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3월5일 저녁 허름한 벽돌 건물에서 인상이 험악한 사람들 사이에 21명이 줄을 서 있었다. 인상이 험악한 선배들은 자연스럽게 여기 저기서 자연스럽게 농담을 주고 받는 가운데 꽁꽁 얼어서는 줄 맞추어 서 있는 앳된 얼굴 21명이 우리 동기들의 면면이었다. 3월 중순경 두명이 더 와서 우리는 23명으로 그렇게 역도부원이 되기 위한 출발을 하였다.
마이재킷을 입은 주장형의 훈시(나중에 익숙해진 우리의 영원한 주장이신 박강현 형님의 재킷과 특유의 팔장을 낀 상태의 훈시 그대로)를 듣고 우리는 입부 빠따를 맞고 어둠침침한 사워실에서 일단 비눗칠을 해야 했고 비눗물을 닦아 내기 위해 선배들의 물세례를 받으면서 험란한(?)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첫날부터 우리는 선배님들도 그리로 후배님들도 경험한 속옷의 중요성을 배우면서 역도부 생활을 시작했다. 지금은 문제가 될 지 모르지만 그때는 팬티차림에 우렁찬 목소리로 훌라송을 부르면서 여관(여학생회관)을 그리고 운동장을 돌았다. 혼자가 아니라서 덜 무안했는데 이것도 우리는 함께한다는 동기 사랑의 한 단초였으리라.
이제 불혹을 넘은 나이가 되어 흰머리가 많아지고 얼굴 면적이 점점 넓어지고 있지만 아직도 동기들을 만나면 그 시절 그 나이 그대로인 착각을 하게 되고, 마약인양 매번 이런 모임을 즐기고 있다.
우리 85학번의 면면은 이렇다. 주장을 맡아서 역도부 발전에 일익을 담당하고 군 생활하면서 쌍꺼풀까지 생긴 우리 꺼벙이 주장 홍중(CJ근무 후 최근 독립), 군대가기 전에 도장이 그리워 찾아오면 이상하게 꼭 그날 동기들까지 빠다를 맞게 하면서 반성하던 속 깊은 두더지 종섭(이마트, 홈플러스, LG홈쇼핑 근무 후 독립), 학창시절 마담뚜로 동기들에게 은혜를 많이 베푼 멋쟁이 사장님이자 역우회 부회장인 오룡(롯데햄우유 근무 후 독립), 나이어린 와이프에 꽉잡혀 살면서도 군말없이 수년째 동기 모임의 자금관리를 하는 신인왕 선규(호남석유화학 근무중), 불뚝나온 배에 숯으로 왕자를 그려서 힘의미전에 출전하였고 부부동반 모임만 하면 이쁜 마누라가 자신의 술 버릇과 화려한 학창시절 거시기를 알까 두려워 일직이라고 못 나오는 재준(삼성선물근무중), 이와 대조적으로 본인은 참석을 하지 못해도 집사람과 애들이라도 동기모임에 참석시키며 동기의 사랑을 외치는 러시아 전문가이자 운동부의 생리를 잘 안다고 널리 알려진 상우(선경 근무 후 독립), 동기가 빠다를 많이 맞았다고 그 큰 덩치에 울었던 속정 깊은 친구로 지금은 인제에서 인술을 베풀고 있는 종원(고려인제병원장), 뛰어난 입담과 동기들의 얼굴마담으로 통하는 우리의 미남 영식이(동부화재 근무중), 믿거나 말거나 이지만 본인은 항상 인천의 세정을 책임진다고 하고 있는 철밥통 철주(인천시 계양구 세정과 근무중), 그리고 엄처시하에서 고생하지만 영원한 비주류의 주류인 광재(효성근무 중) 이렇게 10명이 끈끈한 정을 유지하면서 정기적인 가족 모임과 어떻게 해서든지 동기들만 따로 모이는 비밀모임(?)을 갖고 있다.
동기들이 사회생활을 막 시작하던 92년, 각자 바쁜 신입사원 시절이라 만남이 소원해진 그때, 우리는 매달 회비를 강제적으로 갹출하여 적립을 하면서 매달 만나기 시작을 하였다. 이러한 우리 동기 모임이 결혼해서는 부부모임으로 변해갔다. 동기의 집사람으로 간택되는 행운을 거머쥐는 사람은 결혼 첫해에 동기들의 관악산행 김밥을 싸야만 하는 불문률이 생겼는데 이제는 다 결혼을 하여 이런 불문률이 깨지고야 말았다. 요즈음은 집사람들이 더 친해져서 여자들의 모임으로 변경이 되고 급기야 무슨 운동부 출신 등이 동기애가 없어서 자주 안모이냐고 하면서 동기들을 압박해 나가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고, 우리 동기들은 매번 운전기사로 모일 수만은 없는 것, 그래서 자유를 위해서 집사람들 몰래 비밀리에 모여야 하는 상황까지 되었다.
동기들이 모이면 자주하는 얘기가 있다.
여름 합숙이나 축제 등에서 삼겹살을 분명히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지만 그 한편에 언제나 익기 전에 먹었다는 것, 축제 때 요정의 숲에서 빠다 맞던 얘기, 낙산 합숙 가서 비가 줄기차게 내리던 그날 선후배 모두 허벅지에 푸른 문신을 하고 다음날 훌라송을 부르면서 해변가에서 구보를 하던 기억, 술만 먹으면 동기 하숙집에 배달되는 재준이, 방이 좁다고 방 주인을 다른 방으로 쫓아 내고 주인인양 혼자 자던 더지 등등.
우리 동기들만 만나지 말고 주변 학번의 선후배를 만나자고 하다가 욱원이형과 연락이 되어 작년 4월에 우리학번의 주장형인 강현형(’79), 욱원형(’79), 용찬형(’81)을 모시는 자리가 있었다. 신입부원시절과 역도부 시절의 추억에 젖어서 많은 얘기를 하였는데, 형님들이 전혀 변하지 않고 예전과 똑 같은 모습을 보면서 세월이 흘렀음을 잊었던 기억이 난다. 아무리 주장을 하셨어도 우리 동기 신입시절의 모습과 행동을 하나 하나 기억해주는 강현형과 예전의 일들을 어제 일처럼 얘기하는 욱원형과 용찬이형 덕분에 과거 부원 시절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우리 가슴에 와 닿았던 적이 있다. 형님들 고맙습니다.
이제 80년대 학번 모임에 동기들이 5명이상은 계속 참석을 하고 있고 많은 선후배님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너무 좋은 자리가 생겼다. 동기모임과 학번 모임 나아가 역우회 모임이 더욱 발전하도록 우리 학번 모두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다시 한번 다짐한다.
우리 동기 모임 중 형님들의 은총을 받은 날 모임에 대한 내용이 있어 첨부합니다
2006.4.25(월) 강현형 욱원형 용찬형, 권, 고, 김, 노, 류, 최 7시 여의도 양마니
(1차 양마니, 2차 그아래 단란주점, 3차 고가네 귀가 새벽 1시30분 넘어서)
며칠 전부터 마음이 계속 설레이고 있었는데 갑자기 출장이 확정되었다 ‘계획에 없었는데. 글구 하필이면 동기들이 형님 모시고 술 한잔하는 그주에 출장이라니’라는 생각에 적지 않게 서운했는데, 결국 내주에 가게 되었다 . 참, 다행이었다. 나도 이제 나이를 먹나? 친구 만나는 것이 즐겁고, 소풍 가는 아이처럼 약속한 그날을 부푼 가슴으로 그날을 고대하니 말이다. 게다가 요즈음은 없는 건수라도 만들어서 기를 쓰고 만나려고 하니 말이다.
한동안 일년에 몇 번 보기도 힘들었으나, 더지가 대오각성을 하더니 올해 들어 모임을 활성화시키고 있다. 오룡이가 역우회에 적극 참석하면서 동기모임이 더 활성화 되고 있고, 영원한 짱골라까지 귀국해서 그런지 모임이 활기가 넘치고 있다.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다.
며칠전부터 동기들에게 계속 메일을 보냈다 양마니에 다 참석하라구(더지는 내가 일이 없어서 메일을 보낸다고 하던데, 그 말 맞다). 오룡이가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들어 놓다니 기특한 X.
6시경 재준이로부터 전화가 왔다. 회사 후배가 강현이형을 만났는데, 자기와 통화를 하였으며, 오늘 모임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늦더라도 참석을 하시겠다고 하시더란 내용이었다. 아차 싶었다. 몇 년 전부터 우리 동기 모임 시 나오시겠다고 날을 잡으면 알려달라고 수차 말씀하시던 우리 주장님 아니신가.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재준이가 전화를 직접드려보라고 하였으나, 염치가 없어서 전화를 드리지 못했다. 형에 대한 미안함, 몰염치, 뭐라 형언하기 힘든 그런 것은 우리 모두의 생각이었나부다. 강현이형이 오신다는 말에 다들 놀라고 미안해 하고….
에고 나쁜 놈들.
여의도 약속 장소에 말씀과 달리 8시전에 참석하신 형님은 소인인 나와 달리 굉장한 대인이셨다. 별다른 서운한 표현도 없이 “내가 그렇게 보자고 해도 약속을 안만들더니 그래 돈 없는 공무원선배에게 술 값내라고 하면 어떻게 하니? 그래서 내가 왔지”하시면서 우리 동기 모두에 대해 일일이 언제 만나고 안만났는지를 정확히 기억을 하시면서 애정을 표현하시는데….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이 “형님 죄송합니다.”였다. 못난 후배놈들…
모임에서 그간의 근황, 선후배의 돈독한 정이 졸업후 수년간, 혹은 십여년의 공백이 있었음에도 금방 분위기가 달아 올랐다.멋진 모임이었다. 재준이가 1학년 때 파마하고 왔다가 욱원이형에게 맞고 미장원가서 다시 풀고 온 사건, 대천합숙훈련, 빠따, 총학생회문제, 등 순식간에 과거가 쭈욱 눈앞으로 들어왔다. 욱원이형의 단벌양복, 그리고 재준이 선규가 한여름에 겨울양복입고 선배 부친장례식에 갔던 얘기, 등. 재미난 모임 아닌가!
욱원이형이 송자총장이 취임해서 동창회(교무회의인가?)에서 처음 한 말이 고대의 한 서클이 이런 주소록을 만드는데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냐고 하면서 보여준 것이 역우수첩이라고 하셨는데, 89년인가 작고하신 이승실선배께서 편집위원하시면서 학교근처에서 술을 자주 사주셨는데 그때 편집위원이신 승기형님께서 이런 주소록 이런 신문이 나오는 모임은 우리밖에 없다고 말씀하시던 생각이 나면서 가슴이 참 뿌듯하더라. 모임을 주도적으로 이끄시는 역우회 회장단과 승기형이 계신가 하면 욱원이형처럼 모임을 활성화 하도록 잘 연결하시는 분들도 있어 역우회가 잘 되는 것 같다.
작년인가 용하가 미국에서 올 때 동기들과 윤철이형, 수한이형과 함께 술 마신 것을 빼면 우리는 넘 동기들만 뭉쳤나 보다. 이제 우리도 형님들을 초청해서 만나자 그래야 이제 우리도 중견 아니겠냐?
2차는 재준이가 원하는 단란주점으로 가서 폭탄주만 세잔을 연거푸 마셨다. 주당선배분을 모시고 폭탄주를 했으니……. 역시 대인이신 강현이형 1차 계산을 하신 후 2차에 참석하시고 술 다드시고는 먼저 가는 것이 미안하고 너희 동기끼리 재미난 시간을 갖고 더 놀라고 하시면서 카드를 맡기고 가셨다.
물론 더 쓰지는 않았지만 얼마나 멋있나! 내가 능력이 있어도, 사랑하는 후배를 만나사도 이렇게 할 배포가 있을까? 형님 존경합니다.
3차는 어부인이 회식으로 늦게 온다고 먼저 들어간 선규네 가서 북어국, 순대, 등을 안주로 먹고, 술을 마셨다.
다음 5.5일부터 1박2일 놀러 간다고 하니깐 기대해 봐야지. 그리고 중순 이후에 강현이형에게 석고대죄하는 자리를 만든다고 하니. 그때까지 반성하자, 얘들아.
형님들 모시는 자리여서 인지 우리가 엄청 젊게 느껴지고 마치 대학에 다시 들어간 것 같더라. 고맙다 친구들아 자리 만들고 빛내주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