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때에 제학(提學) 강희안(姜希顔)이 불려들어온다.
왕은 그를 고문하였으나 그는 모른다고 한다.
왕이 삼문을 보고 "희안도 네당이지?"하고 물었다.
"희안은 참말로 애매하오.나으리가 선조의 명사를 다 죽이고
인제 이 사람 하나 남아 있으니 이 사람일랑 죽이지 말고 쓰시요.
현인이 멸종되면 나라꼴이 되겠소?희안은 현인이요.
또 애매하니 후일에 죽이더라도 아직은 살려두고 쓰시요."
하는 삼문의 말은 실로 간절하다.
왕은 삼문의 말을 옳이 여겨 희안을 놓기로 하였다.
춘원 이광수의 소설 <단종애사>에서 수양대군 세조가
성삼문을 심문하는 장면을 살폈다.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조선의 문신으로 자는 경우,
호는 인재(仁齋)이고 본관은 진주이다.
지돈령부사 강석덕의 아들이며 <효사정기문>을 쓴 강 희맹의 형이다.
성격이 온화하고 말이 적으며 청렴 소박하고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세종 즉위년에 안평대군 이용 강희안과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
집현전 학사들이 태어난다.강희안은 시(詩)와 그림(畵) 글씨(書)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세종 때 삼절(三絶)로 불렸다.
특히 강희안은 안평대군 이용과는 이종사촌간이다.
물론 수양대군 세조와도 이종간이다.
강희안이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심문을 받는 등
고초를 겪는다.성삼문의 변호로 화를 면한다.그러나 선비로서는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지경에 지른다.
그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은 많지는 않다.
고사관수도(高士觀水圖)〉는 그 당시로서는 선구적인 화풍을 구사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그가 사신으로서 중국을 다녀와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일찍 받아들일 수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에 급제, 돈령부 주부 등을 거쳐 1454년(단종 2) 집현전 직제학이 되었다.
1455년(세조 1)에 인수부윤으로서 사은부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그는 정인지 등과 함께 세종이 지은 정음 28자에 대한 해석을 상세하게 덧붙였고 '용비어천가'의 주석을 붙일 때도 참여하였다.
세종 때 금인 소신지보와 세조 때 을해자의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최초의 원예서로 알려진 ‘양화소록(養花小錄)’은
강희안이 직접 화초를 키우면서 알게된 화초의 특성과 재배법등을 자세하게 기록한 책이다.
노송,매화,국화,석류화,치자화,귤나무 등 모두 17종의 꽃과 나무,그리고 이를 기를 때
주의해야 할 일곱가지 항목으로 구성됐다.
그는 정치가라기 보다는 유능한 행정관료로서 많은 활약을 했다.
관직으로는 이조정랑, 집현전 직제학, 부지돈령부사를 지냈으며, 세조가 집권하자 원종공신으로 책봉됐다.
그는 학문이 깊고, 상식이 풍부하고 박식했으며, 재능이 출중했다.
서거정은 그를 평하여 '재주와 덕을 겸하였으니 진정한 대인군자'라고 했다.
중국의 음운서였던 〈고금운회 古今韻會〉를 신숙주와 함께 번역했으며, 신숙주·성삼문·박팽년 등과 함께
〈동국정운 東國正韻〉의 편찬에도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