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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입을 다 막으려고 하지 말고 차라리 대통령 귀를 막으심이… (사진 : 노컷뉴스) |
삼성 이건희 회장의 ‘경제 낙제점’ 발언 후폭풍이 거셉니다. 이 회장은 지난 10일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회의에서 기자들과 만나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흡족하지는 않지만 낙제점은 아니라고 본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 발언이 알려지자 청와대는 발끈했습니다. 고위관계자들이 나서, 전례 없이 공개적으로 불쾌한 심기를 드러냈습니다.
기겁한 삼성은 부랴부랴 말을 주워담았습니다. 그래도 화가 안 풀린 정부는, 이번엔 기획재정부 장관이 한 번 더 불쾌한 입장을 표출했습니다. 삼성도 16일 한 번 더 해명을 반복했습니다. 청와대-정부와 삼성이, 한 마디로 국민들 앞에서 웃기는 일들을 벌이고 있습니다.
먼저 이 회장 발언과 삼성의 말 주워담기는 아이들 장난처럼 보입니다. 낙제 운운은 시각에 따라 다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회장의 “과거 10년에 비해서는 상당한 성장을 해왔다”는 얘기는 근거를 알 수가 없습니다. 무슨 통계치를 갖고 그런 얘기를 했는지 궁금합니다. 삼성만이 갖고 있는 은밀한 통계가 있다면, 한번 내놓으면 좋겠습니다.
그룹 관계자의 회장발언 해명은 더 어이없습니다. “이 회장의 얘기는 ‘낙제는 아니다’라는 말보다는 ‘과거 10년에 비해 상당한 성장을 했다’ 쪽에 더 의중이 실려 있다”고 했습니다. 누구는 국어를 모른답니까. 참 궁색합니다. 꿈보다 해몽입니다. 아무리 공포에 질려 하는 해명이라도 좀 그럴듯해야지요. 너무 노골적인 무릎 사과가 측은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청와대와 정부의 태도는, 협량하고 쩨쩨하기 그지없습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경제가 얼마나 대단한 성장을 했고, 얼마나 위대한 성적표를 냈기에, 그 정도 발언에 그리 불쾌해하는지 어이가 없습니다. 국민의 정부-참여정부와 비교조차 되지 않는 화려한 성적을 거뒀는데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서운해 할 수도 있겠지요. 희대의 대국민 사기극에 가까운 대선공약, 그러나 초라하기 그지없는 현실. 그 엄청난 괴리 앞에서 무슨 염치로 그리 길길이 흥분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참 뻔뻔한 사람들입니다.
또 기업인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과민하게 반응하고 입을 틀어막으려는 처사가, 민주적인 사회에서 과연 타당한 것인지도 반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정도 발언이 불쾌하고 불편하다면, 경제상황과 관련해 5년 내내 욕설과 저주에 가까운 공격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대체 어찌 했어야 할까요. 지하 고문실에 잡아 가두고 주리라도 틀었어야 한답니까.
더구나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및 출범 초기, 입이 닳도록 “기업 프렌들리” 운운하면서 갖은 생색과 허풍을 떨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유치한 입막음이 더욱 웃기게 느껴집니다.
“친기업이라는 말을 꺼리는 사람이 있지만 나는 당당하게 쓰겠다.” (경제 연구기관장과의 만남)
“차기 정부는 ‘비즈니스 프렌들리(business-friendly)’ 정부” (재벌 총수들과의 만남)
“너무 친기업적이라고 하는데, 맞다. 기업이 잘 돼야 나라가 잘되기 때문이다” (상공회의소 회장단 신년인사회)
“(‘비즈니스 프렌들리’라는 개념은)시장에서 기업들이 창의적인 도전정신을 가지고 투자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신년 기자회견)
그냥 그 정도면 모르겠습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기업들을 추켜세웠습니다.
“정부가 (기업의) 철저한 도우미 역할을 하겠다” (주요경제단체장-대기업회장단 민관합동회의)
“성장의 주역이 누구냐. 지금은 기업이 주역이고, 우리(정부)는 뒤에서 지원하는 후원부대다. 기업이 조연이고 우리가 주역인 것처럼 국정을 폈던 때도 있었으나 지금은 갑을(甲乙)이 바뀌었다.” (전국 세무서장 초청 간담회)
그뿐이 아닙니다. 온갖 이벤트를 벌였습니다. 기업인들이 공항 귀빈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한다며 청와대가 직접 나섰습니다. 압권은 대통령과 기업인의 핫라인 전화 개통이었습니다.
당시 보도를 보면 웃음이 빵 터집니다.
“기업인 핫라인은 당초 청와대 집무실에 별도의 유선전화를 마련하는 방안이 검토됐으나 ‘퇴근 후에도 전화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대통령) 지시에 따라 휴대전화로 최종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업무시간 뒤에는 관저로 가져가 잠자리에 들 때도 머리맡에 둘 계획이라고 한 참모는 전했다. 부속실이나 수행비서가 대신 받아서 연결해주지 않고, 이 대통령이 직접 받겠다는 것이다.”
이 대통령과 청와대의 과도한 ‘친기업’ 홍보는 사실 참여정부를 겨냥한 것이었습니다. ‘경제를 파탄 낸 정부, 기업을 못살게 굴었던 반기업적 정부! 우리는 다르다’ 이 얘기를 강조하고 싶었던 나머지 한참 오버를 한 것입니다.
그랬던 이 대통령과 청와대는 이후 가장 반시장경제적인 태도, 가장 관치경제적 구태를 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이제 재벌총수 말 한마디에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고, 공개적으로 불쾌감을 표시하며, 그 때문에 기업이 겁에 질리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해명을 하게 하는 모습은 80년 신군부의 공포정치를 연상케 합니다.
서슬 퍼런 전두환 신군부는 당시 모 재벌총수가 대통령 앞에서 조금 못마땅한 말 한마디 했다고 해서 격분하여 그 그룹을 통째로 공중분해 시켰던 적이 있습니다.
이토록 쩨쩨하게 굴려면 ‘비즈니스 프렌들리’는 왜 이야기했고, ‘뒤에서 지원하는 후원부대’ 따위의 헌사는 왜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핫라인 전화는 왜 설치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니, ‘MB폰’이라 불리던 기업인 핫라인으로 대체 누군가와 단 한 통이라도 통화를 했는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최근 이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치한 3류 코미디를, 한 일본인 여성기업가에게 들려줬으면 좋겠습니다. 사실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3년 전 청와대는, 이 대통령의 일본 게이단렌(經團聯) 초청 간담회가 끝난 뒤 한 여성기업인이 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소개했습니다.
“일본 정치가의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린 적이 없었는데 이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앞으로 중소 벤처기업에 신경을 써 주면 ‘명사마’ 붐이 일어나도록 하겠다!”
그렇게 말했다던 그녀가 실존한다면, 최근 한국의 정치경제 상황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좀 대범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정치를 하길 바랍니다. 기업 프렌들리 한답시고 허풍을 치고는, 마음에 좀 안 드는 재벌총수 발언 한마디에 버르장머리 고치려 들겠다는 겁박. 언론 프렌들리 한다고 거짓말을 해 놓고는, 언론인들 쫓아내고 비판적 프로그램 폐지하고 언론통제하는 이중성. 이제 지켜보기도 신물이 납니다.
양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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