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삼백예순일곱 번째
두레 밥상
우리네 오랜 문화 가운데 두레가 있습니다. 4계절이 있어 시기를 놓치면 한 해 농사를 망치니 여럿이 함께 농사일을 해내고, 이웃에 어려울 때 서로 돕는 아름다운 공동체 문화입니다. 이때 함께 일하고 함께 먹는 밥을 두레밥이라 했습니다. 우리는 오랜 세월 두레밥을 먹으면서 공동체적인 유대감을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풍습은 이웃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문화를 창조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네 만남은 밥상에서 만남을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정일근 시인인 <둥근, 어머니의 두레밥상>이라는 시에서 “모난 밥상을 볼 때마다 어머니의 두레 밥상이 그립다.”라고 노래합니다. 식구들이 모이는 날이면 어머니가 펼치시던 두레밥상이 그립다는 겁니다. 거기에는 다툼이 있는 모난 밥상이 아니라, 만남이 있고 우애가 있고 사랑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4대 봉사奉祀라는 제례가 있습니다. 4대에 걸친 조상들의 제사를 받들어 모신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존재할 수 있게 한 많은 조상 가운데 왜 4대 봉사만 의식으로 남았을까요? 밥상과 관련이 있답니다. 옛사람들은 식구食口가 아니면 한 밥상에서 밥을 먹지 않았답니다. 함께 먹더라도 상을 따로 했고, 심지어 그릇도 식구 외의 사람에게는 다른 그릇을 사용했답니다. 가족을 식구라고 하는 이유일 겁니다. 대가족 시절 대개는 4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니 밥상을 함께한 조상까지만 제사한다는 말입니다. 밥상을 같이한다는 말에는 이렇게 웅숭깊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 누구와 자주 밥상을 같이하나요? 밥상을 함께할 수 있는 친구, 그가 이웃이겠지요. 옹두리로 울퉁불퉁해진 우리네 삶에 밥상을 함께할 수 있는 이웃이, 친구가 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마음이 고파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