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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8장 십여 호의 인가밖에 없는 초라한 마을이 때 아닌 방문자들로 화들짝 깨어났다. "에게! 이 작은 마을에서 혼례를 올리자고?" 소운이 입을 빼쭉 내밀며 불만을 토했다. 성대한 혼례 운운하기에 번화한 도시를 기대했었는데 피죽도 먹지 못하는 것으로 보이는 초라한 마을이다. 더구나 올 여름 가뭄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시기였기에 마을은 더욱 황량해 보였다. "있잖아, 큰 도시는 왠지 정이 안 가서……." 백산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마음이 편한 곳에서 혼례를 올리고 싶었다. 영원히 기억에 남아야 할 혼례이기에 형식적인 것보다 정으로 축복해주는 곳을 원했던 것이다. "좋은데요……. 우리 덕에 마을 사람들도 음식다운 음식을 한번 먹어 볼테고." "저도 좋아요. 특히 홍안리란 마을 이름이." 냉추렴도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홍안리(鴻雁理), 기러기 마을이란 게 더욱 마음에 들었다. 기러기는 암수가 같이 살다 한 마리가 죽으면 남은 새는 평생을 혼자 산다는 특성 때문에, 남자들이 신부 측에 보내는 구혼 선물로 많이 쓰이는 새가 아니던가. "그럼 오라버니가 기러기 마을로 들어와서 벌써 청혼한 거네?" 소운도 백산의 의도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표정을 풀었다. 꿈보다 해몽이 좋은 것 같기도 했지만 어쨌든 기분이 좋은 일임에 틀림없었다. "근데 신랑이 너무 삭아서, 원……." "내 청혼이 마음에 안 들면 배를 타면 된다." "마음에 안 든다고 물릴 수 있는 건가? 벌써 배는 떠났고 확인 절차일 뿐인데. 팔자려니 하고 따라야지. 늙은이에게 적선하는 셈치지, 뭐." "너~?" 이미 잠자리까지 같이 했으니 물리고 싶어도 어쩔 수 없다는 말이다. 백산이 눈을 치뜨며 달려들자 소운이 저만큼 달아나며 혀를 쏘옥 내밀었다. "석두야, 준비는?" "네, 마을 사람들이 벌써 준비를 시작했는데 촌장이 기절해버렸습니다." "왜요, 도련님?" "돈 때문에요." 석두가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마을 촌장에게 가서 네 사람의 혼례 준비를 해 달라고 돈을 내놓았는데 그 액수 때문에 촌장이 뒤로 넘어 가버린 것이다. 만 냥, 마음 사람 전체가 몇 년을 먹고 살 수 있는 금액이었기 때문이었다. "너무 많은 거 아니에요, 도련님?" 은 만 냥이란 말에 저만치 도망갔던 소운이 깜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다가왔다. "왜 아까워서 그러냐?" "오라버니, 제가 뭐 어린앤 줄 아세요?" "형수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압니다. 아무것도 안 하고 놀까봐 그러시죠?" 고함을 팩 지르며 백산을 쳐다보는 소운을 대견하다는 듯 쳐다보며 석두가 말했다. 언제나 철없는 애처럼 행동하지만 세상살이에 대한 것 만큼은 자신들보다 나았다. "도련님, 지금 나 거지라고 비웃는 거죠." "무슨 말씀이세요, 형수님. 강호에서 두 번째로 돈이 많으신 분인데." 석두가 진땀을 흘리며 손을 내저었다. 그녀의 말이 틀리진 않았다. 돈이란 많이 있으면 좋은 것이긴 한데, 언제나 성실하게 살았을 때의 이야기다. 수중에 많은 돈이 있는데 누가 일을 할 것인가. 돈이 영원히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돈이 다 떨어졌을 때에는 살아갈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소운이 걱정하는 바는 그런 점이었다. 거지들의 삶에서 배운 지혜. 거지가 돈이 많아지면 거지노릇을 더 하지 않듯이, 농사짓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가장 힘들 때 필요한 만큼만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장하오, 부인!" 소운의 마음 씀씀이에 백산도 더불어 기분이 좋아졌는지 활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모든 준비를 마을 사람들에게 맡겨버렸기에 자신들은 그저 몸만 움직이면 되는 것이다. 마을 사람들로 해서 혼례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혼례의 시작은 신랑과 신부집에 서로의 부모님들의 위패(位牌)를 쓴 다음, 그곳에 신랑 신부의 태어난 날과 시를 적어 삼 일간 보관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 삼 일간 집안에 변고가 없으면 조상님들이 혼례를 묵인하는 것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였다. 일행에게는 따로 집이 없는 관계로 마을 집 두 채를 빌려서 절차를 진행했다. "어르신, 날은 언제가 좋겠습니까?" 삼 일이 지난 후 백산과 석두, 그리고 일휘가 기일을 받기 위해 촌장의 집을 방문했다. "근데 신랑의 나이가 맞아?" 촌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백산의 생년월일이 적힌 붉은 종이와 백산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보아도 얼굴과 나이가 어울리지 않았던 까닭이었다. "신랑 얼굴이 좀 그렇죠?" "그래, 이 사람아. 신랑을 앞에 두고 이런 소리 하기는 뭣하지만 신부들이 영……." 아깝다는 표정이었다. 거의 사십에 달해 보이는 백발의 못생긴 남자에게 꽃 같은 여자가 세 명이라니……. 자신도 남자지만 참으로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게요, 어려서부터 고생을 많이 하다보니 겉늙어서 그렇습니다." 옆에 있는 백산의 얼굴이 구겨지든 말든 촌장과 석두의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하긴 그리 고생을 했으니까 그 정도로 돈을 모았겠지……." "이건 비밀인데요……." 갑자기 석두가 촌장의 귀에 대고 뭐라 속삭였다. 그러자 촌장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시 한 번 백산을 쳐다본다. "그러면 아무런 문제가 없지, 암! 남자는 얼굴로 사는 게 아니거든." 그래도 한 가지 재주는 타고나서 다행이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백산이라고 했는가?" "예, 어르신." "생긴 게 그렇다고 너무 기죽지 말게나. 남자는 말일세, 밤일만 튼튼하면 모든 게 용서되는 법이야. 얼굴 좀 못나면 어떤가. 살다보면 얼굴은 눈에 보이지도 않아. 번지르르한 얼굴로 기방이나 찾아다니는 자들보다 차라리 자네 같은 얼굴이 훨씬 나아." 말이야 칭찬같이 하고 있지만, 네 얼굴로는 기방에서도 받아주지 않으니 부인들에게나 충실하며 살라는 소리였다. "험! 어르신, 날은 안 잡아주십니까?" 터져나오는 웃음을 간신히 참으며 석두가 촌장을 다그쳤다. 상대방을 앞에 두고도 도대체 가리질 않는 마을 촌장의 행동에 웃음이 터질 것만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던 터였다. "날? 아, 그것 때문에 왔지? 삼 일 후가 좋아. 그날은 비도 안 올 것 같고 날도 따뜻할 테고……." "어르신, 그런 이유로 날을 잡아요?" "그 이상 좋은 게 어디 있나. 날이니 뭐니 하는 것 다 필요 없어. 막말로 자네와 신부들의 궁합이 안 좋다면 이 혼례 물린 텐가? 그건 아니지 않는가. 날도 마찬가지야. 좋은 날이란 춥지도 덥지도 않고 비만 안 오면 되는 게야. 마을 사람들 손 없는 날이면 더욱 좋고." 단순한 말이지만 그 말이 진리인 것이다. 어차피 혼례를 치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궁합이 무슨 필요가 있으며 좋은 날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서로 간에 생각해주는 애틋한 사랑과, 가능하면 많은 사람들의 축복, 그 두 가지면 최고의 혼례가 아니겠는가. 형식이니 절차니 하는 것은 있는 자들이 자신의 우월함을 나타내는 수단에 불과한 것일 뿐이다. "가능하면 길게 하게." "그건 또 왜요?" "자네들 때문이 아니고 마을 사람들 때문에……." 타지인이라 하지만 백산의 혼례를 빌미 삼아 동네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려는 의도였다. "알겠습니다, 어르신." 촌장집에서 물러난 세 사람이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며 웃고 말았다. 좋은 날을 받아 달랬더니 비 안 오고 따뜻한 날이면 아무 날이나 상관없다는 것 아닌가. 백산이 빌려놓았던 집으로 향하는 일행의 눈에 빛살처럼 달려오는 인물이 눈에 잡혔다. "야, 이 도둑놈아. 나에게 허락도 없이 소운이를 훔쳐가려 해?" 풍신개와 요몽이었다. 분하를 타고 내려오다 소운의 혼례 소식을 전해 듣고 부랴부랴 달려왔던 것이다. "어? 영감은 역시 타고난 거지야. 어떻게 이곳에서 나는 냄새까지 맡았소." 얼굴에 나타난 반가운 표정과는 반대로 입에서 나가는 말은 거의 욕에 가까웠다. "너?" 백산의 대응에 뭐라 한마디 하려던 풍신개가 손을 들어올린 채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백산의 변해버린 얼굴 때문이었다. 마지막으로 얼굴 본 지가 구 개월밖에 안 됐는데 녀석의 얼굴은 십여 년을 지나가 버리지 않았는가. "좀 의젓해졌지요? 잘생긴 얼굴에 무게까지……. 최고의 남자 아니요. 갑시다, 소운이 기다리는데." '어찌 된 일이냐?'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백산의 뒤를 따르던 풍신개가 석두를 향해 재빨리 전음을 날렸으나 팽무도에게 들으라는 말만 들려올 뿐이었다. "허허! 어찌 이런 일이……." 팽무도의 이야기를 듣던 풍신개의 얼굴이 참혹하게 변했다. 초리하에서 일어난 일을 대충 듣기는 했지만 그런 일이 일어났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한순간에 얼굴이 늙어지는 현상이라니…… . 주안술이 풀려서 한순간에 늙어버린 사람은 보았어도 나이를 건너 뛰어버린 증상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그래서 소운을 못 주겠다는 거요, 뭐요?" "이놈아! 소운이 불쌍해서 그래, 어쩌다 너 같은 놈에게……." 백산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풍신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젊은 얼굴이었을 땐 그나마 봐줄 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나마도 아니라는 표정이었다. "그래도 네 녀석이 나보다 오래 살 터이니, 잘해줘야 한다. 소운이 울리면 지옥에서도 뛰쳐나올 게야 알았냐?" "영감! 지옥은 사람이 많아서 못 가오. 내가 많이 보내버렸거든, 헛소리하지 말고 소운이랑 오래오래 사쇼." "그래야겠지. 나 소운이 좀 보러 갈란다." 자리에서 일어서는 풍신개의 얼굴에 쓸쓸함이 서려 있었다. "얼굴 펴시오, 그런다고 내 얼굴이 젊어지겠소?" 다음 날부터 본격적인 혼례가 시작되었다. 어깨에 붉은 띠를 두르고 꽃을 꼽은 모자를 쓴 백산과 광견조원 여덟 명이 말을 타고 온 마을을 돌며 혼례의 시작을 알렸다. 툭!툭! 탁! 탁! 타타탁! 여기저기에서 폭죽 터지는 소리와 함께 뿌연 연기가 온 마을을 덮으며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악대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세 명이 동시에 앉을 수 있는 꽃가마와 함께 신부들이 있던 집 안으로 들어선 백산의 얼굴에 놀라운 표정이 가득했다. 화장을 하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세 명의 신부 때문이었다. 맨 얼굴만으로도 예뻤던 여인들이 화장까지 하고 있으니 눈알이 핑핑 돌아갈 지경이었다. 자신이 저런 미인들을 아내로 얻었다는 사실이 꿈만 같았다. 당연 눈동자가 풀리고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헤! 전부 내 각시들이란 말이지?" 지금껏 구 개월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보아온 얼굴임에도 오늘은 또 달라보였다. "백랑! 입." "험험!" 나직한 조천영의 말에 재빨리 표정을 바꾼 백산이 헛기침을 하며 신부들과 함께 풍신개를 향해 절을 올렸다. 이제 정식으로 처조부가 되는 것이다. "그래, 잘살아야 하느니……." 풍신개의 두 눈에 뽀얀 물막이 어렸다. 자신의 복수 때문에 거의 돌보지도 못했던 아들놈, 그 아들이 남겨준 유일한 핏줄이 소운이었다. 이 애만큼은 잘 키워보려 했었는데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아서 개방에 맡겨버리지 않았던가. 그랬던 손녀딸이 시집을 가는 것이다. 비록 잘 키워주지는 못했지만 먼저 간 아들에게 떳떳한 아비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 급기야 소운이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옆에는 자신보다 더 불행한 언니들이 있는데, 그녀들을 생각하면 울어선 안 되는데 주책없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어이구, 이 애를 어찌 데리고 사누……." 울고 있는 소운을 쳐다보며 백산이 나지막이 혀를 찼다. 그러면서도 소운의 뒤로 손을 돌려 조천영과 냉추렴의 손을 꼭 쥐었다. 부모의 소식을 모르는 사람과 부모가 없는 사람, 그녀들의 마음도 결코 편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차라리 혼례를 올리지 말 것을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행복하고 기뻐야 할 일인데 그럴 것 같지가 않았다. 백산의 예상대로였다. 먼저 냉추렴이 어깨를 들썩이는 것 같더니 이어서 가장 어른인 조천영마저 울음을 터트린 것이다. 한 번 터진 울음은 쉬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세 여인이 울음을 터뜨리자 가장 당황한 사람은 풍신개와 백산이었다. 자신 때문에 방안이 울음바다가 되어버렸다. '이놈아, 어떻게 수습 좀 해라.' 어찌할 바를 모르고 쩔쩔매던 풍신개가 급기야 백산에게 전음을 날렸다. 자신이야 정말 기뻐서 눈물을 흘렸던 것인데, 신부 셋은 서럽게 울고 있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가기 싫은 시집인데 돈에 팔려 억지로 가게 되었다고 오해를 해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더구나 신부들의 생김새가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이니. '이놈아, 연기라도 해서 좀 달래봐.' 아예 우는 것으로 끝장을 보기로 했는지 세 여인이 부둥켜안고 정말 서럽게 울고 있는 모습에 풍신개의 얼굴이 더욱 난처하게 변했다. 자신이 한 말이라곤 잘살란 말밖에 없는데 신랑이 신부를 맞으러 오는 영친(榮親)의 자리가 울음천지가 되어버렸다. "흑! 흑!" 세 여인이 대성통곡을 하고 있을 때 한쪽 구석에서도 조용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지막이 우는 소리 같았지만 내공을 실었는지 세 여인의 귀에만 선명하게 들려왔다. 주변 이목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서럽게 울던 세 여인이 구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백산이 있던 곳이었다. 순간 백산의 입에서 세 여인보다 더 서러운 신세한탄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아이고! 아버지, 내 얼굴이 망가졌다고, 내가 늙었다고, 신부들이 서러운 모양이요. 얼굴 멀쩡할 때는 서로 좋다고 난리더니, 거지새끼 같은 얼굴로 변하니까 내가 싫어졌나보오. 나 같은 늙은이에게 시집오는 게 슬퍼서 저리도 서럽게 우는 게 아니겠소, 아이고……!" 백산의 한마디 한마디에 세 여인이 움찔거리며 서로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부모님이 보고 싶어서 울었지만 울다보니 그게 아니었다. 웬일인지 알 수는 없지만 자꾸만 감정이 북받치며 자신들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던 거였다. 울음이 울음을 불러왔다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신랑 되는 사람도 한쪽 구석에 박혀서 울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가 서러울 게 뭐 있다고, 생긴 것도 없는 사람이 신부가 셋이나 되는데……. "백…랑! 오라버니?" "아이고! 아버지 이 얼굴로 어찌 살란 말이오." 더욱 가관이었다. 어느새 꺼내들었는지 액땜을 위해 미리 준비해두었던 신부들의 동경으로 자신의 얼굴을 비춰보며 울먹거린다. '천영아, 저거 장난이 아닌 모양이다. 좀 달래봐라.' 풍신개가 이번에는 조천영을 향해 전음을 보냈다. 그도 처음에는 부인들을 달래기 위한 장난인 줄 알았다. 백산의 말 중에 나온 거지새끼란 말은 분명 자신을 두고 한 말이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 신부를 울렸다고 자신을 욕하는 소리로 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계속 두고 보자니 이놈 또한 장난이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결국 세 여인이 백산에게 달려들어 갖은 아양과 교태를 떨고 나서야 사내대장부의 울음은 그쳤다. 신랑 신부의 울음으로 시작된 영친은 다음 날 아침 신부들의 얼굴과 이마의 솜털을 뽑아주는 개검식이란 절차를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신랑집으로 가기 위해 머리를 얹고 비녀를 꽂은 신부들이 푸른 바지에 붉은 웃옷을 받쳐 입고 붉은 보자기로 얼굴을 가린 후 마차에 올랐다. "형님! 참으로 대단하오. 어쩌면 그리 능수능란하게 거짓 표정을 지을 수 있소." 꽃가마를 앞세우고 신랑집으로 가는 도중에 소살우가 백산에게 넌지시 물었다. 백산이 아무리 속이고자 해도 소살우의 작은 눈은 피해갈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옛날 얼굴 같으면 들켰을 터인데 지금은 얼굴이 변했잖냐, 임마." 자신의 얼굴이 변했기에 거짓말할 때의 표정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풍신개마저 속았으니 어쩌면 백산의 생각이 맞는지도……. 그러나. "언니는 오라버니가 거짓으로 그런다는 걸 어찌 알았어요? 나는 못 알아차렸는데." "응. 백랑의 처음 말이 아이고로 시작하면 다 거짓이야." 마차 안에서 냉추렴과 조천영이 소곤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쿡! 곰 아저씨 재주 잘 봤소." "킥킥킥!" 마찬 안팎에서 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역시 사부는 사부였다. 백산 자신도 모르고 있던 버릇을 조천영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역시 그녀가 한 수 위였다. 온 마을 사람들이 축복해주는 가운데 혼례가 끝났고 마을 한가운데에서 뒤풀이 여흥이 한창일 때 신랑 신부는 방에 들었다. 황촉불이 은은하게 밝혀진 방안에 술상을 가운데 두고 네 사람이 둘러앉았다. 각 신부들의 얼굴을 덮고 있던 붉은 천을 들어올리고 비녀를 뽑아준 백산이 상 위에 있던 나무빗과 가위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잘라 조심스럽게 상 위로 놓았다. 이어서 여인들도 백산을 따라 자신들의 머리카락을 잘라놓자, 그것들을 전부 섞은 백산이 비단 끈을 이용하여 굳게 묶은 다음 조그마한 주머니에 담아서 자신의 품속에 넣었다. 아무도 말이 없었다. 혹시라도 무슨 말을 하면 부정이라도 탄다 생각했는지 의식을 행하듯 경건한 마음으로 임했다. 이번에는 하나밖에 없는 커다란 대접에 조천영이 술을 가득 따르자 그 술잔을 들어올린 백산이 세 사람의 신부를 쳐다보며 나지막하게 서약을 했다. "천지 신명께 고(告)하노니 나 백산은 사랑하는 부인들과 죽음까지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천지신명께 고하노니 나 조천영은 사랑하는 백산과 죽음까지도 같이할 것을 맹세합니다." 네 사람만의 사랑의 서약이었다. 영원히 같이 하고자 하는 맹세. "이제 식도 올렸으니까 북경 가서 자리 잡으면 부모님도 찾아봐야지. 북해도 가고, 감숙성도, 그리고 원앙곡도……." 세 여인의 얼굴이 일제히 변했다. 부모님들이 계신 곳, 낮에 서럽게 울게 만들었던 분들이 계신 곳이 지금 백산이 말한 곳이다. 그러나 이내 미소를 지으며 백산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그분들을 추억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분들보다 더 사랑해주는 낭군이 있기에 불행한 과거가 아니다. 가슴 한편을 채우는 아름다운 추억일 뿐이다. "누님, 먼저 북해로 가자. 눈꽃이 보고 싶어." 냉추렴과 구소운이 나가고 난 후 두 사람만 남은 신방에서 백산이 조천영을 쳐다보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칠성리 먼저 갔다 가요." "아냐, 내 고향은 맨 마지막이야.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걸, 뭐." "아버지가 아직……." 조천영이 말끝을 흐렸다. 벌써 십여 년 이상의 세월이 지났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은밀하게 들렀을 때 병색이 완연한 분이셨다. 정상적인 몸이었다면 자신을 찾으러 사람을 보냈을 터인데 강호상에서 빙궁의 인물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함은 이변이 생겼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복수에 미쳐서 방황하느라 부모님마저도 잊고 산 불효자가 되어버렸다. "살아 계실 거야. 사부를 보면 알잖아요. 해야 될 일이 있는 사람은 절대 죽지를 못해요." 걱정하지 말라며 조천영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그녀들을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인들로 만들어줄 자신이 있다. 지금처럼 영원히 사랑해주면 되는 것이다.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셨던 것처럼만 하면 된다. "이제는 더 이상 불행은 없어요, 괴로움도……." "고마워요, 백…… 으읍!"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하려는 조천영의 입을 다른 입술이 내리누르며 막아버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미안하다는 말이나 고맙다는 말을 듣는 것도 어색한 것이다. 오직 사랑한다는 한마디 말로 모든 것이 해결된다. 온몸을 불사르는 황촉불처럼 두 사람의 몸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아나며 서로를 향한 갈증을 식히기 위해 항해를 시작했다. * * * 신방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는 두 사람이 있었다. "이젠 사돈까지 된 건가?" 풍신개가 환하게 웃으며 팽무도를 쳐다보았다. 처음엔 마음이 맞는 친구로 시작된 인연이 처남 매부가 되었고, 이제는 사돈지간까지 되었다. "우리 인연도 참으로 질긴 인연이다, 안 그러냐?" "무슨 일이냐?" 웃으며 하는 말임에도 팽무도의 얼굴은 밝지가 않았다. 웃고 있는 것 같지만 풍신개의 얼굴에 나타난 아픔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구서방이라 불러주셨다. 무련이가 떠난 지 오십 년만에……." 칠아……." 팽무도도 풍신개의 한을 알고 있다. 처갓집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사위, 아무리 노력해도 풍신개를 인정하지 않았던 분이셨다. 오죽했으면 죽어가는 무련이를 보고도 팽가에 가지 못했을 것인가. 그녀와 자신을 따뜻하게 받아줄 거라는 확신만 있었어도 산속으로 숨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미련 없다. 소운이가 제일 마음에 걸렸는데……. 며느리 구박하지 말고 잘해줘야 한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팽무도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사위로 인정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이러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유언을 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질 않는가. "북경 가면 아예 안 나올 거냐?" 팽무도의 다그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고 있다. 북경으로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팽무도의 대답을 기다린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야겠지. 더 이상 무림이란 곳에 관여되는 것도 싫고, 석두 녀석이나 관직에 밀어 넣고 편하게 살지, 뭐. 그런데 아직 대답 안 했다." "무슨 일은……. 이제야 먼저 간 아들놈에게 당당한 아비가 되어서 그렇지. 이젠 만나도 그 녀석이 구박하지 않을 것 아냐." 북경을 간다 했으니, 다시는 안 올 거라 하였으니,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팽무도의 말마따나 북경은 은거지나 같은 곳이다. 더구나 석숭을 통해서 석두를 관직에 넣으면 누구도 이들을 건들지 못할 것이다. "그래? 너도 북경으로 가야지, 이젠 같이 살자." "그래야 하겠지, 이젠 쉴 때도 되었어. 그동안 너무 힘들게 살았다. 나도 이젠 쉬고 싶어. 한 가지, 한 가지 일만 마무리하고……." "아직도 남은 게 있냐? 그들은 이제 끝장……." "그때만 해도 말이다. 정말 좋았다. 오늘처럼 저렇게 별이 유난히 크게 보이는 날이면 무련이와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원앙곡에 누워서 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세곤 했다. 죽을 때도 같이 죽자 하였는데 오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나만 살아 있다." 옛날을 그리는지 풍신개의 얼굴에 아련한 표정이 어렸다. 마음은 그때 이미 죽었는데 몸만 남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녀만 강시가 된 게 아니라 자신도 이미 강시였다. 한 가지 의지밖에 없는 강시……. "무도야……." "왜." "이거…… 산이 녀석 줘. 뇌룡현이 있을 때 돈이 될 거라며 무지하게 욕심을 냈었거든." "주고 싶으면 직접 줘." 풍신개가 내미는 피독주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팽무도가 고개를 돌리며 먼저 가버린다. 그러나 돌아서는 그의 눈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녀석이 죽으려 하고 있었다. 양맹의 전쟁이 다 끝나가는데 돌아올 생각이 없는 것이다. 불꽃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양맹과 마지막을 함께 하려는 것이다. 알면서도 말릴 수가 없다. 녀석이 살아온 인생을 알기에 가고자 하는 길을 막을 수가 없다. 살고 있는 이곳이 지옥인데, 이 지옥을 벗어나고자 하는 놈을 무슨 수로 말린단 말인가. '그래, 어쩌면…….' "북경까지만 동행해라. 그 다음엔 안 말리마." "당연하지, 이 녀석아. 거지가 갈 데가 어디 있냐. 산이 녀석 좀 괴롭히다 가야겠다. 그동안 진 빚도 좀 청산하고 |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