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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희, 박준흠 (최규성)
[우린 어디로 가는가],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노래 또는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노래
펑크밴드 럭스(RUX)의 리더 원종희(보컬)는 2000년대 가장 과소평가 받는 뮤지션이자 왜곡된 모습으로 기억되는 뮤지션이다. 당장 포털사이트에서 럭스나 원종희를 검색하면 대표적으로 나오는 것이 2005년 7월 30일에 있었던 MBC 음악캠프 방송사건이다. 일명 ‘카우치 사건’으로 불려지는 그 사건 때문에 정작 럭스의 음악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들조차도 럭스의 이름 정도는 기억한다. 대략 ‘철없는 아이들이 벌린 개념 없는 행위’ 정도로 알고들 있는 그 사건은 럭스와 원종희에게는 두고두고 불명예스러운 상흔으로 남을 것이다. 하지만 럭스와 스컹크(Skunk) 레이블을 그리 간단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왜곡된 채로 얘기되는 것이 타당한가?)
만약 럭스의 정규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skunk)를 한국 인디음악씬에서 나온 음반들 중에서 ‘세상에 대한 통찰’이 가장 돋보이는 작품들 중에서 하나라고 감히 얘기한다면? 그래서 노브레인의 [청년폭도맹진가](2000/문화사기단)와 함께 [우린 어디로 가는가]를 한국 펑크음악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서슴없이 꼽는다면? 그리고 원종희를 이기용(허클베리핀), 이장혁, 연영석 등과 함께 200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 대중음악 창작자로 꼽는다면? 만약 당신이 정말로 편견 없이 [우린 어디로 가는가]나 [Another Conception]을 들어본다면 수록된 몇몇 곡들에서 묘한(?) 감동을 느낄 것이고, 왜 지금 럭스와 원종희를 얘기하려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치 원종희는 우리가 주목할만한 이 시대의 창작자란 사실은 명백하기 때문이다.
럭스는 아주 천천히 성장한 밴드이다. 솔직히 얘기하면 럭스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는 처음에 아무런 기대 없이 들었던 음반이다. 그런데 음반을 들으면서 “아, 원종희라는 사람은 가사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아닌데 보통 그 나이 때 한국의 다른 또래들이 갖고 있지 않은 통찰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서 그걸 어떻게 체득하게 된 건가, 라는 의문 같은 게 있었다. 특히 <지금부터 끝까지>,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은 한국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가사라고 생각한다. 한편으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예전 20~30대 때 치열하게 운동했던 분들 중에서 40대가 되면서 변절한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보고 반성해야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 흔히 말해서 인텔리가 아닌 펑크뮤지션이 이런 가사를 쓰는 게 나는 놀라웠다. 그래서 이런 가사들이 담긴 노래들이 나오게 된 그 과정이나 생각을 (시간이 좀 지난 감은 있지만)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이게 이번에 럭스의 원종희를 인터뷰한 계기이다.
※ 현재 ‘스컹크 레이블’은 운영에서 일정 부분 노선 변경이 있고, 스컹크 레이블에서 운영하던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은 2008년까지만 연다. 스컹크 헬의 고별 공연이 2008년 12월 24일(수)과 2009년 1월 3일(토)에 있었다. 한국 펑크씬에서의 중요한 움직임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순간이다.
일시 : 2008년 11월 14일(금), 오후 4시
장소 : 홍대 스컹크 헬
대담 : 원종희(럭스) VS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글 : 박준흠(가슴네트워크 대표)
사진 : 최규성(대중문화평론가)
원종희 (최규성)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준흠 : 현재 근황은?
원종희 : 학교에 들어가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웃음) 서울예대 방송영상과라고... 영상촬영이나 제작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학교는 안산에 있다. 서울예대가 서울에 없다.(웃음)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에 변화가 있다고 들었다.
원종희 : 레이블에서 제일 큰 변화는, 올 해 4월쯤에 밴드들이 대부분 나가면서 또한 내가 내보내기도 하고 해서 현재는 소속 밴드로 2팀만 남았다. ‘럭스’하고 ‘백화난만조’라고... 그리고 2009년 1월에 라이블클럽 ‘스컹크 헬’이 없어지고 이 자리에 촬영스튜디오가 생길 것 같다.
박준흠 : ‘백화난만조’가 무슨 뜻인가?
원종희 : 나도 구체적으로 잘 모르겠다. 뭐 하얀 꽃이 만발한다, 그런 의미인 것 같은데. ‘칵크래셔(Cockrasher)’의 보컬리스트가 다시 만든 그룹이다.
박준흠 : 그럼 현재 레이블만 남고 라이브클럽이 없어지는 개념인가?
원종희 : 레이블도 간단히 얘기해서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다시 껍데기를 다 벗어버리고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상태다.
박준흠 : 90년대 후반의 모습으로 간다는 의미가 소속 개념을 없애겠다는 것인가?
원종희 : 그렇다. 스컹크 레이블이 뮤지션들과 정식으로 계약을 하고 뭔가를 할 때는 음반을 발매 할 때나 뭔가 한 가지를 딱딱할 때였다. 하지만 ‘소속’ 개념으로는 특별한 계약을 하지 않았다. 달랑 A4용지 한 장에다가 “이 밴드는 스컹크 프로뎍션에 소속된다. 하지만 나가고 싶을 땐 언제든지 나간다.” 그런 식이었다. 그런데 그건 좀 좋지 않은 것 같다 싶어서 소속밴드들을 다 없앴다.
박준흠 : 그 문제 같은 경우는 다른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소속밴드가 있게 되면 밴드들과 일을 할 때 소속되지 않은 밴드들에게 차별을 받는다는 느낌을 줄 수 있다는 문제들인가?
원종희 : 그렇다. 보통 인디레이블들은 많으면 3~4명이 일한다. 그러니까 일하는 인원이 3~4명이면 또 그만큼 월급을 줄 수 있을 만큼의 일을 뭔가 크게 벌여야 한다. 그런데 일이 없는 상황에서 소속밴드가 5팀, 10팀이 되버리면 사실상 한두 명의 인원이 10팀의 밴드를 관리하면서 잘 해준다는 게 실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인 것 같다.
박준흠 : 혹시 지금 일신상의 변동, 즉 학업을 포함한 그런 변동 상황 때문에 시간을 낼 수 없는 문제가 걸린 것은 아닌가?
원종희 : 음... 순서가 레이블을 정리하면서 내가 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뭐 꼭 학교 때문에 레이블을 정리했다, 그런 건 아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우리 레이블 소속밴드들의 멤버들이 나 빼고 다들 자기 개인적인 일들이 있다. 일을 한다든가 공부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럭스 멤버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도 마찬가지이다. 스컹크에 소속되어서 공연 활동은 같이하되, 직업을 갖고 있거나 학교를 다니거나 하고 있어서 나도 그 입장이 되려고 한다. 나도 명목만 레이블 사장이다 하면서 다른 거 아무 것도 안하고 맨 날 여기 왔다 갔다 하면서 밴드들 걱정하고 하는 것보다는 그게 낫다. 나도 이 친구들이랑 똑같은 입장으로, 학교를 다니면 다니고 일을 하면 하는 식으로 밴드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박준흠 :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있나?
원종희 : 음, 계기라면... 펑크 레이블을 키워나가다 보니까 펑크도 키우면 키울수록 이게 어떻든 하나의 ‘회사’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펑크랑 회사랑은 안 맞는 것 같다. 즉, 펑크적인 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회사를 만드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렇게 됐다.
박준흠 : 그런데 예전에 회사 개념의 레이블을 만들었을 때는 지금하고는 생각이 달라서 만든 것 아니었나?
원종희 : 아마도 그 때는 펑크로 세상을 지배하겠다는...(웃음) 펑크로 뭔가를 해보자, 하는 큰 뜻이 있었다. 지금은 마음은 똑같은데, 회사는 아니다.
박준흠 : 원종희 씨가 만든 럭스 노래들 같은 경우에는 어떤 주장이라기보다는 ‘자기 얘기’를 하는 데 더 집중하지 않았나? 2004년도 정규 1집 같은 경우는 많은 부분이 본인의 ‘다짐’에 관련된 노래들이었다. 좀 전에 얘기했던 세상을 바꾸자(“펑크로 세상을 지배하겠다”)와 같은 ‘변혁’에 관련된 얘기는 여태까지 노래에 없었던 것 같은데, 그런 마음이 예전에는 원래 있었던 건가?
원종희 : 아마 나이가 먹어서 그런 거 같은데...(웃음) 어릴 때는 뭔가를 좋아하면 밑도 끝도 없이 파고들면서 만들려고 노력을 하게 되지 않나. 그걸 만드는 진행 과정에서 내가 좀 치였다고 해야 되나? 이렇게 내 입으로 말하면 되게 초라해지는 건데...(웃음) 뭐라고 표현해야 되나?
박준흠 : ‘기획’ 쪽의 일을 하다보니까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문제점들이 발생했다, 그런 정도?
원종희 : 맞다. 우리가 예전에 [3000 Punk](1999) 음반을 만들었을 때, “왜 음반이 만원이지? 삼천원에도 팔 수 있잖아?”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서 우리끼리는 나름대로 파격적이라고 생각하면서 만들어서 팔았다. 하지만 나중에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까, 처음에는 유통마진이나 이런 것들이 없어도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이 없으면 음반이 많이 안 팔린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거랑 똑같이 기획이나 음반회사 시스템에 대해서도, “그 쪽에서 안받아주면 우리가 하면 되잖아, 우리끼리 해보자!” 하면서 만들어가던 게 작년, 재작년까지라면... “아, 이거는 그 사람들에게 맡기는 게 차라리 낫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게 그다음부터 최근까지다. 그러니까 우리가 타도하려고 했던 그 시스템, 체계 안에 있는 그 ‘악당’들이 알고 보니까 악당들은 아니더라.(웃음) 어떻게 보면 바보 같이 뒤늦게 알게 된 거다. 체험하면서.
박준흠 : 그게 혹시 원종희 씨나 일부의 생각인가? 아니면 스컹크 헬에 관련된 펑크 뮤지션들이 공유하는 지점이 있는 건가?
원종희 : 어떻게 보면 그게 내부에서 깨닫게 된 부분이 많다. 설명이 잘 맞을지 모르겠는데, 천국에 가면 사람들이 팔을 안으로 못 구부린다고 한다. 그래서 맛있는 음식들이 바닥에 깔려있는데 그걸 집어서 서로에게 주는 거다. 하지만 지옥에 가면 똑같이 사람들이 팔을 안으로 못 구부리는데, 아무도 먹지를 못하는 거다. 서로 안주니까. 우리는, 우리만큼은 특별했기에,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팔을 못 구부려서 서로에게 못 먹여주고 있지만 “우리는 할 수 있다. 우리는 진짜 우정으로 똘똘 뭉친 친구들이고, 우리만큼은 그렇게 서로를 배려하면서 잘 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생각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게 회사의 형태가 되면서부터 또 돈이라는 게 개입이 되고, 레이블이 조금씩 커지니까 “어, 우리도 안 되네”라는 걸 나중에 깨닫게 된 거다.
박준흠 : 그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안 좋은 일들도 있었나? 사람들끼리?
원종희 : 그렇다. 그러니까 말도 많았고, 밴드도 8팀이나 있었는데 그 중에 어떤 팀은 누가 챙겨주고 어떤 팀은 안 챙겨준다는 말들도 오갔다. 그 반면에 뭐가 잘 될 때에는 작은 거에서 삐지고, 밴드들이...(웃음)
박준흠 : 지금 얘기를 듣고 보니까 원종희 씨가 약간 사람 문제에서 치인 부분 때문에 힘들어서 방향을 좀 수정한 것 같다. 혹시 나중에 그런 부분(문제)까지 다 커버할 수 있는 역량이 생긴다면 다시 회사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걸 고려는 하고 있는 건가?
원종희 : 지금으로서는 그런 생각을 안 한다. 예전 같이 스컹크 레이블을 키워서 밴드가 많아지고, 스컹크 레이블 타이틀의 빌딩에서 업무를 보면서 몇몇 팀들이 공연에 나가고, 매니저들도 있고, 그런 걸 꿈꾸지는 않게 됐다.
박준흠 : 매니저가 따로 있었나?
원종희 : 밴드 매니지먼트를 말하나? 내가 직접 했고, 중간에 이종혁 씨라고 그 친구도 밴드 하는 친군데 매니저 일도 했었다. 그 시도가 끝까지 잘 안되긴 했지만.(웃음)
박준흠 : 라이브클럽 스컹크 헬을 정리를 하게 된 이유가 운영하는 동안 금전적인 어려움 같은 게 있어서인지?
원종희 : 그것도 똑같은 이유다. 요즘에 뭐 BGBG, FF 등 펑크를 수용하려는 여러 클럽들이 많아지면서, 특히 FF랑 스컹크는 서로 마주보고 있지 않나? 서로 똑같은 밴드들이 공연하면서 매주 금요일, 토요일 같은 공연으로 경쟁하는 구도가 되더라. 그러면서 실질적인 수익은 대관으로 다 나오고. 그런 경쟁구도에 있기가 싫어서 클럽을 굳이 안 해도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사람들은 뭐 클럽공연하면 클럽 사장만 돈 버는데 하면서 그런 얘기가 또 오가니까... 그럼 뭐 럭스도 같은 동등한 입장에서, 한번 초청당해 가면서 공연을 하는 입장이 돼보자는 생각에서 클럽을 정리하게 됐다.
박준흠 : 이 근처에 빌려주는 연습실이 있지 않았나?
원종희 : 그건 올해 7월에 팔았고, 클럽은 내년 1월에 없어진다. 그래서 12월 24일(수), 내년 1월 3일(토) 양일간 마지막 공연을 하려고 한다.
박준흠 : 스컹크 헬의 모든 팀들이 다 나오는 건가? 고별공연으로?
원종희 : 12월 24일은 새로운 밴드들을 포함한 14팀 정도가 올나이트 밤샘공연하고, 1월 3일엔 이 자리를 빛냈던 많은 밴드들이 참여해서 공연을 한다. 스컹크 헬 이전에는 원래 드럭이라는 곳이 있었으니까 이 자리에 가장 애착이 있을만한 밴드들이 선다. 사실 그걸 골라낸다는 것도 어렵지만 크라잉너트 형들도 “종희 너를 떠나서 너보다 우리가 그 자리에 더 애착을 느낀다”는 얘길 또 하니까. 크라잉너트, 껌엑스, 럭스 등 여러 팀들이 나온다.
박준흠 : 예전 드럭 팀들까지 다 나온다 말인가? 그럼 ‘공간’에 대한 의미를 생각하는 것인데, 결국 드럭 때부터 시작해서 스컹크 헬까지 왔던 큰 흐름이 마감이 되는 의미인가?
원종희 : 그렇게 되는 거 같다.
박준흠 :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겠다.
원종희 : 나도 무척 아쉽다.
박준흠 : 예전에 라이브클럽 ‘스팽글’의 고별공연(2000년) 때에도 좀 ‘짠’했던 게 있었다.
원종희 : 여기는 지금 모양은 이렇지만 저기 구석에 보면 아직도 1998년도인가... 그 때 낙서해 놓은 것도 막 보이고 그런다. (웃음)
원종희 (최규성)
“고 2때 학교를 안 가고 당구장 보일러실에 합주실을 만들어서 거기서 합주를 하고, 머리도 ‘닭머리’로 밀었다.”
박준흠 : 럭스의 시작에 대해서 얘기해 달라.
원종희 : 중학교 2학년 때(1994년) 이현의, 이승복이랑 ‘럭스(RUX)’라는 밴드 이름을 만들고 밴드 활동을 시작했다. 한창 성수동 이벤트 스튜디오에서 연습하다가 합주실에서 공연을 하기 시작 했다. 중학교를 졸업하면서 이현의랑 이승복이 밴드를 나갔다. 부모님들의 반대가 심했다.1)
박준흠 : 1998년에 스컹클레이블을 만들었다. 그 때가 고등학교 3학년 때인가?
원종희 : 그렇다. 1999년 2월에 졸업하고 그해 11월에 군대 갔다. 군 생활을 2년 2개월 해서, 2002년 1월에 제대를 했다. 군 생활을 햇수로 4년을 했다. 제대 후 1월에 바로 럭스를 재결성했다.
박준흠 : 그 다음에 2003년 1월에 해체했다가 3월에 박건우 씨가 들어오면서 다시 활동을 한 건가? 그리고 박건우 씨는 ‘브라스만’ 출신이었나? [3000 Punk](1999) 앨범 보면, 브라스만 멤버로 돼있다.
원종희 : 그렇다. 당시 이주현(현재 갤럭시 익스프레스 멤버) 형이랑 크게 싸웠고, 해체하자고 했다.
박준흠 : 그리고 [3000 Punk] 음반에 참여한 ‘스파이키 브랫’에서 원종희 씨가 드럼을 친 걸로 나오는데?
원종희 : 스파이키 브랫에서 드럼을 한 2년 가까이 쳤다. 럭스하면서 스파이키 브랫도 같이 했었다. 앨범도 내고.
박준흠 : 초등학교 3학년부터 6학년 때까지 미국 생활을 한 걸로 안다. 음악을 그 때부터 좋아했다고 나오는데, 이게 향후 영어 가사를 쓰는데도 영향을 미쳤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1989년) 미국에 갈 때는 영어 알파벳도 모르는 상태에서 갔었다. 부모님이 나를 미국인 학교에 보냈다. 전교생 중에서 한국인이 4명 정도였다. 미국 애들 중에는 영어 못한다고 놀리는 애들이 없었는데, 유독 한국 애들이 놀리고 그러더라.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한국 애랑 맞장을 떴다. 내가 이겼다.(웃음) 그렇게 싸우고 어린 마음에 뭔가 되게 억울했다. 이겼는데도 그 억울함이 계속 있었던 거 같다. 왜 같은 한국 사람인데 그 애가 나를 싫어하지, 그러면서 열등감이랄까 그런 게 어렴풋하게 자리 잡았다. 그러면서 “아, 자부심을 가져야겠다”는 그런 맘이 생겼던 거 같다. 그리고 사촌형들이 혼혈인데, 큰아버지가 미국인이랑 결혼을 해서 사촌형들이 딱 봐도 미국인 같이 생겼다. 방학하면 어머니가 누나랑 나랑 영어를 배우라고 사촌형네 데려다 주곤 했는데, 그 때 제일 큰 사촌형이 밴드를 했었다. 그 형이 주차장 안에 합주실을 만들어놓고 합주했고, 나는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밴드 합주하는 거 구경하면서 ‘멋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 형들이 나한테 들려주던 음악들의 가사를 외우면서 놀고 그랬다. 퀸의 <보헤미안 랩소디> 같은 노래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가사를 막 외우고. 핑크플로이드의 [The Wall] 앨범 같은 경우는 초등학교 3학년 때 가사 따라 부르면서 들었는데, 그렇게 듣던 게 초등학교 때 처음 음악을 접하기 시작한 거다.
박준흠 : 그 사촌형 밴드가 펑크밴드는 아니었나?
원종희 : 자기네는 펑크밴드라고는 말 안했던 것 같은데, 음악이 풋내기스러운 음악이었으니까.(웃음) 거의 미국 펑크밴드였던 것 같다. 그 사촌형은 지금 미국에서 빅터레코드라는 음반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고 있다.
박준흠 : 그러면 미국에서 얼터너티브록 붐이 막 터질 때 초등학교 생활을 했다. 5학년 정도에 너바나의 [Nevermind] 앨범이 나왔겠다.
원종희 : 그렇다. 내가 5학년 때 엠씨해머, 바닐라아이스가 유명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너바나의 <Smell Like Teen Spirit> 뮤직비디오가 TV에 계속 나왔다. 친구들이랑 대걸레 들고 학교에서 놀고2)...(웃음) 그게 5학년 때다. 얼터너티브록 붐이 확 치솟은 게.
박준흠 :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 때 초등학생들한테도 너바나가 영향을 미쳤나?
원종희 : 초등학생들도 뭐 다 따라하고 놀고 그랬다. 초등학생 입장에서는 엠씨해머나 바닐라아이스나 너바나나 다를 게 없다.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냥 다 TV에 나오니까 재밌어서 학교에서 대걸레 들고 왔다갔다 하고...(웃음) 장난치고...
박준흠 : 언제 한국에 다시 돌아왔나?
원종희 : 초등학교 6학년 때 다시 돌아왔다. 6학년 2학기로 다시 들어갔다.
박준흠 : 럭스 결성하기 전에는 듀스 음악을 좋아했다고 되어있는데, 혹시 그게 지금 원종희 씨가 창작하는 데 영향을 미치는 것 같나? 무슨 얘기냐면, 럭스 노래는 펑크인데도 좀 다르게 들리는 측면이 있어서이다. 흔히 말하는 ‘가요 필’이 있다.
원종희 : 내가 듀스를 음악적으로 좋아했다기보다는 중학교 때 듀스를 좋아하는 게 유행이었기 때문에 랩도 외우고, 수학여행 가면 애들이랑 듀스 랩도 하고 그랬다.(웃음)
박준흠 : 그 때 춤도 추고?
원종희 : 그렇다. 밤 12시까지 애들이랑 놀이터에서 헤드스핀 막 하고, 독서실도 안가고 놀고 그랬다.
박준흠 : 그러면 드럼을 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원종희 : 중학교 2학년 때 까지는 소위 뒤에서 노는 애들이랑 맨날 춤추고 그렇게 놀았다. 비트박스가 그때 한참 유행이었다. 그 때 이현의라는 친구가 앞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였는데 나한테 큰 맘 먹고 와서 “종희야, 내가 밴드를 할 건데 니가 드럼을 좀 쳐보지 않을래?”라고 했었다. 그래서 “오, 드럼 좋지. 그런데 드럼이 뭔데?” 그랬더니 그 때 핫뮤직에 나온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거 치는 거라고... 아, 되게 멋있겠다는 생각으로 하게 됐다. 초등학교 때 록음악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록밴드가 멋있다, 록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들이랑 그렇게 노는 와중에 어떤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가 와서 드럼을 니가 쳐봐라 하니까... 어, 한번 해보자 심심한데... 그게 밴드를 하게 된 계기였다.
박준흠 : 그 당시에 같이 음악 했던 친구들은 그만뒀는데 어떻게 프로뮤지션을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건가? 아버님한테까지 그렇게 얘기할 정도였다고 했는데.
원종희 : 그게 청개구리 심보도 컸던 것 같다. 다 못하게 하니까. 한창 사춘기 시절에는 부모님이 못하게 하면 되게 하고 싶지않나. 그리고 이현의, 이승복 이 두 친구가 밴드를 그만두겠다 하니까, 왜 그만둬? 난 할래 그러면서... 그게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박준흠 : 그 때 음악에서 ‘자신만의 뭔가’를 발견한 게 있었나?
원종희 : 그렇다. 그 때 한참 카세트테이프에서 CD로 바뀌는 시절이었는데, 또 다른 공부 열심히 하는 친구가 자기가 CD플레이어를 사야하기 때문에 테이프을 개당 2백원에 팔겠다고 하면서 학교에다 갖다놓았다. 백개 정도를. 그래서 나는 록밴드 할거니까 나한테 팔아라하고 그걸 다 샀다. 한꺼번에 2만원어치를. 그냥 이것저것 음반 표지를 보다보니까 난 모르는 밴드였는데, 거기에 너바나에서 펄잼, 사운드가든, 스톤템플파일럿츠와 같은 얼터너티브 쪽도 있었고, 메탈리카, 카니발콥스와 같은 데쓰메탈 쪽으로도 있었다. 그 때 그린데이가 있었다. 하고많은 표지 중에서 그린데이 [Dookie](1994) 음반 표지가 되게 예쁜 거였다. 그래서 그걸 맨 처음에 들었다. 시커먼 펄잼의 [Vitalogy](1994) 같은 건 새까매가지고 틀어보니까 음악이 어둡고 이상하고 무서웠다. 그런데 그린데이의 [Dookie] 앨범은 들어보니까 음악이 되게 신났다. 어, 좋다 그러면서... 또 내가 영어를 좀 할 줄 아니까 그 <Basket Case>가 들리는 거였다. 그 가사가 처음에 “do you have the time to listen to me whine, about nothing and everything all at once” 이렇게 나오는데 가사가 귀에 촥촥 다 들어오는 거였다. 그 말들이 동감이 되는 거다. 그 때 그린데이 앨범은 테이프가 늘어나서 못들을 정도로 많이 들었다. 그게 아마 가사 부분에서 나한테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박준흠 : 첫 자작곡이 <스컹크>라고 돼있는데, 그게 언제 정도인가?
원종희 : 중 3때 우리가 졸업공연을 했었다. 자작곡이 딱 하나 있었다. 왜 ‘스컹크’라고 지었는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렇게 지었다.
박준흠 : 이 ‘스컹크’가 동물 ‘스컹크’를 얘기하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박준흠 : 대략 가사가 무슨 내용이었나?
원종희 : 한글 가사였고, 되게 어두운 곡이었다. 밝은 멜로디에... 가사가 잘 기억이 안 나는데, 대략 “어떻게 또 하루를 살아나갈까~” 이러면서... 중학교 3학년 주제에.(웃음) “아, 오늘아침 눈을 뜨면 생각하지. 내가 왜 사나” 막 이러고. 참, 그 안에 랩도 있었다. 욕설 ‘씨~~’...(웃음)
박준흠 : 아버님은 음악 하는 거 계속 반대했다고 들었다. 가출했다는 얘기도 있던데. 당구장에서 생활하고 그랬다고?
원종희 : 당구장에서 한 3개월 동안 일하면서 돈 모으고 그랬던 적도 있었다.
박준흠 : 그게 고등학교 2학년 때?
원종희 : 그 무렵이다.
박준흠 : 어머님만 이해를 하셨나?
원종희 : 어머니도 이해를 안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뭘 하든 간에 집에 들어와서 해라, 그런 심정으로 얘기했다.
박준흠 : 그럼 어머니가 사업자등록증을 해주신 건?
원종희 : 내가 고 2때 학교를 안 가고 당구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구장 사장님한테 보일러실에다가 합주실을 만들어달라고 해서 거기서 럭스가 합주를 하고, 머리도 ‘닭머리’(모히칸 헤어스타일)로 밀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어떻게 어떻게 해서 나를 찾아내서 “집에만 들어와라”라고 얘기했고, 내가 ‘닭머리’를 딱하고 집에 들어갔다.(웃음) 아버지는 이제 할 말도 없고 “니가 드디어 이제 미쳤구나...” 그러셨다. 나는 학교 갈 생각도 없고 밴드를 하고 싶다고 크게 반항을 하니까 “니가 뭘 하든 집에 있어라, 집에서 밥 먹고 다녀라” 그러셔서... 그래도 어머니 아버지가 너그러우신 마음으로 그렇게 해주시니까, 내가 조금씩 설득이 되면서 학교도 다녀야겠구나라는 생각도 하게 됐고. 아버지는 학교는 다니면서 해라 그러시고, 나는 학교는 다녀도 머리는 안 밀겠다, 이런 걸로 실랑이 했다. 결국에는 군대를 갔다 와라, 하나씩만 해 달라... 부모로써 그렇게 말씀하셔서 그렇게 하나씩은 했던 게 내가 그렇게 비뚤어지지 않고 자랐던 계기인 것 같다. 뭐라 그럴까, 너그럽게 잡아주셨으니까.
박준흠 : 여태까지 곡을 많이 썼는데, 그럼 어머님에 대한 곡을 써 볼 생각은 없었나? 못 들은 거 같은데.
원종희 : <깨우지마>라는 곡이 있는데(1998년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 수록), 그게 “이젠 제발 날 그냥 내버려둬~” 그러고. 참 되게 철없죠.(웃음) 어머니한테 들려주면서 “그러니깐 깨우지 말란 말이야” 그러고, 참...
박준흠 : 원종희 씨는 한동안 일명 ‘닭머리’라는 모히칸 헤어스타일을 했다가, 이후 모자를 썼다.
원종희 : 아, 그게 ‘도라구찌’라고. 일본의 펑크팀들도 많이 쓴다.
원종희 (최규성)
“스팽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밴드가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더라, 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작곡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
박준흠 : 라이브클럽에 서기 위한 오디션에서 몇 번 떨어졌다고 들었다. 첫 무대가 라이브클럽 ‘스팽글’이었나?
원종희 : 홍대에서는 첫 무대가 스팽글이었다. 그 전에 신사동 ‘화이트 스튜디오’라는 합주실에서 몇 번 공연했다. 거기 제일 큰 방이 한 시간에 2만원이었나... 거기 사장님한테 얘기하고, 12만원에 6시간 빌려서 공연했다. 그게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박준흠 : 라이브클럽 ‘드럭’ 오디션에서는 왜 계속 떨어진 건가?
원종희 :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까, 그 때 드럭에서는 민주적으로 소속 밴드들이 다 같이 투표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다 찬성을 했는데, 크라잉넛 멤버들이 계속 반대를 해서 떨어졌다고 하더라.(웃음)
박준흠 : 그 당시에 드럭 오디션을 보는 팀들이 많았었단 얘긴가?
원종희 : 그랬을 것 같다. 그 때 ‘껌’은 합격했다. 나랑 같은 중3이었는데.
박준흠 : 그러다가 스팽글에서 공연한 게 1997년 정도인가?
원종희 : 그랬을 거 같다. 드럭을 처음 알게 된 건, 누나 친구가 내가 밴드한다는 걸 알고서 홍대에 드럭이라는 클럽이 있는 데 가면 좋아할 거라고 소개를 해서였다. 오디션 떨어지니까 거기 말고 다른 클럽도 있다더라 해서 찾아갔던 게 스팽글이었다. 거기서 보람이 형(이보람. 밴드 ‘삼청’의 보컬/베이스)과 스팽글 사장인 성숙이 누나(조성숙. 후에 쌈지스페이스 내의 공연장인 ‘바람’ 운영)를 만났다. 내가 집이 없는데 여기서 자도 되겠습니까해서...(웃음)
박준흠 : 스팽글에서는 공연 자주 했었나?
원종희 : 많이 했다. 금요일에도 많이 하고, 가끔씩 토요일에도 하고.
박준흠 : 그러면 자작곡은 고등학교 때 많이 만들었나?
원종희 : 스팽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면서부터 밴드가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더라, 라는 얘기를 들으면서 자작곡을 많이 만들기 시작했다.3)
박준흠 : 스팽글 같은 경우가 다른 클럽들하고 다르게 창작곡 연주를 많이 원했는데.
원종희 : 맞다. 너네가 자작곡을 연주 해야지, 그러면서 조언을 많이 해줬다. 그래서 자작곡을 만들어야 된다는 압박을 받았다.(웃음)
(최규성)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 시작 부분에 관해 듣고 싶다. 1998년에 클럽 ‘하드코어’에서 럭스와 같이 활동했던 ‘결.애.사’, 송지욱 등과 [우리는 한마음(‘98 펑크대잔치)]4)을 제작한 것이 시작이었는데.
원종희 : 문화라는 게 발전을 해가는 과정에서 하나의 새로운 콘텐츠에 대한 카테고리가 생길 때는, 아티스트들이 직접 홍보랑 매니지먼트 포함해서 발로 뛰는 모양새를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는 것 같다. 특히 펑크도 그렇고 인디 씬 전체가. 90년대 중반에 한국에 펑크랑 같이 인디(문화)가 왔으니까. 그 때 당시에 홍대에 드럭이 생기고 스팽글이 생기고 이러면서 뭔가 만들어지고 있던 그 시기에, 사실상 누구나 다 “음반은 어떻게 내지? 공연은 어디서 해야 되지? 합주는 어디서 하지?” 그러면서 서로 막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던 시기였다. 그 시대적 상황에 비해서 스컹크레이블은 그냥 다른 쪽은 안 보고 내부만 보면서 커왔던 거 같다. 그 때 분명히 인디레이블이란 곳이 있었고, 거기서 삼청교육대 음반도 발매해주고 여러 음반을 발매 해줬는데 우린 그걸 모르고 있었으니까.(웃음) CD 내는 건 둘째 치고 “테이프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걸 어떻게 만들지?” 이러고, 여기저기 합주실이 많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합주실 만들어놓고, “공연을 드럭에서 안하면 또 어디서 해야 하지?” 하면서... 외부를 찾아다니기보다 우리가 만드는 것에 더 집중을 했던 거 같다. 그러다보니까 사실상 생겨야 할 건 스컹크레이블 안에서 한 번씩은 다 생겼다. 합주실, 공연장, 음악상품을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 샵이나 스컹크레이블 홈페이지, 그리고 그에 따르는 구조적으로 음반을 발매하기 위한 사업자등록증에서부터 바코드 생성까지. 유통도 직접 했었고.
박준흠 : 스컹크 레이블 설립 이후의 진행은 어땠나?
원종희 : 음반사가 되기 위한 기본은 다 한 번씩은 찔러봤던 거 같은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매출과 생산원가를 맞춰야 하는 과제에 당면했을 때 이건 어찌 됐건, 한 명 아니면 두 명이서 일을 다 해야 되더라. 그래야지 이 사람들이 실질적으로 생활을, 밥 먹고 자면서 일을 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그에 비해서 일은 점점 많아지고 커지고, 시대적 상황은 펑크가 부흥기였고 밴드들은 많았고, 스컹크레이블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고, 다 받아주고 싶은데 어떤 걸 기준으로 받아야 되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럭스를 하고 있으니까 럭스랑 비슷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을 받아야겠다 해서 받고 그 친구들의 음반을 발매해줬다. 그런데 한 명 아니면 두 명이서 홍보, 프로모션을 잘 하면서 밴드들 공연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했기 때문에 음반을 발매해도 많이 판매를 하지 못했다. 실질적으로는 외부의 도움, 평론가분들이나 어떤 사람들이 그걸 발굴해서 다른 데로 끄집어내서 “어, 이거 좋은데” 할 때는 이게 좀 팔렸다. [3000 Punk]가 괜찮은 음반이다 이러면 KM-TV에서도 와서 인터뷰도 한번 해 주고. 하지만 그런 도움을 받지 못하면 확 죽더라. 자체 시스템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펑크들이 독불장군식으로 우린 너희들 없이도 잘 할 수 있어 이러면서 2003, 2004, 2005년을 넘어오면서 잘 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은 했는데, 실질적으로 그렇게 되진 않았다. 밴드들은 “아무도 우리 음악을 듣지 않아도 우린 음악을 계속 할 거고, 아무도 우리 음악을 좋아하지 않아도 우린 공연을 계속 할 거다”라고 말은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 그 음악을 만들기에는 열정이 계속해서 사그러들었던 게 펑크밴드들의 실정이었던 거 같다. 그렇게 죽 거치다보니까 특히 2005년 무렵부터는 ‘펑크의 시대’가 아니었고, 인디에서도 트렌드가 바뀌었다. 펑크밴드들은 이제 힘들만큼 힘드니까 남을 자들만 남고 힘들어 하는 자들은 다 빠졌다. 그 남은 자들마저도 우리가 음악을 하는 사람들인지 친구들인지...(웃음) 친구들이 무대에서 서로 노래를 하고 있는 건지, 밴드들이 사람이 안와서 이렇게 놀고 있는 건지. 반농담식으로 재밌게 놀다가 결국에 지금 이 시점에서 스컹크레이블은, 우리가 충분히 이 ‘시스템’을 봤고 충분히 이 ‘시스템’을 이해를 했다는 결론이 내려지면서 그럼 우리도 더 이상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했다. 시스템에 우리가 몸을 담고 속해도 되겠다 생각하면서 스컹크의 이상적인 방식을 과감하게 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됐던 거 같다. 그게 2007년쯤이다.
박준흠 : “시스템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게 정확하게 어떤 의미인가?
원종희 : 나도 럭스라는 밴드가 어느 레이블에 소속되는 게 참 싫기도 싫었지만 두려움도 같이 있었던 것 같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과연 그들이 우리의 목소리를 제대로 받아줄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밴드도 이만큼 했고, 어떻게 굴러가는 지도 다 알게 됐다. 그러니까 녹음비가 얼마 정도 되고, 음반이 팔리면 유통마진이 얼마고 밴드한테 돌아가는 게 얼마 정도인지를 구체적으로 다 알고 있는 상황에서는 남들한테 맡겨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다.
박준흠 : 그래서 최근에 럭스의 매니지먼트를 다른 곳에서 하는 것인가? 도프뮤직에서 럭스 홍보사진을 본 거 같은데.
원종희 : 도프와 계약을 하면서 음반을 도프에서 발매를 하기로 했다.
박준흠 : 그럼 3집이 도프에서 나오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박준흠 : 그러면 스컹크레이블에 있던 다른 밴드들도 비슷한 입장인가?
원종희 : 그렇다. 그런 것에 대해서는 스컹크의 입장을 제대로 설명해줬다. 우리가 좋다고 우리끼리 있지만 이건 우리끼리 해서는 일이 안된다. 왜 일이 안되냐면, 우리끼리는 일이 하기 싫기 때문이다. 우리가 서로 얼굴을 붉혀가면서 이렇고 저렇고 말하고 싶지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일을 같이 못한다. 일은 다른 사람들이랑 하자. 너희 음악도 충분히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좋은 음악이니까 다른데 가서 싸워라. 그러니까 다른 레이블에 소속돼서 거기 레이블 사장과 싸우면서 니들 음악을 해라. 우리끼리는 놀자. 스컹크레이블은 남겨두자. 스컹크레이블 만들어놓고 놀던 그 시절은 그대로 남기자고 판단한 거다.
박준흠 : 그럼 여기 스컹크레이블에서는 당분간은 더 이상 음반을 안낸다는 건가? 레이블만 남겨두고?
원종희 : 도프의 윤준이 형이랑 얘기를 한 게, 종희 너도 잘 아는데 뭐 나한테 이걸 맡기냐해서 “아, 우리는 음악만 할 거고, 우리는 도프에 충성을 다하겠다”(웃음) 이러면서 “우린 형이 시키는 거 안 하고 그러지는 않을 거니까 잘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윤준이 형이 “그래도 스컹크를 도프의 산하로 남겨두자. 나는 부담스러워서 못하겠다. 럭스가 스컹크에서 안 나오고 도프에서 나오는 것도 내가 봤을 때는 웃기다. 그러니까 도프랑 스컹크 로고를 같이 띄우자. 그리고 도프 소속 밴드들 중에서도 앞으로라도 럭스랑 비슷한 스타일의 밴드들이 있다면 도프랑 스컹크를 같이 겸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우리 스컹크는 일을 안 하는데 왜 스컹크 로고를 집어넣냐고... 그냥 뽀대로 넣자... 그렇게. 윤준이 형은 아무래도 펑크에서는 스컹크가 큰 비중을 갖고 있으니까 자기 개인적으로도 스컹크는 남겨두고 싶다고 해서, 도프랑 스컹크를 같이 하고 “내가 종희 너한테 조언을 좀 받겠다”라는 얘기를 했다. 조언 줄 건 없겠지만 그럼 그렇게 하자, 이렇게 정리됐다.
박준흠 : 괜찮은 방식 같다. 원래 스컹크 쪽에서 나와야 될 음반을 도프 쪽에서 내게 됐을 때는 스컹크 로고 넣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다.
원종희 : 굳이 도프가 아니더라도 GMC도 점점 확장을 하고 있고, 엄청 많은 레이블들이 우리 밴드들을 반겨주진 않겠지만(웃음) 그래도 밴드들이랑 같이 뭔가를 만들어가고 일을 해나갈 의사는 있다고 본다.
박준흠 : 그런데 스컹크만큼 간섭을 안 하는 레이블과 계약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원종희 :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만큼 또 일을 하게 되니까, 멀리 봤을 때 그건 분명히 밴드한테 득이 될 수도 있다. 외국의 예를 들면 배드릴리전이 만들었던 ‘에피탑’ 레이블이, 재밌게도 지금 메이저 음반사가 돼있다. 펑크라고 하기는 좀 그런데, 분명히 그쪽도 많은 걸 포기했을 거 같아요. 친구들과 비즈니스를 하다보니까 내가 너랑 먼저 친구였는지, 먼저 밴드와 레이블간의 관계였는지... 그런 것들을 포기하고 갔을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엄청 많은 노력과 투자와 운도 따라주었을 것이다. 스컹크는 그러지 못했던 거 같아서 어떻게 보면 포기다. 우리는 성장하지말자, 그냥. 스컹크는 지금 소속밴드가 두 팀이 있으니까 세 팀이 늘어도 네 팀으로 늘어도 앞으로는 비즈니스를 하지말자는 취지로.
박준흠 : 아까 평론얘기가 잠깐 나왔는데, [우리는 한마음]하고 [3000 Punk]에서 그런 얘기도 하지 않았나? ‘구차하게 평론의 대상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웃음)
원종희 : 그 때 그런 얘기를 했다.(웃음) 그런데 이게 음악을 떠나서 모든 예술도 같다고 해야 되나, 사람들의 속마음 깊숙이는 평가해 주기를 원하고 그것을 봐주기를 원하는 게 만인의 바람인 것 같다. 하지만 다치고 싶지가 않으니까, 자기가 소중하게 만들어 낸 자기의 창작물이 남들에 의해서 난도질 당하는 게 싫으니까, 그렇게 말을 내뱉는 데 어떻게 보면 일종의 위악이다. 나는 그렇게 판명을 지어버렸는데, 과연 그런지 아닌지는 모르겠다.
박준흠 : 평론 관련해서 얘길 좀 하면, 평론가마다 평론에 대한 입장이 다르다. 아주 개인적인 비평을 하는 사람이 있고, 나 같은 경우에는 음반가이드 역할을 하려는 게 더 강하다. 음반가이드 역할이란 게, 음악생산물이 많이 나왔는데 소비자들은 그 많은 생산물들을 다 접해볼 수는 없기 때문에 누군가가 중간에서 별점을 매기든 다른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정리를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는 음악산업 안에서의 매체 역할을 의미한다. 당장 한국만 해도 1년에 음반이 천 장씩 나오는데 그런 방법론이 있어야지 ‘정상적인 소비 구조’를 만들 수 있지 않겠나. 여기서의 문제는 한 평론가의 평론방법이 아니라 그 평론가가 과연 ‘일관성’ 있는 평론을 하는가의 문제이다. 심하게 얘기해서 어떤 평론가가 편파적으로 보일정도로 특정 취향을 강하게 드러내는 경우라도 그 평론가가 정확하게 일관성만 지켜준다면, 그 특정 취향에 동의하는 음악소비자들한테는 분명히 가이드 역할을 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말해서 ‘지당하신 말씀’만 읊조리는 평론이 더 문제이고, 색깔 없는 평론가들만 모여 있는 것은 음악씬을 생각한다면 해롭기까지 하다. 가장 이상적인 평론 환경은 각자의 태도와 취향이 분명한 평론가들이 다양하게 구성된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게 음악평론에 대한 내 개인적인 입장이다.
원종희 : 그렇다. 그게 아마도 서로 꽤나 오래 지켜봤을 때 그 진가가 나오는 것 같다.
박준흠 : 나 같은 경우는 평론에서 두 가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하나는 평론가로서 ‘일관성’을 지켜야 한다는 게 있고, 왔다 갔다 하면 안 되잖나... 또 하나는 뮤지션과 음악수용자 사이에 있는 평론가가 결정적인 순간에 누구의 편에 서 있어야 하는가의 문제인데, 내 생각에 음악평론가는 음악수용자 편에 서 있어야 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원종희 : 그렇다. 음식평론가가 식당 편에 서있으면 안되겠죠.(웃음)
박준흠 : 그러니까 음악평론가가 음악수용자 편에 선다는 얘기는 어떻게 보면, 여러 부류에게서 좀 욕을 먹을 소지가 있더라도 음악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평가를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이다. 그렇다는 얘기는 특정 뮤지션을 영원히 지지하기 어렵다는 말이고, 뮤지션들하고는 항상 일정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말이다. 솔직히 나라고해서 뮤지션들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지 않겠는가?(웃음)
원종희 (최규성)
“내가 내 진심을 과연 어떻게 다 언어로 내뱉을 것이며 박준흠 씨가 생각하는 진심이 담긴 그 질문들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싶은 그걸 또 어떻게 다 표현을 할 것인가”
박준흠 : 럭스 멤버들은 다 가사를 중시하고, 좋은 가사도 많다. 고등학교 무렵부터도 가사 쓰는 부분에 있어서도 남다른 생각이 있었나?
원종희 : 남다른 생각은 없었다. 한국말로 뭔가 가사를 쓰는 게 되게 어렵더라. 그 단어를 뱉기가 민망하기도 하고. 그래서 최대한 안 민망하고 최대한 닭살 돋지 않는 가사들을 찾으려고 노력을 했다.(웃음) 그런 생각으로 가사를 썼던 거고, 그 외 뭐 별다른 건 없었다.
박준흠 : [우리는 한마음](1998)이나 [3000 Punk](1999)에 있는 노래들은 영어 가사고, 그 다음에 나온 첫 번째 EP [I Gotta Go](2000)는 앞에 다섯 곡은 영어 가사고 뒤에 두 곡(<새><덤벼라 덤벼 이 개 씨발놈들아>)은 이주현 씨가 만든 한글 가사다. 혹시 이 음반에 담겨 있는 이주현 씨 노래들을 좀 다르게 받아들인 게 있었나?
원종희 : 나도 이 음반에서 제일 좋은 노래를 꼽으라면 그 두 곡이다.
박준흠 : 왜냐면, 이 음반을 처음 들었을 때 <I Gotta Go> 한 곡을 빼고는 초반 다섯 곡들은 다른 펑크밴드들의 노래하고 비슷하다는 생각했었지만, <덤벼라 덤벼 이 개 씨발놈들아> 같은 노래는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었기 때문이다.
원종희 : 그 때 소리바다에 한창 엽기로 많이 뜨고 그랬다.(웃음)
박준흠 : 이후 군대를 갔는데, 군대 갔다 와서 노래가 많이 달라진 것 같다. [I Gotta Go]하고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하고는 창작에 있어서 간극이 많아 보인다. 그 중간에는 어떤 생각들을 많이 했나?
원종희 : 군대에 들어가서는 모든 이들이 그렇듯이 제대할 날짜만 기다리면서 제대하고는 진짜 밴드를 제대로 해야지 하면서 이를 갈았다. 2년 동안. 제대하고 나면 앨범도 많이 내고 공연도 많이 하고 재밌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진짜 컸다. 그리고 군대 2년은 거의 스프링 같이 사람이 꽉 눌린 것 같다. 그러다가 제대하면서 2년 동안 눌렸던 게 펑하면서 튀는 거다. 그 때 군대에 있는 동안, 특히 상병, 병장 꺾이고 부터는 할 일이 없었으니까.
박준흠 : 혹시 그 때 습작 같은 걸 했었나?
원종희 : 그렇다. 행정보급관한테 허락받고서 콜라텍에 합주실을 만들어놓고 거기서 밴드도 하고 그랬다.
박준흠 : 1집의 신곡들은 언제 만든 노래들인가?
원종희 : 2001년 군대 병장 때쯤부터. 멤버들이 다 같이 휴가를 맞춰서 나와서 공연하고, 합주도 하고 그랬다. 그러니까 2001년부터 2004년 초까지 3~4년 동안 랜덤하게 만든 노래들이다.
박준흠 : 이 음반에서 <지금부터 끝까지>나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도 그 때 만든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내가 23살 때 쯤.
박준흠 : 솔직히 얘기하면 1집은 처음에 아무런 기대 없이 들었던 음반이다. 그런데 음반을 들으면서 “아, 이 사람은 가사를 문학적으로 훌륭하게 쓰는 사람은 아닌데 보통 그 나이 때 한국의 다른 또래들이 갖고 있지 않은 통찰력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가사를 들여다보면서 그걸 어떻게 체득하게 된 건가, 라는 의문 같은 게 있었다. <지금부터 끝까지>, <언제나 이 자리에>, <우린 어디로 가는가>, <전진>, <세상의 중심>, <전쟁>은 한국에서 굉장히 보기 드문 ‘세상에 대한 통찰’이 담긴 가사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보면 대개 한국의 그 나이 또래의 청춘들이 ‘나이에 걸맞는 고민’이 부족한 상태로 살아서 원종희 씨의 가사가 돋보이는 것일 수도 있고. 또 한편으로 좀 심하게 얘기하자면, 예전 20~30대 때 치열하게 운동했던 분들 중에서 40대가 되면서 변절한 사람들은 이런 가사를 보고 반성해야된다는 생각까지 하게 만든다.(웃음) 흔히 말해서 인텔리가 아닌 펑크뮤지션이 이런 가사를 쓰는 게 나는 놀라웠다. 그래서 이런 가사들이 나오게 된 그 과정이나 생각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원종희 : 아휴, 과찬이다. 그게 나는 그냥 밴드들을 만나면서 그 밴드들한테 느끼는 생각들이었다. 뭐 너무 광범위하게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짚어보면 우선 <지금부터 끝까지> 같은 경우에는 밴드를 끝까지 하자. 합주실에 앉아있다 보면 “얘네들이 지금은 밴드를 다짐 다짐하면서 하는데, 과연 이게 언제가지 갈까?” 그런 생각이었고, <우리는 한마음> 같은 경우는 “어떤 음악을 하든 간에 우리는 똑같이 한마음이구나”하는 생각. 밴드들이랑 같이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느낀 감정인데, 그게 또 어찌 보면 사람이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사람한테 느끼는 감정은 누구나 좀 비슷하잖나? 꼭 그게 밴드라는 타이틀을 벗어나더라도 사람 대 사람으로서의 얘기를 한 거였기 때문에 공감될 수 있는 부분이 많이 있지 않았을까.(웃음) 나도 지금에 와서 옛날 가사들을 다시 보면 “아, 이게 이렇게도 해석이 되겠다”라는 느낌을 받으면서, “과연 내가 그때 이런 생각을 다 하지는 않았겠지”라는 생각도 한다.
박준흠 : 해석이 달리 된다는 측면은 뭔가?
원종희 : 그러니까, 분명히 나와 나의 아버지에 연관시켜서 그 가사를 쓴 게 아닌데, 나중에 내가 아버지랑 갈등을 하다가 방에 들어와서 내 음악을 듣다보면 “어, 이거 아버지랑 내 얘긴데”라는 느낌을 받게 되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는 내가 되게 좋아하는 명곡들이 어떻게 보면 처음에 그 사람들이 만들 때는 그걸 의도한 게 아니었을 수도 있다. 영화도 예를 들어 어떤 장면이 있는데 영화평론가가 해석하기를 “아마 감독이 악당이 꼭 악당만은 아닐 것이다라는 걸 보여준 것이다” 했는데 사실 감독은 그 장면이 그냥 예뻐서 붙인 걸 수도 있다. 그런데 그게 잘 모르겠는 게, 어딘가는 그게 뇌리에 있으니까 표출이 되는 거겠죠? 내가 거창하게 거기에 대해서 얘기할 수는 없는 거 같다.
박준흠 : 10대 때부터 혼자서 생각하는 시간이 좀 많았나? 왜냐하면 가사를 보면 원종희 씨는 세상을 보는 자기만의 시선이 명확한 것 같기 때문이다. 그게 거의 10대쯤에 결정된 생각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한다.
원종희 : 흠... 듀스 때문에 그런가?(웃음) 꼭 그닥 내가 10대 때 혼자서 사색을 많이 한다든가 그렇게 유별나진 않았다. 집을 많이 나갔으니까.(웃음) 집을 많이 나간만큼 혼자 돌아다녔던 시간도 많았고, 모험심이 좀 강했다. 그래서 모험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했던거고, 그건 아마 10대들이 다들 겪으리라고 본다.
박준흠 : 1집에 있는 ‘다짐’에 관련된 여러 노래들은 사회에서 기성세대가 보여주는 실망스런 모습 때문에 “난 그렇게는 안할 거야”라는 류의 다짐인데.
원종희 : 그렇다. “그렇게 하고 싶진 않어.” 이러면서...
박준흠 : 개인적으로는 어떤 부분이 살아가면서 하고 싶지 않거나 닮아가기 싫은가? 제일 되기 싫은 사람의 유형은?
원종희 :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고 그러는 게 제일 싫다. 사람들이 분명히 본심은 같은데, 외형적으로는 공유하지 못하잖나, 그 ‘진심’을. 개개인별로는 모두가 다 잘살고 싶고, 잘하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게 제일 슬프다. 지금 이 공간에서 이렇게 숨 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나와 박준흠 씨는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서 인터뷰를 하는데, 내가 내 진심을 과연 어떻게 다 언어로 내뱉을 것이며 박준흠 씨가 생각하는 진심이 담긴 그 질문들과 나에게 영향을 주고 싶은 그걸 또 어떻게 다 표현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들고. 우리가 말로 하나씩 얘길 하는데 맴돌기만 하지 사람의 진심까지는 다가설 수 없는 그런 것에 대한, 그리고 결국 그걸 포기하는 사람들이 나는 정말 싫은 거다. 이 건물 1층에 청하사장이랑 나랑 진짜로 싸울 때,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밑에서 시끄러우니깐 그래서 싫어하잖나.(웃음) 그런 게 나는 슬픈 거다. 이게 아까 말했던 천국과 지옥의 차이인 것 같다. 어쩔 수 없이 자기가 먹어야 되니까 남들한테 안주는, 그런 것들에 대한 회의? 아니면 되게 애착? 그걸 잡고 싶은데...
박준흠 : 먹고살기 각박한 사회일수록 대개 사람들이 한 20대 후반만 돼도 진심을 숨기잖나. 그런 부분을 원종희 씨는 앞으로도 지양하겠다는 건가? 계속 나이가 먹어도 그 부분에서는 변치 않고 싶은 건가, 그런 다짐인가? 아니면 원종희 씨도 어쩔 수 없이 어느 정도 나이가 먹어가면서 일정 부분 변할 것 같나?
원종희 : 그게... 그냥 변한다기보다 그게 안 되는 것 같다. 어떤 사람이든 그걸 아무리 시도를 했다한들 실천화되지 않는, 하나의 ‘관념’ 속에만 있는 그 무엇인 거 같고. 그걸 안 버리고 계속 그 자세로 살아가겠다는 건, 그러니까 ‘자세’라는 건, 우리가 그 다음 음반 [Another Conception](2004)으로 만들었듯이 ‘또 다른 컨셉’을 취할 뿐인 거다. 내가 진심이 여기에 있다고 그 진심을 드러내고 살 수만 있으면 참 좋은데. 그렇게 살 것 같이 하면서 “아, 나는 세상 사람들이 서로 미워하는 게 싫어요” 이러면서 맨날 기타치면서 그렇게 하는 게 그냥 외형의 컨셉일 뿐이다. 누군가가 뭐 깡패 같은 애들이 와가지고 그 기타 왜 이렇게 시끄러워 그러면서 다 때려부셨다고 했을 때, 그래도 “저는 비폭력입이다” 하면서 두들겨 맞으면서까지 경찰에 신고를 안 하고 그 컨셉으로 계속 그렇게 할 수 있을까?(웃음) 그러면 자기 컨셉을 바꾸게 되잖나? 또 어떤 큰 계기가 있어서 나는 돈 없이도 살 수 있다고 했는데, 돈 없다고 여자친구한테 채이고 하다보면 돈 버는 컨셉으로 자기 자신을 바꾸게 되고. 나는 1층 청하사장이랑 싸우기 싫은데, 그쪽은 날 볼 때마다 거 좀 치우고 살아 어쩌고 이러면서 막 화를 내니까, 그 상황에서 매번 “아유, 죄송합니다” 이러지 못한다. 나도 “뭐, 이 XX야?” 이러면서 싸우게 되는 거다.(웃음) 쌍욕하면서 싸운 적도 많다. 그러니까 내가 청하사장한테 어떻게 감히 진심을 말할 것이며, 청하사장도 진심은 있지만 그건 뭔 발치에 있는 거고. 실질적으로 외형의 컨셉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계속해서 얍샵하게도 사람들은 바뀔 수밖에 없는 것 같다. 그게 나이가 들었을 때, 내가 이제 사십이니까 아저씨답게 행동해야지 하는 것에도 크게 작용을 하는 것 같다. 사실 그 진심 안에 있는 그 사람은 똑같은 그 사람인데. 그렇게 컨셉을 바꾸는 것에 대해선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쩔 수가 없으니까.
박준흠 : 원종희 씨가 지난 인터뷰에서 얘기했던, “실천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선 함부로 얘기하지 않겠다”는 태도가 있는 것 같다. 이 노래들을 만들 당시에는 그래도 어떤 분노 같은 게 있었나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거라든지...
원종희 : 그런 게 있었다. 뭐 부딪치는 문제들마다 항상 그것들이 보였으니까. 그걸 가사로 많이 썼다.
박준흠 : 그런데 서울예대 방송영상과 진학 이유가 아까 얘기한 펑크뮤지션으로서의 활동 부분 말고 다른 이유가 있나? 특별히 그 학과를 선택한 이유는?
원종희 : 내 개인적으로는, 외부 도움으로 음반을 못 만들면 차라리 우리가 직접 음반 만들지 하는 오기가 있었고, 우리가 활동할 클럽이 없으면 우리가 직접 클럽을 만들지 하는 오기도 있었다. 그리고 뮤직비디오를 한번 만들어 보자는 것도 있었다. 꼭 오기라기보다는 재미가 있었다. 촬영하고 편집하고 영상물을 제작하는 게 개인적으로 많이 끌리는 부분이 있어서 학교를 한번 가보게 됐다. 또한 음악 하는 것과는 별도로 나중에 웨딩촬영이라도 하면서 돈이라도 벌 수 있으니까...(웃음) 뭔가 기술을 갖고 있어야 된다라는 생각도 있고, 배우고 싶었다. 우스개 말로는 MBC 음악캠프 사건(2005년 7월) 이후로 친구들한테는 내가 음악캠프 PD가 돼봐야겠다고도 얘기 했었다.
박준흠 : 1980년생이니까 이십대 후반이다. 이제 내년에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는데, 좀 전에 한 얘기가 삼십대가 되어서도 펑크 뮤지션으로서 활동하는 걸 염두에 두고서 한건가? 아까 얘기한 부업 얘기는 농담으로만 들리진 않는다.
원종희 : 그렇다. 진짜 진심이다. 꼭 웨딩촬영이 아니라도 홍보촬영, 강의영상물촬영 그런 게 괜찮더라. 이렇게 말하면 또 그 쪽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안 되는데.(웃음) 희소성도 있고, 촬영 잘하면 그만큼 돈도 벌 수 있고 하니까, 그걸 내 직업으로 갖고 밴드도 하는 것을 생각하고 있다.
박준흠 : 원래 스컹크에서 나온 앨범들은 사진하고 디자인을 원종희 씨가 많이 하지 않았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했다. 요즘은 전단지 디자인이랑 현수막도 내가 만든다. 되게 열정적으로 하고 있다.
박준흠 : 이쪽에서 디자인 관련된 일을 하는 분으로 박진(전 바세린 기타리스트) 씨가 있다. 박진 씨는 앨범 디자인을 감각적으로 잘하는 것 같더라.
원종희 : 박진 형은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다. 자세히 보면 음악이랑 다 연관이 있는 거 같다. 우뇌가 발달한 사람이 그림도 좋아하고 음악도 잘하고 그런 거 같다. 진이 형은 특히 디자인을 잘한다. 바세린 거나 GMC에서 나오는 거는 다 한다.
원종희 (최규성)
“우리는 무대에서 우리 걸 내뱉기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
박준흠 : 럭스 음악의 특징은 무엇인 것 같나?
원종희 : 그게 문제인 것 같다. 내가 특징을 잘 못 잡고 있는 게.(웃음) 요즘에는 내가 느끼는 게, 가사 말고 음악적으로 너무 비슷하다는 게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박준흠 : 그건 펑크라는 음악적 스타일의 한계 부분이지 않나?
원종희 : 그 포맷의 한계인 것 같은데, 그걸 좀 극복을 하고 싶다.
박준흠 : 어떤 식으로 극복하고 싶나? 생각하는 게 있나?
원종희 : 요즘에 ‘고고스타’나 ‘텔레파시’, ‘갤럭시 익스프레스’ 같은 밴드들이 그걸 대신해주고 있는 거 같다.
박준흠 : 갤럭시 익스프레스도 펑크밴드로 봐야 하나?
원종희 : 펑크라기보다는 록밴드다. 은하계 록밴드...(웃음) 그런데 내가 봤을 때는 펑크인 거 같기도 하다. 아마 주현이 형이 음악이 들리는 거에 되게 민감하기 때문에 럭스에서 다 채우지 못한 것을 갤럭시 익스프레스에서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고고스타나 텔레파시 같은 밴드를 봤을 때도 새로운 것을 찾아가는 모습이 부럽긴 하다.
박준흠 : 럭스가 그 정도까지 음악적인 외연을 넓히기는 어렵지 않을까?
원종희 : 그렇다. 지금 멤버들이 다룰 줄 아는 악기가 기타, 베이스, 드럼, 보컬이니까. 럭스 음악을 얘기할 때, 우선 아쉬운 점은 그거다. 우리만의 특징이라면 아까 얘기했지만 가사를 웬만하면 들리게 노래를 하고 싶다는 것, 그리고 웬만하면 남 얘기 안하고 우리 얘기를 직접적으로 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가수들이 남들의 대리만족을 위해서 자신들의 상황을 맞춰서 노래를 하는 경향이 있지 않나. 예를 들면 자기는 연인과 헤어져 있지 않는데 헤어진 연인에 대해서 노래를 불러주면 헤어져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들으면서 슬퍼하잖나? 정작 가수 본인은 안 슬픈데. 그게 좋고 나쁘고는 아니고, 우리는 그 반대 경우다. 남들은 그렇게 생각 안하는데 럭스 멤버들이 생각하는 것을 노래로 만들면, 그 때 멤버들끼리 서로 얘기를 하고 동감을 하지 않겠나. 사람들한테 들려줬을 때 조금이라도 동감을 하는 사람들은 들어달라는 게 우리 음악의 특징이다. 남 얘기를 하는 건 참 힘들더라. 일하는 느낌이랄까? 내 생각에 일하는 느낌으로 가수를 할 수 있고, 일하는 느낌으로 노래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게 가능할 것 같고, 그게 완벽하게 다 채워지려면 돈도 벌어야 한다.(웃음) 내가 일을 했는데, 남들의 언어로 내가 대신 얘길 해주면서 “아이고, 힘들어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으면 돈을 벌어야지 집에 가서 소주라도 한 잔 마시고 그럴 것 아닌가. 일을 했으니까. 우리는 무대에서 우리 걸 내뱉기 때문에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돈을 안 준다고 해도 아쉬울 게 없다. 우리는 우리 얘길 하고 내려왔으니 여러분도 여러분 얘기하고 싶으면 올라가서 얘기하고 오라고 말하고 싶다.
박준흠 : 럭스가 개런티를 안 받고도 공연을 하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안 할 것 같다. 나도 팬서비스 차원에서 그렇게 하나 싶었다.
원종희 : 특히 좋아하는 자리에서,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아는 사람들, 만약 그런 사람들이 관객 중에 한 10~20%가 된다면 무대에서 노래할 수 있는 게 ‘발언권’이 주어진 상태인거다. 내 얘기를 하고 럭스의 얘기를 하고 럭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거니까. 일례로 MT 술자리에서 노래해, 노래해 그러면 아, 뭐... 그러면서 속으로는 잘해야지, 잘해서 한번 보여줘야지 하는 것도 있잖나?(웃음)
박준흠 : 그러고 보니까 지금 대학교 1학년인데 학교에서 MT 갔다 왔나? 거기서 노래도 하고?(웃음)
원종희 : 그렇다. 노래도 하고 그랬다. <내일의 다짐> 같은 거 부르고, 또 너무 시끄럽다 그러면 가요도 부르고...(웃음) 재밌게 놀았다.
박준흠 : 아까도 계속 나온 얘기인데, 가사를 잘 들리게 하고 싶다는 것이 노래를 통해서 본인이 명확하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어서 그런 것인가?
원종희 : 자기주장인 것 같다. 다시 예를 들자면, 내가 청하사장이랑 싸웠는데(웃음) 나는 청하사장한테 이렇게 얘길 했는데 그 사람은 이렇게 말을 해, 그게 말이 안 되지 않냐하면서 가사를 만들어서 친구들한테 불렀다면 그건 속이 시원할 것이다. 친구들이 그걸 들으면서 “음, 맞아. 그때 싸울 때는 종희가 잘했어” 이렇게 얘길 해주면 좋겠죠. 자기 얘기를 하는 것 이상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그들이 듣고 ‘동감’해 주는 것이다.
(최규성)
“웬만하면 신도 나면서 뭔가 음악이 새로운 걸 찾고 싶다.”
박준흠 : 혹시 럭스 노래를 듣고 럭스가 약간 ‘정치적인 성향’의 밴드라고 바라보는 경우도 있나?
원종희 : 그렇다. 예전에 서정민갑 씨가 5.18 관련해서 같이 음반(2006년에 5.18기념재단에서 만들었던 [5월의 노래])을 만들자고 해서 나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냥 작업을 시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서정민갑 씨가 럭스의 음악은 되게 선동적이고, 럭스의 음악은 운동권 음악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난 그때까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럭스의 가사들을 그쪽 퍼즐에다가 딱 끼워 맞추니까 많이 들어맞더라. <지금부터 끝까지> 같은 노래도 그렇고. 럭스의 음악은 운동권이고 좌익에 가깝다, 기존의 것을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오월의 노래>를 좀 불러달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여기저기서 얘길 들어보니까 5.18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라. 그래서 “어, 이건 아닌 것 같아” 하는 판단이 들어서 이걸 우리가 구체적으로 더 들어가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준흠 : 그래서 하다가 그만둔 것인가? 그 때 녹음까지 다 하지 않았나?
원종희 : 그렇다. 내가 서정민갑 씨한테 피해를 많이 끼친 것 같다. 그때 내가 너무 섣불리 수락을 하는 바람에. 나는 당연히 5.18이면 20년도 더 된 얘기고, 오래 전 일이라서 해도 되겠다 싶었다. 분명히 지금도 억울해 하는 분들이 있고, 반대로 거기에 대해서 자기는 가해자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기 때문에 내가 이 노래를 어느 한 편에 서서 부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절 가사와 2절 가사가 있는데 2절 가사 부분을 들어내고 1절 가사만 반복해서 다시 불렀다. 녹음한 게 아까워서. 돈도 냈고 해서.(웃음) 그게 지금 [스컹크 컴필레이션](2006)에 들어가 있는 노래다.
박준흠 : 그게 그 때 녹음했던 그대로인가?
원종희 : 그렇다. 2절은 안 부르고 1절만 두 번 블렀다.
박준흠 : 그리고 나레이션도 추가로 있잖나?
원종희 : 그 나레이션이 그 상황에 대한 우리 입장을 밝힌 거다. <오월의 노래>이니까 5.18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는 걸 한국말로 얘기하면 너무 닭살스러우니까 영어로 얘기한 거다.
박준흠 : 그 부분에 대한 얘길 좀 더 해본다면?
원종희 : 제 3자의 입장에서, 제 3자라고 말하기에는 너무 그런가... 그 때 그 현장에 없었던 사람으로서 그 사건을 해석하자면, 분명히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수많은 사람들이 무차별적으로 당했고, 그런 일은 반복되면 안된다라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었건 간에 거기서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들,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던 사람들은 희생자들이고, 그들은 보상을 받아야 될 필요가 있고. 사실 5.18 비숫한 일들이 해외에서도 많이 있었잖나? 남미 쪽에서도 그렇고. 이런 일들은 전세계에서 반복되고 있지만 더 이상 없어야 되고, 우리는 그때 5.18을 노래하면서 또 한번 경건한 마음으로 기억할 필요가 있다는 것.
박준흠 : 그러면 음반기획이 어떤 형태였다면 럭스가 참여할 수 있었을 것 같나? 어쨌든 럭스는 본인들이 생각하지 않는 다른 방향에서 읽혀지는 게 싫어서 빠졌다는 얘기잖나?
원종희 :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원래 기획의도가 그렇게 좌파적인 의도가 아니었던 것 같던데...(웃음) 내가 못하겠다는 생각을 한 게, <오월의 노래> 안에 전두환 씨에 대한 가사도 있고, 구체적으로 비꼬아서 말하는 내용들이 많더라. 그것들 때문에 내가 안 하려고 했던 거였다. <오월의 노래>를 불러 달라고 서정민갑 씨가 나한테 제의를 했을 때만 해도 그 노래가 구체적으로 어떤 가사인지 자세히 몰랐다. 알고 보니까 음반의 의도는 내가 추측했던 것은 아니었다.
박준흠 : 5.18기념재단에서 기념 측면에서 한 거였다. 어쨌든 <오월의 노래>가 여태까지 럭스 노래들 중에서 편곡이 제일 화려한 것 같다.
원종희 : 앨리스 인 체인스를 예전부터 좋아했었는데, 이 때 한참 그들 음악을 듣고 있을 때였다. 드럼치는 상현이 형도 그런 얼터너티브록 밴드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우리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은 음악성으로 한번 가보자... 그래서.(웃음)
박준흠 : 그 곡에는 기타도 3명씩 들어갔는데.
원종희 : 그때 럭스 멤버가 상현이 형이랑 나밖에 없었다. 아, 태선이라고 지금 고고스타에 있는 그 친구가 막 들어왔을 때라서 멤버들이 없었을 때였다. 수많은 친구들이 다 피처링을 했던 시기였다. 이걸 녹음하던 시기에 그 친구들한테 그 앨리스 인 체인스 같이 만들어보고 싶다고 해서, 곡 기본 골격을 잡아놓고서 칵크래셔에서 가타 치는 승준이한테 막 좀 더 쳐...(웃음) 그렇게 만든 기억이 있다.
박준흠 : 그런데 그런 식으로 왜 더 안하나?
원종희 : 그게 신이 안 나더라. 그런 노래가 듣기에는 좋은데 라이브할 때 신이 안난다. 상현이 형이랑 내가 맨날 얘기하는 게, 이 <오월의 노래>가 듣기에는 우리 노래들 중에서 제일 안 거슬리는 거 같은데 라이브할 때 이렇게 재미가 없을 수 있냐고 항상 그랬다.
박준흠 : 아까 럭스의 음악적 외연을 넓히는 문제를 얘기했었는데, 당연히 라이브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스튜디오 EP 정도로 따로 만들 생각도 안 해봤나?
원종희 : 아, 그것도 좋다. 음반에 대한 욕심은 항상 많은 것 같다. 그런데 웬만하면 신도 나면서 뭔가 음악이 새로운 걸 찾고 싶다.
박준흠 : 럭스의 멤버가 원종희 씨 말고는 계속 바뀌었다. 그 중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럭스의 음악이랄까, 아니면 본인한테 잘 맞았던 포메이션이 어떤 시기였던 것 같나?
원종희 : 음악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는 맨 처음에 강동일, 이대희, 이주현, 원종희 이렇게 했을 때다. 그 때는 맨날 합주실에서 연습하고 그랬었다. 합주가 너무 재밌었다. 계속 합주실에서 드럼도 쳐보고 이러면서 노래를 만들 때였다. 누구 한명이 악상을 갖고 오면 그걸 멤버들에게 풀어내는 게 아니고 계속 합주실에서 만들어가는 거 있잖나. 그게 음악적으로 제일 좋았던 것 같은데, 내 생각에는 멤버들의 상태가 다 음악적 발전 단계가 같아서 1에서 시작해서 2, 3, 4, 5 올라가던 그 시기라서 그렇게 재밌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각 멤버들이 다 다르니까. 예를 들자면, 주현이 형은 베이스 레벨이 70인데 형민이는 드럼 레벨이 20이고, 나는 보컬 레벨이 한 50인데 박건우 씨는 기타 레벨이 55고... 이러면 합주가 재미가 없더라.(웃음) 자기는 상대적으로 얘에 비해서 잘하는 데 얘는 그걸 못 치니까 답답해서 합주를 못하겠는 거고... 그런 게 다들 있어서 주현이 형도 그렇고. 얘들이 실력이 늘어야 될 텐데 그러면서 밖에 나가서 담배 한 대 피고. 그래서 음악적으로는 초창기 때가 제일 재밌었다.
박준흠 : 그런데 1집 [우린 어디로 가는가] 시기에 만든 신곡들은 원종희 씨하고 박건우 씨가 같이 만든 노래들(작사 원종희, 작곡 박건우)이 많잖나? 그리고 노래들도 잘 나왔다. 박건우 씨하고는 잘 맞았던 게 있었나?
원종희 : 건우는, 음악이 결코 제가 좋아하는 음악 스타일은 아니었다. 건우가 가져오는 음악들은 되게 신기한 것도 많았고... 그런데 럭스에서 건우가 시도하고 싶었던 것들은 너무 기타 위주의 곡들이었다. 그걸 최대한 섞어냈던 게 건우랑 같이했던 곡들이었다. 그 당시에 나뿐만이 아니라 주현이 형도 “건우가 추구하는 스타일이 우리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 같아. 그렇지만 그걸 이런 식으로 소화를 시켜보자. 건우도 삐지면 안 되니까” 이러면서 자꾸 녹였다.(웃음) 건우의 기타 위주의 곡들을... <Old & New>나 <Knock You Down>, <Another Conception> 이런 곡들이 그랬다. 건우가 워낙에 기타에 대한 시도들이 컸기 때문에, 기타를 휘황찬란하게 만들어 오니까 그걸 암만 녹여도 신기한 곡이 됐던 것 같다.(웃음)
박준흠 : 박건우 씨는 지금 어디에서 활동하나?
원종희 : 텔레파시에서 활동한다. 한참 여러 밴드들을 하다가 지금은 텔레파시에서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건우는 예나 지금이나 새로운 걸 좋아하고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데, 그 시도가 럭스가 시도하고 싶은 방향이랑 약간 달랐던 것 같다.
원종희 (최규성)
“표현이 좀 너무 그런데... 남자들끼리도 그렇게 ‘걸레’가 되어가는 거다.”
박준흠 : 한국에서 펑크음악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면?
원종희 : 어려운 얘기다. 펑크의 철학, 허무주의와 같은 사상적인 부분은 사실 한국인들의 코드랑 잘 맞는 것 같다.
박준흠 : 원래 한국이 1997년 IMF 사태 이후에 펑크가 번성했어야 하는데...(웃음)
원종희 : 그런데 한국이란 나라가 잠뽕으로 한꺼번에 막 흡수를 하고 있는 이 단계에서, 과연 서양인들이 차근차근 밟아서 겪었던 착오들을 한국인들이 얼마나 순식간에 소화를 해나갈까 하는 건 참 모를 일이다. 미국에서는 거의 80년대 중반에 “이제 더 이상의 펑크는 없다”고 얘기들 했는데. 한국은 특히 인터넷까지 있는 이 시점에서 하루 만에 펑크를 좋아하다가 한 일주일, 한 달 정도 펑크를 듣다가 “에이, 이젠 펑크는 유치하다”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다.
박준흠 : 그럼 한국에서 계속 펑크뮤지션으로서 삼십대에도 활동하겠단 생각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존재할 생각인가? 어떤 자세로, 어떤 음악을 하면서?
원종희 : 그냥 재밌게..(웃음) 지금까지 하던 것처럼 내 스스로 재밌어야 한다.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가 참 중요한 거 같다. 특히 우리 멤버들과 같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가. 몇 번 시행착오를 겪었었던 게, 그동안 내가 좋아하던 멤버들과 결별을 하곤 했으니까 웬만하면 새로 럭스에 들어온 친구들과는 ‘멋있는 인생’을 즐길 수 있는 자세로 밴드를 하고 싶다.
박준흠 : ‘재미’에 방점을 많이 찍는 것 같은데, 혹시 재미없어지면 어떻게 할 건가?(웃음)
원종희 : 재미없어지면 큰일 난다.
박준흠 : 그럼 원종희 씨도 어떻게 보면 기획자 타입이니까, 본인이 재미없어지면 음악을 못하니까 재밌게 음악을 할 수 있는 조건을, 즉 ‘환경’을 계속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나?
원종희 : 그렇다. 그래서 스컹크헬 클럽 문을 닫는 이유에 그 부분이 크다. 맨날 고민하면서 힘들게 이걸 유지해 나가는데, 게다가 밴드들이 그걸 그렇게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재미가 없다. 그래서 더 재밌게 밴드를 하기 위해서 스컹크헬은 없어도 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계속해서 모양새를 변화시켜 가고 있다.
박준흠 : 원종희 씨는 펑크의 ‘유니티(unity)’라고 할까, ‘내부 공동체’ 부분에 대해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 혹시 펑크 유니티라고 하는 집단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모델’로서 보여주고 싶다든지, 또는 “니네가 사는 모양새를 보면 우리가 훨씬 인간답게 제대로 살고 있다” 이런 얘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가?
원종희 : 그건 누구나 그럴 거 같다. 꼭 밴드를 안 해도, 시골에서 농사짓고 사는 사람들도 서울에서 막 치여서 사는 것 보다 여기서 사는 게 낫지 그러면서 배추를 따고 계실 것 같은데... 그거는 모든 이들에게 다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본보기가 되겠다, 이런 거는 본보기가 되고 싶어서 살고 있는 건 아니다. 내가 한번 사는 인생인데 남들에게 본보기가 되기 위해서 내 인생을 말아먹을 순 없다.(웃음)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거지...
박준흠 : 펑크 유니티에 대한 자부심 같은 건 있나?
원종희 : 나는 항상 자부심을 갖고 있다.
박준흠 : 그런데 굳이 비유를 하자면, 한국에서 대개 성인들은 재력이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이런 데서 자부심을 찾으려고 하지 않나? 그런 걸 볼 때, 원종희 씨가 펑크 유니티에서 그런 ‘소박한 자부심’을 얘기할 때는 사람들이 무시할 수도 있을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원종희 :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지게 되는 고민이, 분명히 그들은 고등학교 때 친구도 있고 중학교 때 친구도 있고 유년기에 사귀던 좋은 친구들도 있는데 인생을 살아가다보니까 내가 잘돼야 사람들과 잘 되더라, 이런 문제 때문에 갈라지게 되는 것 같다. 나부터 살고 봐야 되더라. 일례로 노가다판에 나가서 일당 7만원씩 받고 일하는 게 친구들이랑 같이 있고 싶어서인데, 그리고 나는 분명히 내가 공부를 하면 일당 7만원이 아니라 연봉을 1억 정도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단 마음이 있지만, 내가 과연 이 친구들이랑 노가다판을 나가는 게 재밌어서 이러고 있나 아님 차라리 현재 이 친구들과 같이 있는 것도 좋지만 한 10년, 20년 정도 열심히 일해서 연봉이 1억, 10억 이렇게 된 후 친구들을 만난 것을 놓고 고민을 하게 되잖나. 그 때 대부분은 후자를 선택하게 되는 것 같다. 속으로는 미안하다, 친구들아, 내가 우선 잘 돼서 너희들을 나중에 챙겨 줄께 하면서 그 바닥을 떠나잖나.
박준흠 : 그런데 대부분 안오잖나.(웃음)
원종희 : 그렇다. 대부분 못 온다. 그렇게 단기간에 이뤄지지도 않고, 그걸 겪으면서 사람 머릿속이 또 변하니까. 나중에는 결국 그 노가다하던 친구는 어디간지 모르겠고 자기는 부자가 됐는데 밑은 안보이고, 자기는 현재 연봉이 10억인데 100억이 보이고... 그 때 7만원 벌면서 20만원 버는 사람을 부러워했던 그 마음이, 내가 지금 7만원이 아니고 20만원을 벌면 내 친구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텐데 했던 그 마음이, 그런 것들이 지금 내가 10억이 아니고 100억을 벌면 주변 사람들한테 나눠줄 수 있을 텐데... 그렇게 똑같은 마음으로 가는 것 같다. 그럼 다시 시발점으로 돌아와서, 내가 살아야지 친구들도 살더라는 그 마음가짐이 과연 옳았던 건지. 표현이 좀 너무 그런데... 남자들끼리도 그렇게 ‘걸레’가 되어가는 거다. 어릴 때 친구랑 “너랑 나랑 진짜 친구다” 이러다가, 고등학교 때 친구랑 또 그러고, 결국에는 40대, 50대 넘어가면서 “아, 진짜 우리는 변치말자” 이러고... 속으로는 “이렇게 말해놓고도 또 변하겠지. 얼마나 많이 변했는데” 이렇게 생각하게 되는 게 후자를 선택한 쪽인 것 같다. 전자를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나게 가혹한 현실이 온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끝까지 그걸 지킬 수만 있다면 “비록 너나 나나 지금 7만원 벌지만 우린 할 수 있는데 안한 거지 못해서 안한 거 아니잖아” 이러면서 서로 소줏잔 기울일 수 있는 그게 있다면 참 좋았을 거 같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내가 아까도 말했듯이 “스컹크레이블 내부에서도 뭔가 있더라”했던 게, 레이블이 회사 방향으로 커지면서 이 유니티 안에서도 그런 일들이 없지 않아 있더라.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떨쳐내고 저런 사람들은 저렇게 떨쳐내고 하면서 남을 사람들만 남아라 하면서 같이 있는 거다.
박준흠 : 원종희 씨는 이미 오래 전에 ‘전자의 입장’에서 정리를 한 것 같다.(웃음) 그렇게 한 게 아까도 얘기했지만, 개인적으로 행복이나 재미 그게 더 확실할 거 같아서 선택을 한 건가? 그런 확신이 있어서?
원종희 : 그렇다. 나한테는 그게 재미인 것 같다. 그 ‘의리와 우정’으로 느끼는 재미라는 건 진짜 말도 못할 정도로 크다.
박준흠 : 흔히 말하는 ‘강호의 도리’, 그런 데 매력을 느끼는 건가?(웃음)
원종희 : 꼭 그건 아니고, 남녀 관계도 의리가 있는 거고...
박준흠 : 뭉뚱그려서 얘기해보면 펑크뮤지션들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세상이 있는 것 같나?
원종희 : ‘자기가 배척되지 않는 세상’을 원하는 거다.
박준흠 : 그럼 음악 장르에서 펑크 쪽의 뮤지션들이 유독 그 부분에서 더 강한 집을 하는 것 같나? 아니면 차이가 별로 없는 건가?
원종희 : 그렇게 확연하게 차이가 있지는 않을 것 같다.
박준흠 : 그럼 다들 생각은 비슷한데, 몸으로써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게 펑크뮤지션들인가?
원종희 : 그렇다. 직설적으로 뱉는다. 내가 펑크뮤지션이 아닌 뮤지션이 돼본 적이 없어서 다른 뮤지션들 입장을 잘 모르겠는데... 비슷하지 않을까?
박준흠 : 특히 왜곡된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면서 남에 대해 간섭하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에서 펑크뮤지션이 된다는 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닭머리 같은 것을 했을 경우 한국에서 가장 문화적으로 포용력이 넓은 홍대에서조차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 같은데...
원종희 : 예전에 우리 펑크밴드들이 단체로 다 같이 모여서 해운대 쪽에 간 적이 있었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와따, 머리가 성게네, 성게” 그러고 풋풋하게 반응들 하시니까 재밌었다. 그런 걸로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진 않는다.
박준흠 : 일상에서 부딪치는 일들이 실제로 많을 것 같은데. 가족하고도 그렇고 또 사소하게 시비 붙는 일도 있을 테고. 당장 닭머리 한 채 시내버스를 탄다든지 할 때도 그렇고.
원종희 : 그걸 감당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 지나가면서 누가 “머리 한번 만져 봐도 돼요?” 그러면 “그러세요. 한 번에 천원입니다.” 뭐 이러면서...(웃음) 그렇다고 그게 제약이 되진 않을 것 같다. 밴드를 하는 데 큰 제약이 되진 않을 것 같고. 그냥 지나가는데 서로 안쳐다보고 지나가면 마음은 편하지만, 쳐다보고 뭐라고 한다고 해서 다치는 건 아니니까.5)
최근 럭스 모습
“모두에게 백배 사죄드리고 몇 년 감방에서 살라고 하면 살겠다. 즐겁게 음악만 하며 살았던 1년 전,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문화일보, 2005)
박준흠 : 안 물어볼 수는 없고, MBC 음악캠프에 관한 얘기를 하겠다.(웃음) 그 방송 이후에 원종희 씨가 경찰조사 받으면서 기자들한테 했던 얘기들, 그리고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서 했던 인터뷰를 보면 조금씩 입장 차이랄까, 그런 게 있는 것 같다. 지금은 그것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나?
원종희 : 당시 공개적인 인터뷰나 그런 것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때 보니까 내가 처음 경찰서에 연행됐을 때,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와갖고 “어떻게 된 겁니까, 입장이 어떻습니까, 지금 국민들한테 죄송할텐데 사과하실 생각입니까”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저희가 잘못을 했다면 사과를 해야죠. 하지만 우리는 잘못한 거 같지 않아요” 이런 식으로 말을 한 게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많이 방송됐다고 그러더라. 그 당시에 나는 카우치에서 드럼을 치는 샤론이라고 오은정 씨 집에서 승범이 형이랑 몇몇 친구들이랑 같이 있었다. 되게 오랫동안 있었다. 그 때 그 카우치의 승범이 형이 웬만하면 종희 니가 여기 있어라, 나가지 말아라, 그리고 인터뷰는 하지 말아라 그렇게 얘길 했었기 때문에 나도 그래, 안할께 그러고.(웃음) 언론이라는 게 쉬운 게 아니고, 공개방송이라는 게 결코 쉬운 게 아니더라. 그 때는 몰랐다. 그냥 별 생각 없이, 뚝심으로, “공개방송이든 아님 뭐 관객이 두 명 있는 공연장이든 우린 멋있게 공연하고 내려가면 되는 거고. 우리가 우리의 무대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 사람들한테 책임감을 느낄 필요가 있냐?” 이렇게 생각을 했던 것에 비해서 지금은 내가 하도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방송영상학과를 들어가서 공부를 하고 있잖나?(웃음) 수업에서 방송이란 무엇인가, 언론이란 무엇이고 미디어란 무엇이고, 대중이란 무엇인가를 공부를 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는 참 쉽지가 않았던 것을 안다. 그렇다고 내가 그 때 그 시점으로 다시 돌아갔을 때, 후회가 된다거나 아니면 이렇게 행동했으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건 일부러라도 기피하고 있다, 이왕 다 끝난 건데. 물론 그 때 언론과 매체를 다룰 수 있는 시각이 있었더라면 내가 좀 더 다르게 대처를 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 그 때를 안타깝게 생각하지는 않으려고 한다는 것.
박준흠 : 앞으로 다시는 방송 나가기 힘들 텐데...(웃음)
원종희 : 아, 내가 그 때 그런 말도 했어요. “앞으로 방송 안 나갈게요” 이러면서...(웃음) 뭐 안 나가겠다고 했으니까 안 나가야죠.
박준흠 : 나는 그 때 다른 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때 나왔던 많은 얘기들 중에서 원종희 씨가 했던 얘기가 생각난다. 뭐냐면, “지금 현실이 너무 감당하기 힘들어 죽을 지경이다. 사고를 일으킨 두 명의 당사자들은 이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뉘우치고 있다. 모두에게 백배 사죄드리고 몇 년 감방에서 살라고 하면 살겠다. 즐겁게 음악만 하며 살았던 1년 전, 2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이 얘기를 보면서 마음이 아렸던 기억이 있다. 이 얘기가 아까도 얘기했던 원종희 씨의 ‘진심’에 관련된 얘기라면 사람들도 그런 부분을 알아챌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묻혀갔던 거 같다.
원종희 : 언론이라는 게 그런 거 같다. 미디어에서 뭔가가 나왔을 때 대중심리라는 건 진짜 잔혹하다면 밑도 끝도 없이 잔혹하고, 또 아름다우면 엄청 아름답고... 그 포식자들 앞에서 과연 무슨 말이 허용될 것이며, 지금 당장 바로 앞에 있는 1층 가게 사람들이랑 싸우고 있는데 멀찌감치 화면 속에 있는 저 인물들은 죽어 마땅하겠죠. 뭔가 잘못했다 그러면, 죽는 모습을 보고 싶겠죠. 그게 대중심리인 거 같다. 그런데 거기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면서 계속해서 말을 했더라면 어떻게든 그 대중매체 안에서 명맥을 유지할 수도 있었을까?(웃음) 그런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성은 못 느꼈다. 주변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는 여러 많은 것들이 문제가 됐었겠지만.
박준흠 : 그 때 많은 관전평들이 있었잖나. 그 중에는 그 두 분이 숨는 모습이라든지, 굉장히 당황해하면서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차라리 의연하게 대처를 하지... 그런 얘기들.
원종희 : 나도 차라리 섹스피스톨즈 같이 인터뷰할 때 카메라에 침뱉어버리고, 꺼져라 하고, 그런 얘기도 했었다. 그냥 밀고 나가라고. 아마도 이게 아까 그 질문(“한국에서 펑크를 한다는 것에 관하여”)에 맞물릴 것 같다. 아마 그 친구들한테는 생각보다 언론이라는 게 무섭다는 걸 그 순간 알게 됐던 거다. 그 친구들이 무슨 생각을 어디까지 했을지는 몰라도, 그 무대 끝나고 바로 경찰에 연행돼서 카메라가 한 50대 정도가 와서 자기네들을 촬영하고 질문을 무차별로 던지고 하는 그런 상황을 생각 못했을 수도 있다. 그걸 다 생각을 하고 미리 예상을 했더라면, 의연하게 대처를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참 아이러니한 게 그럼 그걸 생각을 못했으면 왜 그렇게 행동을 했고, 과연 뭐가 또 재밌었고... 그 정도는 생각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 거 같아요.
박준흠 : 지금 그 두 분은 잘 있나? 음악 활동은 하는 건가? 카우치 음반 나온 지 한참 된 것 같은데?
원종희 : 지금 활동을 안 하고 있다. 카우치에서 드럼 치는 샤론 오은정이 일본에 유학 가서 두 분만 남았다. 각자 일하고 있고, 밴드는 쉬고 있다.6)
[The Ruckus Army] (2007)
“좋은 가사고 좋은 노래고 좋은 음악이야, 좋아. 헌데 내가 듣기에는 좀 그래. 럭스의 음악은 힘들 때만 들어야 돼.”
박준흠 : 작년에 나온 정규 2집 [The Ruckus Army](2007)에 대해서 얘기를 좀 더 하고 싶다. 이전 음반을 보면 작사자, 작곡자에 개인 이름을 써놓았는데 이 음반에는 다 럭스로 되어 있다. 이유가 있나? 음악도 전작하고는 좀 달라졌는데?
원종희 : 그렇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 [Another Conception] 다음에 얘기하고 싶었던 얘기들이다. 작사자, 작곡자를 그렇게 쓴 건 [The Ruckus Army] 제목 같이 럭스 밴드멤버들 간에 우애를 더 다지면서 “우리는 이제 굳건하게 지내자, 서로 누가 작곡하고 작사하고 그걸 사람들한테 알리는 것보다 우리가 더 일체화되자”는 심정이 크다. 음악적으로 변했다거나 가사 내용에서 변했던 거는 사실상 노래 한 곡 한 곡으로 봤을 때는 그래프가 비슷하다. 진심의 목소리를 아무리 던져봤자 그걸 들어주는 건 표면에 없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에서 우리가 진짜 진심이 담긴 가사들을 얘기했다면 [Another Conception]에서는 우리가 말한 진심 어린 이 가사들마저도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컨셉으로 보일 뿐이다. 그랬을 때 우리의 컨셉은 [The Ruckus Army]다 하면서 머릿속을 텅 비우고 우리가 말하는 가사들은 바보의 머리에서 나오는 거다, 라는 생각이었다.
박준흠 : 왜 굳이 그렇게 얘기를 하려하는가?
원종희 : 우선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고 싶지가 않았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에서 꽤나 많은 것들을 이야기 한 거 같다. 그리고 가장 기초적인 포맷에서 럭스가 할 수 있는 음악들을 좀 다양하게 했던 것 같고, 그 이상으로 더 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더 파고들고 싶었다.
박준흠 : [The Ruckus Army]에서 얘기되는 ‘성난 군중’이, 정확하게 무엇에 성난 군중이인가? 원인이 있으니까 성이 났을텐데?
원종희 : 그냥 뭐랄까... 삶에 성이 났다. 성이 안 나면 재미가 없으니까.(웃음)
박준흠 : 혹시 하고 싶은 얘기들을 안 하고 있는 부분이 있나? 왜냐면 1집에서는 너무도 명백한 얘기들을 많이 쏟아 냈고, 그래서 나이 차이가 나는 나 같은 경우도 공감을 했다. 나도 20대 때 저랬던 거 같은데 하는 생각도 하고. 그런데 [The Ruckus Army]는 뭔가 좀 두루뭉실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음악도 그렇고 가사도 그렇고. 그래서 그들에게 뭐가 달라졌을 까, 아니면 이미 어떤 시기를 지난 건가, 그런 생각도 든다.
원종희 : ‘설득력’을 갖추고 싶은 부분이 큰 거 같다.
박준흠 : 그러면 1집에서 얘기했던 방식이 설득력이 없다라고 생각하는 건가?
원종희 : 그렇다. 내가 굳이 내 입으로 얘기하자면, 요리로 쳤을 때 만약 이게 ‘인삼’이다 하면 맛이 없잖나. 쓰고 텁텁하고. 먹으면 좋은데 맛이 없는 요리를 만드는 것보다는 인삼이 안에 들어있는데 맛도 있는 거다. 그걸 만들기 위해서는 어떤 과정을 거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Another Conception]에서도 한 번 했었고, [The Ruckus Army]에서는 또 한번 더. 인삼을 썰고 끓이고 이걸 안에다 박아 넣자, 어떻게, 하면서.(웃음) 인삼이 들어있으면 사람들은 그렇게 안 좋아할 건데, 그런 느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내 노래에 인삼이 들어있다고 하는 거라서 좀 거만하게 들릴 수는 있겠지만...(웃음) [우린 어디로 가는가] 음반도 우리가 박준흠 씨를 비롯한 여러 평론가들한테 의외의 호평을 들었다. 참 잘 만들었다, 가사도 좋고 등등... 그에 비해서 내 스스로가 이 음악을 듣기에는 금방 질린다. 그리고 가사들이 “끝없는 길 외로이 홀로서서, 정처 없이 자신을 돌아보네”(<언제나 이 자리에서>) 이런 말들이 너무 직설적이라서 살가울 정도로 따가웠다. 나도 그렇고, 내 주변 친구들이 듣기에도 그렇고. “좋은 가사고 좋은 노래고 좋은 음악이야, 좋아. 헌데 내가 듣기에는 좀 그래. 럭스의 음악은 힘들 때만 들어야 돼.” 이런 평가를 친구들한테 많이 받았다. 이건 아마도 인삼이 써서 그렇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럼 이걸 어떻게든 바꿔서 더 맛있게, 더 듣기 좋게 할 수 있을까. 그게 사운드적인 부분만이 아니라 가사 내용에서도 분명히 그 안에 들어 있는데, 그걸 최대한 듣기 좋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우린 어디로 가는가] 다음부터 있었다. 사실 [우린 어디로 가는가] 자체도 [I Gotta Go] 음반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이 다져진 거 같다. 인삼 뿌리를 막 다져서, 그런 설득력을 갖추기 위한 노력이 가미된 게 [The Ruckus Army]라고 감히 말씀을 드릴 수 있다.
[우린 어디로 가는가](2004)
“3집은 ‘인삼’을 좀 더 숨겨서 ‘설득력’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그게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준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계획이다.”
박준흠 : 혹시 3집 곡 작업은 어느 정도 진행이 된 건가?
원종희 : 지금도 그걸 계속 생각하고 있다. 어떻게 하면 그걸 잘 다져서 집어넣을 수가 있을까...(웃음)
박준흠 : 내년 정도에 나오는 건가요?
원종희 : 드렇다. 그걸 안 넣고 그냥 내뱉기에는 내가 너무 섭섭하고, 그걸 넣었을 때는 분명히 또 맥락이 계속 똑같기 때문에 식상할 수 있다고 본다. 조금 더 나아지고 진보된 걸 들려주고 싶은 게 우리 욕심이다.
박준흠 : 청자에 따라서는 오히려 날 것 그대로를 원하는 사람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나? 아무 치장 없이 본질적인 것만 딱 표현하는.
원종희 : 날 것을 만드는 건 그 사람이 날 것이기 때문에 날 것을 만들 수가 있잖나? 그런데 그 사람이 날 것이 이제 아닌데, 계속해서 그 날 것을 만들려고 그런다면 과연 그게 날 것이 될까, 하는 고민도 있다.
박준흠 : 결국 1집 노래 만들 당시하고 지금의 원종희 씨는 이미 많이 달라졌다는 얘기인가?
원종희 : 그렇다. 걸레가 됐다.(웃음) 경험이 더 많이 생겼으니까 분명히 그 경험에 대한 걸 절대 무시를 못한다. 자기가 원래 하던 게 사람들에게 조금 좋은 인정을 받았다고 해서 억지로 자기 자신의 음악을 끼워 맞추는 건 안 좋다고 본다. 그 때 그 당시에 좋은 음악을 뽑아내기 위해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생각하면서 했듯이, 똑같은 시스템으로 계속 가보고 싶은 거다. 그러니까 그 때는 아무 것도 없을 때 고민하고 갈등한 결과물이고, 지금은 전작들이 있을 때 고민하고 갈등한 결과물이니까 진보라면 진보, 퇴보라면 퇴보겠지만 뭔가 달라지긴 달라지겠죠. 아쉽게도.
박준흠 : 지금 얘기하는 건 강요나 그런 건 아니다. 당연히 평론가의 평에 맞춰서 음악을 한다거나 팬의 입맛대로 할 필요는 없다. 다만 예전의 에너지 넘치는 노래와 공연이 그리운 것이다.
원종희 : 참 안타까운 게, 뮤지션 자체도 그걸 주체하기가 힘든 것 같다. 사실 ‘그 느낌’을 다시 살리려고 했을 때 스스로가 그 느낌을 잃은 거다. 아까 말했다시피 퇴보라면 퇴보라는 게, 음악을 하는 사람이 자기가 완벽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데 그걸 하고 있는 게 아니잖나. 어쩌면 이것밖에 못하기 때문에 이걸 하고 있는 건데. 시간이 지났을 때는 풋내기 시절 했던 그걸 그 이후에는 다시 못 찾는 경우도 많은 것 같다. 그걸 단지 흉내만 내고 있을 때도 그렇고. 콕스패로우라는 밴드가 이번에 신보를 냈는데, 이게 듣고 싶지가 않더라. 너무 걱정 되서.(웃음) 지금 거의 십 몇 년 만에 신보를 냈는데, 내가 진짜 좋아하는 밴드가 나에게 너무 큰 실망을 안겨줄 것 같아서... 그런데 사서 듣는데 안타까우면서도 “참 그래도 멋있는 놈들이네. 음반을 냈으니까” 그런 생각을 했다. 또 이순간의 기록을 한 거잖나. 분명히 자신들은 그 음반을 냄으로서 60대에 다다르고 있는 자기 멤버들의 청사진을 한번 더 찍는 것이니까 내가 콕스패로우한테 실망했다고는 말을 못하겠더라. 여태까지의 청사진들이 쭉 나열이 되고, 이 중에 이 때가 제일 예쁜 것 같아, 할 수는 있어도. 60댄데 아직도 20대를 흉내 낼 수는 없으니까.
박준흠 : 그럼 마지막으로 앞으로 나올 3집에 대해서 조금 더 얘길 해주면?
원종희 : 3집은 [우린 어디로 가는가], [Another Conception], [The Ruckus Army] 그 이후의 이야기가 될 것 같고, 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인삼’을 좀 더 숨겨서 ‘설득력’을 생각하면서 노래를 만들려고 한다. 그게 많은 분들에게 실망을 준다면 어쩔 수가 없지만, 우리는 지금 그런 시점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계획이다.
박준흠 : 장시간 감사합니다.
원종희 : 아휴, 너무 말이 많아 가지고... 감사합니다.
원종희, 박준흠 (최규성)
1) 럭스 결성, 재결성에 관한 이전에 작성된 바이오그라피에 오류가 있다.
2) <Smell Like Teen Spirit> 뮤직비디오에 나오는 장면을 따라했다는 말임.
3) ‘스팽글’은 90년대 말 인디씬에서 ‘모던록’의 산실 역할을 했고, 챔피언스의 [Champions](2007/석기시대) 수록곡인 <스팽글>에도 나오듯이 코코어, 허클베리핀, 마이앤트매리, 코스모스 등의 주무대였다.
4) 럭스의 첫 번째 참여 음반이자 스컹크 레이블의 첫 번째 음반인 이 음반은 당시 신촌에 위치해 있던 ‘Rux Studio’에서 가정용 녹음기로 녹음된 음반이라고 한다. 최악의 음질과 로우파이 녹음상태를 자랑하는 이 음반에는 럭스 외에도 결.애.사, 레이지본, 송지욱, Koryo aggro boys의 노래들이 수록되어 있다.
5) 원종희는 이전에 모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얘기도 했다. “한 1년에서 3년 정도 펑크로 살다보면 세상에 대해 관대해지는 마음이 생기는 것 같다. 선입견도 없어지고. 워낙 극단적인 환경에서 살다보니 그럴 수 밖에 없지만(웃음). 펑크를 좋아하던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자기 자동차 긁어놨다고 ‘어떤 개새끼야!’ 이러는 게 아니라 ‘젊은 애들 객기에 이랬구만’ 웃음으로 넘기고 끝낼 수도 있는 거고. 20~30년 지나면 할아버지들이 닭머리 보면서 ‘야, 우리가 젊었을 때는 최소한 20센티는 되어야 닭머리다’ 이럴 수도 있을 것 같고.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세상이 살만해지지 않을까 싶다.”
6) 한 명은 카우치 멤버이고, 한 명은 스파이키 브랫 멤버이다. 언론에 거론된 대로 편의상 카우치만 얘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