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한산성 마을은 분지형 도시이다.
이 마을 주산은 청량산(淸凉山)이다. 세종실록은 일장산(日長山)이라고 했다
산성 안의 분지가 평탄하여 여느 산속과 달리 일찍 해가 뜨고 늦게 해가 짐으로써
낮이 길다는 의미의 일장산(日長山)이다. 또 낮이 길다는 주장산(晝長山) 이름도 있다.
그 둘레는 화강암과 편마암에 의하여 깍아지른 험준한 봉우리와 벼랑으로 이루어져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다.
이들 사면의 산능선은 거센 북풍을 막아줌으로써 산성내의 거주민에게 아늑한 공간을 마련해 준다.
전체적으로 남동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분지내의 계곡물은 배수가 잘 이루어진다.

남한산성은 광주유수부의 군사 행정 중심지로 300년 동안 인구 4,000명의 규모를 유지했던 산성도시였다. 남한산성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지도가 여러 장 전해온다. 그 가운데 영남대 소장본을 중심으로 당시의 산성 도시계획을 살핀다.
이 그림에는 이미 봉암(벌봉)외성과 한봉외성을 표현하고 있어서 1690년 이후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전통적인 도시나 마을은 배후에 높은 산을 기대고 방향을 잡는다. 청량산에서 동남쪽으로 골짜기가 형성되어 개천이 흘러 동문으로빠져나간다. 산성도시의 중심이 되는 동서로는 남한산성 용도 구역이 계곡을 따라 만들어진 길이다. 그런데 동문과 도시의 중심을 잇는 동서로는 계곡을 따라 올라오다 지수당 근처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남북로와 만난다.
다시 말해 도시의 중심부에는 두 개의 평형한 동서로가 놓이게 되어, 개천을 낀 남쪽 동서로와 연무대 앞을 지나는 북쪽 동서로가 된다. 남쪽 동서로는 민가들이 집중된 주거지역의 중심길이 되고, 북쪽 동서로는 연무대와 이아지역 (19세기에 이쪽으로 이전)을 지나며 군사-행정의 중심길이 된다.
이 두 동서로 사이는 작은 골목들이 여러 개 연결되어 마치 사다리 모습과 같은 형태의 대지들이 생기게 된다.이 부분에 두 개의 중요한 공공시설이 자리 잡았다. 하나는 연무대 앞 넓은 빈터로서 ‘성내장, 산성장’라 불렀던 시장이 섰던 장터이다. 현재 여러 음식점들이 어지럽게 자리 잡은 곳이지만, 일제 강점기에 작성한 지적도 상으로 대지 401번지에해당하는 1,229평 규모의 빈터였다.

“일장산성은 주치의 남쪽에 있다. 높고 험한데, 둘레가 3,992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軍資庫)가 있으며, 우물이 7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는다. 또 한전(旱田),수전(水田)이 모두 124결 있다”-세종실록 지리지-
“광주의 남한산성은 …다른 성에 비하여 더욱 크고 일찍부터 거주민도 있었습니다.… 가운데는 큰 개울이 있으며, 우물은 모두 6개소이고, 수답이 거의 십여석 지기나 되며, 좋은 밭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선조실록 선조 30년(1597) 2월 기사-
이러한 기록을 작성할 당시 읍치는 남한산성 위쪽인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 일대에 있었다.
이후 후금(後金, 청나라)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인조 4년(1626)에 읍치를 남한산 성안으로 옮기고, 유사시 산성마을이 임시수도로서의 역할을 하고 이를 방어할 수 있도록 고을의 격도 목(牧)에서 유수부(留守府)로 승격시키면서 인근의 인구를 이곳 산성마을로 이주시켰다. 당시 남한산성에서 모집한 호구수는 모두 300여호 정도였으며, 이들에게는 신역(身役)과 전세(田稅)를 면제해 주었다.
그 결과 산성으로 피역자들이 몰려와 호구가 1,000여호에 이르게 되었고, 숙종 17년(1691)에는 산성에 더 이상 주민을 모집하지 말자는 주장이 제기되어 모민정책(募民政策)을 폐지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산성 안의 주민은 19세기 말까지 1,000여호 약 4,000여명의 인구가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18세기 후반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에는 산성내 남동(南洞)에는 614호에 남자 1,191명 여자 1,055명이, 북동(北洞)에는 462호에 남자 1,009명 여자 853명이 각각 거주하여 총 1,076호에 4,108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기술하였다. 또한 1842년~1843년간에 편찬된 『광주부읍지(廣州府邑誌)』에는 산성내 호구수가 1,068호에 남자 2,100명
여자 1,947명 도합 4,047명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다고 하였으며, 1871년 편찬된 『광주부지(廣州府誌)』에도
산성내의 호구수는 1,161호로 기록되어 있다.그러나 구한말 의병들의 활동이 이곳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자
일제는1917년 광주군청을 산성 안에서 경안으로 이전시켰고, 이로서 300여년간 군사행정의 중심지로서 역할을 하였던 산성리 마을은 쇄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점차 많은 주민들이 이곳을 떠나 서울과 광주 등지로 나아갔으며, 마을의 인구는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는 70~80 여호로 줄어 산촌벽지로 변하였고, 마을 사람들은 밭농사나 화전을 일구며 어렵게 생활하였었다.산성마을에 또 한번 변화의 계기가 온 것은 1971년 3월 남한산성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면서부터이다. 그리고 1974년 남한산성을 동서로 관통하여 성남으로 이어지는 도로가 개설됨으로써 남한산성의 교통망이 크게 개선되었다.
서울과 주변 지역의 주민들이 남한산성을 찾기가 더욱 용이해진 것이다. 남한산성이 이렇게 관광지화가 됨에 따라 그에 따른 부작용도 있어 산성내에 음식점이 늘어났고 무허가로 이곳저곳에 자리를 잡아 산성의 고유성을 해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 남한산성이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이제 세계인들이 관심을 갖고 지켜야 할 인류보편적인 가치를 지닌 남한산성이다.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는 '남사모'(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의 헌신적인 노력이 컸다.
2014년 7월 15일 조선일보의 <먹으러' 왔던 남한산성, 이젠 다들 '보러' 온답니다>기사를 통해 '남사모'를 살핀다.
남한산성 지키고 알리는 '남사모'
지난 6월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는 하루아침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남한산성을 가꾸고 알려온 사람들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이하 남사모) 회원들을 만나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
남한산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뭐 먹으러 갈래?'에서 '뭐 보러 갈까?'라는 말로 바뀐 시민들의 대화를 들을 때가 가장 뿌듯해요."
남사모 창립 멤버로 7년째 회장직을 맡고 있는 전보삼(65)씨는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는 뉴스가
나온 지 1주일도 채 안 되어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며 "그동안 남한산성을 맛집이 몰려 있는 행락지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점차 문화유산으로 인식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남한산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역사적인 순간에 남사모 회원들은 마치 자신들이 주인공이 된 듯 기뻤다.
지인들에게 축하전화와 문자가 빗발쳤기 때문. "그때 알았어요. '내가 정말 많은 사람들을 붙잡고 남한산성 이야기를 했구나'라는 걸요." 부회장 김내동(59)씨는 30년 전부터 주말 아침이면 남한산성에 텐트를 치고 가족들과 함께 아침을 먹었을 정도로 이곳에 애정이 많다고. 김씨뿐만 아니다. 꽃을 사면 자신의 집 앞마당이 아닌 남한산성의 등산로에 심는다는 부회장 조한숙(68)씨, 2006년부터 1년에 80여 회 남한산성에 올라 사계절을 사진으로 남기고 있는 사진작가 김태홍(60)씨 등 남한산성과 남사모에 얽힌 회원들의 에피소드는 넘쳐난다.하지만 이들을 높이 살 만한 이유는 역시 단순히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이 모은 자료들을 책,
회보 등으로 남겨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는 데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유네스코 심사 기준에 남한산성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에 대한 부분이 10%나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그동안
남한산성을 다니면서 수집한 역사자료, 사진, 활동 내역을 담은 '남한산성을 사랑하는 모임 15년사'라는 책을 만들어 제출했어요.
저희로선 뿌듯한 순간이었지요." 수석부회장 최종섭(62)씨의 말이다.
남사모는 1996년 4월 전보삼 현 회장을 비롯한 5명의 시민이 남한산성을 오르내리며 쓰레기를 주우면서 시작됐다.
그저 동네 뒷산 오르듯 남한산성을 오르다 보니 훼손되거나 더럽혀지는 것이 안타까웠다는 회원들. 18년이 지난 지금은 운영진
10여 명을 포함해 20대부터 80대까지 총 300여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는 어엿한 시민 모임으로 발전했다. 연령뿐 아니라 회원들의 직업도 교수부터 시인, 의사, 주부까지 다양하다. 회원들 상당수는 정기산행을 하고 있을 정도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정기산행은 매달 마지막 주 일요일 오전 10시에 남한산성 내 중앙주차장에서부터 출발한다.
산행을 통해 산성 복원 및 정비사업, 정책에 관한 건의 사항을 기록하고 점심 식사를 한 후 남한산성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역사문화강좌를 진행한다.
첫댓글 회장님 있음에 역사의 이해와 사적.유물에 대한 안목의 부름켜가 커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