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최 부자 6대 崔宗嵂의 묘는 경주시 서면 아화리 심곡저수지 우측 끝 부분에 놓여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아화리>라는 地名이 특이하다. "아화리"라? 한자로는 어떻게 쓸까? 몹시 궁금하여 찾아보니 阿火里라고 표기된다.
阿火라면 불타(오르)는 동산(언덕)이라는 말인데? 거참~! 왜 이런 지명이 붙여졌을까?
동내 유래를 어렵사리 찾아보니, "과거에는 水利施設이 좋지 않아 농사를 짓지 못 하였으며, 하절기에 草木이 枯死될 정도로 旱害가 심하여 언덕에 불을 지르면 불이 꺼지지 않고 계속 탔다하여 阿火라 稱하였다."고 한다.
수구사 끝 맥의 명당에 자리잡은 6대부자 崔宗嵂의 묘로 산소 좌측이 심곡 저수지
제방과 이어진다. 아마 산소를 쓸 당시에는 이 저수지가 없었을 테고... 근래에
만든 저수지일 듯하다.(집에 와서 찾아보니 1945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이 산소 바로 위로 낙동정맥(8구간)으로 등산로가 연결된다.
수구사 끝 맥에 자리잡은 6대부자 崔宗嵂의 묘로 산소 좌측이 심곡 저수지 제방과 이어진다. 아마 산소를 쓸 당시에는 이 저수지가 없었을 테고... 근래에 만든 저수지일 듯하다.(집에 와서 찾아보니 1945년에 준공되었다고 한다.)
저수지가 준공되면서 사람들이 산소를 질러서 산을 오르내렸는지 둘레에 적당한 크기로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망을 둘렀던듯하다. 현재는 콘크리트 기둥에 망을 둘렀던 고리만 남아 있다.
그러나 1945년 상당히 큰 규모의 심곡저수지가 준공되어 웬만한 가뭄에는 물 걱정을 않아도 된다고 한다.
저수지가 준공되면서 사람들이 산소를 질러서 산을 오르내렸는지 둘레에 적당한
크기로 콘크리트 기둥을 세우고 망을 둘렀던듯하다.
현재 상당히 큰 저수지가 있어 그렇기는 하지만, 이 산소를 조성할 당시로 보면 형기상 국세가 고루 갖추어진 명당이라고 할 수 있겠다.
地氣를 살펴보니 대단한 生氣가 흐르는 명당이다. 본 카페의 명당 분류로 하면 군왕혈급 상급(명당 2급지 상급)인데, 5대 부자의 묘보다 약간 덜 좋고, 1,2,3,4대의 묘보다는 한 등급 아래에 속한다고 하겠다. 물론 형기상으로도 1~4대의 묘가 훨씬 좋다고 하겠다.
전형적인 최 부잣집의 비석 양식이다.
1대부자의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부터 형기상으로도 빼어나고 地氣 역시 대단한 명당에 산소를 썼고, 1~4대까지 묘는 地氣상 이 묘보다 한 등급 위인 최상급에 산소를 조성하였고, 3대 4대에 가장 좋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5대와 6대 산소는 地氣상 그보다 한 등급 아래의 곳에 잡았으며 형기면에서도 떨어진다고 하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3대, 4대 만큼 地氣가 좋은 곳이 없는 것이 아닌데...궁금하다.
地氣를 살펴보니 이 곳 역시 대단한 生氣가 흐르는 명당으로 명당 2급지 상급(군
왕혈 상급)에 해당된다. 그러나 5대 부자의 묘가 약간 더 좋은 명당이다.
현재까지 살펴본 이 집안의 산소의 地氣로 보건데
-1대부자 貞武公의 조부나 늦어도 부친(崔臣輔)代부터 부가 형성되었을 것이고,
-1,2,3,4대까지 지속적으로 축적되고
-5대와 6대 때에 절정을 달하였고,
-7대부터는 이런저런 시련을 겪으며 이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자료를 찾아보면 실마리를 찾을 듯싶기도 하다.
물론 양자인 7대부자 崔彦璥의 생부모와 조부모의 산소를 답사하여 보면 더 정확하겠지만, 이들 산소가 5대부자와 6대부자 산소보다 더 좋은 곳에 쓰이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대에 최고 부잣집이면서도 선행을 베풀어 더욱 유명해진 최 부잣집이 더 번창하여 모범적인 사례로 현재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나라의 경제 풍조가 바뀌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최 부잣집의 富가 12대에 가서 마감을 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산소 좌측(아래서 위를 보고)이 심곡저수지 제방과 이어진다.
출처를 명시하지 않고 본 카페의 글과 사진 등의 전재 및 재배포 하는 것을 금지 합니다
동북아풍수지리( cafe.daum.net/songhyunpoongso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