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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국의 후예 -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가시하라(橿原: かしはら)
후지와라쿄
일본 나라현의 가시하라(橿原: かしはら)는 일본의 발상지로 알려진 땅으로, 초대 진무 천황이 즉위한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아스카 시대에는 당시의 수도 후지와라쿄가 있었던 곳이다. 지난 2022년 7월 8일 가시하라 시내의
자민당 선거 유세 현장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숨진 아베 신조 전 수상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한국계 도래인인
뼈속까지 한국계 후손이었다.
아베 신조 전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는 임진왜란 이후 한반도에서 건너간 조선인 후예였다. 기시는
사토가(家)에서 태어나 기시가(家)의 양자가 되었으며 일본 수상(57대 및 58대 역임)을 지냈다. 기시 노부스케의
친동생인 사토 에이사쿠 수상(61대, 62대 및 63대 역임)이 규슈 남단 가고시마에 사는 (조선인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 14대 집을 찾아갔을 때 사토는 14대 심수관에게 ‘당신네가 일본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다.
심수관이 4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더니, 사토 에이사쿠는 ‘우리 가문은 그 후에 건너온 집안’이라고 했다.
또한 기시와 아베 가문에서 가정부로 40여 년을 지냈던 구보 우메는 주간 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아베 신조 총리의 부친인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 고백한 집안 내력을 비교적 상세히 전했다. 구보는 "파파(아베 전 외상)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것을 내게는 말해줬다"면서 (아베 전 외상) 스스로 ‘나는 조선인이다’라고 말했다고 회고했다.
아베 신타로 전 외상이 자신을 조선인이라고 이야기했지만 생전에 “아베가(家)의 원래 기원은 10세기쯤 한반도
북쪽에서 중국대륙에 걸쳐 존재했던 발해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얘기했다고 전했다.
일제시대때 일본 군부는 발해가 있었던 ‘만주’ 지역을 주목하고 만주를 자신의 영토로 만들 계획을 준비한다. 일본이 만주사변을 통해 세웠던 만주국의 이념은 일본, 조선, 한족, 만주, 몽골의 다섯 민족이 평등하게 공존하며 산다는
‘오족협화’를 주장하였다. 또한, 구미제국주의의 패권주의에 대항해 동양의 이상향을 실현한다는 ‘왕도낙토’를
내세웠다. 만주국은 입법, 사법, 행정, 감찰, 고시 등 5권 분립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총무청 중심의 중앙집권제가 정착돼가고 있었다. 이런 만주국에 (조선인의 후예인) 기시 노부스케가 온 것은 1936년이었다. 총무청 차장으로
승진한 기시는 군부로부터 산업행정을 넘겨받기 위해 만주국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진두 지휘하였다.
만주국은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에게는 마치 황금의 땅 엘도라도로 인식되었다. 모든 구성원들에게 평등한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다는 만주국이 성립되자 만주는 희망의 땅이 되어 한반도를 열광시켰다. 70~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기회의 나라 미국으로 이주했었던 상황과 유사했다. 즉, 일제 식민지하의
조선에서 일반 청년이 출세를 한다는 것은 일제의 시스템에 적응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것 뿐이었다. 따라서 일제시대에 출세한 뛰어난 젊은이는 지금 기준으로 모두 친일파가 된다.
가난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나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간 교사로 재직하던 박정희도 이때 교직을 버리고 1939년 10월 만주국 육군군관학교에 시험을 쳐서 입학하게 된다. 1942년 박정희는 육군군관학교 예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일본, 조선, 한, 만주, 몽고 5족 사관생도중 수석) 만주국 황제 푸이에게 은사품으로 금장시계를 받고 일본육사 편입 특전을 받았다. 이후 박정희는 예과 상위 성적자에게 주어지는 관행에 따라 본토의 일본육군사관학교
본과(2년 과정)에 진학해 졸업하였다. 박정희는 1944년 4월 일본육사 57기를 3등으로 졸업해 견습군관으로 만주의 관동군 635부대에 배치되었고 이후 만주국군 보병 제8단에 배속되어 중위로 진급했다.
하지만 1945년 일본이 패전국으로 전락하면서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는 둘다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1948년 12월 22일의 스가모 구치소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지금의 히가시이케부쿠로)에 존재했던 구치소
박정희는 이후 이른바 ‘여수사건’에 연루돼 사형을 구형받는다. 기시 역시 A급 전범으로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된다. 하지만 ‘만주인맥’들의 도움으로 A급 전범용의자였던 기시는 불기소로 석방되었고 박정희 역시 그의 만주군관학교
1953년, 육군참모총장 재직 당시 백선엽
선배이자 육군본부 정보국장 백선엽 등의 도움으로 기사회생했다.
1961년 5.16혁명 이후 박정희가 일본을 방문했을 때 기시 노부스케를 처음 만났으나 이들의 인연은 일본
제국주의가 세운 만주국에서 시작되었다. 만주국의 통제된 경제 실험을 실질적으로 주도한 기시 노부스케의
아이디어는 훗날 박정희의 경제 개발 모델에서 그대로 재현되었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 인맥은 박정희의
경제 개발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대통령이 된 이후 박정희가 구현하고자 했던 사회상은 일본이 만주국에서
실험했던 산업화된 통제기반 경제 시스템이었다.
박정희((1917~1979)와 기시 노부스케((1896~1987)
1961년 일본을 방문한 박정희는 당시 이케다 하야토 총리를 만나 “맨주먹으로 황폐한 조국을 이끌어 보겠다는
의욕만은 왕성하다”며 협조를 요청했다. 1962년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은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를 만나
일본의 전쟁 배상 협상의 내용을 합의하였다. 일본은 공산 진영으로부터의 방파제가 되어줄 한국과의 수교가
필요했고, 경제 성장과 영향력 확대를 위하여 한국을 시장으로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보상이나 배상이라는 표현 대신 애매한 명목으로 일본의 인력과 생산물을 10년에 걸쳐 연 3,000만 달러어치씩 제공함으로써 한국 시장에 진출하였다. 유상 차관도 같은 방식으로 빌려주었다. 후일 김종필은 “내가 이완용이 소리를 들어도 그 길밖에는
없다고 생각했다. 조금 적은 액수이더라도 빨리 공장을 세우고 기술을 배웠기 때문에 우리 경제성장이 빠르지
않았느냐. 후회하지 않는다”고 회고했다.
박정희와 기시의 인연은 박정희가 만주국의 통치 방식을 이어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실제 한일 정치에서
그들의 인연은 이어졌다. 박정희는 한일 국교정상화 채널을 통해 “금후 재개하려는 한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귀하의 각별한 협력이야말로 대한민국과 귀국의 강인한 유대가 양국의 역사적 필연성이라고 주장하시는 귀의가
구현될 거라고 생각합니다”라고 전했다. 그 후 한일협력위원회나 박 대통령의 취임식 때마다 방한했던 기시는
한일 간의 ‘핫라인’ 역할을 맡았다.
박정희는 5.16혁명 이후 기시 노부스케가 만주국에서 세웠던 경제계획을 실행에 옮기며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박정희 정권은 만주국과 마찬가지로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서 한국의 산업구조를
수입대체형에서 수출주도형으로 바꾸고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켜 나갔다. 메이지 유신으로 일찌감치 근대국가로
변모하고 서구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던 일본이 기시 노부스케를 통해 만주국에서 새롭게 디자인하고 계획했던 산업 국가 시스템의 청사진을 박정희가 대한민국에서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처음에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이 세웠던 청사진을 박정희가 성공적으로 실행할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
국가를 건설하고 발전시킨 경험이 있는 인재와 씽크탱크가 크게 부족했던 60년대초의 대한민국에서 박정희는
농촌 문제에 대해서도 기시의 조언을 따랐다. 기시는 만주의 경험을 통해서 “진정으로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충분한 물적 토대가 필요”하다면서 “한국에서 중요한 것은 농업이다. 농촌이 확고하게 서지 않고는 제대로 될 리
없다”고 박정희에게 조언했다. 박정희는 5.16혁명 직후 국가재건국민운동을 벌이고 농촌진흥청을 설립하는 등
농촌진흥에 착수했다. 또한 정신혁명을 내세운 새마을운동을 대대적으로 진행했다.
박정희의 정신개조운동에 앞장섰던 인물도 ‘만주인맥’ 이선근이다. 이선근은 만주국협화회 전국연합회의회의
‘조선계 대표’로 이름을 올렸다. 만주국협화회는 만주국의 기초를 공고히 다지기 위해 1932년 설립된 실천단체이자 교화단체이며, 만주국의 건국정신을 구현할 ‘왕도낙토’와 ‘오화협화’의 이념을 재만 민족들에게 침투시켰다.
박정희의 ‘역사선생’이었던 이선근은 ‘민족혼의 진작과 지도이념의 정립’, ‘유신이념의 사상적 체계화’,
‘국가지도이념(유신·새마을·통일·안보)의 확립’ 등을 표방하며 설립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초대원장으로 취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만주국 제국 군인과 협화회 협의원은 한국 사회에 만주식 의례를 적극 도입했다. 전사자에 대한
1분간의 묵도, 행진, 시국강연 청강, 선전영화 시청, 포스터 작성, 학생웅변대회, 집회와 대운동회 참가 등의
국가의례 등은 1930년대 만주국의 국가행사였다. 박정희가 대통령이 된후 시작한 라디오 체조의 모델도
만주국의 건국체조였다. ‘건국정신 함양을 위해’ 만주국 교육청이 주최한 학생웅변대회는 수십년 후 한국에서
실시되는 학생웅변대회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가정의례준칙’은 낭비와 허례허식을 삼간 ‘협화식 결혼식’을
모델로 만들어졌다고 보인다.
박정희와 기시 노부스케의 유대는 한일관계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도 빛났다. 1973년 ‘김대중 납치 사건’으로
일본 여론이 들끓자 한일 정기각료회의가 무기한 연기됐다. 박정희 정권이 중화학공업화 정책을 막 제시한
시점에서 이는 큰 타격이었다. 일본의 경제원조액 결정을 확인하면 그에 따라 다음 년도 예산을 짜는 상황이라서,
무기한 연기로 예산을 편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때 한일 간의 정치적 타결을 꾀하기 위해 ‘거물 특사’로
파견된 이가 바로 기시 노부스케였다. 그야말로 이들은 정치적 동지였던 셈이다. 후에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는 일본 수상이 되었고 박정희의 딸 박근혜는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어 만나게 된다.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 아베 신조와 박정희의 딸 박근혜
기시 노부스케는 자신의 회상록에서 5.16혁명이후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기 전 처음 만났을때 ‘우리 젊은 육군
군인들이 군사혁명에 나선 것은 구국의 일념에 불탔기 때문인데, 그때 일본 메이지유신의 지사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박정희의 5.16 혁명은 일본을 근대국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사카모토 료마가 6개조 서신 뒷면에 작성한 보증 서신
이루어졌다. 사초동맹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를 비롯한 조선계 후예들이 중심이 되었던 메이지유신이
대한민국 산업화에도 큰 영향을 끼친 것이다.
일제 식민치하의 일본 육사 출신의 친일파 박정희는 메이지유신으로 먼저 근대화하고 이어 산업국가로 우뚝 섰던
일본이 만주에 세운 만주국의 경제 모델과 통치방식을 배우고 연구하였다. 또한 친일 만주 인맥을 이용하여
넘쳐나는 일본의 엔화를 국내로 끌여들여 대한민국을 산업화시키고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철저하게 국익을
우선시했던 박정희는 조선후기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었던 매국노 친일파와 달리 대한민국을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산업화로 부강해진 일본을 제대로 배우고 잘 이용했던 똑똑한 지일파나 용일파로 불러야 한다.
박정희 이후 태어난 세대는 일본과 만주국을 토대로 경제 발전을 이룩한 현재의 대한민국에서 온갖 혜택을
마음껏 누리며 살고 있다. 하지만 묻지마 닥치고 반일종족주의에 선동되고 세뇌되어 있는 좌빨들은 국익은 나몰라라 진영 논리에 빠져 감정적으로 박정희를 공격하며 무조건 친일파 청산만 외치고 있다. 머리속에 인과관계와 앞뒤
맥락이 없으며 눈앞의 이익과 감정에만 매몰되어 있는 탐욕스런 감정덩어리 개돼지들의 현실이다.
참고
재일한국인 최초 도쿄대 정교수 오른 강상중
조태성2017. 12. 16. 04:43
재일한국인 1세의 운명과 가난을 묵묵히 다 살아내었던 강상중 교수의 아버지. 빛 바랜 사진 속 뒷줄 맨 왼쪽이
아버지다. 강상중 교수 제공
일본에서 강상중 교수는 60이 넘은 나이에도 멋진 정장 ‘핏’을 자랑하는, 박학다식과 논리적 말솜씨를 갖춘 명사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1950년 폐품수집상의 아들로 일본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에서 정치학을,
독일 뉘른베르크대학에서 정치사상사를 공부했다. 재일한국인 2세로 정체성 혼란을 겪던 그는 1972년 한국을 처음 다녀온 뒤 ‘나가노 데쓰오’란 이름을 버리고 ‘강상중’이란 본명을 되찾았다. 이후 재일 한국인 최초 도쿄대학
정교수가 되면서 화제에 올랐고 퇴임 뒤 세이가쿠인대 총장, 구마모토현립극장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국내에서 강 교수의 책은 10여 권이 번역, 소개됐다. 학자로서 그의 학문적 지향점을 잘 보여주는 책으론 한일 양국
극우의 뿌리가 일제 당시 만주국에 한데 얽혀 있다는, 우리 정치권에서도 박근혜 정부 당시 ‘귀태(鬼胎, 태어나서는 안 될, 불길한 존재, 혼외정사로 낳은 비정상적인, 이를 정치논리에 대입하면 정통성이 의심스럽다는 의미로 해석이 된다)’ 논란으로 널리 알려진 ‘기시 노부스케와 박정희’(책과 함께)가 꼽힌다. 하지만 강상중이란 이름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린 책은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 독일 학자 막스 베버 얘기를 통해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통찰을 안겨줬던 ‘고민하는 힘’(사계절)이었다. ‘살아야 하는 이유’(사계절)에서 동일본 대지진 당시 아들을 잃은 가슴 아픈 개인사를 풀어냈던 강 교수는,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사계절)에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비교적 자세히 풀어놨다.
일 공영방송 NHK의 의뢰를 받고 진행한 TV강연을 묶어낸 이 책에서 강상중은 자신의 성장과정을 들려주면서 다소 늦고, 헤매고, 때론 앞길이 보이지 않을 지라도 스스로를 너무 몰아세우지 말고, 자신만의 사명이 무엇일까 진지하게
고민할 것을 권한다.
옮겨온 글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