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캐도 하던 말(글)은 끝을 봐야것쥬??
이제 내게 사랑이란 단어는 어색하고 민망하고 입에 올리기 조차 싫어하는 단어이고보면
정말 세월은 참으로 빠르게 지나갔고 다시는 그런 갈등의 시간을 갖는게 싫구만요.
원래 어려서부터 혼자 자라서인지 혼자 잇는게 좋고, 머무를 수 있는 이공간에서
내겐 생활이 중요하고,난 남자헌티 보호를 받으며 다소곳이 살아가는 그런 운명은 아닌가 봅니다.
해서 자칭 "난 고양이과다" 하며 모든 일은 혼자 결정해서 행동하는 드센 여자가 되었네요.
이젠 친구만 필요한 나이입니다.
유일한 나의 친구이며 존경하기도 한 내 친구(지금은 이미 고인이 되었어요)
여고시절 내 짝꿍이엇던 그 친구가 독일로 유학을 가면서 선물로 남자를 한명 소개해 주었습니다.
자기가 좋아했고 존경하는 스승(교장셈)님의 아들이며 친구의 오빠인 그를 소개한다며 나에겐
이름 석자 알려주고 그에게도 내전번과 이름 석자를 알려주고 독일로 날아갔습니다.
그사람의 신상을 가족 사항 고향등을 모두 알려줘서 그야말로 믿을 만한 사람이었지요.
R.O.T.C장료로 입관하는 날 정복을 입고 을지로에서 만났습니다.
익히 들어서 알아서인지 궁금하지는 않았는데 생김새는 몰랐거든요.
첫인상이 거구의 삶은 돼지 같았습니다.키181cm,체중 80kg 얼굴은 마음에 들지 않으나
친구의 간곡한 부탁여서인지 믿음은 가더군요. 그러나 입관하는 날이라서 바로 헤어져야하고
그다음부터 군생활이라서 (포항 해병대 소위)만날 수는 없고 그때부터 펜팔이 시작되었습니다.
비로서 내가 제대로 된 내 생각과 말이 통하는 그런 상대를 만나 제대로 사귀어 갔습니다.
나이차이는 4살 내나이 21 그사람 25 편지로만 오가는 고로 주로 내가 긴 사연을 보내지요.
군생활 잘 하라고 A4용지로 10장씩 써 보내면 군에서 대단한 인기랍디다. 온 부대 사람이 다 돌려보고
사병들이 휴가를 가면 나에게 전화를 하라고 알려줘서 사병들이 전화도 주고 만나는것은 일년에 한 두번
헌데 순탄치 않은 내운명이 또 수상한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럽게 교장셈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그사람 고향은 백령도 섬, 형제는 팔남매에 장남
포항에서 백령도는 가기가 힘든 곳입니다. 그러니 자연 내 편지가 많은 위로가 되엇을터
월남을 지원할까 묻더만요, 반대를 했지요.그런 가운데 내가 감기로 몇달씩 고생을 하게 되어서 자주 먹는 약도 안듣고
해서 명동성모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앗습니다. 결과는 2주후에...그사이 여름이라서 모처럼 그사람 헌티 면회를 가기로 마음먹고 정말 용기를 내어 포항으로 내려갔네요. 터미날까지 마중나온 그곳에는 해병대들이 쫙 깔렸어요.
옆에 바싹 붙어 걷지 않으면 어느 누가 채갈줄 모르니 잘 따라 오라더만요. 부대에서는 애인이 온다고 소문이 나서(워낙 편지를 많이 써서)중대장님이 파티 준비도 되잇었는데...그만 내가 그곳에서 밤에 긴장을 해서인지 몹시 앓아 바로 다음날 아침에 서울로 오게 되엇습니다.바로 성모병원으로 갔더만 결핵1~2기로 넘어가는 양쪽폐가 병이 들었데요.
그 결과와 함께 바로 난 직장을 그만두고 집으로 왔습니다. 23살이 나이에 병이 든것입니다.
이사실을 알릴까 말까 망설였지만 동료들이 말을 해야 한다해서 그에게 알렸는데 포항 앞 바닷가에 가서
한시간이나 울었다고 하면서 자기는 하느님을 믿고 의학을 믿고 나를 믿으니 병 나을 동안 기다린다고 하데요.
정말 그 희망하나로 열심히 2년간 약먹고 엉덩이 주사를 혼자 내엉덩이에 100대를 맞아가며 버텼습니다.
헌데 그사람은 고향이 넘 멀어서 남은 군복무를 고향에서 하기로 결정을 보고 백령도로 돌아가고
난 집에서 투병을 하엿는데...그당시 우리집은 너무나 가난하고 초라햇어요. 내가 벌때는 괜찮앗지만
벌지도 못하면서 약값에 생활비에 거기다가 늙으신 엄마와 병든 언니가 내가 부양해야 할 가족이엇습니다.
2년은 잘 버티어 아주 건강해졌고 그래서 취직을 준비하여 이태원에 새로 생기는 해밀톤호텔에 면접(영어,일어 )간단한 외국어 심사..합격하여 한달간 교육을 받고 자리도 프론트로,유니폼도 맞추고..헌데 보건소에 가서 건강증명서를
가져오라고 한것에 난 미리 겁을 먹고 내가 완치되엇다는 확신이 없어서 배짱없이 포기를 햇습니다.
그때가 내인생의 전환점인데 왜 배짱을 못 부렷을까? 그때 보건소 갔으면 나는 그 호텔 초대직원이엇는데...
나중에 결혼해서 감기가 오래가 그때 비로서 시립병원에서 X-RAY를 찍으니 폐는 탄탄하다고....
그일로 인해 내 꿈도 살아지고 희망없는 비참한 생활의 연속에서 난 자포자기
친구는 독일에 갔고 건강잃고 일자리 잃고 두부양가족의 생활에 지쳐가는 중에
그사람 제대하고 학교 발령받기만 기다렸고 울언니 아풀때 그사람이 와서 처음으로 우리가족을
것도 언니네 식구들을 봣을적에 내 형편이 안좋으니 언니가 취직되면 내 동생을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운명의 여신은 그의 발령이 자꾸 늦어지면서 그도 결핵을 아팟던 나를 백령의 습한 공기속에
데려갈지 고민이 많엇겠지요. 백령이 아닌 다른 곳이었으면 데려 갈 수 잇엇을 터인데
집안에 장남이다 보니 것도 시골서...그의 작은 아버지가 그곳 여자와 결혼을 하라고 보챘나봐요.
그사람데로 고민을 하노라 편기가 없고 나역시 지쳐서 가던중에 5년의 우리의 인연은 삼촌의 강압으로
나는 소식없는 그를 원망하며 될때라 되라는 식으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은 사기 중매결혼을 했네요.
사기라는것은 결혼 이튿날에 알게되었지만 돌아 갈 수 없는 형편에 참아야 했고
친정에 남편과 인사를 가서 잠시 집안을 정리하다 그사람에게서 온 편지가 뭉치로 발견되었를 적에
울 엄마가 집으로 편지 온것을 (전에는 직장이어서)감춘 사실을 알았지요. 엄마는 연애란 안되는 것으로 안 분이시니
그제야 그에게서 왜 편지가 안온 사실을 알았습니다.
연애와 달리 결혼은 책임이 따르고 자식이 생기니 그에 따른 책임은 더욱 무거워 오늘 날까지 버티고 삽니다.
그 많던 사람중에 알곡을 다 날아가고 쭉쟁이 하나 잡아 살아가면서 내겐 생활이 제일인것을 알았지요.
결혼 5년차에 내 친구가 독일서 연락이 끊겨 친구소식알려고 수소문 하다가 그사람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서로 가정을 가지고 결혼생활 5년이상 된 사람들이 서울에서 만났습니다.
처음엔 서로 울었지만 차츰 서로를 위로 하게 되고, 서로가 잘 살기를 바라는 바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되주엇습니다.
내친구가 암으로 죽기 1년전 고향엘 같이 가자고 하더군요.친구의 마음에 나를 백령도 구경을 시키고 싶은 마음으로
해서 배 멀미로 망설였지만 친구의 마지막 여행이라서 남편들이 인천연안부두까지 배웅해주는 가운데
울둘이서 백령도에..그곳에 그의 어머니와 친척들 그리고 내친구의 친구인 그의 여동생이 (현직교사)방학이라서
와 있었고..집이 아닌 두문진에서 울 여자 셋이서 3박 4일 묵으며 그사람까지 4명이 백령도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녔고
그의 빽으로 백령도 해병대 중위출신이니(그를 아는 사람은 내이름 석자는 아직도 알으며 안부를 묻지요)
땅굴 600m까지 구경을 하는 호강을 누려봣습니다.
그의 여동생이 말하데요."여기가 이렇게 촌인데 그당시 왓으면 살 수가 있었겠어?"
내 친구왈"얘는 둘이 그렇게 사이가 좋으니 못 살지는 않앗겠지만 몸이 아파서 견딜수 없엇겠지"
고인이 된 내친구...그녀가 우리둘을 만나게 해주고...또 그녀가 떠나기전 나를 꼭 백령도 구경을 시켜주겠다며
그사람과의 여행을 하게 해 주엇습니다.
그사람과 나 우린 도대체 무슨 사이이지? 하고 물을 때도 있었지만
내친구가 참으로 신기하다 할 정도로 그와 나는 지금까지 가끔 안부를 전하는 친구사이가 되엇습니다.
내게 사랑은 친구이더군요.
백령도에서 내친구 그사람 여동생 나 이렇게 잇을때 그사람이 전화를 내게 합니다.
난 좀 민망하기도 햇고 그 여동생.."여긴 우리 고향이야..남들 의심하지 않게 행동 잘해야"ㅎㅎㅎ
그여동생도 내 친구가 되었습니다.
40대에 동생왈 "야..넌 무슨 재주가 있어서 두남자를 거닐고 사니? 울오빠 너라면 쪽을 못 쓰잖어"..
그동생 40대초반에 과부가 되었거든요.
지난 12월달에 그사람 동생한데서 전화왔네요. 이젠 올해가 정년이라고..
그사람은 해가 바뀌거나 생일이거나 꿈에 보이면 전화 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지는 못 하지만 내친구로 영원히 남아 있는 그사람이 고압답니다.
아울러 그가족들도 내 친정식구들처럼 집안행사에는 제가 한번은 갔고 나머지는 부주만 하지요
그 형제들도 나를 알고 우리집 애들도 그사람을 알기에
예전에 딸이 엄마는 그아저씨랑 살았어야 행복했을 터인데...그러데요.
순탄치 않은 내인생이지만 그래도 연애 한번 못 해본 사람들에 비하면 좋은 추억이 있기에
결혼38년을 잘 버티고 살고 있는 태후 할메입니다.
첫댓글 여자의 일생을 흔히들 자기 야그를 글로 쓰면 책 한권도 넘을 거라고 말들을 하지요. 저 역시 여기 자세하게 적을 수는 없었지만...아마 내가 작가의 소질이 있다면 소설 한권 써도 될 만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도 있어요. 암튼 우연히도 여기에 이런 글을 올릴 줄이야....이곳의 글이 잘 안올라 온다기에 함 용기를 내어 적어봣습니다.
가슴앓이 마이 하싯네요. ㅋ~~~,
금년 여름에 수도권 님들 3박4일 정도로 백령도 한번 가까예?
폭포님하고 지하고 수마석님은 시간이 나지 않을까?
나머지분들 중에도 한,두분 추가되면 ...
두문진(글에 주문진이라 썻던데 그거 오잡니다 ㅎㅎ)에서 그 냥반 이름 크게 합창 한번 하십시다.
소녀도 좀 낑가주이소~!
그 멋진분 함 보고싶기도하고, 그덕분에 백령도 귀경도 좀 하이시더...ㅎㅎㅎ
한권의 소설을 읽는 기분으로 읽었습니다 참 할메님 한테는 가슴아린 사연이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ㅎㅎ
아름다운추억 아직도 이어가시네요~
부럽습니다~^^ㅎㅎㅎ
태후할메님 좋은글연작 잘 보았습니다.
아름다운 사랑을 하셨네요.
잘 읽고갑니다
ㅎㅎ
마음을 터놓고 지낼수 있는 친구 한명만 있어도 .. 잘 살아온 인생이라 그러던디요..
연인에서.. 친구로 ... 참으로 귀이한 인연이로군요..
A4 용지로 10장씩 편지를 썼다니 ..와.. 놀랐네요...무슨사연이였을까나 ..궁굼한디요..
그 편지사연 듣고 싶어지는디....억수로 재미있을것같은 예감.ㅎㅎㅎ
아름다운 사랑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래로 친구로 지낼수있는게.. 얼마나 행복한일입니까.ㅎㅎ
부럽습니다 ...늘 고운추억 안고사는 행복을 누리시길...
아니 무신일로 이러시나여. 무신 사연이길래. 쏘주 한잔 하입시다.
인연이네요
조물주께서 제대로 연을 맺어주시징,,,이세상모든사람들에게 말이죠,,안타깝슴다...^^
그치만,,,,더욱 좋은 친구의 연이 여지껏 이어지니,,그것으로 위안을 삼으셔도 될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