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 위나암성>에 관하여
어떠한 글자의 의미에 대해 전혀다른 해석을 내놓으려면 그에 맞는 사례나 용례를 들어서 실제 그렇게 사용했음을 증명해야함이 논리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차원에서 지난글에서 수경 요수관련 해석에 대해 의견을 냈다면 이 글은 國이라는 고구려 지명에 대한 의미에 대한 지적이라고 하겠습니다.
카론님의 원문은 색으로 저의 글은 검정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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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국내(國內)의 의미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국(國)은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 이므로 국내성은 국경 지역에 있다라고 했는데요.(중략)
우리 역사는 중국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역사 해석은 반드시 중국의 시각에서 봐야 합니다.
==>카론님이 國이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 라는 의미라고 보는 것은 가운데에 戈가 들어가서 그런 듯 한데 본래 國자는 갑골문시기부터 상형문자입니다. 물론 글자의 어원을 카론님 처럼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국은 성읍국가시절에 생긴 개념이므로 1차적으로는 성읍국가나 도읍 자체를 의미하는 <명사>이고 이것이 국가규모가 커지고 발전되어 하나의 국가를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력으로 국경을 지킨다>라는 의미는 어원차원에서는 볼 수 있으나 실제 사용례에 비해서는 너무 여러단계 나아간, 실제 쓰이는 의미와는 다른 의미해석입니다. 그래서 저는 밑에서는 고구려의 國자가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다른 사례로 이야기를 풀어가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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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의 시각으로 국내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국 : 무력으로 국경을 지키는 곳
내 : 안쪽
===> 고구려인이 직접 사용했던 고구려인의 도읍 명칭을 왜 중국인의 시각으로 봐야 할까요???
중국사서에 국내성이 기록되기 훨씬 이전부터 고구려는 國이라는 글자와 국내성을 썼고 삼국사기에 명확히 나와있습니다. 고구려인이 기록한 광개토대왕비문에도 國을 도읍/수도라는 명사로 쓰지만 카론님의 의미로 쓰지는 않습니다. 카론님이 최소한 삼국사기기록은 고려하지않는다면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나가야 될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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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낙랑 동부 7현은 고구려가 빼앗았습니다. 카론은 국내, 불이, 남옥저, 낙랑 동부 7현을 모두 같은 곳으로 묶어 보았습니다. 먼저, 요동이 그림처럼 위치해 있어야 합니다. (중략..)
요동의 위치가 잡히면 대릉하가 패수가 되고, 지리적으로 강을 경계로 국경이 형성됩니다.
===> 요동의 위치비정에 대해서는 과제로 남겨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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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한나라의 국내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패수 안쪽에서 수비를 하고 있던 낙랑군 동부 7현이 고구려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중국의 시각에서 고구려에게 넘어간 낙랑군 동부 7현에 대해 그들은 뭐라고 불렀을까요?
국경을 지키던 곳의 안쪽. 즉, 국내 지역이 됩니다. 국경 안쪽을 고구려에게 빼앗겼고, 고구려가 그곳에 성을 쌓았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애들이 국내 위나암성. 국내 국내성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 낙랑군 동부도위가 관할하던 지역은 옥저, 예 지역입니다. 옥저와 동예가 고구려 세력하에 예속되어 놓이다가 아주 직할지로 바뀌는데에는 어느정도의 시간차가 발생합니다. 중국사서에 그 전후사정이 나와있고 삼국사기에도 옥저나 예가 간혹 등장하다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카론님의 주장은 동부7현지역을 <점령>하고 성을 쌓았고 그 성은 중국인들이 국내성이라고 부르게되었다는게 요지인 듯 합니다. 그럼 이런 조건들이 성립되어야 합니다.
(1)국내성 명칭은 동부7현 점령 이후에 발생해야 할 것
(2)점령직후에 성을 쌓고 도읍으로 삼았다면 그 이전 수도에 대해 명칭과 명확한 근거가 있어야 할 것.
(3)중국인들이 국내성이라고 불렀다면 정작 고구려인은 국내성을 무엇이라고 불렀는지.
(4)현재 집안시는 고구려인들이 무엇이라 불렀는지.
이런 조건과 전후사정을 밝혀가면서 논지를 밝혀나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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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 위치비정에 대한 내용은 말이 너무 길어질듯하여 중략합니다. 아래는 댓글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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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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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경우 성리학이 주류였기에 집안에 사당을 뒀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시대의 사상은 성리학이 아닙니다. 그래서 도읍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붉은 색지역과 노랑색 지역을 제외하면 사람들이 어디에 살았을까요? 그리고 뭘 먹고 살았을까요?
===> 집안시 일대가 사람이 살기 힘든 곳일까요? 지금도 집안시와 마주보고 있는 만포시도 도시를 이루고 있습니다. 좁은 산악지대이니 평야지대에 비할바는 물론 아니겠죠 그래서 중국에서는 이렇게 기록합니다.
都於丸都之下,方可二千里,戶三萬。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
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이 원문으로 답이 되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즉, 살기 힘들다는 곳에 위치하고 있음은 익히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죠. 오곡이 풍성하고 살기 좋고 어쩌구...이런 곳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꾸준히 다른 지역을 공략하고 주변 세력들을 복속해나가면서 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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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유리왕때 낙랑군의 호 수가 증가합니다. ....국내 위나암에 성을 쌓아 낙랑군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이때 부여가 움직입니다. 이는 고구려가 남쪽에 병력을 집중시키자 북쪽에 있던 부여가 5만을 동원해 고구려를 치려고 했던 겁니다. 일종의 낙랑군과 부여가 연합을 했던 것이지요.(...)
===> 삼국사기에 국내 위나암에 대한 언급, 도읍으로 삼게 된 경위가 적혀 있습니다. 그런데 물론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유리왕 이전에 접해보지 않았던 낙랑군을 대비해서 성을 쌓았다는 경위는 찾을 수가 없겠군요. 부여가 고구려를 치려 했다고 하여 또한 낙랑과 부여가 연합을 했다는 것도 어디서 그 상황을 찾을 수 있을까요? 거기에 대해 저는 오히려 고구려를 의식하여 부여가 접촉하고 왕래가 있었던 것은 현도군이라는 것은 다른 기록을 통해서 충분히 알 수 있다고 말하고 싶군요. 고구려가 졸본을 떠나서 국내로 옮기게 된 것은 외부적 요인을 찾자면 부여의 위협에 대비하거나 피하기 위해서이지 낙랑을 넣어서 생각하기에는 상황이 부족해 보입니다. 삼국사기에는 부여의 위협이 여러번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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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는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나라 동쪽에 대혈이 있어 10월에 천제를 지낸 곳입니다. 지리적응로 많은 사람이 살수 없습니다. / 평양 인근은 평지여서 많은 사람들이 살 수 있습니다. 그곳에도 명당이 있구요. 고구려 영역이므로 고구려 고분이 있어도 전혀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백제도 아주 넓은 평야지대잖아요. 사람 많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백제 영역에 속하니 고분이 있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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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시가 산이 깊고 면적이 크지 않음은 알수 있지만, 집안시일대만 수도영역이라고 보기보다는 그 건너편에 만포시일대도 있으며, 하루거리 내에 압록 상류나 하류쪽으로도 취락이 발달할만한 곳은 있습니다. 물론 국가가 거대해진 평양도읍시대와 비할바는 아니죠. 그래서 중국사서에서는 산이 깊고 좋은 밭이 없고..힘써경작을 해도 음식을 아껴야 하고..등등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살기힘들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집안시가 국동대혈이 있는 곳이고 천제를 지낸 곳이라면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 곳입니다. 그럼. 카론님 주장에 수도가 아닌 집안시는 어떤 곳이며, 고구려 역사에서 관련기록을 찾을 수 있는지, 왜 그곳인지, 고구려인들은 그곳을 어떤 지명을 불렀는지...고분들은 고고학적으로 5세기까지 이어지고 있고 오랜시간 무덤들이 조성되었으나 도읍은 아닌곳.도읍과 전혀 다른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 그런 곳....뭔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중요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도읍지는 아니지만 고구려 영역이니 그정도 고분군이 있어도 문제될 것이 없다...라는 것은 조금 비상식적이지 않을까요? 다른 동시대 국가들이 전부 도읍지인근에 왕과 지배층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고구려만 전혀 한참 떨어진 지역에 그렇게 조성해야한다는 것은 그냥 문제 없다는 식으로 넘어갈 사항은 아닙니다. 다른 사례, 논리적 근거가 더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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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레네)다음부터는 고구려가 사용한 國에 대한 저의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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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國”은 예나 지금이나 “국가”를 의미하지만 고구려인들의 國 은 그 의미 외에도
❍ 보통명사로서 도읍지, 수도
❍ 고유명사로서는 국내성과 그 일대 수도지역 자체를 의미(평양으로 완전히 천도하기 전까지)
로 썼다고 할 수 있다.
❑ 국내성에 관한 견해
❍ 국내성은 최초에 유리왕이 도읍을 옮긴 곳이며 처음에는 위나암성을 쌓았다. 이후에는 환도성을 쌓았고. 국내성을 쌓았다. 장수왕의 천도 이전에 이미 平壤 지역으로 옮긴 것으로 보이는 기록들이 있으나 왔다갔다 한것인지, 또는 장수왕의 平壤과는 다른 지역인지는 불명확하나 여기에서는 주 대상이 아니므로 소략.
❍ 집안시의 고구려 고분은 1만2천기 이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졸본으로 보고 있는 환인지역에는 750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자료는 잘 안찾아지는데 집안시 맞은편인 만포시에도 고구려 고분과 유적이 있다고 한다.
❍ 따라서 집안시와 바로 이어져있는 만포시 일대 역시 국내성에 부속된 지역으로 봐야 할것이며, 현재 환도산성으로 불리는 지역과 인근지역까지 국내로 봐야한다. 또한 압록강 하류방향으로도 평지가 있고 고구려유적지가 이어지는데 이 지역까지 포함하여 하나의 國內 지역으로 봐야한다. 왜냐하면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고 붙어있으며 집안시에서 하루내에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이기 때문이다. 집안 서남향의 마선향(??)이란 곳에서 집안시를 지나서 만포시 끝까지 하나의 생활권이며 거리는 약 20KM(직선거리)정도 된다. (구글지도로 측정했을 때)

❍ 아래 지도에서 고분군 지역이 상당부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그부분을 제외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지도에서 찍어보면)폭 2~3키로 ~ 길이 20키로 정도의 지역적 공간은 나온다고 보인다.
아래 사진은 현재 환도산성 지역 일대는 표시하지 않은 것임을 감안해서 봐야 한다. 집안시 시내 정도로만 보통 인식해왔던 국내성지역은 이처럼 다소 멀리서 보면 더 많은 지역이 국내에 부속된 지역임을 확인할 수 있다. 多大山深谷,無原澤。隨山谷以為居,食澗水。無良田,雖力佃作,不足以實口腹。其俗節食 라는 기록에 부합해 보인다.
❑ 고구려 왕명으로 본 國
❍ 장수왕 이전의 고구려 왕호는 왕이 죽고 장사지낸 장소와 관련이 깊다. 표를 보면 상당수 초중기 왕들의 왕호가 장소이름으로 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수도의 이름, 고구려인들이 부른 서울의 이름이 <국내>였기 때문에 관련 국내지역에 장사지낸 왕들의 상당수 이름에 國과 관련된 지역명이 들어가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故)국양, 국천, 국강상, 국원...과 같은 이름들이다. <이때의 國은 국내성(수도)에 대한 고유명사이다.>
이것은 국내를 완전히 떠난 5세기중후반부 이후로는 故國으로 쓰기 시작했다고 보입니다.
판단이 된다. (태후 우씨의 말, 광개토왕비문의 글)
이에 대한 논거는 2부를 통해서 살펴보겠다.
쓰다보니 하자체가 되었네요..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이후에 다시 정리해서 추가 논지를 이어가보겠습니다.
첫댓글 국내성을 논할 때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식량을 생산할 수 있는 경작지 면적입니다. 기본적으로 먹고 살아야 하니까요. 조선시대 경지당 식량 생산량을 조사해 봤더니 1결당 현미 300두~400두, 벼 600두~800두라고 합니다. 현미는 도정을 한 쌀이고, 벼는 도정하지 않은 상태로 약 1:2의 비율로 나타납니다. 계산을 돕기 위해 1결 : 약 5천평, 1두 = 1,8리터, 1ha 약 3천평로 1ha로 환산을 하면 320kg~430kg 정도 됩니다. 조선시대는 농번기 3끼, 농한기 2끼씩 하며, 년 평균 2.5끼를 섭취했는데요. 성인 기준, 하루 500g씩, 1년 소비량은 180kg 정도 됩니다. 이는 통계학적인 수치이며, 1ha 당 2~3명 정도의 생산량을 의미합니다.
집안시 그림을 통해 면적을 표시해 드렸습니다. 10kmX10km=10,000 ha가 되구요. 그곳이 온통 경작지라 하더라도 2만~3만명 정도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데 집안시는 면적이... 만포시쪽까지 생각해도 얼마 안 됩니다. / 카론은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나오는 호구를 호 : 병사수, 구 : 세금내는 사람의 수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호구만 말해도 해당 지역의 현황 파악이 쉽게 되거든요. / 유리왕은 국내지역 위나암에 성을 쌓습니다. 왜냐하면 한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신나라 시대에 내정이 엉망이었을 때 국내 지역으로 확장했는데, 그 땅을 지키기 위해 성을 쌓았던 것입니다. 국내 지역은 무휼때 정리가 되는 듯 싶구요.
수도의 생계가 수도면적에 달려있다고보기힘든게 수도는 인구의 밀집으로 생산력은 기본적인생산외에는 지방에 의존하는게 일반적입니다. 평양성내나 경주 유적지가 도시거주지유적이지 경작지유적은 아니죠. 게다가 분명히 기록에 고구려 밭이적다..살기힘들다..고되있고 주변세력을 복속시켜가며 식량등을 착취한다고 되있고 아랫백성들이 멀리서 식량을 나른다고 명백히 기록되있습니다 / 기원직후에 고구려가 국내로 천도 하는데 이후에도 영동7현은 존속하거나 거수에 의해 자치를 하다가 서서히 고구려에복속됩니다. 왜냐하면 국내와 영동7현은 무관하니까요. 게다가 중국인들이 그지역을 국내가아니라 영동이라고 하고있네요
@키레네 유리명왕의 다른 이름을 보시면 유리(類利 유류(儒留) 누리(累利)라고 합니다. 이 이름들을 해석하면 유리왕이 개간에 무척 공을 들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유리(類利) : 벼를 베는 무리, 유류(儒留) : 밭에 물을 대는 선비, 누리(累利) : 벼를 베어 묶다. 황조가를 보면 유리가 箕山에 밭일로 7일동안 가 있었는데 부인들이 크게 싸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箕는 곡식을 탈곡할 때의 기구로, 곡식을 베어 언덕으로 옮긴 후에 그곳에서 탈곡을 했다는 것입니다. 왕이 직접 농사를 관장하고 개간을 하면서 국력을 키웠기 때문에 대무신왕이 힘을 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카론 삼국시대 초기엔 사람 이름을 지을 때 한자어의 음만 빌려왔지, 뜻까지 빌려오진 않았습니다.
@키레네 식량 착취, 식량을 옮겼다는 문헌 기록이 어디에 있습니까? 옥저사람들에게 바다에서 나오는 물건들을 나르게 했지만 식량은 아니거든요. 카론은 고구려가 심하게 다룬 옥저 사람은 남옥저 사람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남옥저는 한나라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아 양쪽 모두 눈치를 보는 관계였고, 경제 교류도 남옥저가 맡아서 했을 것으로 생각하니까요. 중국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남옥저 사람들이 딱해 보일 수도 있었을 것 같기도 합니다. / 영동과 국내 지역은 구분하는 기준점이 다릅니다. 영동은 어떤 고개의 동쪽을 말하고, 국내는 고구려에게 장악당한 어떤 영토를 말합니다. 영동7현과 국내지역이 겹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조수아 카론도 우이독경을 생각합니다.
@카론 누가 할 소리죠 ㅎㅎ
@카론 하호들이 멀리서 쌀과 양식, 물고기, 소금을 가져다가 공급한다는 기사는 못 보셨나 봅니다.
@조수아 하호들이 쌀과 양식 물고기 소금을 가져다 줬다는 내용은 坐食者에 대한 내용입니다. 좌식자가 앉아서 먹는 사람이니 놀고 먹는 귀족인가 싶었는데 좌(坐)의 원뜻을 찾아보니 전혀 뜻밖의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마주보고 있는 형태래요. 판문점에서 남한 병사와 북한 병사가 서로 마주보고 있잖아요. 이 형태가 바로 좌(坐)라고 합니다. 고구려 신대왕때 좌원(坐原)이란 곳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마주보고 있는 언덕에서 싸웠으니 최전방 국경에서 전투를 벌인게 됩니다. 좌식자는 국경을 지키는 병사들입니다. 국경에서 경계 근무를 하느라 농사를 짓지 못하니 이들에게 식량을 날랐던 거죠.
@카론 근거는?
@조수아 그럼 좌식자의 의미가 뭐죠?
@카론 질문에 먼저 답하시는 게 순서입니다
@조수아 카론은 근거를 말했잖아요. 바로 위에...
@카론 후... '坐'의 본래 뜻을 그렇게 말하는 근거를 달라는 겁니다. 옥편을 봤든 논문을 봤든 뭘 보고 저렇게 말하는지 알려달라는 겁니다.
@조수아 한자를 검색해 보세요. 한자 연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자 원래 의미를 이해하려고 공부하다보니 조금은 알겠더군요. 한자 연구는 먼저 한자를 이루는 구성을 살펴보고, 구성의 뜻을 분석하고, 한자의 쓰임새를 찾아서 공통으로 들어가는 의미를 추적하는 과정을 밟습니다. 꽤 많은 한자들의 원형들이 밝혀지고 있습니다. 坐의 경우 한자를 쪼개면 또 뭐라 할 것 같아서 예로 坐定이 있습니다. 의미를 잘 생각해보시면 두사람이 마주 앉다라는 것을 아실 겁니다. 이 내용은 카론이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연구된 내용을 가져온 것입니다. 한자 공부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내용입니다.
@카론 그러니까 그 사람들, 그 연구자가 누군지 밝혀달라는 말입니다. 한번에 좀 알아들으시죠?
@조수아 설명한 자료 많으니 찾아 본 후에 질문하시구요. 좌식자에 대한 의미는 모르시는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카론 나야말로 카론님이 아무 근거 없이 앉을 좌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얘기한 걸로 이해하겠습니다. 먼저 던진 질문에 답변도 하지 않았는데 자기 질문을 모르느니 마느니 하는 것은 참으로 무식한 행동입니다. 내가 왜 좌식자에 대해서 얘기해야 할까요? 먼저 흡족하게 답변하지 않고 성의 없게 알아서 찾아보라는 둥 얘기하면 답니까? 사람 무시하는 것도 유분수지
@조수아 조수아님은 기본적으로 토론할 자세가 없어요. 카론이 말한 좌식자에 대해 내용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의견부터 밝히면서 논리를 펴셔야죠. 카론은 좌식자에 대해 설명을 했습니다. 한자에 대한 해석도 설명드렸구요. 한자를 검색해 보면 쉽게 찾을 수 있는 내용이라고 계속 말했잖아요. 들을 생각도 없으면서 왜 남의 귀한 시간 허비하게 만듭니까? 무식하다고요? 애써 설명을 드렸더니... 근거는? 행동하는 것이 엉망이니 무시하는 겁니다.
@카론 이제는 다른 사람의 자세까지 함부로 단정 짓습니까? 그 전에 자신의 태도부터 조용히 고찰해 보시죠. 근거는 정확해야 합니다. 뭉뚱그려서 한자 연구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한자 공부하면 저절로 알게 된다는 정도로 근거가 되진 않습니다. 더구나 기존 견해에 반박하려면 더욱 정교한 근거 제시가 필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근거를 물어본 것입니다.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출처'를 달라는 겁니다. 출처를요. 이렇게 사람 말을 못 알아들으니 무식한 행동이라고 얘기할 수밖에요. 남의 행동에 엉망이니 뭐니 하며 정죄하기 전에 본인 행동부터 점검하세요.
@카론 내가 가진 옥편에 '앉을 좌' 자에는 '앉다'가 중심 의미로 되어 있고 님처럼 마주본다는 것은 대질 심문하는 경우에 쓰인다고 되어 있습니다. 좌식자는 따라서 앉아서 음식을 먹는 자로서 과거엔 놀고 먹는 귀족 집단 정도로만 이해가 됐었지만 전문 전투 집단으로 보는 것이 요즘 학계의 일반적인 해석입니다. 나 또한 동의합니다. 좌식자를 국경 경계 근무자라고 이해하기 위해선 어원을 정확한 출처 위에 새롭게 밝혀내는 것도 중요한 것이겠지만 오늘날과 같이 정교한 경계 근무자가 당시에 존재했는지도 따져봐야 합니다. 오늘날 공동경비구역처럼 당시의 국경 경계도 엄밀했을까요? 진수가 한낱 경계 근무자의 취식물 보급 방식을 비중
@카론 있게 다룰 필요가 있었을까요? 국경수비대의 보급 문제가 타국에 대한 기록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일까요? 좌식자가 현 학계의 해석처럼 전문 전투 집단이라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삼국지가 기록될 당시가 지금처럼 종이가 풍부했거나 인쇄술이 발달한 시절이 아니란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글 쓰기가 쉽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을 남겼다는 데에는 굉장히 중요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좌식자가 한낱 경계 근무자라면? 수긍하기 어렵습니다.
@조수아 이렇게 글을 써 주셨으면 기쁨 맘으로 답을 해 드렸을 것입니다. 조수아님도 귀한 시간을 투자해 주셨으니까요. 학계에서도 전투집단으로 해석하고 있다면 바로 坐자 때문일 것입니다. 坐의 모양을 보면 사람이 두명이 있지만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 모릅니다. 마주할 수도 있고, 뒤를 보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래서 한자가 사용된 범례를 찾아 보았더니 마주 본다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대질할 때 마주 보며 하잖아요. 坐定도 마주보고 있는 상황에서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많은 분들이 마주본다는 의미가 있다고 해서 한자가 품고 있는 의미를 말했는데 왜냐고 하면... 홍시맛이 나서 홍시라고 했던 장금이가 됩니다.
@카론 결국 예상했던 대로 논지가 이리 흘러가는군요. 출처는 없고 본인의 자의적인 해석만 있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기분 나빠하시길래 압축했던 걸 풀어서 궁금한 걸 설명해드렸더니 또 엉뚱한 소리만 나열하는군요. 뻔히 이리 될 줄 알았는데 아까운 시간만 허비했군요. 참고로 좌정은 마주볼 때보다 그냥 앉을 때 많이 사용됩니다. 다시 한 번 님이 답이 없는 것을 확신하네요.
@조수아 카론은 坐原을 조사하다가 좌에 서로 마주한다는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휴전선이 생각났거든요. 국경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고, 좌원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는 내용을 통해 좌식자의 의미를 비로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과거에서 있었던 일이 현재에 나타나듯이 현재 상황으로도 과거를 유추해 낼 수 있습니다. 현재 휴전선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가 있습니까? 그들이 우리 군의 주력 아닌가요? 조선시대에도 국경지역에 병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후방에 있는 병사들보다 전투력이 높았습니다. 조수아님 군대 다녀오셨습니까? 카론은 전방에서 훈련량 최고인 부대에서 근무했는데요.
@조수아 그래서 전방 부대에 대하여 전문 전투 집단으로서 신뢰가 높습니다. 그리고 국경을 지키는 것은 모든 국가들이 하는 일입니다. 뉴스를 보면 북한 동향에 대한 기사가 계속 나오잖아요. 왜 나올까요? 우리 안보에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중국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국경에 1만명이 눈을 부릅뜨고 있으니 계속 신경이 쓰이는 것입니다. / 스스로 옥편에 대질한다는 의미도 봤고, 전투집단이라고 인정했음에도 아니다라고 하면 뭐라 설명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도대체 어느 이유로 전투집단을 인식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카론 현대를 기준으로 과거를 보지 마십시오. 고대에도 국경 수비대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견고한 수준으로 국경을 감시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 초기의 경우는 대규모 상비군을 운용할 능력도 되지 못했습니다. 저도 군대를 다녀와서 GOP 근무가 얼마나 열악하고 힘든지 알지만 그건 현대의 일입니다. 고대는 고대의 눈으로 봐야할 것을 분명 앞 댓글에서 이야기했습니다. 난독증이십니까?
@조수아 고대에도 국경수비대가 있었지만 지금처럼 견고한 수준으로 국경을 감시하지 않았다는 근거가 뭐죠? 기록이 있습니까? 카론이 무식하여 좀 알려주셨으면 합니다. 고대의 눈으로 보려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니 일단 현재의 인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과거를 조명해야 합니다. 기록을 보고, 과거부터 계속 이어져온 행동 패턴을 보면서 추론하는 것. 이게 기본 개념 아닌가요? 좌식자의 대하여 연구된 내용을 찾지 못해, 나름 좌식자가 국경의 병력으로 추론을 했는데요. 그 수가 1만이라면 견고하게 국경을 감시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카론 고대에는 국경 개념이 지금처럼 선이 아니라 면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라에 기근이 발생하거나 세금이 무거워 살기 어렵거나 하면 대규모의 백성들이 쉽게 국경을 넘어 이동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그 근거입니다. 오늘날처럼 국경 수비가 견고했다면 대규모 이탈은 발생하기 어렵습니다. 간혹 탈북자들이 있긴 해도 그 수는 적습니다.
@조수아 카론이 알고 있는 坐에 대한 의미를 말씀 드리고 토론은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한자 형태를 보시면 사람 두 명이 있습니다. 서로 마주보고 있다라고 말씀을 드렸는데요. 두 사람 사이에 흙토가 있으니, 토지(땅)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주보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 해결을 위해 두 사람은 마주하여 앉게 되는데요. 앉다의 의미가 이런 개념입니다. 한자는 수천년 동안 발전해 왔기 때문에 고구려 시대를 이해하려면 가급적 한자의 원형에 가까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혹시 역사 이해의 폭을 좀 더 넓히시고 싶은 분이 계시다면 한자에 관심을 두시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카론 출처는 밝히지 않은 채 사견으로 끝맺는군요. 모르면 모른다고, 출처가 없다면 출처가 없다고 하면 될 것이지 이렇게도 용기가 없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조수아 한자가 만들어진 개요를 설명해 드린 이유는 이 내용을 이해해야 坐의 의미 중에 있는 지키다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 사전 보세요. 예제 楚人坐其北門 <左氏傳>를 통해 북문을 지키다로 설명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食의 뜻도 보셨습니까? 밥 먹다 외에 생활하다 녹을 먹다의 뜻도 있습니다. 그래서 좌식자는 지키며 녹을 먹는자로 해석이 그냥 됩니다. 지키다에 땅을 두고 바라보고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으므로 국경지역도 포함될 수 있는 거구요. 출처는 사전을 기본으로 하고 있어요. 대질하다를 보셨으면 지키다도 보셨을거 아닙니까? 전에 가르친다고 해서 스스로 생각해 보시라고 핵심 포인트만 말씀드리잖아요.
@카론 사전에서 첫째 의미는 활용 빈도가 제일 높은 의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활용 빈도가 낮은 의미로 굳이 해석하는 것이 의문이며, 설령 지키다의 뜻으로 해석을 한다 해도 굳이 국경수비대로만 생각할 이유도 없습니다. 전문전투집단도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하는 거니까요.
@조수아 학계에서 전문전투집단으로 해석했다고 하여 카론은 坐의 지키다와 관계가 있다고 판단했고, 좀더 정확한 내용을 알고 싶어 관련 연구 자료가 있나 찾아보고 있는데요. 조수아님도 전문전투집단에 동의를 하셨으니 이 내용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혀 모르셨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현 옥편의 활용범위는 앉다가 주가 되어 나옵니다. 하지만. 사기, 한서, 후한서, 좌씨전, 삼국사기등에 사용된 예를 보면 상당히 다양한 의미로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坐에 숨어있는 원래의 의미를 계속 강조했던 것입니다. 작가에게 무슨 뜻인지 물어 볼 수 없으니 스펙트럼을 넒혀서 생각해 보셨으면 합니다.
@카론 그런 식으로 모르신다는 느낌 어쩌구 라고 얘기하지 마십시오. 학계 운운하시는데 글자 하나하나에 집착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의견 근거 만드려고 애쓰는 분은 학계엔 없는 것 같습니다. 지키다의 뜻을 취해도 님이 생각하는 망상과는 직결될 수 앖음은 이미 지적했습니다.
키레네님 애쓰시네요. 우이독경인데...
이분이 혹시 한자를 쪼개서 의미를 만드시는 분이던가요?
@키레네 네 댓글에서 보시다시피요...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해석이죠
@키레네 한자를 쪼개서 의미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한자의 원래 의미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학자들도 문헌 해석을 할 때 한자의 원래 의미부터 정리했다고 하더군요. 그때는 갑골문의 존재도 모르던 시대였기에 해석의 오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최근 갑골문을 발견되면서 한자의 원형에 대해 연구가 진행되고 있어 그 부분을 참고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