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과 나는 세살터울로 지독히도 싸우면서 컸다
먹을 것이 없는 우리 형제는 곶감하나 가지고
치고 박고 싸우다가 결국 신나게 얻어터지고
곳감을 형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하도 억울해서 형에게 '형아 죽어버려"했다
그런데 그말때문인지 몇년후 정말 형은 죽어버렸다
형의 장례식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라디오에서 이노래가 흘러나왔다
"가랑잎 한잎 두잎 들창가에 지던밤
그사람 나에게 작별을 고했었네
세월이 흐르면 잊을거라고
그렇게 말할때 함께 울었지....."
그후 거짓말처럼 세월은 흘러 나는 직장에 취직하고
회식때면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노래를 청승맞게 불렀다
오래전 아내와 처제를 태우고 서산 두메산골에 있는 처가에 다녀온 적이 있었다.
윗글은 그때 차안 라디오에서 흘러 나오는 이종환 최유라의 사연있는 노래 프로에서
들은 얘기인데 처음에 형제가 곶감때문에 싸우던 얘기를 웃으면서 읽던
진행자 두사람은 나중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차안에 함께 있던 처제와 아내는 너무 썰렁한 얘기라고 웃었다
하지만 나는 속울음을 삼킬수 밖에 없었다. 바로 나의 얘기이기 때문이다
누군지 지독히도 나와 일치하는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고1때 학교에 가기위해 세수를 하려는데 큰형이 먼저 세수를 하고있었다
세수대야가 하나밖에 없어 나는 형에게 빨리비켜 하니까 형은 안비켜주면서
천천히 하길래 나는 공부도 못하면서 왜 안비켜주는거야 하였다
평생 동생들 한대도 안때리고 야단도 안치던 형이
처음으로 나에게 뭐 하면서 화를 내었다
나는 얼른 안방으로 도망가서 형한테 맞지는 않았다
그리고 3년후 아침 형은 집을 나가면서 나에게
"공부 열심히 해 부모님 말씀 잘 듣고 ~"
그것이 형이 나에게 한 마지막 말이었다
형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온후 라디오에서 세월이
흐르면 잊을거라는 먼훗날이 흘러 나왔다.
그후 4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형은 그때
그모습으로 나에게 남아있다
아래 혜지영님의 출석부에서 본 유현덕님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아
그동안 유현덕님이 올리신 글을 읽다보니 "바람든 무"라는 글이
너무나 슬프면서도 가슴에 와닿아서 형의 얘기를 써보았습니다
첫댓글 그립습니다, 저수지에 빠진 나를 구해준 형 박청순(1954~1998)
지난 설날(2020년 1월 25일)을 열흘 앞두고 나는 한겨울 찬바람을 가르며 오토바이크를 타고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중리 만의사쪽으로 향했다.
22년 전, 45세의 나이로 세상 떠난 형(내 바로 위로 나보다 2살 더 많다)의 유골이 뿌려진 곳이 바로 만의사 아래 참나무숲이다.
형이 생각날 때면 시도 때도 없이 찾는 곳이지만 특히 명절날이 다가오면 꼭 찾아가는 습관이 생겼다.
11남매(7남 4녀) 중에서 형은 맨 밑에서 10번째이고 남자로선 6번째, 그리고 그 밑의 동생이 나(11남매 중 막내로 남자로선 7번째)다.
위의 누님들과 형님들은 건강한 편이었지만 어머니 나이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에 태어난 누나와 형과 나,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약한 체질로 태어났다. 어머니한테 들은 이야기지만 30대 중반 이후에 배앓이를 한 어머니는 그 병을 고치기 위하여 담배 한 번 입에 대보지 않은 아버지 허락 하에 민간요법으로 흡연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우리들을 임신한 상태에서도 어머니는 흡연을 계속했던 것이다. 그래선지
모르지만 우리집 가계도를 보면 기관지나 폐 계통이 약한 편이다.
여섯째 형은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만 마치고 중학교는 못 다녔다.
초등학교 졸업 후, 15살에 충청도 산골에서 나와 기술을 배워본다고 했지만 녹록치 않아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9살에 수원으로 올라와서 철공소에서 기술을 익히기 시작하여 경기도 용인과 경기도 광주로 옮겨가며 일하다가 결혼 후엔 오산시에 정착하였다.
충청도 산골에서 살던 1966년, 초등학교 4학년 내 나이 11살, 여름방학 때로 기억한다.
고향동네서 3Km정도 산길로 걸어가면 구룡사 절 밑에 은천저수지가 있다. 그곳으로 날마다 더위를 날려 보내자며 형과 나, 동네 아이들 대여섯 명이 멱 감으러 갔다. 어느 날 깨벗고 저수지가에서 놀다가 물놀이에 정신이 팔려 수영도 못하던 내가 어쩌다 깊은 곳으로 떠밀려가 허우적댈 때였다. 살아야한다는 생각 하나로 계속 물속과 물위를 들쑥날쑥,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발버둥 치다 지쳐서 물속에 잠길 무렵, 밖에서 앉아 땡볕을 씌던 형(13살)은 물속에 잠기는 나를 보고는 잽싸게 저수지물로 뛰어들어 한 손으로는 저수지 가장자리의 억세풀을 꽉 잡고 한 손은 길게 뻗어 내 손을
잡아당겼다. 죽느냐 사느냐 절체절명(絶體絶命)의 갈림길에서 형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난 나는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 저수지로 멱을 감으러 가지 않았다. 그리고 몇 년 뒤 결국 동네 초등학생 아이가 그 저수지에서 멱을 감다 빠져 죽는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 일요일, 수원을 떠나 경기도 용인과 경기도 광주를 전전하며 철공소에서 일하던 형을 가끔 찾아갔다.
그때마다 형은 햇빛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열악한 단칸방에서 기름때가 낀 까무잡잡한 손으로 내 손을 잡으며 ‘어서 오라’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리고는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서 짜장면을 사 주고 만 원 짜리 한 장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수업료를 제 날짜에 못내 교실에서 쫓겨나오기도 하고, 아르바이트로 약간의 돈을 벌어 쓰던 학창시절이었기에 형이 준 만 원은 나에게 큰돈이었고, 학비나 용돈으로 정말 요긴하게 쓰였다.
결혼하여 아들 딸 남매를 낳고 넉넉하거나 여유 있게 살지는 못했지만 형수와 맞벌이하면서 작은 집(아파트)도 장만하고 다복하게 사는 형의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나 40을 넘기면서 약한 체질 때문인지 결핵도 앓고 전립선염이 심해 병원에 입원도 했
다. 그러던 와중에 IMF사태가 왔고 이런저런 고통을 이기지 못한 형은 대학생 아들과 고등학생 딸을 남기고 45세의 젊은 나이에 하늘나라로 가버리고 말았다.
“형은 기억할지 모르지만, 내가 저수지에 빠져 죽느냐 사느냐 긴박한 상황일 때 가까스로 나를 살려낸 내 생명의 은인이야.
형이나 나나 가난한 농부 집안의 흙수저로 태어났지만, 형의 고달픈 삶의 여정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봐 온 이 동생은 형이 떠난 지 22년이 흘렀어도 형을 잊지 않고 있어.
형이 이 세상에 남긴 두 자녀는 다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렸고, 손자가 둘인데 큰손자는 벌써 초등학생이 됐어.
요즘도 가끔 꿈속에서 나타나는 형을 만난 뒤 잠에서 깨면 형이 꼭 살아있다는 착각이 들 때가 있어. 지금 만날 수만 있다면 형이 그토록 좋아하던 돼지고기, 불판에 구워 소주잔을 높이 들고 건배를 외치고 싶어.
약한 몸으로 태어나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누구보다 열심히 일하고 정직하게 살다간 형을 본보기 삼아 나도 최선을 다해 살아갈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내가 이 세상 떠나 형 있는 곳에 가면 예전처럼 반갑게 맞이해 줘.”
그 산 님!
저의 긴 글을 댓글로 달아서 죄송합니다. 2020년 3월 25일자 문화일보에 발표한 제 글입니다.
그 산 님의 글을 읽으니 45세에 스스로 삶을 마감한 제 형(바로 위로 나보다 2살 위)이 생각나서
형에 대한 글을 꺼내보았습니다.
민순님이 올리신 바로위 형님에 대한 글 천천히 잘봤습니다
저수지에 빠진 민순님을 구해준 형님이 45세에 세상을 떠나셨군요
제겐 세살위의 큰형은 23살의 새파란 나이에 생을 마감했고
저는 오랫동안 그일로 가슴아파했었지요
이젠 5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는데 유현덕님의 글 "바람든 무"를 읽고
큰형에 대한 기억을 되살려 봤습니다
@그산 국민학교만 나온 형에게
힘들게라도 고등학교까지 나온 저는 형에게 아무런 보탬도 주지 못했습니다.
지독한 가난을 이겨보고자 형이나 나나 허약한 몸으로 코피 터지게 일하며 살아온 지나간 나날들.
극단적인 선택으로 스스로 생을 마감한 형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립니다.
@박민순 어려운 여건속에서도 박시인님은 잘살아오셨고
형님도 천국에서 잘계실거라 봅니다 !
읽으며 눈물 납니다
젊은날 50 겨우 채우고 떠나버린
남동생
더욱 빨리 간
어머니 생각 납니다
반갑습니다
남동생분과 어머님이 일찍 돌아가셨나 봅니다
카페 어느분의 글을 보고 23살의 나이에 요절한
제큰형이 생각나 올려보았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오후되시기 바랍니다 !
아~~
둘다섯 먼훗날.
노래도 그립고 옛날도 그립습니다
반갑습니다
76년 2월에 요절한 제큰형의 사연이 있는 노래는
김만수가 부른것 같고 훗날 둘다섯이 불러 크게 알려졌다고 합니다
노래는 그시절 추억을 생각하게 하는 마술이 있는것 같습니다
두분의 구구절절한 이야기 요즘 세대들은 잘 모를겁니다 ㆍ나라가 가장 어려운 시기에 태어나 고생들 많이했지요ㆍ이제는 풍족함이 넘쳐나 흥청거리 삶을 사는 인간들도 많답니다ㆍ두분의 가슴에 남아 지워지지 않는 그 아픈 추억들 숙연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ㆍ오늘도 좋은 하루 되시길 ᆢ
감사합니다
유현덕님의 글을 보고 요절한 제 큰형이 생각나
형과 관련된 당시얘기를 올려 봤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
대가족 시대
다들 사연이 있지요
부모님
8남매 낳았는데
지금 3명만 ᆢ
반갑습니다. 매방산님은 형님, 누님과 나이차이가 많으신걸로 기억됩니다
저희는 4형제중에 큰형은 젊은 나이에 요절하셨고
막내는 폴란드에 간지 오래됐고 국내에는 작은형과 제가 남았습니다
우쒸! 울었잖아 왜 두 남자가 몸 아픈 나를 울리냐고요 나는 ㅠㅠ 15살 먹은 다음에야 고아원에서 찾아온 작은 오빠와 둘째 여동생을 만나고 얼마나 울었던지 나 또한 13살밖에 안되었고 고작 그세월 사느라 얼마나 서러웠으면 그리 울었는지 10살된 여동생은 얼마나 굶었는지 말을 잃었고 작은 오빠가 들려주던 당시 전쟁고아들 속 생활의 끔짝함과 고통스런 날들을 들으며 눈물이 그때도 울었고 세월이 이 만큼 지난 지금도 눈물이 흐르네 잘생기고 천재 소리듣던 작은 오빠 15살인데도 세상고초 다 겪은양 진중하기가 노인같던 일거일투 다들 잘살고 있고 삼척에 사는 여동생도 그 기억은 잊었지만 일상은 문제없이 헤쳐나가서 다행이지요 걸어온 과거는 온통 눈물로 얼룩진 우리 남매들의 이야기지요
에고 저희 형제보다 훨씬 사연이 많으신것 같습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 안되어 태어났기에 모두 어렵게 사신거 같습니다
이제 모두 육칠십대가 되어 자리잡으셨으니 이제는 여유있게 지난추억
나누며 재미있게 사시기 바랍니다
미네소타 다니러왔습니다 몸과
마음 바스러질듯 건조하던차에 촉촉해져오는 마음 눈물 ㅡ 사연들이 가슴을치고올라옵니다
미국 미네소타에 다니러 가셨나 봅니다
슬픈 노래나 이야기는 마음을 정화시킨다고 합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잘다녀오시기 바랍니다 !
잊으라 했는데 잊으라고 했는데...
아마 나는 너를 영영 잊지 못할꺼야~
어느 가수가 부른 유행가 일부인데, 우리는
죽지않는 이상 과거의 슬픈 추억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승화시켜 노래와 글과 그림...등등으로
표현할뿐이죠.
간만에 우리네 삶의 냄새가 폴폴 품기는 솔직
담백한 내용의 본문과 댓글들이었네요.
감사합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화이팅~!!
반갑습니다
저도 나훈아님의 영영 좋아합니다
평소에는 잊고 지내다 어느 계기가 되면 이렇게
어제일처럼 또렷이 생각납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오후되시기 바랍니다 !
저도 어릴때 언니랑 디게 싸웠는데 저는 맨날 두들겨맞는 입장이였어요
엄마가 장날 큰사탕을 사왔는데 사탕이 왕사탕이라고 골프공만했어요
4남매라서 사탕은 두개뿐이고 방망이로 깨트려서 나누었는데
언니꺼보다 내가 좀 더 큰거라고 언니한데 디지개 얻어맞고
결국 내입안에 있는 사탕 언니한데 뺏기고 엄마한데가서 위로받고 울고불고
아직도 생생합니다
20년전에 언니 돌아가시고 지금은 언니가 없어요 ㅠㅠㅠ
반갑습니다
눈깔사탕이라 하여 엄청 큰 사탕이 생각납니다
자매분이 어릴때 그사탕가지고 싸우신 추억이 있으시네요
사탕을 보면 언니 생각이 많이 나시겠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갑자기 더워지는 날씨에 건강유의하시기 바랍니다
가슴 아픈 옛 기억 이군요
반갑습니다
이제는 50년이 다되어 슬프다기보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오후되시기 바랍니다 !
댓글도 원문도
읽으니 눈물이 나요.
저도 남동생이 39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거든요.
우리때는 다들 어려운
시대였지요.
파란여우님 반갑습니다
남동생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네요
주변을 보면 스스로 떠나신 분도 은근히 많습니다
어려운 시기 잘 보내셨기에 이제는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네 저는 장손이라~~ 싸우지 않아요
장손이시군요
어릴때는 형제들은 누구나 싸우면서 큰다고 합니다
어린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있었을 추억 이네요
그때는 먹는거랑 입는거 때문에 많이 싸웠지요
남편의 형제가 4형제 인데 시댁을 가면
음식들을 넘 빨리 먹는거에요
이유는 먼저 먹으려고 했던 습관 이라고
...
그런데
그산 님
글이 너무 슬프네요
ㅜㅜ
반갑습니다
저희집도 요절하신 큰형까지 4형제인데
그러고보니 제가 밥을 빨리 먹는 이유를 알것 같습니다
슬픈 이야기는 영혼을 정화시킨다고 합니다
이제는 50년이 다된 이야기라 담담하게 회상할수 있습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오후 되시기 바랍니다 !
애고고~~~
형과의 그런 슬픈 사연이 있었군요
저도 읽으면서..
너무 마음이 아프더라고요
토닥 토닥 토닥~~!!
산사나이님 반갑습니다
형은 큰키에 하얀 얼굴 과묵한 사람이었고
윤동주시인을 아주 좋아했는데
그렇게 일찍 떠났습니다
이 글을 읽고 있으니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생각납니다
자취생활도 같이 했고 눈만 마주치면 쌈질을 하고
제가 힘이 달리니까 빗자루로 매질을 하면 억울해 하면서 맞아 주던 내 동생
고등학교 졸업 후에 같이 자던 친구들과 연탄가스에 먼 길을 가버렸지요
죽고 난 후 유난히 제 꿈에만 10여년을 나타나 용하다는 점쟁이의 힘을 빌려서
한나절 궂을 했습니다
삼일 후 중학교 교복을 입고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환한 얼굴로 꿈에 보이더니
지금까지 한 번도 안 보입니다
점쟁이가 그러더군요
지금 동생이 고마워하고 있다고 ....
그산님이 행복한 가정을 꾸리시고
잘 살아내는 것만으로 형은 고마워하실 것입니다
그까짓 곶감이 뭐라고 ~ 곶감만 보셔도 한이 맺히시겠습니다
가리나무님 반갑습니다
누나의 매질을 맞아줄 정도로 착한 남동생이었는데 연탄가스로
일찍 세상을 떠났군요. 동생분이 제일 친한 누나 꿈에만 나타났나 봅니다
형이 떠난지 곧 50년이 됩니다. 그동안 제꿈엔 거의 안나오셨지요
결혼하지 않은 이른 나이에 떠났기에 아버지가 생전에 형의 묘소를 정리했지요
파리한마리 죽이지 않을 정도로 착한 형이었기에 천국이 있다면 아마 천국에 계실겁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즐거운 봄날 되시기 바랍니다 !
가슴이 찡한 글이네요.
작년 떠나신 누나 생각이 납니다.
그저 마음 속에 새기며 살아갑니다.
글 잘 읽었어요.
김포인님 반갑습니다
작년에 누님을 여의셨군요
오랜세월 같이한 형제나 남매간의 이별은 더욱 가슴아프리라 봅니다
댓글감사드리며 편안한 저녁되시기 바랍니다 !
세상에나
너무 슬픈이야기네요ㅠ
친정도 남동생이 셋이라
셋이 무척 싸우면서 컸는데
자랄때는 그렇게 싸우며 자란다고 하던데
갑자기 훌쩍 떠나버리고
만회할 시간을 주지 않았네요ㅠ.ㅠ
정아님도 남동생을 여의셨나 봅니다
언젠가는 헤어질 사이지만 친동기간의 이별은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따뜻한 댓글 감사드리며 편안한 밤 되시기 바랍니다 !
@그산
아뇨
저는 셋다 건재하고 있어요
그산님 형님이
만회시간을 주지 않고
떠나신걸
전달력이 부족했네요ㅠ.ㅠ
이러거나 저러거나
슬픈이야기에 마음한켠이 시큰합니다
@정 아 아 다행입니다 제독해력이 부족한것같습니다
슬픈 이야기는 마음을 정화시키는 순기능도
있습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되시기 바랍니다 !
가슴아프면서도 한편 형을 그리는 따듯한 마음이 느껴집니다.
한창 자랄때 형제간의 갈등은 크든 작든 어느 집에나 있는 일이지만
제 경우도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형에대한 상실감은 두고두고 마음속에 회한으로
남습니다.좀 더 잘해 줄걸 하는...
반갑습니다 선배님도 형님을 여읜 아픔이 있으셨군요
저는 너무 이른나이에 형을 여의어서 한동안 형이
대문앞에 서있는것 같아 많이 무서웠습니다
이젠 글에서나 회상하지 평소에는 거의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댓글 감사드리며 행복한 봄날되시기 바랍니다 !
형제나 자매를 먼저 보내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이지요.
형님을 먼저 보내신 그산 님 마음이
어땠을까 짐작이 갑니다.
제가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많이 울었던
때가 큰오빠가 돌아가셨을 때였답니다.
울고 또 울고...
슬픈 일은 기억하면 또 슬퍼지기에
이젠 기억조차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베리아님반갑습니다 제큰형은 키가 크고
과묵하지만 저희들을 데리고 고기잡으러 많이
다녔습니다 형이 떠났을때 울기보다는 많이
놀랐고 섬뜩하였지요 50년 가까이 흘러 글로
이렇게 회상해봅니다
댓글감사드리고 즐거운 하루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