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천군은 경상남도 서북부, 대구와 진주의 중간에 위치하여 동으로 창녕군과, 서로 거창·산청군과, 남으로 의령·진양군과, 북으로 경상북도 성주·고령군과 인접하여 있다. 역사적으로 삼한시대의 이 지역은 여러 소국들로 분립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합천지역에는 다라국(多羅國), 초계지역에는 초팔혜국(草八兮國), 삼가지역에는 사이기국(斯二岐國)이 있었다가 AD 1∼2C경에 대가야에 영속되었고, 신라 24대 진흥왕 23년(562)에 이사부·사다함에 의해 대가야가 정복당함으로써 신라령이 되었다. 그후 1914년 합천·초계·삼가 이 세 지역이 합천군으로 통합될 때까지 이들 지역은 별개의 세 군현으로 존재해 왔다. 이 지역은 동쪽으로는 낙동강이 흘러 창녕군과 경계를 이루고, 서·남·북은 1,430m의 가야산 줄기를 본맥으로 하여 매화산(梅花山)(954), 이상봉(二上峰):1,046), 비봉산(飛鳳山)(1,125), 두무산(斗霧山)(1,038), 오도산(吾道山) (1,134), 황매산(黃梅山)(1, 108) 등의 산들로 이루어진 높은 산지가 중첩하여 있고 이러한 산간지대를 활강이 곡류하면서 군의 중심부로 가로질러 낙동강에 합류하고 있다 따라서 초계분지를 제외하면 평야가 별로 없고, 긴 산간 계곡을 따라 좁고 긴 경작지가 형성되어 있다. 이런 경작지는 대규모 농장에는 적합치 않지만 하천이나 계곡물을 이용하여 관개하기에 편한 까닭에 한해가 적고 하상(河床)이 낮아서 홍수 등 수해가 적을 뿐 아니라 피병(避兵)·피세(避世)에 유리한 곳이므로 재지 사족(士族)의 안정된 거주지로서 좋은 여건을 형성하고 있다.5) 합천지역이 경북 안동·경남 거창 등지와 같이 유림의 본거지가 될 수 있었던 지리적 여건은 위와 같은 점 때문이라 하겠다. 이 지역의 교통은, 합천에서 가야산 해인사에 이르는 마령대로(馬嶺大路)와 합천에서 삼가에 이르는 아현(阿峴)(아등이)대로(大路)의 남북도로와, 합천에서 초계를 잇는 견천(犬遷)(개비리)대로(大路)와 합천에서 통산면을 거쳐 거창에 이르는 두현대로(頭峴大路)의 동서도로, 그리고 붕산면에서 대병·가회를 거쳐 삼가에 이르는 북서도로의 3개 도로가 있고, 지현(智峴)(지리재)대로(大路)를 통하여 합천에서 고령을 통하여 대구에 이르고, 삼가에서는 산청, 진주, 의령으로 각각 통하는 도로가 있었다. 이러한 육로 외에 낙동강이 군의 동쪽을 끼고 지나감으로써 강을 통한 수운이 이용되었다.
(합천군 관내도)
취락은 이 지역 3개 교통축을 따라 발달했는데 합천-가야의 마령대로(馬嶺大路)를 따라 묘산면·야로면·가야면이 있고, 합천-초계의 대천대로(大遷大路)를 따라 율곡·초계·적중·청덕, 그리고 초계에서 북쪽으로 황강을 건너 쌍책과 덕곡이 있다. 합천-거창의 두현대로(頭峴大路)를 따라 용주·봉산과 1914년 이전에 삼가군에 속했던 거창군 신원면이 있다. 합천-삼가의 아현대로(阿峴大路)를 따라서는 대양·배산·상백(그후 백산·상백은 쌍백으로 되었다)이 있고, 봉산-삼가의 북서로를 따라 대병·가회가 있다. 합천은 군내 동서와 남북의 교통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고 상가는 남북과 북서교통로가 교차하여 진주, 산청, 의령으로 통하는 교차점에 있어 교통의 요지이자 시장이 발달한 곳이다. 군내의 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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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지역 : |
합천읍내(3. 8) 야로 도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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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지역 : |
초계성내(5. 10) 율지(덕곡면 낙동강 나루) (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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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지역 : |
삼가읍내(2. 7) 고현(대병변 창리)(4. 9) |
인구는 1918년 말로 22,756호 114,651명이었다. 행정구역은 모두 18개 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군내 3개 지역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표1> 합천군 관내면6)
구 지 역 |
관 하 면 |
비 고 |
구합천군 |
강양면(江陽面) 대양면(大陽面) 용주면(龍洲面) 묘산면(妙山面) 율곡면(栗谷面) 야로면(冶爐面) 가야면(伽倻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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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군 백암면(伯巖面) 일부 포함
초계군 갑산면(甲山面) 일부 포함
(궁소면(宮所面):의령군으로 분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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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초계군 |
초계면(草溪面) 적중면(赤中面) 쌍책면(雙冊面) 덕곡면(德谷面) 청덕면(靑德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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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삼가군 |
삼가면(三嘉面) 상백면(上栢面) 백삼면(栢山面) 가회면(佳會面) 대병면(大幷面) 봉산면(鳳山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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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면(神院面):거창군(居昌郡)으로 분리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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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산업은 농업으로 쌀·보리·콩·면화·삼·담배·닥 생산이 많고, 특산물로 청마(靑麻)·목면(木棉)·완석(莞席)·후지(厚紙)·감·밤이 있다. 군지(郡誌)에 나와 있는 이 지역의 풍속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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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 |
풍속은 검소하고 솔직함을 숭상한다. (속상검률(俗尙儉率)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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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 |
순박하고 부지런하여 농경에 힘쓴다. (상박실무경종(尙朴實務耕種)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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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 |
풍속이 강하고 용맹함을 숭상한다. (속상강한(俗尙强悍) 남명 조식 선생이 문학을 주창한 이후로 문교를 숭상하며 예의 범절을 중히 여겨 후배들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나왔다.9) |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 선생은 구삼가현 토동의 외가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18세까지 자랐으며, 그후 47세 때 다시 돌아와 60세까지 이곳에 있으면서 계복당(
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했다. 남명(南冥)의 학문은 경사자집(經史子集)뿐만 아니라 천문(天文)·지리(地理)·의방(醫方)·수학(數學)·궁마(弓馬)·행진(行陣)·관방(關防)·진수(鎭守)에 이르기까지 광범했고, 실천궁행의 학풍을 이루었다고 한다.10) 임진왜란 때에는 남명의 문하에서 곽재우·정인흥 등의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합천지역은 앞서 말한 지리적 여건에 의해, 대부분 남인(南人)에 속했던 영남 유림의 본거지의 하나가 되었는데, 사환(仕宦)의 길이 좁았던 남인(南人)들 중에서도 남명 문하의 서부 경남 48가(家)는 정인홍(鄭仁弘)이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몰락하자 완전 고락(枯落)되고 말았다 한다.11) 그런 가운데 남인(南人)·소인(少人)의 지지를 받던 경종(景宗)이 즉위 4년만에 갑자기 승하하고 영조(英祖)가 즉위하게 되자 정희량(鄭希亮)이 영조의 즉위를 불법으로 간주하고, 청주의 이인좌(李麟佐)와 손잡고 영조 4년(1728) 3월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이때 그를 강력하게 뒷받침해 준 것이 합천의 대지주 조성좌(曺聖佐)·합천 좌수 정상림(鄭商霖)이었고, 삼가현 좌수 신만중(愼萬重)도 현감 이정수(李廷秀)를 내어쫓고 그 군사를 이끌고 합천에 합세했다. 이 일은 경상좌도 유림의 협력을 얻지 못하여 한달만에 실패로 끝났으나 그 여파로 이 지역은 반역향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하여 이 지역 유림들은 중앙정계에서 배제되어 토호로서 자기세력을 향리 속에 국한시키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지리적·역사적 배경하에서 합천지역은 유림이 매우 성한 곳이 되어 한말에는 유림 종장(宗匠)의 고족(高足) 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이 지역에서 나온 학자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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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蘆沙) 기정진문하(奇正鎭門下) : |
노백헌(老栢軒)·정재규(鄭載圭)·농산(農山) 정면규(鄭冕奎)(상백)·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초계)·안계(安溪) 김종우(金鍾禹) 등이 있고 이들 문하에 율계(栗溪) 정기(鄭琦)(대양)·송산(松山) 권재규(權載奎)·정치규(鄭致圭)(상백)·추봉(秋峯) 남승우(南勝愚)(대양) 등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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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艮齋) 전우(田愚)문하(門下) : |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상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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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西山) 김흥락문하(金興洛門下) : |
현재(弦齋) 윤병모(尹炳謨)(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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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우(
宇) 곽종석문하(郭鍾錫門下) : |
중재(重齋) 김황(金榥)·희당(希堂) 김수(金銖)(합천)·겸산(謙山) 문용(文鏞) | 등이 있고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은 22세에 삼가현 신지면(神旨面)(현 거창군 신원면)으로 와 2년 후 산곡 역동(
洞)에 역고재(繹古齋)를 짓고 7년간 성리학을 연구했다.12) 그밖에 많은 유림들이 조선(祖先)과 선현(先賢)의 추모(追慕)·강학지소(講學之所)로서 사(祠)·정(亭)·재(齋)·서당(書堂)·정사(精舍)를 지어 지금도 각 동리에 많이 남아 있다.13) 유림단 파리장서에 서명한 137인의 유림 중 이 지역 인사로 송호완(宋鎬完)·송호곤(宋鎬坤)·박익희(朴翼熙)·송호기(宋鎬基)·송재락(宋在洛)·문용(文鏞)(이상 대병면)·송철수(宋哲秀)·김동수(金東壽)(이상 합천면)·전석구(全錫九)·김석윤(金錫允)이 있다.14) 한말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이곳 유림 가운데 노사문하(蘆沙門下)의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가 적극적인 참여를 시도했으나 거사에 이르지는 못했다. 그는 1860년 김홍집이 일본에서 구해 온《조선책략(朝鮮策略)》을 조정에서 따르려는 움직임을 보였을 때도 성균관 유생들에게,
지금 천하가 모두 이적금수(夷狄禽獸)에 빠졌는데 오직 아동(我東)이 조금 물들지 않아 희망이 있거늘 이것마저 진멸되고 말면 유관(儒冠)을 쓰고 유복(儒服)을 입고, 공자(孔子)의 글을 읽어 춘추의 법을 강론하는 우리로서 무슨 말로 천하후세에 변명하리요. 본도(本道)로부터 유림(儒林)을 규합하여 나라에 소(疏)를 올리고자 하노니 오직 제공(諸公)이 대의의 깃발을 들고 선창하면 궁항벽지에 있는 우리가 대의명분에 따라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15)
고 하며 격문을 보내고 조정에 올릴 소(疏)를 준비했으나 주위 문인들의 만류로 올리지 못했다. 1905년 을사(乙巳)조약이 늑약되자 그해 11월 조용소(趙鏞韶)·정면규(鄭冕圭)·권운환(權雲煥)·진박(陳樸)·송재락(宋在洛)·유원중(柳遠重)·송호완(宋鎬完)·정용규(鄭龍圭)·유치균(柳稚均)·최덕환(崔德煥)·정재호(鄭在鎬)·남정우(南廷瑀)·이교문(李敎文)·정재혁(鄭在爀)·민치덕(閔致德)·김경문(金景文) 등 문인과 동지를 이끌고 최익현(崔益鉉)이 있는 정산(定山)으로 달려갔다가 무산되었으며, 최면암(崔勉庵)의 재기(再起) 소식에 다시 한번 참여를 시도하다가 면암(勉庵)이 대마도로 잡혀갔다는 소식에 단념하고 강학에만 전념하게 되었다.16) 한주(寒州) 계열의 유림은 의병과 입산수구(入山守舊) 양쪽을 다 거부하고 국제사회에 호소하여 항일(抗日)운동을 전개하는 특징을 보여 주는 만큼 의병운동에 나서지 않았다.17) 일제(日帝)의《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編冊)》에 나타나는 것을 보면 합천 서부지역 즉 대병·가회·봉산·삼가에 의병 출몰 기사가 보인다. 삼가군 서원동(書院洞) 출신의 신난파(申蘭波)는 1902∼3년부터 경북 개녕군(開寧郡)·선산군(善山郡)에 출입하며 동지 규합과 자금을 거출하여 문태수(文泰洙) 의병장에게 제공했다.18) 그 외 이 지역 출신이거나 이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장을 보면 다음과 같다.19)
<표 2> 합천지역(출신 되는 활동) 의병장
출 신 |
성 명 |
출생지 |
부하원수 |
활 동 지 역 |
불 명 〃 전승지(前承旨) 불 명 원진위대정교 (元鎭衛隊正校) 불 명 〃 |
박태봉(朴泰奉) 박마야지(朴馬也只) 윤자승(尹滋承) 지관국(池寬國) 신중근(申重根) 노성화(盧性化) 불 명 |
삼가(三嘉) 하동(河東) 진주(晋州) 전라도 고성(固城) 진주(晋州) |
40 400 200 80 15 20 6 |
지리산부근 하동·삼가 덕산(德山)·단성(丹城)·삼가 삼가 〃 의성·삼가·단성 초계·합천·산청·창녕·현풍 | |
합천군의 3·1운동은 1919년 3월 20일을 전후하여 장이 서는 날을 따라 장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는데 시위규모도 컸을 뿐 아니라 시위양상도 격렬한 것이었다. 3월 18일 삼가시위를 시발로 하여 3월 19·20·22일의 대양면민이 주도한 합천읍내 시위, 3월 20일의 대병면 창리 시위, 3월 21일의 초계면 초계 시위로 이어졌는데, 대병 시위와 초계 시위는 모인 군중이 3∼4,000명에 이르는 대규모의 격렬한 시위였다. 이러한 시위운동의 열기는 3월 23일 다시 삼가장터에서 백산·상백·삼가·가회·대병·용주·대양면 및 의령군 대의면·산청군 생비량면 등에서 모인 13,000명의 시위로 그 절정에 달했다. 군중은 주재소·면사무소 등 일제 관공서를 부수고 문서를 소각하고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을 차단하였으며 일군경은 무차별 사격과 탄압으로 많은 사상자가 났다. 그 외에도 이 지역에는 3월 22일의 묘산면 시위,20) 3월 28일의 야로읍내 시위, 3월 31일의 해인사 학생 시위 및 4월 3일의 가야면 매안리(梅岸里) 시위 등 10개소에서 13회의 시위가 있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합천군 내 시위 가운데서도 가장 규모가 크고 격렬했던 합천, 대양, 대병, 초계, 삼가 시위를 중심으로 시위양상과 그 특징을 살펴보려 한다.21)
1) 합천·대양 시위
합천·대양 시위는 대양면민이 중심이 되어 3월 19·20 및 22일까지 합천읍내에서 전개한 시위 운동이다. 합천면은 군소재지로 합천군 동서와 남북 교통이 교차하는 곳이어서 교통이 편리하고 물자의 집산지이다. 이곳에는 동족부락이 10곳 있고 그중 6곳이 합천 이씨의 동족부락이다.22) 영창리(盈倉里)에는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 문하 고족(高足) 희당(希堂) 김수(金銖)가 강학하던 창계서당(滄溪書堂)이 있다. 대양면은 황강을 사이에 두고 합천면 남쪽에 있으며 이곳에 있는 10곳의 동족부락 중 진양 강씨 곳이 4곳, 청송 심씨 곳이 3곳인데 이 두 성씨의 동족부락은 100세대 이상을 이루는 큰 것이다.23) 이곳에 있는 추모·강학을 위한 정(亭)·재(齋) 등의 기문(記文) 또는 양송(樑頌)의 찬자(撰者)를 살펴보면,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인인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6),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6), 율계(栗溪) 정기(鄭琦)(3), 의춘(宜春) 남승우(南勝愚)(10) 등이 찬(撰)한 것이 25곳이나 되어 한주학파(寒洲學派)의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중재(重齋) 김 황(金榥)·희당(希堂) 김 수(金銖)·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등이 찬(撰)한 곳이 6곳24)인데 비하여 볼 때 이곳 유림의 학풍은 노사(蘆沙) 계통의 것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특히 무곡리(茂谷里)에는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에게서 배우고 시암(是庵)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은 추봉(秋峯) 남승우(南勝愚)가 강학하던 암첩재(巖捷齋)가 있고 노사(蘆沙)와 한주(寒洲) 문인 고족(高足)이 찬기(撰記) 또는 찬양송(撰樑頌)한 재(齋)가 7곳이나 되는 것으로 보아 특히 유림이 성했던 곳으로 보인다. 대양면 시위는 이곳 무곡리(茂谷里) 출신의 강홍렬(姜弘烈)이 유학자인 부친과 함께 인산에 참여차 상경하였다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서 합천지역에 전파하였다고 한다.25) 강홍렬(姜弘烈)은 당시 24세의 청년으로 한학을 배워 대병면에서 서당 훈장을 하고 있었다 하는데,26) 이곳의 시위는 그의 배후 주도하에 합천면의 주경천(朱擎天)과 대양면 대목리(大目里) 심재기(沈載祺)·심진환(沈瑨煥)·심재인(沈載仁) 등 12동지가 대목리(大目里) 이계(伊溪)에 있는 수암정(修巖亭)에서 밀의를 거듭한 후27) 3월 19일 합천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준비를 했다. 1919년 3월 19일 주도인물들은 준비된 태극기를 갖고 합천읍으로 잠입하여 오후 4시경 장꾼들이 가장 많이 모여들었을 때 장 복판에서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주고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이에 약 500명의 장꾼이 호응하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대열을 지어 시장거리를 누볐다. 이때 일경 19명이 출동하여 심재기 외 16명을 붙잡고 나머지 군중은 해산되었다. 이튿날인 3월 20일 대양면민 2-300명은 다시 대목리(大目里) 앞 마정(馬亭)부락에 모였다. 대목리(大目里)의 심맹권(沈孟權)(22, 일명 재현(載現))이 이때 군중의 앞에 나서, 소기의 목전을 달성하기 위해 결사대를 조직하자고 제의하여 그를 포함하여 손득룡(孫得龍)(24, 일명 용이(龍伊) :대목리(大目里) 음식점), 이용선(李龍善)(38, 무곡리), 김영기(金永騏)(48), 추용만(秋鏞滿)(32), 이상자(李相字), 배상룡(裵祥龍)(28) 등 12명이 나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명부를 작성하여 이름을 적고 각각 무인을 눌러 소기의 목적 달성을 위해 헌신할 것을 서약하였다. 시위대는 결사대를 앞세우고 6km 떨어진 합천읍내로 들어가 각 면에서 모인 군중과 합세했다. 김영기(金永騏)는, "나라 잃은 백성은 사람 아닌 닭과 개"같음을 역설하고, "조국 독립을 위하여 최후의 1인 최후의 일각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눈물로 호소했다.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읍내 거리를 시위한 후 오후 7시경 시위대는 합천경찰서로 쇄도하여 전날 구금한 심재기 등 17명을 석방하라고 요구하였다. 이때 합천경찰서 안에는 경찰서장 식촌현후(植村玄厚)와 순사 1명, 순사보 4명이 소방부 6명, 주민 2명의 지원을 받아 있었는데, 서장은 고압적 자세로 해산을 명하고 소방부와 더불어 시위대를 밀어내려고 하였다. 이에 시위군중은 깃대를 가지고 순사를 때리고 소방부와 맞붙는가 하면 담을 넘어 서내로 돌진하려 하였다. 일경이 공포를 쏘아 위협하였으나 군중은 물러서기는 커녕 오히려 더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이때 진촌희삼랑(津村喜三郎)·대구보희구삼(大久保喜久三)·약본작차(掠本作次) 3명이 엽총을 발포하여 4명이 즉사하고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일제의 기록에는 이틀 후인 3월 22일에도 경찰서 습격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28) 시위로 하여 순국·부상·수형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 |
김영기(金永騏)(48) 추용만(秋鏞滿)(32) 추용소(秋鏞韶)(32)29) 김호수(金浩洙)(32 : 일명 호준(浩俊)) |
② 부상자 : |
이용선(李龍善)(38 : 무곡리, 농) 손덕룡(孫德龍)(24 : 이명 용이(龍伊), 대목리, 음식점) 심재수(沈載洙)(대목리) 외 8명 |
③ 수형자 : |
심맹권(沈孟權)(25 : 이명 재현(載現), 대목리, 농), 2년 배상기(裵祥祺)(28) 이용수(李龍守) 이용선(李龍善)(38 : 무곡리, 농), 2년 손득룡(孫得龍), 2년 강상무(姜相武), 1년 |
2) 대병면 창리 시위
대병면은 합천군 서쪽끝에 있어 함양·거창군과 접한다. 창리에 고현시장(古縣市場)이 서고 17개의 면내 동족부락은 남평(南平) 문씨(文氏)(3), 은율(恩律) 송씨(宋氏)(3), 안동(安東) 권씨(權氏)(3), 팔계(八溪) 정씨(鄭氏)(2) 등의 거주 부락이고 은율(恩律) 송씨(宋氏)와 안동(安東) 권씨(權氏) 동족부락은 100세대가 넘는 것이다.30) 이곳은 구삼가군에 속했었고 각 동리에 있는 재(齋)나 서당(書堂)에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5곳),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 간재(艮齋) 전우(田愚)(각 1곳)등 유림 종장(宗匠)이 기문(記文)을 찬(撰)한 것이 있다.31) 대병면에 독립선언서가 전해진 경로는 적어도 3개 이상이 되는 것 같다. 첫째는 대병면 장단리의 정태섭(鄭泰燮)이 서울에서 선언서 500매를 가져와 합천군내에 배포했다는 것, 둘째 대병면 장대리 임상종(林尙鍾)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감추어 가지고 고향으로 왔다는 것, 그리고 세째로, 대병면 이기복(李起馥)이 군내 백산면(柏山面) 이원영(李愿永)에게서 선언서를 전해 받았다는 것 등이다.32) 이 세 경우의 정태섭(鄭泰燮)·임상종(林尙鍾)·이기복(李起馥) 3인은 시위 준비과정에서 함께 참여하고 있음이 기록에 나타난다.33) 선언서가 전달된 자세한 배경을 알 수가 없지만 이곳에 선언서가 전달되자 권영두(權寧斗)·권중박(權重璞)·정시권(鄭時權)·유인수(柳仁秀)·권양희(權良熙)·송헌기(宋憲基)·정태섭(鄭泰燮)·이기복(李起馥)·권진희(權晋熙)·임상종(林尙鍾) 등 20여명의 인사들이 시위를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유인수(柳仁秀)의 판결문에 의하면, 1919년 3월 18일 이들 20여 명은 대병면 금곡리(金谷里)의 곽씨산정(郭氏山亭)에 모여 조선독립에 관한 시위운동 거행에 관해 협의하였다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시위방법 결정과 임무분담이 주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위 준비에 관한 정문선(53)34) 씨의 증언에 따르면, 다음날 새벽 권양희(權良熙)와 정시권(鄭時權) 2명이 정시권(鄭時權)의 사랑에서 태극기를 제작했다. 이 태극기는 미리 동리민들에게 나누어 주어 품안에 품고 시위장소로 가도록 계획했다. 대병면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전에는 고현(古縣)·대평(大平)·병목(幷木)의 3개면(面)이 있었는데, 이 3개 지역을 나누어 고현(古縣) ; 정시권(鄭時權)·권양희(權良熙), 대평(大平) ; 권중박(權重璞), 병목(幷木) ; 송씨(宋氏) 2명 (아마 그중 1명은 송헌기(宋憲基)가 아니었나 생각된다)이 책임을 맡아 대중동원을 위한 연락을 하였고, 3월 20일 주도자들은 대기(大旗)를 들고 병목, 대평으로 시위대를 마중 나가 인솔했는데 병목 시위대는 권양희(權良熙), 대평 시위대는 정시권(鄭時權)이 했다 한다. 이렇게 하여 대병면 3개 방면에서 약 4,000명이 집결하여 창리 고현 시장으로 가는 중도에서 권영두(權寧斗)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열변으로 군중을 고무하였다. 이어 주도자의 선창으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에 들어가 시장으로 향하였다. 시위군중은 시장을 일주하고는 순사주재소를 포위하고 소내로 돌입하였다. 일경이 총을 겨누자 선두에 선 이병추(李秉樞)는 옷을 열어 젖히고 "자! 쏴 보라!"하며 돌진했다. 순사부장이 쏜 총알이 그의 귓가를 관통하여 유혈이 낭자하자 이를 본 군중은 격분하여 순사와 순사보를 반죽음이 되도록 두드려 눕힌 후 주재소 건물, 기구를 전부 파괴하고 문서류를 옥외로 끄집어내어 소각했다. 시위대는 다시 거기서 l00m가량 떨어진 대병면 사무소로 달려가 건물·기구를 파괴한 후 서류·부책을 전부 밖에 내다 소각했다. 이때 수십 명의 일군이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두르며 들이닥쳤다 시위대는 흩어지고 54명이 검거되었다. 그 가운데 옥고를 치룬 사람은 다음과 같다.
권영두(權寧斗)(35) 3년 임상종(林尙鍾) 3년 권중박(權重璞)(25) 1년 6월 유인수(柳仁秀)(34) 2년 송헌기(宋憲基) 1년 6월 정시권(鄭時權)과 권양희(權良熙)는 서울로 피신하여 옥고를 면했다.
3) 초계면 초계 시위
초계지역은 청계산(591), 태백산(584), 미타산(662) 등의 산들과 그 지맥으로 완전히 둘러싸인 분지에 초계면과 적중면이 동서로 반씩 차지하고 있고, 그 동쪽으로 청덕면이 낙동강을 끼고 있고, 초계분지 북쪽의 황강을 경계로 그 윗 지역에 쌍책면과 덕곡면이 있어 이 합천군 동부 5개 면이 구초계군을 이루었었다. 이곳이 분지인 까닭에 동서로 도로가 하나 뿐이어서 이 길을 통하여 서쪽으로는 합천면과, 동쪽으로는 낙동강 나루를 통하여 창녕군과 총하고 있다. 초계를 중심으로 한 동부 5개 면에서는 초계장이 유일한 장이고, 초계 북쪽 30리의 낙동강변에 율지장(栗旨場)(밤바리장)이 서서 낙동강을 통해 어염이 공급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노사(蘆沙) 문하의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이 강학하던 일중정(日中亭)이 초계면 무릉리에 있고,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의 각재(覺齋) 권참현(權參鉉)에게 배운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의 태동서사(泰東書舍)가 유하리(柳下里)에 있다 변지섭의《경남독립운동소사(慶南獨立運動小史)》(상(上))의 초계면 3·1운동에 대한 서술에는 4월 5,6일경 창원(昌原)의 변상태(卞相泰)가 초계(草溪) 무릉리(武陵里)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을 심방하면서 시암(是庵)의 조카 이원화(李源華)를 만나 3·1운동을 논의함으로써 4월 20일 이 지역 시위가 일어났다고 하고 있는데 초계시위는 3월 21일에 일어났던 까닭에35) 전후관계가 맞지 않아 납득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3월 21일 일어난 이곳의 만세시위는 적어도 두 계통으로 거사가 추진된 것 같다. 하나는 시암(是庵)의 조카이자 초계면 무릉리의 유지 이원화(李源華)와 전하선(全夏善)·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 등에 의해 추진된 계통이며, 다른 하나는 초계면 대평리의 정점시(鄭點時)·초계 부호 노호용(盧浩容)·부락의 학자요 선비인 이몽우(李夢雨)이 세 사람의 우인(友人)이 중심이 되어 추진한 계통이다. 이원화(李源華) 등의 추진과정에 대해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제 3권의 서술을 옮겨 보면 다음과 같다.
이곳 초계면에도 3·1운동의 감격적 소식은 끊임없이 들려 왔다. 초계면 무릉리(武凌里)에 사는 이원화(李源華)·전하선(全夏善)·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 등은 전국의거에 발 맞추어 이곳 초계면에서도 의거를 단행할 것을 모의하여 거사일을 3월 21일 초계리 시장 장날로 약정하고 동지를 규합하면서 모든 준비를 서둘렀다. 즉 이들은 이날의 대중 동원의 공작과 아울러 독립선언서·태극기 등을 만들어 물샐틈없는 준비를 갖추어 갔다. 36)
정점시(鄭點時) 등 3인이 주도하여 추진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이들 정점시(鄭點時)·노호용(盧浩容)·이몽우(李夢雨)는 당시 21∼22세의 청년들로서 세 사람이 협의하여 격문을 짓고, 3월 21일 초계장날을 거사일로 정한 뒤 노호용의 밀실에서 밤새 태극기를 만들었다 한다. 당시 노호용의 집안은 초계 제일의 부호로서 2,000석을 했다 한다. 이들은 많은 태극기를 일일이 그리기 어려웠으므로 나무에 새겨 찍어 내어 이것은 정점시(鄭點時)가 동부 5개 면 즉 초계(草溪)·적중(赤中)·청덕(靑德)·쌍책(雙冊)·덕곡(德谷)에 전달했다 한다.37) 이 두 계통의 시위준비가 서로 긴밀한 협의하에 진행된 것인지 별개로 되었던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으나 양쪽 다 3월 21일 초계장날을 거사일로 잡았던 까닭에 이날 오후 1시경이 되자 초계 장터에는 약 4,000명의 군중이 모였다. 주도인물들은 준비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누어 준 후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다. 군중은 이에 호응, 만세를 연달아 부르며 시장을 누볐다. 한편 시위대는 일군과의 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약 300명으로 별동대를 조직하여 초계 우편소를 습격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우편소 인입선(引
線)을 끊고 실내선을 토막냈으며, 공중전화기를 부숴버렸다. 그런 후 초계 주재소로 쳐들어가 건물을 향해 투석하고 몽둥이 등으로 창문을 두드려 부수었다. 이때 순사가 공포를 쏘아 시위대를 해산시키려 하자 군중은 더욱 격분하여 순사 2명을 때려 눕혔다. 이때 합천경찰서에서 경찰 응원병이 달려와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김장배(金長培)외 1명이 현장에서 순국하고 이원탁(李源鐸) 등 10명이 부상하는 가운데 시위대는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후 4시경 군중은 일단 해산하였으나 다시 의거를 감행하려는 기운이 짙어 이에 겁을 먹은 초계리 거주 일인 46명은 합천읍으로 피신하였다. 초계시위로 인한 순국·부상·수형자는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 |
김장배(金長培)외 1인 |
② 부상자 : |
이원탁(李源鐸)·권국서(權國瑞)외 8인 |
③ 수형자 : |
이원화(李源華) 3년 성만영(成萬永) 2년 구재범(具在範) 2년 정수조(鄭守祚) 1년 김명덕(金明德) 2년 정점시(鄭點時) 2년 정판백(鄭判伯) 2년 안주백(安周伯) 2년 권국서(權國瑞) 2년 이만용(李萬用) 2년 | 노호용(盧浩容)·이몽우(李夢雨)는 옥고를 면했다.38)
4) 삼가 시위
3월 18일과 23일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삼가 시위는 백산·상백면과 가회면이 중심이 되어 일어났다. 백산(栢山)과 상백(上栢)은 그후 합쳐져서 오늘날의 쌍백면(雙栢面)이 되었는데, 여기에는 11곳의 동족부락이 있고 이 가운데 대성(大姓)은 초계(草溪) 정(鄭), 김녕(金寧) 김(金), 인천(仁川) 이씨(李氏)이다.39) 1989년 3월 현재 쌍백면에는 초계 정 23.5%, 김녕 김 10.8%, 인천 이 8%로 이 3성(姓)을 합치면 42.3%로서 주민의 반에 이른다.40) 초계 정씨의 경우 면내에서 44∼45%까지 점했었다고 한다.41) 이 지역의 3·1운동은 초계 정씨와 인천 이씨가 주도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상백에서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하 고족(高足)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와 그의 종형제(從兄弟)이자 동문(同門)인 정면규(鄭冕圭)가 나왔고, 이들의 정신적 무게가 무겁게 드리운 곳이다. 노백헌(老栢軒)(1843∼1910)은 상백면 육리(陸里) 묵동(墨洞)에서 태어나 22세에 노사(蘆沙) 문하에서 수학하고 그의 학통을 계승, 정립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42) 그는 한주(寒州) 이진상(李震相)을 비롯하여 그의 문하 허유(許愈)·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 등 한주학파(寒洲學派)와 교류하고 김평묵(金平默)·최익현(崔益鉉)·유기일(柳基一) 등 화서학파(華西學派)와도 교류하였으며,43) 최면암(崔勉庵)과 더불어 거의(擧義)하려 했던 사실은 앞서 언급한 바 있다. 육리(陸里) 묵동(墨洞)에는 그의 만년에 지은 노백서사(老栢書舍)가 있다. 또한 이곳에는 족형(族兄)뻘되는 노백헌(老栢軒)과 학문적 입장을 달리한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1880-1957)가 있었다. 그는 외가 친척인 삼외재(三畏齋) 권명희(權命熙)의 권유로 20세 때부터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과, 연재(淵齋)의 순절(殉節) 후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밑에서 수업했다. 1912년 심석재(心石齋)마저 순절(殉節)하자 고군산도(古群山島)로 가서 간재(艮齋) 전우(田愚) 문하에 들어갔다. 그후 상백면(上栢面) 평구리 갈마골의 모원재(慕遠齋)에시 궁리와 강학으로 일생을 마쳤다. 그는 철저한 항일정신을 견지했고,《을사순국제공전(乙巳殉國諸公傳)》,《경술순국제공전(庚戌殉國諸公傳)》,《한말순국열사제공전(韓末殉國烈士諸公傳)》,《정미삼밀사전(丁未三密使傳)》을 저술했으며, 야사(野史)로서《한사초집(韓史抄輯)》을 남겼다.44) 가회면(佳會面)은 산청군 신등면과 접하는 합천군 서부지역이며 대병면과 삼가면의 사이에 있다. 합천과 삼가를 제외하고는 이들 지역에 보통학교도 없었으며, 가회에는 장(場)이 없어 12km 떨어진 삼가장을 이용했다. 이곳에는 남평(南平) 문(文)씨와 김해(金海) 허(許)씨가 대성(大姓)이다. 이곳의 3·1운동을 주도했다는 파평(坡平) 윤(尹)씨는 함방리(含芳里) 구평(龜坪)부락에 모여 사는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활약하여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선무일등공신(宣武一等功臣) 구산(龜山) 윤탁(尹鐸)과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의정부참찬(行議政府參贊) 추담(秋潭) 윤선(尹銑)의 후예들이다. 윤탁(尹鐸)의 강학지소로서 구산서당(龜山書堂)과 윤선(尹銑)의 강학(講學) 및 조두지소(俎豆之所)로서 회계서당(晦溪書堂)과 구음재(龜陰齋)가 이곳에 있다.45) 가회면은 상당히 부유한 고을이었던 것 같다. "합천군내 17개 면 재산을 다 합해도 가회면 재산보다 못하다"는 말이 있다. 가장 큰 부자는 덕촌리(德村里)의 만석군 김홍석(金洪錫)이었고(실제는 6,000석 정도 되었다 한다) 이곳에는 150석 이상 되는 집이 30집이 되었다 한다.46) 상백·백산면에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것은 상백면과 백산면 제각기의 길을 통하여 된 것이었다. 상백면에는 이곳 출신으로 당시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던 정현상(鄭鉉尙)(1892∼1967)이 서울에서 선언서를 가지고 내려와 백형(伯兄) 정현하(鄭鉉夏)에게 전달하고 상경하였다. 백산면의 이원영(李愿永)은 호(號)를 백두산 밑이라는 뜻으로 백하(白下)라 하는데,47) 대병면 병목에서 한학을 배우고 서울로 가서 오산학교를 나왔다 한다. 1919년 당시 그는 32세로서 부인과 아들 둘 딸 하나를 하신리(下新里) 집에 두고 단신 서울에 머물고 있었는데, 독립운동에 투신해 있었다 한다.48)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16 또는 17일에 독립선언서 4장을 신발 밑에 숨겨 가지고 백산면으로 내려와 한 장은 하신리(下新里) 숙실의 이계엽(李啓燁)(30)에게, 한장은 상백면 평구리의 처남 정연표(鄭演彪)(이명 방직(邦直))에게, 또 한장을 대병면(大幷面) 3·1운동 주도자의 한 사람인 친구 이기복(李起馥)에게 전했다. 가회면의 경우, 가회면 구평리의 한학자로서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인인 현재(弦齋) 윤병모(尹炳謨)(1859∼1934)가 산청군 단성(丹城)의 김영숙(金永淑)과 상의하여 그들의 장자 윤규현(尹圭炫)과 김상준(金相峻)을 서울로 보내 대중창기(大衆倡起)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여 오게 함으로써 양처(兩處)의 계기를 이루었다고 알려져 있다.49) 그러나 그곳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 시위는 윤재현(尹在鉉)이 주도하였는데 그가 덕촌리(德村里) 한필동(韓弼東)과 함께 고종 인산(因山)에 참여하고 돌아와 시위를 주도했다는 것이다.50) 윤재현(尹在鉉)은 자(字) 사언(士彦), 호(號) 강려(康旅)라 하고 추담(秋潭) 윤선(尹銑)의 후손으로서 풍모가 빼어나고 학문과 재혜(才慧)가 특출했으며, 500석의 재산을 가졌고51) 3·1운동을 시작으로 하여 구음의숙(龜陰義塾)을 통한 교육운동과 의열단 지원 등으로 일생을 이면에서 독립운동으로 마친 인물이다.52) 상백과 백산지역은 이원적으로 독립선언서가 전달된 후 각기 은밀히 운동준비가 추진되는 과정에서 상백면의 정연표(鄭演彪)가 양쪽으로부터 제의를 받게 되자 두 흐름을 일원화시키게 되었다. 상백편에서는 정연표가, 그리고 백산면에서는 이계엽이 면내 유지들의 후원하에 전면에 나서 시위준비를 주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상백면장 박노석(朴魯碩)과 각 이구장(里區長) 및 유지(有志)를 회집하여 다음의 원칙을 정했다. - 거사일은 3월 18일 삼가 장날로 정한다. - 회집장소는 삼가 읍으로 가는 중도(中途)로 한다. - 태극대기(太極大旗)는 각 동에 1개, 수기는 각자가 지참한다. 백산면에서는 태극대기와 수기 1,000여 개를 만들었으며 "기미 3·1운동 백산면 대표자 이계엽"이라고 쓴 장폭기(長幅旗)를 제작했다. 가회면에서는 덕촌리 만석군 김홍석(金洪錫)이 비밀리에 자금을 대어 윤재현(尹在鉉)의 서재에서 독립선언서를 인쇄했는데, 삯군을 대어 목도자(木濤字)로 찍어냈다고 한다.53) 깃발은 허장(許
)의 집에서 허장(許
)과 김태현(金台炫)이 만들었고, 이들이 각 동네에 연락을 취했다 한다. 쌍백지역과 가회는 당색이 달라서 지금까지도 만나면 서로 외면하는 상태라고 하는데, 민족적 거사를 앞두고는 긴밀한 연락관계가 형성되었다 한다.54) 3월 18일 백산면 주민들은 운곡리 면사무소 앞에 모여 만세를 부른 후 오전 11시경 장꾼으로 가장하여 삼가로 내려가면서 상백면 시위대와 합류했다. 제 1회의 만세시위는 오후 1시경 상백면의 정연표를 비롯한 주도자들이 삼가시장내 주점인 박흥대의 집에서 최종 회합을 가진 후 정언표·정각규 등이 선두에 서서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시작했다.55) 이때 가회면의 한필동(韓弼東)도 "조선독립기(朝鮮獨立旗)"라고 쓴 지기(紙旗)를 흔들며 만세를 높이 불렀다. 그는 윤재현(尹在鉉)과 함께 서울의 고종 인산에 참여하고 와서 가회면 시위를 주도한 사람으로56) 이 사실은 3월 18일 시위부터도 가회면과 상백·백산지역이 함께 연합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시위는 오후 1시에 시작되었으나 본격적 시위는 오후 5시경부터 오후 8시, 시위 주도자 정연표(鄭演彪)·한필동(韓弼東)·정각규(鄭恪圭)·공민호(孔敏鎬) 등이 체포될 때까지 치열하게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삼가 시장에는 3∼400명이 모였다 한다.
합천군(陝川郡) 삼가(三嘉), 십팔일(十八日) 오후(午後) 오시(五時) 다수(多數)의 군중(郡衆)이 삼가시장(三嘉市場)에서 독립만세(獨立萬歲)를 고창(高唱)하고 현재(現在)도 소요(騷擾)를 하고 있으므로써 합천경찰서장(陜川警察署長) 이하(以下)가 급행(急行)하여 목하(目下) 진압중(鎭壓中)57) 합천군(陝川郡) 삼가(三嘉), 삼가(三嘉)의 소요(騷擾)는 십팔일(十八日) 오후(午後) 팔시(八時) 수모자(首謀者) 오명(五名)을 체포(逮捕)하고 진정(鎭定)시켰다.58)
3월 18일의 삼가 장터 시위는 그날 저녁 8시경에야 합천에서 달려온 경찰서장과 경찰 및 재향군인에 의해 겨우 해산되었을 정도로 끈질기게 전개되기는 했지만 3∼400명이 시위에 참여했다는 것으로 보아 이 시위는 그곳 시위 주도자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되지 않았나 한다. 이에 3월 18일의 시위가 있은 후 다음 삼가 장이 서는 3월 23일에 다시 시위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고 삼가면 대병면·응주면·백산면·상백면·가회면 등 구삼가군 지역과 대양면·의령군 대의면·산청군 생비량면 등 인근 지역 면에 이르기까지59) 유지 자산가의 배후 지원하에 전 주민적 참여 권유와 조직적 동원이 이루어졌다. 비록 이 지역이 유교적 전통이 뿌리깊어 충군애국의 의식이 강하고, 일제의 무단정치 10년에 대한 반감과 그 전년도 말 이래의 쌀값 폭등으로 민생이 도탄에 빠져60) 이로 인해 일제에 대한 저주의 마음이 가득했다 하더라도 총칼 앞에 나서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주민동원 과정에서 참여를 독려하기 위한 주도자들의 위협이 있었을 수가 있고, 그렇다 하더라도 3·1운동이 갖는 의미가 손상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백산·상백지역에서 보이는 그러한 예로, 오영근(吳永根)·정문약(鄭文若)·정희영(鄭喜永) 등이 촌에 다니며 촌민에 대해 삼가 장날 시위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고,
"명일(明日) 삼가시장(三嘉市場)에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니 나오지 않는 자는 그 주가(住家)를 방화(放火)한다고 위갈적(威喝的) 선동을 하였던 까닭에 ‥‥‥‥"61)
라고 하며 시위 참여 동기를 변명하고 있는 한 참여자의 말 가운데서,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주민동원 과정의 한 모습을 보여 준다 하겠다. 가회면에서도 주민동원을 위해 주도자들이 마을마다 다니며, "부락 단위로 나온 사람 이름 적는다." "빠진 사람 여기 안살린다." "집을 두드려 부순다"하며 전 주민적으로 참여케 했으며,62) 시위 당일에는 농악대를 동원하여 부락마다 사람을 모아 5집 사는 동네도 빠지지 않고다 나왔다 한다.63) 쌍백·가회지역에서 "유지 재산가들이 앞장섰고, 부자 권한으로써 주민들을 동원했다"는 말64)을 많이 들을 수 있었다. 3월 23일 이른 아침 백산면에서는 3,000명이 면사무소에 운집하여 만세를 높이 부른 후 면사무소를 전복시켜 불태웠다. 이어 3.5km 떨어진 상백면 평구리로 가서 그곳에 모여 있던 상백면민과 합세하여 4km거리의 삼가로 향했다. 이들은 가는 도중에 전주 2개를 쓰러뜨리고 3-4개는 밀어뜨려 초자를 부수어 버리는 한편 전선을 절단했다. 3월 18일의 시위가 합천경찰서의 일경과 재향군인에 의해 진압되었던 데서 합천으로 통하는 통신을 차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각 면에서 모인 군중은 각각 7,800명씩으로 대오를 편성하고 각각 독립기에 대장의 성명을 서명하고 있었다65)고 하는데서 이 시위의 조직적인 일면을 여실히 보여 주며, 이와같이 하여 삼가의 정금당 앞 광장에는 13,000 군중이 모여 일제에 대한 성토대회를 개최했다. 김전의(金典醫)·정방석(鄭邦
)·김달희(金達熙)·임종봉(林鍾鳳)이 차례로 등단하여 일제의 침략을 규탄했고, 한 연설이 끝날 때마다 농악대가 북과 징을 울렸으며 만세소리가 지축을 뒤흔들었다. 마지막 연사인 임종봉이 연설하는 중에 임종봉을 향하여 일 헌병이 발포했고, 군중은 이에 항의하여 포위해 있던 군경에 달려들자 이들은 주재소로 달아났다. 군중들은 곤봉·낫·호미 등을 들고 주재소 우편소로 쇄도했다. 여기에 일군경이 무차별 총을 난사하여 13명이 즉사하고 30여명이 부상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삼 가 읍 내 도66)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 앞에 시위 군중은 해산하지 않을 수 없었지만, 이 지역 시위는 그것으로 끝나지는 않았다. 이날 상백면으로 돌아온 백산·상백 시위대는 오영근(吳永根)·정희영(鄭喜永) 등이 중심이 되어 수십 명이 오후 7시경 상백면사무소로 가서 면사무소 집기와 문서들을 끄집어내어 불태우고 기둥을 절단했으며 유리창을 깨부수었다.67) 3월 24일에는 진주에서 일군응원병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일제의 보고를 보면 그후에도 이 지역의 항일의 기운은 좀체로 수그러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삼가부근(三嘉附近)이 불온(不穩)하여 응원대(應援隊)를 파견(派遣)하다."68) 3월 31일 밤에는 삼가면에 가설한 진주·합천간 3등 도로상의 다리에 석유를 부어 교통을 두절시킨 일이 일어났다.69) 삼가시위에서의 순국·부상·수형자는 다음과 같다.
① 순국자 : |
윤성(尹聖)(소군(少君))(16). 가회면(佳會面) 함방리(含芳里) 구평(龜坪), 결혼한지 수개월만에 순국함. 배숙원(裵淑元), 가회면(佳會面) 장대리(將臺里) 권영규(權永奎), 가회면(佳會面) 둔내리 두심(屯內里 杜尋) 김일학(金日學), 가회면(佳會面)외사리(外沙里) 내사(內沙) 이상현(李相賢), 삼가면(三嘉面) 두모리(斗毛里) 박선칠(朴仙七), 삼가면(三嘉面) 두모리(斗毛里) 공사겸(孔士謙)(재규(在奎)) (71), 상백면(上柏面) 외초리(外草里) 이낙현(李洛鉉), 산청군(山淸郡) 생비양면(生比良面) 법실리(法室里) 김기범(金箕範), 산청군(山淸郡) 생비양면(生比良面) 제보리(諸寶里) 우씨(禹氏)(명(名) 미상(未祥)), 삼가면(三嘉面) 하판리(下板里) 한우상(韓佑相), 합천군(陜川郡) 대양면(大陽面)70) |
② 부상자 : |
이원백(李元伯)(36) 김진권(金鎭權)(27) 김주익(金周益) 임종봉(林鍾鳳)외 다수 |
③ 수형자 : |
이계엽(李啓燁)(30) 3년 김태현(金台鉉) 3년 가회면(佳會面) 중촌리(中村里) 윤규현(尹圭鉉)(25) 8월 가회면(佳會面) 함방리(含芳里) 허정모(許正謨) 8월 허동규(許東奎)8월 권중태(權重台) 6월 허장(許
) 3월 최용락(崔龍洛) 8월 가회면(佳會面) 함방리(含芳里) 오영근(吳永根)(31)1년 6월 상백면(上柏面) 대현리(大峴里) 진택현(陳宅賢) 6월 정원규(鄭元圭) 6월 정치규(鄭致圭) 8월 | |
1) 지역적 특징
합천지역의 합천·대양, 대병, 초계, 삼가에서 격렬하게 일어난 3·1운동에 대해 우리가 갖는 일차적인 관심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요인 또는 배경에서 이러한 시위가 가능했던 것일까 라고 하는 것일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우선 이 지역이 갖는 지리적·역사적 요인에 의해 형성된 지역적 특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제 1장의 지역개관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합천지역은 경남 서부 산간지역에 있어 계곡을 따라 형성된 좁고 긴 경작지는 대규모 농장에는 적합치 않지만 관개에 유리하고 홍수나 한해를 덜 탈 수 있으며 피병(避兵)·피세(避世)에 유리한 곳이므로 재지 사족들의 안정된 근거지가 되기에 알맞은 중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조건 위에 역사적으로, 대체로 남인에 속했던 이 지역 유림들은 인조(仁祖) 반정(反正) 이후 중앙정계에서 소외당하였으며 특히 정희량(鄭希亮)의 난(亂) 이후 반역(叛逆)의 향(鄕)이 되어 중앙정계로부터 철저히 배척당하였다. 이러한 지리적·역사적 요인에 의해 이 지역 유림들은 토호로서 자기 세력을 향리속에 국한시키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조선 후기에 오면서, 동족의식의 발달과 당쟁의 격화로 배타적인 관념이 강한 유력한 동파(同派)·사족(同族)의 일치단결을 공고히 하기 위해 발달했다고 하는71)동족부락의 발달 현상이 이 지역에도 보이고 있다. 합천지역의 동족부락은 117곳으로서 이것은 경남지방에서는 진주의 216곳, 통영군의 122곳에 이어 세 번째이며, 전국 162개 군 가운에 17번째 드는 것으로 보아72) 동족부락이 상당히 발달된 지역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지방 토호로 전락한 유림이 성리학(性理學)의 심화와 예학의 발달, 주자가례의 보급확대에 따라 그러한 가치관을 생활화하는 방편으로서의 유교적 향촌질서·가족질서 운영이 가져온 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지역내 각 동리마다 선현(先賢)·조선(祖先)을 정사(亭祀)하고 유학(儒學)을 강(講)하는 원(院)·재(齋)·정(亭)·서당(書堂)을 짓고, 훌륭한 유학의 종장(宗匠)을 찾아 학문을 연마하며 도(道)로서 친교를 나누는 것이 향풍(鄕風)이 되었다. 그 결과 이 지역에서 한말 대학자의 문인(門人) 고족(高足)이 많이 배출되었다. 즉,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문인 : |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농산(農山) 정면규(鄭冕圭) 안계(安溪) 김종우(金鍾禹)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 |
간재(艮齋) 전(田) 우(禹) 문인 : |
창수(蒼樹) 정형규(鄭衡圭) |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인 : |
현재(弦齋) 윤병모(尹炳模) |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 문인 : |
희당(希堂) 김 수(金 銖) |
따라서 이 지역은 대성(大姓)이 중심이 되어 움직일 때 전 주민이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보여진다. 실제로 3·1운동에서 백산면의 인천(仁川) 이(李)씨, 상백면의 초계(草溪) 정(鄭)씨, 가회면의 파평(坡平) 윤(尹)씨, 대병면의 안동(安東) 권(權)·은율(恩律) 송(宋)씨, 대양면의 청송(靑松) 심(沈)씨 등이 큰 역할을 했던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들 이곳 유림들은 이 지역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끼친 실천적(實踐的) 학풍(學風)과 그들 조선(祖先)들의 임진왜란 의병 참여의 사실에서 일정 부분 구국을 위한 헌신의 정신적 맥을 이어받었으리라 생각되는 점도 있다. 한편 한말 의병운동에 있어서는 학파에 따라 그 대응 논리와 행동양식이 달랐다. 한주학파(寒洲學派)는 의병 참여를 거부하였으며, 중도에서 시도로 끝나고 말긴 했지만 거의(擧義)의 기치를 들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이 있던 정산(定山)으로 달려갔던 노사학파(蘆沙學派) 정재규(鄭載奎)와 그의 동문·문인, 그리고 나름의 의리론에 입각하여 "부해지의(浮海之意)"를 고수한 간재학파(艮齋學派). 그러나 이들 학파간에 학문적 입장에 따라 망국(亡國)의 사태에 대응하는 논리와 형식은 달랐지만 철저한 의리의 정신과 항일 의식은 공통된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실제로 한주학파(寒州學派)에서는 의병참여는 거부했지만 유림단의 파리장서 서명운동을 주도했고, 노사학파(蘆沙學派) 정재규(鄭載圭)의 거의(擧義) 시도는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을 뿐 아니라, "부해지의(浮海之意)"를 고수했던 간재학파(艮齋學派) 정형규(鄭衡圭)도 항일의식을 고취하기 위하여《을사순국제공전(乙巳殉國諸公傳)》,《경술순국제공전(庚戌殉國諸公傳)》,《한말순국열사제공전(韓末殉國烈士諸公傳)》을 비롯《정미삼밀사전(丁未三密使傳)》《유의사(柳義士)(유건영(柳健永))전(傳)》을 저술했으며, 야사(野史)《한사초집(韓史抄輯)》저술하였음 또한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간다. 이러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이 지역사회에서 1910년 국권상실과 1919년 고종황제의 붕거-독살설, 독립선언과 3·1운동의 발발은 이곳 사람들의 예민한 의리관념과 강렬한 항일의식에 비추어 남여노유를 막론하고 분기치 않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전주민은 상복에 백립을 쓰고 면민이 모여 북쪽을 향해 제상을 차려 놓고 망곡을 했으며,73) 만세시위가 추진되자 어느 지역보다 적극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하기에 이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2) 3·1운동 전개상의 특징
① 일시 : 지방의 3·1운동의 발발일은 대체로 장날이냐 아니냐로 구분될 수 있다. 도회지 같은 인구 밀집지역이 아닌 다음에야 향촌사회에서의 대중집회는 장날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장날 시위는 시위 군중이 장꾼으로 가장함으로써 시위 움직임을 은폐할 수 있고, 인근지역에서 모여든 장꾼들을 참여시킴으로써 쉽사리 큰 시위를 촉발시킬 수 있다는 점등으로 인하여 지방 3·1운동은 대부분 장날을 이용하여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장날을 이용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그러한 경우는 시위대의 동원에 있어서 조직성이 더 강하든지 (안성군 원곡면의 경우) 아니면 결사대와 같은 강한 결속력을 가진 조직을 통한 시위 (창녕군 영산면의 경우)일 경우가 그러했다. 합천군에 있어서는 3월 19일 합천읍내 시위는 장날을 이용한 시위였으나 주동인물 17명이 구금되자 다음날 다시 시위를 벌였고, 3월 22일에도 경찰서 앞 시위가 있었는데, 뒤의 두 번은 장날을 이용한 시위가 아니었다. 그 밖의 3월 18일의 삼가, 3월 20일의 대병, 3월 21일의 초계, 3월 23인의 삼가 시위는 모두 장날을 이용한 것이었다. ② 장소 : 지방의 3·1운동에 있어서 그 장소는 그 지역 시위의 성격·규모·시위과정의 적극성 및 조직성 여하에 따라 다를 수가 많고, 그럼으로써 그 지역시위의 특징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어떤 곳이 되었든 시위장소는 일차적으로 주민 집결의 편의성과 시위 의도 또는 목표라는 두 가지 점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항촌사회에서의 대중집회는 그것이 특수 계층의 의사표시가 아닌 한, 장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일 수 있었다. 장은 그것이 봉건지배체제든지 침략세력의 무단지배체제이든지 간에 수직적 질서의 경직성에 대한 민(民)의 수평성이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고 따라서 그곳을 민(民)의 광장이었다. 일제 무단통치 아래서 숨죽여 지내던 이 민족이 장터에서 저항의 깃발을 들었다는 것은 의미가 깊은 것이다. 동리 단위의 소규모 시위의 경우 마을 행길·뒷동산이 시위장소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항의 강도가 강한 경우 지역 내 일제 관공서인 면사무소·주재소·우편소 앞에서의 시위로 이어졌다. 또 그것이 그 지역내의 장소인 경우도 있고, 수 km 또는 20∼30km 이상 떨어진 인근지역으로 원정하여 벌이는 경우도 있다. 합천군의 합천·대양, 대병, 초계 및 삼가 시위는 모두 그들 생환권 내의 장터에 집결하여 시위를 전개하였는데, 삼가 시위의 경우, 가회면에서는 약 12km, 대병면에셔는 약 20km 이상의 거리에 있음에도 이런 곳에서도 삼가시위에 참여하였다. 이것은 이곳 시위가 갖고 있는 조직성·계획성이라는 특성을 보여 주는 것이다. ③ 전파경로 : 지방의 3·1운동은 지금까지 중앙의 3·1운동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는, 학생 및 종교단체를 통한 지방전파 외에도 여러 경로를 통해 전파된 것으로 보여지는데, 지금까지는 중앙의 3·1운동에만 주의를 집중해 온 나머지, 그리고 지방의 사례가 충분히 조사되지 못하여 이제는 많은 경우의 구체적인 모습을 밝히기가 아주 힘들어졌다. 중앙의 3·1운동 추진자와 직접 관련되지 않은 지방의 3·1운동 전파경로는 지역인사의 인산참여, 서울 거주 지방인의 귀향, 또는 인근지역 시위상황에 자극되어 일어나는 등의 경로가 대부분이며, 어느 한 지역이 한 가지 경로를 통한 것이 아니라 여러 경로가 중첩되어 전파되는 예도 보이며, 또 그러한 경우가 많았으리라고 추측된다. 합천지역의 경우, 시위 전파경로를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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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대양 : |
강홍열이 부친과 함께 인산에 참여 후 귀향함으로써 전파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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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병 : |
세 경로가 중첩됨. 즉 정태섭·임상종이 각각 상경, 인산에 참여함으로써와 이기복이 백산면의 이원영에게서 선언서 전달받음으로써 전파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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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계 : |
초계면의 전파경로는 분명하지 않다. 창원(昌原)의 변상태(卞相泰)의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 방문을 계기로 보는 것은 시위발발 일자가 1달이나 틀리기 때문에 납득하기 어렵다. 이 지역 주도인물 가운데 무릉리의 전하선(全夏善)(일명 영우(永愚))이 탑동공원(塔洞公園) 독립선언식(獨立宣言式)에 참가하였다는 것74)으로 보아 그를 통하여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크고, 합천지역 내에서 상호 전파되었을 가능성도 있다.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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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가 : |
백산-서울 거주 이원영에 의해 전파됨. 상백-서울 유학중의 정현상에 의해 전파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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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회 : |
이 지역 인사의 인산참여에 의해 전파되었음은 틀림없다. 그러나 기존의 서술에서는 윤병모(尹炳謨)의 아들 규현(圭鉉)이 상경했다고 하는 데 대해 증언자들은 이를 부정하고 윤재현(尹在鉉)과 한필동(韓弼東)의 상경과 그들의 시위주도설을 이야기하고 있다. | 이상에서 볼 때 합천군 3·1운동은 인산참여자에 의한 경우와 재경 인사의 귀향에 의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 전파경로와 관련하여 지방에의 3·1운동 전파에 있어 중앙과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즉 전혀 무관하게 진행된 것인가, 아니면 어떤 관련하에 진행되었는가 하는 부분이 3·1운동의 전국적 확산 문제와 관련하여 반드시 해명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인데 밝힐 수 없는 것이 아쉽다. 합천면에 있어서 최소한 백산면의 이원영(李愿永)의 경우는 중앙의 운동 추진자들과 어떤 관련을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되나, 다른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사실을 확인할 길이 없다.76) ④ 시위양상 : 지방의 3·1운동은 지역에 따라 여러가지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장터 만세시위, 뒷동산 만세시위, 횃불시위, 봉화시위, 망곡식·결사대 시위 또는 독립축하식, 그리고 개중에는 시위중 순국한 자의 시신을 운구하며 벌인 우중의 상여시위77)도 있었다 합천지역의 3·1운동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시위를 선도하게 했던 합천·대양시위가 좀 독특한 것이었고, 나머지는 장터에서 대중 만세시위로 이루어졌다. 시위군중의 성격에도, 장날의 자연군중을 이용하여 거의 시위 촉발만 시키는 형태의 것과 인근주민을 시장 또는 특정 시위 지점으로 집결시켜 인위적인 시위대를 형성시키는 형태, 그리고 이 양자를 결합시킨 형태가 있는데, 합천에 있어서는 장날의 자연군중과 조직적 동원군중의 양자가 결합된 형태의 것이었다. 시위성격에는 평화적 시위와 폭력적 시위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앞에서 본 합천군내 각 시위는 매우 격렬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대병면 창리 시위에서 시위대가 창리 주재소·면사무소를 습격·파괴·문서 소각을 했다든가, 초계에서 300여 명의 별동대가 주재소와 우편소를 습격, 파괴, 문서소각·전선 절단을 했다든가, 3월 23일의 시위를 시작하면서 백산 주민들이 백산면 사무소를 불태우고, 삼가로 오는 길가의 전선을 절단했으며, 시위 후 상백면사무소를 파괴했다든가 하는 것은, 주도자의 구금이나 공포 발사·총격으로 시위대를 자극하여 일어난 합천 경찰서·삼가 주재소 습격도 있기는 하지만, 합천군의 3·1운동이 계획성과 조직성을 갖고 처음부터 상당히 공세적인 시위로 추진되었다는 점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 지역 시위 전개상에서 보여 주는 주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수개 면이 연합하여 시위를 전개했다는 점이며, 이것은 3월 23일 삼가 시위에서 가장 극명하게 나타났다. 이렇게 이곳 시위가 연합시위의 양상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배경을 생각해 보면, 시위 장소인 초계나 삼가가 인근 수개 면의 유일한 장이었다는 점, 즉 초계는 합천 동부 5개 면의 유일한 상업의 중심이었고 삼가는 군내 남서부 가회·삼가·백산·상백 및 산청군 생비량면·의령군 대의면 등 인근 지역상권의 중심이었다는 것과 이곳 시위가 지역 내 이원영(李愿永)·윤재현(尹在鉉)·노호용(盧浩容) 등의 지주와 유지·자산가의 주도 또는 지원 하에 이루어졌으며, 유림 사이에 학문과 도(道)를 통한 교제와 교류가 이루어져 왔던 점, 그리고 이곳 시위 주도자들이 대규모 항일 시위를 촉발하려 의도했던 것 등이 함께 어울어져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곳 시위의 연합양상은 최초의 시위였던 3월 18일의 삼가시위에서부터 보인다. 3월 18일 시위 주도자로 구속되어 형을 받은 사람 가운데 쌍백의 정방직(鄭邦直)(연표(演彪))·정각규(鄭恪圭)·공민호(孔敏鎬)와 가회의 한필동(韓弼東)이 함께 나타나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상백·백산-대병-초계 사이의 연관이 여러 면에서 나타나고 있다. 즉, ㄱ. 이원영(백산) :부친 이진석(李眞錫)이 초계에서 서당 훈장을 챘고, 이원영 본인은 대병변 병목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이원영의 여형제 2명이 대병면의 송씨가(宋氏家)로 출가(出嫁)했다. 이원영은 대병면의 임상종(林尙鍾)·이기복(李起馥) 등과 절친한 사이였다. 이밖에 방백지역과 대병지역은 혼맥(婚脈) 등이 형성되어 가깝게 교류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ㄴ. 상백면 시위를 주도한 정연표는 대양면 강홍열·박운표, 초계지역 적중면의 노기용, 대병면 권중박 등과 계(契)를 만들어 3·1운동 4∼5년 전부터 비밀회합을 가져 왔다는 점. ㄷ. 강흥열(대양)은 대병에서 한문 사숙을 했다는 것. ㄹ. 대양면 강영선(姜永善)은 적중면(赤中面)의 연락책임자로 일경과 격투 중 그를 살해하고 만주로 피신했다 하고, 대양의 차홍렬(車洪烈)은 초계시위에서 크게 활약했으며, 같은 면의 한우상(韓佑相)이 주민을 동원, 삼가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일정의 총탄에 맞아 순절했다는 기록 등을 통하여 볼 때 이들 시위주도자간에 횡적 연결의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삼가·대병·대양·초계 등의 시위가 상호연계하에 추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겠다.
3) 추진주체
① 대양면 : 대양면의 시위는 배후조종자 : 강홍열, 행동대장 :심재현, 재정지원 :박운표 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과 그밖의 참여자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강홍렬(姜弘烈) : 진양인(晋陽人), 호(號) 관암(觀庵), 1985년생(당시 24세). 대양면(大陽面) 장자동(壯子洞) 출생. 대병면에서 한문 사숙을 했다 하며, 대병면 시위 주도자 권중박(權重璞)과 상백면 주도자 정연표(鄭演彪)·대양면 박운표(朴運杓)·초계(적중면) 노기용(盧企容) 등과 의기가 투합, 3·1운동 4-5년 전부터 비밀리에 계(契)를 조직, 회합을 가져 왔다 한다.78) 1919년, 한학자이던 부친과 인산에 참여하여 선언서를 갖고 돌아와서 대양면 시위를 배후조종했다. 그후 그는 의열단에 가입하여 구여순(具汝淳)·오세덕(吳世悳) 등과 더불어 국내 폭동계획에 참여하였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었다.79) 해방 후 반민특위(反民特委) 경남지부장이 되었다.80) 심재현(沈載現) : 당시 22세로 수암(修巖) 심능백(沈能百)의 4대손(代孫), 대양면 대목리 이계(伊溪)에는 수암(修巖)의 첩식지소(捷息之所)로서 수암정(修巖亭)이 있고, 인동(仁同) 장석영(張錫英)이 기문(起文)을 지었는데, 이곳 3·1운동의 계획을 위한 회합은 이 수암정(修巖亭)에서 이루어졌다 한다. 박운표(朴運杓) : 대양면의 재산가로 강홍열 등과 절친했고, 독립운동을 후원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밖의 참여자의 면모를 보면,81) 김영기(金永琪)(1883∼1919) :당시 36세, 광산인(光山人), 자(字) 주선(周善), 12인 결사대의 1인, 3월 20일 시위에서 연설로써 시위대를 고무시키고, 시위현장에서 순국함. 추용만(秋鏞滿)(1887∼1919) :당시 32세, 자(字) 경삼(景三), 호(號) 청암(淸庵), 12인 결사대의 1인, 3월 20일 시위에서 태극기를 매단 죽간(竹竿)으로 경찰서장의 머리를 후려갈기고 경찰서로 돌진하다 일경의 총에 맞아 순국함. 김호수(金浩洙)(1887-1919) : 당시 32세, 자(字) 맹선(孟善), 광산인(光山人). 김재중(金在重) : 1892년생, 당시 27세, 자(字) 도원(道源), 호(號) 설천(雪泉), 학림군(鶴林郡) 세군(世君)의 후(后), 어릴 때부터 정의를 숭상하여 3·1운동과 신간회 조직, 3·1의숙(義塾) 창설(
設)에 참여(參與)하고 박남권(朴湳權)·심재현(沈載現) 등과 같이 항일구국 운동에 앞장섰으며, 해방후에는 대한청년단(大韓靑年團) 고문(顧問), 국민회(國民會) 합천대표로 참석했다. 이태일(李泰一) : 1860년생, 당시 59세, 자(字) 상삼(象三), 호(號) 만포(晩圃), 3·1운동 참여. 차홍렬(車洪烈) : 1892년생, 당시 27세, 3·1운동때 초계시위에 참여하여 전영우(全永愚)·이만현(李晩鉉)과 같이 관사(官舍)파괴, 전선을 끊음. 한우상(韓佑相) : 1869년생, 당시 50세, 삼가 시위에 참여, 동민들을 삼가시장에 집합시키고 만세를 고창하다가 총탄에 순절. 박주홍(朴宙洪) : 1868년생, 당시 51세, 자(字) 내인(乃仁), 3·1운동 때 활약하다가 총상을 업어 그해 4월 8일에 순국. 남강 이승훈과 친교가 있었고, 어전(於田) 저수지를 완성했다. 대양면의 시위 주도자와 참여자를 볼 때 연령적으로 2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보이며 이는 중장년 층이 중심이 되어 참여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며, 차홍렬(車洪烈)은 초계시위에, 한우상(韓佑相)은 삼가시위에 참여하고 있어 지역적으로 상호 연계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② 대병면 : 대병면의 시위 주도자는 3월 18일 금곡리 곽씨산정(郭氏山亭)에 모였다는 20여 명이 그들로 보이는데, 이들에 대해 자세한 사항은 잘 알 수가 없으나 현재 알 수 있는 내용을 정리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그밖에 3월 18일에 회동했던 20여인의 추진자에 드는지는 불분명하나 3·1운동 참여자로 알려진 사람을 보면,82)
<표3> 대병면 시위 주도자
성명 |
연령 |
자·호 기타사항 |
활동내용 |
형량 |
비고 |
권영두(權寧斗) |
35 |
|
고현시장 중도 집결지에서 선언서 낭독 |
3년 |
《경남독립운동소사(慶南獨立運動小史)》상(上) |
권중박(權重璞) |
25 |
자(字)홍일(弘鎰), 호(號)뇌산(磊山) |
대평지역 집결책임 |
1년6월 |
〃 |
정시권(鄭時權) |
44 |
권(權)외재 문인(門人) |
고현지역 집결책임 |
피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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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양희(朴良熙) |
(4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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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수(柳仁秀) |
34 |
자(字)공무(公懋), 진주인(晋州人) 서강(西岡) 원중(遠重)의 자(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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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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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헌기(宋憲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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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병목) 집결책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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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진희(權晋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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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수(柳仁秀)에게 곽씨산정(郭氏山亭) 회동(會同)권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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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수(柳仁秀) 판결문> |
정태섭(鄭泰燮)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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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선언서 가지고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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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복(李起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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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면 이원영(李愿永)에게 선언서를 전달받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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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상중(林尙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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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선언서 전달, 권중박과 대평지역 집결책임 |
3년 |
정문선증언 |
권중진(權重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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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6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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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추(李秉樞) 1869년생, 당시 50세, 자(字) 윤서(允瑞), 송병순(宋秉珣) 문인, 대병 3·1운동에 시위대의 선두에 서서 주재소를 포위, 돌입하다가 총탄이 귓가를 관통했으나 선두에서 돌진하여 군중을 고무하였다. 윤중수(尹中洙) : 1891년생, 당시 28세, 자(字) 시백(時伯), 호(號) 만송(晩松), 참봉(參奉) 석우(錫佑)의 자(子), 보성전문(普成專門) 졸업, 3·1운동에 참여하고, 그후 파리장서 유림단 사건에 가담, 서명 모금운동을 하다가 투옥됨, 그후 만주로 망명하여 그곳에서도 6개월 옥고를 치룸. 정시권(鄭時權)은 동문 권양희(權良熙)와 더불어 3·1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피신하여 옥고를 면했는데, 그는 권(權)외재 (외재는 호(號))의 문인이었다 하고, 머슴 3∼4명, 꼴 머슴 2명을 둘 정도의 재산이 있었으나 3·1운동 후 피신생활을 하는 동안 재산을 다 소비하였다 한다.83) 이상에서 볼 때, 대병의 주도자도 연령적으로 20대 후반에서 50대까지 나타나고, 이병추(李秉樞)·윤중수(尹中洙)·정시권(鄭時權)·권양희(權良熙) 등의 면모를 볼 때 유림적 인사가 이곳 시위를 주도했던 것으로 보아 무리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③ 초계 : 초계 시위는 무릉리에서는 이원화(李原華)·전하선(全夏善)(영우(永愚))·성만영(成萬永)·김덕명(金德明)·구재범(具在範) 등이 주도하였다. 이원화(李原華)는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의 조카이며 무릉리의 유지라 한다. 전하선(全夏善) : 자(字) 회중(晦中), 호(號) 지암(止庵), 1886년생, 당시 33세, 일휘(一諱) 영우(永愚), 여력(
力)이 과인(過人)했다 함. 기미년(己未年)에 독립군자금(獨立軍資金)을 모금하고 서울 탑동공원(塔洞公園)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후 돌아와 지방(地方)운동에 종사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84) 초계면 대평리에서는 정점시(鄭點時)(점시(點是))·노호용(盧浩容)·이몽우(李夢雨) 3인이 주도했다 한다. 정점시(鄭點時)(1897∼1937) :당시 22세. 남의 논 7∼8마지기 소작하는 빈농으로 인근 적중면 옥두리(玉斗里)의 안씨(安氏)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3·1운동 때는 우인(友人)이자 초계부호 노호용(盧浩容)과 부락 학자이자 선비인 이몽우(李夢雨)와 더불어 거사를 논의하여 격문을 짓고, 노호용의 밀실에서 나무로 새긴 판에 태극기를 밤새 찍어 동부 5개면에 전달하였다. 시위 후 3인 중 혼자 체포되었으나 혹독한 고문에도 동지를 보호하여 나머지 2인은 옥고를 면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장애까지 가져와 고생하였다.85) 노호용(盧浩容) : 광주인(光州人), 송천(松川) 석당(碩堂)의 9세손, 자(字) 맹선(孟善), 호(號) 제천(濟川), 1898년생, 당시 21세로서 2000석 재산을 가진 초계 제일의 부호였다. 정점시·이몽우 등과 3·1운동을 함께 의논하고 자금과 준비장소를 제공하고 배후 지원·협조를 하였다.86) 3·1운동 후에는 이듬해 봄 초계면 초하리에 소유토지 200두락을 기부하여 정양의숙(正養義塾)을 열었다. 당시 기사를 보면,
합천군(陜川郡) 초계(草溪) 부호(富豪) 노호용씨(盧浩容氏)가 소유토지(所有土地) 이백두락(二百斗落)을 교육사업(敎育事業)에 기부(寄附)하얏슴으로 차(此)를 기인(基因)하야 당지(當地) 유지제씨(有志諸氏)의 열심활동(熱心活動)한 결과(結果) 금춘(今春)에 초계읍(草溪邑)에 위치(位置)를 정(定)하고 사립(私立) 정양의숙(正養義塾)을 설립개교(設立開校)된 바 인근(隣近) 각(各) 군(郡)에서 학생(學生)이 운집(雲集)하야 근이백명(近二百名)에 달(達)함으로 사용교실(使用敎室)이 협용(狹容)하야 임시(臨時)로 야소교회당(耶蘇敎會堂)을 공용(供用)하얏스나 또한 협애(狹隘)하야 부득이(不得已) 거절당(拒絶當)한 자(者)이 다수(多數)함으로 의숙당국자(義塾當局者)는 일층(一層) 분발(奮發) 활동중(活動中)이며 당지(當地) 부호(富豪) 이태호씨(李泰鎬氏)는 소유토지(所有土地) 백여두락(百餘斗落)을 기부(寄附)하야 노호용씨(盧浩容氏)와 동심협력(同心協力)하야 동의숙(同義塾)의 확장유지(擴張維持)를 계도(計圖)하며 차(且) 기(其) 외(外) 유력유지(有力有志)와 협의(協議)하야 이사회(理事會)를 조직(組織)하기로 하는 중(中)이오 김태도씨(金泰道氏)의 주선(周旋)으로 평양(平壤) 숭실대학생(崇實大學生) 이용준씨(李用俊氏)를 정빙(姃聘)한 바 학제(學制)로는 고등정도(高等程度)로 일학년(一學年) 예비정도(豫備程度)로 일학년(一學年)인데 교실협소(敎室狹少)로 각학년(各學年)을 일이부(一二部)로 분(分)하야 교사(敎師)는 이용준(李用俊)·오대현(吳大鉉)·변승규(卞承奎)·허범제씨(許範諸氏)이며 운동장(運動場)도 설계중(設計中)이오 또한 신교실(新敎室) 건축(建築)도 불원간(不遠間) 착수(着手)할 터이라 하더라.87)
그는 또한 전초계(全草溪) 면민(面民)의 호세(戶稅)를 단독으로 대납(代納)하기도 하고 진주 일신학교(日新學校) 건립에 거액을 기부하였으며, 기타 사선사업을 많이 하였다. 광복 후에는 여러번 향교(鄕校) 교임(校任)을 맡아 교궁(校宮)을 수리(修理)했다 한다.88) 이몽우(李夢雨) : 초계면 대평리 학자로서 정점시(鄭點時)·노호용(盧浩容)과 같이 3·1운동을 주도했다.89) 그외에, 상백의 정연표, 대양의 강홍열·박운표, 대병의 권중박 등과 계(契)를 만들어 비밀회합을 가져왔고, 3·1운동 때에도 강홍열·정연표 등과 마찬가지로 어떤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이는 인사로 노기용(盧企容)이 있다. 그는 광주인(光州人)으로 기묘(己卯) 명현(名賢) 왕필(王筆)의 14세손(世孫)이며 자(字) 수경(守卿), 호(號) 우전(雨田)이라 하는데 1897년(당시 22세) 적중면에서 출생했다. 3·1운동이 나자 경북 대구에서 항일운동을 목적으로 송두환(宋斗煥)·정두희(鄭斗禧)·김종철(金鍾喆) 등이 조직한 군사주비단(軍事籌備團)에 가담하여 상해(上海)의 임시정부(臨時政府)의 군자금조달에 활약하였다. 1921년 8월 18일 경주군 양북면 호암리 최세림(崔世林), 그해 9월 23일에는 합천군 덕곡면 조성걸(趙性傑), 1923년 7월에는 합천군 용주면 고품리 문재규(文載奎) 등에게 가 군자금을 조달하려 하였으나 성과는 얻지 못했다. 1923년 11월 3일 동지 이수영(李遂榮)·최윤동(崔允東) 등이 군자금 모집차 경북 군위군 악계면(岳溪面) 대율면(大栗面) 거주 부호 홍정수(洪禎修) 집에 가다 일경에게 체포됨으로써 그도 소위 제 2경북 사건에 연루되어 7년형을 받었다.90) 이상의 초계면 운동 주도자를 볼 때 20∼30대의 청장년층으로서 유지 자산가들과 유학적 소양을 닦은 인사들에 의해 시위가 주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④ 백산 : 백산면은 3월 23일의 삼가 대시위에 앞서 3,000여 면민이 백산면사무소를 불지르는 등 시위를 고조시킨 곳으로 이원영(李愿永)이 배후조종하고, 행동대장으로 이계엽(李啓燁), 부호로서 재정 및 기타 조력자로 이상동(李相東)을 꼽을 수 있다. 이원영(李愿永)(1887-1949) ; 자(字) 근부(謹夫), 호(號) 백하(白下)로서 인천인(仁川人). 부친 이진석(李眞錫)이 초계에서 서당을 하며 모은 색경과 근검으로 백산면 하신리에서 천석 가량의 재산을 이루었다. 3형제 중 막내인 이원영(李愿永)만 공부를 하여 대병면 병목에서 한학을 하고, 서울로 가서 오산학교를 나왔다 한다. 3·1운동 당시 고향에 아들 둘 딸 하나의 가족을 두고 서울에 와 있었으며, 이때 독립운동에 관여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백산·상백·대병지역에 전달하고 이계엽(李啓燁)을 내세워 삼가시위를 배후 지휘한 후, 의령군 봉수면 엄보섭의 집으로 피신하였고, 그후 만주·상해를 다니며 해방될 때까지 군자금 모집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활동으로 부친의 재산을 다 소모하였고 해방 후에는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였다가 낙선한 얼마 후 숨졌다.91) 이계엽(李啓燁) ; 1889년생, 당시 30세, 인천인(仁川人), 백산면 하신리 사람으로, 빈농이나 사람이 똑똑했다한다. 이원영의 지시하에 백산면 시위를 총 주도하여 "기미(己未) 삼일운동(三一運動) 백산면(栢山面) 대표자(代表者) 이계엽(李啓燁)"이라고 쓴 장폭기(長幅旗)를 들고 시위에 앞장섰다가 3년형을 살았고, 그후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다시 잡혀 1927년 하얼빈형무소에서 옥사했다.92) 이상동(李相東) ; 1882년생, 당시 37세, 인천인(仁川人), 자(字) 인칙(仁則), 호(號) 후암(厚庵), 추탄(秋灘) 이정현(李廷鉉) 문인. 300석 재산가로 백산면 시위준비에 필요한 자금을 내고 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주모자로 체포되어 1년 6월의 옥고를 치루었다.93) ⑤ 상백 :상백면의 시위는 배후조종자로 정현용(鄭鉉庸), 행동대장으로 정연표(鄭演彪), 그리고 정현하(鄭鉉夏) 등 자산가들이 음성적으로 지원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정현용(鄭鉉庸)(1893∼1946) ; 초계인(草溪人), 상백면 평구리에 세거해 온 500석 자산가로서 인품·식견으로보아 상백면 시위의 배후 조종자로 추측되고 있다.94) 3·1운동 후 대구에 있는 그의 처남으로 판사인 강인중의 집에 피신하여 3년간 은신했다. 그후 일제 전기간 동안 외지에서 기업활동을 했다. 유교적 보수성이 짙어 보통학교도 가장 늦게 들어온 상백에서 단발,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권장했다.95) 정연표(鄭演彪)(이명 방직(邦直) : 1891∼1961) ; 호(號) 선약(善若), 끼니를 잇기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도 동생에게 가사를 맡기고 강홍열·박운표·권중박·노기용 등과 계(契)를 만들어 밤마다 서당에 가는 것처럼 가장하고는 모여 독립 운동에 관한 의논을 나누었다 한다. 백산면 이원명의 처남으로서 그로부터 선언서를 전달받았고, 백산·상백의 이원적 시위준비를 일원화시켜 합천군 최초의 시위인 3월 18일 삼가 시위에 앞장서 1년 옥고를 치루었다. 그후 향리에서 한약방을 경영했다.96) 정현하(鄭鉉夏) :백산면 이원영씨의 처족이 되며, 가까이 지냈다. 동생 현상(鉉尙)에게서 선언서를 전달받았고, 3·1운동시 표면에 나서지 않았던 관계로 옥고를 치루지는 않았다.97) ⑥가회 : 배후조종자로서 윤재현(尹在鉉), 행동대장에 김태현(金台炫), 재정지원자로 김홍석(金洪錫)으로 알려져 있다. 윤재현(尹在鉉)(1887∼1934) ; 파평인(坡平人), 자(字) 사언(士彦), 호(號) 강려(康旅), 숭록대부(崇祿大夫) 행의정부우참찬(行議政府右參贊)이자 정인홍(鄭仁弘)의 문인(門人)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폐모정청(廢母庭請)에 참여하였다가 삭탈관직(削奪官職)되었던 윤선(尹銑)의 후손으로, 500석 재산을 가졌고, 학문과 재혜(才慧)로 이름이 높았다. 덕촌리 한필동(韓弼東)과 고종 인산에 참여한 후 돌아와 시위를 추진, 배후에서 지도했다 한다. 3·1운동 후 그해 4월, 독립을 위해서는 신문화를 배워야한다고 생각하여 윤씨 종중 서숙 10여 간을 수선하여 구음의숙(龜陰義塾)을 열었다.
합천군(陜川郡) 가회면(佳會面) 함방리(含芳里) 사립(私立) 구음의숙(龜陰義塾)은 동리(同里) 유지(有志) 윤재현(尹在鉉)·윤구현 외(尹求鉉 外) 수십인(數十人)의 발기(發起)로 객년(客年) 사월경(四月頃)에 설립(說立)한 바인대 교사(校舍)는 윤씨(尹氏) 종중(宗中) 서숙(書塾)이던 와즙(瓦葺) 십여간(十餘間)을 수선(修繕) 이용(利用)하고 숙황(塾況)은 축월점진(逐月漸進)하는 중(中) 금년(今年) 1월(月)부터 동면(同面) 덕촌리(德村里) 한규동(韓奎東)·한필동(韓弼東) 제씨(諸氏)가 동의숙(同義塾)에 대(對)한 제반사항(諸盤事項)을 호상(互相) 토의진행(討議進行)한 결과(結果) 현금(現今) 수합(收合)된 합액(合額)이 이천백여원(二千百餘圓)에 달(達)하얏으며 한규동씨(韓奎東氏)는 숙장(塾長)으로 윤구현씨(尹求鉉氏)는 총무(總務)로 윤병규씨(尹炳珪氏)는 재무(財務)로 각각(各各) 피선(被選)되야 숙무처리상(塾務處理上) 성력(誠力)을 진(盡)하며 강사(講師) 한중원(韓重源)·윤병건(尹炳健) 양씨(兩氏)는 육십여명(六十餘名)의 학생(學生)의 보통학과(普通學科)를 매일(每日) 열심교수(熱心敎授)하는 바 인근(隣近) 산청등지(山淸等地)에서도 부급래학(負
來學)하는 청년(靑年)이 초초증가중(稍稍增加中)이라더라.98)
이 의숙은 그후 학생이 150여 명으로 늘어나자 갑·을·병 3반으로 나누어 조선어·체조·영어·불어·수학·수신·창가를 가르쳤는데, 1925년 애국가를 봉창을 시켰다는 이유로 폐쇄 당했다. 이러한 교육활동과 더불어 그는 진주에 전당포를 설립하여 의열단에 자금을 지원하는 등 일생 동안 이면에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다.99) 김태현(金台炫)(1890∼1937) ; 김해인(金海人), 자(字) 자삼(字三), 호(號) 소서(笑西), 부친은 명의로서 이름이 높아 많은 재산을 모았으나 아들에게 전수하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스스로 익힌 의술로 명의 소리를 들었다. 언변이 뛰어나게 좋아 삼가 시위 때 크게 활약했고, 3년의 옥고를 치루었다.100) 김홍석(金洪錫)(1888∼1960) ; 덕촌리(德村里) 출생, 합천군 제일의 부자로 만석군으로 불렸고, 실제 재산은 6,000석 정도였다 한다.101) 가회면 윤재현·한필동 등 3·1운동 주도자에 게 자금을 지원하여 선언서 인쇄, 기타 경비에 조달하게 했다.102) 백산·상백 및 가회지역의 주도자 가운데 특히 백산의 이상동(李相東), 가회의 윤재현(尹在鉉) 등은 유림적 성격이 분명한 사람으로 보인다. 이상의 대양·대병·초계·삼가지역 3·1운동 주도자들을 살펴보았는데, 개인에 대한 자료가 불충분하여 그 성격을 가늠하기가 쉽지 않지만 이 지역 3·1운동을 유림이 주도한 것으로 보는 이유를 약술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지역이 영남 유림의 연수(淵藪)였으며, 둘째, 추진과정에서 색목(色目)은 극복하는 것이 보이지만 신분의식은 극복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 즉, 색목이 다른 가회-쌍백은 연합하나 삼가읍내의 경우 아전·상인들이 많으므로 "생명을 건 언약을 그들과 맺을 수 없다"며 추진과정에서 배제시키고 있다는 점103)으로 보아 추진 지도자들이 신분적 배경의 고려 하에서 연결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 세째, 시위주도층이 20대 초반 이하가 아니고 20∼40대대까지의 중장년층이며 시위 참여자로서 50∼70대까지 보이는 점으로 보아 지역내 중장년층이 주축이 된 시위였던 것으로 보이며, 네째, 유력한 동족부락 출신자들이 시위에 적극 참여 주도하였다는 점, 다섯째, 주도자·참여자 가운데 유림으로 파악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즉, 대양면의 주도자 심재현(沈載現), 대병면 정시권(鄭時權)·권양희(權良熙), 송병순(宋秉珣) 문인 이병추(李秉樞), 파리장서 서명운동에 참여했던 윤중수(尹中洙), 초계의 시암(是庵) 이직현(李直鉉)의 조카 이원화(李原華), 대평리 이몽우(李夢雨), 백산면 추탄(秋灘) 이정현(李廷鉉)의 문인 이상동(李相東), 가회면의 윤재현(尹在鉉) 등이 그들이며, 그밖에도 더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정규견(鄭奎見)은 3·1운동에 참여하고 3주간 구류를 살았는데, 자(字)는 성오(星伍), 호(號) 연사(淵舍)로 1869년생,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의 문인이었다.104) 따라서 이러한 여러가지를 볼 때 이곳의 시위는 유림이 주도했다고 하여도 잘못이 아니리라고 생각된다. 이 지역 지도층의 의식에 대해서는 그것을 살필 수 있는 자료에 접하지 못했으나, 그 일면을 볼 수 있는 사실로서 가회·초계·대병 3지역에서 3·1운동 이후 3·1운동의 추진자 또는 지역유지에 의해 신식교육기관을 설립하는 것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즉 가회의 윤재현(尹在鉉)에 의한 구음의숙(龜陰義塾), 초계의 노호용(盧浩容)에 의한 정양의숙(正養義塾), 그리고 대병의 송필영(宋弼永)·송조영(宋曹永)·송관식(宋寬植) 등이 1921년 4월경에 문을 언 삼일의숙(三一義塾)105)이 그것이다. 대병의 세 송씨(宋氏)의 경우 3·1운동 참여 여부를 확인할 수 없으나(의숙의 이름이 '3·1'인 것으로 보아 분명히 연관은 있으리라 생각된다) 가회·초계의 경우, 유림적 성격이 짙은 자산가들이, 3·1운동 후 신식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사재를 털고, 유지를 규합하여 교육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은 이들의 의식이 3·1운동을 계기로 크게 변했다가, 또는 이러한 변화된 의식을 가진 인물들이 3·1운동을 추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106) |
*주 석*
* 본연구소(本硏究所) 연구원(硏究員) 1) 허선도(許善道), <삼·일운동(三·一運動)과 유교계(儒敎界)>,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삼·일운동(三·一運動) 50주년(周年) 기념논집(紀念論集)》, 1969, 281면. 2) 김용기(金龍基), <3·1운동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에 대(對)하여>,《문리대학보(文理大學報)》2,부산대학교 1959. 허선도(許善道), 위의 논문. 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비건립위원회(巴里長書碑建立委員會),《한국유림독립운동 파리장서약사(巴里長書略史)》, 1973. 이원균(李原鈞), <삼·일운동(三·一運動) 당시(當時) 영남지방(嶺南地方) 유림(儒林)의 활동(活動)>,《부대사학(釜大史學)》4, 1980. 남부희(南富凞), <유교계의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과 삼·일운동(三·一運動)>, 경북대 석사학위논문, 1984. 남부희(南富凞), <3·1운동(運動)과 유교계(儒敎界)의 성격(性格)>, -서당참가(書堂參加)와 관련(關聯)하여-,《경대사학(慶大史學)》 4, 1980. 3)
지 역 |
관계인사 |
비고 |
대 양 |
이용선, 손득룡, 심맹권(재현) |
《독립운동사자료집》5 |
대 병 |
유인수 |
정부기록보존소 |
상백·가회 |
정방직(연표), 정각규, 공민호, 한필동 |
〃 |
〃 |
오영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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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증언을 해 주실 분은 다음과 같다. 강동영 : 합천군 대양면 덕정리. 심수석 : 합천군 합천읍 합천농협지소, 심재현(沈載現)의 자(子). 정문선(53) : 합천군 대병면 회양리 895-5. 정시권(鄭時權)의 자(子). 정호인(65) : 합천군 초계면 대평리 403, 정점시(鄭點時)의 자(子). 이상돈(李相敦)(63) : 서울 서대문구 신촌, 이원영(李愿永)의 자(子). 이화석(李華錫)(83) : 합천군 쌍백면 하신리. 정신규(鄭愼圭)(56) :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정연표(鄭演彪)의 자(子). 정락영(鄭洛永)(72) :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정만영(鄭萬永) :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정현효(鄭鉉孝)(60) : 합천군 쌍백면 평구리. 조문성(趙文聖) : 합천군 초계국민학교 교장. 윤한승(尹漢承)(57) : 합천군 가회면 함방리 구평부락. 허종희(許宗禧)(54) : 합천군 가회면장. 정홍두(鄭弘斗)(79) : 합천군 가회면 덕촌리 연동. 5) 이수건(李樹健),《영남사림파(嶺南士林派)의 형성(形成)》, 영남대출판부(嶺南大出版部), 1979, 152∼3면 참조. 6) 월지유칠편(越智唯七編),《신구대조(新舊對照)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 중앙시장(中央市場), 1917 7) <구합천군지(舊陜川郡誌)>,합함천군지편찬위원회(陝川郡誌編纂委員會),《합천군지(陜川郡誌)》, 1981, 8면. 8) <구초계군지(舊草溪郡誌)>. 1699,《합천군지(陜川郡誌)》, 168면. 9) <구삼가읍지(舊三嘉邑誌)>, 1908.《합천군지(陜川郡誌)》. 310면. 10) 서원섭(徐元燮)·이홍진(李鴻鎭),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생애(生涯)와 문학(文學)>,《한국(韓國)의 철학(哲學)》, 경북대 퇴계연구소. 1983, 109면. 11)《경상남도지(慶尙南道誌)》, 1959, 725면 및 이재철(李在喆), <18세기(世紀) 경상우도(慶尙右道) 사림(士林)과 정희양난(鄭希亮亂)>,《대구사학(大丘史學)》31, 1987. 12) 금장태(琴章泰)·고광직(高光稙),《유학근백년(儒學近百年)》, 1984, 468면. 13)《합천군지(陜川郡誌)》, 658∼691면 참조. 군지(郡誌)에 나와있는 이러한 건물을 보면 서원(書院) 5, 사(祠) 125, 정(亭) 248, 당(堂)(서당(書堂)) 22, 정사(精舍) 10 등 모두 420채이다. 1개 면에 평균 23채가 있는 꼴이다. 14) 허선도(許善道), 위의 논문 및 이원균(李源鈞), 위의 논문. 15), 16) 금장태(琴章泰)·고광직(高光稙), 앞의 책, 326-27면. 17) 국사편찬위원회,《한민족독립운동사》 1, 329∼332면 참조. 18) <폭도(暴徒)에 관(關)한 편책(偏冊)>, 국편,《한국독립운동사》, 자료 17, 의병편 X, 1988, 43, 44면. 19) 헌기(憲機) 제(第)535호(號)(1909.3·11), 한국주차헌병대본부(韓國駐箚憲兵隊本部), <폭도수령조서(暴徒首領調書)>, 국편, 위의 책, 자료 13, 의병편 Ⅵ, 1988, 228면. 및 국편. 위의 책. 833∼4면, 그리고 국편, 위의 책, 자료 17, 의병편 X, 48면. 20) 묘산면 3·1운동 관련자료로 윤병석(尹炳奭)의 재판기록이 있다(국립문서보존소 문서번호 77-1801) 21) 시위과정에 대한 서술은 기존의 관계기록 즉 변지섭(卞志燮),《경남독립운동소사(慶南獨立運動小史)》(상(上))과 《합천군지(陜川郡誌)》, 이용락,《3·1운동실록》,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제 3권, - 3·1운동사(하) -를 참조하여 서술했다. 기존의 서술과 다른 내용은 본문 중에서나 주로 표시했다. 22) 선생영조(善生永助),《조선(朝鮮)の취락(聚落)》, 1935, 531면. 23) 위와 같음. 24)《합천군지(陜川郡誌)》, 658∼691면. 25), 26) 강동영씨 증언. 27) 심수석씨 증언. 28) 김정명(金正明),《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Ⅰ, 1967, 445면. 29)《합천군지(陜川郡誌)》, 633면. 30) 선생영조(善生永助), 앞의 책, 531면 및 543-556면. 31) 주 24)참조. 32) 변지섭(卞志燮). 위의 책, 40면. 33) <유인수 판결문> 34) 주 4) 참조 35) 조선소요사건경과개람표(朝鮮騷擾事件經過槪覽表). 김정명(金正明), 앞의 책, 460면, <조선소요사건상황>,《독립운동사자료집》6, 554∼5면 및 경상남도경찰부(慶尙南道警察部),《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24∼26면. 36)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329면. 37) 정호인씨 증언. 38) 위와 같음. 39) 주 30) 참조. 40) 합천군 쌍백면사무소 현황 자료. 41) 정신규씨 증언. 42) 금장태(琴章泰)·고광직(高光稙), 앞의 책, 321면 43) 위의 책, 326면. 44) 위의 책, 245∼253면. 45) 주 30) 참조. 46) 정홍두옹 증언. 47) 이화석옹 증언. 48) 이상돈옹 증언. 49) 변지섭(卞志燮), 위의 책, 17∼18면. 50) 정홍두옹·윤한승씨 증언. 51) 위와 같음. 52)《합천군지(陜川郡誌)》646면, 동아일보 1925. 3. 1(3) 9, '윤재현씨(尹在鉉氏) 교육열(敎育熱)' 및 정홍두옹 증언 53). 54) 정홍두옹 증언 55) <정방직 등 재판기록> 56) 주 50) 참조. 57) 고경(高警) 제(第)7901호(號)(1919.3. 19), 국회도서관,《한국민족운동사료》 3. 1운동편(運動篇) 기(其) 3, 95면. 58) (고경(高警) 제(第)7957호(號)) 독립운동(獨立運動)에 관한 건(件)(제(第)21보(報)) (1919. 3. 20), 위의 책, 100면. 59)《고등경찰적록(高等警察摘錄)》, 24면 및 I《합천군지(陜川郡誌)》, 631∼640면. 60) 1910년대 미가(米價) 동향
1910년대 미가(米價) 동향
| 자료 :《조선총독부통계년보(朝鮮總督府統計年報)》(명치(明治) 43∼대정(大正) 8) 61) <오영근 판결문> 62), 63) 정홍두옹 증언. 64) 정만영·정현효·정홍두·정신규씨 증언. 65)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2, 1968, 299면. 66)《영남삼가읍지(嶺南三嘉邑誌)》 연도미상, (필사본), 서울대 도서관 소장. 67) <오영근 판결문> 68) 밀수제(密受第) 102 기(其) 119(1919. 3. 26). 제82호, 국회도서관, 위의 책, 69면. 69) 주 65)의 책 811, 812면. 70)《합천군지(陜川郡誌)》633면, 그는 대양면민을 삼가 시위에 참여시키고 시위에 앞장섰다가 일경의 총에 순국했다 한다. 71) 선생영조(善生永助), 위의 책, 454면. 72) 위의 책. 543∼556연. 73) 주 35)의 <조선소요사건상황> 493면에, 당시의 경남지방의 상황으로서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그러나 고 이 태왕전하 훙거(薨去)가 일반의 주지하는 바가 되자 각 계급을 통하여 충심으로 애도하는 지성이 농밀(濃密)함을 볼 수 있었다‥‥‥3월 3일 고 이 태왕 전하의 국장 집행의 전날 이래 본도로부터 양반·유생 기타 지방 유력자로서 상경하는 자가 뒤를 이었고, 그렇지 않은 자는 각지마다 유력자가 주최가 되어 요배식(遙拜式)을 거행했는데, 모두 참견자가 다수였으며, 정숙하고 성대히 거행되었다" 쌍백·가회지역에서도 망곡식에 대한 증언을 들을 수 있었다(이화석·정흥두옹 등). 74)《합천군지(陜川郡誌)》, 641면. 75) 대양면의 차홍렬(車洪烈)은 초계 시위에 참여했고, 같은 면의 강영선(姜永善)은 적중면(赤中面) 연락책임자였다(《합천군지(陜川郡誌)》, 632~3면)고 하는 것. 그리고 이원영(李愿永)이나 강홍렬(姜弘烈)·노기용(盧企容) 등을 통해서 이루어졌을 수도 있다. 76)《합천군지(陜川郡誌)》에는 이원영(李愿永)에 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 "조유경락(早遊京洛) 급당사옥(及當社屋) 여손병희(與孫秉熙) 최린(崔麟) 창동기미만세(創動己未萬歲) 왕만주연상해등지(往滿洲上海等地) 여임정제인(與臨政諸人) 동심공력(同心共力) 이도국권회복(以圖國權回復)"(638면). 77) 충남 청양군 정산면 시위.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 3, 139면. 78) 강동영·정신규씨 증언. 79) 박태원(朴泰遠),《약산(若山)과 의열단(義烈團)》, 백양당(白楊堂), 1947. 163∼4면. 80)《합천군지(陜川郡誌)》, 647면. 81) 이하 위의 책, 632∼3면에서 인용함. 82) 이하 위의 책, 635∼6면에서 인용함. 83) 정문선씨 증언. 84)《합천군지(陜川郡誌)》, 641면. 85) 정호인씨 증언. 86) 위와 같음. 87) 동아일보, 1921.9. 17.(4) 6. 88)《합천군지(陜川郡誌)》, 785면. 89) 정호인씨 증언. 90) 김후경(金厚卿),《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1983, 523면. 91) 이상돈(李相敦)·이화석옹 증언 및 주 76) 참조. 92)《합천군지(陜川郡誌)》, 636, 638면 및 이화석옹 증언. 93) 위의 책, 635면 및 이화석옹 증언. 94) 그의 인품·식견으로 보아 그러했으리라 추측되고 있다. 다른 부호들은(정현하(鄭鉉夏)·김홍석(金洪錫) 등) 이면에서 3·1운동을 지원했으나 그 지역에서 무사히 살았는데 3년간 피신을 했고, 그후에도 향리에 돌아오지 못하고 외지에서 살다 해방 후 돌아왔다는 것으로 보아 시위에 깊이 관련되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95) 쌍백지역은 특히 보수성이 강하여 이곳 출신 정낙영(鄭洛永)(72)씨의 경우 1928년 12세까지 머리를 땋고 서당에 다녔는데,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부(伯父) 정현용(鄭鉉庸)이 머리를 깎여 삼가보통학교에 편입시켰다 한다. 96) 정신규씨 증언. 97) 그는 후에 삼가노동우애회(三嘉勞
友愛會)에서 지세(地稅) 및 공과금(公課金) 불납동맹(不納同盟)과 소작권(小作權) 박탈방지대(剝奪防止隊)를 조직(組織)하여 활동할 때 그가 발기인의 1인이 되어 삼가·의령·진주·산청·합천 지주들을 규합하여 1925년 4월 16일 지주대회(地主大會)를 열었다(동아일보 1925.4. 15. (3). 5.) 98) 동아일보, 1921.6.23. (4) 4. 99)《합천군지(陜川郡誌)》, 646면: 정홍두옹 증언: 동아일보, 1921. 6. 23(4) 4; 8. 6(4) 2; 1922. 4. 17(4) 6; 1925, 3. 1(3) 9. 100) 정홍두옹 증언. 101) 그의 토지 중 가회면 덕촌리·함방리, 삼가면 일부리에 소재한 것만 보면 다음과 같다 : 전(田) 11,374평(坪), 답(畓) 69,620 평(坪), 대지(垈地) 813평(坪)(1932년도), (합천군(陜川郡) 소장(所藏),《토지대장(土地臺帳)》). 102) 정홍두옹 증언,《합천군지(陜川郡誌)》, 638면. 103) 정신규·정현효·정홍두옹 증언. 104)《합천군지(陜川郡誌)》, 504면 및 정홍두옹 증언. 105) 동아일보, 1921. 6. 1.(4) 3. 106) 합천지역에서 3·1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대병·초계·가회·쌍백 4지역 가운데 3·1운동 후 위 3지역에서는 시위 주도자에 의해 또는 '3·1'이라는 명칭으로 사립 신식교육기관이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과 4지역 가운데 쌍백지역에서는 이러한 움직임이 없었다는 사실도 비교 검토해 볼만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 |
첫댓글 몇가지 참고할만한 내용이 있어 올려 놓았습니다.
내용이 길긴 하지만 낮익은 이름들이 있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