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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만우절에 올릴만한 떡밥 아이디어가 생각났는데 이번에는 도저히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습니다ㅠㅠ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그동안 올렸던 만우절 떡밥들이나 다시 한번 재탕해야겠어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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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순수하다. 역사는 사실이다. 역사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다. 타임머신을 개발하지 않는 한 아무도 역사를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역사는 인간의 주관이 상당수 배어들어간 기록으로 전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곡되거나 잘못 전해지는 역사들이 부지기수이다. 폭군으로 알려진 광해군이 그랬고 간신배에 졸장으로 알려진 원균이 그러했다.
미국에도 비슷한 예가 하나 있다. 바로 맥클레란이다.
맥클레란이라고 하면 누군지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는 한국에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남북전쟁 때 활약한 북군의 장군이다. 하지만 그는 겁쟁이에 졸장으로 역사에 남아있다.
앞서 말했듯 역사에는 기록하는 사람들의 주관이 상당수 배어있다. 광해군과 원균이 부정적인 이미지로 역사에 남은 것과 비슷하게 맥클레란 역시 잘못 서술된 역사의 피해자 중 하나다. 그는 과연 알려진 대로 겁쟁이에 졸장이었을까?
남북전쟁의 발발 그리고...
1860년대 미국은 노예주들과 자유주들 간의 대립으로 분열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당시의 상황에 무지한 오늘날 현대인들의 시각으로 보자면 노예주들은 흑인들을 노예로 삼고 채찍으로 때려가며 학대하는 악마이고 자유주들은 휴머니즘과 인권을 앞세우는 천사로 비추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실일까?
자유주들이 대다수인 북부와 노예제를 유지하는 남부는 이질적인 경제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산업이 고도로 발달하고 자본주의의 잇점을 잘 알던 북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예제도는 전혀 쓸모없는 것이었다. 노예란 소유주의 재산이었기 때문에 먹고 입는 것은 모두 소유주가 제공해야 했고 같이 살다보면 정이 들어서 가족같이 대해주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푼돈 몇푼으로 노동자들을 자유롭게 부릴 수 있는 북부 자본가들이 이러한 비효율적인 노예제를 못마땅하게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남북의 대립은 날로 극심해져가다 마침내 노예제를 반대하는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마침내 폭발하고 만다.
노예제를 유지하던 남부의 주들은 잇따라 미합중국을 탈퇴했고 얼마간의 협의 끝에 리치몬드를 임시수도로, 데이비스를 임시대통령으로 하는 미동맹국(the Confederate States of America)이 탄생하였다. 남북전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먼저 포문을 연 것은 남부였다. 당시 남부가 연방에서 탈퇴하자 대부분의 군사기지와 요새에 주둔하던 북군은 철수하거나 항복했지만 찰스턴 입구에 있는 바다 한가운데의 요새 섬터만은 항복을 거부한 채 남군과 대치하였다. 하지만 남군의 포격이 시작되고 미처 북군의 지원이 오기 전에 섬터가 항복해버리자 북부는 격분하였다.
곧 수많은 사람들이 북군에 지원하며 남부에 대한 응징을 맹세했고 남부원정군의 사령관 맥도웰은 어서 빨리 출전하여 방자한 남부를 박살내 버리라는 압력에 시달렸다. 결국 훈련도 채 끝마치지 않은 채 맥도웰은 오합지졸에 가까운 군대를 데리고 리치몬드를 향해 출전했고 남부는 이에 맞서 섬터요새 함락의 일등공신 뷰리가드와 존스턴을 사령관으로 군대를 출전시켜 불 런에서 양측은 맞붙게 되었다.
결과는 북군의 참패였다.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북군은 남군을 거의 패배 직전으로 몰아넣었지만 남군 예비대를 이끌던 잭슨준장의 철벽과도 같은 방어로 결국 전세는 역전되어 오히려 북군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것이다.
어서 빨리 방자한 남부를 응징하자고 휘몰아치던 여론은 이 전투로 급반전되었다. 남군이 수도 워싱턴의 바로 코앞까지 다가오자 언론은 어서 적들과 협상을 맺자고 선동했고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 과연 미합중국은 이대로 분열되고 마는가?
링컨은 이 패배의 원인이 보수적인 군부 때문이라 여겼다. 당시 북군의 모든 전선을 책임지던 총사령관 스콧은 칠순이 넘은 노인이었고 한때는 유능한 장군으로 명성을 떨치던 스콧이지만 노인이 된 이상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작전보다는 안정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일관한 것이 링컨이 생각하는 패배의 원인이었다. 그렇다면 스콧을 대신하여 북군을 지휘하고 남부를 응징할 인물은 누가 될 것인가?
작은 나폴레옹
링컨은 공병장교 맥클레란을 주목하였다. 그는 젊고 활기가 넘쳤으며 스콧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다. 맥클레란이 바로 스콧을 대체할 젊은 피인 것이다!
맥클레란은 당시 미국의 열손가락 안에 드는 엘리트 장교 중 한명으로 나폴레옹의 열렬한 추종자였고 크림전쟁을 관전한 뒤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기록하여 전략전술에 대한 책자를 내기도 하였다. 또한 권투와 스포츠를 즐겼으며 13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를 가뿐히 들어올리는 괴력의 사나이기도 하였다. 링컨을 비롯하여 사람들은 그를 작은 나폴레옹, 리틀 냅(little Nab)이라고 불렀다.
링컨으로부터 총사령관 자리에 임명받은 맥클레란은 특유의 조직력을 발휘하여 북군을 훈련으로 단련하기 시작했다. 맥클레란의 노력으로 오합지졸이었던 북군은 비로소 군대로서의 기강을 잡아가기 시작했으며 어떠한 적이라도 맞서 물리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불 런에서의 패배로 인해 잠잠하던 여론은 이제 모든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하여 다시금 남부로의 출전을 요구하였다. 맥클레란은 탐정 핑커튼을 고용하여 남군에 대한 정보를 알아오게 했지만 핑커튼이 가져온 정보는 충격적이었다. 남군의 숫자는 총 십오만에 달하며 위싱턴에서 리치몬드까지 곳곳에 상당한 방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맥클레란은 일단 북군의 숫자를 이십칠만으로 끌어올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지만 간사한 여론은 그런 그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자신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맥클레란의 신중함을 못마땅하게 여긴 링컨은 계속 맥클레란에게 출전하도록 압력을 가했고 결국 해임까지 거론하자 맥클레란은 하는 수 없이 직접적인 길 대신 먼로와 요크타운을 통한 우회기동으로 리치몬드로 진격하는 작전을 수립하였다.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햄프턴로즈 전투에서 세계 최초로 철갑선끼리의 전투가 벌어진 뒤 바다길은 북군에게 훤히 열리게 되었고 맥클레란은 북군을 바다 건너 먼로요새로 수송하였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북군이 처들어오자 당황한 남군은 일단 매그루더에게 오만명의 병력을 줘서 요크타운 방어선을 설치하였다. 한동안 대치하던 양군은 맥클레란이 포격을 시작하자 격퇴되어 후퇴했고 이제 리치몬드로의 길은 훤히 뚤린 셈이 되었다.
리치몬드 가까이 진군한 맥클레란은 미국 각지로 뻗어나가는 철로들이 모이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세븐파인즈에서 존스턴 휘하의 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이미 매그루더가 요크타운에서 시간을 끄는 동안 모든 준비를 끝낸 남군은 숫적으로 북군보다 훨씬 우세했고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리 나폴레옹이 살아 돌아온다 한들 리치몬드를 함락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결국 맥클레란은 이대로 계속 있다가는 그 결과는 오직 재앙이 될 것임을 예견하고 함대의 함포지원을 받을 수 있는 남쪽의 해안가로 철수할 것을 결정했다. 한편 남군은 사령관 존스턴이 전투에서 부상당하자 군사고문인 로버트 E. 리를 존스턴 대신 사령관에 임명하게 된다.
리와의 숙명적인 대결
리, 그는 버지니아 출신의 웨스트포인터(웨스트포인트란 미국의 육군사관학교를 말하는데 그곳을 졸업한 사관생도는 웨스트포인터라고 불리운다)로 일찌기 사관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멕시코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쳐 당시의 사령관 스콧으로부터 이보다 더 훌륭한 인재는 다시 없을 것이란 극찬을 받은 인물이었다. 남부의 노예주들이 탈퇴하자 스콧은 그에게 자신의 자리를 물려주려 했지만 리는 차마 침략군을 이끌고 자신의 고향을 침략할 수 없다며 남부로 가서 대통령 데이비스의 군사고문이 되었다.
리와 맥클레란, 이 두 희대의 명장끼리의 대결은 잘 주목받지 못하는 면이 강하다. 리가 공격적이고 위험을 감수하는 용장이라면 맥클레란은 신중하고 이길 수 있는 전투만을 치루는 지장 타입의 장군형이었다.
리는 남부의 존속을 위해 수도 근방까지 처들어온 북군에게 괴멸적인 타격을 입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숙지하고 있었다. 맥클레란이 이끄는 북군의 숫자는 십만, 하지만 리치몬드 근방의 남군들은 총 이십만에 달하였다. 승산은 충분하고도 남았다.
맥클레란이 해안으로의 후퇴를 시작하자 리는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상대의 헛점을 찾아내서 패배를 안겨주려는 리의 공격과 되도록 안전하게 모든 군대를 함대의 함포사정권까지 철수시키려는 맥클레란의 방어는 칠일간 이어졌다. 총 다섯번의 전투가 벌어졌지만 맥클레란은 네번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안전하게 모든 병력을 해안가로 철수시키는데 성공했다.
맥클레란의 후퇴 결정은 위험에 빠진 북군을 구하기 위한 결단이었지만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링컨이었다. 군에 관해서는 젊은 시절 민병대에 잠깐 몸을 담아본 경험 밖에 없었던 링컨은 맥클레란의 후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남군의 숫자가 이십만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으며 맥클레란에게 왜 그대로 리치몬드로 진격하지 않았냐고 성화만 내었다.
이제 리치몬드 함락은 불가능해진 것일까? 이대로 미국은 분열된채 존속하게 되는 것일까?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고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라파하녹강변의 프레데릭스버그에서는 남군의 워싱턴진격을 차단하기 위해 맥도웰이 사만명을 거느리고 주둔하고 있었고 서부에서도 속속 군대가 이동 중이었다. 이들과 합류하면 충분히 리치몬드를 점령하고 분열된 미국을 다시 통합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때 워싱턴 서쪽의 셰넌도어계곡에서는 맥클레란의 이러한 전략을 망쳐놓는 사건이 발생했다. 불 런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철벽장군이라는 별명이 붙은 잭슨이 컨스타운을 공격한 것이다. 잭슨의 군대는 일개 사단규모에 불과했지만 이러한 소수의 남군에게 겁을 집어먹은 링컨은 맥도웰과 속속 전장으로 집결하던 북군들을 그대로 워싱턴 주변과 셰넌도어계곡에 묶어두는 실책을 범하였다.
이제 맥클레란이 지원을 받아 리치몬드로 진격할 길은 없어졌다. 그의 앞에는 압도적인 숫자의 남군이 길을 막고 있었으며 함포지원으로 인해 버티고는 있었지만 언제 우세한 남군에게 삼켜져버리고 말지 장담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링컨은 계속 맥클레란에게 무리한 진격을 명했지만 맥클레란이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대통령의 명령에 거부하자 링컨은 분노하여 포토맥군이라 이름붙은 맥클레란 휘하의 북군을 반도에서 철수시키고 맥클레란을 대신할 다른 장군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링컨이 주목한 장군은 서부에서 큰 공을 세운 존 포프였다. 링컨은 맥도웰을 비롯하여 여러곳에 잡다하게 퍼져있는 북군을 모아 버지니아군을 창설하고 포프에게 지휘권을 넘겼다. 링컨은 포프가 충분히 "겁쟁이"에 불과한 맥클레란을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그것은 링컨의 착각이었다.
포토맥군이 반도에서 철수하자 이제 리치몬드는 더이상 위협을 받지 않게 되었고 리는 맥클레란을 견제하던 병력을 북쪽으로 돌려 북부를 침공하였다. 이 과정에서 모든 책임을 진 포프는 부하들과 다툼만을 일삼다 결국 패인을 초래하여 두번째 불 런 전투에서 대패하였고 결국 이 전투로 인해 맥클레란이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버지니아군이 참패한 이때 링컨이 유일하게 쓸 수 있는 카드는 포토맥군 뿐이었다. 리가 불 런에서의 여세를 몰아 매릴랜드를 침략하자 급해진 링컨은 한번 버렸던 맥클레란을 다시 불러들여 리의 침략을 막게 했고 맥클레란은 이번에도 특유의 뛰어난 조직력과 카리스마를 발하여 안티탐에서 리의 대군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우게 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과연 링컨이 맥클레란을 다시 신뢰하게 되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 답은 "아니다"이다. 일단 급해지니까 다시 한번 쓰기는 했지만 링컨은 여전히 맥클레란의 반도에서의 겁쟁이같은 행동을 문제삼았다. 당시의 여론은 계속되는 패배의 책임이 과연 누구에게 있는가를 추궁하고 있었고 여기에 대한 책임이 가장 큰 링컨은 여론의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어 줄 다른 인물이 필요했다. 그 희생양으로 링컨이 선책한 인물이 바로 맥클레란이었던 것이다.
링컨의 책임회피로 모든 잘못을 뒤집어 쓰게된 맥클레란은 결국 포토맥군 사령관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맥클레란의 후임으로 군단장 중 하나였던 번사이드가 뽑혔으며 그는 링컨의 바람대로 리치몬드로의 직접적인 공세를 취하다 결국 대패하고 말았고 그를 대신하여 다시 사령관에 취임한 후커 역시 같은 운명을 맞았다.
맥클레란은 햄프턴로즈와 세븐파인즈, 칠일전투, 안티탐전투 등을 승리로 이끈 명장이 분명하다. 하지만 오늘날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겁장에 졸장으로, 그에 대한 이미지를 그렇게 조작한 링컨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남아있다.
이제 남북전쟁에 대한 다각도의 해석이 가해지는 가운데 맥클레란은 다시 졸장에서 명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이다. 여러 전사학자들의 노력으로 그의 마지막 전투인 안티탐은 게티즈버그를 대신하여 전쟁의 향방을 결정지은 가장 중요한 전투로 인정받았으며 맥클레란에 대한 재해석은 이미 학계에서도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맥클레란을 겁쟁이에 졸장으로 잘못 아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 현실을 뒤집고 억울하게 졸장취급을 받아온 맥클레란에 대한 재해석, 원균을 졸장으로 폄훼하는 한국인들이 본받아야할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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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는 중동의 이슬람국가들 중에서 가장 정교분리를 성공적으로 해냈다는 평가를 듣는 나라이다. 하지만 인구의 절대다수가 이슬람교도인 만큼 역시 세속과 종교의 충돌은 있어왔는데 그중에서도 신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창조론과 모든 생물들은 하등생물들에서 점점 진화하여 지금에 이르렀다는 진화론은 제일 많이 충돌하는 부분이다.
일찌기 1차세계대전에서 패배한 터키는 그동안의 체제에 대한 모순과 불만, 새로운 민족주의와 개혁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군주제가 폐지되고 무스타파 케말을 초대대통령으로 하는 터키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과학은 삶의 가장 믿음직한 안내자다" 아타튀르크라는 성에서도 엿보이듯 국부로 추앙받는 케말은 강력한 정교분리정책을 펼쳤고 이는 교육정책에서 가장 강하게 나타났다. 종교적인 색체가 강했던 전통교육들은 폐지되고 탈종교적인 학교들이 설립되었는데 바로 이 부분에서 창조론의 격렬한 반발이 시작되었다.
기존의 교육체계에서는 제도적으로 진화론교육을 막은 것은 아니었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와 종교신앙 등으로 학교에서 진화론을 가르치는 것은 금기시되었고 거의 모든 학교들이 창조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이 창조론은 기독교의 창조론과 크게 다르지 않아 모든 생물들은 신이 그 종류대로 창조했고 이 세상의 역사는 대략 6천년 정도라는 것이 핵심이다. 그외 대홍수와 바벨탑 이야기 등이 사실인양 학생들에게 교육되었다.
그런데 케말이 학교내에서의 창조론 교육을 금지하고 대신 진화론을 가르치도록 하자 성직자들을 중심으로한 보수적인 이슬람교도들이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하지만 특별히 진화론이 반발의 초점이 된 적은 케말의 집권 동안은 별로 없었고 또한 케말 본인의 명성과 다른 복잡한 내외사정들로 인해 그후 진화론문제는 수십년간 심각하게 거론되지 않게 된다.
가라앉았던 진화론문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한 때는 1957년이 되서였다. 보수적인 동부지방의 이슬람성직자들이 민주주의적인 원칙에 따라 국민들이 원한다면 공립교육에 창조론을 포함시켜야 된다는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하지만 이 소송은 정교분리의 원칙을 강하게 내세우는 터키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을 받고 패소해야만 했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다윈의 "종의 기원"을 비롯하여 수천권의 진화관련서적들을 이스탄불 광장에 쌓아놓고 판결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책들을 불태웠지만 이런 행동은 오히려 창조론자들에 대한 터키국민들의 부정적인 이미지만 심어줄 뿐이었다.
근본주의자들은 법적으로는 창조론교육을 실행할 수 없음을 알고 대중설득작업에 들어갔다. 그들은 57년 분서사건으로 인해 심어진 부정적인 모습을 벗고자 자선사업과 빈민구제사업을 벌임과 동시에 학교에서 창조론을 교육할 교사들을 양성하여 학교들에 취업시키는 방법으로 영향력을 확대해나갔고 이슬람교도가 절대다수인 터키에서는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이 창조론에 기울 수밖에 없었다.
창조론에 대한 제일 좋은 선전도구는 바로 음모론이었다. 즉 진화론은 이교도(기독교와 유대교)들이 이슬람을 파멸시키기 위해 만든 음모라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중동전쟁 등으로 인해 타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분위기로 흐르던 시대상황을 겨냥한 것으로 실제로 많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창조론자들은 65년, 전과 같은 방법으로 진화론만을 교육하는 법처제에 대해 위헌소송을 제기했고 명망높은 무프티인 하잘 아크타는 사만명에 달하는 지지자들을 데리고 승소를 위한 야외기도회를 열기도 했다. 하지만 판결은 전과 같았다. 창조론은 종교이므로 정교분리원칙에 따라 공교육에서 가르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창조론자들은 포기하지 않고 더 많은 지지자들과 백만인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하며 68년에 다시 소송을 제기했지만 판결을 뒤집지는 못했다.
68년 소송은 좀더 극단적인 행태를 보였는데 그들은 판결을 내린 판사들의 재임용탈락운동과 이스탄불 광장에서 다윈의 동상화형식까지 벌였지만 이것이 폭동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한 경찰이 공포탄까지 쏘며 강제해산작전에 돌입하자 이리저리 밀리다 두명이 밟혀죽는 비극도 있었다.
비록 재판에서는 이기지 못했지만 창조론이 가진 영향력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야쿰 체틴 사건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야쿰 체틴 사건이란 법조계비리사건으로 야쿰 체틴이라는 변호사출신 로비스트가 판사와 검사를 상대로 비리사건을 저질러 노동착취혐의를 받던 아랍계 대기업 "파자티 뱅크"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지도록 조종한 사건이다. 후일 무혐의로 밝혀졌지만 65년 재판에서 창조론자들의 소송을 기각한 판사인 야세르 오르한은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를 받았으므로 창조론자들은 판사들이 진화론자들에게 뇌물을 받고 일부러 자신들의 소승을 기각시켰을지도 모른다는 논지의 음모론을 펴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70년대 초 터키의 경제불황과 대규모실업사태로 창조론을 주장하는 근본주의자들의 세력은 더욱 커졌다. 당시 범죄가 급증하고 한층 더 심각해진 냉전으로 인해 불안해진 사회분위기 때문에 창조론자들은 이 사회적인 위기는 오직 신만을 섬기는 신앙으로만 극복할 수 있고 이것을 저해하는 공교육의 진화론교육은 폐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당시 한 통계에 따르면 터키국민의 79%가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쳐야 한다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논쟁이 이렇듯 커지자 74년, 당시 많은 인기를 자랑하던 "아세나요 후쿠티예 쇼"(120분 토론 쇼)에서 이 문제를 주제로 생방송토론을 벌이게 된다. 당시 진화론 진영에서는 출연자를 섭외하는데 많은 애를 먹었는데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진화론을 지지했지만 과반수의 국민들이 창조론을 지지하는 마당에 신변에 위협을 느낄 염려로 인해 방송에 출연하기를 꺼린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스탄불 분자생물학과 교수인 일한 아케나지 교수가 출연하기로 했고 창조론 진영에서는 쿠르드계 이란인 무프티, 오마르 야쿠프 엘하자딘이 출연했다.
이 쇼는 방송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왔고 많은 과학자들이 진화론의 승리를 장담했지만 대신 아케나지 교수의 신변을 걱정했다고 한다. 이 방송에 대한 소식은 해외에도 일부 알려져 한 그리스 신문은 사설에서 "터키는 중세시대로 후퇴하는가?"라는 마치 터키에서 당장에 창조론교육이 시작되기라도 한 것처럼 비꼬는 왜곡된 뉘앙스의 글을 싯기도 했다.
방송당일인 74년 9월 17일, 방송국 앞에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전경들이 배치되었고 방송국 앞 광장에는 수천명의 창조론 지지자들이 모여 "알라 외의 다른 신은 없다"를 외치며 야외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계절은 아직 가을이었지만 한겨울급인 영하 7도까지 기온이 내려가는 바람에 여성 한명이 거의 동사직전에 구급차에 실려가는 해프닝도있었다. 이렇듯 열띤 분위기에서 시작된 방송토론은 시청률이 기록적인 45%까지 치솟기도 하였다.
이 토론에서 진화론측은 되도록 과학적인 증거들을 제시하며 과학적인 토론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고 창조론측은 자신들에게 불리한 과학문제에서 되도록 비껴나는 대신 진화론으로 인해 야기된 우생학과 제국주의, 불신앙 등 주로 진화론이 역사적으로 끼쳤던 해악들을 부각시키며 상대방을 논박하려 하였다.
방송시작 45분째가 되자 갑자기 뜨거운 토론현장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발생했다. 창조론 진영의 엘하자딘이 터키는 진정한 신정국가인 오스만 제국 시절에 신의 영광을 받아 강대국이 되었지만 이교도인 케말이 정교분리정책을 실시하고 진화론을 가르치면서 지금같이 쇠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 갑작스러운 발언에 출연자들을 당황했고 사회자인 지힌 루스토는 서둘러 토론을 중지시키고 방송을 끝내게 된다. 알다시피 케말 아타튀르크는 터키의 국부이자 민족영웅이었고 그를 모독하면 법적인 처벌을 받을 정도로 그에 대한 국민들의 존경심은 대단했다. 그런데 엘하자딘은 토론 중 흥분을 못이겨 위와 같은 발언을 하게 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인해 터키인들은 격분했다. 엘하자딘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숨어다녀야 했고 루스토와 제작자인 아젤 숭구르는 방송에서 사임을 하기까지 했다. 동시에 창조론자들은 이 갑작스러운 사태로 여태껏 유리하게 돌아가던 여론이 순식간에 반전되는 바람에 많은 영향력을 상실해버렸다.
엘하자딘은 이란으로 도망쳐 그뒤 비난의 대상을 케말에서 터키인 전체로 바꿔 이교도인 케말을 옹호하는 터키인들은 신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등의 극단적인 발언을 여러차례 했고 터키정부는 빗발치는 여론에 못이겨 이란에 엘하자딘 신변인도를 요청하기도 했지만 거절당했다.
터키에 대한 증오를 여러차례 드러낸 엘하자딘은 그후 79년 이란 혁명 때 테헤란에서 실종되었는데 수많은 소문이 떠돌아다녔다. 혁명 때의 혼란상황을 틈타 테헤란의 터키교민들이 살해했다는 말부터 터키정부가 납치했다는 말까지 여러 소문들이 있지만 아직 확실하게 밝혀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튼 이날의 사건 이후 터키의 창조론자들은 십여년간 조용하게 지냈다. 대중들을 선동하여 정부를 압박해 진화론 대신 창조론을 공교육에 포함시키겠다는 계획은 흐지부지되었으며 오히려 창조론자들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더욱 강해진 것이다.
하지만 창조론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니었다. 창조론은 87년 오반 만수르라는 남자의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로 접어드는데 바로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과학적인 면을 부각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움직임을 시작한 만수르는 미국 하버드대 토목건축학과를 졸업하여 박사학위를 딴 유학생 출신의 엘리트로 미국에 있는 동안 IRC 등 창조과학계열의 단체들의 활동을 보고 많은 감명을 받아 고국인 터키에서 비슷한 활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는 열역학 제2법칙이나 방사성동위원소 측정법의 오류, 환원불가능한 복잡성 등의 과학적인 면을 창조론과 접합시켜 창조과학이라는 단어를 처음 터키에서 사용했으며 여태껏 신앙적인 면에만 매달리던 창조론자들의 모습과 차별된 태도에 많은 호응을 얻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인 "진화는 어째서 그른가? ; 창조주의 과학적인 설계"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그동안 백년여년 전 이교도 영국인 찰스 다윈에 의해 주장된 진화론은 그 기초적인 의도가 불순하고 그릇된 주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세계에서 막강한 헤게모니를 장악하며 히틀러의 유태인학살과 인종차별, 인간의 존엄성 상실 등의 수많은 부작용을 발생시켰다. 하지만 진화론은 여태까지 과학이라는 허울을 뒤집어 썼기에 아무도 그것을 의심하지 않아 결국 지금과 같은 전쟁과 부도덕의 시대가 오게 된 것이다.
먼저 필자는 지금까지의 창조론자들의 접근방식이 일부 틀렸다는 것에 동의하는 바이다. 신께서는 지극히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방법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창조론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저 신앙적인 것에만 매달리거나 초과학적인 기적 등으로만 창조를 설명하려 한 것이다.
창조론은 엄연히 과학이다. 세상 도처에 신의 창조를 증명하는 증거들이 널려 있으며 신께서는 기적만을 만드시지 않으시고 지극히 합당하며 과학적으로 창조를 하셨다. 진화론자들은 신의 존재가 없다고 미리 결론부터 내려놓고 발견되는 증거들을 자신들의 주장에 끼워맞춤으로서 결국 여기저기 모순점들이 드러나고 이에 반해 창조론은 계속되는 과학의 발전으로 창조야말로 단 하나의 진리였음이 밝혀져 더욱 신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상 만수르의 주장은 당시 미국의 IRC 등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지만 이런 식의 과학적인 접근법은 터키에서는 생소했기에 많은 근본주의자들이 그의 주장을 환영했다. 이제 그들은 대중들에게 창조론이 과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기적 뿐이 아닌 엄연한 과학이라고 설득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 것이다.
만수르의 주장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그는 기존의 창조론자들이 진화론을 이슬람을 파멸시키려는 이교도의 음모라는 음모론과는 다른 진화론은 다름아닌 종교전체를 말살시키려는 공산주의자들의 음모라는 주장을 한 것이다. 그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의 경우 버틀러법이 있어 창조론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여기에 반발한 진화론자들이 스콥스 재판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패소했다는 예시 등을 들며 오직 터키를 비롯한 소수의 국가들만이 진화론에 매달리고 있을 따름이라고 자신의 책에서 주장했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것은 이미 버틀러법은 68년에 위헌판결을 받고 폐지되었다는 것과 스콥스 재판이 당시 미국과 국제사회에 남겼던 영향이었다.
그는 공격의 화살을 사학과 고고학에도 돌렸는데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아의 방주는 터키의 아라랏산에 멈춰섰으니 터키야말로 전세계인류가 퍼져나간 인류의 고향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대홍수가 일어난 사천년 전 이전의 것으로 알려진 유적들과 유물들은 모두 조작이거나 홍수의 와중 운좋게 살아남은 것들이며 따라서 창조론에 따라 과학 뿐 아니라 역사교육도 전면 여기에 맞춰 수정해야 한다는 것이 만수르의 주장이었다.
만수르의 이러한 주장들은 많은 지지를 얻었으나 수십년전보다 높아진 교육수준은 순순히 그의 주장이 대중들에게 먹혀들어가도록 놔두질 않았다. 만수르의 저서가 베스트셀러가 되자 즉시 이스탄불 국립대학의 학생들은 "이성적 과학적 사고 유지 수호 연대"를 발족시켰으며 만수르의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리는 강력한 캠페인을 전개해 나갔다. 또한 74년 문제가 된 방송토론에 출연했던 아케나지 교수는 만수르의 주장을 조목조목 반박하는 책 "무엇이 거짓인가? ; 창조과학의 딜레마"를 발간하여 만수르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한 베스트셀러로 만들었다.
논쟁이 가열되자 만수르는 자신의 주도로 창조론이 과학임을 주장하며 60년대와 같이 창조론을 공교육에 포함시키려는 소송을 준비했지만 90년 1월 1일 새해 첫날, 그는 자신의 집 소파에서 총을 맞아 숨진 채로 발견되었다.
창조론자들은 격분하여 진화론자들의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주장하며 아케나지 교수의 사무실을 항의방문하기도 했지만 두달 뒤 만수르 살해범이 잡힘으로서 사건은 끝나게 된다. 만수르는 진화론자들의 손이 아닌 단순 강도살인사건으로 죽은 것이다.
이 사건 이후 구소련의 붕괴와 경제호황, 쿠르드족 문제 등으로 인해 진화론과 창조론의 대결은 크게 이슈화되지 않았지만 여전히 양측은 관련서적과 잡지들을 발행하며 "학술적인" 논쟁을 벌이고 있는 중이다. 터키의 높아진 교육수준으로 인해 창조론 지지자들은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반도 되지 않는다.
정교분리가 원칙인 터키의 헌법으로 인해 학교에서 창조론을 가르치는 것이 불가능해지자 창조론자들은 최근 학교에 창조관련자료들을 배포하며 교과서에 나오는 진화론을 비판하고 있다. 그들은 인종차별과 나치즘, 공산주의, 테러리즘의 근본사상은 바로 진화론의 적자생존이라고 주장하며 신을 진심으로 믿는 창조론교육이 행해져야만 진정한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외 진화론에 대한 과학적인 반박 등이 담긴 이 자료들은 무료로 학교에 배포되고 있으며 진화론에 부정적인 교사들에게 수업교제로 많이 활용되고 있다.
터키에서 계속 일어난 진화론과 창조론의 논쟁, 그 결말과 대중들의 여론은 어디로 몰릴지 전세계의 눈이 터키로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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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트섬은 위도 305, 경도 325도에 위치한 섬으로서 오래전부터 여러 나라들 간에 분쟁이 일어났던 곳이다. 무역에 알맞은 위치로 인해 수많은 전쟁과 다툼에 휘말렸던 로스트섬의 역사를 살펴보자.
이 섬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최소 기원전 10세기부터 인간이 거주한 것으로 보이는데 켈트족의 일파로 추정되는 섬의 원주민들은 로마에 의해 "적"이라는 의미의 호스틸레스(Hostiles)라고 불렸다. 로마인들은 원주민들의 문화와 생활 등을 기록하는데 별로 관심은 없었지만 그들이 섬 북쪽 해안에 세웠던 거대한 석상에 매우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현재 이 석상은 왼쪽발의 일부만 남아있는 상태이다. 지진에 의해 무너졌다는 말도 있지만 8세기 말, 바이킹의 침략 때 그들이 무너뜨렸다는 설도 있다.
현재 왼쪽발만 남아있는 석상
외부와의 제한적인 교류만을 하던 이 섬을 정식으로 자국영토에 포함시킨 사람은 덴마크의 마그누스 한소인데 그는 당시 준비하던 잉글랜드 침공을 위한 교두보가 필요했고 그리하여 손수 원정대를 이끌고 섬에 상륙했지만 원주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인해 별 소득없이 덴마크로 돌아가야만 했다. 이때 원주민들은 "블랙록"이라는 탈취한 배 한척을 섬의 내륙 깊숙히 옮겨놓았는데 이 배의 잔해는 지금도 남아있으며 당국의 노력으로 상당부분 복원되어 당시의 역사적인 기념물로서 전시되고 있다.
복원된 블랙록
마그누스의 원정실패 이후 한소 왕가는 원주민들로부터 종주권을 인정받고 조공을 받는 것에 만족했지만 마그누스의 증손자인 알바르 한소는 점점 늘어나는 북해무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이 섬을 직접 다스리기로 했다. 이번에도 문제는 원주민들의 저항이었는데 그는 증조부의 실패를 교훈삼아 상인과 장인들을 섬에 이주시키는 방식으로 섬을 서서히 잠식해나갔다. 이때 섬에 이주해간 사람들은 다르마(Dharma)라고 불리며 이들의 이주는 원주민들을 자극시켜 결국 이들과의 전쟁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전쟁은 서로의 영역확정과 지위인정으로 인해 일단락되는 듯 했다. 가끔씩 작은 충돌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서로의 지도자들이 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타협하여 계속 평화가 유지되었다.
2004년, 미국에서 제작된 사극 "로스트"에 나오는 알바르 한소
다르마인 중에서는 색슨계인 벤저민 라이너스가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인 로저 라이너스는 데인 로(Dane Law)에서 덴마크 왕가에 충성하던 귀족으로 북해무역에 관심을 갖고 수십년 전 다르마에 합류했던 사람이었다. 벤저민은 대부분이 스칸디나비아계였던 다르마에서 소외받는 것에 분노하여 원주민들의 지도자였던 리처드 알퍼트와 내통하였다. 벤저민의 배신으로 불시에 기습을 당한 다르마는 대부분이 몰살당했으며 그들의 시체는 커다란 구덩이에 한꺼번에 묻혀졌다. 최근 발굴에서 이때 유골들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덕분에 당시의 복식 밑 갑주에 대한 많은 정보들이 밝혀져 유럽의 리인액터들을 기쁘게 하고있다.
사극 "로스트"에 나오는 리처드 알퍼트
벤저민 라이너스
다르마 축출에는 성공했지만 덴마크의 보복을 홀로 이겨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리처드와 벤저민은 스코틀랜드에 붙기로 했다. 당시 스코틀랜드는 공위상태로 여러명의 후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는데 리처드와 벤저민이 선택한 사람은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위드모어 공작, 찰스였다. 그 역시 북해무역에 관심이 많았고 그것을 통해 많은 이득을 보았으므로 더큰 이익을 줄 수 있는 로스트섬의 영유에 즉각 관심을 표했다. 그리하여 일단 그는 사위인 데즈먼드 흄을 섬에 대표로 보내 섬의 귀속문제를 논하도록 했다.
위드모어
데즈먼드 흄
이때 국제적인 상황은 점점 변하고 있었는데 덴마크는 한소 왕가의 쇠퇴와 스웨덴인들의 반란으로 다르마 사태에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었고 이러한 정세는 리처드와 벤저민의 마음이 변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스코틀랜드에 귀부하기로 했던 말을 번복하여 섬의 독립을 지키고자 하였고 데즈먼드는 아무 소득도 없이 돌아와야만 했다. 여기에 실망하고 분노한 위드모어는 애꿎은 사위만 비난하여 딸부부와의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위드모어는 자신에게 많은 이득을 안겨주고 왕위에 더더욱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될 섬의 장악을 위해 유능하지만 잔혹하기로 악명높은 마틴 키미의 용병대를 섬으로 파견했다. 이들은 명성대로 순식간에 주요 마을들을 장악하고 동시에 무자비한 약탈과 살육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벤저민의 딸인 알렉산드라가 살해당하고 벤저민 자신은 해외로 망명했다. 하지만 리처드가 이끄는 원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했고 게릴라전을 통해 적들을 괴롭혔다. 주요 마을들만 장악하면 금방 끝날 줄 알았던 섬의 장악이 의외로 어렵게 돌아가자 그는 용병대를 이끌고 원주민들이 숨어서 저항하는 숲속으로 들어갔다가 그만 매복에 걸려 전사하고 말았다. 마틴 키미의 전사로 인해 위드모어의 야심을 꺾이고 말았다. 결국 그는 섬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마틴 키미
그뒤 섬은 명목상 덴마크령이었지만 사실상의 독립국으로서 북해무역으로 인해 결성된 한자동맹에도 가입하여 많은 번영을 누렸다. 하지만 한자동맹이 쇠퇴하면서 섬 또한 오랜 침체의 길을 걸었고 나폴레옹 전쟁 때는 영국이 스웨덴을 지원하고 프랑스와 독일 북부해안을 기습하기 위한 해군기지로 사용되었다. 사실상 영국령으로 남아있던 섬은 그뒤 몰타와 같은 시기에 영국군이 철수했지만 영유권문제가 불거지게 된다. 일단 섬은 명목상 덴마크령이었지만 이미 천년 가까이 덴마크의 어떤 간섭도 없이 독자적으로 발전해왔고 또한 섬의 주민 대부분이 혈통과 언어에서 스코틀랜드와 매우 가까운 켈트계였기 때문에 섬의 귀속문제를 놓고 논쟁이 분분하다 결국 EU의 공동관리구역으로 선정되었다.
지금 현재 섬의 인구는 만명이 채 되지 않으며 섬 자체에 별다른 산업은 없고 대신 아름다운 자연풍관으로 인해 관광업이 발달해있다. 군사적으로는 영국해군의 관리를 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북극얼음의 해빙으로 바로 북극해를 거쳐 가는 항로가 개발됨에 따라 새로운 무역항으로서 주목받고 있다. 얼마전 빙하기 때 섬에 살던 것으로 추측되는 북극곰의 화석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이를 기념하여 북극곰이 섬의 마스코트로 정해져 섬의 상징으로 쓰이고 있다. 2004년, 오세아닉815기가 이 섬에 추락하여 한국인 권선화씨가 극적으로 살아난 사건 때문에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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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인도네시아의 플로레스에서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발견이 있었다.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라는 학술적인 종명을 가지고 있는 우리 현생인류와 같은 호모속에 속하는 난쟁이 인류가 발견된 것이다. J.R.R. 톨킨의 소설이자 영화로도 만들어져 우리에게 매우 친숙한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인 프로도가 속한 종족인 "호빗"이 이 난쟁이 인류의 별명으로 정해졌다. 이들의 학술적 종명은 플로레스에서 온 인간이라는 뜻의 "호모 플로레시엔시스(Homo Floresiensis)"이다.
플로레시엔시스와 사피엔스 두개골의 비교
호빗의 발견은 인간도 다양한 형태로 진화할 수 있다는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환경의 영향에 따라 진화는 미처 사람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는데 악어의 경우만 봐도 화석기록만 보면 이족보행을 하거나 다리 대신 지느러미가 달린 종 등 다양한 형태를 갖췄던 것으로 드러난다.
6,500만년 전, 중생대가 끝난 후 신생대를 "포유류의 시대"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종수로만 친다면 조류나 양서류에게 밀리기는 하지만 최소한 인간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제일 익숙하고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동물은 포유류이다. 그중 박쥐는 포유류 중에서 가장 성공했다고 평가받을 수 있는데 이들은 포유류의 전체종수 중 20%를 차지하고 다들 알다시피 유일하게 하늘을 날 수 있다. 박쥐는 박쥐목에 속한 포유류의 총칭인데 하위분류로는 큰박쥐아목(Megachiroptera)과 작은박쥐아목(Microchiroptera)이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초음파를 쓰는 박쥐는 바로 작은박쥐아목이다.
박쥐의 가장 큰 특징은 유일하게 비행능력을 갖춘 포유류라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멸종한 날지 못하는 박쥐가 있었는데 이가 바로 오늘 설명하려고 하는 프레다토르(Predator)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박쥐목에 속하지 않으니 박쥐라고는 할 수 없지만 최소 현생박쥐들과 가장 가까운 관계이며 특히 작은박쥐아목의 자매군이다. 비록 날지는 못해도 완전히 퇴화한 눈 대신 초음파를 이용해 사물을 식별한다는 점만 본다면 영락없는 박쥐이다. 영국 드라마 프라이미벌(Primeval)에 나와 유명해졌다.
프라이미벌에 나왔던 프레다토르
프레다토르 커터리(Predator cutteri)는 2007년 2월 10일, 센트럴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고생물학자 더글러스 헨셜에 의해 발견되어 명명되었다. 커터리라는 종명은 헨셜의 아내인 헬렌의 처녀적 성인 "커터(Cutter)"에서 따온 것이다. 그외 리키(Reeki), 벨모렌시스(Belmorensis) 등의 다른 종들이 더 발견되었지만 아직까지 발견된 다른 속이나 과는 없는 상태이다.
처음 발견되었을 때에는 작은박쥐아목으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협의 끝에 지금은 옛박쥐목(Archaeochiroptera)으로 새로 분류되었다. 과명인 프레다토리드(Predatoriid)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사실상 1과 1속이기 때문에 그냥 속명인 프레다토르라고 더 많이 불리운다.
프레다토르가 유명한 이유는 바로 그 크기와 식생 때문인데 현생박쥐의 경우, 제일 큰 박쥐도 겨우 고양이만하며 육식을 해도 고작 곤충 정도만 잡아먹는데 반해 프레다토르는 제일 작은 종인 벨모렌시스만 해도 2m가 넘고 치아와 턱뼈의 형태를 봐도 알 수 있듯이 직접 다른 동물들을 사냥해서 잡아먹는 맹수들이었기 때문이다.
사냥감을 물어뜯기에 좋은 날카로운 이빨
프레다토르의 두개골을 다른 식육목 동물들과 비교한 사진, A.커터리, B.벨모렌시스
프레다토르는 전체적인 골격의 형태로 볼때 신생대 팔레오세기 때 박쥐와의 공통조상에서 분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 시기의 화석이 부족해 정확히 언제 어떤 형태로 왜 분화되었는지는 의문으로 남아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박쥐화석인 오니코닉테리스(Onychonycteris)가 에오세 초기의 생물이라는 사실을 볼때 어쩌면 프레다토르와 박쥐의 분화시점은 중생대 백악기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른다.
오니코닉테리스 피니(Onychonycteris finneyi)
프레다토르는 사족보행을 했지만 오늘날의 고릴라처럼 앉아있을 때는 양손을 사용할 수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늘고 긴 사지는 치타처럼 단거리를 빠른 속도로 뛸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으며 점프력이 상당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발과 뒷발의 형태로 볼때 영장류와 같은 교목성일 가능성도 있지만 대체적으로 지상에서 생활했을 것이다. 특히 주목할만한 점은 400cc에 이르는 뇌용적인데 이는 침팬지와 비슷한 크기로 비록 지금의 우리들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주 교활하고 영악한 악마같은 포식자의 이미지가 저절로 떠오른다.
이들은 페름기 말에 제일 번성했는데 같은 시기 육식 포유류형 파충류들은 가장 큰 경쟁상대였을 것이다. 특히 그 시대를 주름잡던 고르고놉시드(Gorgonopsid)의 가장 큰 라이벌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물론 고르고놉스(Gorgonops)나 리카이놉스(Lycaenops)같은 대형 고르고놉시드의 상대는 못되었을테지만 아르크토그나투스(Arctognathus)나 아르크톱스(Arctops)같은 비교적 소형 고르고놉시드는 프레다토르의 사냥감이 되기도 했을 것이다.
페름기 말을 지배했던 육식파충류 고르고놉시드
비록 이들의 영악함을 말해주는 큰 뇌용적과 빠르게 달릴 수 있고 나무도 자유자재로 탈 수 있는 사지, 강력한 턱과 날카로운 이빨 등 이들은 당시의 환경에 최적으로 적응했지만 당시 지구상 모든 생물의 95%를 전멸시킨 "대멸종의 어머니" 페름기 대멸종의 마수로부터는 자유롭지 못했다. 프레다토르의 화석은 경쟁상대였던 고르고놉시드와 함께 페름기 위의 지층에서는 더이상 나오지 않으며 이는 아무리 강력하고 똑똑하다고 하더라도 결국 자연의 무서운 힘 앞에서는 이들도 어쩔 수 없는 연약한 동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고르고놉시드에 묻혀 프레다토르는 별로 잘 주목받지 못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을 유명하게 만들어준 것은 바로 위에서도 언급했던 영국드라마 프라이미벌로 시즌 1에 나오는 프레다토르와 고르고놉시드의 대결은 이 드라마 최고의 명장면으로 뽑히고 있다.
1859년은 보통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출판한 해라고 알려져 있다. 다윈과 동시에 자연선택을 통한 진화의 메커니즘을 발견한 알프레드 월러스는 같은 해 동남아에서 연구활동 중이었는데 그러던 중 술라웨시에서 특이한 행동을 하는 개미를 발견하게 된다. 이 개미는 같은 무리의 다른 개미들과 달리 마치 술취한 듯 비틀거리며 아무데나 다니고 그러다가 지상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나뭇잎 뒷쪽을 꽉 깨문체 죽어버린다. 당시에는 왜 이 개미들이 이런 특이행동을 보이는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2011년 5월 8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의 공충학자인 데이빗 휴스가 개미들의 특이행동에 대한 비밀을 풀어낸 논문을 발간하여 많은 화제를 모았다. 이 개미들은 다름아닌 공팡이의 조종을 받아 곰팡이가 원하는대로 행동하는 "좀비"들이었던 것이다.
이 곰팡이에 감염된 개미들은 근육이 괴사하고 중추신경계가 손상을 입으면서 질서정연하게 다니는 다른 개미들과 정신을 못차리고 비틀거리게 되고 마침내 체내의 곰팡이가 번식할 시기가 되면 곰팡이가 좋아하는 습도와 환경을 가진 지상에서 25cm 정도 떨어진 나뭇잎 뒷쪽을 문체로 죽게 되는 것이다. 곰팡이는 이렇게 사망한 개미의 사체를 자양분으로 삼아 위의 사진과 같이 자라나게 되고 마침내 포자를 터뜨려 공기 중으로 흩뿌려 다른 개미들을 감염시키게 되는 것이다. 일부 곰팡이종은 감염된 개미가 다른 개미들을 깨물게 조종하여 물린 개미에게 감염되는 방법을 쓰기도 한다.
감염된 개미가 잎을 물게 되면 그 자리에는 아령모양의 문 자국이 생기는데 "최초의 박쥐와 고래"인 오닉코닉테리스(Onychonicteris)와 암불로케투스(Ambulocetus)가 발견되어 유명해진 독일의 메셀 피트에서 이 자국이 나있는 잎사귀 화석이 보고되어 이 곰팡이의 생태가 최소 에오세기 때부터 존재했다는 추측이 가능하게 한다.
이 곰팡이는 관찰과 연구의 역사가 그리 오래되지 않아 현재로서는 개미와 일부 벌레들만을 숙주로 삼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어쩌면 인간과 같은 더큰 생물들을 숙주로 삼아 번식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영국 센트럴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고생물학자 더글러스 헨셜은 페름기 대멸종 기간에 발견된 곰팡이 포자의 대부분이 바로 이 곰팡이와 포자와 매우 유사하다면서 이 곰팡이에 의해 페름기 대멸종이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난 2월 10일 사이언스지에 게제한 논문에서 밝혔다.
페름기 대멸종 사건은 지구에서 일어났던 다섯번의 대멸종 중 가장 규모가 컸던 사건으로 이때 지구상 생물의 95%가 멸종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멸종의 추세와는 반대로 번성에 번성을 거듭한 생물이 있었는데 바로 곰팡이들이었다. 페름기 대멸종이 진행되던 시기의 지층에서는 예외없이 다른 시대보다 훨씬 많은 어마어마한 양의 곰팡이 포자화석들이 발견되는데 여태까지의 일반적인 견해는 대멸종이 진행되면서 곳곳에 죽어서 썩어가는 수많은 사체들이 있었을테니 곰팡이들이 이를 양분으로 삼아 번성했을 것이라는 예상이었으나 헨셜은 그의 논문에서 포자화석들을 분석한 결과 대부분이 좀비 개미를 만드는 곰팡이의 근연종들로 밝혀졌다면서 이 화석 곰팡이들에게 페름기를 끝냈다는 의미인 페르무스 테르미나토르(Permus Terminator)라는 학명을 붙였다. 말그대로 "페름기 종결자"인 것이다.
이 논문에 따르면 처음 이 좀비 곰팡이들은 지금과 같이 일부 절지류들만을 숙주로 삼는 생태만을 지녔으나 어느 순간 지상척추동물의 한종을 숙주로 만들 수 있는 돌연변이종이 출현했을 것이라 예측했다. 숙주가 매우 제한된 다른 유사근연종들에 비해 새로운 생태학적 지위(ecological niche)를 획득한 이 돌연변이종은 자연선택을 통해 급격히 번성했고 그에따라 다른 축추동물들을 숙주로 삼는 능력을 가진 종들이 분화해갔을 것이다. 하지만 생태계에서는 어느 한 종이 무제한으로 번성하도록 놔두지 않는다. 좀비 곰팡이의 지나친 번성이란 곧 숙주의 감소를 뜻했고 또한 이들은 자실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다른 곰팡이에 비해 더 많은 산소를 소비하므로 대기 중의 산소농도도 희박해져갔고 이것은 숙주의 더욱 빠른 감소를 의미했다. 결국 짧은 번성기를 지나 이 곰팡이들은 급격한 쇠퇴를 맞이하게 되었고 더욱이 척추동물들이 곰팡이의 균사에 저항하는 효소분비를 진화시키며 더더욱 도태되어 마침내 원래대로 일부 절지류들만을 감염시키는 곰팡이들만 남게 되었다는 것이 이 논문의 요지다.
페름기 대멸종 이후에도 몇번의 대멸종이 더 있었지만 그 원인은 좀비 곰팡이 때문이 아니었다. 희안하게도 페름기 이후 이 좀비 곰팡이들은 수억년째 벌레들만을 숙주로 삼았을 뿐 대형동물들을 감염시키는 능력을 두번다시 진화시키지 않았다. 균사에 저항하는 효소가 수억년 째 지상척추동물들을 지켜오고 있는데다 어쩌면 지금과 같이 일부 벌레만을 감염시키는 능력이 종의 유지에 가장 최선의 방법인지도 모른다. 굵고 짧은 것보다 가늘고 긴 것을 선택하는 생존방식이 생태계에서 도태되지 않고 여태까지 살아남을 수 있는 비결인 것일까?
하지만 주의해야한다. 곰팡이의 번식력은 상상을 초월하는데다 언제든지 균사에 저항하는 효소마저 무력화시키고 인간과 같은 대형동물들을 숙주로 희생시켜 말그대로 좀비들로 가득찬 세상을 만들 수 있는 무시무시한 돌연변이종이 생겨날 수도 있으니까. 영화에서는 좀비들에게 물리지 않으면 감염되지 않지만 이 좀비 곰팡이들은 공기 중의 포자를 통해 체내에 들어오기 때문에 만약 인간을 숙주로 삼는 돌연변이종이 발생한다면 공기를 막지 않는 한 전 인류가 좀비가 되어버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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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서류의 대량멸종을 불러온 연가시, 인간에게도 기생할까?
영화 "연가시"가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흥행에 성공했다. 이미 영화가 나오기전 인터넷을 통해 유명해진 연가시는 메뚜기나 귀뚜라미, 사마귀 등의 몸속에 들어가 기생하며 번식기가 되면 숙주의 행동을 조종하여 물속에 뛰어들게 만든 뒤 유유자적 빠져나와 알을 낳고 죽는다.
영화 연가시
연가시는 특정 곤충들에게만 기생할 수 있도록 진화했기 때문에 사람에게는 기생하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라도 인간이 속한 척추동물에게 기생하여 목(order) 단위의 멸종을 일으킨 연가시가 존재한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연가시"는 우리가 아는 "연가시(Gordius aquaticus)"와 같은 목에 속할 뿐이고 또한 단일 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분류군에 기생하는 모든 종들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 모두는 "옛연가시과(Archaeogordiidae)"에 속해있다.
트라이아스기 때 화석으로 남은 "연가시"
데본기 때 틱타알릭이나 아칸토스테가 등의 등장으로 척추동물들이 뭍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최근 분류학의 추세가 린네식 분류법 보다는 분기도를 중심으로 돌아가면서 "양서류(amphibian)"보다는 "사지류(tetrapod)"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쓰기 시작했지만 양서류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그리고 석탄기가 양서류의 전성시대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지구상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양서류들이 지상을 지배하던 시대였다.
현존하는 양서류들은 아무리 종수가 많아도 주요분류군이 셋 밖에 없지만 데본기부터 중생대 중반까지는 정말로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양서류들이 존재했었다. 그중 석탄기 초기에 등장한 템노스폰딜목(Temnospondyli)은 현존하지 않는 양서류들 중 가장 오랫동안 유지되고 번성한 분류군으로 고생물을 다루는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양서류의 대부분이 이들일 정도이다.
지상을 지배하던 양서류들은 양막류(Amniote)가 등장하면서부터 점점 뭍에서의 지배권을 잃어갔으나 물가는 여전히 이들의 지배구역이었다. 그중 제일 번성한 것이 바로 템노스폰딜목으로 페름기 대멸종 때 다른 양서류들이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몰락한 것을 틈타 거의 대부분의 물가를 접수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트라이아스기 대멸종 때 잠깐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하고는 백악기 때까지 번성했는데 미스테리하게도 너무나 갑작스러운 멸종의 길을 걷고 말았다.
템노스폰딜목의 최후를 장식한 쿨라수쿠스(Koolasuchus)
이 갑작스러운 템노스폰딜목의 멸종은 옛연가시과의 등장과 그 궤를 같이 한다. 분자생물학적인 연구결과 쥐라기 무렵 현생 연가시와의 공동조상에서 분리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 옛연가시과는 바로 템노스폰딜목 양서류를 숙주로 삼는 기생충들이었다. 옛연가시과나 템노스폰딜목이나 모두 고생물이 되었기 때문에 이들이 왜 정확히 템노스폰딜목만을 숙주로 삼으며 생태는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다(이는 현존하는 연가시들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숙주를 죽음으로 내모는 연가시 특유의 치명적인 생태는 옛연가시과들도 마찬가지여서 번성하던 템노스폰딜목 양서류들은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되었고 곧이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연가시"가 빠져나오고 있는 순간 매몰된 희귀한 화석
위의 화석은 대단히 희귀한 케이스로 옛연가시가 숙주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순간이 기록되어 있다. 해당 옛연가시에게는 재수없는 일이겠으나 빠져 나오고 있는 순간 토사에 매몰되어 화석화되는 바람에 학자들에게 귀한 연구과제로 쓰이고 있다.
고생물이라 이 옛연가시들의 생태를 알기는 쉽지 않지만 템노스폰딜목 양서류들이 대부분 수생이나 반수생 동물이라는 점과 옛연가시들과 자매군인 현생연가시들이 물에 알을 낳는다는 사실을 종합해보면 두가지의 가설이 있는데 하나는 옛연가시의 알이나 유충을 수생곤충이나 물고기들이 먼저 섭취하고 그것을 다시 최종숙주인 템노스폰딜류가 잡아먹어 기생한다는 것과 유충이 직접 구강이나 항문으로 숙주에게 직접 침투한다는 설이 그것이다. 독일의 메셀 피트에서 발견된 화석이 옛연가시의 유충이냐 아니냐에 따라 발표는 달라질 것이다.
기생상태가 그대로 나타나있는 화석. 복부를 내장대신 가득 채우고 있는 연가시가 보인다
기본적인 생태는 현생 연가시들과 비슷할 것으로 보이는데 일단 숙주의 몸속에 들어오면 이들은 내장에 흡착하여 영양분을 빨아먹은 뒤 산란기가 되면 항문을 통해 몸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추측된다. 위의 사진에서 나타나 듯 대부분의 기생상태를 보여주는 화석들은 내장이 거의 사라졌을 정도로 괴사한 상태기 때문에 옛연가시가 빠져나가면 숙주는 그 쇼크로 인해 사망했을 것이다.
쥐라기 후기에 처음 등장한 이들 옛연가시과는 점점 다양하게 분화해가며 더더욱 많은 템노스폰딜목 양서류들을 감염시키게 되었고 백악기 초에 이르러서는 거의 모든 템노스폰딜목이 옛연가시과의 숙주로 전락했다. 화석기록을 보면 옛연가시과의 번성과 함께 템노스폰딜목의 꾸준한 쇠퇴가 눈에 띈다.
결국 쿨라수쿠스를 마지막으로 한시대를 풍미했던 템노스폰딜목 양서류들은 멸종을 맞이하게 되었고 이는 숙주들이 사라진 옛연가시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템노스폰딜목의 멸종은 다른 생물들에게 기회가 되었는데 그동안 양서류들로 인해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던 악어들이 물가의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고 양서류 내에서 비주류였던 개구리와 도롱뇽의 조상들이 입지를 넓혀 양서류 사회에서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하지만 개구리와 도롱뇽들은 이전의 대형양서류들과 같이 다시는 물가의 지배권을 되찾지 못했다.
옛연가시과는 현생 연가시들과는 다르다. 하지만 이들의 비슷한 생태를 볼때 이들의 공동조상도 흡사한 생태를 가졌을 것이 확실시되고 있으며 그렇다면 인간을 비롯한 척추동물을 새롭게 숙주로 삼을 새로운 연가시가 탄생하지 말란 법은 없다. 지금 당장 그런 연가시가 출현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영국의 센트럴 메트로폴리탄 대학의 더글라스 헨셜 교수가 발표한 논문에는 그럴 가능성을 시사하는 내용이 있다. 인간은 뇌에서 H2O라는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되어 체내에 수분이 부족하면 갈증을 일으켜 물을 마시게 하는데 연가시와 가까운 종인 아쿠토고르디우스(Acutogordius)는 피부샘에서 H1이라는 물질을 분비한다. 이것이 인간 체내의 단백질 1O와 결합하게 되면 H2O가 합성되는데 만약 이러한 방법으로 H2O가 계속 증가하면 실제로는 수분이 부족한 상태가 아닌데도 갈증이 계속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 연가시가 마냥 허구만은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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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나름 괜찮은 떡밥들이었나요?ㅠㅠ
첫댓글 뉴질랜드하고 오스트레일리아하고 통일 떡밥
기대하고 있었는데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