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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둑어둑 저녁이 내려앉을 즈음, 골목 어귀를 돌면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밥 짓는 냄새가 마음을 붙든다. 바람은 여울여울 흐르고, 담장 아래 몽돌 같은 기억들이 까끌까끌 발끝에 와닿는다. 한국어는 그렇게 온몸으로 스며드는 언어다. 뜻을 전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결을 만지고 온기를 건네며, 사라지는 순간마저 아스라이 붙잡아 두는 언어. 그래서 우리는 말한다. 한국어는 곧 한국의 얼이라고.
`새록새록`이라는 말이 있다. 잊혔다고 생각한 감정이 조용히 되살아날 때, 그 미묘한 부풂과 잔잔한 파문을 우리는 새록새록이라고 한다. 이런 어휘에 대한 감각은 한국어 안에서만 봉긋하게 살아난다. `아슴아슴` 또한 그러하다. 희미하지만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기억의 가장자리를 더듬는 그 상태를 이보다 더 정확히, 더 따뜻하게 말해낼 수 있을까.
또 `뜸`이라는 단어가 있다. 말 사이사이에 남는 정적, 숨죽인 순간의 간격. 뜸을 들이면 말의 맛이 살아난다. 영어에는 없는 이 여백의 미학은 한국어만이 품을 수 있는 감정의 호흡이다.
`포슬포슬` 눈처럼 부서지는 식감, `파삭` 하고 터지는 순간의 경쾌함, `까끌까끌` 거칠게 스치는 감각은 혀끝과 피부를 동시에 깨운다. `도담도담` 아이를 어르는 손길에는 사랑의 리듬이 있고, `담쑥`하게 밀려드는 감정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의 농도가 담긴다. `살포시` 손을 얹거나, `올망졸망` 아이들이 모여 떠드는 모습에도 삶의 결이 스며 있다. 한국어는 단지 사물을 지시하지 않는다. 그것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까지 함께 번역해 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아이들의 언어적 뿌리를 스스로 흔들고 있다. 한국어가 완전히 자리 잡히기도 전에, 우리는 아이들을 영어유치원으로 보낸다.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아이에게, 아직 `여울여울` 흐르는 감정과 `도담도담` 웃음이 익숙한 시기에도, 하루 종일 영어만 반복하도록 강요한다. 아이들은 `뜸`을 들여 마음을 담을 여유조차 없이, 영어 단어와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 현실은 단지 경제적 문제가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아직 한국어로 자기 생각과 감정을 충분히 표현할 힘조차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는 모국어의 결을 느끼고, `새록새록` 감정을 피워올릴 기회조차 빼앗은 채, 외국어 학습을 우선시한다. 영어가 중요한 시대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의 마음과 사고보다 먼저 점수와 경쟁을 앞세우는 순간, 그 도구는 독이 된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올망졸망` 영어 단어와 문장 속에서 지친다. 놀이보다 학습, 친구와의 자유로운 상상보다 교재와 숙제, 자연스러운 질문보다 반복적 발음 교정이 우선이다. 부모들은 "세상이 이렇게 변했다"며 이해한다고 말하지만, 그 뒤에는 값비싼 등록금과 학원비, 그리고 눈치와 경쟁이 자리한다. 가족의 시간은 줄어들고, 아이의 마음은 살포시 단단한 외피로 덮인다.
한국어가 아직 덜 다듬어진 상태에서 외국어를 먼저 배우면, 아이들은 자기 내면을 한국어로 정리할 기회를 잃는다. `갈구치다`라는 말의 생생한 몸짓과, `도담도담` 안긴 손길의 온기를 경험하기 전에 듣기, 되풀이, 철자만 반복하게 된다. 어린아이의 마음은 너무 이른 경쟁과 외국어 압박에 시달려 `아스라이` 흔들리기만 한다.
결국 우리는 무엇을 잃는가. 언어적 뿌리와 감정적 안정, 가족과의 긴밀한 관계, 그리고 아이가 세상과 스스로 연결되는 경험이다. 영어는 필요하지만, 모국어의 감각과 사고가 먼저 자리 잡혀야 한다. 그것이 없이 영어만 강조하는 교육은, 결국 아이의 마음과 언어를 가난하게 만든다.
한국어는 번역되지 않는 감정의 집이다.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여울여울 흐르며, 아슴아슴 남는 그 모든 순간들. 뜸을 들이며 살포시 말을 던지고, 올망졸망 모인 이야기 속에서 마음을 건져 올리는 일. 그 시간을 빼앗기고 영어 단어와 문장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아이들은, 결국 자신의 언어적 뿌리조차 느끼지 못한 채 성장한다.
이제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아이의 마음과 한국어의 결을 지킬 것인가, 아니면 외국어 경쟁의 이름으로 어린 영혼을 점수 속으로 밀어 넣을 것인가. `새록새록` 마음을 피워 올리고, `도담도담` 웃음이 오가는 순간을 지켜주는 일이, 진정으로 아이를 위해 필요한 교육이다.
한국어의 온기와 여백을 지키는 것이 곧 한국의 얼을 지키는 일이다.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몽글몽글 피어나는 한국어의 결을 먼저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이의 세계뿐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 잃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