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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버지니아 식민지 이주민과의 충돌
제임스타운 인근에는 포우하탄(Powhatan) 연맹에 속한 원주민이 약 14천 명이 이미 살고 있었다. 1609년에 영국인이 인디언에게 식량을 강제로 요구함에 따라 양측 간의 갈등이 고조되어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영국 정착민은 1609년부터 가뭄으로 인한 흉작과 본국으로부터의 보급두절에 따른 식량부족으로 큰 고통을 겪게 되어 원주민들과의 식량교역이 절실하였으나 인디언 역시 그 해 작황 부진으로 영국인들에게 식량을 내어줄 형편이 못되었다. 영국인들이 무력으로 식량 강탈을 시도함에 따라 양측 간의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고 급기야는 1610년 8월 9일 70명의 영국군이 인디언 마을을 급습하여 약 70명의 원주민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움에 따라 양측의 갈등은 전쟁국면으로 확대되었다.
역사에서는 이 전쟁을 ‘Anglo Powhatan’ 전쟁이라고 이름 붙이는데, 앞으로 치르게 될 수많은 인디언 전쟁의 시작으로 볼 수 있다. 이 전쟁은 1614년 추장의 딸인 포카혼타스(Pocahontas)가 영국인들에게 납치되면서 양측 간의 적대행위가 끝나게 된다. 포카혼타스는 이미 결혼한 여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롤프(John Rolfe)라는 영국인과 다시 결혼하여 런던으로 갔었는데, 거기서 1617 년에 폐렴으로 사망하였다. 당시 그녀의 나이는 22세에 불과하였다. 그녀와 롤프 사이에 난 후손들은 아직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전쟁의 결과로 영국인들은 더 많은 차지하게 되었으며 Powhatan 연맹에 속했던 일부 부족들은 역사에서 사라져 버렸다.
포우하탄 연맹과 영국 정착민과의 두 번째 전쟁은 1622년부터 1632년까지 10년간 계속되었다. 인디언들은 영국인들을 완전히 내쫓을 목적으로 대규모 학살사건을 일으켰다. 모피 등의 물품을 교역하기 위한 모임으로 위장하여 많은 영국인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다음에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무차별적으로 살해함으로써 긴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날의 기습공격으로 당시 정착민 인구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347명이 목숨을 잃었다.
인디언으로부터의 공격에 대한 보복으로 영국인들도 인디언 마을과 옥수수 밭을 파괴하였으며 1623년에는 평화회담을 열기 위하여 많은 원주민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건배용 술잔에 독약을 타서 한꺼번에 200명을 독살시키기도 하였다. 1624년에는 활로 무장한 800명의 인디언들과 총검으로 무장한 60명의 영국인들이 맞붙었었는데 수적으로는 원주민이 월등 앞섰으나 활과 총칼의 대결에서는 총칼이 이길 수밖에 없는 법이다. 원주민들의 옥수수 밭이 크게 파괴된 뒤에 인디언들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 때로부터 1632년 9월 양 진영 간에 다시 평화가 찾아오기 전까지 크고 작은 전투가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그 전쟁 와중에 영국 정착민들은 그들의 영역을 크게 확장하였으며 1634년에는 그들이 확보한 정착지를 인디언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하여 버지니아 반도를 가로질러 약 10km에 달하는 방책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2차 전쟁이 끝난 지 12년이 지난 1644년 3월 세 번째 전쟁이 시작되었다. 포우하탄 연맹은 남아 있는 전사들을 모두 규합하여 유럽인들의 정착 마을을 공격하여 약 500명을 죽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정착민들은 본격적인 인디언 소탕작전을 전개하여 포우하탄 연맹소속의 부족은 물론이고 인근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에 거주하던 부족까지 공격하여 주변에 거주하던 인디언 세력을 궤멸시켰다.
이로써 수십 년에 걸쳐 지속되었던 영국인과 포우하탄 인디언과의 전쟁은 끝났다.
유럽인들과 가장 먼저 접촉하였던 포우하탄 부족은 지금은 Powhatan County라는 행정구역 이름으로만 남아 있을 뿐 부족의 정체성은 역사 속에 거의 묻혀버린 상태이다. 반면에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백인과 대결하게 된 대평원지역에 거주하던 부족들은 그들의 문화 등 정체성을 오늘날까지도 온전히 잘 보존하고 있다.
북동부 해안지역에 나타난 유럽인들
영국인들이 최초로 미국 남동부의 버지니아에서 정착촌을 개척하기 시작한 1600년대 초에 북동부 지역인 뉴잉글랜드와 뉴욕 지역에서도 유럽인들이 현지의 인디언들과 접촉하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뉴욕 지역으로 진출하여 인디언들과 야생동물 모피 교역을 계속 확대해 나갔다.
한편 영국인들은 뉴욕의 북쪽에 위치한 코네티컷과 매사추세츠 지역을 탐험하면서 여러 가지 필요한 정보를 수집하고 물물교환 형식으로 인디언들과 교역을 해왔는데 때로는 인디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서인도제도나 유럽으로 팔아넘김으로써 항해 이윤을 불리기도 했다.
1614년에 영국 탐험가 존 스미스의 대원인 토마스 헌트에게 매사추세츠 플리머스 인근에서 납치되어 스페인으로 노예로 팔려 갔던 스콴토가 구사일생 끝에 1619년 고향으로 돌아 왔는데 훗날 그 지역에서 정착촌 건설을 시작한 영국인들에게 생명의 은인과 같은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일화는 미국 건국 초기역사에서 빠지지 않고 소개되고 있다.
스콴토가 플리머스로 돌아와 보니 자기네 부족민의 대부분이 유럽인들이 전염시킨 천연두 또는 렙토스피로시스와 같은 질병으로 인하여 죽고 없는 상태에 있었다.
1610년대에 유럽인들과 접촉하였던 북동부 해안 마을의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건너온 새로운 전염병에 대하여는 아무런 면역력이 없었기에 속수무책으로 죽음으로 내몰렸다.
한 마을의 인구가 전멸하는 경우도 속출하여 북동부 해안에는 버려진 마을이 즐비하였으며 수습되지 못한 시신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플리머스 인근의 원주민들의 세력이 극도로 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훗날 이곳에 원주민들로부터 큰 저항 없이 정착촌 건설을 추진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출처 :보스톤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