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청년 김교각은 어떻게 지장왕보살이 되었나?
1.서기 696년, 신라 계림의 왕족 집안에 한 사내아이가 탄생하였으니 그의 부친은 김흥광으로 훗날 성덕대왕이 되었고 모친은 성정왕후가 되었다.
전하건대 이 아이의 처음 이름은 교각이며 학명은 수충이다. 탄생할 때부터 그 풍모가 기이하고 복혜구족 하였다.
2.교각은 유년시절부터 총명하고 자애로웠으며 학문을 즐겨 도를 깨달았다.
다른 왕가의 자손들과는 달리 성실하며 교만하지 않았고, 언제나 학문에 분발하였다.
3.수충은 독서를 좋아하였다.
특히 학문, 불학, 예의, 천문, 지리를 아주 좋아하여 이들 학문에 대한 자신만의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4.청년 시절에 키가 7척이요 기골이 장대하니 그 힘이 능히 열 사람의 범부를 당할 만하여 부모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5.당시의 신라는 망망대해를 사이에 둔 당나라와 선린의 관계를 유지하며 교류가 빈번하였다.
서기 714년, 성덕대왕은 수충을 당나라에 숙위 학생(일종의 유학생)으로 보내어 학문에 정진케 하니 그의 나이 18세 때의 일이었다.
6.당 현종이 왕자 수충을 대하매 사람됨이 크고 기골이 장대하며 몸가짐이 출중하니 먼저 숙위를 받아들이고 후에 대감직에 봉했다.
7.현종은 또한 친히 수충을 접견하고는 수충을 총애하여 조당에서 연회를 베풀었으며, 머물 집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8.수충은 당의 수도 장안성을 유람하였다. 둘레가 7십 리에 달하는 장안성은 천하 제일의 성도라는 이름에 걸맞게 고매한 기이 감돌았으며, 온갖 새로운 학문과 문명이 번창하고 있어 수충을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9.수충은 학문을 즐기면서도 널리 교분을 맺었다.
그의 허심탄회한 성품은 이내 친구들을 끌어당겼고 그들로 하여 수충은 많은 지식을 습득할 수 있었다.
10.수충은 낙양의 백마사를 방문하여 예를 다하여 고숭을 친견했다.
불법의 진리를 통했던 이때의 여행은 수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11.수충은 또한 하남성의 숭산 소림사를 찾아 달마선실을 참관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불법에 대해 깊이 고찰하기에 이르렀다.
12.수충은 소림사의 고승을 찾아 뵙고 서로 예물을 교환하였다.
13. 717년 4월, 당 숙위 4년만에 수충은 모친의 급전을 받고 고국 신라로 돌아왔다.
14.이때 신라는 왕실의 암투가 격렬하였다.
그의 부친 성덕대왕은 모후 성정왕후를 폐하여 사가에 머물게 하고 그의 큰 아우인 중경을 태자로 책봉하였다.
수충은 궁 밖으로 쫓겨났다.
15.당에서 돌아온 뒤로 수충은 마음의 평정을 찾지 못하고 그의 모친과 서로의지하며 지냈다.
16.수충은 당에서 보낸 4년 여 동안의 숙위생활을 떠올렸다.
시서예의나 삼교구류의 가르침을 생각해 보면 궁중에서의 참담한 암투는 크게 각성해야 할 일이었다.
17.수충은 오로지 불법만이 고난을 이겨낼 수 있다고 여기고 불법에 귀의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자신의 모친을 속이고 절로 들어가 삶의 해탈을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18.수충이 마침내 한 사찰에서 출가하니 그는 이름과 성을 숨기고 다만 법호를 지장이라 하였다.
그는 죽는 날까지 불법의 진리를 깨닫기 위해 큰 서원을 세우고 정진하였다.
19. 719년, 지장은 행장을 수습하여 ‘흰 개’와 함께 상선을 타고 거친 풍량을 헤치며 당나라로 다시 향했다.
이상적인 수행의 땅을 찾아나선 것이었다.
20.수충이 탄 상선은 절강성의 보타산 근처에 이르러 거센 풍량을 만나 잠시 정박하게 되었다.
지장은 부근의 어민들이 사는 민가에 숙소를 정하였다.
21.그날 밤이었다. 밤이 이슥해지자 문 밖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덜컥 방문이 열렸다.
해적이 침입한 것이었다.
해적은 모두 네 명이었는데 행동이 흉폭하기 그지없었다.
22.지장은 부드러운 말로 그들을 설득하였다.
그러나 해적들은 끝내 지장의 말에 복종하지 않았다.
지장의 무술을 알 까닭이 없는 해적들이었다.
마침내 지장은 악을 제거하고 선을 펴고자 마음 먹고 힘을 쓰니, 땅바닥에 널브러진 해적들은 한 놈도 다시 일어나지 못한 채 신음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23.지장은 측은한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지장이 해적들을 불러모아 불법의 진체를 쉽게 깨우쳐 주니 그들의 얼굴에는 부끄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해적들이 크게 깨달아 다시는 못된 짓을 하지 않을 것을 안 지장은 그들을 풀어주었다.
24. 풍량이 가라앉자 지장은 다시 수행길에 올랐다.
마을 사람들은 그 며칠 사이 지장의 인품과 선풍을 흠모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마을 멀리에 있는 포구까지 따라나오며 지장과의 작별을 아쉬워했다.
25.뱃머리가 거친 바다 물결을 기르기 시작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절강성의 항주에 닿았다.
항주에는 금화 만불사가 있었다.
만불사는 불법을 수행코자 하는 승려들이면 누구나 찾는 절이었다.
지장은 지체없이 만불사에 머물면서 몰아지경에 들었다.
지장이 경을 읽고 널리 법을 펼치니 만불사에는 더욱 많은 승려들이 모여들었다.
26.지장이 있는 동안, 만불사는 불법이 크게 일어나고 도풍이 진작되었다.
아녀자의 무리들까지도 제자가 되기를 원했으나 지장은 단지 승려들에게 전념하였다.
27.어느 날 좌선에 몰입되어 있던 지장은 홀연, 한 꿈을 꾸었다.
“이상적인 수행의 땅은 이곳처럼 변화한 도시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마땅히 심산유곡에 있을 것인즉 그 산은 높고 신령한 기운을 가졌으며, 청정하고 청량한 기운을 가졌느니라.”
꿈에서 깨어난 지장은 문득 깨달음을 얻어 크게 기뻐하였다.
“더 이상 만불사에 머물지 않으리라.”
28. 지장은 다음날 만불사를 나왔다. 꿈에서 본 듯한 길을 딸라 동으로 동으로 길을 재촉했다.
울창한 수림이 앞을 막아서는 산과 깎아지른 절벽이 버티고 있는 준령을 넘어야 했다.
29.어느덧 절강성의 봉황산을 지나쳤고
30.길을 잃어 해매던 끝에 휴령의 제운산을 넘었다.
31.휴령에서 다시 길을 재촉한 지장은 장강(양자강)변 귀지의 만라산을 지났다.
32.장강의 거센 물살을 힘들게 거슬러 올라온 나룻배는 귀지의 석문촌에 이르러 마침내 닻을 내렸다.
33.오랜 선상 여행에 지친 지장은 석문촌에서 하선했다.
그곳에서는 처사 고제라는 사람이 있어 추앙을 받고 있었다.
지장은 고제와 친교를 맺어 오랫동안 석문촌에 머무르며 소석묘에서 시를 짓기도 했다.
34.그러면서 지장은 자기가 찾는 영산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했다.
처음에는 지장의 뜻을 못본 척하던 고제도 마침내는 그의 정성에 감동하여 한 곳을 가르쳐 주었다.
그곳은 동족으로 더 내려간 곳에 위치한 구화산이었다.
35.지장은 곧바로 고제를 작별하고 구화산으로 가기 위해 길을 떠났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 헤매던 끝에 지장은 구화산 북쪽의 노전고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36.지칠 대로 지친 지장은 주저없이 고을에서 가장 큰 집으로 들어섰다.
노전 고을의 오용지는 처음보는 중이건만 지장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잠자리를 제공하였다.
다음날 지장이 구화산을 찾아온 까닭을 이야기하자 오용지가 빙그레 웃으며 민양화를 찾게 하니 지장은 크게 감격하여
<수혜미>라는 시를 지어 오용지에게 답례하고 산으로 올랐다.
37.오용지가 말했던 민양화의 집은 한나절이 지나서야 도착할 수 있었다.
구화산의 험한 계곡을 올라가 마을로 들어서니 민양화 부자가 지장을 맞이했다.
38.지장은 민양화의 집에서 며칠을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민양화가 물었다. “무엇을 구하시는지요?“ ”
내가 천 리를 마다앓고 구화산까지 달려온 것은 널리 불법을 펼칠 적당한 땅을 찾기 위함이었소.
내 몸을 의지할 가사자락 정도나 덮을 수 있는 땅이면 되겠소.“
“그거야 못 구해 드리겠습니까?” 그때였다. 지장이 가사자락을 펼치니 구화산 전체가 가사자락에 덮여버렸다.
39.순간, 민양화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신을 희롱하는 듯한 고승의 불법이 광대무변함도 알 수 있었다.
민양화는 그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을 출가시켰으니, 그가 바로 도명화상이다.
뒤에 민양화 또한 속세를 등지고 지장의 제자가 되었다.
사진은 대원사 김지장 성보박물관이다.
첫댓글 좋은글 감사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