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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2장
천무맹과 천마맹의 전쟁이 극으로 치닫고 있는 그 순간에 그들의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듯, 팽무도 일행은 편안한 얼굴로 대동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다.
갈태독과 백산을 만나기로 하였던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던 까닭이다. 최북단에 위치한 대동은 산서성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이다.
이곳에서 북으로 백 리 정도만 더 가면 북경이 있는 하북성에 이른다. 기나긴 여정의 종착지가 되는 곳이다.
백산의 꿈이 있고 자신들의 꿈이 있는 곳. 더 이상 세상의 욕심에 얽매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곳, 바로 북경이다. 지금껏 겪어왔던 모든 일들이 아스라한 추억으로만 남을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예외였다.
"왜 그러느냐. 몸이 안 좋은 게냐?"
대동에 도착하면서부터 연신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흔들어대는 풍신개를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던 팽무도가 물었다.
요 며칠 먹는 것조차 거의 입에 대지 못했는지 얼굴이 많이 추레해져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 그렇지, 뭐. 날이 추워졌지 않느냐."
풍신개의 말이 아니더라도 계절은 이미 성큼 겨울로 들어섰다. 차가운 한풍이 불어 닥치며 눈이라도 쏟아질 듯, 하늘은 잔뜩 흐렸다.
"거지가 몸이라도 튼튼해야지……. 그나저나 남궁부녀는 잘 갔는지 모르겠다."
풍신개의 등을 두드리며 혀를 차던 팽무도가 하늘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백산의 혼례가 끝나고 풍신개로부터 강호소식을 들은 남궁지우가 더 이상 강호유람을 할 수 없다며 세가로 돌아간 것이다.
해서 석두를 비롯한 광풍대원 몇 명을 딸려 보냈으나 심상치 않은 정세 때문에 못내 불안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과거 중원을 지배했던 가문의 전대 가주였기에 더욱 걱정이 되었던 거였다.
"걱정 안 해도 된다. 지금 양맹은 다른 곳에 눈 돌릴 틈이 없다."
어쩌면 양맹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무림인이나 여타 세가들 입장에서 보면 지금이 가장 안정된 시기일 것이다.
오히려 그들이 걱정해야 할 일은 전쟁이 끝난 후라 할 수 있다.
양패구상이 아닌 한 세력에 의한 강호일통은 새로운 질서 세우기로 이어질 터이고, 그 결과 무림의 암흑기가 도래할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을 따르는 세력과 따르지 않는 세력을 분리한 다음 피의 숙청이 이어질 수도 있기에, 그러한 면들이 풍신개의 얼굴을 더욱 어둡게 하였다.
또한 자신의 복수가 그만큼 어려워진다는 것도…….
"어찌 되려는지……."
팽무도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한 번 하늘을 쳐다보았다. 팽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했을 터인데 강호를 일통한 세력이 가문을 몰락시키고자 한다면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 아닌가.
통일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남궁세가나 팽가는 눈엣가시가 될 뿐, 결코 도움이 되는 곳은 아닐 터이다.
비록 몸은 떠났다지만 가문을 향한 마음은 어쩔 수 없는 것이리라. 죽을 때도 가져가야 하는 게 팽가라는 성이기에.
"아버님, 식사하세요."
울적해하고 있는 두 사람의 마음을 달래기라도 하듯 저쪽에서 소운이 뛰어오며 팽무도를 불렀다. 혼례를 치러서인지 이젠 제법 성숙함이 물씬 풍기는 것 같았다.
"그래, 막내야."
팽무도가 환하게 웃으며 소운을 맞았다.
가족.
이젠 이들이 가족인 것이다. 같이 있어도 전혀 부담이 되지 않는 아이들, 언제나 따스함만이 넘쳐나는 이런 모습, 자신이 원했던 진정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뛰지 말아라. 너도 애가 아니다."
아직도 마냥 어린애같이 행동하는 소운을 쳐다보는 풍신개의 얼굴에 따스함이 가득했다.
"내일 만금이가 온다고 하더구나. 저 몰래 시집갔다고 화가 단단히 난 모양이더라."
"정말요? 숙부님 본 지 오래되었는데……. 어디로 온대요?"
"그놈이 올 데가 분타밖에 더 있겠냐? 가서 보고 오너라. 내게 보낼 소식도 있다 하더라."
"잘됐네. 추렴 언니랑 소령이 옷감 사러 가려 했는데."
파면신개 악만금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아들의 친구였고 풍신개의 제자라 할 수 있는 인물.
개방의 방주자리도 마다하고 천무맹에 들어가 풍신개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 되었던 자였다. 이번엔 그가 직접 전쟁에 관한 소식을 들고 온 모양이었다.
"무도야, 내일 운강석굴에 가자. 첫눈이 올 것 같아."
"죽을 때가 되니까 별짓 다 하는구나."
말은 그리했지만 다음 날 아침 팽무도는 운강석굴로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 어쩌면 마지막 추억이 될 것 같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한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떠나기 위해 객잔을 나서는데 뜻밖에도 요몽과 조천영이 따라나섰다.
"아가야, 눈이라도 오면 어쩌려고……."
"그래서 가보려고요."
"아버지 때문이냐?"
팽무도의 물음에 조천영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눈이 올 때면 언제나 생각하는 곳, 고향(故鄕).
사시사철 차가운 얼음꽃이 만발하지만 그 속으로 따스한 정이 흐른다. 눈 쌓인 설원(雪原)이 보고 싶어 울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언제나 첫눈이 오면 고향 쪽을 쳐다보며 돌아갈 수 있기를 빌었다. 그랬던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버렸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울 일이 없다. 고향 산천을 그리워하지 않아도 된다. 아버지께 이 기쁜 소식을 빨리 전하고 싶을 뿐이다.
조금만 기다리시라고, 사랑하는 남자와 손녀딸을 데리고 돌아간다고, 더 이상 불행한 딸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딸이 되었노라고.
"그래, 같이 가자. 마차를 준비해야겠구나."
결국 팽무도와 풍신개, 남궁세우, 그리고 조천영 모자와 요몽 스님까지. 애초에 셋만 가기로 했던 운강석굴행의 인원수가 배로 늘어나 버렸다.
"사부님, 저희가 마차를 몰겠습니다."
일휘와 소살우가 소운과 냉추렴을 따라가고 없자, 섯다와 모사가 기다렸다는 듯 마차 앞으로 나섰으나 풍신개의 저지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노인네들끼리 술 한잔 하러 가는데 나서지 말라는 게 이유였다.
풍신개와 팽무도가 마부석에 앉아서 마차를 몰고 출발한 지 얼마 가지 않아서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올해따라 유달리 늦었던 탓인지 첫눈임에도 불구하고 함박눈이 내렸다. 거의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눈발이 하얗게 허공을 메웠다.
"소령아, 이게 눈이란다."
소령이의 앙증맞은 손을 꺼내며 조천영이 속삭였다.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포근한 눈이다.
매년 눈을 보았고 첫눈이 올 때마다 소원을 빌었는데, 올해 쳐다보는 눈은 왜 이다지도 아름다운 것인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까르르!"
손에서 느껴지는 차가움 때문인지 소령이 투명한 웃음을 터트렸다.
"엄, 엄……."
포대기 안에서 고개를 내밀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소령이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소령이 벌써 엄마를 알아본 모양입니다."
"그러게 말이네. 신동인 모양일세."
요몽과 남궁세우가 놀랍다는 듯 소령을 쳐다보았다. 말을 하려면 아직 한두 달은 더 있어야 하는데 벌써부터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가.
"흑!"
급기야 조천영이 울음을 터트렸다. 고마움 때문이었다.
조산을 했기에 혹여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어쩌나 하고 많은 걱정을 했는데 외려 다른 아이들보다 성장이 더 빠른 것이 아닌가.
대환단이라는 절세영약이 도움을 주었다고 하지만 건강하게 자라주는 소령이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다.
요즘 들어 너무 행복한 일만 생기는 것 같았다.
첫눈이 내리는 가운데 처음 입을 열어 엄마를 부른 소령이, 비록 완전하게 엄마를 부른 것은 아니지만 이제 자신을 알아보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감사하는 마음뿐이었다. 하늘에 고맙고, 백산에게 고맙고, 모든 가족에게 고마웠다.
"다 왔다. 조심해서 내려라."
마차로 한 시진 조금 넘게 왔을 때 밖으로부터 팽무도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제법 눈이 쌓였는지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
마차에서 내린 세 사람의 입에서 일제히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그들의 눈앞에 새하얀 눈발을 맞으며 앉아 있는 오십 척 높이의 거대한 좌불(坐佛) 때문이었다.
어깨까지 축 늘어나 닿아 있는 두 귀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소원을 들어주려는 듯 하염없이 넓어 보였다.
천 년 전, 한족이 아닌 선비족에 의해 만들어진 곳이라 하였다.
금 중원을 지배하고 있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치욕의 역사라 할 수 있는 곳이기에 간간이 보이는 불자들의 모습을 제외하고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팽무도와 남궁세우, 그리고 조천영이 감탄의 표정으로 석굴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한 곳을 노려보며 온몸을 부르르 떨고 있는 두 사람이 있었다.
풍신개와 요몽이었다. 그들의 시선이 향하는 곳에 하얀 눈발을 맞으며 사라져가는 방립인 두 사람이 있었다.
'왜 또 나타났는가. 아직도 나에게 볼일이 있는가.'
풍신개가 내심으로 중얼거리며 품 안에 들어 있는 검은 구슬을 가만히 만졌다.
피독주를 소살우에게 주면서 바꾸었던 물건.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광천뢰 중 하나와 교환했던 거였다.
북경으로 들어갈 땐, 광천뢰는 물론이고 무기도 들여갈 수 없다 하였더니 순순히 내주었다. 외려 더 주겠다 하였는데 하나만 받아왔던 것이다.
요몽의 표정도 풍신개와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였다. 눈 때문에 퍼렇게 얼어 있는 것 같지만 단순히 그 이유만은 아닌 듯, 그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다시 무슨 업보를 쌓으려 주변을 맴도는 것이오, 무슨 업보를…….'
"아미타불……! 아미타불……!"
차라리 깨어나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백치로 살았던들, 아무것도 모른 채 모두 잊고 살았던들,
이렇게 괴롭진 않았을 터인데 운명에 대항하기에는 자신의 능력이 너무 미약했다. 왜 이들을 따라왔는지…….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이곳에 오고 싶어서, 자신의 의지로 온 게 아니었다. 자신도 모르게 이들과 같이 동행하고 말았던 것이다.
'돌아가야 한다. 이들과 같이 있으면 안 된다.'
'안 된다, 아들아. 너는 그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 너의 가문을 위해서, 우리 사신가를 위해서 한 번만 봉사해라. 그러면 더 이상 붙잡지 않으마.'
요몽의 몸이 격렬하게 떨렸다. 머릿속을 잠식해오는 사늘한 기운에 대항하기 위해 계속하여 불경을 암송해보았지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다.
'아니 되오. 이들은 당신과 상관없는 사람들이오. 아니 되오, 아니 되오.'
마지막 남은 이성의 끈을 붙잡기 위해 내심으로 소리를 질러보았으나 의미 없는 몸짓일 뿐이었다.
"요몽 스님, 어디 편찮으십니까?"
얼굴은 퍼렇게 얼어 있음에도 땀을 흘리는 요몽의 모습에 깜짝 놀란 조천영이 그를 불렀다.
"아닙니다, 조시주. 잠시 심마가 들었나봅니다."
경악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심령이 제압되어 있는 상태임에도 말하는 어투나 행동은 정상일 때와 한치도 다름이 없었다. 자신이 제압되었다는 것 자체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공할 무공이었다. 본인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시술자의 의지대로 움직이게 하는 무공, 상대의 의식은 물론이고 잠재의식까지도 조정하는 무공이었다.
사사지옥혈공(邪邪地獄血功), 바로 그 무공이었다.
"좀 안고 계실래요?"
"아…… 예."
세 사람의 술자리를 준비하기 위해 소령을 내밀자 순간적으로 흠칫하던 요몽이 이내 표정을 풀고 자연스럽게 받아 안았다.
그러나 소령을 받는 그의 손이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소령을 안아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자신의 손으로 무슨 일인가를 저지를 것만 같았다.
"아미타불……!"
소령을 안고 난 후, 한참이 지났음에도 아무 일이 없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불호를 읊조렸다. 공연한 기우였던 것이다.
"어디 가세요?"
갑자기 요몽이 석굴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조천영이 요몽을 불렀다.
그녀의 손에는 차리다 만 음식이 들려 있었다. 먹을 것을 챙겨주려 하는데 다른 쪽으로 가기에 부르는 것이었다.
"놔둬라. 저기 노천불 앞에 불공을 드리러 가는 거겠지."
두 사람과 같이 술잔을 기울이던 풍신개가 멈칫거리는 요몽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시장하실 텐데……."
"다녀와서 먹지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다시 노천불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긴다.
소담스럽게 쏟아지는 눈발을 맞으며 조용한 목소리로 불호를 읊조리는 요몽의 어깨가 마치 등신불처럼 힘들어 보임은 조천영만의 착각이었는지도…….
"나 이곳을 떠나야겠다."
어느 정도 순배가 돌자 풍신개가 두 사람을 향해 이별을 이야기했다. 이곳에 있어선 안 될 것 같았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각인대사가 뒤따르고 있다는 것은 원하는 무엇이 이곳에 있다는 말이다. 계속해서 이곳에 머물면 이들마저 위험에 빠트릴 것 같았다.
더 빨리 떠났어야 했는데, 소운과 팽무도 때문에 너무 지체했다는 생각이 불현듯 밀려왔던 것이다.
"무슨 소리냐. 북경까지 같이 간다고 하고선."
"그렇습니다, 형님. 북경 언저리만이라도 같이 가지지요."
"그래요, 할아버님. 소운이도 안 보고."
세 사람이 동시에 입을 열어 풍신개를 만류했으나 이미 결심을 굳혔는지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칠아……."
"묻지 마라, 그럴 수밖에 없다. 가야 한다, 그것도 지금."
자리에서 일어나 막 걸음을 옮기려던 풍신개가 표정을 흠칫 굳히며 전방을 주시했다. 휘날리는 눈발 속에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인물들 때문이었다.
지금 이곳은 사람의 내왕이 거의 없는 곳이고 폭설마저 내리고 있는데, 십여 명이나 되어 보이는 자들이 나타났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마음대로 가지도 못하는 팔자인가보다."
풍신개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결국 자신들 일행을 노리고 온 자들일 것이다.
"끝까지 우리를 없애려 하는군."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자들을 쳐다보던 팽무도의 몸에서 시리도록 차가운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들이었다. 오십 년 전에 자신들을 악마로 만들었던 그 장본인들이 찾아온 것이다.
"천영아, 가서 요몽 스님을 찾아봐라."
"예, 아버님."
전방에서 다가오는 인물들을 쳐다보던 조천영이 노천불이 있는 곳을 향해 달음질을 쳤다.
"요몽 스님! 요몽 스님!"
정신없이 내달리며 요몽을 찾았으나 노천불 앞에 있던 사람이 어디에도 없었다. 갑자기 전신에 오한이 들며 불안감이 밀려왔다.
적들이 와 있는 것과 때를 같이 해서 소령이의 모습도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요몽……."
"무슨 일입니까, 조시주!"
울먹이는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요몽을 부르는 순간, 한 동굴에서 소령을 안고 있던 그가 나타났다.
"적이 나타났어요. 빨리 피해야 해요."
"네?"
놀라는 표정으로 조천영에게 다가온 요몽의 눈에, 저 멀리 팽무도가 있는 곳으로 다가서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고수들이었다. 떨어지는 눈발이 투명한 막에 막힌 듯 그들의 몸에 접근하지도 못하고 사그라지고 있었다.
"누구지?"
요몽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아버지인 각인대사의 출현을 걱정하고 있었는데 전혀 안면이 없는 사람들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각인대사의 성격상 다른 이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음모를 꾸밀 위인이 절대 아니라는 건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일단 가보지요."
두 사람이 일행 쪽으로 몸을 옮기는 그 순간, 팽무도는 자신들 앞에 있는 자들을 향해 진득한 살기를 토해냈다.
"결국 찾아오고 말았군."
삼 장 앞으로 다가온 인물들의 얼굴을 면면히 쳐다보던 팽무도에게서 묵직한 저음이 흘러나왔다.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자들. 무당의 제자 신분을 벗어 던진 무당삼선(武當三仙), 아미파의 대정신니(大正神尼)와 대비신니(大悲神尼), 점창파의 점창오로(點蒼五老),
그리고 청성파의 청성노군(靑城老君)과 태상신군(太上神君)까지 합해 전부 열두 명이었다.
오십 년 전 천무맹 최고 실세들이었고 현재는 각 문파에서 가장 연장자로서의 위치에 있는 자들, 백살대 음모의 주역들이었다.
"그대들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네."
무당삼선의 맏이인 운양진인이 담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많은 심적 고초가 있었는지 언제나 불그레한 동안을 간직하고 있던 그의 얼굴이 추레해져 있었다.
장문인인 영운의 말도 모르는 바 아니었고 과거에 잘못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아무리 고뇌하고 생각해보아도 그때의 일을 다시 들춰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었다.
"우리는 과거를 되찾고자 나온 게 아니오. 그저 아이들과 같이 지내기를 바랄 뿐이외다."
이미 과거를 잊고자 하였다. 강호상에 공론화되는 것도 원하지 않는다. 여타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있는 듯 없는 듯 살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자네도 나이를 먹었으니 알 것 아닌가. 세상일이 어디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게 있던가."
청성파의 최고 연장자인 청성노군 설운영의 말이었다. 본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그게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라지고 없어야 될 사람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다면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지금 우리를 제거한다 해서 당산들의 죄상이 가려질 것 같소이까!"
팽무도와는 달리 남궁세우의 목소리는 상당히 격앙되어 있었다.
나타나지 않겠다 하는데,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겠다 하는데, 오히려 복수를 하겠다고 나서도 시원찮을 판임에도 저들은 물러나지 않는다.
"물론 가려지지 않겠지. 언젠가는 밝혀지겠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그러나…… 지금은 아니네. 지금껏 지나온 세월만큼 더 흐르고 난 뒤라면 가능할지도……."
운양진인이 바라는 바였다. 언젠가는 밝혀지겠지만 그 시기를 좀 늦추고 싶을 뿐이다. 드러나야 할 역사라면 자신들의 힘으로 막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 시기를 늦출 수는 있다. 눈앞에 있는 이들만 없어져준다면 앞으로 오십 년, 아니 그 이상의 세월을 잡아둘 수 있을 것이다.
그것 때문이었다. 모든 강호인들이 그 사실을 너그럽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밝혀져야 한다.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거니 하고 이해를 해줄 때…….
그렇게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구파일방의 힘이 아니라 세월이다, 아주 기나긴 세월…….
"솔직해지시오, 운양진인. 당신이 죽고 난 뒤에 밝혀지기를 바라는 것 아니오. 죽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당신들을 욕해도 부끄럽지도, 치욕스럽지도 않을 테니까……."
"구도우와 저기 스님은 보내도록 하게."
팽무도의 말을 망연히 듣고 있던 운양진인이 뜻밖의 말을 했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제거하여 살인멸구를 할 줄 알았는데 자신들의 비겁한 행동을 목격하고 있는 풍신개와 요몽, 그리고 조천영은 보내라 하고 있었다.
"내가 강호에 소문을 내는 건 두렵지 않으시오."
"상관없네. 우리도 다시는 강호에 나서지 않을 테니까."
"형님! 천영이를 데리고 가십시오. 저들의 말이 맞습니다."
남궁세우가 풍신개를 향해 떠날 것을 종용했다. 운양진인의 말이 맞다. 이곳에서 자신들이 죽고 나면 아무리 풍신개가 세상에 떠들고 다녀도 믿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세상을 쥐고 있는 자들이 아니라고 하는데 설사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누가 인정해줄 것인가. 오히려 풍신개만 실성한 사람 취급을 당하여 매장될 것이다.
"먼저 가서 기다려라. 먹다 남은 술, 마저 먹어야지."
팽무도의 주문 역시 마찬가지였다. 물론 풍신개가 있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요몽과 조천영, 그리고 소령이 있다.
그들의 안전이 확보되지 못하면 자신들도 제대로 싸울 수 없음이다. 그래서 보내려는 것이었다.
"자신 있느냐?"
걱정스러운 표정의 풍신개의 물음에 두 사람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오십 년 동안 쌓인 한인데 질 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좋다, 천영이와 소령이를 데려다주고 바로 오마. 스님, 갑시다."
두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던 풍신개가 이내 조천영을 업으며 말했다. 저들이 걱정하는 것을 알기에 일단 마음이라도 편하게 해주어야 한다.
"시주님."
"스님이 무공을 익히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소. 그렇지만 아무런 도움이 안 되오. 혹시 다른 자들이 더 있을지도 모르고……."
두 사람을 돕기 위해 나서려는 요몽을 풍신개가 말렸다. 지금 와 있는 저들 때문이 아니었다.
조금 전에 보았던 각인대사, 바로 그자 때문에 남아 있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들과 같이 한통속이 되어 나타난 것인지도 모르기에 더욱 불안했다.
"칠아……."
팽무도가 떠나려는 풍신개를 다시 불러 세웠다. 막 몸을 돌렸을 뿐인데도 그의 모습이 흐릿하게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걱정 마라. 지금은 안 떠난다. 다녀와서, 다녀와서……. 갑시다, 스님."
빙긋 미소를 남긴 풍신개의 모습이 쏟아지는 눈발을 뚫고 사라져갔다.
"우리도 시작해보세나."
풍신개와 요몽의 모습을 막연하게 지켜보고 있는 팽무도와 남궁세우를 향해 네 개 문파 인물 열두 명이 포위망을 형성하며 다가들었다.
"전부 죽여주마, 위선자들……."
갑자기 팽무도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오며 그의 주위로 붉은 혈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왜인지, 자신도 모르게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몰려오는 것 같았다. 친구와 편안한 이별도 하지 못하게 방해하는, 저들의 행태에 더더욱 화가 치밀었다.
"네놈들은 말이다, 오십 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단 말이다!"
씹어뱉듯이 말하던 팽무도의 두 손에 붉은 수강이 맺혀들며, 청성파의 청성도군과 태상신군을 향해 빛살처럼 뛰어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남궁세우도 역시 붉은 강기가 맺혀 있는 손을 휘두르면서 아미파의 두 여인을 향해 몸을 날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술 한잔 하려고 왔기에 두 사람이 다 무기를 가져오지 않았던 것이다.
"대라환영(大羅幻影)!"
"무량전광(無量電光)!"
"칠살태양세(七殺太陽勢)!"
사파(四派) 인물들의 대응도 신속했다. 이미 오십 년 전에도 각파에서 최고에 달했던 자들이고 나머지 세월 속에서도 쉬지 않았다.
무공을 익히기보다는 후대에 자신들의 심득(心得)을 물려주기 위해 고민하고 있던 그들이기에 개개인의 무공실력은 이미 극에 달해 있었다.
청성도군의 대라신공(大羅神功)이, 태상신군의 사전절광검법(射電絶光劒法)이, 대비신니의 칠살창(七殺槍)이 팽무도와 남궁세우를 향해 무섭게 짓쳐들어왔다.
오십 년의 한(恨) 속에 만들어졌던 오천맹의 무공과 그들을 넘기 위해 절치부심(切齒腐心)했던 구파의 무공이 오만여 개의 불상과 새하얀 눈발 가운데 격돌했다.
붉은 혈운이 사방으로 움직이며 그 꼬리를 남겼고, 그 꼬리를 따라서 청광과 백광이 뒤섞이며 어우러졌다.
열네 명의 몸에서 쏟아져나온 살기에 소담스럽게 쌓여 있던 눈들이 아우성치며 스러지고 붉은 황토가 맨살을 드러냈다.
"혈극참!"
"창궁혈해탄!"
구우웅! 스아악!
양손의 붉은 강기를 이용한 검법과 도법이 휘몰아치는 눈발을 헤치며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무당삼선의 검에서 튀어나온 백색의 강기들이 붉은 혈광을 막아나갔다.
팽무도와 남궁세우도 강했지만 사파의 인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도 이미 살고자 하는 마음을 버렸는지 피하는 동작도 없이 전력으로 부딪쳐오고 있었다.
'아우! 먼저 점창오로부터.'
이렇게 싸우다간 자신들이 먼저 지쳐버릴 것 같았다. 개개인의 실력은 우위에 있다 하지만 저들은 연환공격으로 대응해오고 있다.
즉 한 번의 공격을 가한 후 끓어오르는 내기를 가라앉힐 시간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렇지를 못했다. 단 한 번의 동작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구나 수중에 무기도 없는 상태이질 않는가.
방법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약간의 부상을 감수하고라도 적의 숫자를 줄이는 방법.
"창궁혈해탄!"
"혈극참!"
팽무도의 전음에 고개를 끄덕인 남궁세우가 먼저 뒤쪽을 향해 혈우창궁검법 일 초를 날리고 이어서 팽무도의 입에서 광폭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사방 천지에 붉은 혈운이 생겨나고 수백의 도탄강기가 허공을 유영하며 십이 명의 인물들을 향해 밀려간다.
"저럴 수가……."
무당삼선 세 사람의 표정이 경악스럽게 변했다.
자신들 앞으로 밀려오던 검탄강기들이 순식간에 스러지며 남궁세우가 팽무도의 도탄강기를 뒤따르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즐독 ㄳ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