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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주명리(좋은사람 정모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도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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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 력: 1926년 1월 7일 04:00 음/평: 1925년 11월 23일 04:00 남자
시 일 월 년 庚 丙 己 乙 寅 申 丑 丑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대운: 역행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81 71 61 51 41 31 21 11 1.5
대운 시작: 1세 5월 2일 현재 나이: 91 세 |
양 력: 1926년 1월 7일 08:00 음/평: 1925년 11월 23일 08:00 남자
시 일 월 년 壬 丙 己 乙 辰 申 丑 丑
庚 辛 壬 癸 甲 乙 丙 丁 戊 대운: 역행 辰 巳 午 未 申 酉 戌 亥 子 81 71 61 51 41 31 21 11 1.5
대운 시작: 1세 5월 22일 현재 나이: 91 세 |
충청남도 부여군 외산면 반교리에서 아버지 김상배(金相培)와 어머니 이정훈(李貞薰)의 다섯째 아들로 출생했다. 가야국 시조 김수로왕의 72대손이자[1] 김해 김씨 안경공파(安敬公派)로 안경공(安敬公) 김영정(金永貞)의 13대손이었다.
그의 집안이 충남 갑부로 성장한 것은 그의 할아버지 김현택이 갑부로 성장하여 가세를 일으킨 것이며, 김현택은 부지런해 생전에 쌀 2000섬 지기가 됐다.[1] 3대 독자였던 아버지 김상배는 토지측량사를 지냈다.
[1] 토지등록 분규 등을 잘 해결해 신망을 얻은 후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으로 지역사회의 유지가 됐으며, 어머니 이정훈은 전주 이씨 선비댁 출신으로 아버지 김상배보다 12년 연하였다.
위로 김종익, 김종락 등의 네명의 형이 있었는데 맏형 김종호는 마흔살이 넘어 공무원 시험을 거쳐 서울시 종로구청 주사로 근무했고, 70년에서 80년까지는 중앙곡물협회 회장직을 맡았다.[1] 둘째 형 종익은 민주공화당 6,7,8대 국회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부모는 모두 아들만 일곱 명을 두었다. 막내 동생 김종식은 중학교 시절 6·25 전쟁 중에 실종됐다. 그뒤 김종필은 실종된 막내동생을 오랫동안 찾았으나 찾지 못했고, 그의 측근인 보좌관 김석야는 2000년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총리께서 수십년 동안 막내동생을 찾으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끝내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1]
부유한 가정환경에서 태어나 유복한 소년기를 보냈다. 그 후 공주중학교[2]를 거쳐 1944년 3월 공주고등학교를 졸업[3]하고 1945년 4월 대전사범학교 강습과(講習科)를 졸업하고,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1948년 3월에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2년을 수료했다.
1947년(22세, 병술대운 정해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교육학부 수료,
1949년(24세, 병술대운 기축년) 육군사관학교 8기로 졸업.
1951년(26세, 병술대운 신묘년) 1.4 후퇴 직후 부인 박영옥씨와 결혼함.
1958년(33세, 을유대운 무술년) 육군정보참모부 기획과장,
1960년(35세, 을유대운 경자년) 2월 18일 육군중령으로 정군운동을 주동하다가 예편.
1961년(36세, 을유대운 신축년) 5월 16일 516 혁명주동, 1961년 6월 중앙정보부 신설,
1963년(38세, 을유대운 계묘년) 1월까지 정보부장 지냄. 육군 준장으로 예편하면서 정치에 참여, 부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같은 해 공화당 당의장에 취임.
1968년(43세, 갑신대운 무신년) 3선 개헌반대와 관련된 공화당 내의 국민복지회사건으로 모든 공직을 사퇴하고 정계에서 은퇴했음,
1971년(46세, 갑신대운 신해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공화당 부총재로 정계에 복귀함. 갑오월 국무총리로 취임함.
1975년(50세, 갑신대운 을묘년) 12월에 국무총리 사임.
1979년(54세, 계미대운 기미년) 10·26으로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하자 공화당 총재로 피선됨.
1980년(55세, 계미대운 경신년) 경신년 5월 공화당 대통령후보로 출마준비 중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등에 의한 신군부 반란사태로 좌절되어 권력형부정축재자로 연행되어 216억 압수당함.
1981년(56세, 계미대운 신유년) 정치활동 규제 당함.
1985년(60세, 계미대운 을축년) 기묘월 해금되어 다시 정치 활동함.
1986년(61세, 계미대운 병인년) 신당창당준비,
1987년(62세, 임오대운 정묘년) 10월 30일 신민주공화당 창당하여 대통령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함.
1990년(65세, 임오대운 경오년) 당시 집권여당인 민주정의당, 통일민주당과의 내각제 개헌 합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을 결성, 최고위원직을 맡았음.
1992년(67세, 임오대운 임신년) 김영삼(金泳三) 대통령 당선에 일조하였으며 민주자유당 대표최고위원에 취임했음.
1995년(70세, 임오대운 을해년) 민주자유당 내 세대교체론에 반발하여 탈당한 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였음.
1997년(72세, 신사대운 정축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金大中)·박태준(朴泰俊)과 이른바 DJT연대를 통하여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에 공헌했음.
1998년(73세, 신사대운 무인년) 새정치국민회의·자유민주연합 공동정권의 국무총리 취임,
2000년(74세, 신사대운 경진년) 국무총리 사임, 한일의원연맹회장,
2001년(75세, 신사대운 신사년) 9월 국회에서 임동원 통일부 장관 해임안을 가결한 것을 계기로 김대중 정부와 결별을 선언했다. 이후 김종필은 소수야당의 총재로 남게 됐다.
2002년(76세, 신사대운 임오년) 월드컵축구국회의원연맹회장.
2004년(78세, 신사대운 갑신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에 이겨내지 못하고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민련이 교섭단체도 구성하지 못하고 비례대표 1번으로 출마한 자신도 낙선하고, 자민련에서 아무도 비례대표가 나오지 않자, 총재직을 사퇴하고 정계 은퇴 선언을 했다.
2008년(82세, 경진대운 무자년) 3월 26일, 김종필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함께 서울 강남에서 회동을 갖고 한나라당 공천 결과가 편파적으로 진행됐다는 데 의견을 같이하고 이명박을 강력히 성토함. 년말에 뇌졸중으로 쓰러짐. 이후 일보다 건강을 챙김.
2015년(91세, 경진대운 을미년) 2월 21일 부인 박영옥씨 별세.
자식은 1남1녀, 며느리가 과테말라 국적. 딸은 이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