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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온 / 명산 photo 스크랩 천년고찰 각화사와 태백산사고를 품은 각화산-왕두산(‘16.3.5)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207 16.03.10 04: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각화산(覺華山, 1177m)-왕두산(王頭山, 1046m)

 

여행일 : ‘16. 3. 5()

소재지 : 경북 봉화군 소천면과 춘양면의 경계

산행코스 : 각화사주차장각화사능선삼거리사고(史庫)갈림길각화산왕두산동암각화사각화사주차장(산행시간: 3시간)

 

함께한 사람들 : 안전산악회


특징 : 각화산은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태백산사고가 있었던 산이다. 하지만 이 고장 사람들은, 군목(郡木)인 춘양목(春陽木)의 기개를 닮았다고 해서 더 많은 사랑을 주고 있단다. 그리고 왕두산은 각화산을 일군 능선이 남동 방향으로 약간 가지를 틀어 2km 정도 떨어진 곳에다 만들어 놓은 산이다. 두 산은 모두 전형적인 육산(肉山)이다. 두 산을 잇는 능선에서 바윗길을 만나기도 하지만 암릉으로 분류할 정도는 못된다. 그러다보니 사고(史庫)가 있었다는 역사적인 의미 외에는 특별한 눈요깃거리를 보여주지는 못한다. 혹자는 각화산 일대의 춘양목을 꼽기도 하지만 인근의 다른 산들에 비해 굵기나 밀도(密度)가 한참 떨어진다. 하지만 고산준령들이 사람의 접근을 막아온 탓에 확실히 때를 덜 탔다.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며 호젓하게 걸어보는 것도 하나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산행들머리는 각화사주차장(봉화군 춘양면 석현리)

중앙고속도로 풍기 I.C에서 내려와 5번 국도를 타고 일단 영주시내로 들어온다. 가흥교차로(영주시 가흥동)에서 36번 국도로 갈아타고 울진(봉화) 방면으로 달리다가 춘양교차로(봉화군 춘양면 소로리)에서 빠져나오면 춘양삼거리다.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88번 지방도를 타고가다 공세동삼거리(춘양면 석현리)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산행들머리인 각화사주차장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가 필요하다. 공세동에서 각화사까지 들어가는 도로가 차량이 서로 비켜 지나갈 수 없는 1차선 도로라는 점이다. 양보의 미덕이 필요한 구간이라는 얘기이다.




각화사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서 산행이 시작된다. 아스팔트 포장도로라서 산길을 걷는 맛은 덜하지만 길가에 늘어선 기괴하게 생긴 고목(古木)들이 그런 부족한 점을 메꾸어 주고도 남는다. 콧노래라도 흥얼거리며 걷기에 딱 좋은 길이다. 그렇게 4~5분쯤 걸으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천년고찰인 각화사가 나타난다.



절로 들어서기 전 오른편에 커다란 비석(碑石) 하나가 보인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 지정된 귀부(龜趺)이다. 가로 2m, 세로 1.85m의 방형석(方形石) 위에 놓인 길이 1.75m의 귀부는 비석이 꽂혔던 자리만 남아 있는 탓에 언제 어떤 경위로 제작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 없어졌다는 저 비신(碑身)은 대체 뭐란 말인가. 아마 최근에 복원해 놓았는가 보다. 하여튼 귀갑(龜甲)의 몸체는 6각형의 귀갑문양이 전면을 덮고, 그 속에 ()’자와 ()’자를 돋을새김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아 고려 초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귀부를 구경하고 나오면 진행방향 저만큼에 멋진 누각(樓閣)이 나타난다. 각화사(覺華寺)의 대문역할을 하고 있는 범종각(梵鐘閣)이다. 그런데 현판(懸板)에 적힌 산의 이름이 좀 의아스럽다. 각화산이 아니라 태백산(太白山)인 것이다. 각화사가 조선시대 때 각화산에 있던 태백산 사고(太白山 史庫)’의 수호사찰(守護寺刹)이었다고 하더니 그와 무관하지 않을 듯 싶다. 옛날에는 이 부근 일대를 모두 태백산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긴 돌계단을 올라 절로 들어선다. 절은 3개의 단()으로 나뉘어져 있다. 맨 아래는 스님들이 머물거나 종무(宗務)를 보는 건물들로 보이고, 가운데 단에는 대웅전과 선원(禪院), 그리고 맨 위에는 산신각이 배치되어 있다. 비좁고 경사진 절터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조치였을 것이다.



각화사(覺華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로 676(문무왕 16)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1101(숙종 6) 국사 무애계응(無?戒膺)이 중건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 및 중수를 거쳐, 1777(정조 1) 삼재불입지(三災不入地) 중의 하나인 이곳에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를 건립하여 왕조실록을 수호하게 한 뒤 800여명의 승려가 수도하는 국내 3대사찰의 하나가 되었다. 1913년 의병을 공격하기 위하여 일본군이 사고(史庫)와 절을 불태웠다고 하는데, 1945년 해방 후 소실되었다는 설도 있으니 참조한다. 1926년에 달현(達玄)이 법당을 비롯한 다섯 동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1970년에 금오(金烏)가 요사채를 중건하였고, 1979년 범종을 주조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2층의 누각인 범종각과 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인용)




산길은 각화사의 오른편에 있는 이견암(二見庵)에서 열린다. 암자의 오른편 귀퉁이에 있는 해우소(解憂所)의 옆을 지나면 임도에 가까운 길이 나타난다. 하지만 산길은 오른편 산자락으로 나있으니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한다. 들머리에 산악회의 리본 몇 개가 매달려 있으니 참조할 일이다. 표현은 쉽게 했어도 들머리를 찾기는 그다지 쉽지가 않다. 이정표나 등산안내도 등 산행을 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그 어떤 시설물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아까 주차장 근처에서 수행 정진하는 선원이므로 입산을 금한다는 안내판을 보았는데, 이 모든 게 연관이 있지 않나 싶다. 이럴 경우에는 스님이나 보살님을 붙잡고 물어볼 것을 권한다. 조금도 싫은 내색 없이 잘 가르쳐 주시니 어려워할 필요도 없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다. 하지만 버거울 정도까지는 아니니 지레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다. 길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하늘을 향해 죽죽 뻗어 오르고 있다. 볼을 스쳐가는 바람결에선 진한 솔향이 묻어나온다. 그렇다면 저 향기 속에는 그렇게나 몸에 좋다는 피톤치드(Phytoncide)가 듬뿍 들어 있을 것이다.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배출하는 나무 중의 하나가 바로 소나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청량한 기운이 온몸을 감싸고돈다. 이런 걸 보고 힐링(Healing)산행이라고 하는가 보다.



소나무들을 자세히 보면 색깔이 약간 불그스레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저런 소나무들을 일컬어 적송(赤松)이라 부른다. 그 외에 금강송(金剛松)이나 황장목(黃腸木), 홍송(紅松)으로 불리기도 하지만, 이 지역 사람에게는 춘양목(春陽木)이란 이름으로 통한다. 1950~60년대 춘양역을 통해 질 좋은 금강소나무가 전국으로 실려 나갔던 데서 연유된 이름이다.



눈에 거슬리는 소나무들도 눈에 띈다. 나무의 일정부분이 허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아마 송진을 채취한 흔적일 것이다. 다른 산들에서 보았던 저런 흔적들은 대부분 일제(日帝) 때 이루어졌다고 하는데, 이곳도 그때의 아픈 상처가 아닐까 싶다.



산길로 들어선지 12분 후 첫 갈림길이 나타난다. 이정표가 없어 정확하지는 않지만 오른편은 태백산 사고지(太白山 史庫址)’로 가는 길이지 싶다. 각화산 정상은 물론 왼편이다. 산길은 언제부턴가 소나무 대신에 참나무가 주인노릇을 하고 있다. 하지만 오래묵은 나무들은 보이지 않는다. 어쩌면 산불의 후유증일지도 모르겠다.



갈림길에서 20분 남짓 더 오르면 주능선삼거리에 올라서게 된다. 왼편에 보이는 길은 석현리에서 올라오는 능선 길이다. 오늘 내가 따라나선 안전산악회에서는 이 코스를 택했지만 난 각화사를 들머리로 잡았다. 절을 조금이라도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이다. 하여간 각화산 정상은 이곳 삼거리에서 오른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일단 능선에 올라서면 산길은 그 가파른 기세를 많이 누그러뜨린다. 거기다 보드라운 황톳길이어서 걷기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하지만 다른 볼거리는 일절 없다. 육산(肉山)의 전형적인 특징일 것이다.



주능선에 올라서면 또 다시 춘양목 군락지가 나타난다. 하지만 아까 각화사 근처의 군락지에 비하면 왜소(矮小)해도 한참은 더 왜소하다.



능선에 올라선지 20분 조금 못되면 또 다시 삼거리를 만난다. 이번에는 이정표(각화산 1.0Km/ 사고지 0.3Km/ 석현2리 공세동 2.9Km)까지 갖춘 삼거리이다. 오른편으로 300m쯤 내려가면 태백산 사고지(太白山史庫 : 사적 제348)’ 터에 이르게 된단다. 태백산 사고는 임진왜란 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전주사고본(全州史庫本)을 저본(底本)으로 하여 만들어낸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관하기 위해 설치한 4개의 외사고(外史庫 : 태백산, 오대산, 강화 정족산과 묘향산 또는 적상산) 중 하나이다. 선원각(璿源閣)과 실록각(實錄閣) 등 이층짜리 기와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빈 터로만 남아있다. 300여 년 동안 이곳에 보관되어 오던 실록은 서울대학교로 이장(移藏)되었다가 현재는 부산의 정부기록보존소로 옮겨져 보존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 각화산은 비록 태백산 줄기이기는 하지만 주봉(主峰)에서 남쪽으로 약 12떨어진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하지만 옛날에는 이 일대의 산을 모두 태백산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사고의 이름 또한 태백산사고가 되었다고 한다.




산행을 시작할 때만해도 이슬비였던 것이 언제부턴가 안개비에 가까운 는개로 바뀌어 있다. 덕분에 걷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하지만 안개는 걷힐 줄 모르고 있다. 아니 오히려 더 짙어져 가는 느낌이다. 음산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잠깐씩이나마 하늘이 열리는 곳으로 나오면 환하게 밝아진다는 것이다.



또 다시 무덤이 나타난다. 각화산은 다른 산들에 비해 유난히도 무덤이 많지 않나 싶다. 어쩌면 등산로 곳곳에 매달려 있는 천하명당 조선십승지라고 적힌 리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다. 그 정도로 유명한 명당이라면 그대로 놔둔다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십승지(十勝地)란 정감록(鄭鑑錄)’에 근거한 역사적 용어로서 한국인의 전통적 이상향 중의 하나이다. 십승지에 관한 기록은 정감록중의 감결(鑑訣), 징비록(懲毖錄), 유산록(遊山錄), 운기귀책(運奇龜策), 삼한산림비기(三韓山林秘記), 남사고비결(南師古秘訣), 도선비결(道詵秘訣), 토정가장결(土亭家藏訣) 등에 나타난다. ‘감결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몸을 보전할 땅이 열 있으니, 풍기 금계촌, 안동 화곡, 개령 용궁, 가야, 단춘, 공주 정산 마곡 진천, 목천, 봉화, 운봉 두류산, 태백으로 길이 살 수 있는 땅이다.’ 그중의 봉화가 이곳 춘양 땅을 이르는 모양이다. 참고로 십승지의 구체적인 장소는 영월의 정동(正東)쪽 상류, 풍기의 금계촌(金鷄村), 합천 가야산의 만수동(萬壽洞) 동북쪽, 부안 호암(壺巖) 아래, 보은 속리산 아래의 증항(甑項) 근처, 남원 운봉 지리산 아래의 동점촌(銅店村), 안동의 화곡(華谷), 단양의 영춘, 무주의 무풍 북동쪽 등을 드는 게 보편적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일부 인용)



사고지 갈림길에서 25분쯤 걸었을까 또 다른 삼거리(이정표 : 차돌배기 8.8Km/ 왕두산 2.2Km/ 태백산 사고지 1.1Km/ 석현2리 공세동 3.6Km)가 나온다. 각화산 정상은 이곳에서 왼편으로 진행해야 한다. 하지만 이어서 오르게 될 왕두산은 오른편 방향이다. 각화산의 정상에 오른 다음에는 이곳으로 되돌아 나와야만 한다는 얘기이다.




갈림길에서 4~5분쯤 더 오르면 드디어 각화산 정상이다. 주차장에서 1시간25분이 걸렸다. 빗길이라서 천천히 걷기도 했지만 각화사를 둘러보는데 든 10분 정도를 감안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각화산이란 지명은, 본래 서동리 3층 석탑(보물 제52)’이 있는 곳, 즉 춘양중학교(춘양면 서동리) 자리에 있던 람화사(覽華寺)를 원효대사가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람화사를 생각한다.’며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헬기장을 겸하고 있는 정상은 텅 비어있다. 정상표지석은 물론이고 조금 전에 보았던 이정표까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저 부산의 산도깨비라는 분이 매달아 놓은 정상표지판 하나가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을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 버릴 수밖에 없는 정상석을 거론 안할 수가 없다. 먼저 도착한 일행들이 임시방편으로 만든 정상석인데 길쭉한 자연석에다 각화산이라고 써 놓았다. 앙증맞은 것이 반듯하게 만들어진 여느 정상표지석에 결코 뒤지지 않을 것 같다.




삼거리로 되돌아와 다시 산행을 이어간다. 잠시 후 헬기장이 나온다. 하지만 삼각점(춘양 305, 2004 재설)이 있는 걸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을 정상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싶다. 삼각측량의 기준점인 삼각점(三角點, triangulation point)이라는 게 본디 인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헬기장을 지나면 가파른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거기다 커다란 바위들까지 곳곳에 자리 잡고 있어 안전에 주의가 요구되는 구간이다. 바윗길은 중간에 가끔 작은 오름짓을 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내리막길의 연속이다. 물을 흠뻑 머금은 바위들은 딛기가 부담스럽고, 중간 중간에 미끄러운 맨땅들이 나오지만 미끄러운 탓에 오히려 더 부담스럽다. 다행인 것은 언제부턴가 비가 그쳐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안개는 오히려 더 짙어졌다. 어둡게 느껴질 정도로 침침한 바윗길은 꽤나 오랫동안 계속된다.







하지만 안개가 끼어 좋은 점도 있다. 굵고 오래 묵은 참나무들이 짙은 안개 속에 잠기면서 기괴한 풍경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바윗길이 끝나면 보드라운 흙길이 나타난다. 낙엽까지 도톰하게 쌓여 여간 폭신폭신한 게 아니다. 험한 바윗길을 고생해서 내려온데 대한 보상이라도 해주는 것 같다. 잠시 후, 그러니까 각화산 정상을 내려선지 40분 후 오른편 사면(斜面)으로 길이 하나 나뉜다. 이정표는 없지만 금봉암(동암)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이어서 10분 후 또 다른 갈림길이 오른편으로 나뉜다. 어쩌면 이곳 역시 동암으로 연결될 것이다.



첫 번째 갈림길에서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그리고 두 번째 갈림길을 지나면서는 꽤나 가파른 오르막길로 바뀐다. 하지만 그 거리가 짧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는 없다. 5분 후에는 왕두산 정상에 올라서게 되기 때문이다. 각화산에서 왕두산까지는 50분 정도가 걸렸다. 참고로 이곳 왕두산은 산에 불이 나면 왕이 바뀐다는 얘기가 전해지는 산이다.



제법 너른 공터로 이루어진 왕두산 정상도 역시 정상표지석은 없다. 하지만 이곳에는 가늘고 긴 말뚝 모양의 정상표지목을 한가운데에다 꽂아 놓았다. 비록 윗부분이 썩어 문드러졌을 정도로 낡았지만 없는 것보다야 한결 나은 풍경이다. 그리고 삼각점(춘양21, 1995재설)과 함께 개인이 만든 정상표지판도 두 개나 달려있어 인증사진을 찍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이곳에서는 태백산이 조망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안개로 인해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산을 시작한다.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거기다 습기까지 잔뜩 머금고 있어 미끄럽기까지 하다. 잠시 후 널따란 헬기장을 만난다. ‘오늘은 헬기장 천지네요집사람의 말마따나 웬 헬기장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전에 아산에 있는 태학산에 갔을 때 헬기장이 많다고 느꼈는데 이곳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다.




헬기장을 지나면 산길은 사면(斜面)을 따른다. 질퍽거리기까지 한 산길이 여간 부담스럽지가 않다. 그저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얼마 후 엄청나게 굵은 소나무 아래를 지나게 되고, 이어서 산자락 모퉁이를 돌면 작은 암자(庵子)가 하나 나타난다. 각화사의 부속암자인 금봉암(金鳳庵)이다. 동암이라고 부르니 참조한다. 정상에서 15분 조금 못되는 지점이다.




암자는 선방의 수좌(首座)처럼 단아한 모습이다. 단청이 되어 있지 않아 친근한 감마저 든다. 그래선지 일반인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단다. 스님들의 참선도량이기 때문이란다. 저 멀리 안동의 학가산까지 시야(視野)가 탁 트이고, 햇살 투명한 양명한 곳이니 어찌 참선도량이 깃들이지 않고 배길 수가 있었겠는가. 행여 참선에 방해라도 될까봐 소심스럽게 경내(境內)로 들어선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아무래도 동안거(冬安居)가 끝났나 보다.



암자의 담벼락 아래에 이름 모를 들꽃이 피어있다. 맹추위가 아무리 훼방을 부려도 찾아오는 계절만은 막을 수가 없었던가 보다. 심심산골 그것도 이렇게 높은 암자에까지 꽃소식이 전해진 것을 보면 말이다.



금봉암에서는 오솔길을 따라 내려오게 된다. 암자가 차량이 오를 수 없는 곳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려가는 길가 오래된 고목(古木)들이 보이는가 하면 아직도 그 여운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는 단풍나무들을 만난다.



내려가는 길은 많이 가파르다. 일직선으로는 뚫을 엄두를 내지 못한 산길은 좌우로 꿈틀대면서 갈지()자를 그리고 나서야 겨우 길을 만들어내고 있다. 수행하는 스님들이 올라 다니느라 고생깨나 하겠다고 생각하며 내려가는데 마침 스님 한분이 올라오고 계신다. 힘이 들 법도 하지만 표정은 여간 평온한 게 아니다. 미소와 함께 건네 오는 말씀 역시 괜찮단다. 하기야 고생을 하며 오르는 것 자체가 바로 참선이 아닐까 싶다.



산행날머리는 각화사주차장(원점회귀)

왕성하게 자라나고 있는 소나무 숲을 지난 후 물기 없는 계곡을 따라 20분 남짓 내려서면 저만큼에 각화사가 나타나면서 오늘 산행이 종료된다. 오늘 산행은 3시간10분이 걸렸다. 오롯이 걷는 데만 걸린 시간이다. 하지만 서두르지 않고 느긋이 걸은 결과이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길, 아침에 보지 못했던 풍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만큼 시간에 여유가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사랑나무가 아닐까 싶다. 한순간도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뒤엉켜 있는 것이 마치 사랑을 나누고 있는 것 같아 사랑나무라는 이름을 붙여봤다.


다른 하나는 매나무이다. 집사람이 먼저 발견한 것인데 고목(古木)의 꼭대기가 흡사 매의 부리를 빼다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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