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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3장
허초(虛招).
남궁세우의 검탄강기는 허초였다. 무당의 최고수인 자신들을 상대로 허초를 날리는 대담성을 보였다. 설마 그런 방법을 쓰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들이었다.
그들이 노리는 목표는 자신들이 아니라 점창파 인물들이었다.
"태극십절지(太極十絶指)!"
"구궁적양수(九宮赤陽手)!"
"천강복마권!"
다급한 표정을 지은 무당삼선의 입에서 우렁찬 외침이 터져나옴과 동시에 등을 보이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자신들의 절기를 쏟아 부었다. 점창오로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행동은 변함이 없었다. 이미 일정 부분 희생은 각오하고 있었기에 뒤에서 다가오는 기운을 무시하며 더욱더 앞으로 다가들었다.
"우리 두 사람의 합공을 받아낼 사람은 산이 녀석 빼고는 없단 말이다!"
바로 눈앞에 다가온 팽무도의 강기를 막기 위해 검을 휘두르는 점창오로에게로 거친 고함을 터트린 남궁세우가 손과 발을 날렸다.
"허억!"
점창오로의 표정이 해쓱하게 변했다. 설마 뒤쪽에서 다가오는 위험을 감수하며 자신들을 공격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더구나 지금 저들의 후위에 있는 사람들은 무당삼선이다.
이곳에 와 있는 사파 인물 중 가장 강한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 그들에게 허초를 날리고 자신들을 공격해오다니.
"좋다, 그렇다면……."
점창오로의 표정이 굳어졌다. 어차피 이곳에 오기 전에 모든 것을 버리고 왔다. 오직 이들의 제거에 목숨을 걸었다.
붉은 혈광을 막아가던 힘을 줄이고 왼손에 나머지 힘을 모아서 앞으로 뻗어냈다. 지금 그들이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그러나.
"크아악! 으악!"
"크윽! 커억!"
모두 일곱 마디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다섯 마디의 비명소리는 이승을 하직하는 소리였고 두 마디는 고통에 못 이겨 지르는 신음소리였다.
처참했다. 점창오로 다섯 명이 한순간에 피떡이 되어버렸다.
남궁세우의 주먹에 두 명의 얼굴이 사라져버렸고 나머지 세 명은 팽무도의 도탄강기에 노출되어 허리 아래가 사라져버렸다. 실로 가공할 무공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남궁세우와 팽무도의 상태도 순탄치 못했다. 호신강기를 극도로 끌어올렸다고는 하지만 거의 무방비 상태로 등을 허용했기에 내부로 엄청난 충격이 밀려왔던 것이다.
"이젠 조금 전보다 낫겠군."
피를 울컥울컥 토해내면서도 싱긋 미소를 짓는다.
무기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점창오로를 가장 먼저 공격했던 이유였다. 그들이 가지고 있던 무기에 검과 도가 전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금강불괴였는가……."
운양진인이 경악스런 표정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설마 자신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낼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호신강기 정도는 뚫어버릴 수 있는 무력이었음에도, 가루가 되어 흩어진 의복을 제외하고는 어떤 상처도 입히지 못했다.
"당신들이 준 약을 먹었더니 그리 변하더군."
천무맹에서 영단이라고 주었던 마단, 그 마단이 피부를 도검불침의 신체로 만들어주었던 거였다.
"그랬었나……. 그러나 금강불괴라 해서 안 뚫리는 건 아니라네."
아무리 단단해도 뼈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일 뿐이다. 외부는 도검이 불침한다지만, 내부까지 완전하게 금강불괴를 이룰 수는 없다.
인간의 내부는 자체적으로 특수한 기능을 가진 기관이다. 피부야 주목적이 장기를 보호하는 데 있기에 단련하는 게 쉽지만 내부기관이야 어디 그렇겠는가.
어떠한 방법을 쓴다 해도 한계가 있다. 내부까지 완전하게 금강불괴를 이루는 방법은 없다는 말이다.
저들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내부에 심한 부상을 입었기에 입으로 흘러나오는 피가 멈추지 않고 있는 것이다.
'아우, 빨리 끝내세. 느낌이 안 좋아.'
무당삼선의 말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궁세우에게 전음을 보냈다. 풍신개가 떠나면서부터 마음 한켠이 계속 불안해왔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형님!'
전음을 마친 두 사람의 몸에서 미증유의 기운이 흘러나오며 사방으로 몰아쳤다. 들어 올린 양손을 따라서 점창오로의 검과 도들이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혈우창궁검법과 한천팽무도법의 이 초를 준비하고 있는 것이었다.
"준비하시오, 이기어검이오."
운양진인의 말에 따라 나머지 일곱 명의 몸에서도 거대한 기운이 흘러나오며 그들의 주위를 잠식해나갔다.
이미 각오를 하고 왔기에 누구도 점창오로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자신들도 살 생각이 없었기에.
무당삼선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의 경지가 어디까지인 줄은 모르지만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기운도 팽무도와 남궁세우에 못지않았다.
"혈극폭!"
"창궁혈해천!"
"사상무망!"
"구궁연환겁!"
"……."
"……."
거의 동시에 아홉 명의 입에서 터져나온 거대한 외침소리가 무이산 자락을 타고 오르며, 무시무시한 기운이 사방에서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쌍방간에 이기어검의 대결이었다.
붉은 기운을 머금고 있는 다섯 개의 검과 도, 그리고 갖가지 기세를 머금고 있는 검과 권강들이 서로를 향해 물밀듯이 밀려들며 그 진득한 살기를 토해냈다.
* * *
팽무도가 못내 불안해하며 빠른 시간에 싸움을 끝내고자 하는 그 시간, 풍신개의 발걸음은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두르세! 우리가 빨리 가야 하네."
폭설을 헤치며 급하게 몸을 움직이는 두 사람, 정확하게는 네 사람이었다.
등에 조천영을 업고 있는 풍신개와 소령을 안고 있는 요몽이 전력의 경공으로 쏟아지는 눈 속을 달리고 있었다.
풍신개의 마음은 급했다. 그곳에 와 있는 자들은 하나같이 초극의 고수들이고, 적어도 자신의 수준 이상이었기에 더욱 걱정스러웠다.
광풍대원 몇 명만 데리고 왔어도 이리 급한 심정은 아니었을 터인데 왜 그들을 말렸는지 후회가 밀려왔다.
'풍신개…….'
"허억!"
몸을 날리던 풍신개가 정색을 하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또다시 자신의 귓가에 들려오는 그 목소리.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자신을 찾는 게 아닌가.
'부인이 보고 싶지 않은가.'
자신을 부르는 악마의 목소리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아무리 무련이가 보고 싶어도 지금은 아닌 것이다.
조천영과 소령을 데려다주어야 한다. 그 다음, 그 다음에 모든 것을 정리해야 함이다.
'자네는 나를 거부하지 못하네. 업고 있는 여인을 내려놓고 이곳으로 오라, 어서!'
이번에는 약간 귀기를 풍기는 것 같은 목소리가 그의 귓전을 울렸다. 거부할 수 없는 목소리.
'안 돼……. 가면 안 된다, 구칠…….'
'아니야, 천영일 데리고 오라는 것도 아니고 혼자 오라는 것 아니냐. 가라, 구칠. 이번이 아니면 다시는 무련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안 돼! 이 눈 속에 천영이와 요몽만 두고 갔다가 그놈들의 동료라도 있으면…….'
'너도 알지 않느냐, 구칠. 무당삼선의 일행은 더 이상 없다. 그들만 왔단 말이다.'
심마가 아니었다. 가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 가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이 굳어지는 것이었다.
"안 돼, 나는 갈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고함을 내질렀다. 그렇게라도 해야만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상념을 떨쳐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왜 그러십니까, 시주……. 어디 편찮으십니까."
"아닐세……. 자네…… 천영이를 데리고 갈 수 있겠나?"
'이럴 수가…….'
풍신개의 얼굴이 해쓱하게 변했다. 분명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요몽에게는 두 사람만 가라는 말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할아버님, 빨리 가서 광풍대원들을 데리고 오는 게……."
"그게 낫겠지?"
"그분들이 위험할 것 같습니까?"
"그…… 그렇네. 아무래도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으이."
조천영의 말에 약간 망설이는 표정을 보이던 풍신개의 얼굴이 이어지는 요몽의 말에는 맞장구를 친다. 마치 답답한 마음에 광명을 찾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그리하십시오. 저희들도 반 시진만 가면 될 것 같은데……."
조천영에게 아이를 건네준 요몽이 그녀를 안으며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묘한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마치 갈등의 요소를 주지 않겠다는 듯 서둘러 몸을 빼는 것처럼 보였다.
"알았네! 내가 빨리 가서……."
떠나는 요몽과 조천영을 망연히 쳐다보던 풍신개가 몸을 날렸다. 그러나 그가 가고 있는 방향은 운강석굴 쪽이 아니었다.
운강석굴과 반대쪽인 무이산 북쪽을 향해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제는 어떤 망설임도 없어서인지 앞으로 나아가는 그의 몸에 힘이 넘쳤다.
거의 일 다경 정도를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사방이 탁 트여 있는 조그마한 공터였다.
"자네를 부르는 데는 힘이 많이 드는구먼."
방갓을 벗어 들고 내리는 눈을 맞고 있는 각인대사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혀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분명 자신은 이곳에 오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먼저 조천영을 데려다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곳으로 오고 말았다. 정신을 잃거나 하는 상황이 아니었기에 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별것 아니네. 내가 익힌 무공의 힘이랄까……. 사사지옥혈공이란 무공이네."
"고금오천무의 하나인 사사지옥혈공 말이오?"
이미 요몽에게서 들었기에 별반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비록 고금오천무의 하나이지만 자신을 조종할 수 있을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네, 그건 강호에 알려진 사실일 뿐. 사신가의 무공인 사사지옥혈공을 말하는 것이네. 고금오천무의 원뿌리가 된 무공이지."
각인대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풍신개가 할 말을 잃었다. 반신오천역과 오신가 이야기였다.
과거 신의 가문이 되게 했다는 무공. 검제 담운천도 오신가 출신이라 한다. 그 오신가의 무공이 강호에 현세해 있다는 말이었다.
"자네가 팔십 호, 아니 팽무련을 처음 만났을 때 뒷골에 고통 같은 것을 못 느꼈나?"
"그럼 그때 그것이……."
"맞네. 바로 이것, 제령침이라 하네."
각인대사가 손에 들고 있는 물건은 세 치 정도 되어 보이는 실처럼 가느다란 침이었다. 그 침을 이용해서 풍신개의 심령을 조정했다는 말이었다.
"이놈이 머릿속에 들어가서 녹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네. 아쉽게도 자네 머릿속에서는 절반밖에 녹지 않은 모양이더군."
풍신개가 자꾸만 갈등했던 이유였다.
완전히 녹았더라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스스로 합당한 이유를 만들어서 행동했을 터인데, 시간이 너무 촉박했기에 그랬다는 것이다.
"왜……?"
풍신개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각인대사를 쳐다보았다.
자신에게 뭔가 알아낼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개방이란 단체를 원하는 것도 아닌 사람이 왜 자신을 제압하려 했단 말인가.
"궁금한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자네에게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자네 때문이 아니고 자네 주변에 있는 자 때문이네."
"무슨 소리요, 내 주변 때문이라니."
갈수록 이상한 말만 하고 있다.
자신의 주변이라 해봐야 팽무도와 남궁세우, 그리고 강호에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백산과 광풍대원들이 전부이질 않는가. 결코 강호에 영향을 미칠 만한 인물이 없다.
"아, 그 이야기를 안 했구먼. 내가 말했던 그 오신가를 멸망시켰던 자가 있네. 정확히는 멸망시켰던 무기가…… 광혈지옥비라는 열두 자루의 비도네."
"그럼 산이를 노리고……. 오! 하늘이여……."
풍신개가 그 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저들이 노리는 사람은 백산이었다. 백산을 잡기 위해 조천영이 필요했던 거였다.
"그럼 요몽도……."
"그 애는 제령침을 맞은 지 꽤 오래되었네. 나를 거부하기 위해서 스스로 백치가 되어버렸고."
"나쁜 놈들, 어찌 인간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어찌 인간이 그런 짓을……."
풍신개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모든 게 끝장나버렸다.
북경 가서 잘살아보겠다던 산이의 꿈도, 그들과 같이 어울려 살고자 했던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꿈도, 모두 허공으로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손녀딸 소운, 먼저 간 아들에게 당당한 아비가 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자식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할 엄청난 죄인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범주에서 보면 자네 같은 생각을 하는 게 무리는 아니겠지…….
하지만 말이네, 자네가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를 밟아 죽일 때 그들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하는가?
아니면 날아다니는 파리를 죽일 때라든지……. 같은 이치로 보면 되는 게야."
이미 인간이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풍신개나 조천영 등은 길바닥의 개미라는 것이다. 그냥 밟아 없애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벌레들.
"다시 보여준다 했으니 보여주겠네. 특별히 알몸으로 말이네, 잘 가게……!"
풍신개의 시야에서 멀어지며 각인대사가 있던 공간 속으로 팽무련의 모습이 나타났다.
새하얀 눈발을 맞으며 나타난 팽무련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알몸의 모습이었다.
과거에 백옥같이 희었던 살갗은 다 사라지고 검게 변해버린 모습이었지만, 그녀의 모습이 분명했다.
오십 년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자신의 반쪽. 그녀의 복수를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는데, 그녀 때문에 버텨왔던 삶이었는데, 더 큰 불행을 만들고 말았다.
"무련, 어찌하면 좋소. 어쩌란 말이오."
이것이 운명이라면 너무 가혹하다. 혼자만 불행하다면, 모든 업보를 혼자 짊어지고 갈 수만 있다면…….
"서ㆍ방ㆍ님, 울ㆍ지ㆍ말……."
"무련! 나를 알아보는 게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돌아온 풍신개가 팽무련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은 여전히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텅 빈 공간뿐이었다.
"각인! 네- 이-노-옴!"
풍신개의 처절한 외침소리가 무이산에 울려 퍼졌다.
그것마저도 놈이 조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과 무련이를 우롱하기 위해, 홀로 신이라 자처하는 놈이 하찮은 인간을 희롱하며 즐기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 선물이라 생각하게. 입맞춤도 선물했네. 부인과 입맞춤을 하면서 가는 것도 괜찮지 않겠나."
"그래……. 옛날에…… 당신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을 때 같이 죽었어야 했어……. 그때 같이 죽었던들 이리 되지는 않았을 것을……."
더 이상 길이 없다. 저자의 말대로 자신은 아무런 힘없는 벌레일 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반항이란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인생인 것이다.
팽무련을 향해 나지막이 속삭인 풍신개가 품속에 있던 광천뢰를 꺼내 입에 물었다.
'좀 서툴더라도 용서하시오, 너무 오랜만이 아니오.'
눈물을 흘리며 풍신개의 입술이 팽무련의 입을 덮었다. 내리는 눈보다 더 차가운 입술이었지만 마음만은 포근했다.
그녀와 같이 죽을 수 있게 해준 하늘에 감사할 뿐이었다.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을죄를 짓고 말았지만 더 이상 운명에 대항할 수 없음이다.
'안녕, 내 사랑.'
순간 팽무련의 손이 풍신개의 단전을 뚫고 들어갔고 풍신개의 입 안에 있던 광천뢰는 그녀의 입 안으로 밀려 들어갔다.
* * *
무이산의 한 공터에서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풍신개와는 달리, 통곡하는 여인이 있었다.
조천영.
소령이를 안고 사라지는 요몽을 쳐다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림사의 스님인 줄 알았고 바보 같은 사람이었기에 동정했던 그 사람이, 사객의 암습에서 몸을 희생하면서까지 소령이를 구했던 그 사람이, 다시 소령이를 훔쳐가고 있다.
자신의 혈도를 짚어놓고 소령이를 데리고 가는 것이다.
포대기라도 가져가라 외치고 싶지만 아혈마저 제압당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따라가고 싶어도 따를 수가 없다.
내리는 눈 속에 망부석처럼 소령을, 그렇게 마음속으로 소령을 부를 수밖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녀의 머리 위로 슬프도록 처량한 하얀 눈만 내려앉았다.
* * *
두 곳에서 일어난 비극을 알지 못한 채, 운강석굴 앞에서는 역사를 묻고자 하는 자들과 인간처럼 살고자 하는 자들이 치열한 생존의 혈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연신 피를 토해내고 있는 팽무도와 남궁세우의 전방으로 창백한 얼굴의 다섯 명이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강해졌군……."
무당삼선의 얼굴에 감탄의 표정이 어렸다. 두 사람의 강함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자신들이 펼치는 동귀어진의 공격마저 막아내고 있다.
목숨을 걸고 모든 것을 다 뽑아서 공격하고 있음에도 두 사람을 처리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시작된 싸움이고 끝을 봐야 한다. 이곳에서 살아나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한다. 자신들이나 저들이나 전부 이곳에서 뼈를 묻어야 함이다, 역사와 함께…….
"아직 모르셨소? 우리가 왜 강해졌는지."
저들 때문에 강해지지 않았던가. 저들이 강하게 만들었음에도 놀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저들이 없었던들, 저들의 야망이 없었던들, 왜 백살대가 백살마대로 변했을 것이며 왜 자신들과 같은 사람이 생겨났겠는가. 알고 있을 것이다.
알면서도 일부러 외면하고 있는 것이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훔쳐낸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동시에 힘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내상이 심해졌는지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왔으나 그런 것에 연연할 틈이 없었다.
무당삼선도 이미 심검의 경지에 들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신들보다 깊이가 낮다 뿐이지 비슷한 경지였다.
역시 무당이란 문파는 거대한 곳이었다.
자신들은 한으로 쌓아서 이룬 무공일진대, 저들은 모든 것을 거머쥔 채 유유자적 생활을 하면서도 심검의 경지에 다다라 있었다. 무당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러나 당신들의 죽음은 정해진 것이오…….'
과앙!
모든 힘을 끌어올려 마지막 삼 초를 다시 한 번 펼치려는 순간, 무이산 어느 곳에서 거대한 폭음이 들려왔다.
"칠아!"
팽무도의 입에서 처절한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자신을 불안하게 했던 정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녀석의 죽음이 있으려고 떠나는 뒷모습이 아쉬웠던 것이다.
'그럼 천영이는…….'
그런 와중에도 조천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풍신개에게 이상이 생겼다면 천영이와 소령이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이런 나쁜 놈들……!"
팽무도에게서 분노의 고함소리가 터져나왔다. 결국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서 놈들이 나타난 게다. 자신들을 이곳에 묶어두고 다른 짓을 꾸미기 위해서…….
팽무도의 몸에서 전율적인 살기가 흘렀다.
비겁한 자들, 오직 자신들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다른 이들의 고통은 생각지도 않는, 마치 자신들만 살아가는 세상이라 생각하는 놈들이다.
이런 자들이 세상을 주무르고 있었다. 이런 더러운 놈들이 최고라고 떠받들어지고 있었다.
"죽인다!"
그로선 각인대사와 풍신개의 사정을 알 리가 없었기에, 모든 책임을 앞에 있는 무당삼선 일행에게 돌려버렸다.
"으-아! 혈극멸!"
"창궁혈애무!"
광폭한 외침소리와 함께 허공으로 솟구쳐 오른 두 사람의 몸으로부터 죽음의 기운이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다음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자신들이 싸우는 통에 풍신개 일행에게 무슨 일이 생겨버렸다. 이번에 모든 것을 끝내기 위해 몸속에 있던 힘을 전부 끌어올렸다.
"구궁무허!"
"사상합일!"
"태극만월!"
무당삼선의 입에서도 포효 같은 고함이 터져나왔다. 그들의 몸에서도 엄청난 기운이 쏟아져나오며 팽무도와 남궁세우를 향해 밀려갔다.
그 기운의 뒤를 청성파 두 사람의 몸이 따르고 있었다. 그들도 이번이 마지막임을 예감했는지 전력을 다해 공격하는 것이다.
'아……!'
무당삼선의 얼굴이 굳어지며 죽음의 기운이 서렸다. 자신들이 만든 새하얀 백색의 기운이 붉은 기운에 의해 스러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무당파의 운정의 몸이 가루로 부서지고, 그 다음 운양진인과 운청진인의 몸이 차례로 사라졌다.
"크윽!"
그러나 팽무도도 무사하지 못했다. 세 사람에게로 집중된 기운을 피해서 청성도군과 태상신군이 하나가 되어 뛰어들었던 것이다.
먼저 뛰어들었던 청성도군이 몸을 희생하여 팽무도의 기운을 막음과 동시에 뒤따르던 태상신군의 검이 그에게 휘둘러졌던 것이다.
"형님!"
허공으로 솟구쳐 오르는 팽무도의 왼팔을 본 남궁세우가 태상신군의 목을 일수에 날려버리며 그를 부축했다.
"괜찮아, 어서 가세. 천영이가 위험해."
피할 수도 있었으나 이번에 마무리를 짓고자 했기에 왼팔을 버렸다.
무당삼선의 기운을 방어만 하고 여분의 기운을 아래쪽으로 돌렸으면 청성파 인물들을 먼저 처리할 수 있었을 터였지만 그리할 수 없었다.
다음에 다시 한 번 심도를 전개한다는 자신도 없었거니와 조천영과 소령의 안위가 걱정되어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의 몸을 추스를 생각도 못하고 급하게 몸을 날렸다. 몸에서 핏방울이 하얀 눈 위로 점점 떨어지고 있음에도 신경 쓸 틈이 없었다.
"사부님!"
그때 저 멀리서 달려오는 광풍대원들이 보였다. 거세진 눈발 때문에 일행이 걱정되어 전부 이곳으로 왔던 모양이었다.
"천영이는, 천영이는 어찌 되었느냐?"
다급한 팽무도의 물음에 누구도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다만 눈물만 흘리며 팽무도를 주시하고 있었다.
"말을 하란 말이다, 말을……. 울컥!"
거칠게 고함을 내지르던 팽무도가 한 모금의 피를 쏟아냈다. 무슨 일이 생겼음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녀석들이 울고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사부라는 사람의 팔이 사라졌는데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 함은 그보다 더 큰일이 일어났다는 뜻이 아닌가.
"소령이가 사라졌습니다. 요몽이 납치해갔다고 합니다. 형수님은 괜찮습니다."
"오! 하늘이여……."
팽무도과 남궁세우가 무너지듯 주저앉고 말았다.
천영이가 살아났다는 것에 안도해야 했지만 그녀와 백산의 꿈인 소령이가 납치되었다는 것이다. 이제 사 개월 된 아이를 데려갔다는 게 아닌가.
"찾아라! 대동을 통째 뒤져서라도 찾아내야 한다!"
광풍대원들에게 고함을 지른 팽무도가 몸을 날려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조급함이다. 왜 소령이를 납치했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우선은 찾아야 한다. 세상을 뒤져서라도 찾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형님!"
남궁세우도 팽무도를 부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소령이를 찾기 위한 광풍대원들의 몸부림이 시작되었다.
"바보 같은 자식……. 왜?"
무이산을 헤매던 팽무도가 어느 한 곳을 쳐다보며 고통스런 표정으로 울부짖었다.
폐허가 되어 있는 자그마한 구덩이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살점들, 그리고 피. 풍신개와 팽무련이 마지막을 장식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풍신개가 서둘러 떠나려 했던 사실과 관련이 있는 것 같은데 왜 이곳에서 자폭을 했는지, 무슨 까닭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형님, 저쪽에 이게 있었습니다."
팽무도의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 이곳으로 오다가 발견한 옷가지와 도(刀)였다.
"어떻게……."
팽무도가 부르르 떨며 남궁세우가 가져온 도를 집어 들었다. 팽무련의 애도였다.
팽무련이 스무 살 되던 해 생일날, 자신이 선물했던 바로 그 도(刀). 분명 그의 손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의 손으로 죽일 수밖에 없었기에 평생을 복수에 미쳐서 살지 않았던가. 그런데 왜 무련이의 도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칠형님과 같이 죽은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무련이와 관련이 있는 사람임에는 분명합니다. 칠형님의 장포도 이 도와 같이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너무 정신없이 일어났다. 구파원로들의 공격과 풍신개의 죽음, 그리고 요몽이 벌인 납치극까지. 전부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일인 것이다.
"구파가…… 너희들이 끝까지 비열한 짓을 하는가."
현재로선 가장 의심스러운 곳이 그들밖에 없었다.
무당삼선을 비롯하여 사파의 인물들이 나타난 시기와 같이하여 일어난 일련의 사태들, 처음부터 완벽한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럴 마음이었으면 왜……."
남궁세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애초에 소령이를 노렸다면 놓아주었다 잡는 것보다 운강석굴에 있을 때가 훨씬 좋은 기회였다.
더구나 무당삼선이나 삼파 인물들의 행동거지로 보았을 때, 결코 이런 짓을 벌이려는 의도가 없어 보였다.
"누구라도 상관없어. 소령이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진정 악마가 무엇인지를 보게 될 거야."
팽무도의 몸에서 질식할 듯한 살기가 흘러나왔다.
자신과 남궁세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이 무림에 나왔기에 이 모든 일이 발생했다고만 여겼다.
"형님, 어서 갑시다. 칠형님은 소령이를 찾고 난 후에 모시도록 하지요."
"그래, 그래야겠지……."
떠날 수밖에 없다. 자신의 일평생 유일한 친구였던 풍신개의 죽음을 대하고도 슬퍼해줄 시간이 없다. 우선 손녀딸을 먼저 찾아야 한다.
그 다음에, 세상에 대한 죄를 묻든지 심판을 하든지 해야 할 것이다.
팽무도와 남궁세우가 눈물을 뿌리며 그곳에서 멀어져갔다. 오십 년 전 죽었던 여동생인 팽무련이 강시로 살아 있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한 채.
그들이 떠난 후에도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변함없었다. 태어난 시기도 달랐고 자라온 환경도 달랐지만 죽음만은 같이한 풍신개와 팽무련.
만남은 인연이고 헤어짐은 운명이라 했던가. 팽무련을 향한 풍신개의 끝없는 사랑이 그 운명을 거부하게 했는지, 두 사람은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저 먼 곳으로 떠났다.
이제 더 이상 슬픔은 없으리라. 더 이상 절망도 없으리라. 모든 것을 벗어버렸기에.
이승을 떠남으로 해서 세상살이에 대한 번민을 전부 벗어버린 풍신개와는 달리, 현실이 주는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한 여인이 있다.
한때는 빙혼마녀 조천영으로 세상 남자들을 떨게 만들었던 그녀, 한 남자를 만나고부터 진정한 사랑을 얻었고
또 어머니가 된 여인, 무공마저 잃고 평범한 여인으로 변해버린 그녀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ㆍ령ㆍ아……."
"언니, 힘내요. 소령이는 돌아올 거예요."
냉추렴이 곁에서 그녀를 달래고는 있지만 위로가 될 리 없다. 소운과 같이 파면신개를 만나고 온 그녀를 기다리는 건 엄청난 비극이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말았던 거였다. 소령이에게 새 옷을 만들어주기 위해 옷감을 떠 가지고 왔는데, 그 옷을 입을 임자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같이 왔던 소운은 개방으로 가서 소령이를 찾겠다며 다시 되돌아갔고 지금 이곳에는 추렴과 조천영, 그리고 오구만 남아 있다.
"포대기도 안 가져갔어. 이렇게 눈이 오는데……. 젖을 먹여야 하는데……."
조천영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고 있던 냉추렴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그녀의 말대로 먹는 게 문제이질 않는가.
엄마 젖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하는 아이인데……. 이 일을 어쩌란 말인가.
뱃속에 있을 때 조천영이 복용한 대환단 때문에 추위는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고는 하지만 배고픔, 그게 가장 문제였다.
"나쁜 놈들……. 그 어린 게 무슨 죄가 있다고."
어찌할 수 없는 현실에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제야 간신히 웃고 살 수 있는데, 이제야 과거를 모두 잊어버릴 수 있었는데, 하늘은 그 작은 행복마저도 용납하지 않는 것 같았다.
조천영의 눈물처럼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발은 밤이 되어도 그치질 않았다. 온 세상을 하얗게 칠해버릴 심산인지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아무것도 먹지 못한 조천영에게 차라도 마시게 하려고 바깥쪽으로 몸을 움직이던 냉추렴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첫댓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