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살롱] ◆함열의 3대 부잣집
동양 부자와 서양 부자는 베푸는 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로마의 부자들을 보면 많은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공공건물들, 예를 들면 극장이나 도서관을 세우거나 광장을 조성하는 데에 돈을 썼다.
이에 비해 동양의 부자들은 밥을 먹이는 데 돈을 썼다. 식객(食客)문화가 바로 그것이다.
'사기'에 보면 중국의 맹상군은 사람을 좋아하여 식객이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자기 집에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후한 대접을 했던 것이다.
조선의 부잣집들도 손님 접대하는 접빈객(接賓客)을 매우 중시하였다. 접빈객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그 집안의 사회적 품격이 정해졌다.
필자가 현장조사를 해보니까 내로라하는 사대부 집안의 안주인들 상당수는 과로로 사망하였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 밥해 주고 치다꺼리하다가 과로해서 죽은 것이다.
이런 형태의 적선은 서양처럼 건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후대인들이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그 집을 거쳐 갔던 과객(過客)들의 입소문에 의하여 평판으로만 전해진다.
순천 쪽에서 올라오는 전라좌도의 과객과, 목포 쪽에서 올라오는 전라우도의 과객들이 중간에서 합류하는 지점이 전라북도 삼례(三禮)이다.
삼례 다음 지점이 젓갈 많이 나오는 강경(江景)이고, 강경 가기 전의 중간 지점이 함열(咸悅)이다.
판소리 '호남가(湖南歌)'의 가사 가운데는 '화순은 풍속이 순하고… 함열은 인심 좋고'라는 대목이 있다. 왜 '함열' 인심이 좋다고 그랬을까?
구한말 곡창지대였던 함열에는 3대 부잣집이 있었다.
김부잣집· 조부잣집· 이부잣집이 바로 그 집들이다.
김부잣집은 현재에도 '김안균 가옥'이라고 해서 99칸 집이 남아 있다.
이 세 집은 서로 경쟁적으로 과객 접대를 후하게 했다.
삼례를 거쳐 함열을 지나가는 여행객들에게 밥도 푸짐하게 먹이고 노잣돈도 후하게 쥐어주었던 것이다.
김부잣집에서 과객들에게 굴비 반찬을 내놓는다고 소문이 나면 조부잣집도 이에 질세라 쇠고기를 내놓는 식이었다.
이 평판이 당시 전라도를 강타했다. 김부잣집의 후손 한 명은 월북하여 이북에서 장관급 벼슬을 지낸 좌파였지만
6·25 이후에 이 집이 불타지 않고 오늘날에도 남아 있는 것은 '호남가'에까지 나오는 이 집안들의 후한 인심 덕택이라고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