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한 채의 살림을 처분해 달라는 전화가 왔다. 부동산에서 건네주는 열쇠를 받아들고 현관문을 여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주인을 애타게 기다리다 기진한 화초들이 목이 꺾인 채 나를 맞는다. 마치 어제도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양 살림은 다소곳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는데 살림의 주인인 할머니는 고운 한복을 입은 채 안방 벽에서만 웃고 계신다. 몸이 많이 아프셨는지 문갑 안에는 거의 모두가 약으로 채워져 있다. 몸살약이 박스 채 몇 개나 된다. 허리도 많이 아프셨던가보다. 허리복대가 두께별 기능별로 여러 개이다. 수지침 도구함에 지압봉의 양이 많은걸 보니 당신스스로 지압 봉을 붙이셨던 모양이다. 가족은 없는지 언제 어떻게 돌아가신 건지 궁금하지만, 열쇠를 건네 준 부동산도 위탁받기는 마찬가지여서 물을 곳이 없었다. 도시가스도 연결된 상태 그대로이고 냉장고의 전원도 켜진 채이다. 꽁꽁 언 고기며 생선들이 냉동실에 가득하다. 푸짐한 상차림을 하고도 남을 아까운 식재료들을 꺼내 버리며 죄스런 마음을 지울 길 없다.
안방으로 들어가 유품을 정리하는데 안타까움이 울컥거려 남편이 폐기물을 버리러 간 사이마다 할머니께 혼잣말을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오래된 경대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니 화장품 샘플들이 가지런하다. 한 때는 이 거울을 통해 당신을 치장하며 행복을 느끼기도 하셨을 테고, 또 어느 때는 당신의 슬픈 마음을 거울을 통해 위로받기도 하셨으리라 생각하니 더욱 숙연해진다. 두 번째 서랍엔 산호, 비취, 호박의 알이 크게 박힌 반지가 제 빛을 잃고 뒹굴고 있다. 한 때 유행하던 자석 팔찌가 있고 멈춘 지 오래 되어 보이는 손목시계도 있다. 아무리 모조품이라고는 하나 할머니께서 대단한 멋쟁이 이셨음은 장롱 속에서도 짐작할 수 있었다. 색색의 스카프와 모양별로 차곡차곡 쌓아놓은 모자, 반짝이가 많이 달린 옷가지하며 핑크빛을 좋아하셨는지 유독 그 색의 세련된 옷이 많았다. 박스를 뜯지 않은 내의며 수건, 양말들은 장롱 구석 한 쪽에서 주인의 손길을 못 받은 것이 아쉬웠는지 습기를 머금은 채 웅크리고 있다.
당신은 정작 화장품을 샘플로 쓰시고는 포장도 뜯지 않은 채 제조일자를 5년이나 넘긴 화장품세트는 누구에게 주고 싶으셨던 걸까, 그릇장 안에 있는 상표도 뜯지 않은 냄비세트는 또 왜 그리 아끼신 걸까, 빈 술병이 없는 걸로 봐서 술을 즐기시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담가놓은 술은 다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 살림들이 하나하나 버려지고 집의 공간이 넓어질수록 할머니에 대한 궁금증이 따라 커지는 것은 비록 알지 못하더라도 할머니 손 떼를 느끼며 조금씩 할머니가 알아져서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한다. 내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새것이면 무어든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다가 손녀에게 주시며 환하게 웃으시던 모습이 떠올라서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보물처럼 꽁꽁 싸 놓은 보따리 속에서 나온 새하얀 버선 두 켤레가 아주 오래 전 내 할머니 장롱에서도 똑 같이 나왔던 것이 기억났고, 그에 실망하여 내 할머니께 핀잔 섞어 말을 하던 철없음이 떠올라 죄스러워 그런 건 아닐까 생각한다.
경대의 마지막 서랍엔 할머니의 도장과 여권이 가지런히 놓여있다. 먼 곳으로의 여행을 위하여 여권을 만들며 할머니는 즐거우셨을 것이다. 여행하시면서는 또 얼마나 행복하셨을까,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라던 천상병시인의 시구처럼 할머니의 이 세상 소풍 길도 즐거우셨기를 바란다. 이 세상 소풍 길이 정녕아름다웠더라고 할머니께서도 말씀하셨기를 바란다. 여권이 필요치 않은 먼 길, 그 아름다운 소풍 마치시고 돌아가는 길에 비록 알지 못하는 이가 조금 늦게 배웅했더라도 할머니는 서운해 하지 않으셨으리라 믿는다. 이제 할머니의 집은 비어졌다. 시작할 때의 무거웠던 마음은 귀한 경험을 얻은 것으로 모두 거두어 진 듯하였다. 내가 가고 없는 자리도 이렇게 정갈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서는 채우는 것 보다 비우는 데 더 마음을 써야 할 일임을 다짐해 본다. 여권사진 속 할머니도 액자 속에서처럼 환하게 웃고 계신 것이 이 세상 여행길이 정말 즐거우셨노라고 말씀하시는 것만 같다.
(남상경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