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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스토리 중 몇가지만 올려봤어요
아주 오래전에 신문에 연재된 부분이랍니다^^
이제 다시 옛이야기로 되돌아가 볼까 한다.
혜화국민학교와 성북동 동구여중을 졸업한 나는 강남의 서문여고에 배치받았다.
강북 살면서 어떻게 방배동의 여고에 들어갔냐고? '8학군'을 찾아서였다.
유난히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는 이사까지 해가며 날 서문여고에
입학시켰다.
어머니 뜻에 어긋나지 않게 난 열심히 공부했다. 자연히 성적은
상위권이었다. 이화여대쯤은 무난히 합격할 수 있는 성적이었다.
적어도 2학년 1학기까지는 그랬다.
2학기부터 나도 모르게 공부와 멀어져가게 됐다. 돌이켜보면 이른바 사춘기라는 것이 뒤늦게 찾아 왔던 듯싶다.
하교길이면 남학생(대학생 포함)이 뒤를 졸졸 따라오는 날이 하루도 빠짐없이 이어졌다. 신경이 안 쓰일 리가 없었다. 스트레스도
엄청 받았다. 성적이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4등, 6등, 18등...
한번 곤두박질치기 시작한 성적은 좀처럼 회복될 줄 몰랐다. 속상했다. 닥치는 대로 꾸역구역 먹어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대식증으로 고생했다던데 나 역시 그에 못지않았다.
체중은 음식섭취량과 정비례했다. 60kg이 훌쩍 넘어섰다. 얼굴살에 코가 파묻힐 정도였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또래에 비해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좀 조숙한 편이었다. 명동에 구두사러 나갔을 때(중학생이었음) 남자 대학생이 추근추근 거리기도 하였다.
내가 그렇게 늙어(?) 보였나. 게다가 내 옆엔 어머니까지 계셨는데...
서문여고 2학년2학기, 3학년1,2학기를 보냈다. 대학입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명문대는 꿈도 못 꿀만큼 성적은 말이 아니었다.
부모님은 화려했던 나의 과거성적에 미련을 두고 계셨다. 당연히
재수할 것을 요구했다. 싫었다. 그 지긋지긋한 교과서, 참고서와
다시 한번 씨름해야 한다니...
몰래 인하공전 항공운항과에 입학원서를 넣었고, 37대1이라는 경쟁을 뚫고 마침내 합격했다.
과(科)자체가 이미 미래의 내 직업을 예고하고 있었다. 스튜어디스! 그때만 해도 미스코리아는 나와 무관한 단어였다.
서문여고시절 난 언제나 '학교대표'였다. 전교에서 한 명 뽑아 내보내는 교외행사에는 무조건 내가 선발되곤 했다. 새마을연수원
연수도 내가 들어갔고, 신사임당 교육도 내가 나가 받았다. 하다못해 크리스마스 연극을 할 때면 주인공격인 예수역까지 내 차지가 됐다.
당시 KBS TV에서 원종배 아나운서가 진행하던 청소년 프로그램에도 내가 서문여고 얼굴로 출연했다.
얼굴 팔리는 일이라면 예외 없이 내가 나서게 되다 보니 주위에서
이러쿵저러쿵 말들도 많았다.
"이승연이가 교감과 그렇고 그런 사이라더라." "무슨 소리야 교장선생님이 빽이라던데?"
기가 막혔다. 하기야 사촌이 땅을 사도 배가 아프다던데, 하물며
남 잘되는 꼴을 어찌 곱게 봐줄리 있겠는가.
어쨌든 이런저런 학교 밖 일에 자주 모습을 비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내 존재가 여기저기 알려지게 됐고 수업이 끝나고 나오면 한껏 멋을 낸 낯모르는 남학생들이 날 기다리고 있기도 했다.
화려하다면 화려할 여고생활이었지만 나라고 입시지옥을 벗어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시락2개 싸 가지고 밤 아홉시 까지 학교에서 공부하고, 그 이후엔 독서실에서 책과 씨름하고....
물론 고3 초기엔 새벽녘까지 대입준비에 매달렸다. 꽃피고 새우는
5월이 왔다. 내 마음도 날씨 따라 차츰차츰 들뜨기 시작했다.
학교에 남아 자율학습 한다고 거짓말하고 친구들과 어울려 옷에
떡볶이 국물 흘려가며 수다 떨다가 어머니가 날 데리러 오는 밤 9시쯤 학교로 슬쩍 들어가는 나날들이 계속됐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던가? 그날 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학교로 돌아가야 할 시간을 놓쳐버렸다. 어머니는 교문앞에서 하염없이 날 기다리고 서있었고.
현장을 들키긴 했지만 그리 큰 꾸중은 듣지 않았다. 거짓말을 않는 내 성격 덕이었다.
"너 어디 가서 뭐했어?"
사실 그대로 좔좔 말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어머니는 내가 잘못했다는 사실, 그래서 혼내줘야 한다는 것도 잊은 듯 내 얘기 속에
빠져들었다.
지금도 어머니는 이따금씩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때 이미 네가 말(言)로 먹고 살 줄 알았다."
난 지금 탤런트 겸 MC겸 DJ이니까 그 말이 일리도 있는 것 같다.
매일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 대하면서도 뭐 따로 할말이 있었는지
그 친구는 그날 밤 내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연탄가스 중독으로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다.
믿기지 않았다. 짝 잃은 기러기, 이 빠진 동그라미... 수험공부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졸립고 힘들 때마다 "대학가서 신나게 놀아보자"며 서로에게 용기를 주었던 기억들이 한동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안보이면 잊어진다던가. 친구의 죽음에서 맛본 슬픔이 무디어질
무렵 학력고사를 치렀고, 예상대로 시원찮은 점수를 따냈다.
점수 나쁘다고 전기대학 원서접수 안 할수는 없는 일. 그래서 원서마감 직전까지 끈질기게 초(秒)단위 눈치작전을 벌였다.
그 결과 제1지망 학과로 적어낸 곳이 외국어대 영어과. 물론(?)
낙방이었다. 후기대학도 자신이 없었다. 부모뜻과 무관하게 인하공전 항공운항과에 합격했다. 부모는 "곱게 다녀라. 졸업하면 시집부터 가고"라며 체념했다.
서울과 인천을 오가는 통학생활이 시작됐다. 예쁘고 늘씬한 친구들과 새로 사귀었다. 고3시절 독서실 가서 공부는 안하고 친구들만 만들었을 만큼 사람 사귀기를 즐겼던 나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 '환경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나 역시 과분위기에 적응해갔다. 좀 야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였다.
영어시간에 외국인 교수는 내 얼굴만 쳐다보며 강의했다. 내가 영어를 꽤 잘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친구들의 반응은 그게 아니었다.
입들을 삐죽 내밀며 교수와의 '썸씽'운운하며 입방아를 쪄댔다.
'맘대로 해라. 이미 중고교때 그런 소리 질리도록 많이 들었으니까."
항공운항과는 2년제였지만 강의 강도는 4년제 학과 못지않았다.
뒤늦게 공부에 발동이 걸려 장학금을 타기도 했다.
어머니는 "고등학교 때 진작 그럴 것이지"라며 대견스러움과 아쉬운 감정을 동시에 드러냈다.
인하공전 항공운항과 시절 장학금을 타기는 했지만, 항상 공부만
파고드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장학금 받았다고 자만하다가 다음 학기엔 F학점을 따내며(?) 간신히 낙제를 면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호되게 야단치고 나면 그다음 학기엔 또 장학금을 타내고... 그렇게 대학 2년은 흘러갔다.
그 흔한 서클활동(요즘엔 동아리라고 하던가)도 전혀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항공운항과라는 과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까짓거 서클 안 들면 그만이지...'
대학시절 차츰 '멋'에 신경 쓰게 됐다. 친구들의 옷과 머리모양
그리고 액세서리를 유심히 훔쳐보며 그대로 흉내냈다. 집에서는
날로 세련돼 가는 내 외모를 지켜보며 걱정이 태산이었다. 돌이켜보면 나름대로 세련미라고 여겼던 것이 어른들 눈에 '치기 어린
야함'으로 비쳤던 듯 싶다.
대학입학후 아버지가 수원에 전자제품 공장을 차렸다. 우리집도
안산의 예술인아파트로 옮겼다. 아버지공장과 인하공전의 중간 지점에 있는 우리집 덕에 학교 다니기는 훨씬 수월해졌다.
우리집 앞엔 이른 아침마다 남학생들이 우글거렸다. 나를 학교까지 에스코트하기 위해서였다. 그 중에선 날 바래다주느라 자신의
아침수업을 빼먹기까지 하는 서울의 대학생도 있었다.
어머니는 "쟤들 부모 맘이야 어떨지 모르겠다만 과히 기분 나쁘진
않구나"며 흐뭇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스튜어디스가 되고 미스코리아가 되고 또 연예인으로 정신없이 바빠지면서 그 친구와 조금씩 멀어지게 됐다.
지금 꾸준히 사귀는 남자는 없다. 동트기 전에 나가 별보고 귀가하는 생활이 매일 반복되다보니 솔직히 애인 만들 틈도 없다.
대학시절 내가 살던 안산 예술인아파트에는 남녀대학생들로 이뤄진 청년회 모임이 있었다. 1학년생은 나뿐이었고 멤버들은 고학년이었다.
지금도 그때 그 선배언니들과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으며 지낸다.
청년회 회원 중엔 스타도 있었다. 몬트리올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신혜수 언니가 바로 '우리들의 스타'였다.
당시만 해도 내가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을 거라곤 꿈도 못 꿨던
때라 혜수언니 라는 존재는 부러움 그 자체였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다. 내 경우가 거기 딱 적용된다.
KAL 스튜어디스들 중에는 새리 미용실 단골이 많았다. 외국 문물에 접할 기회가 많다보니 자신들도 모르게 눈이 높아졌기 때문인
듯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선배언니들 따라 한번 두번 머리 만지러 다니다가 결국 새리 미용실만 이용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난 그곳 원장님에게 '찍혔다'. 김훈숙 선생님이었다.
그분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나갈 것을 권했다. 처음엔 '설마
내가?'라며 대수롭지 않게 웃어넘겼지만 한번 두번 참가권유를 받다보니 최면에 걸려들게 됐다. '그래, 난 미스코리아감이야'.
참가 결심을 굳힌 순간 사직서를 냈다. 이리저리 심사숙고하다간
스튜어디스라는 썩 괜찮은 전문직을 포기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일단 미스코리아 출전을 선언했지만 뭐하나 준비해 놓은 것이 없었다. 남들은 1년전부터 때 빼고 광내가며 외모를 만들어간다고
하던데... 두렵고 불안했다.
게다가 어머니마저 일본 친척집에 가 계셨다. 하기야 부모에게 알리지도 않고 참가원서를 내기는 했지만(대학입학때도 부모 몰래
항공운항과를 택했었음).
누구의 도움도 바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대회는 불과 2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사촌언니에게 사정을 털어놓았다. 언니는 기꺼이 내 뒷바라지를 해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첩첩산중이었다. 옷은 어디서 구하나? 돈도 없는데 이브닝드레스다 뭐다 그 값비싼 의상들을 무슨 수로 사 입을 것인가. 모
유명디자이너의 옷을 많이 입어야 좋은 점수를 딴다는 소문도 있던데...
암중모색을 거듭했다. '궁하면 통한다'고, 어둠 속에 서광이 비쳤다. 새리 미용실 김훈숙 선생님이 무조건 지원을 약속한 것이다.
그림자처럼 딸들 곁을 떠나지 않은 채 옷매무새를 고쳐주고, 콩콩콩 화장도 다시 매만져주며 조금이라도 더 예뻐보이게 만들려고
애쓰는 미스코리아 후보어머니들의 정성을 김선생님이 내게 대신
베푸셨다.
그분 덕에 온갖 서러움을 잊을 수 있었고 '나는 외토리가 아니다'라는 든든함도 가지게 됐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치열한 경쟁의 장이다. 경쟁이 과해지면
전쟁이 된다. 미스코리아 전쟁에 필요한 모든 것은 그분이 무한정
공급한다.
나는 투지만 불태우면 된다. 그런 각오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날을 맞이했다. 결전의 날이었다.(이거 너무 살벌했나?)
새리 미용실 김훈숙 선생님은 미스코리아 의상과 화장은 물론 핸드백까지 사주며 자신감을 불어넣어 줬다.
흔히들 미스코리아로 뽑히는 순간 "어느 어느 미용실 누구누구에게 감사한다"고 수상소감을 밝히는 것을 비아냥거리곤 하지만, 그런 답변이 안나온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듯한 느낌이다.
나는 미스코리아가 됨으로써 김선생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신세, 은혜 갚는 일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다.
각종 잡지에 의상모델로 사진이 실릴 때면 난 꼭 새리 미용실로부터 '헤어스타일'협찬을 받는다. 그래야만 그곳 이름이 내 사진 밑에 활자로 명기되기 때문이다.
톱디자이너 한분이 10여 차례나 전화를 걸어와 자신의 패션쇼 모델로 무대에 서줄 것을 부탁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분 옷
한번 입어보는 게 소원인 사람도 많으니까.
하지만 그분의 요구를 정중히 사양했다. 머리를 자신이 지정하는
곳에서 만지라고 했고, 그 미용실은 새리가 아니라는 점이 모델
거부 사유였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날 난 솔직히 진(眞)이 될 줄 알았다. 수유리
아카데미하우스등지에서 다른 후보들과 합숙하며 교육받을 때 뭐든지 1등은 내차지 였기 때문이다. 무슨 '심사'만 있다하면 난 항상 10점 만점에 10점이었다.
92미스코리아 미(美)라는 사실이 두고두고 억울하고 아쉽기만 하다.
미스코리아 참가를 계기로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사귀게 됐다. 본래 난 동갑내기보다는 언니들과 친한 편이다. 동료들과는 달리 언니들은 날 '씹지'않는다는 게 좋아서이다.
동갑내기 친구들 중에선 KBS작가로 일하고 있는 김윤정과 가수 김태우씨, 코디네이터인 윤미성이 고교동창생들로 절친한 사이이다.
선배 미스코리아들 중에서는 오현경씨, 고현정씨와 가깝게 지낸다. 나이는 내가 많지만 미스코리아 쪽으로는 그분들이 선배인 탓에 우리는 말을 높인다.
나나 그들이나 이름 끝에 '씨(氏)'자 붙여가며 예의를 갖추고 있다.
얼마전 내가 졸도했다는 사실이 日刊스포츠에 기사화된 후 고현정씨가 안부전화를 걸어와 진심으로 걱정해줬다. 참 고마웠다.
첫댓글 말투나 행동이 너무 과장돼 있어요..자기는 솔직하고 편안한 성격이라고 주장하는데 절대 아닌듯.. 글구 그렇게 이쁜 얼굴이 넘 많이 망가졌어요..
귀차니즘이 압박 .. 스크록도 압박. 해오는구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