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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5일 대림 제1주간 화요일
제1독서 : 이사 11,1-10
복 음 : 루카 10,21-24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흥미로운 이야기를 책에서 읽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서 한 사람을 맞이하면서 말합니다.
“자, 이제부터 당신이 살면서 행한 착한 일들을 모두 말해 보시오.
그리고 점수를 합산해 봅시다. 합산한 점수가 1,000점이 넘으면 즉시 하늘나라에 갈 것이오.”
“저는 15살 때부터 매일 미사에 참석했습니다.”
큰 계산기를 꺼낸 베드로는 “이것은 0.5점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곧바로 “저는 묵주기도를 자주 바쳤습니다. 10만 단쯤 될 겁니다.”
“이것은 0.75점입니다.” 또 말했지요.
“성찰하면서 회초리로 제 등을 수없이 매질했습니다.” “0.8점 주겠습니다.”
“성인전을 읽었습니다.” “0.9점 주겠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 자기 선행을 베드로 앞에서 고백했지만, 점수 얻기가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5시간 내내 말한 뒤에 얻은 점수는 고작 20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울부짖었습니다.
“아이고, 이건 정말 불가능하잖아요. 당신이 저를 하늘나라에 집어넣어 주시지 않으면,
제힘만으로는 도저히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잖아요.”
바로 그 순간 종소리가 울리더니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1,000점 받았습니다. 이제 하늘나라에 들어가시오.”
주님을 인정할 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이었습니다.
그 나라는 자기 공적만으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라고 고백하면서,
하느님의 자비에 자신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철부지를 통해 창조주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분을 찬양할 수 있는 신앙의 자세를 우리에게 가르치십니다.
그분을 믿고 따르는 것은 우리의 능력이나 재주를 통해서
또 본인의 열심한 생활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대단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 별것 아닌 철부지의 모습처럼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넓은 사랑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인 우리 구원의 길이 열린 것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사람,
사랑의 하느님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주님 안에서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상에서 중요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을 믿고 그분께 나아가는 것뿐입니다.
오늘의 명언
오류로 가는 길은 수없이 많다. 그러나 진실에 이르는 길은 단 하나이다(루소).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대림시기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를 노래합니다.
이는 우리가 대림시기를 어떤 마음으로 맞이하고 지내야 할 것인지를 알려줍니다.
곧 기쁨과 감사를 지녀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파견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 기뻐하며 말하자,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기도를 드리십니다.
마치 “내 마음이 나의 구원자 하느님 안에서 기뻐합니다.”(루카 1,47)하고
기뻐 찬미하는 '성모님의 노래'와 같습니다.
그러니 이 기도는 예수님의 '마니피캇'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대체 무엇에 감사하고 즐거워하실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루카 20,21)
그렇습니다.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졌음에 드리는 찬미와 감사기도입니다.
여기서 '감사'(Έξομολο-γουμαί)의 원어의 뜻은
‘억제할 수 없는 기쁨으로 즐거워하는 감격스런 찬양의 고백’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는 '아버지의 선하신 뜻'에 대한 ‘완전한 인식’과 ‘동의’와 ‘전폭적인 지지’를 드러냅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 대림시기에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바로 그 뜻을 우리가 모른다 할 지라도 그 뜻이 선하신 것만을 믿으며 의탁하고,
그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찬미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할 일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루카 10,22)
그렇습니다.
오로지 아드님이신 예수님만이 '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아시며,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이들이 알게 됩니다.
곧 '하느님의 뜻'은 우리의 지혜나 슬기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아드님을 통해 드러내 주시기에 알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드러내 보여주신다’ 해서, 모두가 알게 되거나 모두를 알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라야 알아듣고, 또한 받아들이는 만큼만 알아듣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게 된 제자들에게 행복을 선언하십니다.
곧 '하느님의 뜻'의 이루어짐이 제자들에 대한 행복선언으로 드러납니다.
“너희가 보는 눈은 행복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들은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루카 10,23)
그렇습니다.
제자들은 '아버지의 선하신 뜻'과 계시를 받은 복된 이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보고자 했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그들에게 보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처럼 아버지께서 우리 안에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심을 믿음과 흠숭으로 고백해야 할 일입니다.
'아버지의 뜻'에 ‘전폭적인 지지’와 ‘동의’로 ‘찬미’와 ‘감사’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루카 10,21)
주님!
미처 알아듣지도 못한 채, 당신의 ‘선하신 뜻’을 부둥켜안고 살아갑니다.
선하신 뜻을 드러내신 당신의 사랑에서 당신의 얼굴 뵙고,
감추신 신비에서 당신 심장의 소리를 듣게 하소서.
당신의 선하신 뜻, 그 안에 제가 달려 있으니 당신 뜻, 그 안에서 제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타산지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게 부족한 지혜와 경륜을 다른 사람에게서 얻는 것을 뜻합니다.
신부님들의 좋은 강론을 듣는 것은 제게는 ‘타산지석’의 기쁨입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의 심리가 다르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한 가지 예로 동양인 대학생과 서양인 대학생을 상대로 ‘장점’을 칭찬하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서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기쁘게 받아들였고,
자신의 장점을 자신 있게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 대학생들은 대체로 그 칭찬을 별것 아닌 것처럼
겸양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자신의 장점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하면 깨끗하게 패배를 인정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동양인들은 질 것이 확실할지라도 끝까지 패배를 인정하지 않고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독일인들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배가 확실하게 되니
깨끗하게 인정하면서 전쟁을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패배가 확실했음에도 ‘옥쇄’ 작전을 펼치면서 연합군을 당황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심리를 연구한 책이 루스 베네딕트의 ‘국화와 칼’입니다.
서양의 문화와 역사의 근간이 되었던 ‘그리스도교’의 근본 가르침은 어떤 사상적인 바탕에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의 비유에서 이렇게 이야기하셨습니다.
“종이 분부를 받은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분부를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고 말하여라.”
예수님의 말씀은 동양적인 사상과 더 친밀하다는 생각입니다.
오늘도 어제에 이어서 김재덕 신부님의 ‘예수님과 만난 여인들’ 중에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이 또한 제게는 ‘타산지석’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방법이 아닌 것으로, 은총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유학을 다녀온 사제의 바람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좋은 성적으로 유학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면 더욱더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유학 갔다 온 모든 사제가 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미 같은 과목의 신부님이 신학교에 있는 경우도 있고, 신학교에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실망하기 보다는 지금 나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 최선을 다했던 그 일들이 나중에 학생들을 가르칠 때 커다란 자양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작은 성당에서 기쁘게 살았고,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나중에 교구청에서 지낼 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는 몹시 아팠습니다.
예수님께 기도를 청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라자로는 죽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 병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라자로가 잠들었다. 내가 가서 그를 깨우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은총을 베푸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마르타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믿음을 보시고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라자로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 그러자 라자로는 무덤에서 나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와 마르타에게 신앙고백을 받으신 후에 라자로를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믿음은 끝까지 지키는 것입니다.
심지어 오빠가 죽어서 원망스러울지라도 지켜가는 것입니다.
믿음보다 우선 될 수 있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알아야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분석의 대상으로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이해되어야만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어떻게 믿어야 할까요? 끝까지 지키고, 간직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다른 것과 바꾸지 않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정말 은총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얻은 믿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그것을 하찮은 것들과 바꾸지 말아야 합니다.
믿음은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것이어야 합니다. 힘들어도 믿음은 항구하게 지켜야 합니다.
이것이 마르타와 마리아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메시지입니다.
상처를 받아서. 미워서, 믿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일지라도 소처럼 우직하게 믿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유 없는 고통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고통이 클수록 은총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매 미사 때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일찍이 사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에게 평화를 두고 가며 내 평화를 주노라.’ 하셨으니,
저희 죄를 헤아리지 마시고 교회의 믿음을 보시어,
주님의 뜻대로 교회를 평화롭게 하시고 하나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주님께서는 나의 믿음을 보시고 잘못한 이를 용서하십니다.
나의 기도를 보시고 누군가를 용서해 주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보시고 죄인을 구하십니다.
나의 기도가 누군가를 살린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이것이 기도와 믿음의 힘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성인들의 통공을 청하며, 우리가 연옥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는 이유입니다.
눈을 떠야 하고 귀가 열려야 합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세상에는 볼 것도 많고 들어야 할 말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보고 싶은 것을 다 볼 수도 없고, 듣고 싶은 말을 다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기왕이면 꼭 보아야 할 것을 보고, 꼭 들어야 할 말을 듣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보기 위해서는 눈을 떠야 하고, 듣기 위해서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들이 아니라 철부지 어린이들이
먼저 알아보고 듣게 된다(루카10,2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른들은 자기가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미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가르침을 줄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어린아이들은 계산하지 않고 순수하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은 무슨 얘기를 하면 그 안에 어떤 의도가 담겨 있는가를
신중히 생각하고 온갖 추측과 추정, 상상합니다. 그러나 철부지는 있는 그대로를 인정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아는 것이 병이요, 모르는 게 약”입니다.
세상의 지혜나 율법적 지식은 부족하지만, 겸손히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그분의 보살핌을 바라는 철부지는 행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때때로 제자들에게만 따로 얘기하셨는데
제자들은 오로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루카10,23-24) 고 하셨습니다.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은 바로 예수님 당신을 가리키고 있고,
‘너희가 듣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과연 지금 앞에 계신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또 그분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을까요? 혹 마음은 콩밭에 있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의 육신만을 보고 예수님의 육성만 들었다면 참으로 불행합니다.
사실 꼭 볼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들었다는 증거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고 예수님의 말씀을 실행함으로써 확인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볼거리와 들을 거리에는 분주하면서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데 인색합니다.
주님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감실을 찾고 주님을 영접하는 미사참례는 소홀히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과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모순 속에 있습니다.
이 모순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늘은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귀를 쫑긋 세워 말씀을 들어야겠습니다. 볼 것을 보지 않는데 눈이 좋으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귀가 밝으면 뭐 합니까? 들어야 할 것을 듣지 않는데….
“인간이 무엇이기에 하느님께서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는가!”(김정원신부).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쁨에 넘치신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제자들의 전도사업 보고를 들으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 감사의 기도를 바치신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은 모두 세상의 비밀과 하느님의 뜻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과 업적들을 보지도 못했고, 듣지도 못하였다.
자신의 교만과 오만에 빠져 주님의 가르침을 알아듣지 못하였고, 그분을 배척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께서는 당신과 아버지와의 관계를 말씀하신다.
하느님 아버지와 예수 아드님만이 서로를 알고 계시며,
또한 예수께로부터 계시를 받은 사람만이 하느님 아버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예수께서 택하신 제자들이 행복하다고 선언하신다.
바로 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적을 보기 때문에 복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업적으로 하느님 나라가 이룩되었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마태 13,17) 하신다.
하느님은 겸손한 사람, 마음이 가난한 사람에게 당신의 진리를 드러내신다.
스승님은 제자들을 철부지들이라고 하신다.
철부지들이란 어린이들로서 하느님의 뜻을 있는 그대로 따르며 실천하기 때문에,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그들이 구원받을 준비가 더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얕은 지식으로 신앙을 논하며, 거부하며, 신앙의 자유를 이야기하면서
믿음에 관해 이야기도 못 하게 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모습은 어쩌면 태양 앞에 등불을 켜 놓는 것이거나,
아니면 그 등불을 가지고 그냥 어둠 속으로 숨어버리는 것과 같다.
그래서 결국은 그 빛을 거부하는 결과를 만들고 만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신비를 알 수 있으니,
우리의 눈은, 또 그분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눈은 행복한 눈이다.
우리는 그분의 놀라운 가르침을 들었으니,
우리 삶의 참된 제물로 그분께 영광을 드려야 할 것이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일관되게 보여주고 계시는 한 가지 사목 노선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장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입니다.
교황님에게 있어 그들은 목에 걸린 가시 같은 존재, 아픈 손가락 같은 존재들입니다.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등진 난민들, 이주민들, 재소자들, 환자들, 노인들, 가난한 사람들...
교황님께서 그토록 작음, 작은 이들을 총애하시는 이유는?
영원한 스승이신 예수님께서 그토록 작은 이들, 보잘것없는 이들을 총애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루카 10,21)
예수님께서는 작은 이들 가운데서도 가장 작은 이들인 철부지 어린이들을 총애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지니고 있는 단순함과 천진난만함,
앞뒤 재지 않는 순수한 사랑과 신앙을 각별히 보신 것입니다.
교황님께서 2015년 미국을 방문하셨을 때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의회 연설에서 강대국의 횡포를 신랄하게 지적하셨습니다.
야만적인 자본주의, 고삐 풀린 자본주의의 횡포로 인한
부의 불균형에 대한 개선을 강하게 촉구하셨습니다.
미국 상하원들은 마음속으로 큰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연설이 끝나고 교황님과 함께하는 만찬이 준비되지 않을까?
식사 후에는 교황님과 찍은 인생샷 사진 한 장 건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교황님은 연설이 끝난 후 점심 약속이 있다면서 서둘러 자리를 떴습니다.
대체 어떤 사람과 점심 약속이 되었을까? 대통령? 아니면 미국 주교단? 모두 아니었습니다.
교황님께서는 성 패트릭 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300여 명의 노숙자들과 함께
간소한 점심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자신이 작은 이들의 사목자요 동반자임을 만천하에 드러내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나눈 노숙자들을 만나 이렇게 위로했습니다.
“여러분, 힘내십시오. 저도 이민자 가족입니다. 어떤 어려움에도 낙담하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또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기셨는데, 그곳은 교도소였습니다.
거기서 재소자들과 만나 시간을 보내시면서 이렇게 격려하셨습니다.
“걷다 보면 발이 더러워지기 마련입니다.
이곳에 머무시는 동안 더러워진 발을 깨끗하게 잘 씻기 바랍니다.”
작고 가난한 이웃들을 향한 예수님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총애와 각별한 사랑,
이번 대림 시기 우리의 묵상 주제요, 실천 과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영으로 충만하신 예수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기도, 계시 말씀,
그리고 제자들에 대한 행복 선언으로 짜여져 있다.
예수께서 성령을 받아 기뻐하시면서 감사의 기도를 올리신 이유를
복음서의 앞선 부분에서 찾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 복음의 서두가 말하는 “바로 그때”(21절)란
예수님으로부터 둘씩 짝지어 파견된 일흔 두 제자들이 돌아와서
예수께 각자의 선교활동에 대한 보고를 드리던 때였다.(루카 10,1-20)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악마들이 자기들에게 복종하였던 것에 대하여 기뻐하고 있었다.(17절)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것보다 제자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는 것을 더 기뻐하라고 말씀하셨다.(19절)
예수님의 기쁨과 감사는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곳에 있다.
예수님의 기쁨은 우선 당신께서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루카는 예수께서 성령을 받았다고 표현하지만,
이는 곧 예수께서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하여 계심을 알고 계시다는 것이며,
동시에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자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즉 오늘 독서가 선포하는 이사야의 예언이 예수를 통하여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날 이새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주님의 영이 그 위에 내린다.
지혜와 슬기를 주는 영, 경륜과 용기를 주는 영,
주님을 알게 하고 그를 두려워하는 영이 내린다.
그는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으로 기쁨을 삼아,
겉만 보고 재판하지 아니하고 말만 듣고 시비를 가리지 아니하리라.
가난한 자들의 재판을 정당하게 해 주고,
흙에 묻혀 사는 천민의 시비를 바로 가려주리라.
그의 말은 몽치가 되어 잔인한 자를 치고, 그의 입김은 무도한 자를 죽이리라.
그는 정의로 허리를 동이고 성실로 띠를 띠리라.”(이사 11,1-5)
이사야는 장차 올 메시아가 하느님의 영을 받아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킬 것을 내다보고 있으며,
메시아의 통치는 곧 하느님 성령의 일곱 가지 정신에 기초를 두게 될 것을 예언하고 있다.
하느님 성ㄹ형의 일곱 가지 정신은 우리가 “성령 칠은”이라고 부르는 선물이다.
① 슬기(sapientia/wisdom) ② 통달(intellectus/understanding)
③ 의견(prudentia/counsel) ④ 굳셈(fortitudo/power)
⑤ 지식(scientia/knowledge) ⑥ 효경(respectus/respect) ⑦ 두려움(timor.fear)
이사야는 하느님 성령으로 충만한 예수께서는 정의와 성실로써,
자비와 평화로써 만물이 서로 화해하는 새로운 조화와 질서의 세상을 세우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만물이 화해하는 조화와 질서의 세상은 어떤 무엇도 아닌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새로운 세상은 이 세상 사람들이 머리에서 짜내 만든 지혜나 책에서 얻어낸 똑똑함이 아닌,
그래서 안하무인이요 오만하여 근시안적이요 자만함이 아닌,
오히려 철부지 어린이들에게 나타나는 슬기와 효경 같은 하느님의 영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모든 계시와 세상 구원적 행위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예수는 제자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분이며, 이미 오셨고, 또 오실 분이시다.
우리도 오늘 바로 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기도드릴 수 있음을 기뻐하며 감사하자.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신다.
이승화 시몬 신부
세상은 늘 변합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위치를 지속하고 싶다면
꾸준히 배우고 익히고 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의 자리를 과거의 유물이 되고
새로운 삶을 따라갈 수 없습니다.
가게에서 주문하는 것도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도
변하는 세상에 맞춰서 따라가는 노력이 있을 때
비로소 흐름을 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어디서든 간직해야 할 본질도 있습니다.
이는 삶의 가치이자 방향성입니다.
의사가 되고 싶어라는 직업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어라는 가치입니다.
그리고 우리 신앙인들이 간직하는 가장 큰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이 진리를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조심해야 합니다.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잘 식별하고
무엇을 위한 만남인지, 무엇을 위한 관계 맺음인지
잘 살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혜로움과 슬기로움을 찾다가
더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세상 변화와 본질을 혼동하여 아버지를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행복하다고 하십니다.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한 것을 살피기에
그리스도인다움을 누릴 수 있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그 삶을 위해 기도하며
주님 안에서 기쁨과 행복을 누리기 위해
기꺼이 삶을 봉헌할 수 있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출처 : ‘시몬 신부의 신앙 이야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