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894년에서 1895년에 걸쳐 청나라와 일본과의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 대하여 지배권을 주장해 오던 청나라와, 근대화 이후 우리 나라에 대하여 끊임없 이 세력을 뻗쳐 오던 일본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서로 관여하여 대립하였다. (2) 동학 농민 운동으로 우리 정부가 청나라에 원병을 청하여 청나라 군대가 파병되자, 이에 맞서 일본은 그들의 공사관과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군대를 보내 옴으로써 양국의 대립은 더욱 심해졌다. (3) 1894년 7월 25일에 풍도 앞바다에서 일본군이 청나라 군대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청나라는 요동 반도, 대만 등을 일본에 떼어 주게 되었다. (4) 일본은 청·일 전쟁의 승리로 우리 나라에서 중국의 세력을 몰아냈으며 우리 나라에 대한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게 되었고, 대륙 침략의 기초를 더욱 굳히게 되었다. 2. 러·일 전쟁 (1) 러·일 전쟁은 러시아의 동아시아 침략과 일본의 대륙 침략 사이의 충돌로 일어난 전쟁 이다. 청·일전쟁 후 중국에서는 이권을 얻으려는 국제적인 대립 경쟁이 격화되었다. 특히, 청의 의화단 사건에 따라 여러 나라들은 군대를 보냈다가 이를 철수하기로 하였는데, 러시아 는 만주에 그대로 군대를 주둔시켜 각종 이권을 차지하고, 다시 한국에 대한 일본의 우 위를 위협하였다. (2)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은 청·일 전쟁 후 급속도로 발전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을 높 이고 있던 일본의 정책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1904년 2월 6일, 일본은 러 시아에 최후 통첩을 발송, 8일에 러시아 군함을 인천에서 격파, 여순항을 기습하였고, 10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5월 7일 러시아의 함대가 전멸하였으며 일본의 승리로 전 쟁이 끝났다.
나라의 주권을 빼앗기다 1. 을사조약의 체결 과정 (1) 러·일 전쟁의 시작과 함께 23일 일본의 강요로 공수동맹을 전제로 한 한일 의정서가 체결 되었다. 의정서는 6개조로서 제2,3조에 한국 황실의 안전과 독립 및 영토 보전을 보증한 다고 되어 있으나 모두가 주권 국가의 주권을 무시한 것이었다. (2) 러·일 전쟁이 일본측의 승리로 기울어지자 정부는 5월 18일자의 조칙으로 한국과 러시아 사이에 체결되었던 일체의 조약과 협정을 폐기한다고 선포하는 동시에 러시아인이나 러 시아 회사에 주었던 이권도 전부 취소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에 대한 내정 간섭을 심화시켜 8월 외무 대신 서리 윤치호와 하야시 곤스케공사 사이에 ‘외국인 용병 협정’ 을 체결하게 되었는데 이는 곧 일제의 한국 재정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이었다. (3) 포츠머스 회담의 내용상 전승의 대가로 부족한 것을 한국에서 보충하자는 일본 자체 내 의 여론은 곧 1905년 11월 9일 일본 특명 전권 대사 이토 히로부미를 파견하여 하야시 공사와 주한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 요시미치를 앞세우고 조약의 체결을 강행하려 하였 다. (4) 일본은 고종 황제와 일부 대신들의 반대를 힘으로 누르고 우리의 외교권을 빼앗는 이른 바 을사조약(1905)을 맺었다. 이토는 강제 통과된 협약안을 궁내 대신 이재극을 통해 황 제의 칙재(임금의 재결)를 강요한 뒤 같은 날 한국 외교권의 접수, 일본 통감부의 설치 등을 중요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외부 대신 박제순과 일본 공사 하야시 사이에 체결 조 인하고 18일에 이를 발표하였다. (5)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일본은 원래 있었던 공사관의 모든 업무를 통감부로 옮기고 종래 공사관에서 맡았던 정무 이외에도 조선 보호의 대권, 관리의 감독권, 그리고 군대 동원 권도 가지게 되었다 (6) 통감부는 조선의 시정을 감독하거나, 어떠한 정책의 시행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 게 됨으로써 명실공히 조선의 최고 감독 기관으로 강력한 세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지배 적인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을사조약에 대한 우리의 항거 1. 을사조약에 대한 반대 투쟁 (1) 이 조약의 체결 소식이 1905년 11월 20일자의 황성신문에 장지연이 ‘시일야 방성대곡 (이 날에 목놓아 통곡하노라)’이라는 논설을 게재함에 따라 전국에 알려져 국민들의 조 약 체결에 대한 거부와 일제에 대한 항쟁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으며 일본에 저항하는 정신을 드높였다. (2) 상소 : 이상설을 비롯하여 민영환, 최익현 등이 조약 파기와 매국노 처단을 요구하며 강 경하게 상소하였다. (3) 순국 : 민영환 등은 상소로도 조약 체결이 원점으로 되돌아가지 않자 유서로써 전국민 에게 경고하면서 자결 순국하였고, 뒤이어 조병세, 홍만식, 이상철, 김봉학, 이한응 등 도 죽음으로써 일본에 항거하였다. (4) 민중 활동 : 전국적인 의병 항쟁이 일어났고 조약에 대한 항의 표시로 상인들은 가게 문을 닫았으며, 학생들의 자진 휴학이 이어졌다. 또한 나철에 의한 5적 암살단이 조직되 기도 하였다. (5) 고종 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준, 이위종, 이상설을 특사로 파견하여 일제의 침략을 세계 여러 나라에 알리고자 하였다. 이들은 을사조약의 부당성 을 주장하고 만국 기자 협회에서 일제의 침략 행위를 규탄하려 하였으나 일제의 방해로 무산되었고 이준 열사는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이를 구실로 일제는 고종 황 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 황제가 즉위하였다. (6) 일제는 재정이 부족하다는 구실로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고 울분을 참지 못한 대대장 박 승환의 자결이 이어졌다. 이때 해산된 군대는 의병에 합류하였다.
침략에 대항하는 의병 전쟁 1. 의병 전쟁 (1) 의병은 외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울 때 국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 발적으로 일어나 외적에 대항해 싸운 민간 병사들을 말한다. 조선말에 일어난 의병 활동 은 3기로 나눌 수 있다. 의병은 무기나 전투 능력면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울 힘이 부족 했지만 자기 고장의 지리를 잘 알고 있는 점을 활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다. (2) 을미사변 때에는 명성황후의 죽음에 대한 항거와 단발령의 실시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의병으로 유인석, 이강년 등이 주축이 되었다. (3) 광무 9년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에는 의병 활동이 보다 활발해졌으며 민종식, 최익현, 이 은찬, 이재구 등이 주축이 되어 각지에서 애국 운동을 고취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군 에 대항하여 산발적인 전투를 감행했다. 그러나 신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을 당해 내지 못 해 실패하고 말았다. (4) 1907년 고종 황제의 퇴위와 군대 해산 후에는 군인들 중의 일부가 가담하였다. 군인들의 가담으로 인해 의병은 전투력이 강화되어 일본군과 큰 싸움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1908년 1월에는 전국 의병 부대가 연합한 ‘13도 창의군’이 서울 진격 작전을 펴 흥인지 문 밖 30리까지 진격하여 일본과 치열한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5) 1910년 나라를 빼앗긴 후에는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져 의병들은 활동 장소를 간도나 연해주, 중국 동북부로 이동하여 독립군을 조직하였다. 중국의 봉오동과 청산리 등에서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 전쟁도 독립군의 활약이다. (6) 의병들은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여기저기서 큰 전과를 올리면서도 주민들에게는 조금도 피해를 입히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 주민들도 의병 활동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 1. 학교의 민족 운동 (1) 교육과 산업을 일으켜 부강한 나라를 이루기 위해 지식인들이 앞장서서 교육, 언론, 학문 등의 분야에서 활동하였다. 일본의 침략에 대해 우리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노력들이 전개되었는데 안창호와 이승훈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이들은 비밀 독립 운동 단체에 참 가하여 활동하면서 신식 학교를 세우거나 강연회를 열고 책을 발행하여 교육을 통해 국 민들을 계몽하였다. (2) 신민회 조직 : 1907년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로 을사조약이 맺어진 뒤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를 중심으로 이갑, 양기탁, 이동녕, 신채호 등이 조직한 비밀 단체이다. 신민회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의 각 방면에 걸쳐 진흥 운동을 전개하여 국가의 실력을 발휘하고 자 하였으며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우고 ‘대한 매일 신보’를 발행하 였다. 2. 국채 보상 운동 일제 통감부가 한국 침략에 필요한 시설 및 부대 비용으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의 은행 등으로부터 돈을 빌려쓰게 했는데, 그 액수가 1907년에는 1천 3백만 원이나 되었다. 당시 정부는 적자 재정이었으므로 외채를 갚는다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 였다. 이에 외채를 갚지 못할 경우 나라를 빼앗기게 될 것이라는 위기 의식으로 온 국민이 외채를 상환하여 국권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 운동은 특히 황성 신문, 대한 매 일 신보, 제국 신문, 만세보 등 각종 신문들이 적극적으로 캠페인을 벌임으로써 온 국민의 참여를 유도했으며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3. 역사 연구 우리 민족의 전통 문화를 이어가고 자주 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우리 역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등은 조선사 연구를 통해 사람들이 우리 역 사를 바로 알게 하는 데 힘썼다. 또한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역사책을 발행하여 일부 역 사가들의 주체성이 없이, 세력이 강한 나라나 사람을 좇아 자기의 존립을 유지하려는 사대 주의적 생각을 철저히 비판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적 발전을 위해서 활동한 인물들을 발굴 해 내어 높이 재평가함으로써 민족 주체 사관을 확고히 정립하였다.
※ 그외 또 지난해말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으로 강제징용 됐던 중국인11명이 일본카지마 건설회사 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승소, 피해자960명에대한 피해보상의 길리열린 정도 양국 시민단체 공동실사 작업에
힘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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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완전 배꼈구만....하영이 그렇게 안 봤는데....
그래서 수정할려구 배끼면 왠지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