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삼한
삼한지역 4천리.
기록에 삼한 지역은 4천리라고 하여 해안선을 따라 거리 계산도 해 보았는데요.
청천강에서 원산까지 대략 4000리 되는 것 같더군요.
이는 학계의 정의대로 하면 낙랑, 대방, 예지역이 한 지역에 포함되어 버립니다.
4천리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중국사람들이) 한 지역의 총 거리를 말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카론은 지리 개념을 면이 아닌 선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은 도시들을 중심으로 선을 연결하여 거리를 계산해 보았고...
그림에 나타낸 내용은 포항에서 역으로 거리를 계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온조의 십제가 연결이 되어 요동반도까지 삼한 지역에 편입된 것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온조가 정착한 곳의 동쪽에 낙랑이 있었다고 합니다.
카론은 최리의 낙랑국으로 생각합니다.
온조와 최리가 다퉜습니다.
최리가 말갈과 함께 온조를 협공하였고, 온조가 위험에 처하게 됩니다.
온조는 마한에게 백리 땅을 빌려 달라 간청하였고, 백성을 이주시킵니다.
온조의 2차(일부) 이주인 것입니다.
그런데 온조가 마한을 집어 삼키면서 갑자기 세력이 커집니다.
온조와 다투던 최리는 다급해져서 고구려와 혼인 동맹을 맺었는데 오히려 고구려에게 멸망당하고 맙니다.
시기별로 기록을 정리해보니 이런 내용의 이야기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위 내용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도록 위치를 비정하였더니 그림처럼 된 것입니다.
온조가 마한에게 빌린 백리.
온조 기록을 보면 마한에게 백리(40km)땅을 빌렸다고 합니다.
그곳은 현 한강 남쪽으로 강동에서 강서까지가 100리(40km) 지역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마한 위에 진한이 있는 이유
마한의 경계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온조가 한강 이남으로 자리를 잡았다면 이곳이 마한의 경계에 해당하겠더군요.
다른 곳에 이주해 온 사람들을 굳이 도읍에 둘 이유가 없으니까요.
기록을 보면 외부에서 온 사람들에게 외부의 땅을 주고 지키라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진한을 마한 위에 두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진행형입니다)
한수 북쪽에 있는 진한은 진한의 여러 이름 중에 하나인 신라로 생각하고 있구요.
2. 대해
며칠전에 TV에서 잠비아 방궤글루 기행을 방영했는데요.
아래 그림을 보고 호수라는 생각이 드십니까?
잠비아는 아프리카 내륙에 있는 나라입니다.
바다가 없어야 하지만 이곳에는 바다가 있고, 이곳 사람들도 바다라고 부른답니다.
여행자가 짜지 않은 바다라고 하던데....
아무튼 모터 모트를 타고 3시간을 가면 호수 중간에 있는 섬에 갈 수 있다고 하는 군요.
파도가 치는 것이 인상적인데요.
큰 호수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이 호수의 크기는 비교적 작은 편에 속합니다.
직경이 80km 밖에 안되거든요.
카론이 대해가 있었다고 표시한 곳은 이보다 4배나 더 큰 호수입니다.
3. 중국사람들의 지리 인식
카론은 지리를 설명하는 기록을 보면서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시대별로 중국인들의 지리 인식을 고려해야 합니다.
전국시대에는 장성 밖이 미지의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위만 조선 멸망시킨 후 그 너머를 보게 됩니다.
숙신의 땅에 대해가 있구요.
동옥저가 대해와 닿구요.
예는 내용이 딱히 없구요.
삼한은 한반도 지역이구요.
백지로 그림을 그린 후에 다시 지도를 입혔는데요.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설명을 하고 있으며, 최대한의 지리 인식입니다.
그 너머에 대해서는 아직 모른다는 거죠.
지역의 크기
지역을 구분할 때 크기는 얼추 비슷해야 합니다.
한 지역이 4천리입니다.
그렇다면 예의 지역은 어느 정도 되어야 할까요?
최소한의 크기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리적으로 사람이 많이 사는지 여부도 확인을 해야 합니다.
예 지역은 아무리 넓어도 사람이 많이 살지 못합니다.
사하라 사막이 아무리 넓어도 인구는 얼마 안되잖아요.
기록을 잘 살펴보세요.
예의 북쪽에 고구려와 옥저가 있고, 조선의 동쪽에 예가 있다고 합니다.
조선은 구려 + 옥저+ 예로 되어 있다고 하므로 낙랑군에 옥저와 예의 일부가 포함이 된 것입니다.
카론은 낙랑군에 포함된 옥저를 남옥저로 봤고, 고구려가 차지한 옥저 지역을 북옥저로 생각한 것입니다.
남옥저와 북옥저 그리고 동옥저까지 생각하면 옥저 지역도 상당히 넓습니다.
4. 옥저의 구분
글쓴이가 남옥저, 북옥저, 동옥저로 나눈 이유는 옥저 지역을 크게 3등분하여 설명을 한 것입니다.
남옥저는 낙랑군에 점령당한 지역이고, 북옥저는 고구려에 점령당한 지역, 동옥저는 아무에게도 속하지 않은 지역.
그리고 강의 형태를 보면 옥저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5. 단단대령 위치
단단대령 동쪽에 있는 7개 현을 낙랑동부도위 영동 7현이라고 하는데요.
영동7현 중에 불이현이 있어요.
그런데 국내성을 불이현이라고 한다네요.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국내성도 단단대령 동쪽에 있다고 봐야 하잖아요.
단단대령은 스모킹 건이 없어서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지만 위치를 특정하지 않아도 국내성을 설명하는데 전혀 지장이 없습니다.
단단대령 동쪽에 국내성이 있다.
6. 낙랑에서 시작되는 거리 문제
거리는 기준점이 명확해야 합니다.
시작점과 끝점, 그리고 중간 지점에 대한 기록만 있다면 더 이상 왈가왈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현 기록의 문제는 너무 장거리에, 중간지점에 대한 내용은 없고, 기록마다 거리가 다르다는 점입니다.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상황이므로 확정하기 힘든 내용들은 일단 내려놓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동과 같이 특정지역에서 시작되는 거리 개념은 충분히 설명이 가능합니다.
일단 거리가 짧기 때문입니다.
카론이 생각하는 요동에서는 현토군과의 거리가 나옵니다.
요동에서 500리 떨어진 곳에 국내성이 있다고 하여 해당 지점을 추적한 것입니다.
동황성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동에서 천리밖에 고구려가 있다고 하여 당시 도읍을 찾아 봤더니 동황성이 나온 것입니다.
거리 문제는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이고,
위치를 파악하면 기록에 나와있는 역사를 해석하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부분은 가급적 배제하고 확실한 부분만 먼저 정리를 했습니다.
그리고 기록에 나오는 문구를 해석하면서 보완을 하고 있습니다.
7. 집안시와 부여, 경주 비교
그림만 보셔도 금방 아실 겁니다.
백제와 신라의 도읍도 비교적 방어에 용의한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하지만 집안시와는 많이 다르지요.
왕궁 주변에 약간의 평야도 있고, 무엇보다도 주변에 광활한 평야가 있다는 점입니다.
지도는 같은 축적이며, 노란색 지역을 보세요.
집안시 주변은 없잖아요.
첫댓글 추론에 의한 추론이 너무 많네요. 가능성에 의한 추가가능성. 이랄까요 항목별로 왜 문제인지 다시 글을 준비해보겠습니다. / 그리고 당시 고구려 지형문제는 삼국지등에 산많고 땅적고 살기힘들다고 특히 구구절절 기록되어있어서 매칭자체에는 무리가 없는데 자꾸 평야지역이 없다는 이야기만 반복하는 까닭을 모르겠네요.
굳이 글 준비 안하셔도 됩니다. 이미 위 내용에 대해 논의가 있었고 보실 분들 다 보셨거든요. 키레네님께 예전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고 참고하시라고 적은 글입니다. / 글을 보면서 인문학에 대한 기본 소양이 부족하신 분으로 생각합니다. 위 내용을 이해하시려면 먼저 지리와 농사관련 지식등을 공부하신 후에 토론에 참여해 주셨으면 합니다.
구글 지도 지형입니다. 살펴보세요. 조양지역 산 많아요. 계곡이구요. 좋은 밭 많지 않아요.그럼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있는 땅은 됩니다.
@카론 물론 조양이 기록상 묘사에 부합될수도 있죠 조양은 부합되지않는다는말 한적이 없습니다 다만 집안이 국내성지역이 될수없다는 카론님의 이유가 비논리적이라는 말을 하는겁니다. 집안이어도 기록상 표현에 매칭이 된다는 얘기를 하는것이며 문제점과 카론님이 클리어해야될 문제점들을 최근글에서 언급했으나.......... 그리고 답글은 카론님을 위해 준비하는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카론님도 답글안하셔도되나 하신다면 근거과 추론과정이 합리적인 답글 기대하겠습니다
@키레네 준비를 하시더라도 제글 아래로 답 글 형식으로는 하지 말아 주세요. 집안 지역은 기록에 나와있는 음력 10월에 사람들이 나라 동쪽으로 몰려가 동명, 동맹제를 지냈던 대혈이 있는 곳으로 말씀을 드렸고요. 국내성으로 적당하지 않다는 내용은 그 지역이 협소하고, 산지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농사를 지어도 수확량이 얼마 안된다는 논리로 작성된 것입니다. 비논리적이라고 말씀하신다면 이 부분에 대한 반론을 해 주세요. 식량을 옮긴 부분은 좌식자를 통해 논리를 전달해 드렸잖아요. 모두 합리적인 논리입니다.
@카론 삼국지무렵에 고구려는 이미 조양지역일대부터 압록강중하류일대까지 정복한 큰나라였군요? 님의 지도에는 예땅이라 되있고 예땅에 이천리쯤 가서 왕릉을 조성한다라....어느기록으로 이를 뒷받침할수있을까요? 동맹? 수혈? 결국 집안시일대에서 천제도지내고 수백년간 무덤도조성하네요 카론님도 인정되죠? 광개토대왕비나 기타 고구려비도 계속 있네요 평지성과 주변 방어산성도 주변에 여럿두고요. 그러면서 정확히 말씀하신대로 협소. 산지. 적은 수확량이기때문에 국내성이 집안일대임을 부인하기 힘든겁니다. 기록이 분명히 험한산속. 골짜기. 밭이적고 먹을게적고..그렇게 기록되었죠? 기록 지형 유적 3박자 그대로 매칭.
@키레네 카론님이 그대로 왜 국내인지 정답을 말씀하신거고 물론 고구려는 생산지역과 무역거점확보를 위해 옥저,예,부여,낙랑 지역으로 계속진출을 시도하게되며 역사발전을 이루게되는것이죠. 따라서 카론님은 조양이 수도일때 발생하는 비논리를 보강하셔야됩니다 왜조양에는 고구려왕릉이나 고구려식 성곽이나 금석문이 집중되지않는가. 왜 2000리가까이나 멀리가서 무덤을 만드나... 풍수같은 근거없든 추정말고 명확한 사실을 말이죠. 그리고 평양에서 국내의 거리가 17개역 670리인가?..로 기록되있는데 평양 조양....그냥봐도 2000리이상되죠?
@키레네 삼국지등에 고구려 장례풍습은 멀리 천수백리를 시신을 가져가 안치한다거나 하는식의 기록 한줄만 있었어도.. 안타깝네요. 정리글은 이와무관하게 제 개인적의사대로준비됩니다
고고학도 전혀 참고하지 않는 분께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듯 싶습니다. 고고학을 조금이라도 알면 옥저와 숙신을 저기다 비정할 수가 없을텐데...
카론 역시 인문학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분에게 토론을 기대하진 않습니다.
푸핫 말이 되는 말씀을 하세요. 자기 생각에만 의거해서 맘대로 지리를 옮겨놓는 것도 인문학입니까? 말을 장난으로 받을 생각마시고, 진짜 진지하게 고고학도 공부해보고, 다양하게 접근해본 다음에 집안이 국내성이 아니라고 주장해 보세요. 정식 논문을 써보시든지.
되게 웃기는게, 저도 학계에 적잖이 비판감을 갖고 있는 이제 막 시작하는 고대사 역사학도입니다만, 이곳 카페에서 님이든 덕림석님이든 재야를 자처하는 일부 분들을 보면 학계를 무조건 식민사학이라고 치부하고 발을 들일 생각을 전혀 안하더군요. 근데 독재를 깨려면 그 체제 내로 들어가서 깨야지, 밖에서 뭘 껄쩍대면 뭐 되는게 있습니까? 전두환 독재를 해외 교민들이 깼던가요? '체제 내로의 장정'이란 말은 들어보셨는지요? 마오쩌둥과 중국공산당(구좌파)들의 용어가 아니라, 68혁명 시기 유럽 신좌파의 용어입니다.
@신농 새내기 역사학도라면 다양한 인문학에 대해 공부하시길 바래요. 외국에선 역사학자를 인문학의 토탈패키지라고 해서 존경을 하거든요. 모르면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질 못해요. 그리고 선입견도 조심하세요. 카론은 식민사학이란 말은 입에 꺼낸 적이 없어요. 현재의 역사인식, 지리인식이 조선시대때 상당수 만들어졌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카론도 조선시대 기록들이 머리 속에 있었다면 쉽게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다행히 텅 비어 있어서, 알고 있던 인문학을 적용하여 지금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3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 행정지도를 100번 이상 그렸는데요. 아직도 이해 못하는 지역이 많아요.
@신농 카론은 외국에서 연구하는 기본에 충실하여 독서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지리, 기후등)에서... 뭐 먹고 살았을까? 뭐 입고 살았을까? 뭐 하고 살았을까? 전쟁은 어떻게 벌어졌지? 이것이 생각하는 전부입니다. 기록을 보고, 지리와 환경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잘 정리하는 것이 역사 아닌가요? 카론이 제기하고 있는 문제는 지리와 환경 분야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록 정도에 불과합니다. 아주 쉬운 내용입니다. / 논문은 학위에 대한 욕심이 없어서 안합니다. 연구는 젊은 사람이 하는 거죠. 카론은 딱 이정도 포인트만 말씀드리고 있어요.
남 걱정은 안하셔도 될듯요. 나이 어린 사람은 외골수인 경우는 드물어서 그래도 다양한 것들을 흡수할 수 있지만, 이미 자신의 것이 옳다고 경도된 경우에는 어찌할 바가 없지요. 왜 조선시대에 지리인식이 '만들어졌다'고 보십니까? 조선시대 사람들, 물론 고대사 지리를 잘 모르는 경우도 있긴 했지요. 하지만 그 한계를 넘어서는 연구가 바로 근대 고고학 등의 연구방법론들이 들어와서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적 유물을 통해 잘 정리하는 것이 역사 아닌가요?'라고 하시면서 정작 고고학 연구를 인용하신 적이 없는걸로 아는데요. 학계 그 누구도 옥저를 그런데 비정하지 않는답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공부가 정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질만한 것인지 아닌지 생각해보라는 얘깁니다. 논문 투고 얘기했던 것도, 그렇게 받아들여질 만한 공부를 하고 있는건지 스스로 점검하라는 뜻이고요(학위 같은게 중요한게 아니라-어차피 학위논문과 학술지논문도 구분 못하시는 것 같지만). 논문 투고, 물론 학계의 편협한 벽이 없는건 아니지만, 요즘에는 그래도 제도권 아닌 사람들도 투고할 수 있는 곳이 찾아보면 전혀 없지도 않습니다.
@신농 옥저 지역이 엉뚱한 곳에 있다고요? 앞으로 엉뚱한 곳에 비정하시는 분들 많이 나올 것이니 걱정하지 마세요. 근대 고고학의 연구방법론이라면 발굴이겠지죠. 카론은 현재 유적쪽은 다루지 않고 있어요. 지리와 환경쪽에 대한 연구가 전혀 없어서 그 부분부터 공부를 하고 있거든요. 인문학을 조금이라도 공부한 사람은 산 속에 도시를 무조건 집어 넣질 않아요. 스스로 납득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학계에서 정리해 주는 유물관련 자료는 계속 수집하고 있고, 공부하는데 도움을 많이 받고 있어요. 지리와 환경을 이해하게 되면 유물에 대한 해석도 조금씩 달라질 수가 있다는 점 밝히고요.
@신농 전공자들도 읽지 않는 학술지 논문에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차라리 동영상을 제작해서 배포하는 것이 낫죠. 음모론쪽으로 접근해서 시작하면 부담없이 잘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논리가 이해되면 의심이 생기게 되고, 차츰 대중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말 나온김에 심심풀이로 해볼까나....
카론/ 지적을 듣고 말고는 본인 자유이니 제가 왈가왈부할 바가 아니고, 저도 이 이상 말섞고 싶지 않네요. 고고학 공부를 미루겠다는 것도 변명에 불과하고, 논문이 전공자들도 안 읽는다는 말도 안되는 소릴 하면서 동영상 배포니 음모론이니 이야기하는데 무슨 이야기가 더 필요한지? 다만 하나 명심할 것은 이 반응이 저만의 반응이 아니라, 양식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만한 반응이라는 점 정도는 기억해두세요. 이만.
오는 말이 좋지 않으니 가는 말이 좋지 않는 거죠. 그래서 의미없이 서로 지적질만 하고, 디스만 하고 있는 겁니다. / 카론이 주장하는 내용은 현재 학계에서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기에 음모론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쪽 범주에서 놀수 밖에 없는 현실인거죠. 그래서 음모론쪽에 강점인 동영상을 얘기한 겁니다. 혹시 알아요? 상대성 이론도 오랜시간이 걸려 인정을 받았잖아요. / 그리고 카론의 구라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요. 구라는 일본어로 거짓말입니다. 신농님은 지금 카론의 거짓말을 읽고 있는 겁니다. 역설로 받아들일 지는 자유구요.
@카론 카론님. 평양은 현 평양으로 인정하신다면 그렇게 수백년간 중요한 풍수명당 집안시 무덤축조 평양으로 이사하자 왜끊깁니까... 그리고 평양과 조양과의 거리 어떻게 하실겁니까?
지적질? 토론에서 지적을 받아들일 생각이 없는 자가 무슨 토론을 한단 말인가? 참나 원...
저는 카페 가입한지는 얼마안되었지만, 예전의 카론님의 글들을 보면서 정말 대단한 정성이구나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지도 그리기도 힘드실텐데...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다.' 라고 말씀하신 '초록불'님의 글처럼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좋은 토론에 몇몇 인신공격성 글이 좀 보여 안타깝지만, 카론님의 이론은 언제나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론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