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종, 내안의 사막, 33×53㎝, 종이에 먹과 채색, 2021.
■ 파리의 日·中 미술 두 거점 - 上
19세기 日 판화 ‘우키요에’소개
유럽 인상주의 화가에 큰 영향
‘요미우리 갤러리’세운뒤 가속화
中은 붉은 건물 ‘홍루’가 중심
청나라 혼란기 틈타 대거 반출
40여년에 걸쳐 국보급 팔려나가
얼마 전 원로 화가 이영수 선생께서 새로 꾸민 한국민화집을 보내왔다. 그이가 오랜 세월에 걸쳐 집념 있게 모으고 묶어낸 우리나라의 대형 민화집이 새로 출간된 것이다(통간은 40권이라고 했다). 책을 펼치면서 한 개인이 이 엄청난 일을 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화의 가치를 처음 발견한 것은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1889∼1961)였다. 그는 1904년 ‘공예’라는 잡지에 기고한 ‘불(가)사의한 조선민화’란 글에서 “조선의 이름없는 화인이 그린 ‘까치 호랑이’ 그림이 일본의 국보급 그림을 능가한다”고 써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한 눈 밝은 이의 글이 계기가 돼 일본인의 대대적인 조선 민화 수집 붐이 일었고 우리의 무관심 속에 빼어난 그림이 셀 수 없이 일본으로 흘러들어가 일본 그림으로 둔갑하게 된 것이다.
그 후 국내에서도 뒤늦게 민화의 예술적 가치를 재인식, 재평가하는 작업이 일어났는데 이 선생과 같이 수십 년에 걸쳐 집념과 열정을 쏟아 수집하고, 책자를 만드는 일을 하는 이도 생겨났다. “저는 독립운동하는 심정으로 야나기가 가져간 우리 민화를 되찾아오고 있습니다.” 40여 년 세월을 미국과 일본 등지까지 헤매며 흩어진 민화를 모아온 그이의 결연한 의지가 담긴 말이다.
국파산하재(國破山河在), 나라는 망해도 산천만은 그대로. 두보(杜甫)의 춘망(春望)에 나오는 시구다.
그런데 나라가 망하면 산천은 그대로일지 몰라도 문화재는 산지사방 흩어지는 운명을 못 면한다. 역사가 오랜 민족이나 나라일수록 그 문화재가 겪는 수난의 운명 또한 가혹해 유민(流民)처럼 떠돌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경우 청조가 망하고 전쟁과 혼란의 시기에 접어들면서 문화재 수난의 역사도 함께 시작됐다. 우리나라 역시 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고려 불화나 청자, 백자를 비롯한 많은 미술품과 문화재들이 고국을 떠나 일본이나 서구 쪽으로 흩어지게 된다. 특히 고려 불화는 그 대부분이 일본으로 흘러가게 됐고 조선 민화 또한 그 숫자를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양이 일본의 소유가 돼버렸다.
반대로 나라가 강성할 때의 문화재는 일방적 찬탈이나 암거래보다는 다른 나라와 보다 양성적인 교류가 일어나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19세기 후반 파리로 간 우키요에(浮世繪)가 아닐까 싶다. 우키요에는 서민의 생활상을 담은 풍속적 민화라 할 수 있는데 일본은 나라가 외침을 당하지 않아 중국과는 달리 황실이나 박물관 소장품의 고급 문화재 해외 반출이 거의 없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에도시대 서민 계층이 애호하던 이 채색 목판화는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오히려 국내에 있을 때보다 그 회화적 가치를 더 인정받은 경우라 할 수 있다. 우키요에가 인상주의의 불을 댕겼다 해 일본인들의 자존심까지 높였던 것이다.
그런데 파리는 어떻게 그토록 빠른 시간에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어떻게 멀리 중국, 일본 등 동아시아 국가들의 문물까지 흡수해 들이면서 세계 미술의 거점 도시가 될 수 있었을까.
파리가 1867년 만국 박물관을 기점으로 국제미술의 수도로서 그 명성을 드높이기 시작할 전후에 일본과 중국의 문물도 들어오게 되는데 미술의 경우 두 건물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화가에 생겨나면서 가속화된다. 파리 번화가에 일본 미술을 판매하는 요미우리 갤러리와 중국 미술품을 전시하며 붉은 파고다 혹은 중국 루브르로 불렸던 붉은 건물 홍루가 세워지게 된 것. 일본의 경우는 이미 19세기 전반에 우키요에 판화가 파리에 진출하기 시작해 1818년 조제프 브르통이 출간한 ‘일본의 풍속과 생활 방식’이라는 책에 50여 점의 일본 판화가 실리는 등 다양한 책자에 우키요에를 중심으로 한 판화가 나타난다. 특히 일본과 먼저 교류했던 동인도회사의 네덜란드를 통해 일본 문물이 유입된다. 사실 만국박람회가 열리기 약 20년 전인 1840년대에 프랑스 왕립 도서관 등에서는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작품을 판화로 찍어내기도 하는 등 그림을 통한 일본 판타지가 퍼져 나갔던 것이다.
가장 본격적으로 우키요에를 파리에 보급시켜 이른바 자포니즘(Japonism)을 일으켰던 화상은 하야시 타다마사(林忠正·1853∼1906)였다. 그는 파리에서 다시 열린 1878년 만국박람회에 직접 일본에서 회화와 공예품들을 들여와 파리를 중심으로 한 유럽에 팔았고 정식 갤러리까지 세웠을 정도의 뛰어난 딜러였다.
그는 불어에 유창했을까. 그건 모르겠지만 천부적 화상(畵商)의 재능을 타고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한편 화가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이 호쿠사이의 작품들을 접하고 매료돼 그의 판화집을 샀던 바로 그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일본 미술 열풍이 불었다고 보고, 프랑스 자포니즘의 기원을 그가 호쿠사이의 그림을 산 1856년으로 설정하기도 한다.
일본 미술이 이렇게 다양한 합법적 루트를 통해 주로 우키요에 중심으로 유럽에 소개됐던 데 반해 중국의 명품들은 거의 한두 사람의 전설적인 인물에 의해 유럽과 미국에까지 반출돼 나갔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왜 전설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가 하면 수천 년에 걸친 중국의 방대한 유물·유적과 미술품들, 그것도 명실공히 최상위 국보급의 명품들이 그 한두 사람에 의해 유럽과 구미의 공공 박물관과 미술관, 개인 소장가 등에 밀수 형태로 반출돼 장장 40여 년에 걸쳐 팔려나갔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추(Edward T Chow·중국명 仇혁之, 1910∼1980)와 르오진자이(盧芹齋·1880∼1957)가 그 두 사람이다. 특히 뛰어난 감식안과 상인적 수완, 그 위에 로비력을 더하며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까지 겸비한 그 문제적 인물인 르오진자이는 청나라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면서부터 발 빠르게 문화재 반출을 시도한다. 국가가 피 튀기는 정치적 혼란기에 들어가고 왕조의 존폐가 누란의 위기에 몰렸을 때 그의 나쁜 천재성은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다.
김병종 화가, 서울대 명예교수
■ 전설이 된 파리의 中화상
‘도자기 딜러’ 에드워드 추
불법도 동원한 르오진자이
유럽·美 등에 수많은 고객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은 스위스를 거점으로 활동했던 에드워드 추. 상하이(上海)와 홍콩의 골동상이었던 그는 1949년 공산당의 중국 통일 이후 활동 무대를 스위스로 옮겨 주로 중국 명품 도자기를 유럽에 판 딜러였다.
그가 옥션 등 합법적 유통경로를 택했다면 세테루(CT Loo)라는 이름으로 불린 르오진자이는 파리의 동양 미술 컬렉션을 도맡다시피 하면서 불법과 합법을 총동원했다.
라이위엔공사(來原公司)를 세워 1912년 상하이와 베이징(北京), 1915년 뉴욕에 지점을 내면서 루브르, 메트로폴리탄, 시카고 미술관 등을 고객으로 뒀고 둔황 유물에서부터 당태종 소릉육준(昭陵六駿) 부조에 이르기까지 손대지 않은 분야가 없을 정도였다.
파리 파고다로 불리는 4층 규모의 그가 세운 홍루는 테보가를 거쳐 쿠르셀가 교차로에 세워졌는데 그는 건물 내부를 중국식으로 장식하고 본토에서 요리사를 불러 컬렉터들을 초청하고 문화재를 소개했다.
중국이 열강의 침략으로 허덕일 때 고급 문화재를 빼내어 무수히 팔았던 그를 유럽에서는 전설의 딜러로, 중국에서는 대도(大盜)라고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