군측이 병력을 증원받아 공격을 재개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이에 유엔군측 각 군단의 전방사단들은 주저항선 전방에 정찰기지를 설치하여 방어종심을 증가시킴은 물론, 적저을 탐지하기 위하여 정찰대를 투입, 화력의 엄호하에 적진 깊숙이 정찰작전을 펼쳤다. 이때 공산군은 전 전선에서 아군과 접적을 회피하는 등 활동이 소극적이었으나 유일하게 국군 제1사단 전방의 문산-서울 축선에는 북한군 제8사단이 투입하여 정찰기지를 확보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5월 7일 오후부터 강력한 항공폭격과 보전포 협동작전으로 5시간 동안 혈전을 벌여 북한군을 고봉산에서 격퇴하였다. 그리고 5월 8일 공격을 재개하여 최종 목표인 봉일천 동쪽의 명봉산(286)과 188고지를 확보하고 작전을 종료할 무렵 미 제1군단장은 북한군을 계속하여 공격하여 전과를 확대하고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라고 명령하였다.
이에 국군 제1사단은 5월 9일 문산천 주변의 개활지를 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공격의 발판이 되는 고지군을 확보할 목적으로 제11연대가 내화산-동거리로 우회기동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우전방 제15연대가 일련의 고지군을 따라 동거리로 공격하였다. 이후 사단은 5월 10일 오후에 제15연대를 문산-서울 도로변의 명봉산-대자동-관산리 일대의 정찰기지에 배치하고, 사단 주력은 다시 미 제3사단으로부터 주저항선을 인수한 후 골든선의 방어태세를 보강하였다
바. 주보급로 확보작전
미 제8군사령관은 중서부전선의 골든-노네임선 방어진지가 강화되고 정찰기지 설치가 완료되자, 유엔군 전선조정으로 노네임선으로 철수함으로써 공산군 수중에 넘어간 중동부전선의 중요 전술도로인 홍천-인제-간성을 연결하는 도로를 탈환하기로 결심하였다.
제8군사령관은 특히 국군 제3군단의 보급지원 문제를 해결하고, 차후 화천저수지 동족에서 공세작전으로 전환시 유리한 기동로를 확보할 목적으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국군 제5, 제7사단과 국군 제3군단에 예속된 제3, 제9사단 그리고 국군 제1군단에 에속된 수도, 제11사단을 투입하여 홍천-인제-간성간 도로의 10~25km 북쪽 가리산-신월리-915고지-1037고지-대진리를 연하는 미주리선 확보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국군 6개 사단(제3.5.7.9.11.수도)은 1951년 5월 7일 미주리선을 콕표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제9사단이 한석산을, 제5.7사단은 좌측에서 소양강 남쪽의 부평리-청구리 일대를, 수도사단은 설악산을 목표로 각각 공격을 실시하였다.
1) 매봉-한석산 전투
여기서 국군 제9사단이 국군 제1군단의 예비로 강릉에서 재정비 중에 4월 25일부로 제3군단에 배속되고, 27일에는 이성가 준장의 후임으로 최석 준장이 사단장에 부임한다. 사단은 5월 2일 제7사단 제8연대지역을 인수하여 제3군단의 좌측방 사단으로 현리 북쪽 7km의 산악지대를 방어하던 중 7일 인제 북쪽의 미주리선을 공격하게 된다.
여기서 제3사단 제22연대가 고지쟁탈전을 했던 한석산(1119)과 매봉(1066)을 탈한하기 위해 제30연대 제3대대가 5월 7일 공격을 개시하여 3일간의 쟁탈전에서 최종 승리하면서 390여 명의 전사상자를 낸 반면 북한군 890여 명을 사살하여 전 대대원이 일계급 특진하게 된다. 10일에는 예비인 제1대대를 투입하여 한석산도 탈환하였다.
2) 설악산 부근 전투
한계령-오색리-관모봉을 연하는 선에 주저항선을 구축하고 있던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수도, 제11사)은 5월 7일 미주리선을 향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때 군단 정면에는 북한군 제6사단이 가리봉-대승령-노동을 연하는 선에 강력한 거점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수도사단의 공격은 첫날부터 험준한 지형과 산악 특유의 짙은 안개로 지연되어 8일 제1연대가 가리봉(1519)을 , 기갑연대가 노동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5월 10일 아침에 2개 중대의 북한군이 가리봉을 재탈환하기 위하여 기습공격을 해 옴에 따라 치열한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다시 전개 되었다. 이후 사단은 협조된 공격을 개시하여 좌전방 제1연대가 안산(1430)을 , 우전방 제1기갑연대가 노동을 점령하여공격의 발판을 확보하였다.
한편 수도사단의 우인접 부대로 공격을 실시한 제11사단의 제20연대는 1,000미터 이상의 험준한 설악산 준령을 따라 북한군을 추격하였다. 5월 11일 제20연대 제5중대는 저항령 부근에서 북한군과 무려 31시간 격전을 펼쳤으며, 989고지로 진출하여 좌인접에서 진출 중인 제1기갑연대를 엄호하였다.
5월 11일 미 제8군사령관은 공산군측이 수일 내에 공격을 재개한다는 정보가 입수됨에 따라 중서부전선 부대의 공격계획을 취소하고 동부전선에서 구군의 미주리선 공격을 중지시켰다.
이로써 국군과 유엔군은 5월 초까지 구파발-마석우리-용문산-설악산-대포리를 잇는 골든-노네임선에서 중공군의 4월 공세를 저지한 후 정찰대가 봉일천-의정부-포천-가평--춘천-인제-속초선까지 진출하여 전방지역에 대한 정찰활동을 실시하게 되었다.
4월 공세에서 중공군은 유엔군의 항공ㄹ 폭격과 포병화력을 활용한ㅇ 조직적인 지연직전으로 인해 그들의 작전목표였던 유엔군 격멸은 고사하고 오히려 서욹 북방에서만 7만 5천~8만여 명이 사살되고 5만여 명이 부상당하는 등 심대한 손실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에 따라 중공인민군지원군사령관 팽덕회는 4월 공세의 실패를 자인하고 공세 결과를 모택동에게 보고하면서 공세의 조기종결을 결심했다.
1951년 4~5월에 접어들어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춘계공세를 저지하기 위하여 모든 전력을 경주하고 있을 대 후방에서는 이 보다 앞서 발생한 국민방위군사건과 거창사건의 진상 조사, 처리문제로 정국의 갈등이 심화되던 중, 5월 7일 신성모 국방장관이 해임되고 그 후임에 이기붕 장관이 임명되어 군의 기강확립과 전력증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중공군 5월 공세와 유엔군의 방어
1. 개 요
중공군의 4월 공세가 1주일만에 중단되자,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골든-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파악을 위해 정찰기지 확보작전을 통해 적정 파악을 하도록 위력수색을 강화하여 5월 9일에는 김포반도-봉일천-의정부-가평-춘천을 확보하는데 이어 동부전선의 인제와 속초까지 탈환함으로써 4월 공세 당시 상실한 지역의 절반을 회복하였다.
전세가 호전되자 메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은 반격작전을 계획하여, 5월 12일 기해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 그리고 제10군단이 문산-춘선 선을 점령한 후 북동쪽의 인제를 공격하면, 국군 제3군단과 제1군단이 정면 공격을 계속해 38도선 이북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 제8군 사령관 밴플리트 중장은 5월 10일 이후 전 전선에 걸쳐 공산군의 활동이 현저히 강화되고 새로운 공세 징후들이 포착되자 반격계획을 즉히 취소하는 한편, 예하부대에 공산군의 공세에 대응한 조치를 강구하도록 지시하였다.
한편 4월 공세에 실패한 공산군은 공세 실패에 다른 불리한 전황을 조기에 만회하고 작전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학기 위한 방책의 일환으로 5월 공세(제5차 2단계 공세)를 계획한다. 이러한 공산군 측의 조치는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 사단들을 격멸하여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조.중 연합사령관 팽덕회의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라 공산군은 중동부지역에 배치된 국군 6개 사단을 섬멸한다는 목표를 설정한 다음 주공을 중서부에서 중동부로 전환하고, 중공군 3개 병단과 북한군 4개 군단 등 총 41개 사단을 집중 투입하는 공세를 계획한다.
이때 공산군측의 세부적인 부대 운용은 중공군 제9병단과 제3병단 그리고 북한군 3개 군단을ㄹ 주력ㅂ대로 중동부 지역의 국군 저염에 집중 배치하여 운용하고, 중공군 제19병단을 서부전선에서 겭제부대로 운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중동부지역에서 주력부대 운용은 중공군 제9병단과 북한군 제2군단 및 제5군단에 주공 임무를, 중공군 제3병단과 북한군 제3군단에 조공 임무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유엔군과 공산군 측의 대치 상황과 계획을 고려해 볼 때, 공산군측이 의도한 대로 중동부지역에 배칟된 국군 6개 사단이 붕괴될 경우 이 지역의 전선은 완전히 개방될 수밖에 없었고, 이는 유엔군 측이 중서부전선의 주요부대들이 고립되는 최악의 위기상황에 봉착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결과는 작전의 성공을 이용해 유리한 조건에서의 휴전회담에 임하려는 공산군의 전략에 결정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들의 4월 공세 공격중단은 일시적 어려움 때문이며 곧 서울점령을 위한 대규모 공격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미 제8군의 중앙부를 보강하는 부대배치를 실시한다.
서울 외곾을 방어 중이던 미 제1군단은 문산 축선에 국군 제1사단, 의정부 축선에 미 제1기병사단과 미 제25사단을 배치하고 영국군 제29여단을 예비로 하였다.
북한강 계곡 통로를 방어중인 미 제9군단은 덕소-예봉산-용문산-금학산을 연하는 선에 서에서 동으로 영 제28여단-미 제24사단-국군 제2사단-국군 제6사단-미 제7사단을차례로 배치하고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예비로 확보하였다.
미 제10군단은 춘천-홍천 축선에 미 제1해병사단과 국군 제2사단, 소양강 남쪽에 국군 제5사단과 제7사단을 배치하였다.
동부전선의 국군 제3군단은 한석산-가리봉 선에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 국군 제1군단은 설악산-대포리 선에 수도사단과 제11사다을 배치하였다.
반면 공산군은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 목적보다는 중동부 전선에서 국군을 격멸한 후에 미군을 섬멸한다는 전략에 따라 주공을 중동부로 전환하고, 중공군 3개 병단 중에 제19병단은 서부에서 유엔군을 견제하고, 제9병단과 제13병단을 중동부 전선으로 돌리고, 북한군 2, 3, 5군단을 투입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51. 5. 16일에 공세를 단행한 공산군은 현리에서 국군 제3군단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일부 부대가 하진부리까지 진출하였으나 그들이 계획했던 아군의 3중 포위에 실패하고 6월 초에는 공세 종말에 다다라 북으로 퇴각하게 된다. 이후 유엔군의 재반격을로 전선은 전전상태로 회복되고 , 양측은 휴전협상에 돌입한 상태에서 지리한 진지전만을 계속하게 되었다.
2. 피아의 상황과 전투 편성
가. 공산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중공군은 제5차 1단계인 4월 공세를 통해 38도선 돌파에 성공하고 서울에 근접하여 전장 주도권을 회복하였으나, 유엔군 섬멸이라는 최초의 계획은 달성하는데 실패하였다.
그래서 조 .중 연합군 사령관 팽덕회는 국군에 대한 집중 공격으로 미군을 고립, 분산시킨 후에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유리한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를 설정하였다.
이러한 배경에는 그동안의 5차에 걸친 대규모 공세에서 병력이 우세하더라도 화력과 장비가 열세하면 승리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서울 점령"이라는 정치적이고 전략적인 목표보다는 "중. 동부 산악지역에서 국군 사단ㅇ들을 격멸한 후 고립된 미군을 섬멸할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한다는 목표로 선회하였다.
공산군은 이를 위해 중서부 전선에 대한 양공작전으로 유엔군이 동부로 이동하는 것을 견제하고 중동부 전선에 대한 차단 작전을 병행함으로써 미 제10군단의 동측 연결을 저지하는 방책을 채택하였다.
이들의 5월 공세 계획은 우선 현리지역의 국군 4개 사단(제3,5,7,9사단)을 양익 포위로 섬멸한다는 기본 방침에 따라 제9병단이 주공으로 좌익(양구-인제)에서 상남리-속사리, 한계-풍암리로 우회하고, 인민군 제2, 5군단이 우익(인제-한계령)으로 현리 동쪽과 속사리 방향으로 기동하여 다중 양익 포위망을 형성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이 작전을 지원하기 위해서 서부의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이 자신들이 주공인양 위장하고 기만작전을 펼치며, 예비인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동해안의 국군 제1군단이 현리지역으로 증원하지 못하도록 할 계획이었다.
또 춘천 동쪽의 중공 제3병단은 주공의 일부로써 미 제10군단을 고착 견제하여 현리지역으로 증원을 차단하도록하고 이 계획에 의거 5월 초에 북한군 제1군단이 서울 서쪽에서, 중공군 제19병단으로 서울 동쪽에서 위장 도하 작전을 , 그리고 예비인 제39군을 춘천-홍천 축선에 공격을 가하여 공격방향을 기만하였다. 이를 위해 5월 9일부터 은밀히 동쪽으로 기동하여 공격준비를 완료하였다.
중공군 5월 공세 작전계획 상황도
북 제2군단
사방거리 대성마을 해안 서화 진부령
제9병단 사령부
당거리 원당리
북 제3군단 북 제5군단
화천 제3병단 사령부 용대리
원통 설악산 국 제11사 수도사
중공 제20군 국 제3사
중공 제27군 국 제9사 한계령 양양
중공 제15군 중공 제12군 인제
춘천 국 제7사 신남리 서림리
중공 제60군 국 제5사 현리
자은리
미 제2사
철정리 광원리
창촌리
홍천 풍암리 계방산
미 제7사단 미 제1해병사
양덕원리 창동리 속사리 하진부리
(1) 중공군 제9병단(제20, 27, 12군)은 포병 제25, 26, 11, 28연대를 배속받아 주공을 담당한다.
제12군은 국군 제5사단을 섬멸하고 북 제2군단과 협격하여 퇴로를 차단한다
제27군은 침교-이현 지역의 요지를 점령한 후 국 제7사단을 , 일부는 국 제5사단을 섬멸한다
제20군은 북 제5군단과 협동으로 국 제9사와 제3사를 섬멸하고 일부는 국 제7사를 섬멸한다.
(2) 북한군 제5군단은 군량전, 귀둔리, 오작동에서 국군 제3사단 측면을 돌파한 후 일부 부대가 진동리-왕성곡으로 진격하여 중공군 제20군과 협격으로 현리의 국군을 섬멸한다.
(3) 북한군 제2군단은 마산리와 그 서쪽의 국군 수도사단과 제3사단 전투지경선으로 돌파한 후 1개 사단이 속사리로 진출하여 중공군 제12군과 협격으로 하진부리 국군을 포위 섬멸한다.
(4) 북한군 제3군단은 제2군단을 후속하여 한계령-대암산-유리봉-서림리를 점령하여 현리의 국군이 동으로 도주하는 것을 차단하고 동쪽의 부대가 서쪽으로 증원하는 것을 차단한다
(5) 조공인 중공군 제3병단은 포병 제29, 30연대 각 1개 대대와 대전차포병 제402연대를 배속받아 서부전선의 미군과 동부전선의 국군 부대를 분할하고, 동부 전선의 작전을 보장한다
제15군은 미 제1해병사단과 미 제2사단의 연결을 차단한다. 군 주력을 두 방향으로 나누어 한쪽은 평촌리-사오랑치를 연하는 대거리로, 한 쪽은 물노리-갈곡에서 삼년동을 향해 진격하여 미 제2사단을 분할한 후 섬멸한다.
제60군은 추곡리-대룡산 지역에서 미 제10군단을 견제하면서 미 제1해병사단의 공격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증원을 차단한다.
제39군은 소양강 남쪽의 수구동-내평리-대동리를 연하는 일선 진지를 견고하게 방아하고 중공군 공격부대들의 진출을 보장한 후 제3병단의 예비대가 된다.
(6) 중공군 제19병단과 북한군 제1군단은 고양-가평 간에 위치한 수락산과 마석우리, 청평천 등에 각각 2~3개의 목표물을 선정하고 섬멸하며 서부전선의 미군을 견제하면서 동부전선의 승리를 위한 유리한 조건을 조성한다. 이때 제19병단 주력은 청평천 서북에서 한강을 도하 전과 확대를 준비한다.
제63군은 가평 서북방에서 국군 제6사단의 2~4개 대대를 섬멸하고 청평천-사기막에서 도강하여 영평리-원주 방면으로 전과 확대를 한다.
제64군은 포천 동북방 기산 일대에 집결해 마석우리 일대로 병력을 집중하여 미 제24사단 예하의 2~4개 대대를 격멸하고 도하하여 양평으로 진격한다.
제65군은 포천에 집결하여 1개 사단은 정면의 국군과 유엔군을 견제하고 주력은 내각리로 진출해 국군과 유엔군을 섬멸하며 양수리 일대에서 한강을 건너 주력은 수원으로, 다른 1개 사단은 인천으로 진격한다.
북한군 제1군단은 동진하여 중공군 제65군과 연결하고 국군 제1사단 1~3개 대대를 섬멸하고 서울을 진격하여 점령하고 경비를 담당한다.
나. 아군측 상황과 전투 편성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5월 이전 공산군의 배치상황을 근거로 공산군의 차기 공세는 서부 또는 중부 축선에 주력이 집중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동부 전선은 도로망이 협소하고 산악지형으로 보급문제가 크기 때문에 중공군은 수도 서울 공략에 가용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방어에 유리한 동부 전선은 국군을 배치하더라도 북한군을 충분히 방어 하리라 판단하여 미 제7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을 5월 1일 부로 미 제10군단 지역에서 미 제9군단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 공간에는 국군 제7사단을, 국군 제7사단 자리에는 국군 제5사단을 배치하였다.
또한 미 제1해병사단의 작전통제권을 미 제10군단장에게 주고 미 제1군단과 미 제9군단의 전투지경선을 우측으로 이동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화천지역에서의 차량 통행이 급증하고 소양강 상에 교량을 가설하며 대규모 병력이 동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포착되었다. 여기에 생포된 포로들이 중공군 주력이 미 제10군단 정면을 공격할 것이라고 진술하였다. 이런 정황으로 중공군 주력이 중동부 전선에 집중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작전계획이나 전선을 조정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고, 만약에 중공군이 방어준비가 미흡한 중동부 지역에 집중된다고 사전에 알려지면 전선에서 대량 이탈사고가 날 수도 있다는 판단에 기존방침을 준수하고 대신 미 제1군단의 예비인 미 제3사단을 제8군 예비로 운용토록 하는 최소한의 조치만 하였다.
전투편성은 서부전선에는 미 제1군단이 미 제1기병사단, 미 제25사단(필리핀 제103ㅐ3ㅐ, 터어키여단), 영 제29여단(벨지움 대대, 독립 군군 제5해병대대), 국군 제1사단이 골든선에, 미 제9군단은 미 제7사단, 미 제24사단, 영 제28여단,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 국군 제2사단, 국군 제6사단이 노네임선 전방 가평-춘천선에, 미 제10군단은 미 제2사단(프랑스 대대, 네덜란드 대대), 미 제1해병사단(국군 제1해병연대), 국군 제5사단, 국군 제7사단으로 춘천 동쪽 대룡산-소양강 남쪽 남전리 선에 배치되었다.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내륙 산악지역의 방어를 담당한 국군 제3군단은 국군 제3사단과 제9사단으로 남전리-용대리 간을 방어하고 동해안 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1군단은 수도사단과 국군 제11사단으로 용대리-설악산을 방어하였다.
육군본부 예비병력은 공비 토벌작전 주인 제8사단과 태백산전투사령부가 있었고 미 제8군 예비는 미 제3사단과 캐나다 제25여단이 있었다.
3. 전투 경과
가. 중. 동부 전선의 전운
1951. 4. 22일부터 29일까지 지속된 중공군 4월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한 미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중장은 '51. 4. 30일을 기해 노네임선을 요새화하는 동시에 적정 파악을 위해 위력수색을 지시한다.
이에 따라 위려수색을 하면서 5월 9일 경에 김포반도-의정부-춘천-인제-속초를 연하는 선까지 탈환하였다. 이후 미 제8군은 본격적인 반격계획을 수립했으나 공산군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어 공산군의 공격에 대비하게 된다.
한편 동부전선의 국군 및 유엔군은 반격계획에 따라 5월 7일 인제-간성을 잇는 미조리선으로 진격했으며 이 기간에 공산군의 공세 징후가 포착되었다. 이에 따라 진격을 멈추고 방어작전으로 5월 13일 기하여 소양강과 설악산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마련하고 방어작전으로 전환했다.
나. 중공군의 중부전선 집중 돌파
(1) 국군 제7사단 지역(음양리)
인제
군축령
소양강
군축교 제9-28연대
관대리
남전교 내린천
하수내리 음양리
제7-5연대 남전리 검우석
삼팔교
구만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현리
신풍리 소치리
제5사 정자리 용포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비득재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내촌강
'51.5. 16일 16:30분에 중공군의 공격준비 사격이 시작되었다. 국군 제7사단은 다수의 병력과 시설이 피해를 입고 통신선이 절단되어 지휘통제 능력을 상실했다. 2시간만인 20시경 방어선이 돌파되었지만 이 사실을 인접 부대나 제3군단에 알리지 못했다.
심지어 미 제10군단조차도 이 사실을 알리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국군 제7사단은 소양강과 가리산 등 천연적인 잇점을 살려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지만 중공군이 돌파를 강행하자 그들이 접근하기도 전에 진지를 이탈하였다.
중공군 제20군은 구만리 일대에서 소양강을 도하하여 공격을 개시하여 2개 사단이 제8연대 지역으로 집중 돌파를 감행함으로서 쉽게 무너지고 24시경 부평리 일대를 장악했다.
중공군은 예하 제60사단에게 종심 기동하여 오마치 고개를 차단하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이 임무를 부여받은 제178연대 제2대대는 빠른 속도로 기동했고 그 첨병중대가 오마치 고개 일대에 도달했다. 그 예하 제58사단 제173연대가 남전리 일대로 소양강을 도하하여 5월 18일 -1:00시경 오마치 고개와 용포일대를 완전히 장악했다.
한편 미 제8군은 5월 17일 22시부로 동부지역 국군 사단들에게 와코선(778-한계-장평-1009)로 연결되는 새로운 방어선으로 철수를 명령했지만 이미 지휘통제가 불가능한 상태에서 각자 도생의 철수를 거듭해야 했다.
구만리 일대의 국7-5연대는 5월 16일 16시 30분에 중공군의 공격을 받았다. 중공군 제27군 예하 제81사단과 제79사단이 23시경 구만리 창막동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여 국7-5연대는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소부대 단위로 철수를 하게 된다.
한편 국7-8연대는 중공군 제27군 제81사단과 제20군 제60사단이 신풍리는 물론 도수암까지 진격하여 제대로 축차방어 한번 못하고 퇴각해야 했다. 특히 제81사단 첨병 연대인 제242연대가 방내리까지 진출하여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유일한 보급로가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중공군이 18일 24시경에 갑둔리, 소치리, 김부리 일대까지 점령하여 국7-8연대는 현리로 퇴각하는 상황에서 중공군은 상남ㄴ리 일대에서 국 제7사단과 제3군단에 대한 포위 섬멸작전을 벌이게 된다.
국군 제7사단장은 5월 17일 사단 예비인 제3연대를 가마봉-대암산을 연하는선에 점령토록 하여 퇴각하는 부대를 엄호토록 하였으나 준비된 진지도 없었고 적이 먼저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등의 상황에서 가마봉, 대암산 등에서 일부만 점령하다 적의 압력에 굴복하여 상남리 지역으로 후퇴하게 된다. 철수과정에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1개 대대로 오마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사단은 제3, 제5연대 일부로 저지진지를 형성하려 했으나 5월 18일 02시경 풍암리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 시각, 미 제10군단의 상황은 우측의 제5사단과 제7사단이 돌파되어 요충지인 오마치 고개 일대가 중공군이 점령한 가운데 좌측의 미 제2사단마저 방어선의 일부가 돌파당해 돌파구가 확장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군 제7사단은 풍암리 일대로 철수하여 18일 14시 50분경 방어선을 편성하였고 뒤이어 중공군이 율전리 일대로 진출하여 횡성과 속사리 양 방향으로 진출하려 공격을 하였으나 미 제3사단의 화력지원을 받아 적을 격퇴한다. 이후 사단은 제3, 5연대가 미 제2사단에 배속되고 유동 일대에서 제8연대를 중심으로 전투력 복원을 실시하여 끝까지 전선을 이탈하지 않고 중공군과 격전을 한다.
(2) 국군 제5사단의 상황(어론리)
제7-8연대
부평리
도수암
상수내리
국5-27연 현리
신풍리 소치리
*매봉 제5사 정자리 용포
국5-36연 갑둔리
어론리 *888 검부리 대암산
미 제2사
*714국5-36-2대대
*933 비득재
* 가리산 자은리 *1076 *우각산 가마봉 오마치
*873 상남리
*833 국5사 국7사
광암리 *675
침교
도관리 외야리 고사리재
방내리
한계 내촌강
*643 (미 제2-23연) *683(국5-36연)
외삼포리 *533 *4762 장평리 *559 국5-35연 *379
군업리 *587 *796(미 제2-9연대)
국군 제5사단은 5월 7일부로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이래 미주리선으로 진출하여 홍천-인제를 연결하는 도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사단은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서 제35연대를 좌, 제27연대를 우에 배치하고 제36연대를 예비로 논리 북방 매봉-상수내리를 연하는 선에 진지를 점령했다. 사단의 좌측방에는 미 제2사단 제브라 특수임무부대가 있고 우측에는 국군 제7-8연대가 인접해 있었다.
국군 제5사단을 공격한 부대는 중공군 제9병단 예하 제12, 27군이었다. 제12군의 목표는 국군 제5사를 돌파하여 우회 종심기동으로 속사리를 차단하여 국군을 포위섬멸하기 위한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였다.
중공군은 5월 16일 17시 30분에 내평리 일대에서 공격을 개시했다. 우측 국7-8연대가 돌파되면서 국5-27연대도 포위를 고려하여 22:00시경 철수를 개시하였다. 자정이 지나 좌측 제35연대도 괘석리로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이 이미 우각산 등 주요고지를 선점하여 광암리로 향해야 했다.
17일 낮 동안에 제36연대의 엄호하에 부대를 재정비하고 미 제2사단의 우측방을 엄호하기 위해 노네임선후방 장남리에 제36연대, 광암리에 제27연대, 외야리에 제35연대를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그러나 적이 야간에 기습공격하여 지휘통제가 마비되어 중공군의 포위망을 뚫고 내촌강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결국 미제10군단의 전선 조정으로 미 제2-23연대가 국5-27연대 전방인 643고지군에, 미 제2-9연대가 국5-36, 35연대 후방에 재치되었다.
여기서 국 제5사단 장병들은 미 제9연대의 화력지원을 받으며 중공군의 공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다.
(3)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광암리에서 발굴된 군번 0167621은 어느 용사입니까?
비를 맞으며 우각산으로 오른다. 그동안 많은 탐사를 했지만 정상부근에서 소나기를 맞는 일은 없었다. 자연현상이지만 나는 예사롭지 않게 오늘을 맞이한다. 동행하고 있는 진욱이가 하산하자고 말한다. 나의 건강을 생각해서다.
"진욱아, 전쟁 당시가 봄가을만 있을까, 여름겨울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때는 용사님들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생각해 보라"
"맞아요, 몸숨걸고 전쟁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용사님의 유해를 찾아야 하므로 아프거나 다치면 안됩니다"
"그럼 아무리 비가 내려도 안다치고 몸살 안나면 되는 거지, 나 자신있다. 용사님이 보우하사... ."
"그래요, 누가 말리겠어요. 시작 했으니 목표한 전투지역을 탐사해야지요"
"좋아, 우리 군가를 하나 부르자, 진짜 사나이다"
우리가 우각산 일대, 제7사단 및 제5사단 주력이 내달려 후퇴해간 고지군에서, 2000년 유해발굴작전 시작 이 후에 처음으로 산악에서 군가를 불렀다. 사나이로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 . 그리고 비는 한바탕 쏟아지고 멈췄다.
어론리 가마봉(924)-우각산(11080- 998- 상남리가마봉(1191)-문내고개-문안사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전부 개인호가 있다. 그만큼 이곳 일대가 전투지역임을 알려준다.
[살모사의 출현]
문안사로 내려와 일행을 만나 옷을 갈아 입었다. 대웅전 앞을 오르는데 살모사 새끼가 나타나 계단을 따라 오른다. 모두 호들갑이다. 하지만 나는 위해 행위를 못하도록 하고 관세음보살을 세번 복창하고선 갈 곳으로 가라 했다. 이때 절 스님인지 아닌지 한 분이 오셔서 이 장면을 알려주었더니 자루 하나를 들고와 집게로 넣어서 수풀 속으로 갔다.
여러번 언급했지만 나는 탐사를 다니며 유해가 있는 곳(양구 백석산.진천 봉화산. 청주 국사봉 등)에서는 탐사 중에 혐오스럽다는 뱁을 만나고 묵념으로 환생을 빌어주고 절대 손대지 않았다.
[군인이 숨져간 곳에서 소지품을 챙겼다]
그리고 광암리로 향하여 마을에서 중요한 제보자 한분을 만났다. 이 분으로 인해 이곳 괘석리와 광암리 일대에서의 중요한 발굴 작전이 실현되었다. 이 동네 어르신은 전쟁 때에는 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어 피난길에 들지 않았고 할아버지와 함께 계속하여 집에 있으면서 할아버지를 따라 산으로 숨기도 하고 전쟁 3년을 보냈다. 그래서 어디에 전사한 유해가 있는지 많이 알고 계신다.
"이리 따라 오세요, 저기 산골에 국군 3구가 묻혀 있어요"
"어떻게 알게 되었습니까?"
"좀 말하기가 곤란합니다. 그 당시는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산속에 가면 여기저기 사람이 죽어있는데 군인인지 민간인인지 알 수도 없고(대부분 옷이나 전투화를 벗겨 갔다고 함) 그래서 옷을 입고 있으면 소지품을 챙기게 되지요. 신발도 파가 묻었거나 할 것없이 신고 다닐만 하면 벗겨서 가져 옵니다"
"이해가 됩니다. 한 번 같이 가 주시겠어요?"
"여입니다. 이 소나무 밑에 분명 3분이 있을 겁니다"
"아니 벌써 50년이 지나 60년이 되었는데 그렇게 정확하게 맞다고 하시니 대단하십니다"
"그 매년 사실 한번도 빠지지 않고 한번씩은 찾아와 들꽃을 올려놓고 갔어요, 군에 갔다오는 3년을 빼고는... ."
"그럼 여기말고 또 없습니까?"
"있지요, 집 바로 옆에 밭둑에도 있고, 그 건너편에 산소가 있는데 그 산소 앞 부분에도 있고 여러군데 있어요"
나는 아저씨를 따라서 광암리와 괘석리 일대를 여러분 탐사를 했다. 그리고 제보하신 지역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토지소유주와 협조를 하고 일정의 보상금도 지급하면서 준비를 하고 발굴 작전에 들어가 드디어 최초 제보한 지역에서 3구의 유해를 발굴하는데 여기서 인식표가 나온다.
0167621 ], 5사단 소속군번이다. 유족을 찾았다. 그 여동생 조카 되는 분을 모시고 현장 공개도 했다. 그러나 유전자 감식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니 신원을 밝힐 수 없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 집안의 내력을 조사할 수도 없다. 경우에 따라 부모님중 한 분이 재혼했다거나 전쟁의 소용돌이에 어떤 피해는 없었느지 등을 물어볼 수 없다.
[남자의 그곳에 칡이 자랐다]
그리고 집옆의 밭둑에서도 유해블 발굴했다. 산골 한 곳에서도 3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그런데 해당 유해는 칡넝쿨속에 있었는데 발굴되는 한분의 그곳에 정확하게 칡이 자랐다. 너무도 어이없기도 했고, 눈물나게 처량도 했고, 죽도록 미안도 헸던 유해발굴이다. 나는 얼른 그 칡을 캐내 숲속에 넣고 인간답게 살라 축원을 해 주었다.
[누가 우리 아버지 묘 앞에 삽을 대나?]
제보지역 한곳이 묘소 앞부분인데 연고자를 찾으니 전직 경찰관이다. 죽어도 삽을 댈 수 없다고 하니 황당하다. 묘소도 아니고 묘소 약 5M 앞인데 땅소유권을 갖고 있으면서 안된다고 하니 방법이 없다.
그래서 사실 내가 발굴책임을 지고 있던 시기에는 발굴을 하지 못하고 말았다. 매년 노크를 하여 생각의 변화만을 기다리려야 했다. 그러다 어찌된 일인지 발굴해도 된다는 연락을 해왔다고 한다. 발굴을 하여 보니 유전자 감식에 일치되는 유족이 이미 유전자 감식을 해 놓아서 신원이 확인되고 현충원에 안장할 수 있었다.
(나) 국군 제5, 7사단은 전투를 한 것일까, 아니면 그저 피리소리에 놀라 도망친 것일까?
이곳 홍천 두촌면 일대 자은리-어론리-남면 신남리-부평리-남전리-인제(남북리.상동)지역을 탐문하다 보면 제3.5.7.9사단의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된다. 중공군 4월 공세와 5월 공세의 최대 전투현장의 한 곳인 이곳은 전쟁 전에는 인제 지역은 북한지역이다. 그러니 아무래도 서먹서먹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특히 제5사단과 7사단은 실제 중공군 5월 공세시 이 일대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하고, 제3사단과 제9사단은 인제 현리-용포지역에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이미 제7사단은 북한지역 군우리 개천 바호산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했고, 그들의 인해전술을 알고 있기에 혼비백산하여 도망칠 수 있다. 제5사단은 북한지역는 국군 제2사단에 배속시킨 1개 연대만 철원과 평강 사이에서 북한군 제2전선을 토벌하는임무를 수행했다.
이렇게 볼 때 국군 제7사단은 북진 작전시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질겁하여 무질서한 철수가 이해가 될만하다. 그러나 제5사단은 그보다는 어떻게 보면 뭘 모르고 중공군의 공격에 덤벼들다 큰 피해를 입고선 지휘게토이 무너져 내리면서 무질서한 철수가 이루어졌다고 보면 어떨까?
(다) 과학화 전투훈련장에 남겨진 용사님의 병복을 빕니다.
지금 과학화 훈련장 부지는 바로 중공군 5월공세시 국군 제7사와 5사단이 철수해가던 지역으로 곳곳이 중공군에 포위되면서 많은 희생이 남겨진 곳이다. 하지만 그런 조사 한 번 없이 훈련장으로 변하여 안타까움이 남는다. 고지나 능선이나 제보네 의하면 계곡에도 국군이 죽어서 가매장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가매장한 분들은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마을이 사라지면서 흩어져 버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이제 대부분 운명하셨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 국군 제3군단의 붕괴
(1) 국군 제9사단의 상황
국군 제9사단은 제3군단의 좌전방 사단으로 제28연대와 30연대를 전방, 제29연대를 예비로 방어편성 했다. 제3군단은 2개 사단으로 전방 방어선을 편성했다. 제9사단은 16일 20시경 좌측의 국군 제7-5연대의 측방 유입으로 상세한 전장 상황을 알게 되었다.
5월 16일, 제9사단 정면에는 적의 공격이 없었다. 그러나 자정이 지나면서 전방 부대들이 돌파되어 고립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제9사단장은 제3사단장에게 예비대를 보내 오마치를 선점토록 협조했다. 그러나 제3사단도 상황은 마찬가지여서 오마치 일대에 부대를 배치하지 못했다. 5월 17일 01시경 중공군의 전후방 동시타격에 02시에 돌파되어, 군단에 철수를 건의 했으나 제3군단장은 미 제10군단장에게 전황을 물었으나 아무 이상이 없다는 답변을 듣고 철수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제9사단장은 퇴로가 차단당하기 전에 야포와 차량을 먼저 철수키로 하고 이동시켰다. 그러나 이미 오마치가 차단되어 다시 용포로 돌아왔다.
결국 사단은 17일 새벽 4시경 철수를 명하였고 용포 일대로 철수를 하게 된다. 이 때 전투지경선을 넘어온 제7사단의 일부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러나 낮 12시경 서쪽 능선에서 중공군의 요란사격을 가해왔고 집결된 부대들은 포위됨에 놀라서 사방으로 분산하게 되어 13시 40분경에 현리에 도착했다. . 당시에 이미 적 1개연대가 오마치 넘어 암달동을 점령하고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귀둔리에서 현리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현리는 국군 제3사단 및 제3군단 직할부대, 제7사단 제5연대, 수도사단 제1연대 제1대대 일부 병력이 혼재되어 있었다. 병력들이 모이자 대규모 공격으로 제7사단이 붕괴되고 오마치 고개가 피탈당한 상황을 모두 알게 되어 장병들의 불안과 동요가 확산되었다.
(2) 국군 제3사단의 상황
국군 제3사단은 제3군단의 우측 사단으로 덕적리, 한석산, 가리봉을 연하는 선에 진지를 편성했다. 제18연대를 가리산 1226고지에 일대에, 제22연대를 가리봉 1519고지 서쪽 능선 일대에 배치했다. 또 제23연대를 예비로 전방 연대의 후방에 대대별로 거점을 점령토록 하였다. 가리봉의 동쪽 능선부터는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이 배치되었다.
사단은 생포한 포로 등 여러 정황으로 적이 가리산으로 공격할 것으로 판단하고 여기에 대비히고 있었다. 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적은 북한군 제5군단 예하 제6, 32, 12사단으로 5월 15일부터 가리봉 방향으로 공격하여 17일 04시경 이 일대를 돌파했다.
제3사단은 제9사단으로부터 제7사단이 철수 중이며 오마치고개가 피탈당했다는 연략을 받고 군단이 포위 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 08시경 철수를 명령했다. 13시경 현리에 도달했으나 이미 북한군 제6사단 제1연대가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3) 국군 제3군단의 퇴로 차단
서화리 간성
와촌 *안산
원통
소양강
한계령
국3-18연 *가리산 수도-1연
*1226 국3-22연
인제
*958 국9-30연 회전동 양양
*한석산
*점봉산
내린천 *매봉
*596 검우석
국9-28연
현리
도채동
*매봉산
*대암산 용포
검전리 오마치 *방태산
현리 일대에서 만난 제3사단장과 제9사단장은 각각 1개 연대씩 차출하여 오마치 고개를공격하기로 했다. 이때 군단장은 5월 17일 14시경 현리에 도착하여 작전회의를 열고 공격명령을 하달한 후 15시 30분경 하진부리의 군단 전술지휘소로 복귀하였다.
제9사 제30연대와 제3사 제18연대가 공격명령에 가담하였으나 부대들이 오마치 공격을 하기도 전에 적의 기습에 무력화되어 방태산으로 퇴각하면서 비극이 서막이 시작되었다.
5월 18일 03시경부터 부대들이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방태골을 지나 방태산을 넘어 광원리 일대로 퇴각하게 되었다.
중공군은 굶주린 이리떼처럼 국군 제3군단을 추격하여 광원리까지 따라 붙어와 부대들은 다시 창촌으로 퇴각하게된다. 주요 길목마다 이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이 지키고 있어 국군의 철수는 지휘체계가 무너진 상태로 소부대 또는 각자 도생의 방법으로 준령을 너어야 하는 고난의 행군으로 무기도 버리고 군복도 벗어 던지고 민간복 차림으로 사단장도 걷고 걸어야 하는 상황이 계속 되었다.
창촌에 이르고 있을때에 이곳도 중공군이 지키고 있었고 정예 연대라는국군 제3-18연대도 이곳에서 계방천을 도하하다가 기습을 받아 흩어져 다시 광원리에서 모이기 시작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받은 미 제8군사령관은 이 지역에서 반격을 개시하지 말고 중공군의 공격이 멈출 때까지 기다리라 지시했다. 그리고 미 제3사단과 미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출동준비 명령을 하달하였다.
한편 중공군 첨병 부대들은 광원리, 하진부리까지 일부 부대가 들어와 국군 제3군단을 압박하였다. 군단은 결국 경사가 60도에 달하는 1,150고지의 을수재를 넘어야 했다. 장병들은 체력과 정신력이 고갈된 상태에서 탄띠. 철모. 군복까지 벗어 던지고 맨몸으로 하진부리로 향했다. 5월 19일 15시경 군단의 일부가 도달하여 재편성을 하고 있을 때 공산군이 재차 공격해와 결국 제3군단 주력은 여기서 다시 5월 20일 횡계리로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부대가 하진부리에 도달할 때에 미 제8군사령관은 하진부리일대에서 더 이상 퇴각하지 말고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으나 군단은 5월 21일 퇴각을 하여 제3사단은 송계리로, 제9사단은 대화로, 군단사령부는 영월로 퇴각하여 흩어졌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3-1) 유해 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용포에 남겨진 일병 김권순 유해의 만남
나는 인제-현리지역의 유해발굴 지역 \선정을 위한 탐사 및 탐문활동을 시행하는 과정에 용포에 이르렀다. 용포교에서 지나던 마을 사람으로부터 연세가 많으신 분을 소개받아 찾아간 집이 안신현이란 분이였다. 안 아저씨는 전쟁 당시에 8살로 아버지와 집에 있었다.
그러다 5월에 갑작스레 병력이 오마치로 우르르 몰려가더니 다시 우르르 되돌아 가기를 반복하는 모습을 지켜보다 잠들었다. 그리고 아침이 되었는데 집에서 바라보니 용포교 자리 논바닥에 교복입은 학생들이 엄청 많이 앉아 있었다. 여가저기서 총쏘고 수류탄이 터지는 소리 포탄이 작열하는 소리가 요란해서 얼른 집에 숨어야 했다.
다시 하루가 가는데 조용해졌다. 그런데 아버지가 오라고 해서 광으로 가니 군인이 엎드려 있다. 광바닥이 피바다였다. 얼마나 손톱으로 긁었느지 군인의 손톱이 다 빠졌다. 아버지가 칡순을 해와서 시신을 끌어서 집 뒤에 방공호가 있었는데(일제시대에 조선시대 현감(?)의 비가 서있던 자리를 파서 만들었다고 한다. 실제 비가 옆에 넘어져 있었다) 그 속에 넣었다. 다른 두 구의 시신도 넣었는데 광에서 있던 시신은 키가 제일 작고 부상으로 한쪽 다리가 절단되어 있었다고 한다.
우린 '2001년 10월 초에 제3군단 공병으로부터 병력을 지원받아 직접 발굴을 시작하려 현장으로 갔다. 그런데 아버지를 찾는다는 김춘자씨가 남편인 에비역 중사 출신의 남편 안시와 함께 있었다. 어떻게 된 것인지 물으니 이분들은 서울에 살고 있는데 아버지지가 현리 용포일대에서 전사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마침 휴가기간이라 한번 와 봤는데 마찬가지로 우연히 우릴 만난 것이다.
[꿈에 나타난 아버지가 세번째 묻힌 사람이다고 했다]
그래서 관련이야기를 들으니 참 운명이란 대단한 인연의 연속이었다. 먼저 정신현 아저씨는 어젯밤이 돌아가신 아버지 기일인데 꿈에 아버지가 오늘 중요한 손님이 오신다며 찾고 있는 분이 세번째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묻혀있는 분이라고 했다 한다.
[작은 아버지되시는 분이 함께 군대를 갔었는데, 전사한 곳이 현리 어디인데 나중에 손자 군대에 면회 가보니 그곳이었다 한다]
유복녀 김춘자 아주머니는 여기를 찾게된 동기가 순천에 사시는 작은 아버지뻘 되는 분이 당시에 본인 아버지와 같이 이곳으로 와서 본인은 살아서 나왔고 사촌은 살아나오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때는 여기가 현리 용포인지 모르고 있다가 손자가 군대를 갔는데 3군단 공병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면회를 와서 보니 아니 전쟁 때 싸웠던 곳이고 권순이가 전사한 용포교 일대가 그대로 였다. 그래서 기가막혀 면화갔다와서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는 준 것이다. 그러자
[직장을 버리고 장인을 찾아 나선 사위, 안서방]
이렇게 되자 통신 주특기로 중사를 달고 예비역이 된 아주머니 남편이 장인을 찾겠다고 용포교 일대를 수소문하던 중에 오늘 우리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다. 이분들도 보고 가겠다고 옆에서 지켜보는 가운데 정씨 아저시 집 뒤의 큰 소나무 숲속에서 반공호를 파내려 갔다. 한 길을 파내려가도 보이질 않는다. 모두가 지금까지 이야기를 되새겨보며 의아해 하는 눈치다.
[야, 삽 이리줘 봐~]
나는 직접 병력을 올라오게 하고 삽을 들고 내려섰다. 한 길이나 된다. 그래도 병사들보다 그 당시는 네가 삽질을 더 잘했다. 약관40대였으니 말이다. 몇 삽을 퍼 올리고 금속 탐지기를 가동시켜보니 탐지음이 들린다. 그래서 그 곳을 다시 한 삽 들어 올리려는데 뭐가 걸린 느낌이다. 바로 삽을 내려놓고 전문 발굴삽을 이용하여 흙을 걷어내려는데 발뒤꿈치 뼈가 분명했다. 이렇게 해서 충북대 박선주 교수팀이 투입되었다(육군이 고용한 전문 발굴팀)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3구의 유해와 마지막 세번째가 정아저씨가 말한대로 키가 가장 작고 한쪽 다리가 없었다. 꿈같은 이야기가 현실이 되었다.
[장모님을 찾아 모녀의 상봉을 만들었으나 어머니 얼굴을 보지않는 김춘자씨!]
사위되는 분이 그간의 일들을 말하였다. 전쟁이 나고 군에 간 분이 전사했다는 통지서가 오면서 시집에서 한살된 아기를 놔두고 친정으로 가라하여 집으로 돌아간 후에 장모 되시는 분은 재혼을 했다. 수소문하여 찾으니 완도에 잘 살고 있었다. 지역유지인데 찾아가서 사실관계를 말하니 믿으려 하지 안했다.
그렇게 하길 몇번, 드디어 모녀 상봉을 위해 누가 보이지 않는 동행항에서 만나기로 하고 어느날 동해항에서 상봉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춘자씨가 어머니가 아니라고 울며불며 손을 주지않고 처다보지도도 않했다. 겨우 손을 잡아 반 강제로 50년 만에 모녀의 기막힌 만남이 이루어 졌다. 하지만 어미니란 말을 하질 안했다. 본이니 난 자식을 두고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다시 어머니 되시는 분은 배르 타고 떠났다 한다.
[대전 현충원 안장식에 나타나지 않은 부인 그리고 어머니~!]
우린 대전 현충원에 안장식을 하는 날, 사위 되는 분을 통하여 장모님을 오시도록 했다.그래서 무녀간의 상봉을 성사시키려 했다. 하지만 기달려도 그 할머니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열하는 춘자씨의 모습에 그당시 여러 안장 행사가 있었는데 모두 고 김권순 참전용사님의 묻히는 장소로 다 모였다. 눈물 바다가 되었다. 얼굴도 못보았는데 전사자 몸으로 나타나시던지 이렇게 다시 흙으로 돌아가느냐며 그 통곡은 현충원을 울렸다.
안타까운 것은 그 후로 김춘자씨가 병으로 돌아가시더니 그 남편도 병으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운명은 기고하다. 누구에게는 한없이 야속하고 누구에게는 한없이 희망이다.
(나) 잠뱅이 걸치고 방태산을 넘는 제9사단장 최석 장군과 학도병
사단의오마치 고개 공격계획에 따라 제9사 30연대는 제3대대가 주요 지형인 736고지를 무혈 점령했다. 그러나 785고지를 점령해야 할 부대들이 내린천을 따라 남하 하다가 방태산으로 퇴각하면서 사단 전체가 방태산으로 퇴각하게 된 비극의 서막이었다고 기록한다.
한편 제3사단 18연대는 제9사 30연대가 중간 목표를 점령하면 이를 초월하여 오마치를 공격하기로 되어 있ㅇ었다. 그러나 현리 일대의 병력이 기습을 받아 방태산으로 흩어지고, 제9사단도 방태산으로 퇴각하자 제3사단장 역시 5월 18일 03시 30분경 모든 장비를 파괴하고 방태산을 지나 창촌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한다.
이에 제3군단은 무질서한 철수를 시작한다. 군단은 장병, 노무자, 위문공연단 등이 뒤섞여 공용화기와 장비를 파괴하거나 유기하고 방태산(1436)으로 퇴각한다. 방태산 남쪽의 광원리로 험준한 주억봉(1449)과 구룡덕봉(1388)을 넘었다.
나는 동네분들의 제보로 매화동 일대에서 육박전이 벌어졌다는 밭 언저리를 확인하여 발굴결과 우의와 수통을 달고 있는 탄티를 차고 전사한 국군용사(모든 유품이 아군 것임) 수 구를 발굴했다.
[학도병이 숨져서 그대로 가매장 했다는용소늪, 그리고 그 옆에서 발굴되는 "여농"이 새겨진 교복 단추와 용사님]
매화동에서 방태산(작은)으로 계곡길을 따라 가면 용소가 있다. 경사가 심하여 계곡 물이 적어 보여도 물살이 얼마나 센지 나는 이곳을 '01년 8월 말에 건너다 물속의 작은 구르는 돌에 치여 지금도 아른거린다. 이곳 일대가 옛날에는 화전민들이 살았다. 90이 넘어가는 할머니가 현리에 살아계셔 제보를 구했다. 할머니가 그곳에서 60년대까지는 살았던 장본인이다. 주변에 군인 시신이 너무러져 있고 용소 바로 윗부분에 조그만 공터같은 곳이 있는데 교복입고 몇이 죽어 있어서 당시 화전민들이 사을 이용하여 대충 묻었다는 것이다.
나는 '01년 10월 초에 박선주 교수팀을 모시고 현장으로 들어가 주변을 탐사한 결과 금속탐지기에 신호가 나는 곳을 선정하여 발굴을 개시했다. 드디어 발굴되는 50년 만의 굴레를 벗는 용사님, 머리 부분에 풀푸리가 얼켜서 이걸 걷어내는데만 2~3시간이 소요되는 정밀 발굴을 하여 몇 구의 유해와 "여농"이 새겨진 교복 단추 몇개, 탄창, M1탄, 수류탄 등 다수의 아군 유품도 발굴했다.
[미산리 내린천의 핏물]
지금 전사에는 미산리 내린천관련 내용이 미흡하다. 하지만 탐문 결과 마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 해 5월의 전투에서 얼마나 죽었는지 미산리 내린천 일정구간이 핏물이었다 한다. 특히 미산리 수리봉(944)일대로 군인들이 올라가려 하고 이미 중공군이 요소에 매복을 하고 있어 전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냥 허무하게 죽어갔다. 군인은 총도 없고 맨몸이었다. 중공군도 요란스런 따발총인데 그것도 몇 명만 갖고 있었다.
그래도 맨몸으로 몰려드는 군인이 워낙 많다보니 그냥 갈겨댄다는 것이다. 이래서 가뭄이 이어지던 강바닥이 피바다가 되고 비통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살짝 비가 내리는데 그것이 흘러 십리도 더 갔다는 이야기는 서럽게 만들었다. 시신도 누가 처리할 겨를도 없고 할려고도 안했고 그냥 강가에서 까맣게 부패되어 가다 물에 떠내려 가든지 여우나 들개들이 달려들던지 희생되었다.
[뭘 봐, 너 줄 것 없어~!]
당번이 구해온 잠뱅이를 입었다. 지금은 계급이나 위신이 문제가 아니다. 살아서 남아 다시 적을 무찔러야 한다. 방태산 계곡을 따라 위로 무조건 오른다. 비록 5월이지만 햇빛이 왜이리 강렬한지 비지땀이 흐른다. 병사의 나이나 사단장의 나이나 다를게 없다. 거기서 거기였다. 동네 친구도 형도 동생도 함께 군복을 입고 당시는 근무했다. 초창기 군의 실태다.
걷다보니 아무도 여에 없다. 다 떨어져 나갔다. 얼마를 걸었을까 너무 힘이 들어 주저앉았다. 옆을 보니 한 교복을 입은 학도병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이미 두끼를 굶었는지라 체면이고 뭐고 배가 꼬르륵 거린다. 그래도 오르면서 계곡 물을 간간이 마셨다.
[한참 물을 먹고 고개를 들어 보니 바로 위에 국군이 엎드려 물을 먹다 죽어 있다]
5월이라 춥지는 안했다. 다만 산을 올라 도망가다 보니 배가 고팠다. 지금 주먹밥도 보급이 안된다. 그런데 한 교복을 입은 학생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체면이고 뭐고 너무 배가 고파서 옆에 다가서서 쳐다봤다. 한입이라도 먹으면 살 것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차마 사단장이라 말할 수도 없고 잠뱅이걸친 처지에 어떻게 한입 안되겠느냐고 물었다. 일생리대에 가장 큰 용기였다. 하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되었다. "너 줄것 없어... ."
계속 행군이다. 누가 앞장서고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정상으로 올라서야 한다. 땀이 먹은 것이 없으니 이제 일사병이나 열사병이 일어날 지경이다. 그러니 계곡물은 보이는대로 먹어야 한다. 계곡이라 물이 많은 것이 아니라 어쩌다 돌틈에 조금있는 상태인데 한번는 웅덩이처럼 되어 있는 곳에 물이 있어 정신없이 먹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앞을 보는 순간 기막힌 현장이 보인다, 바로 국군이 베낭을 메고 엎드려 물을 먹다 죽어 있다. 보니 옆구리가 관통되어 엄청난 출혈이 있었던 모양이다. 목 마르다고 물을 많이 마시면 피가 물거져 저혈당으로 쇼크사가 발생하여 죽는다. 물도 함부로 많이 마시는 것이 아니다.
(다) 통행금지구역
나는 광원리와 운두령, 율전리, 오대산일대를 정말 지겹도록 탐사했다. 중공군 5월 공세시 국군 제3군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격게 된다. 미 제8군사령관이 지금의 영동고속도로선을 지키도록 했으나 그 밑으로 철수해 가버려 미군이 운두령으로 들어와 중공군의 남진을 차단하게 된다.
이를 본 제8군사령관은 바로 북진작전에서도 국군 제2군단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속수무책으로 철수해버려 우측방이 노출되면서 협조된 철수작전을 못한 과오가 있는데 또 이런 사태가 발생하니 제3군단을 해체해 버린 것이다.
따라서 나는 판단하기를 이정도라면 이 일대는 많은 전사자가 산악지역에 남아 있으리라 보고 1,000m고지군을 샅샅이 뒤진다는 각오로 일행들과 아니면 혼자서 탐사를 주기적으로 했다.
광원리 월둔골에서 월둔 고개롤 올라서면 방태산의 좌우능선을 중앙으로 관통하여 조경동으로 내려서게 되는데 한번은 기린면 방동리-자연휴양림-방태산(1449)으로 올라서 구룡덕봉-월둔고개로 내려서는 탐사를 하고, 한번은 홍천 내면 구룡령-갈전곡봉(1196)-가칠봉(1240)-월둔고개로 탐사를 했다. 이곳 일대는 능선상에 개인호가 수천개는 남아 있는데 모두가 6.25당시 호가 아니라 그 이후에 대간첩작전 중에 굴토된 것도 있고, 진지공사로 굴토된 것이 혼재되어 있다.
그런데 조경동이란 지명이 백골병단이 통과한 지역으로 우군기의 오폭으로 일부 피해가 발생한 곳이다. 따라서 그 곳을 가보려 월둔고개에서 무모하게 통행금지돤 산악 계곡로를 따라 짚차로 이동을 하다 수해로 길이 유실되어 갈 수 없는 막다른 길목에 그만 갇히게 되어 버렸다. 용감하면 무식하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였다.
[산속 계곡이라 무전이나 헨폰같은 것이 작동하지 않았다.]
지금 서울 여의동에서 매일신문 기자를 하고 있는 홍일병이 연신 악세레다를 밟아보지만 차는 더욱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들어가지 말라는 경고를 무시한 내가 잘못이다. 옷을 걷어 붙이고 바퀴 밑을 파내고 큰돌을 받히고 가속패달을 밟아 일단 차를 수렁에서 빼내야 어떻게 뒤로 돌려 되돌아 나가기라도 할 수 있다.
가속패달을 밟은 순간 한번은 주먹만한 돌이 하늘로 치솟아 내머리에 정통으로 떨어져 그만 피가 흐른다. 나는 아프다는 말도 못하고 손으로 쥐어 잡고 일어서 숨을 돌렸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먹구름이 넘실대고 들어온다. 그때도 아마 중공군이 이렇게 밀려들어와 많은 희생이 발생했으리라 생각하며 용사님을 불러보았다. "용사님 저를 도와 주십시오, 여기서 나가야 선배님들을 발굴하여 현충원에 봉헌할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린 차를 꺼내고 다시 돌리어 오던 길로 돌아나와 광원리로 갔다.
(다) 전사에 기록하지 않고 있는 국군 제3군단의 현리진입과 미 제8군의 전략은? (유재흥 장군의 기막힌 역사)
유재흥 장군은 최초 제7사단으로 의정부지구 전투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패배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 다음은 중공군 4월 공세시 이번엔 제6사단으로서 사단의 엄청난 인명손실에 책임을 피할 수없다. 그런 장군이 이번에는 제3군단으로서 이곳 현리에서 1개 군단이 무력화 되는 비극의 주인공이다.
장군은 그 후 국방부 장관이 되었고, 12.12사태시에 그 책임자로서 미군부대로 피신(?)했다가 최규하 대통령의 호출에 미군영에서 나와 전두환 합수부의 계엄사령관 정승화 체포 영장에 서명을 날인하는 영광(?)을 갔고 있는 장군이다.
전사기록은 왜 제3군단의 양개 사단이 대낮에 그것도 분명 중공군의 대규모 공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철수해 이동하는 행위가 있었는지 의문이 든다. 아무리 전술의 무지라 할지라도 이런 방책은 세우기 어렵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오마치고개가 확보된 것도 아니고 또한 현리에서 평창지역으로의 철수로는 사실 그 당시 주도로는 31번도로를 이용하는 것이 유일했다. 지금도 418번 지방도로를 이용 동쪽으로 전진하여 남족으로 방동리 계곡으로 해서 방태산(6.25당시 주로 이용)-광원리로 빠져 나오던지, 아니면 방동약수에서 조경동- 월둔고개.가칠봉(1240)-광원리로 내려서는 것이 산악 기동로이다. 다른 기동로는 418번 도로를 이용하여기린면 진동리로 해서 조침령을 넘어 서림에서 56번 도로를 이용하여 구룡령으로 해서 기동하는 방법이 있다. 당시 이곳은 국군 제1군단이 확보하고 있어 원거리이지만 충분히 선택 가능한 철수로인데 굳이 양개 사단이 현리로 밀려들고 철수로의 애로지역은 확보하지 않은 체로 중공군으이 성동격서에 말려들어 혼비백산. 방태산으로 오르고 다시 창촌. 광원리에서 기습을 받고 군단 주력은 광원리 을수동에서 계곡을 따라 3일간 아무것 도 멱지 못한 채로 을수재를 넘어 용평 속사리로 내려가야 했던 비극이 초래되었다.
정말 제3군단이 자체적 판단에 의하여 아니면 지난 2월의 횡성의 대 재앙처럼 미 제8군의 전략적 판단에 의하여(당시는 공격간 이므로 제8사단이 전방으로 추진되어, 중공군이 좋은 먹이를 만나 대규모 부대를 이곳으로 투입하여 기타지역에서의 압력을 흡입했다는 설이 있음. 결국 측방과 후방에서의 포위를 자초하여 사단이 8,000여 명의 인명피해로 무력화되었던 사례) 혹시나 중서부나 서부전선에서 수도권에 영향력을 돌리기 위해 현리지역으로 2개 사단이 철수하게 되었는지 의문이다.
(라) 현리 가옥 빨래줄에 매달린 많은 두개골은 누구입니까? (너도 그랬으니 나도 그렇게 한다)
지금 제3군단 헬기장이 있는 인근 마을에서 지역주민 간담회를 실시하여 제보를 획득하는 노력을 했다. 다행이도 일부 주민이 당시를 기억하는 분들이 있었다.
[중공군이 왔을 때에 북한군이 따라와 있었다]
현리 사람들은 중공군의 악랄한 것을 기억하는 분은 별로 없었다. 다만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하고 시끄럽게 떠들고 다니며, 나이가 어려보였다. 여기에 총은 모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몰려 다니는 인원 중에 몇 명만 가지고 있었다. 당시 대부분 피난가버려 동네에는 나이드신 분들이 대부분 이었다.
동네에 들어온 군인은 중공군이 아니라 북한군이었다. 이들은 들어오자마자 완장을 찬 몇몇이 동네를 이잡듯이 뒤져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숨어있던 군인들을 잡아내서 목을 쳐서 내걸었다. 차마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모두가 무서워서 벌벌 떨고 있었고 시키는대로 해야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이번에는 국군이 다시 올라왔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몰라도 부역자를 색출한다고 이번에는 국군이 난리다. 그리고 몇 명을 잡아서 목을 잘라 빨래줄에 매달았다. 북한군이 한 대로 그대로 했다. 결국 죽어간 사람은 동네 사람이고 일부 쌍방의 포로들이었다. 파리 목숨보다 못한 인간의 목숨이었다.
(마) 사실 학도병이 왔는데 총도 없이 논바닥에 앉아서 죽어갔다.
용포지역에 수많은 학도병이 차에 실려와 내렸다. 중공군이 오는지 북한군이 오는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무슨 군인이 이렇게 많이 모였는지 용포교 주변에 군인과 차량들로 꽉 메워졌다. 여기에 남쪽으로부터 트럭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이 실려왔다.
[이해할 수 없는 학도병 증원]
중공군 4월 공세이후에 국군과 유엔군은 공세이전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주도권을 갖고 있는데 무슨이유로 군복을 입지않은 학생이 교복을 입은 체로 이곳에 증원되었을까?
이미 거창 신원리 사건과 국민방위군 사건이 터져 그 책임자가 사형을 받게된 상황에서 정상적인 군동원 업무가 시작되었는데 어이 학도병이 실려왔을까?
남아 있던 동네 분들이 모두 보았다고 증언했다. 총도 주어 지지않고 그저 실려와 용포교 주변 논에 주저앉아 쉬다가 중공군의 기습을 받아 총 한발 쏘아보지 못하고 대부분 숨져갔다.
(바) 돼지막사 돼지 탈출사건~!
용포교에서 불과 얼마 안되는 곳에 시골버스 정류장이 있다. 이 곳에 비닐하우스가 있었다('01년도) 그런데 이곳이 6.25 당시는 논의 일부 였다. 중공군 5월 공세시 주변에서 엄청난 군인이 전사한 상황에서 군데 군데 시신을 땅을 파고 묻었다. 그리고 그걸 기억하는 분들은 이곳을 떠났다. 떠난 이유는 아무래도 부역의 일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실이 잊혀진 가운데 어느날 이곳에 돼지우리가 만들어졌다. 돼지를 여러마리 기르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날 난리가 났다. 우리안의 돼지가 우리를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슴높이가 넘는 우리를 어떻게 뛰어 올라 탈출했을까?
나중에 알게 된 일인데 돼지들이 우리 안에서 코로 땅을 파다 사람 유해가 나오고 그걸 보고 놀라서 순간 뛰어 올랐다는 것이다. 착한 돼지들이 인간을 보니 얼마나 놀랐을까?
[멧돼지를 잘못 만나면 뼈도 안남는다]
그러나 산속의 멧돼지들은 배가 고파서 6.25전쟁 당시에 개인호나 교통호 등에 묻혀진 유해의 냄새를 맡아가며 남겨진 유해를 먹었다. 실제 우리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산정상 부분에 굴토된 개인호를 파낸 멧돼지의 실체를 확인하였다. 화천 북방 상서면 산양리 상마산동 일대는, 전후 마을 사람들이 경찰의 통제하에 고지 일대에서 유해를 50여구 수습하여 일정장소에 가매장했는데 어느날 멧돼지 몇마리가 나타나 그 지역을 휩쓸고 가더니 유해가 한마리도 남지 않았고 전투화 조각등 멧돼지가 씹지 못하는 것만 남았다고 했다.
결국 돼지를 모두 잡아 도살하게 되었다. 그리고 주변을 넓게 발굴하여 유해를 수습하게 된다. 이곳 뿐만 아니라 논바닥(지금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도 증언을 받아 몇 십구의 유해를 수습하여 한 곳으로 옮겼다가 다시 그곳을로 도로가 개설되면서 다시 옮겨지고 이렇게 해서 결국 우리가 추적해 들어갔을 때는 그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사) 차라리 포로가 되는 것이 편했다(내린천을 따라 가면 남인줄 알았더니 북한군이 서 있었다)
참전용사 한 분이 증언을 해왔다. 본인이 을수재를 넘었다고 한다. 이 분이 증언하여 우리는 유해도 1구를 발굴해 왔다. 용사님은 3사단 소속이었다. 현리에서부터 철수하다 보니 3일째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물을 먹는 것도 한 두번이다. 산을 올라야 하고 뛰어야 하고 중공군이지 북한군인지 추격하는 공산군을 피해야 한다.
"야 나 이제 못 걷겠다. 차라리 여기서 쉬다가 죽을 거다"
"무슨 소리야, 저 산만 넘으면 아군이 기다릴거야. 일어나라. 여기까지 와서 주저 앉으면 어쩌라는거냐"
"아냐, 난 이제 걸을 수 없다. 너라도 빨리 도망가라"
[적군에 남길 수는 없다. 계곡으로 밀었다... .]
그래서 전우를 남기고 떠날 수는 없기에 미안하다고 하며 계곡으로 밀어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유학산 지구전투시 제15연대 이경식 용산님이 부상당한 전우를 그대로 고추밭에 묻고 떠났다는 증언, 그리고 그 경북고 출신 부상자를 찾으려 유학산 일대를 뱅뱅 돌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물길을 따라 갔더니 북한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또다른 용사님을 만났다. 이 분은 포로가 되었다가 포로교환시 돌아오신 분이다. 포로가 된 상황은 산으로 올라가다가 힘에 겨워 주저앉아 있는데 아무도 없다. 그래서 공포감에 떨고 있는데 몇 명이 모여들었다. 어둠이 깔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른느데 한 군인이 물을 따라 가자고 한다. 물은 북에서 남으로 또는 동에서 서로 흐르니 물길을 따라가면 아군 진영을 만날 수 있을 거란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어둠속에서 조심조심 물길을 따라 이동해갔다. 총도 없고 수류탄도 없고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얼마를 걸어 갔을 가 앞에 누군가 보인다. 몸을 숨기고 지켜 보았다.
"동무 나오라우?"
"동무 나오라우, 다 보고 있다. 도망치면 죽는다"
"셋을 새갓어, 하나 둘 ... ."
용사님들은 누구라 할 것없이 항복을 외쳤다. 살려 달라고 했다. 알고 보니 내린천은 남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 흐르고 있었다.
(4) 미 제2사단의 양쪽 견부 확보
(가) 미 제2사단의 역습
국군 6개 사단이 미주리선으로 진격하는 동안 미 제2사단은 대룡산, 가리산, 매봉을 연하는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이때 좌로부터 제9연대, 제38연대, 제23연대를 배치했다. 미 제2사단은 중앙의 제38연대에 네덜란드 대대를, 우측의 제23연대에 국군 제5사단 제36연대 제3대대와 프랑스 대대를 각각 배속했다.
1) 중공군의 공격 개시와 오판
우측의 미 제23연대는 제2대대와 배속받은 공수 1개 중대, 미 제72전차대대 예하 1개 소대로 "제브라 특수임무부대"를 편성하여 우측방을 방어했다. 미 제23연대의 주력은 사단의 예비로써 와촌 일대에 집결시켰다. 국군 제5-36연대 제3대대와 아이반호(국군 1개 중대 규모로 편성된 지휘소 방호부대) 부대를 전초부대로 운용했다.
가리산 국5-36-3대대 미2사 = 국5사
미 2-23연
제브라
미2-38연 특수임무부대
미2-9연 네덜란드
프랑스
한계
미 해병1사 = 미 제2사 걸운리
대룡산 홍천
미 제2사단의 정면을 공격한 중공군은 제12군 예하 제31, 34, 35사단이었다. 이들은 5월 15일 밤에 소양강을 도하한 후 5월 16일 17시 30분에 사단의 우측과 정면에서 돌파를 시도 했다. 그런데 이들이 이곳으로 공격한 것은 이곳에 미 제2-23연대에 배속된 국5-36-3대대를 사전 정찰을 통해 확인하고 이곳이 국군 제5사단의 책임지역으로 오판했다.
2) 미 제2사단 제23연대의 인제-홍천 축선 전투
중공군의 병력이 점점 증강되자 미 제2사단은 국군 제36-3대대를 철수시키고 와촌 일대에 집결해있던 미 제23연대를 사단의 우전방에 투입했다.
5월 16일 21시경, 중공군이 미 제23연대 3대대 정면을 중공군 제12군 제31사단이 돌파를 시도했다. 이들은국군 제5사단과 미 제23연대 전투지경선의 간격을 이용하여 24시 경에는 자은리 북쪽의 삼거리 일대까지 진격했다. 이때 미군의 상황과 지형에 관한 정보가 부족하여 2시간 가량 지체하기도 하면서 5월 17일 아침 국군 제5사단을 돌파하고 인제-홍천 도로를 따라 계속 진격하여 5월 18일에는 국군 후방의 주요 목을 차단하고 하진부리선까지 진출하게 된다.
미 제2사단은 퇴로가 차단되자 배속된 프랑스 대대를 평천 일대로 투입하였고 이에 따라 미 제23연대가 한계 일대로 퇴각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23연대는 탱크 2대와 100여 대의 차량을 버리고 도보로 퇴각하기도 했고 5월 18일 17시부로 한계를 좌우로 연하는 선에 방어선을 구축한다.
한편 미 제2사단의 좌익 미 제38연대의 가리산지역으로 중공군 제35사단 제103연대의 돌격부대가 치고 들어와 17일 03시경 피탈되고 계속하여 평천 계곡으로 치고 내려 오던 중에 프랑스 대대가 새벽부터 20시까지 이를 저지하였다.
3) 가리산 전투
5월 16일 17시 30분 경 중공군 제35사단이 미 제2사단 제38연대의 전방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5월 17일 01시 30분경 제38연대 A중대가 방어하던 가리산이 피탈된다. 중공군이 게속하여 평천 계곡으로 내려왔고, 이 일대 배치되었던 프랑스 대대가 네덜란드대대와 함께 새벽부터 20시까지 이를 저지하였다.
중공군 제34사단은 중공군 제31사단이 자은리 북쪽 삼거리에서 미 제2-23연대를 공격할 때 국군 제5사단 쪽으로 공격방향을 전환했다가 5.17~18일 양일간에는 자은리 일대에서 미군을 몰아 내는 것을 목표로 총공격을 감행했다.
중공군이 모두 가리산 일대에 집결하여 총공격을 개시하자 미 제제2-38연대장은 가라산에 군단 일제사격을 요청하여 중공군에 최대한의 피해를 강요한 후 가리산 지역을 철수하였다.
4) 미 제2사단 제38연대 제3대대의 벙커고지 전투
중12군 중34사 중31사
중15군 품걸리 물로리 삽다리
홍천고개
평촌리 미2사=국5사
늘목고개 38=23
자은리
가락고개 평내
박달재 9=38
778 부채뜰
사실고개
한계
미 1해병=미2사
구성포리
와촌
한편 우측의 벙커고지(778고지)일대는 미 제38-3대대가 점령한 상태에서 중공군의 기습으로 5월 17일 야간에 일시적 피탈 되었으나 백병전을 방불케하는 격전에서 최종 미군이 승리하여 진지를 사수하였다.
5월 18일 아침 , 미 제8군은 778고지를 기점으로 한계-와코선이 연계된 수정된 노네임선을 설정하고 12시를 기해 병력배치를 완료하라 명령하였다. 이로써 좌로부터 미 제1해병사단-미 제2사- 국군 제5사- 국군 제7사단이 배치된 새로운 방어선이 완성되었다.
저녁부터 이 778고지로 중공군이 총공세를 가해왔다. 이 고지가 좌측 견부로써 돌파하지 않으면 우회기동으로 국군과 유엔군을 포위 섬멸하려는 공산군측의 작전 기도가 실패하게 된다. 반대로 미군은 이곳을 사수함으로써 동측부대들의 철수를 엄호하고 좌측의 미 제1해병사단의 방어를 용이하게 하는 잇점이 있었다.
그러나 미 제8군은 고지가 너무 전방에 나가있어 계속적인 방어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보고 미 제2-38-3-K중대를 철수시키게 되는데 고수방어를 하고 있던 중대는 진내 사격을 요청하여 이 고지 위에 약 1만여 발의 포탄이 작렬하여 표고가 2m(?) 주저앉으며 중공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고 철수하게 되었으며 일시적으로 미 제1해병에서 진지를 인수하여 철수를 엄호하였다. 이후에 해병도 철수하여 이 일대는 중공군이 점령하였으나 중공군의 총공세는 결정적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미군이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자 중공군은 20일 03시경부터 총공세를 가해왔고 미군은 19일에 176대, 20일에 21대의 폭격기를 투입하여 중공군은 막대한 인적 피해를 입으면서 21일 전투지속 능력 상실의 뚜렷한징후를 보였다.
이에 바로 미 제10군단은 제187공정연대 전투단에 공격 명령을 부여하여 반격작전으로 전환하게 된다.
(4-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사오랑치 고개 일대의 발굴 유해는 민간인이지, 아니면 어느 국적인지?
홍천 가리산지구 전투는 중공군 5월 공세시 미 제2사단과 중공군이 짧은 2~3일간 전투를 실시했다. 이 보다 앞서 1.4후퇴시에는
국군 2.5.8사단이 춘천 우측방 내평리~부평리간에서 일시적 방어를 하고 제3사단이 후속하여 들어왔다가 후퇴해 나간다. 5월 공세이후에는 재진격간(유엔군 3차 반격작전) 국군 제1해병연대가 진출한다.
우리는 물걸리 일대에서 500고지군 일대에서 '01년도 이후에 무려 15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주요 격전지라 어디에도 명시된 곳이 아니다. 내평링에서 넘어오는 사오랑치 고개 주변이다.
[홍천을 넘나들던 고개?]
내평리 사람들 이야기는 그 옛날에는 내평리에서 소양강을 건너 사오랑치 고개를 넘어 홍천으로 들어가곤 했다 한다. 이렇게 보면 혹시나 피난가던 사람들이 피해를 입은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물론 나온 유품들이 군인들 것이 있지만 유품이 없던 유해도 있다면 어떻게 분석해야 할 지 어려운 문제라고 봐야 한다. 만약에 모두가 군인이라하면 사실 중공군이 이곳을 점령한 기간이 5월 공세로 보면 2~3주에 불과하다. 이 말은 그들이 죽은 중공군을 옮겨 가기에는 시간이 촉박하였다는 것이다. 더욱이 유엔군의 재반격시 거의 무방비로 포위가 되어 많은 피해를 여기서부터 파로호에 이르는 구간에 남기게 된다. 내가 발굴작전을 통제할 당시는그래서 이 일대를 발굴하지 못하도록 통제했다.
(나) 발굴하지 말라는 벙커고지 유해를 발굴한 발굴하는 의미는 무얼까?
(제천 세무대학에 와 있는 미국 교수의 헌신적인 유해발굴 노력)
벙커고지는 미 제38-3대대 K중대가 고수방어를 했던 장소다. 처음 기습에는 돌파된 적도 있지만 바로 역습으로 탈환하여 중공군 공격을 막아냈다. 당시 제3대대장 헤인스 중령은 좌로부터 I. K. L중대 순으로 배치하는데 가장 신뢰하는 브란웰 대위를 벙커고지에 배치했다. 대대장 헤인스는 전원이 엄체홍에 들어갈 수 있도록 2~3인용 엄체호를 구축하고 교통호로 연결하도록 했다.
[나는 너희들을 포격으로부터 지켜 줄 튼튼한 엄체호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병력들이 어차피 지연진지에 불과 하다고 판단하여 제대로 엄체호를 구축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대대장은 부대원들에게 진지방어로 작전이 바뀌었다고 설명하며 능선을 쫒아 다니며 진지공사를 독려했다. 산기슭의 통나무를 베어 엄체호 목재로 쓰고 성토를 1m이상 하도록 독려하였다. 이렇게 하여 진지 점령 1주일이 지난 5월 8일 경에는 800고지의 둥근 정상에 23개의 엄체호가 완성되어 장병들이 벙커고지라 부르게 된다. 그리고 진지 전면에 경게철조망, 그 전방 150m에는 조명지뢰와 수류탄을 장치한 전술철조망을 쳤다. 그리고 이중 철조만 사이에는 대인지뢰 등을 매설했다.
[제8군사령관 벤플리트 장군, 제10군단장 알몬드 중장이 현장에 서다]
이곳을 헬리곱터로 방문한 지휘관이 미 제10군단지역에서 가장 강한 진지라고 칭찬을 했다. 5월 12일 축성이 끝난 상황에 모래주먼니 23만개, 철조망 385롤, 철주 6천개, 지뢰 3,955개였다. 이 모든 것을 정상에 올린 것은 한국 노무대대(700명)이었다.
[사단장님, 한가지 걱정은 적이 우리진지를 공격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5월 14일, 사단장이 헬리곱터에 대대장을 탑승시켜 전방어지역을 정찰시키고 약점을 찾으라고 한다. 이에 제3대대장 헤인스가 답하기를 너무진지가 완벽하여 중공군이 바보가 아닌 이상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 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약점이 있었으니 좌측소대정면에 있는 절벽이 너무 심하다는 이유로 적이 못 오를 것으로 생각하여 단선 철조망에 지뢰는 매설도 하지 않았다.
드디어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 되고 우측의 가리산이 피탈된다. 이에 연대는 돌파구 확장을 막기 위해서 대대의 좌측방 일부를 제9연대 일부가 담당하게 하여 하였다. 대대가 정찰대를 전방의 916고지에 보낸 결과 중공군이 다가서고 있었다. 이에 대대는 포병사격과 항공지원을 요청하여 소위 공격준비 파괴사격을 실시하여 적을 일부 무력화 시켰다.
드디어 5월 17일, 중대장 브란넬 대위는 전병력을 호 속으로 들여 보내고 만만의 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중공군은 이미 916고지에서 정찰대가 나오는 통로를 눈여겨 보고 있었고, 그 통로를 이용하여 은밀히 진출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날 따라 안개가 심하여 한치 앞도 보이질 않았다. 몇발의 조명지뢰가 터졌으나 곧 소화되고 잠잠해진 진지는 고요한듯 했다.
중공군이 이미 진지에 도달하고 있었다. 바로 눈앞이다. 수류탄을 던지고 진내에서 격전이 벌어질 상황이다. 이렇게 되자 일부 병력이 엄체호를 이탈해 뒤로 물러 나면서 순식간에 고지 정상이 중공군이 점령했다.엄체호 안에서는 주위의 상황을 알 수 없어서 불안감과 초조감이 항상 감돌게 된다.
모두가 물러 나거나 진지를 이탈하는 상황에 정상의 무반동총반 2명이 건재하여 그 혼란속에서 사격을 하고 있었다. 이 무반동총과 중대본부간의 전화가 통하고 있어 이를 통하여 대대장은 포병의 사격을 유도하도록 했다. 중대장이 정상의 기관총 진지를 찾아 갔을 때는 도망친 소대원을 찾으려 소대장은 보이질 않았고 선임하사관이 대대에 상황을 보고 있어서 이 전화기를 이용하여 대대에 역습을 요청했다. 이 무렵에 제3소대장은 도망친 소대원을 다시 규합하여 L중대의 좌측편에 진지를 점령하는데 무개호 였다. 하지만 중공군이 이곳으로 공격하지 않했다. 무반동총반이 포병사격을 유도하여 중공군 증원부대의 진출이 저지되었던 것이다.
[중대장이 무지원하 역습으로 정상을 탈환하다]
적이 잠시 주춤하는 사이에 역습을 감행하려는 중대장은 역습소대가 도착하고 포병의 지원사격을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박한 순간이었었다. 이에 중대장이 두 소대장과 35명의 병사를 이끌고 선두에서 18일 01시경 남쪽경사로에서 돌격을 감행했다.그리고 정상의 중공군 기관총을 제압했다 . 중대의 손실은 전사 1명에 부상 8명이었다. 날이 밝은 아침에 중공군 시체를 진지내에서 28구, 정면의 철조망 근처에서 40~50구, 그리고 도방가지 못하고 진지내에 남아 있던 2명이었다.
[반유개호에 남아있던 3명의 미군 병사, 히프. 리키. 로우]
나는 이 지역의 탐사를 위해 영주 세무대학에 교수로 나와 있는 미국인과 함께 벙커고지 일대를 정밀 탐사했다. 지뢰도 2발이나 발굴했으니 위험한 탐사였다. 이 미국인은 한국에 머무는 동안 이곳의 전사를 조명하기 위해 주변 주민들과 인터뷰도 하고 참전용사를 만나기도 하고 한국인 노무자를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진실을 규명하려 노력한 장본인이다. 서울 MBC에서 동행 취재를 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위의3명의 미군병사는 중공군이 밀려들자 고개를 숙이고 반유개호에 그냥 남아 있었다. 겁이 나니 총을 쏠 엄두도 못내고 중공군과 동료들이 죽기 살기로 전쟁을 하는 곳에서 숨죽이기고 있으면서 군화발이 밟고 지나가도 아프다는 말도 못했다 한다. 어둠이 주는 효과로 천명으로 살아났다. 중대장이 정상을 탈환하면서 한순간은 중공군이 움크리고 있는 줄로 알고 사격을 하였으나 곧 미군병사임을 알고 구출하게 되었다. 그런 반유개호를 이 교수는 알고 있고 나를 안내하여 밟고 지나가게 했다.
5월 18일 주간부터 정상적인 역습이 시작되었다. 포병이 연신 사격을하고 박격포가 예상되는 적 진지에 불을 뿜어대 포신이 녹아내릴 지경이 되었다.
[우리는 패한 것이 아니라 철수를 명령받았기 때문에 진지를 포기한다]
대대장은 분명 중공군의 역습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다시금 엄체호를 보수하고 진지 주변에 지뢰를 매설하고 철조망을 보강했다. 5월 18일 야간에 중공군의 역습이 시작되고 대대장은 준비된 진내사격을 요청했다. 엄체호 안에는 K중대 인원이 출입구를 막고 포병의 진내사격을 기다렸다. 이윽고 진지 상에 시한신관이 작열하고 기어 올랐던 중공군이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 중공군이 오르고 포병사격이 실시 되고 중공군은 무참하게 많은 희생자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때 우측방 제23연대 지역이 돌파되어 전선 조정이 불가피하게 되자 대대의 철수를 명하게 된다.
제 3대대장은 중공군의 전면 공격을 포병의 시한신관 사격으로 격파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의기양양하고 자신에 찬 얼굴로
자랑스럽게 산을 내려왔다.
(라) 가리산-매봉구간의 개인호 형태, 어론리-인제간 도로상에서 불타는 차량들과 이것을 가져가려는 중공군의 숨바꼭질
나는 이 벙커고지를 여러차례 올라섰다. 800고지에서 916고지 방향으로 그리고 당시 제3대대가 점령한 지역을 탐사했다. 분명 개인호에 유해가 남겨져 있다는 확신은 들었지만 발굴은 통제했다. 중공군이기에 말이다. 미군은 이곳 전투에서 공식적인 전사자는 1명이다.
지역주민들의 제보는 산에 올라 많은 것을 습득했다는 것과 전쟁 직후에는 잘못하여 지뢰가 터지고 불발탄이 터져 주민이 상하기도 했다는 내용이 많았다. 특히 가리산-매봉 구간에 개인호가 엄청 크다고 하였다. 이것은 국군이 아닌 유엔군이 점령한 지역은 많은 지역이 사전 우리 노무자를 동원하여 준비된 호를 구축하다보니 서양인원은 덩치가 크고 기관총 호가 많기 떼문에 당연히 호가 크다 . 실제 가리산-매봉 구간의 개인호는 크게 분포하고 있다.
여기서 특이한 사실은 전쟁 중에 중공군은 미군 차량이나 죽어간 유해를 보면 정신없이 여러 명이 달라붙어 달러나 시계 등 소지품을 가지려 혈안이 되었다고 한다.
미 제2사단이 수정된 노네임선으로 철수하면서 중공군에게 밀리면서 어론리-자은리 구간의 도로에 미군 차량들이 수십대 멈춰서 있고, 이걸 노획하여 가져가려는 미군 폭격기와의 숨비곡질이 시작된다. 미군은 중공군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폭파해 버리려고 비행기들이 출격하여 포격을 하고, 중공군은 길 옆의 마을이나 개울같은 곳에 숨기려 한다는 것이다.
(나) 국군 제1군단의 우측견부 고수
1951. 5. 16일 17시 30분, 중공군 제12군이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협조점이자 유엔군을 동서로 양단할 수 있는 요충지인 속사리를 포위하기 위해 공격을 개시하자 북한군 제5군단도 국군 제1군단 수도사단의 전방의 원통 일대에 공격을 개시했다.
간성
용대리 미시령
*827 속초
노동 저항령
원통 백담사 *882 마등령 설악동
제11-20연
*안산 *대승령 *972
원통 우화리 *1456
수도-기갑연 설악산
한계령 약수리
수도-1연
가리봉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의 공격에 일부 거점을 탈취당하기도 했으나 한계령에서 적의 진출을 저지하였다. 수도사단 기갑연대는 내설악에서 국군 제11사단은 외설악과 동해안을 연하는 선에서 북한군 제5군단의 진출을 저지하고 있었다.
국군 제1군단장은 미 제10군단과 국군 제3군단의 상황을 보고 받고 예하 부대들은 주저항선인 한계령-대청봉을 연하는 선에서 철수시켜 가라피-장승리-양양을 연하는 선에 새로운 방어선을 선정했다. 군단은 18일 12시 육군본부로 부터 와코선(미군의 수정된 노네임선상)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수령했다.
국군 제1군단장은 이에 대관령을 확보하는 것이 승패를 좌우할 것이라 판단하고 예비인 제11사단 제20연대를 차량으로 횡계리로 이동시키고 수도사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보냈다.
국군 제11-20연대와 수도사단 제1연대는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전투를 벌이며 5월 18일 유천리, 대관령을 연하는 선에 종심깊은 방어선을 형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 짙은 안개를 틈타 중공군이 침투했다. 양 연대는 축차적인 방어를 하며 21일 야간에 횡계리 대관령 일대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5-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가) "한계령에서 내 부대원이 다 죽었소~!" (윤흥정 장군의 눈물, 당시 수도사 기갑연대 대대장)
6.25전쟁 기념사업회 사무총장이신 윤흥정 장군(전 국방차관)이 나를보자고 한다. 수도사단 출신인 고 이종록 선배님과 함께 기념사업회로 찾아갔다.
"이중령, 내 소원좀 들어주게, 내 부하들 유해를 찾아 주게나!"
"네? 제가 무슨 그런 역할을 할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내가 대대장을 하던 때가 중공군 5월 공세인데 우리가 설악산에 머물고 있었어요"
"그럼 제1기갑연대가 내설악에 있을 때에 중공군 5월 공세가 시작되었습니까?"
"그래요, 우리는 5월 공세인지 6월 공세인지 잘 몰라요. 우리는 그 당시에 북한군과 대치하며 사실 북진 중에 있었거든"
"그런데 한계령에서 어떻게 대대가 많은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까?"
"아니 상부에서 철수하라며 한계령으로 내려서라는 거야. 그래서 한계령에서 가리산 방향의 능선을 타고 병력을 배치하는데 이미 적이 들어와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있었지"
"그렇다면 전사책에 나와 있는 내용이 조금 오류가 있다고 봐야겠습니다. 북한군 제5군단의 일부부대가 침투하여 주요 목을 지키고 있었다고 기록되어야 맞겠습니다"
"그래요, 우리는 대낮에 한계령 남서쪽 능선에 저지진지를 구축하고 있고 일부는 한계령 일대에 집결되어 있는데 여기저기서 북한군이 나타나 일대 혼란이 발생했고 많은 병력이 희생되었어요. 대대가 무력화 되어 버렸어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곳 일대를 탐사하여 유해를 찾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한계령에서 가리산방향으로 탐사를 시작했다. 활엽수가 우거져 있고 능선상에는 조릿대가 무성하게 엉켜자라고 있는데 살펴보니 개인호가 다수 확인되었다. 그리고 발굴작전이 시작되었는데 한계령 바로 남서쪽 능선 일대에서는 유품은 발굴되는데 유해는 찾지 못했다. 가리산 일대는 그래도 많은 유해를 발굴한다.
다시 윤흥정 장군님을 찾아 그간의 실태를 말씀드리려 찾아갔다. 하지만 그 사이에 장군님이 영면에 들어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정말 세월은 기다려 주지않는다는 말이 분명했다.
(나) 중공군이 왔다는 곳이 이곳 유천리-대관령 선상에는 없다.
지역주민이 본적이 없다고 한다, 운두령선까지 온 것이 아닌지, 중공군과 혼성 4개 연대가 공격했다고 전사 기록
한국전쟁사 8권 5448페이지에 보면 "국군 제1군단장은 대관령을 확보하는 것이 승패를 죄우할 것이라 판단하고 군단 예비인 국군 제11사단 제20연를 차량에 탑승시켜 횡계리로 이동시키는 한편, 수도사단 제1연대를 대관령으로 보냈다.
국군 제1연대와 제20연대는 한계령 일대에서 북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임과 동시에 5월 18일에는 유천리, 대관령을 여하는 선에 종심깊은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이런 상황에서 5월 21일 10시경 짙은 안개를 틈타 중공군이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제11-20연대 우측의 제3대대를 공격했다. 대대는 백병전이 포함된 격전을 벌였으나 중과 부족으로 18시에 철수를 개시하여 22시 50분경 연대 전술지휘소가 위치한 횡계리로 도착한다. 이에 제1대대는 격전은 없엇으나 고립될 것을 고려하여 싸리재로 철수했다.
국군 수도사단 제1연대 제2대대는 광정면을 담당하여 중공군과 전투를 하다가 1150고지 일대로 철수한다. 제1선에서 3선까지 축차적으로 철수하며 공산군의 진격을 저지하던 제1연대와 제20연대는 5월 21일 야간에 대관령 일대의 제4선에 방어진지를 편성했다."
중공군의 항미원조사(중국군의 한국 전쟁사) 2권 518~521페이지에 보면 5월 19~20일, 미 제3사단이 동진하여 풍암리, 하진부리에 도착하여 전역 돌파구를 봉쇄하였다고 쓰여 있다. 더이상 부대 식량이 떨어지고 현지에서도 보충할 여건이 못되며 이미 한국군은 궤멸되어 후방으로 물러난 상황에서 미군이 작전지역에 투입됨으로써 자국군의 피로도가 상승하고 전투력 복원이 어려우니 후방으로 철수하여 휴식과 정비를 한 후에 다시 기회를 봐야한다는 건의문이 일선 지휘관들이 팽덕회에게 팽은 다시 모택동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일부 부대가 운두령 일대에서 포위되어 격멸되고 유엔군은 반격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 지역 일대에서 탐문 및 탐사활동을 하면서누구한테도 중공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물론 만난 사람들의 증언이 100% 맞다던가 전부일 수는 없다. 하지만 피난을 가지않고 마을에 남아 있던 분들은 연로한 분이거나 어린 나이인데 그래도 그 기억은 실제 목격담이기에 신뢰할 수 있다고 봐야 한다. 다행히 북한군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는 많았다.
(5) 유엔군의 반격여건 조성(돌파구 차단 작전)
미 제8군은 중공군이 공격을 개시한 5월 16일부터 2일이 지나자 중공군의 주공이 미 제10군단 지역으로 집중되었다는 것을 인식했다. 제8군사령관은 수정된 노네임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한 후 미 제8군 예비인 미 제3사단, 미 제9군단의 예비인 제187공정연대, 호남지역에서 공비토벌작전 주인 국군 제8사단을 미 제10군단 지역에 투입했다.
(가) 국군 제3군단의 철수 작전
군단은 5월 17일 야간에 현리에서 중공군의 추격을 받으며 험준한 방태산(1436)을 넘어 철수하는 동안 다수의 공용화기와 무전기를 버리고 고지 정상으로 국 제3-18연대의 엄호를 받으며 철수하였다.
이 당시에 현리-용포 도로 상에는 미 전폭기들이 군단이 파기하지 못하고 유기한 차량과 포차들을 끌고 북으로 북상하는 적들에게 소이탄과 기총소사로 파괴 도는 소각하였다.
당시 군단은 상부의 명에 따라 와코선(1009-창촌리-오대산을 연하는 선)을 점령하기 위해 일부는 방태산-구룡덕봉-광원리-창촌으로, 주력은 내린천을 따라 방태산-남전동-광원리-창촌을 목표로 철수하였다.
그러나 중공군의 일부가 이곳에 먼저 도착하여 광원리에서 창촌에서 적의 기습으로 많은 피해를 입고 계방산(1577)과 오대산 사이에 있는 을수재를 넘어 하진부리로 철수하게 된다. 하지만 2일간의 굶주림과 피로로 다수의 병력이 체력 한계점에 도달해 철수를 포기하고 포로가 되었다. 결국 이 상황으로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국군 제9사단과 제3사단은 국군 제1군단과 미 제10군단에 다시 배속되게 된다. 당시에 양 사단의 병력 수준은 제3사단이 34.2% 수준의 3,621명, 제9사단이 40.0%수준의 4,5872명이었다.
군단이 재편성을 서두르고 있을 때에 북한군과 중공군으로 혼성 편성된 4개 연대규모의 적이 군단의 저지선을 돌파한 다음 하진부리-강릉 도로를 차단하려는 듯 공격을 계속하였다. 이때 제3사단은 유천리 북쪽에 3개 연대를 종으로 배치하고 제9사단도 제30연대와 제28연대를 속사리 부근에 배치하여 적의 진출을 저지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아 제3사단은 정선으로, 제9사단은 대화 쪽으로 다시 철수하여 속사리-하진부리선이 붕괴 되었다.
(나) 미 제3사단의 돌파구 차단
계방산 1577
운두령
흥정산 1277 *1325 *1324 회령봉 *보래령 *`1272 *1795
*953 미 제7연
속사리
창동리 *645 *924
미 제65연 *1003
장평 삼거리 *1095 *백적산1141
미 제65연 장평리 미 제7연
국군 제3군단의 현리 철수작전으로 유엔군의 중동부 전선은 벙커고지-풍암리-속사리-철갑령을 연하는 선에서 대돌파구가 형성되었다.
제8군사령관은 돌파구 확장을 저지하기 위하여 18일 자정에 예비로 서울에 대기 중인 미 제3사단 제7연대와 경안리에 집결 중인 제65연대를 긴급히 제10군단의 우전방으로 이동시키도록 하였다.
19일 아침 미 제10군단에 배속된 미 제3사단의 정찰대가 속사리-하진부리 일대를 정찰한 결과 적정이 미흡하자 제15연대를 풍암리 북쪽에 추진 배치하여 국군 제7사단과 협조, 횡성-풍암리 축선에서 적을 저지하였다, 이날 미 제2사단 제23연대도 한계리에서 중공 제118사단의 공격을 , 프랑스 대대는 중공 제31사단의 공격을 저지하였다.
19일을 전후하여 중공군의 공격기세는 현격히 둔화되고 미 제3사단은 제7, 65연대가 백적산과 장평리에 진출하면서 적이 운두령에 집중 배치된 것을 확인하여, 21일 사단은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을 하여 순조롭게 진출하는 도중에 속사리-하진부리를 방어하고 있던 우측 국군 제3군단이 적의 기습에 돌파되면서 철수하는 바람에 일시적 위험에 봉착하기도 했다.
사단은 다시 22일 공격을 재개하여 우세한 화력으로 18:00시경 운두령을 탈환하여 중공군의 진출이 저지 되고 공세이전의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다) 대관령 확보 전투
오대산 1563 제26연대
*1560 *동대산 1343 *노인봉 1338
진고개 *황병산 1407 매봉 1173
을수재 월정사 제1-2대대 *1150
*1359 *1167 건봉 1157
제20-3대대 백일평
*967 *장군암 1140
제20-2대대 싸리재 대관령
국 제3사 제1-1대대
유천리 *투구봉 *941
909 칼산 횡계리 제1-3대대 *능경봉
국 제9사 제20-1대대 1123
하진부리 *988
국군 제1군단은 중공군의 5웕 공세를 맞아 설악산-속초선에서 분전하였으나 육군의 명으로 19일 제3군단과 전선을 조정하기 위해 오대산-두노봉-남애리를 연하는 와코선으로 철수하였다.
이때 군단은 군단의 전투지경선을 따라 진출하는 적을 저지하기 위해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를 군단 좌측방 후방의 유천리-횡계리에 배치하였다. 그런데 21일 제3군단의 속사리-하진부리선을 돌파한 중공군 일부가 대관령과 강릉을 목표로 경강국도로 진출하여 재20연대와 격돌하게 된다.
따라서 강릉의 비행장과 군수품 등의 집적장소로써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군단은 대관령 확보가 필수라 결론짓고 수도사단은 대관령을 확보하고 제11사단은 정면의 적을 저지하도록 하였다.
강릉에서 정비중이던 수도사단 제1연대는 적정도 알지 못한 채 긴급히 대관령으로 이동했다. 22일 새벽에 벌어진 전투에서 제11-20연대(제1연대 2대대 증강)백일평-대기리 선에서 저항했으나 1개 연대 규모의 적이 방어선을 돌파하여 대관령으로 진출한다. 그러나 곧바로 아군의 공격에 물러나면서 2개 대대규모의 증원을 받아 이번에는 능항봉으로 우회 공격을 하였으나 다시 격퇴되었다.
적은 다시 2개 대대규모로 횡계치를 공격했으나 아군의 협동작전과 동해안의 함포지원에 분산철수하게 되었다. 이에 아군은 23일부터 바로 재반격을 개시하게 된다.
(라)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 백일평 일대는 험준한 준령지역으로 실제 전투 흔적이 적었다.(투구봉, 칼산에서 유해발굴)
제20-3대대 백일평
*967 *장군암 1140
제20-2대대 싸리재 대관령
국 제3사 제1-1대대
유천리 투구봉989 칼산 942 횡계리 제1-3대대 *능경봉
국 제9사 제20-1대대 1123
하진부리 *988
백일평 일대는 1,000m고지군이다. 사실 이곳에서 정상적인 공격대형으로 공격은 불가하다. 반대로 방어는 산골마다 은폐엄폐가 용이하기 때문에 공격부대를 물리치기 좋다
하지만 우리 전사에는 공산군 혼성 4개 연대가 이 일대를 공격하여 방어중이던 제3사단과 제9사단의 속사리-하진부리 선이 무너지고 제3군단이 철수하게 되어 미 제3사단이 돌파구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이 곳으로 투입되어, 운두령에서 중공군 5월공세의 최후를 선물하여 다시는 중공군이 이 땅에서 볼 수 없게 되는 현장이다. 반면에 국군 제3군단은 해체되고 제9사단 미 제3사단에 배속된다.
[땅벌집에 유해가 있다]
우리가 이 일대에서 탐문 및 탐사 간 찾아낸 것은 작은 도사리에서 지역주민의 제보로 몇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제보자 축사 바로 옆에 밭둑이 있는데 땅벌이 집을 짓고 살고 있는데 손을 댈 수 없어 지금까지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사장님 혹시 유해가 국군인지 공산군이지 아세요?"
"그때 네 나이가 5살이고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지. 그리고 나중에 군에 갔다 오니까 아버지가 알려 주었는데 3구가 있다고 했다. 그때는 땅벌이 없었는데 한 5년 전부터 이곳에 땅벌이 살고 있다. 건드리지 않으니 그대로 산다"
"혹시 중공군이 들어 왔는지 모르세요?"
"중공군은 보지 못했고 북한군은 자주 보았다. 이 동네는 프락치도 없었던 걸로 안다. 워낙 그 당시는 산골이라 몇 가구 살았어요. 국군이나 경찰도 오곤 했는데 들어 와서는 바로 떠났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곳에서 유해를 증언 내용대로 발굴하고 땅벌은 제거하여 드렸다. 그리고 도사리 북쪽 900m능선을 탐사한 결과 600여 개의 개인호가 식별되어 유해 3구가 발견된다.
2) 칼산, 투구봉, 차항리에 유해가 많았다
이곳은 사실 전사가 명확하지가 않다. 물론 산악지형이란 특징도 배제할 수는 없다. 대관령을 동서의 축으로 하여 동쪽은 제1군단이 서쪽은 제3군단이 방어를 전담하고 했다.
[중공군 2월 공세후 개시되는 대관령 일대의 전사는 다음과 같다]
[킬러작전]
중공군 2월공세 후 유엔군 반격작전인 제천-영월지역의 돌파구에 들어온 공산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한 킬러작전이 2월 21~3.4일간 실시된다. 이를 위해 '51.2.21일 10시에 미 제9군단은 횡성을 점령하기 위해 4개 사단 병진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에 미 제9군단, 그 우측 미 제10군단과 더불어 킬러작전의 한 축이었던 국군 제3군단이 오대산을 중심으로 수도사단이 동쪽에서, 제7사단이 서쪽에서 공격을 , 제9사단은 에비로 송계리에 집결한다.
킬러작전이 계시되자, 제3군단은 수도사단의 제26연대를 횡계리에, 제1연대를 강릉에 배치하여 방어진지를 강화하는 한편, 좌인접 미 제10군단의 공격을 엄호하기 위해2월 25일 좌전방 제7사단을 평창-창동리 도로를 따라 공격케하였다.
공격이 순조롭게 되자, 미 제7사단의 공격을 지원하기 위해 수도사단 1개 연대를 신속히 속사리로 투입하여 적의 퇴로를 차단하도록 하여 수도사단은 횡계리에 대기중인 기갑연대를 속사리로 진출시켰다. 그러나 5일간 지속된 폭설로 대관령-횡계리-구산리 간의 도로가 차단되어 제설 작업 후 3월 1일에 이르러서야 경강국도를 중심으로 북쪽과 남쪽에 각각 1개 대대씩 투입하여 병진공격을 할 수 있었다.
이 무렵 영월 부근에서 철수한 북한군은 발왕산.속사리.월정사 부근에 종심진지를 편성하고 아군의 진출을 저지하고자 한다. 그리고 일부는 계방산-오대산-황병산을 연하는 산악지대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유격전을 기도하였다.
군단에서는 거문리 일대에서 제7사단 제5연대와 교전 중인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3월 1일 중으로 속사리에 진출하도록 독촉한다. 그러나 제설작업이 지연되어 3월 2일 하진부리에 진출항여 접적이 개시되어 속사리 하진부리간의 중간 지점인 발왕리에서 야간방어로 전환한다.
그러나 22시경 제1기갑연대의 후방을 엄호하던 제26연대 제3대대와 연대의 퇴로를 차단하려는 적이 3일 04시까지 유천리 일대에서 백병전을 치렀지만 다수의 피해를 입어 08시에 차항리로 찰수한다. 이로써 제1기갑연대의 퇴로가 차단되어 버렸다. 혹한 속에서 기갑연대는 여명을 기해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야음을 이용한 적이 연대를 포위하게 되었다. 이에 사단자은 철수명려을 내리고 제26연대로 하여금 유천리오 재진출하여 기갑연대와 연결하도록 한다.
결국 기갑연대는 방어와 적진 돌파를 반복하며 월정동. 광천리를 경유하여 4일 자정경 적의 추격에서 벗어나 대관령 서쪽 가사두에 집결했다. 기갑연대는 철수 작ㄷ전간 300여 명의 적을 사살했다. 그러나 전사 59명. 부상 119염. 실종 802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와 81mm박격포 11문. 60mm박격포 18문. 3.5인치 로켓포 10문 등 다수의 장비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실종자 대부분은 다음날 복귀하였다.
결국 적 주력을 포위 섬멸하기 위해 실시돤 킬러작전은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으로 악천후와 싸워나가는 힘겨운 진군이 되어 2.21~3.6일까지 14일간의 추격작전은 미 제9.10군단이 횡성-평창의 목표까지는 도달하는데 성공하고 적에게 큰 피해를 주었지만 목표선인 아리조나선 이남의 모든 적을 섬멸한다는 당초의 목표를 달성하지는 못했다.]
이상의 내용에서 속사리와 하진부리, 차항리, 황계치의 주 격전 부대는 중공군이 아닌 북한군이었고, 아군은 수도사단 기갑연대와 제26연대였으며 가문리 일대에서 전투한 제7사단이 일부 포함된다.
[리퍼작전]
다시 진행되는 리퍼작전(절단작전으로 아이다호선 확보(춘천선)으로 서울을 신속하게 탈환하기 위한 작전이 3월 7일 08시를 기해 실시된다. 그리고 3월 15일 서울을 탈환하고 춘천을 점령하자, 미 제8군사령관은 3월 21일 리퍼작전을 확대하여 임진강 하구-문산북쪽-의정부 북쪽을 연결하는 아스펜선으로 진출하고 (1단계작전) 2단계에서는 임진강에 연하여 설정된 벤톤선을 점령하는 "용기 작전"을 계획하고 3월 22일 08시에 10-16km전 방의 카이로선을 향해 진격한다.
여기서 후퇴하는 공산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문산 북방에 제187공정단을 투하하는 "토마호크 작전"을 23일 07시에 대구비행장에 이륙하여 실시되며 여러 시행착오(비행기 고장 등)를 극복학고 낙하하게 되며, 그루우던 특수임무 부대가 23일 오전 카이로선의 국군 제1사단을 초월하여 1번 축선으로 진출 공정단과 연결하도록 하였다. 당시 공산군은 북한군 제19사단 제36연대였으나 이미 많은 병력이 임진강을 건너 철수하였다.
당시 미 제10군단은 리퍼작전의 조공으로 한계-풍암리-태기산-계방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을 목표로 공격하게 된다. 제10군단장은 좌측 횡성-풍암리간 소로와 우측 평창-방림리-속사리 도로를 따라 진격토록 하고, 미 제2사단과 미 제7사단을 배치하고 구군 제5사단을 양 도로 사이의 산악지역을 담당하게 한다.
이때 국군 제5사단은 중공군 2월 공세 이후 국군 제1군단에 배속되어 단양-풍기간 주보급로 경계임무를 수행하면서 부대 정비를 하던 중에 미 제10군단에 배속되어 운교리-안흥리 지역으로 진출하여 제36연대를 지구리에, 제35연대를 월암동에 배치하여 3월 7일 벌교산-태기산-속사리를 목표로 3개 사단 병진을로 공격을 개시했다. 당시 제5사단은 횡성에서 사단을 공격했던 북한군 6사단으로서 이들은 북한군 제12사단으로부터 1개 연대를 지원받아 태기산으로 연결되는 고지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사단은 14일 적의 최후 거점인 태기산을 점령하고 신대리-백운동 선으로 진출한 후 15일에는 북쪽의 운무산(980)-흥정산(1277)의 아이다호선으로 진출하게 된다.
국군 제5사단의 좌전방 미 제2사, 우전방 미 제7사단도 13일 전후 공산군의 저항을 극복하고 알바니선으로 진출하고 17일에 최종 목표선인 아이다호 선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을 종료하였다.
한편 리퍼작전의 또다른 조공인 국군 제3군단은 최종 목표선인 계방산-황병산을 연하는 아이다호선까지 약 16km가 남아 있었다. 유재흥 군단장은 제7사단과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공격부대로 투입하고, 미 제10군단에서 복귀한 제3사단을 군단예비로 하여 국군 제1군단으로 배속이 전환된 제9사단의 정선 일대를 인수하도록 했다.
국군 제7사단은 좌전방에 제3연대를 상대화-백적산(1141)-잠두산(1241)을 경유 속사리로, 우전방 제5연대를 대기에서 백석산(1364)-박지산(1391)-형제봉을 경유 하진부리로 각각 진격하게 했다. 3월 6일 08시에 2개 연대 병진으로 공격하게 된다. 이때 우전방 지역에 북한군 제27사단이 형제봉과 박지산으로 남하 중이라는 정보보고에 의해 배속된 해병 제1연대를 투입하여 해병연대는 발왕산과 봉산리 일대로 3월 6일까지 진출했다.
해병연대를 배속받은 제7사단은 3월 7일 공격을 개시하였지만 백적산.백석산 일대의 적이 완강히 저항하여 8일에는 예비인 제8연대까지 투입하여 결국 제3연대가 7시간의 일진일퇴의 공방전으로 백적산을 탈취하였다.
군단장은 하진부리를 조속히 점령하여 북한군의 퇴로를 차단한다는 목적하에 군단 예비인 제3사단 제18연대를 전방에 투입했디. 북한군이 3월 10일 2개 연대로 대규모 역습을 해왔으나 백적산-거문리-형제봉 선으로 격퇴하고, 11일 속사리와 하진부리를감제할 수 있는 백적산이 확보되자 북한군의 공격지세는 현저히 둔화되고 12일에 최종목표인 속사리와 하진부리를 점령하고 경강국도를 통제하게 된다.
한편 국군 제7사단의 우전방을 방어하던 제1해병연대는 3월 7일 봉산리의 제3대대가 국군 제7-5연대가 철수하여 적중에 고립되어 제3-18연대가 군단의 우전방으로투입될 때까지 공중투하 보급을 받아가며 북한군의 기습공격을 수차례 격퇴하였다. 제18연대가 투입되면서 북한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제1해병연대는 13일 09시를 기해 공격으로 전환하여 최종목표인 외차래지까지 진출하였고 15일 다시 차항리로 이동하여 작전지역을 제3사단 제22연대에 인계한다. 그리고 16일에는 미 제9군단의 미 제1해병사단에 배속되어 홍천으로 이동하였다.
제3군단은 3월 25일 후방지역의 패잔병 소탕작전을 제7사단에 전담시키고 제3사단으로 하여금 경강국도에서 카이로선인 현리-하서림 도로를목표로 공격을 게시하여 27일 카이로선상의 하서림을 확보하고 30일에는 제23연대가 조개동으로 진출한다.
한편 국군 제1군단은 리퍼작전이 개시되기전 미 제10군단에서 작전통제가 해제되어 3월 5일 강릉으로 복귀하였다. 이때 제3군단으로부터작전지역 일부를 인수받고, 제9사단과 수도사단을 배속받았다. 이 당시에 이미 군단은 황병산-하평동으로 진출하여 리퍼작전의 최종 목표인 아이다호에도달해 있었다.
이 당시에 군단 작전지역내에는 북한군 제10사단이 패잔병과 지방 게릴라 2,000여 명으로 재편성하여 북상 중이었다. 이에 군단장은 제9사단을 투입하여 패잔병을 소탕하게 하면서 18일에는 수도사단으로 연곡천 북쪽지역에 대한 강력한 수색정찰을 명하였다. 이때 국군 제1군단 정면의 적은 북한군 제69여단으로 북으로 철수한 제10사단의 일부 병력을 증원받아 하월천리-만월산-명지리 축선에 축차진지를 편성하고 있었다.
상황이 급진전 되자 수도사단장은 대관령 너머의 유천리와 차항리 일대에 배치한 제26연대를 양양 남쪽의 인구리로 이동시키고, 사단 예비인 제1기갑연대를 강릉에서 주문진으로 이동시킨다. 사단으 27일 남대천을 도하해 양양으로 진출한 후 양양-인제, 양양-서림리 간의 차단진지를 점령하였다. 북한군은 란계령에 이르는 설악산 입구의 387고지에강력한 진지를 구축하여 제1연대의 공격이 실패하였다. 제1연대는 다시 동해안의 함포사격 지원에 387고지를 점령하게 된다. 이에 북한군은 오색리를 경유하여 설악산으로 퇴각한다.
이상의 킬러작전과 리퍼작전간 중공군은 이곳 속사리-하진부리-횡계리지역에 중공군은 보이질 않는다. 따라서 중공군은 이곳에 들어오지 않았고 운두령 일대에서 진출이 멈추고, 속사리-대관령 구간, 경강국도변은 북한군이 국군과 격전을 벌였다고 봐야한다.
따라서 유해발굴은 주로 이목정리-유천리간 도로주변의 고지에서 이루어 지고, 차항리 일대는 낮은 구릉지역에서 유해가 발굴되었다. 속사리 지역의 고지군에서 1500여 개의 개인호를 식별하여 발굴한 결과 2구가 발굴되었다.
[뱀이 많이 나오는 칼산~]
칼산 지역은 차항리지역에서 탐문활동간 한 주민이 동행하여 탐사를 같이 했다. 주민의 이야기는 전쟁 중에 비행기뿐만 아니라 포탄사격이 있어서 바위군이 파편처럼 변하여 동네사람들이 들어가고 싶어도 뱀이 많아서 가지를 못했다고 한다. 바로 산 입구에 본인 밭이 있어서 항상 가면은 주변에서 처음에는 전투화나 반합 등을 주어서 집으로 왔다고 한다.
칼산 바로 서쪽에 투구봉이 있다. 이곳은 뱀이 나오지 않아 사실 전후에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 많은 유품을 가져갔고, 특히 철모를 많이 주워왔다고 한다. 본인이 올라가 보니 온전한 전사자는 보이질 않았다. 모두가 사람이 조각조각 본해되어 흩어져 있었다 한다. 당시는 탄피를 주로 주워 오기 위해 나이 불문 서로 먼저 오르려고 했다고 한다
우리는 이곳 칼산과 투구봉 일대에서 10여 구의 유해를 발굴한다. 하지만 모두 노출된 부분 유해로 나와 얼마나 전투가 치열했는지 알 수 있었다.
또 이곳 유천리 호명리 745고지에서 개인호 100여 개를 발굴하여 6구의 유해를 발굴하고 유천리 장군 바위산은 개인호 200여 개를 발굴했으나 유해를 확인 못했다.
[봉평 무이리(707고지군), 면온리(887)]
무이리 708고지군은 전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탐사활동간 전투지역이라는 제보에 조사팀이 탐사를 실시한 결과 개인호가 300여 개 있었다. 제보자 강희봉씨가 말하길 어렸을 적에 아버지에게도 들었고 본인이 직접 산에 소먹이용 꼴을 베러 올라갔을 때 유해를 목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곳에서 3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봉평면 면온리 887고지는 개인호가 400여 개 식별되어 유해 9구가 발굴된다.
[이목정리, 국군이 차로 유해를 실고 와서 묻었다, 그리고 송장골이 되었다]
제보지역으로 당시 어린나이에 이 지역에 살고 있었던 박명동씨가 직접 목격한 사실에 근거하여 능선사에 분포된 예상 장소를 13개소 선정하여 발굴하게 된다. 전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에 어느날 국군이 전사한 군인을 차고 실고 와서 묻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후에 미군이 찾아와 유해를 발굴하겠다고 하며 발굴을 하다 나오는 실태가 미군이 아니므로 다시 묻었으며 동네에서 지금까지 송장골이라 불러온다 한다. 우리는 이곳을 제보자를 동행하여 발굴결과 13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차항리, 인식표와 함께 3구 발굴]
지역주민 한일우씨가 10세였을 때에 이곳 횡계리 지역에 전투가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날 국군이 3명의 전사자를 묻는 것을 직접 목격했고 그 후로 그 자리에 사료용 옥수수를 숙성시키기 위해 흙으로 덮었다고 한다.
이곳을 발굴결과 유해가 훼손되지 않고 발굴되어 3구 모두를 제보 내용대로 발굴이 되었고 인식표가 2개 식별되는데 한 분은 K1136922로 수도사단 제1연대 제3대대 제11중대 소속이었다. 다른 한 분은 K1137835로 역시 제1연대 제3대대 제11중대였다.
(6) 용문산 승전보
공산군은 5월 16일 공격을 개시한 주공부대들이 중동부 전선의 주저항선을 돌파하자 중서부 지역의 유엔군을 고착, 견제하여 중동부 전선으로 유입을 차단하고 그들 주공 부대의 진출을 지원할 목적으로 17일 조공부대를 북한강 계곡으로 투입하여 중서부 전선에서도 혈전이 시작 되었다.
이 기도의 일환으로 중공군 제19병단 예하 제63군의 3개 사단이 북한강과 홍천강의 합류 부근을 방어 중인 미 제9군단의 중앙사단인 국군 제6사단을 공격해 왔다.
당시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 중공군 4월 공세로 물러난 후 전선 조정에 따라 노네임선의 용문산(1157) 일대를 점령하고 방어에 주력하였다.
중공군의 5월 공세가 임박하여 제6사단장은 주저항선이 북한강에서 12~17km 떨어져 있어 방어에 불리하다고 판단하고 제2연대를 홍천강 남쪽에 배치하여 주저항선인 용문산 서쪽에 제19연대, 동쪽에 제7연대로 방어진지를 구축했다. 그리고 사단 수색대를 홍천강 북쪽에서 일반 전초로 파견하였다.
북한강 중공군 187사단
중공군 187, 188사단
청평댐 청평호 미사리 마곡리 홍천강
울업산 장락산맥
송산리
신천리 *장락산
창촌
무명산 *나산
마치고개
*벽암산 *427 설곡리 국6-2연대 미7-17연대
국2-31연대 국6-2연대
당시 좌인접 국2-31연대는 화야산에서, 우인접 미7-17연대는 두능산에서 철수하여 제2연대만 청평호 남쪽의 요지를 방어하고 있었다. 18일 낮에 중공군은 중대규모로 도하공격을 시도하다 격퇴되었다. 어둠이 오자 울업산에 대대규모로, 우전방 장락산맥에 연대규모로 도하공격을 감행하였으나 5개 포병 대대의 화력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격퇴하게된다.
그러자 적은 이 일대가 주저항선으로 오판한 듯 19일 새벽에 제187, 188사단을 투입하여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러나 홍천강변의 감제고지인 559고지의 제1대대는 항공지원 속에서 진지를 사수하였다. 그러나 계속적인 적의 파상공격으로 축차적으로 포위망을 탈출하여 나산의 지휘소로 철수한다.
중공군은 이번에는 우전방에 예비 1개 사단을 투입하여 울업산 일대를 공격하여 제2대대는 항공 폭격의 엄호속에 427고지로 철수하게 된다.
계속되는 적의 공격으로 탄약과 식량이 부족한 상황에서 적은 총공격을 개시하여 제1대대는 나산에서, 제3대대는 353고지에서, 제2대대는 427고지에서 전면방어 진지를 구축하고 조명지원하에 진내로 진입하는 적과 백병전으로 맞서 결국 적을 격퇴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19일 밤에 미 제8군사령관은 중동부 전선에서의 적의 공격이 현저히 둔화된 점을 고려 즉시 재반격작전으로 돌입, 중서부 전선의 미 제1, 9군단에 문산-포천-춘천을 연하는 토페카선으로 공격을 명하였다.
공격명령을 수령한 사단장은 20일 05:00시에 제7연대와 제19연대를 공격으로 전환하여 북한강 남안으로 진출하자 중공군은 포위공격을 우려하여 서둘러 강 북쪽으로 철수를 개시하여 제2연대와 연결하게 되었다.
결국 중공군은 이곳 장락산맥 일대의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입었고 반면에 국군 제6사단은 사창리에서의 굴욕적인 패배의 불명예를 씻고 중부전선의 절단을 막아냄으로서 공세이전의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7-1) 유해발굴 위한 탐사 및 탐문 결과
1)참전용사 김달현(제3대대)의 전투현장 방문
김달현 용사는 사창리에서 중대장의 무전병이었다. 무전차 옆에 서있는데 갑작스레 꽝소리가 나고 아수라장이 되었다. 중공군이 여기저기서 꽹고리 치고 피리 불고 난리다. 이미 지휘하는 중대장도 소대장도 보이질 않았다.
남쪽으로 산을 올랐다. 매봉산인지 화악산인지 모른다. 무작정 남쪽으로 올라갔다. 북진작전시 희천에서 포위되어 죽다 살아난 악몽이 살아났다.
중대장님 중대장님 ?
야 소리죽여, 이리 따라와
네,알겠습니다
무전기 메고 있냐?
아닙니다, 적 박격포에 반쪽이 날아가 쓸 수 없게되었습니다
알았어, 빨리 따라와
우린 산을 넘었다. 여기 저기서 나뭇가지가 흔들거리는데 중공군은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만난 전우가 열이 넘었다. 우리 중대장 통제로 어디쯤 왔는데 나중에 보니 가평이었다. 영국군이 우리를 엄호하여 우린 꽤나 많은 인원이 모여들었다. 그리고 다시 걸어서 뒤로 물러났다. 한강을 건너 무슨 동네에 들어왔는데 여기서 처음으로 밥 같은 것을 먹었다.
[엄소리 342고지의 추억!]
야, 빨리 호를 파라, 여기서 더이상 물러나지 않는다
중대장님, 대대는 어디에 있습니까? 전화선을 연결해야 합니다
야 지금 전선을 연결하지 못한다. 새로 받는 무전기를 호 속에 넣고 보호해라
알겠습니다
달이 오른다 . 저 멀리에 짖어대는 개소리도 들리고 봄이 와서 온통 산이 녹색으로 변하고 있다. 전우들은 다 죽었는지 포로가 되어 중공군에 잡혀갔는지 지금 중대원은 대부분 신병들이다. 알고 있는 전우는 10명 남짓이다.
김상병님, 오늘 밤은 조용하게 지낼 수 있겠지요?
뭐라고, 너 이리와라 중대장 호에 들어와라. 중대장님은 저 앞으로 점검 나갔다.
가도 됩니까, 여기도 보초가 있어야 해 괜찮아
하지만 이 대화가 마지막이었다 한다. 조신병이 중대장 호로 걸어오는 순간 중공군의 박격포 공격이 시작되어 진지가 난리가 났다. 한순간이다. 다시 또 사창리의 비극이 시작되는 듯했다. 중대장 호 주변에 중공군이 기습하여 육박전이 시작되었다. 용사님은 무전기를 감싸안으며 대대에 포탄 사격 요청을 했다.
진지 순찰을 나갔던 중대장이 뛰어들고 박격포는 여기저기 꽝꽝거리는데 주변에서 죽어가는 소리가 윽윽하고 들린다. 호를 파고 들어가 있는 전우들이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고 달려드는 중공군을 향해 총을 쏘고 대검으로 질렀다.
그러더니 이내 우르릉 꽝 하고 포탄이 작열한다. 아군 포병이 쏜 포탄이 진지 상공에 터지기 시작한다. 무슨 폭탄인지는 잘 모르지만 하늘에서 번쩍이고 주변이 불바다가 되었다. 몰려들던 중공군이 순식간에 까맣게 타버린다. 얼마가 지난는지 철수 명령이 있어 철수를 했다. 이번에는 많은 전우가 중대장을 따라 철수를 함께 했다. 계속하여 고지에는 불폭탄이 터지고 있다. 여름을 맞이하는 나무들도 모두 불에 타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그날 산에 기어오른 중공군은 모두 불고기가 되었다고 한다. 사창리의 재판이 성공했다. 중공군은 강을 건너 북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의정부 전투에서 도망쳐 산속에 숨어 전쟁을 끝낸 용사님?]
우리는 마을 입구에서 한 아저씨를 만났다. 참전용사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전쟁 중 탈영병이 맞고 끝까지 군대를 피했다. 아저씨는 한 낮인데 술 한잔을 걸치고 계셨다. 할머니는 얼마전 운명하셨고 아저씨는 혼자 살고 계셨다. 전쟁이 나기전에 군에 입대하여 7사단 제9연대 제2대대로 들어가 포천 북방에서 근무했다.
사실 전쟁이 나기전에도 북한군이 수시로 넘어와 총격전을 하곤 했다. 전쟁 나기 전에 사실 군에 먹을 것이 부족하다 보니까 수시로 외박을 내보내 부대에 남아 있는 동료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한다. 물론 중간 간부들이 빼먹는 것은 말할 것도 없는 실태였다.
포천읍 내로 외박을 나갔는데 일요일 새벽에 사이렌이 울리고 전쟁이 났다는 가두방송에 군인들은 본대로 복귀하게 되는데 차가 없어서 한나절이 걸렸다. 하지만 벌써 전방이 뚫리어 본대로 가기도 전에 도중에 철수하는 본대를 만났다. 하지만 게속하여 적 포탄이 바로 눈 앞에 떨어지는 아찔한 경우가 수시로 발생했다고 한다.
그러다 의정부 어디 언덕에서 방어를 한다고 호를 파려는데 북한군이 밀려 내려와 창동으로 철수하는 과정에 본대와 헤어져 아저씨는 밤새 걸어서 고향인 가평 설악면 엄소리로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군에 가질 않고 지역 일대 야산에 숨어서 전쟁기간을 보냈다고 한다. 밤에는 집으로 몰래 들어와 먹을 것을 챙기고 낮에는 산 토굴에서 보내는 기막힌 생활을 했고, 전쟁이 종료되는 싯점에 탈영병을 잡으러 다니는 체포조가 왔는데 마침 군에 있을 때에 후임이 와서 술을 실컷 먹여서 돌려 보내고 본인은 계속 참전용사로 둔갑하여 지냈다는 것이다. 그러다 나이 60이 넘어가면서 신고하여 결국 가지않고 말았다는 용사님이다.
그러니 엄소리 일대 산에 대해서는 손바닥 손금보듯 잘알고 있었다. 그 아저씨가 우릴 인도하여 엄소리 340고지를 오른다 오늘도 술 한 잔을 마시고 산을 오르는데 잘도 오르신다.
[이동네 저동네 혼자이신 아주머니는 다 만났다]
정말 체력이 좋다. 깡마른 체구인데 의정부에서 도망칠 때도 쉬지않고 그대로 달려서 산넘고 물건너 바로 동네로 숨어들었다는 아저씨다. 그러니 젊어서는 참전용사로 신분을 내걸고 있으면서 혼자 사는 아주머니는 솔직히 다 만나보았다고 자랑이다. 인기가 좋았다는 아저씨다.
우리는 참전용사이신 김달현 용사님과 함께 산을 올라 탐사를 진행한 결과 개인호가 수없이 있었고, 김용사님이 중대장호라는 곳도 찾아냈다.
그리고 유해발굴이 시작되어 50여구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참전용사 및 지역주민 증언]
김사업(제6-2-1-중화기중) : 본인은 국방경비대 제2연대에 '47년도 12월에 들어가 6.25전쟁시는 제6사단 소총수로 시작하여 중화기중대 81밀리 소대선임하사관이었다. 많은 전투중에 용문산 전투시에 우리 1대대는 철모에 "결사"라는 글자를 새기고 미사리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사주방어를 했지만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당시는 5월이지만 몹시 더워서 시신을 오래 놓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바로 옆에 있는 호구덩이에 밀어넣고 전투를 계속했다. 일부 발굴했다지만 당시는 중공군만 죽은게 아니라 우리 전우도 많이 전사한 것이 사실이다.
손중문(제11-20-3-10중) : '50.9월 1일 제11사단 화기소대에 배치되었다. '51년 5월 경에 설악산 지역에서 전투를 하는데 탄약과 식량 등 보급품이 부족하여 후퇴하면서 부상자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어서 현지에 방치하고 철수하였다. 신흥사란 절 부근 고지에서 대대본부를 만나 합류하였으며 보급품을 보충 후 재차 북방고지의 적과 치열한 전투 속에서 향로봉까지 공격하였다.
김병대(수도사-1-1-1중) : 본인은 '540년 9월 20일에 캬튜사로 미 제3사단에 배치되어 장진호 부근 전투에참여했다. 함흥에서 철수하여 묵호에서 한구군 수도사단 제1연대에 편입되었다. 설악산 부근의 가리봉 전투에 참가하여 북한군과 전투했다. 당시에 계곡일대에 동료 전우들이 전사하여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
# 대승 령일대 3구, 가리봉 10구, 삼형제봉 43구, 한계리에서 7구등 70여 구 발굴했다.
윤경진(제5-35-의무대) : 본인은 '50년 10월 28일 군에 들어와 교육을 받고 제5사단에 배치되었다. '5년도 48월에는 양구북방에서 피의 능선 전투를 했고 9월에는 가칠봉 전투를 했다. 그러다 3사단에게 진지를 주고 양양으로 가서 교육을 받고 다시 겨울인데 거진으로 올라가 '52. 1월11사단으로부터 진지를 인수받아 유명한 351고지 전투를 했는데 너무 죽어나가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다시 '53년 초에 제15사단에게 진지를 주고 4월에 김화로 이동하여 3사단 금화지역으로 들어갔다.
싯점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설악산 낙산사 뒤 북쪽방면 뒷산 2~3부 능선에서 국군 전사자가 많이 발생하여 매장했다. 계속하여 공격 중에 신흥사 뒤쪽 무명용사 묘비로 가는 방향과 비룡폭포 뒤쪽 계곡쪽에 돌무덤 형태로 임시 묘비를 만들어 매장했다.
윤창용(제6-2-2-6중) : '50.12.20일 입대하여 훈련을 마치고 제6사단에 배치되었다. 특히 '51. 4. 23일에 사창리 전투에서 당시 중공군과 전투하여 아군 피해가 상당히 발생하였다. 또한 휴전 당시에 화천 북방 819고지(내성동리)일대에서 중공군과 고지 주인이 9번이나 바뀔 정도로 전투를 하여 많은 피해가 발생했으나 시신처리는 잘 모르겠다. 나도 여기서 부상당하여 후송되었다.
# 석룡산 일대 45구 발굴, 백암산 일대 150여구 발굴
한재형(제6-2-3-12중) : '49. 6.26일 입대하였다. '51. 4월에 사창리에서 중공군에 포위되어 엄청난 전우가 희생되었다. 나도 이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북한 자강도(백두산 밑)의 "삼풍"지역에서 포로생활을 하다가 휴전 후 포로 교환시 귀환하였다.
정용봉(제8-16-1-4중) : 본인은 '50. 9월에 입대하여 종합행정학교 8기생으로 12월 2일 임관하여 8사닩 제16연대로 갔다. 당시는 북진 작전에서 중공군에 포위 되어 다시 후퇴를 거듭하여 38선으로 넘어와 상수내리 지역에 진지를 편성하고 있을 때이다. 그런데 밤에 불을 피워 적에게 위치가 노출되어 아군의 피해가 컸다. 특히 남면 상수내리 쌍둥이산(567. 577) 일대에서 적군과 백병전으로 많은 피해가 발생한다. 포위망을 뚫고 계곡 아래로 내려오는데 시체가 샇여 있었다. 아군 중대원 대부분 전사하여 본인 혼자 생존할 정도로 중공군 신정공세에 많은 피해가 있엇다.
이성복(제9-30연) : 본인은 전쟁 발발 후 북한에서 동료 300여 명과 남한으로 내려와 제9사단에 편입되었다. 사단 유격대 임무를 수행ㅎ하였는데 인제와 현리 사이에 있는 매봉산 (일명 고시리봉)에서 대대본부가 기습을 당하여많은 인원이 전사하는 것을 보았고, 이곳에서 본인도 전투를 실시하다 철수명령에 따라 철수하였다.
남북리. 아미산 53구, 합강리 일대 12구, 원대리 일대 56구, 매봉.한석산 일대 131구 발굴
정준기(지역주민,인제 용대리) : 2000연대 약초 캐러 저항령과 신선봉 일대에 올랐으며, 고지 정상 일대의 바위틈에 널부러진 유해를 식별하여 비료포대에 담아서 집 뒷산 소나무 아래에 묻었다. 당싱데 탄피나 군화조각 등 유품도 많았다.
김경산(지역주민, 속초) : 전쟁 이후에 대청봉 등산주에 소청봉과 봉정암 이른 구간에서 사람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철모 탄띠. M1탄 등 아군 유품도 많이 있엇다. 이 구간에 아군 유해가 많이 매장되어 있다고 들었다.
이진수(지역주민, 인제) : '99년도에 장수대 인근 충혼탑 보수공사를 실시 하던 중에 탑 기단 안에 기름먹인 상자에 담겨있는 뼈 조각을 반 자루 정도 발견하여, 일부는 다시 재건축한 기단 밑에 묻었으며 나머지는 산으로 올라가는 능선 우측 편에 매장했다.
#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 제보다. 전쟁이후 제12사단장으로 부임한 전 재향군인회장을 역임한 박세환 에비역 대장이 바로 봉정암 주지와 협력하여 설악산에 널려있는 사람 뼈를 군인들이 회수하여(당시는 백골병단 유해로 추정함) 화장을 해서 바로 이곳 충혼탑에 안치하게 된다. 사실 그 당시는 인류학적 방법에 기초한 유해발굴이나 신원확인 방법이 전무한 상태였다). 당시 지장제등을 진행한 큰 스님이 영시암에 살아계셔 실제 그 당시의 실태를 직접 들었으며 대력 500여구는 된다고 하셨다.
저항령에서 90여 구, 중청봉에서 3구 등 설악산 일대에서 100여 구의 유해를 발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