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무예신문
서인선(사단법인 한민족합기도무술협회 총재)
나의 어린시절
-합기도의 입문 나는 경북 군위군 의흥면출신이다. 중학교때 까지는 그곳에서 평행봉과 철봉 등으로 혼자 운동을 하였다. 어린시절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도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했었고 또 6.25전쟁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은 상태라서 항상 사회는 긴장속에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운동을 열심히 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내 또래의 아이들보다 유난히 강했고 그래서 나를 이기려는 아이들이 없었다. 그리고 17세되는 때 나는 대구상업고등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유학생활을 시작하였다. 대구에서 나는 특이한 무술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야와라'라는 유술이 있는데 그것이 엄청 강해 누구도 이길수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서복섭이라는 분은 차돌을 잡으면 가루가 된다는 소문도 있었다. "그래? 그럼 나도 배워보자" 마침 나의 형 서인혁이는 먼저 '야와라'를 배우고 있어서 쉽게 도장을 방문할수 있었다. 당시에는 도장이 2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최용술이라는 분이 운영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서복섭이라는 분이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에 최용술이란 분을 찾아가서 배우기 시작했다. 15평정도 크기 도장의 첫인상은 우선 환경이 너무 열악했다. 벽에는 그림 한장없이 썰렁했고, 바닥에는 다다미 몇장이 깔려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중에도 특별한 것은 도장가운데 커튼이 쳐져 있었고 커튼넘어 안쪽은 바깥에서 볼수가 없도록 해놓았다. 커튼안에서 은밀하게 한수,한수를 비밀스럽게 1대1로 최용술선생님이 지도하고 그 안에서 누가 얼마나 배웠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최용술선생님과 당사자만이 알수 있었던 것이다.
수련생활 최용술 선생님은 대단히 엄격했다. 1대1의 수련에서도 봐주시는 법이 없었다. 가차없이 꺾었고 가차없이 발로 찼다. 하지만 인정이 없었던것이 아니다. 한수,한수를 정말 정성스럽게 지도하셨고 강했지만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수련이 이어졌다. 우리는 최선생님이 사랑으로 지도하고 있다는 것을 얼마든지 느낄수 있었고 그래서 참고 진심으로 열성적으로 배웠다고 자부한다. "절대 남에게 지지 말라"고 최선생님은 우리에게 강조을 했다. 싸움을 조장했던 것은 아니지만 싸워서 지는 것을 무척 싫어하셨다. 본인도 항상 최고라고 말씀하셨고 배우는 우리들도 항상 최고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보다 강하려고 노력했고 정말 도장바깥에서는 강하다고 인정을 받았다.
'합기도'의 어원 우리나라에 상주해 있는 미군들의 군사훈련에는 동양무술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중에서도 일본교본이 있었는데 책명에 "合氣道(아이기도)"라는 용어가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을 본 최용술선생님의 제자한명이 그것을 가지고 최선생님에게 보여주며 "이것이 선생님께서 가르치시는 무술입니까?"라고 물었고 그것을 본 최선생님은 "맞다. 이것이 내가 지도하는 무술이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이말이 급속도로 퍼져서 합기도라는 무술로 불리우게 되었다고 한다. 내가 그당시 들은 이야기로 신빙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도주 최용술 최용술선생님은 충북영동 출신으로 어린시절 고아로 자라 일본으로 양자되어 갔다고 했다. 일본에서 다케다쇼가쿠라는 사람을 만나 무술을 연마하고 1946년에 귀국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그런데 내가 보기로는 최용술선생님은 합기도를 체계적으로 전통을 이을 생각이 없었던 것이 보였다. 제자간에 선후배를 지정하시지 않았고 비밀로 몇몇 제자에게만 지도하여 같은 문하생끼리도 누가 누군지를 알수 없는 정도였다. 최용술 선생님은 슬하에 1남1녀의 자녀를 두셨는데 성질이 깐깐하시고 단도직입적이었으며 무척 성질이 급했다. 불우한 어린시절과 가난한 환경때문인지 대하는 사람마다 각각 처우가 달랐다. 더구나 당시 선생님의 나이는 50세였고 문하생들은 10대~20대들이었기 때문에 잘 어울리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동네 어르신들도 배우러 오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배운 사람들은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 었고 나중에 이들이 합기도무술의 한자리씩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최용술선생님은 걸출하신 분이셨고 섬세하고 과묵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1989년에 타계하신 최용술선생님에 대해 나는 최초로 합기도를 배운 사람으로서 감회가 남다르다. 이자리를 빌어 진심으로 최용술선생님의 명복을 빈다.
막걸리공장 2층, 합기도도장 서복섭씨는 대구에서 명분집안 자제로 20대에 서복섭씨는 막걸리공장의 사장을 하고 있었다. 전쟁직후라서 먹을 것이 없었고 막걸리를 걸른 찌거기라도 먹으려고 막걸리공장은 새벽부터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되었고 그중에 최용술이란 사람이 끼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순서를 지키지 않고 끼어 드는 사람과 최용술은 난투극을 벌어졌고 어떤 남자는 순식간에 제압이 되었다. 서복섭씨에 의하면 불과 몇초만의 상황종료였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최용술은 강했다. 이를 지켜본 서복섭은 최용술이란 나이많은 사람을 정중히 초청하여 막걸리공장 2층에 도장을 차려주고 스스로 문하생을 자청하였다고 한다.
합기도를 떠난 서복섭 서복섭씨는 대구에서 60년대까지는 합기도를 한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70년대에 서울로 이사하여 합기도를 그만두고 당시 지압이란 '카이로프라틱'을 했다고 하던가. 그분야에서 임원도 했고 현재도 그쪽일에 관여하고 있다고 들었다. 서복섭씨는 인품이 온화하고 넉넉했었다고 난 기억한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대학까지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았다. 항상 조용조용한 말투와 문하생들에게 용돈을 주어가며 지도하여 그 당시의 합기도인이면 모두 서복섭을 거쳐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합기도를 그만둔 것은 우리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어떤 이유든지 서복섭씨가 합기도의 초반에 공헌을 했다고 나는 단언할수 있다.
나의 형, 서인혁 나는 형과 함께 합기도를 배웠다. 형도 누구못지 않게 열심히 운동했고 당시 몇 안되는 합기도 고수 중에 한명이었다. 하지만 70년대에 국내의 모든 활동을 접고 미국에 '국술원'이란 타이틀을 가지고 취업이민을 떠났다. 미국에서는 '세계국술협회'를 창립하고 대한민국의 고유무술 '국술'을 훌륭하게 보급하고 있다. 참고로 '국술'은 합기도와 권법, 무기술을 아우르는 종합무술이라고 할수 있는데 외국에서는 상당한 호평을 받고 있다. 나의 형 서인혁도 초창기의 합기도멤버로서 나는 기억한다. 형과 함께한 어린시절의 운동에 대한 추억을 나는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성무관, 신무관, 국술원을 중심으로 합기도는 진화되었다.
-초장기 합기도인 50년대 초 최용술선생님께서 합기도를 보급하면서 급속하게 합기도도장이 늘어 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합기도도장들을 살펴보면 대구에서 최용술선생님과 서복섭관장님 외에 장인목관장(장관장은 일본 대동류아이기도 5단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합기도보다는 지압에 더 집중하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송중화관장(송무관), 강문진관장(평무관), 신상철관장(광무관), 김정윤관장 등이 있었고 이분들의 열정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합기도가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분들은 조직적인 계파를 형성하지 못하고 개인적인 이력으로만 남게 되었고 앞으로 전개되는 성무관, 신무관, 국술원 등 3개계파가 배출한 합기도도장이 전국 4000여도장의 80%이상을 점유하게 되어 나는 이 3계파에 대하여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합기도의 험난한 개척시대 합기도는 불과 50년역사도 안돼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무술이 되었다. 하지만 초창기때의 합기도도장은 수많은 고난을 겪어야 했다. 당시 국민소득은 70불 정도였고 도장에서 관원들에게 받는 돈은 불과 100원이었다. 이러한 영세한 운영에도 도장에 오는 관원들은 그야말로 몸과 힘만 있는 젊은이들이였다. 그러나 사범이나 수련생들은 넘치는 열정으로 운동을 하였고 희노애락을 함께하며 도장을 키워갔다. 운동을 배운 관원들은 사범의 자격이 되어 합기도의 전도사로서 전국으로 개척을 시작하였다. 항상 지역의 텃세는 거칠었고 지역건달들은 도장에 버티고 서서 한달, 두달 도장에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서기 일쑤였으며 심지어는 10대1로 싸움을 하거나 수시로 밀려오는 도전장을 받아 수십차례 싸움을 해야만 했다. 특히 성무관창시자인 지한재관장은 종로에 도장이 있어 그 유명한 종로건달을 맞아 힘겨운 싸움이 연속이었다고 들었다. 합기도는 이렇게 진화하고 성장하였다. 나도 전국을 다니면서 지역의 유명한 건달들은 거의 만나보았다. 그들과 싸움도 했지만 회유하고 화해하면서 보낸 수많은 세월들이 추억의 응어리로 남아있다. 합기도가 빨리 성장한 이유는 우리 국민들의 천부적인 무술재질과 또한 실전에서 쌓은 실력이 인정받았다고 볼수 있다. 이런 결과 60년대 수백개의 도장이 형성되는 기록이 생겼고 급기야 이를 조직화하려고 63년에 (사)대한기도회를 창설하게 되었으며 초대 총재는 최용술 선생님이었다.
- 성무관사람들 지한재관장은 대구공고를 56년에 졸업하여 58년경 안동에서 합기도도장을 운영하였다. 이후 59년경에 서울에 상경하여 '성무관'이란 도장을 개관하였는데 이것이 최초의 '성무관합기도장'이라고 할수 있겠다. 지한재 관장은 어릴적부터 나와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으며 운동도 잘했지만 싸움도 꽤 잘했다. 그리고 항상 자신감이 넘치는 모습이었으며 인정이 많고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경호실사범으로 있으면서 한층 더 합기도가 자리잡는데 공헌했다고 감히 말할수 있다. 지금은 지한재관장이 미국에서 '신무합기도협회'를 창설하고 도주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성무관의 초장기 멤버들을 나열하면 황덕규관장, 이태준관장, 김용진관장, 김영한관장, 한봉수관장, 최세호관장, 명광식관장(미국거주), 명재남관장(작고), 권태만관장(미국거주), 김지팔관장(미국거주), 이등구관장, 강정수관장, 김종택관장, 유명우관장, 송루원관장등이며 오세림씨와 박상범씨는 경호실 요원으로 근무했다.
-신무관사람들 김무홍관장은 나와는 각별한 사이다. 나의 일년선배이며(대구상고) 1959년 대구상고를 졸업했으며 일생을 함께한 사람이다. 잘생긴 얼굴에 진정 호남형의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김관장 역시 인간적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실무에서 너무 일찍 손을 떼고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 참으로 아쉽다. 그래도 신무관은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어 다행이다. 신무관의 초창기멤버들을 열거하면 김정수관장, 이민영관장, 김무정관장(김무홍관장 동생), 원관하장, 나인동관장, 신동기관장(외국거주)등이라 할수 있다.
-국술원사람들 국술원합기도는 61년에 부산 중앙동에서 서인혁관장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지난번에 밝혔듯이 서인혁관장은 나의 형이며 1957년 대구상고를 졸업했다. 서관장도 정말 인간성 좋은 사람이다. 항상 타인을 먼저 배려할 줄 알고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다. 현재는 미국에서 세계국술협회를 창설하고 총재로 있으며 해외에서 더 인정받고 있고 '서인혁의 날'이 제정될 정도로 유명하다. 국술원의 초장기멤버들을 열거하면 먼저 나의 큰형 서인석관장을 빼놓을수 없다. 서관장은 전라도지역을 다니면서 합기도보급에 무척 힘쓴 사람이다. 서관장이 겪은 고통은 글로 다 쓸수가 없다. 하지만 그런 결과로 전라도지역에 합기도가 자리잡은 것은 커다란 공과라고 인정해야 한다. 서인선관장(현 한민족합기도무술협회 총재),이정오관장, 변정원관장, 고재호관장, 고영태관장, 변세기관장, 박인석관장, 조창현관장, 김세준관장, 임희이관장, 피영준관장, 김창수관장, 강광정관장, 조자룡관장, 최한영관장, 진종문관장, 정진수 관장, 이성진관장, 진순길관장, 김승진관장, 오수복관장, 태권도를 하다가 합기도를 한 이도윤관장 그리고 어린나이에 도장을 운영한 조재수관장, 현재 미국에서 화랑도협회를 운영하고 있는 이주방관장, 이한철관장, 김우탁관장(카나다거주), 김무진관장이 있으며 또한 허일웅관장은 도장을 운영하면서 70년대에 학계로 진출하였고 현재는 명지대교수면서 일본대동류와 중국의 우슈와 관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위에 열거한 관장들이 60년대 합기도 도장을 운영하였던 사람들이며 모든 관장의 이름을 다 기억 하지 못하여 기재하지 못한 점을 이해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서인선 총재가 말하는 합기도의 역사>
- 국술원은 어떤 무술인가- 요즘 국술이 많이 인기가 있다는 소리를 듣고 내 개인적으로는 반가운 일이라 생각한다. 우선 국술의 최고권위자가 나의 형 서인혁이고 나 또한 국술을 물려받아 '국술원합기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단일 무술 단체로 만들었고 이끌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간에 들리는 엉뚱한 소문에 나는 기분이 언짢아 있고 그것을 이번 기회에 밝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으며, 그 이유는 역사는 왜곡해서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국술에 관한 여러 이야기는 많은 면에서 사실이다. 그러나 국술과 합기도가 전혀 다른 무술이란 것을 듣고 나는 역사를 바로 잡아야겠다고 판단했다. 나의 형 서인혁은 10대시절에 최용술도주를 찾아가 합기도 개인지도를 받았다. 그당시 함께한 서복섭, 지한재, 김무홍처럼 우리도 열심히 배워 최도주한테 인정받는 제자가 되었다.
그후 서인혁은 나와 같이 합기도의 3대계파인 '국술원합기도'를 형성하고 열성적으로 세력을 키워갔다. 그 기운은 기름에 불붙인 것처럼 삽시간에 전국으로 세력은 퍼져나갔다.
1973년까지 한편에서는 합기도의 세력을 키우고 다른 한편에서는 합기도의 통합을 모색하다가 서인혁은 나에게 국술원에 대한 모든 권한을 이양하고 '대한기도회 합기도사범 자격'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나의 형 서인혁이 미국으로 떠날 때 전국 국술원의 도장 수는 10여 개였다. 그 이후 내가 기도회를 인수할 80년 초에는 100여개의 도장 수를 자랑하는 최고의 단체로 성장하였다.
- 대한기도회- 나는 국술원합기도로 모든 합기도를 통합하겠다는 의지로 83년 5월에 국술원 합기도조직을 이끌고 대한기도회를 인수하였다. 합기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가 회장을 맡았으며 형인 서인혁은 나의 합기도선배이기 때문에 그리고 본인의 뜻에 따라 총재로 추대하였다. 그리고 지한재는 80년대 기도회 이사로 있었다. 인수당시 대한기도회소속 도장은 72개였고 내가 이끌던 국술원합기도는 100여개의 도장이었으며 두 세력이 합쳐 해를 거듭할수록 합기도장은 두배이상으로 늘어 나갔다. 하지만 전회에서 밝힌 대로 전경환이란 최고 권력자의 출현은 대한기도회를 위기로 빠트렸으며 전경환씨가 이끌던 '새마을합기도'는 2년동안 화려한 꽃을 피우고 사그러졌다. 이를 전화위복으로 빠져나갔던 도장과 다른 소속의 도장들이 대한기도회를 몰려오기 시작하여 대한기도회의 전성기를 맞이 하였다. 2002년 내가 회장으로 재직시 850여개 지관이 있었다.
- 합기도는 합기도다- 최용술도주는 분명 우리나라에 합기도의 씨를 뿌리신 분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제자들이다. 지금의 신무관출신이든 성무관출신이든 국술원출신이든 그 조상들은 최용술도주와 함께 합기도의 태동을 위해 땀을 흘린 합기도역사의 창조자들이다. 이런 그들이(혹은 그의 후손들이) 이제와서 최용술도주를 부인하고 합기도를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거나 합기도와 다르다고 하는 것은 조상을 배반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서글프다.
합기도역사를 온 몸으로 겪어온 내가 지금 행해지는 합기도의 왜곡된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서 반드시 합기도의 역사를 바로 잡고 모든 사실을 밝히리라 다짐한다. 그래야 후손들이 자기 조상들을 똑바로 모시고 위아래의 서열이 제대로 정리가 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합기도의 선배들은 자기의 조상의 줄기를 찾고 자기정체성을 밝혀야 한다. 그래야 합기도는 무술로서만이 아닌 예의와 이론으로서도 완성된 무예가 될것이다.
- 최용술- 합기도를 비하하는 말중에 최용술 도주는 형이 없이 마구잡이로 지도를 하였고 그 제자들이 마음대로 형(形)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더 심하게는 최용술도주가 일본에는 족보도 없다는 비아냥도 한다고 들었다. 하지만 최용술도주는 우리나라에서 합기도를 보급할때 상당한 무술의 고수였고 충분히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합기도를 체계적으로 보급하려는 뜻이 없었던 듯했다. 도주에게 찾아온 제자들에게 직접 한수 한수 은밀하게 전수하였고 제자들끼리도 물려받은 수가 달랐다. 이렇게 전수받은 제자들은 입장이 달랐고 그들은 창의적인 능력도 뛰어났다. 도주로부터 한수를 배우면 나름대로 연구하여 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개발. 그리고 그들이 개발한 수는 도장에서 조직적으로 전수되었고 합기도가 급속도로 전파되는 윤활유가 되었다. 최도주는 날카롭고 예리했으며 제자들에게는 엄격하고 무서웠다. 제자들도 빈틈없이 정성으로 수를 배워 익혔고 그들의 제자들에게 잘 전달하였다.
- 합기도의 선배들은 위대했다- 요즘 합기도 도장이 4,000여개가 된다고 한다. 나는 실로 감개무량하다. 두서너개의 도장이 있을때 합기도를 시작해서 전국으로 물불을 가리고 않고 활동하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남다른 감회가 있다. 이렇게 많은 합기도장은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을까. 그것의 해답은 초창기 합기도인들의 땀과 희생이라고 한마디로 단정한다. 그들은 도장에서 먹고 자면서 오로지 합기도만을 연구했다. 한가지 수에서 수백가지의 형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수없이 적용하여 보완하고 수정해 완성한 것이 지금의 합기도다. 이렇게 노력한 선배들에게 '합기도를 마음대로 만들었다'느니 '최도주와 다르다'느니 하면서 입을 놀리는 것은 어린아이같은 행동이다. 이순간에도 묵묵히 합기도의 발전을 위해 도장에서 정성으로 노력하는 합기도인에게 격려의 뜻을 전한다.
한가지 첨부하여 기록에 남기려는 것은 하나의 무술을 사족직화 하여 자기가 창시한 것 처럼 말을 한다면 앞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엉뚱한 무술 이름으로 무술계를 흐트러 놓을 것인가를 깊이 생각했으면 하는 마음이다. 지금부터 20년만 뒤로 돌아가면 요사이 흔한 무술의 이름이 우리나라에 몇 가지나 있었는지 지금 실무 사범 관장은 생각해주길 바란다.
계파,분파 추월하는 자랑스런 합기인이 되자
우리나라 합기도는 앞에서도 기술하였지만 1954년 최용술 선생님께서 처음으로 대구에서 합기유술을 창시하신지 50여년이 흘렸으며 그 이후 서복섭 선생의 유술관, 안동에서 지한재 관장의 합기도장 등 합기도의 시작은 몇 개 도장에 불과하였다. 1960년대 들어 합기도는 한국 무술계에서 태권도 다음으로 크게 성장하여 최용술 선생님의 대구 본부를 위시하여 지한재 관장의 성무관, 김무홍 관장의 신무관, 서인혁 서인선 관장의 국술원 허일웅 관장의 국술관 등 몇 개의 분파로 합기도는 우후죽순처럼 성장 발전하였다. 이를 하나로 구심점을 만들기 위하여 1963년 9월 2일 대한기도회가 설립되었고 초대 총재는 최용술 도주님이었으나 회장, 이사, 대의원이 대다수 비합기도인이였기에 최용술 도주님은 기도회와 인연을 끊으니 합기도는 10년이상 성무관 국술원 신무관 등 유파로 전국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10년이 흐르는 동안 합기도는 각 문파에서 이탈한 더욱 많은 관이 발생하여 합기도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따른 각계파의 관장 사범들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하지 못하면서 더욱더 분파가 계속되었다. 특히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가 정책이 법인의 허가를 지방 자치제에 이관하였으므로 사단법인 설립이 완화되어 지금은 합기도 단체가 40여 개에 이르는 난립 된 모습으로 뇌사상태에 빠져있다.
나는 합기도의 1세대로써 전국 관장 사범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법인이 백 개가 되어도 우리 합기도의 정체성을 굳건히 하고 모든 실무자 유단자들은 합기도를 우리나라 최고의 무술로 만들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어떻게 하면 합기도가 완전한 자리 메김을 할 수 있을 것 인가를 깊이 고민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합기도가 최고의 무술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각 계파를 초월하여 이제는 실무 관장 사범 특히 합기도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젊은 실무 관장 사범들이 스스로 판단하여 합기도의 나갈 길을 선정하고 이것을 모든 회원들에게 인식시켜야 합기도의 백년대계가 설계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얼마 전 경찰청 가산점 문제로 경찰 고위 간부를 만나 대화를 하였는데 나는 합기도 하는 사람으로써 부끄럽게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이분의 말씀이, 합기도는 왜 이렇게 단체와 법인이 많으냐고 물으면서 합기도 단증이 부정으로 인한 사회적 물의 때문에 합기도가 많은 불이익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그분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이렇듯 우리 합기도가 분리되어 경쟁을 하면 점점 더 약해 진다는 것을 우리 합기도인들이 자각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제는 합기도가 한국의 전통무예의 맥을 잇고 최고의 무예로 완전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역사 왜곡 이나 진실 왜곡 즉 '나는 합기도가 아니다', '내가 합기도를 창시했다', 혹은 조상을 들먹이면서 무술을 창시 하였다니 하는 망언을 이제 머리에서 던져 버리고 합기도가 이 땅에 처음 창시되었을 때 그 인기를 다시 찾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데 있다. 모든 술기를 재정립하여 합기도를 배우는 사람들에게 더 좋은 술기와 가르침을 통한 삶의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하고, 많은 합기도 회원을 확립하고 그 중 합기도 미래를 열 우수한 유단자들을 배출해야 합기도의 미래가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 전국에서 합기도 전파를 위하여 노력하는 모든 실무 관장 사범들은 마음 가짐을 다시하고 계파 분파를 초월하는 자랑스런 합기도인이 되어 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합기도의 기틀 해방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새로운 무술의 장을 연 전통무술 합기도는 최용술 도주님의 창관 이후 그의 산하의 많은 사람들의 활동이 있었으나 그래도 국내의 초창기 합기도 보급을 위해 동분 서주 활동한 합기도인 중에는 성무관 지한재, 국술원 서인혁 서인선, 신무관 김무홍, 호신야와라 서복섭, 송무관 송중회, 평무관 강문진, 한풀 (김종윤), 을지관 김용진, 호신도 이동주, 국제연맹 명재남, 연비관 김정수, 유심관 이민영, 원무관 원광화, 비룡관 황덕규 등 많은 합기도인이 활동해 이 무술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마음 한뜻으로 대한체육회 가입해야한다
합기도 창립이래 50년 이상이 흐르는 동안 전국 3000여 합기도 도장과, 군소법인 40여개 그리고 합기도로 부터 파생한 많은 무술들이 난립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 합기도가 전통무술로서, 국민 속에 자리매김하면서 처음 시작될 때와 같은 심정으로 오직 합기도 발전을 위한다고 생각하고 합기도인은 하나가 되어, 한 마음 한 뜻으로 통합하여 통일된 모습으로 되살아 나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하여 하나된 실체로 체육회 가입도 서둘러야 하고 관계 당국과 협의해야 할 것이다.
합기도 기초정신을 계승할 철학을 세워야 한다
합기도가 처음 창관했을 때 그 의의는 우리 조상들이 남긴 훌륭한 호신 무술을 재 집대성하여 그 술기와 정신을 온 국민에게 보급하고 상무정신과 호국정신을 기르는 합기도인이 되기 위함이었다. 그 정신을 충효신예 즉, 국가를 위하는 마음, 부모를 섬기는 마음, 스승을 존경하고 선배를 섬기고 후배를 사랑하는 마음, 술기 하나 더 아는 것 보다 예의를 중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위의 정신을 바탕으로 합기도인 만의 무예 철학을 세워 다시는 스승을 배반하는 행위, 선배를 무시하는 행위, 난립을 조장하는 행위, 서로 존경하지 않고 헐뜯는 행위 등 합기도 발전에 저해되는 행동은 합기도 세계에서 없어져야 한다.
또한, 무술이 어느 사이비 종교처럼 자기가 창설했다느니, 조상을 들먹이는 속이 들어다 보이는 무인은 이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는 사회를 모든 실무 관장 사범 유단자들은 합기도 백년 대계를 위하여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우리 무도계는 일반 지식층에 무시 당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반 사람과 특히 식자들에게 확고한 이념과 무술인의 굳건한 정신, 즉 예를 중히 여기고 상무 정신에 입각한 뚜렷한 길을 걸어 나가고 있으며, 이렇게 합기도인들도 개선되는 사회, 정진하는 체력과 정신으로 우리나라를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점을 무인만의 철학을 가지고 사회에 이바지해야 할 것이다.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아야 더 많은 회원 확보도 가능하며 무술 중 태권도와 더불어 우리 합기도가 명실 상부한 격기 호신 무술로 자리 매김 하도록 실무 관장 사범 유단자들은 최선의 노력을 해야만 우리 합기도가 다시 이 땅에 우뚝 설수 있을 것임을 명심하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아울러 합기도 역사를 연재하도록 지면을 제공해 주신 무예신문 관계자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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