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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9장 1~11절/하나님이 노아의 가족에게 주신 복
노아 때의 대홍수가 지나고 땅에 물이 빠지면서 방주에 있던 노아의 가족과 모든 짐승과 기는 것과 모든 새들이 방주에서 나왔습니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일이었습니다.(창8;18~29) 정결한 짐승과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하나님께 번제로 드렸는데 하나님은 노아의 제단을 통해서 드려지는 향기를 받으시고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창8;21) 하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시는 것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노아의 때에 심판하시는 것과 같이 모든 생물을 멸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땅에 사는 동안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밤과 낮이 쉬지 않고 오리라(창8;21~22) 말씀합니다. 우리는 노아의 때, 심판의 결과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 순종하면 하나님이 보호하심을 통해 나타나는 평안과 기쁨의 삶이 이루어질 것이지만 반대로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하여 나타나는 이 땅의 삶은 더욱 곤고해지고 고통의 시간이 멈추지 않을 것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살아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홍수가 끝나고 새 삶을 시작하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선언해 주심으로 창세기 9장이 시작합니다.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입니다. 하나님의 축복된 선언은 창세기 1장 27~28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신 축복의 말씀을 반복하여 선언해 주심으로 처음 이 땅의 인유의 시작과 하나님의 심판 이후의 시작을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하나님의 사람들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축복의 명령은 한 번도 변개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은총의 약속을 한 번도 변개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마음속에서 계획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실하게 그를 찬양하는 자들에게 은혜의 복을 내려 주십니다. 우리 자신이 받은바 은혜에 대해서 진심으로 감사함을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확증하고 보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창조하신 후에 주신 축복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좋아해서 육체가 됨으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습니다.(창6;2~3절) 하나님의 생명을 갖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할 하나님의 아들들이 시간이 자난 후에 육체가 됨으로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 건설되고 실현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위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은 “광대한 땅의 허락과 사람이 크게 증가하며 그 땅을 소유하고 향유하리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축복이 갱신되어 나타났습니다. 다시 말하면 1절에 “하나님이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 하라.” 하셨고, 이것이 7절에 다시 반복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새롭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언하는 자로 살아낼 것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을 그 앞에 두시고, 세상이 존속하는 한 그 모든 것들은 인간의 소유이며, 후사가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세상을 소유하고 거주지로 삼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사람인 노아와 그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의 관리를 맡기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낙원이 아니라 오히려 광야이긴 하지만 우리들이 마땅히 받아야 죄의 형벌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의 축복의 사람으로 살아낼 것을 기대하고 선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사도바울은 로마서 8장 19~20절에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의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하게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피조세계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세상을 다스려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이 땅위에서 번성케 하시고, 영속케 하시는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피조세계를 다스리는 권능을 허락하셨습니다.
2절에서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에 기는 모든 것과 모든 물고기가 너희를 두려워하며 너희를 무서워하리니 이것들을 너희 손에 붙였음이니라.” 했습니다. 이것은 창세기 1장 28절에 말씀하신 인간의 권리를 회복시키시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 다른 것은 이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다스릴 수 있느냐? 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를 가져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의 축복된 세상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 하겠지만 사람들의 딸들은 자신을 위한 것을 세우려하여 많은 사람들을 고통으로 몰고 갈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한 치조물인 동물들과 모든 생명을 가진 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인간에게 유용한 동물들은 길들여서 우리의 필요에 따라 부리거나 식물로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말과 소는 참을성 있게 고삐와 멍에를 달게 받고 있으며 양은 털 깎는 사람과 도살자 앞에서는 벙어리와 같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사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는 동물들은 속박을 당하게 되며, 때로는 사람들이 사나운 짐승들에 의해서 피해를 입는 일이 있습니다만 그 맹수들이 힘을 합해서 인간을 해치게 하지는 못합니다. 만일 맹수들이 힘을 합해 인간을 공격했다면 하나님께서 이들을 이용하셔서 홍수로 하셨던 것만큼이나 효과적으로 이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맹수를 광야에 감금하고 있는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모든 산 동물은 너희의 먹을 것이 될지라 채소같이 내가 이것을 다 너희에게 주노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후 대홍수 이전까지는 인간은 땅에서 나는 소산인 열매와 채소와 뿌리 및 모든 종류의 곡식과 젖만을 먹도록 제한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창1:19) 그러나 홍수가 땅의 효력을 대부분 쓸어버렸기 때문에 그 소산물은 부족하게 되었고 사람들이 살아낼 영양이 부족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허락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육식을 하도록 허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람이 채소를 먹듯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육식을 할 수 있도록 허락 받은 것입니다. 육신을 허락하셨지만 자신이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과 우리의 것을 구분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산 동물을 인간의 양식으로 허락하시면서 금하신 것이 있는데 고기를 그 생명 되는 피 째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4절) 고기를 먹을 수 있으나 그 생명을 인간의 마음대로 주관하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피는 곧 생명이며 이 생명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피를 하나님의 생명을 말하고 있으며 생명을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합니다.
레위기 3장 17절에 “너희는 기름과 피를 먹지 말라 이는 너희의 모든 처소에서 너희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기름은 태워서 향기롭게 하나님께 드려졌습니다. 하나님께 태워진 기름은 고약한 냄새를 냅니다. 향기로운 냄새가 아니라 우리가 맡아보더라도 역겨운 냄새입니다. 하나님은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드릴 때 인간의 죄악을 태워서 없애주시는 은총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또한 피는 제단에 쏟아 부음으로서 자신의 죄를 덮어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용서를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죽어야 할 자리에 나를 대신하여 동물이 죽었고 그 피를 하나님의 제단에 바르거나 부어 드림으로서 내가 죽지 않고 살게 되었음을 선언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피는 곧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레위기 17장 11절에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제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음으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우리는 동물을 잡고 피를 항상 제단 뿔에 바르거나 제단에 쏟아 부음으로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상징으로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름과 피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기름을 태워서 향기로 드리고 피는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인간은 식물이나 동물을 죽여서 음식을 만들어 먹음으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홍수 이후에 주신 하나님의 축복의 선언입니다.
6절에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감하는 능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 심각한 문제 중에 하나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감정이 무디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옆에서 사람이 죽어도 마음에 어떤 상처나 고통을 느끼지 못합니다.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송역 지하차도에서 한꺼번에 수십 명이 죽었다고 해도 “안 됐군.” 하는 말을 할 뿐 우리에게 아무런 아픔이 없습니다. 우리의 감정이 이렇게 무디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로 고통 받는 사람들이 수천만 명이 된다고 말합니다. 생존을 위하여 국경을 넘는 많은 사람들이 유럽 전역에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는 식량을 무기화화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배부르니까 다른 사람의 고통에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다른 사람의 고통을 받으면 그것이 내 고통일 수 있음을 알고 함께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나로 인하여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고통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 대하여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배부르면 다른 사람의 사정은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들립니다.
마태복음 25장 33절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의 비유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갖는 공감의 능력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3~34절에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말씀합니다. 그리고 35~36절에서 하나님께 복 받을 자들의 행위를 말합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는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반면에 왼편에 있는 자들을 향하여는 하나님의 책망에 대하여 선언합니다. 마태복음 25장 41절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저주의 말씀을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에게 저주의 선언이 이루어지는 이유는 마태복음 25장 42~43절에 “내가 주릴 때에 너희는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혀주지 않았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지 않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지 않았다.”하는 것입니다.
오른편에 있는 자들이나 왼편에 있는 자들이 똑같이 말합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그러한 일들을 행하였으며, 행하지 않았습니까?” 이때 대답은 똑같습니다. 마태복음 25장 40절. 45절에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네게 한 것이니라. 너희가 여기 내 형제들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하지 아니한 것이 곧 네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대답하십니다. 우리의 삶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문제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의 이기적이고 독단적인 마음을 지적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이웃들에 대하여 조금 더 관심을 갖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있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마태복음 5장 21~22절에 보시면 “살인하지 말라”라는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이 있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하셨습니다. 미워하는 것, 시기하는 것, 저주하는 것을 살인으로 간주하신 것입니다. 사실 분노는 살인을 낳게 합니다. 가인이 아우 아벨에 대하여 분한 마음을 품었더니 결국 아우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절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 했습니다. 한 분의 교도관이 들려주신 말입니다. 자신이 관리하는 복역수 가운데 60이 넘으신 분이신데 시골에서 농사를 지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번은 논에 물을 대느라고 밤 11시가 되도록 지키다가 다 물을 받아 놓고 집에 들어왔는데 이튿날 아침에 논에 나와 보니 이웃집 사람이 할아버지의 논의 물을 몽땅 빼서 자기 논에 채운 것을 보고 너무 화가 나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데, 이웃집 사람이 나오는 것을 보고 말다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편에서 자기는 할 일을 했다고 해서 너무 기가 막히고 화가 나서 들고 있던 호미를 휘두른 게 그만 그 사람의 머리에 맞아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본의 아니게 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20년의 형을 살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자기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결과입니다. 우리의 감정을 절제하고,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일시적으로 분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화가 날 때 자제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감정을 절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사람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중에 은혜를 받아서 성령의 주시는 힘으로 감당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능력이 여기에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새 계명을 주시면서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산다면 우리 사회가 놀랍게 변화할 것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다른 사람이 손해 보도록 하는 일을 함부로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자기가 오해를 받으면 변명하느라고 쫓아다니면서, 다른 사람을 중상하고 모략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내 입으로 살인하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격을 서로가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멸시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에야 자기 자신도 바로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이처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성격을 쉽게 바꿀 수 있습니까? 솔직히 우리는 우리 자신의 성격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실 때 변하여 완전히 새 사람이 됩니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리스도는 정말 우리를 완전히 새 사람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이 다른 사람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충만하게 하십니다.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수해를 당하고 현실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체 실의에 빠져 있습니다. 삶의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우리가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람들이 됩시다, 현실의 어려움은 언제나 있지만 이러한 현실에서 하나님의 사람을 체험할 수 있도록 우리가 사랑을 전하고 하나님의 긍휼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하나님은 홍수로 인하여 온 세상이 폐허된 땅에 정착하는 노아의 가족들을 향해서 선언하시는 말씀은 창세의 언약을 다시 하십니다. 1절, 7절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당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나님은 이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축복이 계승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복을 받아야 피조물들도 함께 복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바로 이 땅의 소망이요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를 약속합니다. 11절에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언약을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합니다. 오늘 우리도 이 땅에 수해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며 새로운 희망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소망을 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절망하고 실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희망을 갖고 살아갈 용기를 줄 수 있는 성도가 되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