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견의 몽유도원도이다. 그는 우리 회화사상 신라시대의 솔거, 고려시대의 이녕과 더불어 3대 화가로 꼽힌다.
몽유도원도는 이들 3대 화가의 작품 중 현존하는 유일한 작품이다.현재는 일본의 국보(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덴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몽유도원도에는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안평대군이 송설체로 쓴 몽유도원기가 있다.
그는 몽유도원도를 그리게 된 경위를 자세히 적고 있다.
세종의 세째아들 안평대군 이용(李瑢)은 시·문·서·화·금·기(詩文書畵琴碁)에 능통하여 쌍삼절(双三絶)로 불리운 인물이다.
그의 주위에는 늘 집현전 학자 등 문사들이 함께 하였다. 몽유도원도는 1447년 어느날 안평대군이 절친했던 집현전 학사이자 훗날 사육신의 한사람이 된 박팽년과 함께 노닐었던 선경을 당대 최고의 화가 안견에게 그리게 했던 것이다.
그의 명을 받은 안견은 불과 3일만에 천하의 명작 몽유도원도를 완성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 이용이 지은 몽유도원도의 발문을 풀이한 글을 이렇게 옮긴다.
"정묘년 (1447) 4월 20일 밤 잠자리에 들었더니, 바야흐로 정신이 아른거려 나는 곧 깊은 잠에 들며 꿈속으로 빨려들어갔다.
홀연히 나는 인수(박팽년)와 더불어 어느 산에 당도했다. 산봉우리는 층층이 나 있고 깊은 계곡은 그윽했다.
복숭아 꽃나무 수십 그루가 늘어선 사이로 오솔길이 있었고, 숲이 끝나는데 이르러 갈림길이 있었다.
우리는 어느 길을 따를까 서성대고 있었는데, 그때 소박한 산관을 쓰고 거친 야복을 입은 한 사람(속세의 사람이 아님을 의미)을
만났다. 그 사람이 나에게 깊숙이 머리 숙여 절하면서 말하기를, "이 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골짜기에 드는데,
그곳이 도원이외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수와 함께 말을 급히 채찍질하여 그 길로 찾아드니, 깎아지른 산벼랑에
나무숲은 울창하고 계곡의 물은 굽이져 흐르는데, 길은 100굽이나 돌고 돌아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골짜기에 들어가니 탁 트인 동굴과 같은 넓은 곳이 나왔는데 2~3리는 될 듯했다.
사방에는 산이 바람벽같이 치솟고 구름과 안개가 자욱한데, 멀리 또 가까이 복숭아나무에 햇빛이 비쳐 어른어른 노을과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또 대나무 숲에 띠풀을 덮은 집들도 있었는데, 싸리문은 반쯤 열려 있고
흙담은 이미 무너져 있었다. 닭과 개와 소와 말은 없지만, 앞 시내에는 조각배 하나가 물결을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어
그 정경이 소슬한 것이 신선이 사는 곳인 듯했다. 우리는 주저하면서도 오래도록 둘러보았다.
나는 인수에게 '바위틈에 서까래를 얹고, 골짜기를 파서 집을 지었다더니,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 아니겠는가?
이곳이 정녕 도원이로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때 몇 사람이 뒤따라왔으니, 바로 정부(최항)과 범옹(신숙주)이었고, 함께 운서를 편찬하던 자들이다.
그런 다음 서로 짚신감발을 하고 걸어 내려오며 실컷 구경하다 홀연히 꿈에서 깨어났다.
오호라! 번화한 도성과 큰 마을은 이름난 고관들이 노니는 곳이요, 깎아지른 절벽과 깊은 골짜기는 조용한 은자가 숨어 사는 곳이라. 현란한 옷을 걸친 자는 그 발이 삼림에 이르지 않고, 자연에서 마음을 닦는 자는 꿈에도 조정을 그리지 않노니,
대개 고요함과 소람함이 길을 달리함은 필연의 이치이기 때문이리라.
옛사람의 말에 '낮에 한 일이 밤에 꿈이 된다'고 했다.
나는 궁궐에 몸을 의탁하여 밤낮으로 국가 일에 종사하고 있는데, 어찌 꿈이 삼림에 이르렀으며, 또한 어찌 도원에 이르렀는가?
나와 서로 좋아하는 사람이 여럿 있거늘, 어찌 두세 사람만 동행하여 도원에서 노닐었던가?
아마도 내 천성이 그윽한 것을 좋아하고 산수를 즐기는 마음을 품었기 때문이 아니런가.
또한 이들 몇 사람과 더불어 사귐의 도리가 특히 두터웠던 까닭에 함께 여기에 이르게 된 것인 듯하다.
이제 가도(안견)에게 명하여 그림을 그리게 했다. 옛날 사람들이 말한 그 도원이란 곳도 역시 이와 같았는지 모르겠다.
훗날 이 그림을 보는 자가 옛 그림을 구해서 내 꿈과 비교해본다면 필시 무슨 말이 있을 것이로다.
꿈을 꾼 지 사흘 만에 그림이 완성되었기에 비해당의 매죽헌에서 이 글을 쓰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