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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둥글이세상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둥글이
내가 제정신이라니!!!
대학을 다닐 때 정신위생의 문제에 관심이 많았다.
시간나면 도서관에 가서 심리학 개론부터 시작해서 인지/의식 관련한 책을 많이 읽었고,
심리학 관련 수업을 즐겨들었으며, ‘인간’과 ‘정신’의 문제에 대한 고민도 끝없이 되풀이 했다.
그것은 ‘나’라는 존재와 삶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에 기인한 것이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왜?’라는 의문을 갖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내기 위한 시도는
내 청소년기부터 집요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대학이라는 공간에서는 그 ‘왜?’라는
질문을 좀 더 다각적으로 할 수 있는 기회와 공간이 마련되고 있었음으로
나는 내 자신을 발견하기위한 좀 더 치열한 사색을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치뤄냈다.
나는 까딱 잘못하면 ‘자기 자신의 견해에만 집착하게 된 후로 그 함정을 빠져나오지 못하게 되는’
인간 종족의 고질병인 ‘독단’의 특성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인간심리일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숙고, 내 자신을 들여다보기위한 노력 등에
심혈을 기울인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내 자신의 견해에 맹목 할 수 없음을 경계했고,
이 모든 것들을 내 자신의 사고의 확신 속에서만 추려나간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방법을 통해서도 검증 받고자 힘썼다.
그래서 학교생활 상담소에 가서 학기 바뀔 때마다 심리검사를 받고 상담도 받곤 했다.
2학년 1학기 때인가는 심리검사하고 난 후에 ‘결과분석’을 해주시는 상담교수님으로 부터
참으로 오랫동안 상담을 받은 적이 있었다.
심리검사를 한 후에 1주일이 지나 후 결과를 듣기위해서 간 나에게 검사지를 살핀 교수님이
대뜸 ‘정상이다’(제정신이다)고 말씀하신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나는 교수님의 말씀을 어처구니 없이 느꼈던 것이다.
이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20수년을 넘게 살아왔던 내가 도대체 정상일 수 있는 것인가?
인간에 대한 관심, 배려... 자연에 대한 진지한 이해와 그 속에서의 온전히 하나 되기 위한 노력,
조화, 통합, 우애, 사랑 등등의 가치 등이 송두리째 짖 밟히는 사회.
한정된 지구자원으로 인해서 내가 하나라도 더 가지면 다른 사람들이 덜 갖게 됨으로
내가 많이 쓰고 풍요해지는 만큼 상대적으로 헐벗고 굶주리며 죽어가는 사람이 만들어지는
‘현실’에 아랑곳 않고, 다른 사람들보다 하나라도 더 손에 쥐고, 자신의 지위를 높일 수 있는 능력만 가지면
영웅취급을 하는 ‘이따위’ 사회에 적응해 살아온 내가 도대체 제 정신일 수 있냔 말이다.
상식적?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서, 나는 상담교수님에게 내가 정상이지
않음의 사실을 말씀 드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정상이지 않은 사실 조차도 확인하지
못한 함정에 빠진 상태임을 말씀 드렸다.)
물론 이를 위해서 우선 사회가 정상이지 않은 현실을 구구 절절히 설명해 드려야 했다.
이것이 한 학기 내내 1주일에 두 번씩 이어졌다.
그 상담이라기보다는 토론의 공방전에서
나는 늘상 ‘사회적 책인감’의 문제를 들먹이면서 ‘무책임한 이들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혼란’을 화두로 삼았고,
상담교수님은 ‘왜 그런 생각을 하는가? 네 마음이나 편하게 가져라’는 말씀만 줄기차게 고수하셨다.
상담이 이어지면서 상담교수님과의 매꿀 수 없는 간격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 후 심리학/사회학 분야의 교과목을 섭렵하면서 ‘사회적 시야’와 ‘심리학’과의 분명한 괴리를
거듭 확인한 후에 내가 가진 ‘의문’이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더 이상 상담소를 찾지 않았다.
하여간 그 후로 사회학, 철학, 종교, 노장사상, 물리학, 생물학 분야의 잡다한 서적들을
떠둘러 보며 좀 더 치열하게 사색했다.
머리가 총명하지 못해서 역사상 굴찍한 사상가들은 한번 읽으면 낱말까지 일일이 기억한다는
그 지혜를 전하는 책들을, 줄치고 읽고 난 후에도 제목조차도 기억하지 못할 때가 번번하지만
하여간 책을 덮으면 그 내용을 잊을 망정 열심히 살피면서 뇌리에 자극을 주곤 했다.
물론 나는 단순히 ‘사색하는 것’으로 내 존재와 삶의 비밀/원리를 알아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거기에는 늘상 현실적인 ‘부데낌’ ‘행동과정’ ‘실천’을 통한 ‘사고의 숙성’이 따라야 했다.
그러한 ‘실천성’은 ‘내 자신의 삶이 사회에 보편타당하게 하라’는 어떤 선각자의 말과 같이
나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의 잘 못 짜맞춰진 사회현실을 내 일로 고민해야할 필요와 맞물려져서
‘사회적 실천’으로 현현되었다.
대학시절 ‘사색과 실천’이라는 이름으로 동아리를 만들어서 캠페인을 행했던 것은
그러한 ‘이론’과 ‘행동’을 합치시키기 위한 나름의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내가 ‘제 정신을 갖고 살기 위해서 노력’을 했다는 것을 말할 뿐
그러한 노력 자체가 내가 제정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의식은 그 내부에서 스스로의 자아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끝없이 스스로의 의식을 ‘재확신’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음으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이 엄청난 독단에 빠졌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인지할 길 조차가 없기 때문이다.
이에 더불은 갖가지 심리학적인 방어기제와 합리화기제는 우리가 순수의 시야로
스스로를 들여다 보기를 더욱 어렵게 만들어 내고 있다.
물론 고승들은 각고의 노력 끝에 자기 자신의 의식을 내려 놓고 그것을 바라볼 수 있는
역량을 갖는다고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이야기이고,
깨달음을 위해서 머리 깎고 절간에 들어갈 각오(그리해서 깨달아질 수 있을지의 문제는 차치하고)가
되어 있지는 않은 나 같은 평범한?사람들이 제정신을 갖고 살기는 참으로 요원하리라.
하여간 이렇게 인간으로 태어나서 제정신을 갖는 것이 어렵다 보니
희대의 살인마로 이름이 난 외국의 어떤 이도 교수형 당하는 마당에
‘이건 내 잘 못이 아냐?’라고 사회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다고 하지 않는가?
특별한 자각과 훈련을 통하지 않는다면 인간이 평생을 그 속에 빠져 살면서도
그 사실 조차도 알수 없는 의식의 함정.
우리는 어떻게 그 속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 것인가...
오늘도 나는 나를 찾아 나선 이 길바닥에서 내가 과연 제정신인지를 숙고해본다.
--- 내가 지금 한바탕의 꿈 속을 헤메이고 있다면 어서 빨리 깨어나기를 기원하며...
* 참고로 나는 나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상대방이 나에게 쏟아내는 ‘*새끼’ ‘*할놈’이라는
류의 욕설에는 즉각적인 호전적 반응으로 일관 한다. 왜냐하면 나는 ‘사람새끼’이고,
‘*’ 해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친놈’(정신 빠진 놈)이라는 류의 욕설에는 상당히 관대한 것은
앞서와 같은 사색의 결과 때문이다.
그들이 나에게 하는 ‘미친놈’이라는 류의 욕설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전반의
일반적인 의식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그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내가 그 존재 매김에
무턱대고 반발할 근거는 없는 듯 하다.
10월 1일 공주를 향하여...
공주에서 점심을 먹고 나서 오후 세시쯤에 부여로 향했다.
공주여고 앞쪽 길로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웅장한 품을 자랑하고 있었다.
[ 1000 1010 플라타너스 길 ]
[ 1020 부여로 향하는 이정표 ]
점심을 먹고 나서 좀 걷다가 우금티 터널 앞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전전날에 떨어진 비에 흠뻑 젖은 텐트를 말릴 겸으로 해서
한쪽으로 텐트와 깔게 등을 널어놓고 배낭을 눕혀 놓고 한숨 잤다.
[ 1025 우금티 터널 전경 ]
터널을 내려와 좀 걸으며 다체로운 풍경들을 대한다.
[ 1026 버스에서 내려서 힘겨운 걸이를 하는 할머니가 한분 눈에 띈다.
할머니는 간신히 횡단보도를 넘은 후에 한참을 숨을 고르신다. ]
[ 1027 스산한 바람에 거의 생기를 잃은 해바라기 ]
[ 1028 시멘트 바닥에 발을 잘 못 내디디고 쏟아지는 강렬한 햇빛에 우왕좌왕한 말미에
결국 최후를 맞이한 민달팽이 - 그 꿈틀거린 흔적을 통해서 최후를 맞는 한동안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가 느껴진다. ]
이상하게 한발 한발 걷는 발걸음이 가볍다.
낮잠 자고 일어난 후에 왠지 모르게 새롭게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오후에 해 넘어갈 때의 태양 빛 깔과 아침에 태양 떠오르는 빛깔의 차이가
실질적으로 잘 구분이 안되기 때문에, 종종 정신없이 낮잠 자고 일어난 후에 오전인지
오후인지 헤깔 릴 때가 있곤 하다.
그런 때는 새날을 맞아 아침이 새로 시작되는 뿌듯한 희망 같은 것이 들기도 한데,
이날이 딱 그런 날이었다.
늘상 보는 풍경들이었지만, 새롭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느껴졌다.
[ 1029 멀리 외양간의 송아지 한 마리 - 소들은 같은 포유류인 개나 고양이보다 훨씬 깊은 영혼을 가지고 있음을
거듭 느끼곤 한다. 이 녀석들은 멀리서 사람이 보이면 인기척을 느낄 때부터 사라질 때까지 예외 없이
관심 있게 살피곤 하는데, 그 눈빛에는 항시 따스함이 느껴지곤 한다. ]
[ 1030 - 1610 왠지 모르게 낯설고 신선하지만 정겹게 느껴지는 풍경들 ]
아저씨 꼬집기
오는 중에는 언덕배기에서 술취한 아저씨를 한분 만났다.
차를 길 한편으로 세워 음악을 틀어 놓고는 한쪽으로 나와서 휘청거리고 계셨는데,
술취한 정신으로 차를 몰고 나왔다가 스스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서
차를 멈춰 세우고 술이 좀 깨이기를 기다리시는 분이셨다.
아저씨는 나를 보시더니 휘청휘청하시면서 걸어오시면서 반갑다고 인사를 하고 나서는
자신이 지금이 현실인지 아닌지 분간하기 힘들다고 하시면서
‘칼 있으면 팔 좀 한번 째보게 좀 빌려주지요’하는 것이다.
‘아픔을 느끼시려면 꼬집어 보면 되지 왜 칼로 그러려고 하세요’ 하니까
아저씨는 내 팔을 꼬집으려 하는 것이다. ^^‘
장자가 어느 화창한 날 나비가 되어서 언덕을 펄펄거리던 꿈을 깨고 난 후에
자신이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현재 나비인 자신이 사람의 꿈을 꾼 것인지
헤깔려 했다는 대목이 있다.
장자는 주관적 인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현실성’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방법이 없음을
그리 ‘내가 나비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내가 사람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하고
혼돈스러워하는 대목으로 설명했었다.
그런데 이 아저씨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다른 사람의 팔을 꼬집어서 확인하려는
나와 너의 구분과 경계마저도 뛰어넘은 참으로 ‘심오한’? 철학적 성찰을 실현하려는 것 아닌가?
알콜 기운으로 인한 정신적 ‘검열’통로의 마비는 무의식의 해방을 불러왔고,
그에게 저리 천연덕스러운 자유를 부여하고 있었다.
그 자유는 워낙 방탕한지라, 나와 너가 구분되지 않고 기본적인 논리작용의 흔적도 살필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해방된? 정신에 의한 철학적 성과물을 내가 폄하할 수는 없는 것이었으나,
자신이 현재 놓여져 있는 현실이 꿈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한 신체적 자극을 받기 위해
내 팔을 꼬집으려고 엄지와 검지손가락을 달그락 거리며 다가오는 것을 마냥 두고 볼 수많은 없었다.
나는 다가오는 아저씨의 손을 제지하고 그의 팔을 꼬집어 드렸다.
세게.
‘아... 아프네요.’ 하며 아저씨는 자신이 인식하는 것이 현실임을 확신하셨다.
팔뚝의 통증과 함께 직전까지 그의 머릿속에 표류하던 혼미한 개념들의 허실도 대강 정리하였으리라.
몸의 통증을 느끼기 위해서는 꼭 칼이 아녀도 된 다는 것을...
자신의 몸의 통증을 느끼기 위해서는 자신의 팔을 꼬집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자신이 현재 놓여져 있는 ‘때와 장소’가 꿈이 아님을...
그러한 자극은 몽롱한 정신 때문에 잠시 뒤로 미뤄졌던
다양한 사실적인 고뇌와 현실 속에서의 자신이 해야 할 바에 대한 좀 더
명확한 지침 등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 것이다.
물론 뇌세포 뉴런 - 시넵스의 연결을 방해하여 사고를 단절시키고, 환영을 극대화하는
혈중 알콜 기운이 얼마만큼 빨리 그가 ‘현실’로 돌아오는 것을 가능케 할 것인가는 의문이었지만,
그렇게 만취한 상태로 차를 끌고 언덕배기까지 올랐다가 ‘꿈일까? 현실일까?’에 대한
의문을 품고, 현재 자신이 술에 취해있는 현실임을 깨달아
‘술 깬 후에 차를 몰고 가야겠다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음은
술이 깬 후에 스스로를 안도하게 하리라.
어쨋튼 그 자신이 놓여져 있는 현실이 ‘술 먹고 차를 몰고 온 상태’임을 확인하여,
큰 실수를하지 않을 수 있게 ‘자극’을 줬던 ‘분수령’이 바로 나의 ‘꼬지까’는 행위에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
내 천국의 창고에는 오늘의 선행이 하나 쌓이리라.
술 좀 깨었다가 오시라면서 인사드리고 가는데,
자동차도 함께 취했는지 초록색 마티즈 승용차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노래 소리가
끊겼다 이어졌다를 반복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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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시 반 쯤 넘자 사방이 어두워져서 인근마을 이인면으로 야영지를 찾아 들어갔다.
[ 2000 이인면으로 향하는 곳의 가로등 하나 ]
[ 2010 이인면의 한 버스 정류소와 가로등 ]
인적인 끊긴 이인초등학교 건물 뒤편 이름 모를 나무 아래쪽에 텐트를 쳤다.
사방이 정적이 휩 쌓인 채로 가끔 나뭇잎 하나씩 떨어져대는 소리가 운치가 있기도 했지만,
멀리서 다가오는 사람발자국 소리 같기도 해서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텐트에 누워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기분은 참으로 독특했다.
어렴풋히 노랗게 말라가는 낙엽 사이로 별빛이 초롱초롱한 것이 참으로 아름다웠고,
그 하늘을 배경으로 바스락거리면서 떨어져 내리는 낙엽은 정취를 더해줬다.
[ 2100 하늘이 보이는 풍경 ]
[ 2200 나무아래 텐트 - 밤의 양질감을 살리기 위해서 후뢰쉬를 터트리지 않고 찍다 보면
윤곽이 좀 흐리게 나옵니다.ㅠㅜ ]
10월 2일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부여가는 길에 오르려고 학교를 나서는데
학교 현관 입구가 참으로 멋스럽다.
[ 2300 이인초등학교 들어가는 현관입구 ]
산간지방의 오전이 흔히 그러하듯이 안개가 가득하다.
[ 2310 이인면 나가는 길목 ]
[ 2320 거미줄에 맺힌 이슬방울 ]
[ 2330 점차 걷혀지면서 하늘을 드리우는 안개 막 ]
[ 2340 부여까지 18km 5시간 쯤 걸으면 되겠군 ]
[ 2350 흉측하게 생긴 녀석이 하나 나타가 ‘멍멍’거리며 시비를 건다. ]
[ 2360 아스팔트위에서 말라 비틀어진 지렁이 한 마리 ]
몇 걸음 더 걸으니 비슷한 운명에 처해진 지렁이가 한 마리 눈에 띈다.
파고들 흙바닥을 찾아 아스팔트 바닥을 누비며 뒹구는 중에 온 몸이 모래가루 범벅이 된 녀석이었다.
[ 2370 모래가루 범벅이 된 지렁이 ]
녀석을 살려 보내기 위해서 손으로 잡자 격렬히 저항한다.
지렁이라는 녀석들은 원래 외부로부터 어떤 압력이 전해지면 무조건 반항하게끔 프로그램 되어 있는 듯 하다. 녀석들을 살려 보내기 위해서 잡을 때는 늘상 그렇게 몸을 비비꼬며서 저항한다.
그런데 이 녀석은 몸에서 누런 액체까지 쏟아 붓어대서 손이 끈적해 졌다.
풀숲에 던져 넣으니 그 사이를 파고 들어간다.
통념적으로 말해지는 윤회를 믿지는 않지만, 다음 세상에 만약 내가 지렁이로 태어나서
아스팔트 바닥에서 이리 버둥거리고 있는 나를 네가 발견하거들랑,
너는 지나치지 말고 가던 길을 멈추서서 나를 풀숲으로 돌려보내야 한다.
그러고 보니 이는 어쩌면 전생에 네가 나에게 그리해준 것에 대한 보은을 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렇다면 굳이 (내가해준)보은을 기억하거나 (내가 받을)보은을 기대하거나 할 필요는 없으리라.
전생과 내세 사이를 하나의 작용으로 연결하는 현세에서 지금 자연스럽게 그것을 주고 받고 있으니...
주는 것이 받는 것이고 받으면서 주고 있으니...
주는 것은 받은 것의 결과이자 원인이고, 받는 것 또한 그러하리니...
뭐 윤회가 있다면...
[ 2380 풀 숲으로 찾아 들어가는 지렁이 ]
국도 아래로 아기자기한 텃 밭이 눈에 띄는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온다.
[ 2390 눈에 띄는 텃 밭은 종종 내 저녁 찬꺼리를 제공해주곤 한다. ]
[ 2400 국도상으로 나서는 민달팽이 - 어디 급히 갈 곳이 있니? ]
[ 2410 멀리서 껌벅껌벅~ ‘안녕 소야~’ 하며 인사해도 껌벅껌벅~
‘아침은 잘 먹었지?’ 해도 껌벅껌벅~ ]
[ 2415 - 2416 거리의 양탄자 - 깔려죽은 동물의 털. ]
[ 2430 가지런히 죽은 벌 한 마리 - 천성적으로 집단생활을 하게끔 태어난 네가 왜? 이곳에서
홀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니? ]
[ 2435 ‘국도용 화분’ - 아무렇지 않게 죽음이 버려지는 이곳 아스팔트 바닥에 걸 맞는
‘말라비틀어진 잡풀이 심겨있는’ 화분 ]
[ 2437 그나마 이곳 국도상 가드레일에는 작은 야생동물 등이 들어와 죽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판으로 막아 세워 놓고 있었다. ]
[ 2440 폐쇄된 버스 정류장 앞 쪽에서 어르신 내외가 깨를 타작하는 모습 ]
[ 2450 오랜만의 가을 분위기. 언덕을 뒤덮는 코스모스 ]
[ 2460 부여로 향하는 수학여행 관광단. 길가는 내내 6, 7팀의 수학여행단 버스가 지나쳐갔다. ]
[ 2470 길 한편에 이상한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생전 처음 보는 열매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하나 따서 베어 물었다.
스폰지를 씹는 듯한 느낌이 났지만, 시큼하면서 달짝찌근한 맛이 났다.
언듯 사과 맛이 느껴졌다.
무슨 열매인지 궁금해서 몇 개 따서 가방에 챙겨넣었다. ]
반가운 분과의 만남
전화가 한통 온다. 공주에 사시는 분이라고 하신다.
공주에서 출발하기 전에 연락주고 만나려고 했는데, 늦었다고 하시며 시간되면 점심을 같이 하자고 하신다.
나야 뭐 사양할리 없지만, 국도상에서 이동하고 있는 신세인자라 만나 뵙기가 애매하다.
어찌어찌 해서 그분이 부여 도착하기 4km 지점으로 차를 몰고 오셔서,
부여 소재의 쌈밥집으로 이동했다.
이 분은 정신장애치료관련 시설에서 일하시는 분이셨는데 나이도 나보다 열 세 살이 많으셨다.
한국사회가 정신장애를 가진 이들을 포용력 있게 껴안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아쉬워하면서,
자신은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서 나름대로 고민을 하시고 계신단다.
장애 분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이야기가 통하는 바가 많았다.
차분하고 신중하게 생기신 모습이셨는데, 작은 눈 안쪽으로 진지하고 열정적인 그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둥글이 활동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서 우연히 알게 되셨단다.
좀 더 좋은 이야기를 나눴으면 좋으련만, 직장 때문에 다시 돌아가야 하신단다.
쌈밥 배 터지게 먹고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열매의정체
점심 먹고 난 후에는 인근의 골목 구석으로 들어갔다.
골목 여관 아래쪽에 빨래 걸이가 있길래,
전날 빨았다가 채 마르지 않은 속옷 좀 걸어 놓고 말리면서 누워서 한숨 잤다.
좁은 골목길이라 차들이 5,60cm 옆으로 지나쳐 갔다.
다방아가씨 하나가 누워있는 나를 보고 미소를 짖고 지나간다.
[ 2480 빨래말리기 ]
자고 일어나자, 문득 가방에 따 놓았던 정체불명의 열매의 이름이 더더욱 궁금해진다.
마침 여관 한편에서 주인 아저씨가 나오시길래 가서 여쭙는다.
‘아저씨 말씀 좀 여쭐께요. 이게 무슨 열매인지 아시나요?’
그런데 온화하던 아저씨 표정이 갑자기 바뀌면서
대뜸 나에게 따져 묻는 것이다.
‘이 열매 저기서 땃지?’
고개를 돌려 보니 여관 아래쪽 화단 앞 넓찍한 화분이 있는데,
그 위에서 작은 나무가 자라고 있었고, 바로 그 열매가 몇 개 달려 있는 것이다.
뜨끔~ 참외받에서는 운동화끈도 고쳐매지 말랬건만...
[ 2490 여관 아래쪽 화분에서 무르익는 열매 ]
오는 길에 땄다고 조근 조근 설명을 드리니 이해하신다.
본인도 화분 관리하면서 열매 숫자는 대충 세고 있었을 테니,
설명 드리면 오해 살 일은 아니었다.
이게 ‘꽃사과’란다.
이 밤톨보다 작게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먹고 있는 사과의 원조란다.
이것을 품종계량을 해서 만들어진 것이 우리가 현재 먹고 있는 다양한 종류의 사과란다.
어쩐지 그 맛이 시큼 달짝지근하다고 했지.
난생 처음 접한 이 나무열매.
앞으로 길가에서 내 보급을 채워질 열매의 목록이 하나 더 추가 되었다.
부여군
부여는 6세기 백제 26대 성왕이 사비(부여)로 도읍을 옮긴 후 6대 123년간의 중흥을 이룬 곳이다.
[ 5890 부여의 지리적 위치 ]
[ 5900부여군청사진 ]
이곳 부여의 인구는 8만 5천으로 남에서 북으로 가로 지르는 거리가 걸어서 20여분이
걸리지 않는 읍내의 공간에 각종의 역사문화제가 밀도 있게 자리하고 있는 문화의 창고이다.
백제의 도읍으로서의 위상은 1400년이 흐른 현재에는 ‘문화-역사-관광’의 중심지로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읍내의 중요 3 로타리에는 백제역사문화의 상징을 드러내는 동상이 각각 세워져 있었다.
[ 6000 성왕동상이 세워져 있는 로타리 / 성왕은 백제의 도읍을 부여로 옮겨 중흥을 왕이다. ]
[ 6100 계백장군동상이 세워져 있는 로타리 / 계백장군은 나당연합군에 맞서서 죽음으로써
무너져가는 백제와 국운을 함께한 백제의 장수이다. 앞서 계룡일지에서 잠시 거론했지만,
계백장군과 백제군은 황산벌에서 나당연합군과 ‘*할놈’ ‘*새끼’를 주고 받으며 결전을 치러냈었다. ]
[ 6200 백제금동대향로 / 국보 제287호 백제 나성과 능산리 무덤들 사이 절터에서 발견된 백제의 향로이다.
[ 6205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사진 / 글 - 펌 ]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는 당시 백제인들의 여러 가지 사상과 금동기술이 총체적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왕실의 의례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백제금동대향로는
한 다리를 생동감 있게 치켜든 용이 갓 피어나려는 연꽃봉오리를 입으로 받치고 있고
그 위에 박산이 위치하는 형상이다. 향로의 맨 꼭대기에는 봉황이 비상하려는 듯
날개를 활짝 펴고 서있다. 이 향로는 높이 61.8cm 지름 19cm 무게 11.85kg의 대작이다. ]
백마강을 반월로 두르고 백제의 최후의 격전지였던 부소산성이 그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부여읍 내에는 국보 9호인 정림사지 오층석탑이 세워져 있는 정림사지를 비롯해서,
궁남지, 서동공원, 선화공원, 국립부여박물관, 구드래공원, 백제역사재현단지 등의 각종의
역사 문화재와 관련 문화관광시설 등이 자리해 있고 읍내를 벗어나서는
충화면의 서동요 테마파크(촬영장세트), 능산리의 백제왕릉 고분 등이 분포해 있어서,
그 중요 역사-문화-관광 시설만도 일일이 헤아리기가 힘들 지경이다.
[ 6210 부여시내의 이정표 하나만 봐도 그 다양한 역사-문화의 창고로서의 위상을 살필 수 있다. ]
이렇다 보니 이곳 부여에 전국 각지의 여행객(특히 수학여행)들이 모일 수 밖에 없는 듯하다.
* 참고로 ‘백마강’은 백제의 큰강‘이란 뜻으로 규암리 천정대에서 세도면 반조리끼자의 16km의 ’금강‘ 말함.
[ 6215 부여의 상징 - 금동이 ]
나름대로 문화관광 여행 다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여에 머무르면서 틈틈의 시간을 내서
읍내의 북쪽에 위치한 부소산의 [부소산성]과 읍내의 남쪽에 위치한 [궁남지]를 돌아봤다.
[ 부소산성 ]
부소산은 백제시대의 궁궐의 후원이 있고, 전시에는 성곽으로 이용되었단다.
백제말기 나당연합군이 침입하였을 때 죽음으로 절개를 지켰다는 낙화암이 있는 곳이다.
[ 6300 6310 들어가는 입구에서부터 수학여행객들로 번잡 거린다. ]
[ 6320 사비문 매표소 ]
[ 6330 고풍스럽게 깔아 놓은 돌바닥을 지나... ]
[ 6340 고개 위로 보이는 ‘반월루’ ]
반월루는 최근 1972년에 지은 누각으로 부여를 반달모양으로 감싸며 흐르는 백마강을
살피며 부여가 ‘반월성’이라는 이유를 살필 수 있는 곳이라서 이름을 ‘반월루’라고 지었단다.
하지만 부소산의 높이가 너무 낮기 때문에 반달모양으로 부여읍을 감싸며 흐르는
백마강이 한눈에 들어오지는 않는다. ]
[ 6350 반월루에서 내려다보이는 시가지와 백마강 ]
부소산성 내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곳곳의 길을 따라 역사 공간으로 빨려가는 와중에
곳곳에 매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간의 매점까지 15 곳 정도)
그곳에는 아이들 장난감으로 모형 칼과 도끼 등이 판매되고 있었는데,
많은 아이들이 이를 구입해서 영화 속에서 대했을 과거 그들 선조들의 국가의 존립을 내건
대 결전을 흉내 내며 스릴감을 맛보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비명을 지르고 함성을 내뱉으며 해대는 칼질장난이
백제 최후의 보루였던 이곳 부소산성에서 울려퍼질지...
1600년전에 이곳에서 최후를 맞이했던 이들은 상상이나 했겠는가.
[ 6360 에구~~~ 나도 10년만 젊었으면... ]
아이들 장검 또닥이며 즐기는 광장에서 조금 더 걸으니 낙화암이 있는 ‘백화정’이 눈에 들어온다.
[ 6370 백화정 - 백화정은 낙화암에서 자결하며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1929년 부풍시사라는 시모임에서 건립을 했다고 한다. ]
[ 6380 멀리 보이는 백마강과 낙화암 한면 / 백제의 여인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성이 무너질 때 이 낙화암에서 뛰어내렸단다. ]
이곳에서 5분 정도를 더 걸으니, 고린사가 눈에 들어왔다.
고린사는 낙화암에서 떨어져 죽음으로 절개를 지킨
백제 여인들을 추모하기 위해서 고려시대 때 지어진 절이라 한다.
[ 6390 - 6410 고린사 전경 ]
아이들을 2, 30명씩 끌고 다니면서 라운딩을 시키는 그룹을 4,5개 지나쳤는데,
아마 시에서 훈련 된 역사해설가들인 듯했다.
[ 6420 팀별로 부소산성의 주요 시설들을 돌면서 역사-문화 해설을 기하는 모습
/ 이곳의 약수터 물이 무병장수하게 할 뿐만 아니라,
한 모금 마실 때 3년 씩 장수한다는 역사해설을 하고 있는 중.
‘그러나 여러분들은 어리기 때문에 마셔도 더 젊어지지는 않아요’ ]
그런데 고린사 앞쪽으로 개가 한 마리 묶여 있는 것이 보인다.
대충 개의 표정을 보면 이 개가 싹싹한지 싸나운지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이놈이 절 밥 먹으면서 매일 불경을 들어대서 그런지 표정도 온화하고 성격도 좋다.
많은 사람들을 대해서 그런지 사람이 옆에 다가와서 쓰다듬어 줘도 경계하는 모습이 없었고,
그렇다고 촐랑대지도 않고 여유롭게 대하는 것이다.
하도 이뻐서 평상에 앉아서 10여분을 쓰다듬어 줬는데, 간질이는 손에 왼쪽 목을 댔다가,
오른쪽 목을 댔다가 바꿔대더니 아예 벌러덩 누워서 등을 대고는 편히 뻗는 것이다.
[ 6430 예쁜 개 녀석 ]
고린사 아래쪽에는 유람선 선착장이 있었서 백마강을 유유히 떠서 부소산의 전경을 살필 수 있다고 하는데,
입장료도 2000원이나 했던 판이라, 유람선까지 즐길 처지는 아니었다.
[ 6440 유람선 선착장 ]
돌계단과 숲속 길을 다시 겔겔 거리며 되돌아와서 후문 주차장 쪽으로 나서니
유적 발굴지가 눈에 들어온다.
[ 6450 관북리유적지 ]
발견된 도자기/기와 파편이 하도 많아서 그런지 아무런 경계와 울타리와 접근금지 표지도 없이
하잘 것 없는 돌무더기 치럼 쌓여져 있었다.
[ 6460 하찮은 돌 무더기 처럼 쌓여진 과거 백제 문화의 흔적 ]
인근 발굴장도 개방되고 있었다.
[ 6470 -6510 개방된 발굴장 ]
* 단상 : 1400년 전에 외세(당나라)의 힘을 끌어 들어서 백제를 무너트리고 대권을 잡았던
신라의 ‘사대근성’은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날로 이어지면서 경상도정권의 미국사대의
특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경상도민을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역사적 개연성에 대한 추정이다.
[ 궁남지 ]
궁남지와 관련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이야기(궁남지 내 안내표지 옮김)
백제시대 이궁터로 알려진 궁남지 일대에는 ‘아명’을 ‘서동’이라고 했던 무왕의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비시대에 왕궁 남쪽 못 가에는 궁궐에서 나와 혼자 사는 여인이 궁남지의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백제 제 30대 왕인 무왕 장이다.’
그의 어머니가 용과 교통하여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으니 아마도 그의 아버지는 왕이거나 태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궁궐 밖의 생활의 궁핍하였으므로 생계유지를 위해 그는 마를 캐다 팔았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서동이 되었던 것이다.
서동의 어머니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그를 정성으로 키웠다. 그는 기골이 장대하고 효성이
지극한 장부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궁중에서 한 노신이 찾아와 왕의 밀명을 전하였는데
신라의 서라벌에 잠입하여 국정을 탐지하라는 것이었다.
서동은 그명을 받아들여 마를 파는 상인으로 위장하여 신라에 잠입. 탐지활동을 충실히 수행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신라 제 26대 진평왕의 셋째 딸인 선화공주와 마주치게 되었다.
이후 두 사람의 만남이 잦아지면서 사랑이 싹텄다.
그러나 서로는 국적과 신분이 달라 맺어질 수 없는 사이임을 알았다.
그러나 헤어질 수없었던 두 사람은 지혜를 짜내 서동요를 만들어 퍼트리기로 다짐했다.
서동은 서라벌의 아이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 가서 마를 나누어주며 노래를 부르게 하였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시집가서 서동 도련님을 밤이면 몰래 안고 간다’는 노래였다.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온 나라에 퍼져 나갔다.
결국 대궐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오해를 받게된 선화공주는 귀양을 가게 되었다.
그러나 이를 미리 알고 있던 서동이 선화공주를 백제로 데려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이야기이다.
[ 6600 - 6630 궁남지 입구 들어서서 보게되는 수련지 ]
[ 6640 아니? 왠 흑로(색깔이 희면 ‘백로’ 거무스름하면 ‘흑로’)님께서... 이런 곳에...
원래 이 흑로는 사람 타는 것을 싫어하는지라 높다란 나무 위에서 생활하면서
광활한 개활지 같은 곳을 거닐며 먹이를 찾다가도 100M 밖에서
사람이 다가오는 낌새만 채면 멀찌감치 도망가곤 하는데,
욘석은 흑로 서식지로서는 상당히 좁은 면적의 이곳 궁남지에 기웃거리면서
상대적으로 좁은 공간에서의 지나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적응이 되었는지
20여m 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날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폼을 잡고 서있는 것이다. 암튼 이렇게 크고 선명한 흑로 사진을 찍기는 처음~ ]
[ 6650 궁남지 한가운데의 ‘포용정’ 1 - 용을 껴안는다는 의미 (... 혼자 사는 여인이 용과 교통하여...) ]
[ 6670 궁남지 한가운데의 ‘포용정’ 2 - 주변에는 분수가 뿜어지고 있다. ]
[ 6680 궁남지 한가운데의 포용정 3 - 뿜어지는 분수를 배경으로 ]
[ 6685 포용정으로 향하는 물다리 ]
[ 6690 궁남지 한편의 거대한 그네에 올라서 좀 놀다가 ]
궁남지를 빙 돌아 구경하고 돌아가는 길에 수련 밭에서 오리 떼를 발견한다.
욘석들은 연못가에 부리를 쑤셔 넣고 입으로 오물오물 하면서 수중의 자잘한 생물들을
섭취하는 듯 하다.
[ 6700 오리떼 ]
바로 옆에까지 다가갔는데도 게의치 않고 지들 볼일 보다가 2m 쯤 앞에까지 다다르니 잠시
‘꽥꽥’ 거리면서 웅성거리다가 별일 없다는 듯이 코너를 돌아서 유유히 걷는다.
[ 별일 없다는 듯이 옆을 지나쳐 가는 녀석들 ]
하여간 부여라고 하는 작은 지역에 그리 많은 문화유산과 더불어 한가히 쉴 수 있는
이러한 자연과 역사가 어울린 공간이 또 한편으로 이리 펼쳐져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부여군농민회
부여에 도착해서 인터넷 지도를 뒤적이다 농민회 사무실이 눈에 띄어서
이야기 나눌 것을 핑계로 하루 묵어 가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호탕한 목소리의 여자분이 찾아오시라고 하신다.
10여분 걸어 도착한 농민회 사무실 건물이 나를 압도한다.
[ 7000 부여농민회 사무실 건물 ]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전화를 받으셨던 정책실장님이 잡무를 보고 계셨다.
통성명을 하고 어찌 이리 당당한 건물을 농민회에서 쓰고 있냐고 여쭸다.
원래 이곳 건물 부지에 농민회 컨테이너가 있었다는 것이다.
농업인회관을 시에서 세운다고 하길래 대신 건물 한 층을 달라고 합의를 해서 세웠는데,
그 후에 타 단체 등이 안 들어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독점하게 되었단다.
여타의 단체들이 민중단체를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관성도 작용했으리라.
그만큼 농민회 활동이 열심이기 때문인 이유일 것이다.
부여 농민회는 88년도에 만들어졌단다.
작년에는 전국농민회에서 모범지부로 선정되었을 만큼 활동성이 있는 조직이다.
현재도 FTA 반대 대책위 꾸려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부여군 내의 430여개의 마을을 농민회 회장님 등이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왜 FTA를 반대해야하는가?’에 대한 마을 설명회를 하고 계신단다.
작년에 200여개의 마을을 돌아다녔었고, 현재도 계속 추진 중에 있단다.
일반 시민단체는 물론이고 상당수의 농민단체들도 단기적 지역현안문제에만 집중하고,
장기적 공동투쟁 건에 대해서는 서로 책임을 미루는 경향이 있는데,
이들은 FTA 투쟁 건 자체를 ‘지금 당장 닥친 우리 자신의 일’로 매김하고 열정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젊은 피
부여농민운동이 이러한 적극성을 가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곳에는 ‘젊은 피’의
열정이 끓고 있기 때문인 듯 했다.
회장님 빼고 집행부가 모두 30대인데, 최근 5,6년 동안 집행부가 모두 2,30대였단다.
또한 최근에도 젊은 농민회 회원이 30명 정도 더 늘었단다.
다른 지역의 농민운동이 상당히 노쇄하고 아예 조직자체도 되지 않은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인 차이이다.
이는 아마 부여농민회의 특별한 인물들 덕분으로 생각된다.
누구 하나 특별하지 않겠냐만은 이야기를 나눴었던 황우정(여) 정책실장은 독특한
이력을 바탕으로 열성적이면서도 조직적인 운동역량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는 과거 단국대에서 학생운동 하다가 이곳 부여에 농활을 왔었단다.
이곳이 고향은 아니었지만, 농활 왔던 것이 인연이 되어서 졸업 후에 농민운동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정착했단다. 그녀의 남편 역시 단국대에서 학생운동을 함께했었던
사람이고 이곳 부여에 적을 둔 이는 아니었지만, 그녀와 함께 내려와서 부여에 터를 잡고
함께 농민운동을 하고 있단다.
물론 농민운동이 생계를 보장해주는 것은 아니고 그들 역시 농부로서 수박농사 지으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농민회 집행부를 꾸려나가기 위해서 자신들의 농사일에 제대로
신경도 쓰지 못하며 열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들의 나이는 30대 초반인데, 아직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는가 할 정도로 민중에 대한 애정과
순수한 헌신성이 돋보이는 이들이었다.
학생운동을 거쳐서 농민/민중을 위해서 운동한답시고 나서던 상당수의 사람들이 지쳐서 떨어져 나가거나,
차츰 초기의 순수성을 잃고 좀 더 편하고, 폼나는 단체와 조직으로 흘러들어가곤 하는데,
이들의 순수함과 헌신성은 빛 바랠 기미도 안보이는 듯 했다.
그들의 열정은 부여의 젊은 층을 포섭하기에 충분해서
일개 지역의 작은 군의 농민회 회원들이 버스를 대절해 국가보안법철폐 상경투쟁 등을 이루고
FTA 저지투쟁 등에서 격렬한 선발대 역할을 하는 동력을 뿜어내며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농민회 도착 첫 쨋 날은 상황실장님과 간단한 통성명 정도만 했고,
농민회 도착 세 쨋 날에는 농민-시민운동에 대한 좀 더 깊은 고민들을 주고 받았다.
세 쨋날 11시 경 부터는 집행위원장님, 농민회 회원분들, 명지대농활대표 등과 동석해서 소주를 주고 받으며
농민으로서 살아감의 아픔과 FTA 저지를 위한 투쟁 전략 등을 고민하는 것을 경청했다.
농민으로서 살며 빚더미에 오를 수 밖에 없는 현실과,
FTA를 저지해서 붕괴하는 농업을 막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업을 포기하고 운동에 뛰어들
수 밖에 없는 참담한 현실 토로가 이어졌다.
농민회에서 묵기
첫 쨋 날은 농민회 회장님이 마을 설명회 돌아다니시는 이유로 연락이 안 되어서
정책실장님의 임시 허락 하에 사무실에서 묵었다.
정책실장님은 잡무 끝내시고 저녁에 나가실 때 잘 쉬라며 열쇄를 건네주셨는데,
이런 때는 사람에 대한 신뢰감이 가득 차 오른다.
얼굴 대한지 몇 시간 밖에 안되는데, 단지 공동의 사안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 만으로
자신들의 ‘아지트’를 개방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인간적인가?
이는 결코 ‘자본’과 ‘권력’이 집중된 조직이나 단체(관변단체)에서는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움켜쥐고 더 갖기 위해서 혈안이 되어 있는 특징이 있는 지라,
아무것도 가진 것 없고 별 볼 일 없는 나그네를 자신들의 사무실에서 재워 줄 리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자기 자신의 이익과 편리를 접어두고 힘 있는 자들에 의해서 짖 밟히는 민중을 위해서
앞서는 단체들은 별 볼일 없는 나그네를 그리 품곤 한다.
그들이 가진 무기 자체가 ‘없는 이’ ‘약자’를 감싸 안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덕분에 저녁에 편히 쉴 수 있었다.
떨어지는 이슬 안 맞고 자는 것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좋은 사람들의 노고의 흔적을 살필 수 있는 단체 사무실에서 묵는 것은 그 자체로 기쁨이다.
10월 3일 개천절
아이들...
부여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다가 피곤해서 부여초등학교 한편의 나무의자에 누워서 한숨 자려고 누웠는데,
옆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말 투가 영 심상치 않다.
그 중에 특히 열 살도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마한 녀석의 말투가 깡깡하고 거칠다.
누워서 자려고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살며시 다가오더니 몇 발 짝 떨어지 곳에서
의도적으로 ‘꺅~’ 하면서 시끄럽게 해댔었지만 게의치 않았었다.
헌데 누워서 잠들랑말랑한 상황에서 언듯 보니 이 녀석이 함께 놀던
대여섯살은 더 많은 형뻘 되는 녀석(중학생)에게 대들다가 무릎치기로 두 대를 맞는 것이다.
형뻘 되는 녀석의 폭력에 대해서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다가
작은 녀석의 버릇없는 태도에 대한 ‘자업자득’인 듯 하기도 하고,
피곤하기도 해서, 시선을 거두고 눈을 감았다.
그 작은 녀석은 잠시 눈물을 짜고 있다가 자전거를 타고 나가면서
‘이 *새끼야. *발놈아’ 등등의 저주를 그 형뻘 되는 이에게 퍼붓는다.
그런데 20분 쯤 후에 녀석이 다시 나타난다.
그 형뻘 되는 이가 운동장에서 공을 차고 있는데,
이 꼬마 녀석이 손에 새총을 들고 나타나서는 ‘이 *발놈아’ 하면서 그에게 다가간다.
과히 ‘악동’이라 불릴만한 자태이다.
가만히 있으면 안 될 듯 해서 녀석을 다그친다.
왜 그렇게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함부로 욕을 하느냐는 것과 새총으로 형을 쏘려고 왔냐고 몇 마디 했다.
녀석은 새총으로 형을 쏘기 위해 온 것은 부인했지만, 집에 갔더니 엄마가 복수해주고 오랬단다. ^^‘
형뻘 되는 녀석을 불렀다.
녀석은 나이든 사람이 심각한 표정으로 부르자 약간 주눅이 들어서 다가왔다.
상황을 조정코자 각자 뭐가 불만인지 이야기 해 보라고 하니,
녀석들은 서로들 자신의 입장만을 토로했다.
작은 꼬마 녀석은 자신은 아무것도 안했는데, 형이 때렸다고 하고,
형 뻘 되는 녀석은 꼬마 녀석이 계속 욕을 해서 때렸다고 변명했다.
작은 꼬마 녀석이 유난히 입이 거친 문제를 들어 우선 말투를 조심해야한다고 얘기해줬고,
형 뻘 되는 녀석에게는 그렇다고 동생을 그리 때리면 되냐고 차분히 얘기했다.
꼬마 녀석은 뭐가 그리 서러운지 끊기는 호흡으로 훌쩍거리면서 계속 눈물을 짜댔다.
‘이젠 됐어’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면서 안아주고 난 후에 앉아있던 벤치로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형 뻘 되는 녀석이 생각이 있는 녀석이어서 우는 녀석을 달래서 함께 운동장으로 향한다.
녀석들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함께 공을 차기 시작했다.
[ 7010 다시 친하게 어울리는 아이들 ]
그런데 1시간 후에 또 하나의 사건이 벌어진다.
이 사건의 발단도 입이 거친 그 꼬마애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책을 읽고 있다가 언 듯 운동장 쪽을 보니,
등치가 꽤나 좋은 열 두 세살 먹어 보이는 녀석 하나가 심각한 표정으로
꼬마 녀석을 불러 세우는 것이다.
꼬마가 아마 심기를 불편하게 한 듯 하다.
그런데 그 꼬마 녀석은 상황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다가가려 하다가 조롱하듯이
웃으면서 뒤로 물러선다.
등치 좋은 녀석은 보다 더 심각한 표정으로 불러 세운 후에
‘내가 우습게 보이냐?’는 식으로 얘기하며 주먹으로 얼굴을 한대 친다.
꼬마는 또 울먹이기 시작한다.
두고 볼 상황이 아녀서 다가가서 물었더니,
역시나 꼬마가 약 올리 듯이 자신을 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대 때렸다는 것이다.
상대편이 자신의 말을 안들을 때 마다 때려서 문제가 해결될 것은 아니라고 설명해주면서
‘자신보다 약한 사람은 누구나 때릴 수 있음’이 잘 못되었음을 이야기 해줬지만 어느 정도
이해해 먹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주먹의 힘 있는 사람 뜻대로 문제를 해결해내는 세상이라면, 최홍만이 대통령이되면 좋겠다?’라고
얘기를 하자 그때는 좀 눈동자가 흔들리는 듯 했다.
입이 거친 꼬마 녀석에게는 스스로의 말투가 모든 문제의 발단임을 설명해줬지만,
이 녀석은 앞서와 같이 마냥 억울해 함의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그 작은 눈안에 꽉 들어찬 옹고집과 공격성은 한해 두해 동안 쌓인 것은 아닌 듯 했다.
더군다나 울면서 집으로 들어온 자신에게 그의 어미가 ‘가서 때려주고 와’라고 했음의 가정환경을 보면
이를 중화내지는 해소시킬 길 없이 그 타인에 대한 공격성과 반발성은 더욱 강화되어질 듯 하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
다만 그 부조화 갈등, 아픔을 마음에 담을 뿐이다.
솜씨 좋은 목수
길가는데 벽면 한편으로 목조로 만들어진 모형 집이 몇 개 붙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 7100 3110 목공소 벽면에 붙어있는 모형집 ]
걸음을 멈춰 서서 살폈더니 인기척을 느낀 사장님이 작업을 중단하고 반갑게 다가오셔서
이 모형집의 정체를 설명해 주신다. ‘우체통’이라는 것이다.
‘우체통이 이렇게 이쁘냐’고 물으니, 안 그래도 지나는 사람들이 많이 사갔었단다.
조그마한 모형에서부터 대형 물레방아와 정자에 철골구조물 끼지도 취급하는 인테리어 업체였다.
[7115 작업 중에 잠시 가게를 설명해 주시는 사장님 / 금성인테리어목공 ]
사장님은 자신의 생산물에 관심을 가진 나그네가 반가운지
사무실 안쪽에 자신이 만들고 있는 모형 들을 보여주신다.
나름대로 어렸을 때부터 뭔가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관심이 있었던 지라,
요목 조목 이야기를 청해 듣다가 사무실을 빠져 나왔다.
[7140 목공소 내부 전경 - 그의 머리에 떠 오르는 아이디어는 저 안 쪽 작업공간에서 실현되고 있었다. ]
* 참고로 뭔가 나무 재료 등으로 깎고 다듬고 만들기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자신의 지역에 소재한 목공소에 재료비만 내면 참여할 수 있는 소박한 교육과정이 있으니 참조하시길...
명지대 농활발대식
추수의 계절을 맞이하여 부여시외버스터미널 건너편 공터에서
[농활 발대식 겸 FTA 반대 촛불행사]가 치러졌다.
부여에서의 농활을 위해서 명지대에서 70여명의 학생들이 내려온 상황이었다.
행사 시작 30분 전부터 상가가 좌우로 즐비한 도로 한편에
농민회 집행위원장님과 정책실장님 등이 분주하게 오가면서 스피커, 앰프, 빔프로젝트 시설을 하셨다.
7시가 좀 넘은 후에 조촐한 농활발대식이 시작되었다.
[ 3160 발대식 준비를 위해서 대열을 갖춰 앉은 학생들 / ‘약’자 아래에는 부여농민회 집행위원장님 ]
[ 3170 행사 시작... ]
[ 농활대 사회자 ]
[ 3180 부여농민회 회장님 한 말씀 ]
[ 3190 부여민중연합체 대표님 ]
[ 3200 부여전교조지부장님 ]
명지대 농활팀을 반기면서 마이크를 잡으셨던 농민회회장님, 민중연합체 대표님,
부여전교조 지부장님 등은 지역 농님들의 아픔을 피부 깊숙이 느껴보는 시간이 되기를 당부했으며,
무엇보다도 농민-민중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FTA 저지를 위해서 학생들의 심도 깊은 관심을 촉구하셨다.
[ 3205 농활에 열심 하면서 FTA 저지를 위해 힘을 모으자는 결의를 다지는 학생회 대표 ]
[ 3210 집중하여 듣는 학생들 ]
[ 3220 FTA저지 투쟁 관련 영상을 보며 ]
[ 3225 명지대 농활팀 대오 전경 ]
[ 3230 명지대 대오 뒤쪽으로 명지대 팀을 반기는 지역민들 ]
[ 3245 촛불집회에 참석한 아이들 ]
별일 없이 조용하던 시가지에서 사람들이 모여서 촛불을 켜 들고 있자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 몇이 무리를 이루워서 학생들 대오 옆에 자리했다.
그 나이 또래 아이들이 늘상 그러하듯이 앞에서 재미없는 이야기를 하니 몸을 비비꼬면서
소란을 피워댔는데, ‘끝나고 폭죽행사 하니까 그때 폭죽 하나씩 받고 싶으면 조용히 해야한다’고 하니
그 기대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잠깐씩 정숙을 유지했다.
[ 3246 이장면만 본다면 아이들이 상당히 엄숙하게 행사에 참여했던 듯 ]
[ 3250 행사의 마무리 행사 - FTA 저지 결의를 폭죽에 담아... 꼬마들은 신나서 죽을 지경 ]
[ 3260-3280 FTA 저지 결의를 불태우자 ]
10월 4일
[ 부여초등학교캠페인 ]
모기에 뜯기지 않기 위해서 농민회 복도에 텐트를 치고 잤었다.
눈을 뜨고 일어나서 텐트 지퍼를 여니, 현관유리문 밖으로 길바닥에 비가 좀 뿌려져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비는 멈춰 있었다.
소파에서 잠을 자고 있는 농활대 두 학생들이 깨지 않게 전날 해놨던 콩밥을
챙겨 먹고 캠페인용 스티커를 가지고 부여초등학교로 나섰다.
초등학교 전경이 참으로 멋들어지다.
거대한 은행나무 두주가 마치 수문장처럼 학교 입구에 버티고 서 있다.
[ 7500 부여초등학교 전경 ]
캠페인 중에 교장선생님으로 뵈시는 나이 지긋한 분이 나오시길래
활동내용을 설명 드리면서 양해를 구했더니 문제없음을 말씀하셔서 마음 놓고 활동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지역에서 캠페인 하면서는 종종 선생님들로부터
핀잔을 듣고 쫓겨나고 했었는데, 충청남도 지역에서는 선생님들의 반응이 부드럽고
지나가는 말로도 문제를 삼는 분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충남의 온화한 선생님들 덕분에 학교 앞 캠페인 하면서 선생님들이 옆으로 지나칠 때 마다
(잔소리 들을 걱정으로)식은땀 나며 머리칼이 서던 노이로제 증세가 덕분에 완화되는 듯 하다.
아이들이 3분의 2쯤 등교할 즈음 되어서 스티커가 바닥이 나서 학교 주변 청소를 했다.
나눠주는 스티커를 안 받고 거부하거나 무시하면서 지나치는 아이들이 7,8명 정도로 상당히 되었다.
(건네는 스티커를 안 받는 아이들이 하나도 없는 학교에서부터 많게는 열 댓명 되는 학교가 있음)
아이들의 ‘쌀쌀맞음’과 ‘떨어진 휴지의 양’은 대체로 비례하는데,
보통수준보다 좀 더 많은 휴지가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 이 날 오후에는 앞서 정리했던 ‘부소산’(부소산성)을 들렀었다.
- 저녁에는 앞서 정리했듯이 집행위원장님, 정책실장님, 농민회 지부장님, 농민회 회원,
명지대농활대표 등과 함께 소주를 하면서 지역의 잡다한 현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10월 5일
부여백제초등학교
백제초등학교는 정림사지 외곽을 두루는 담벼락에 마주하고 있어서
캠페인 하는 기분이 독특했다.
[ 7600 국보 제 9호 정림사지 오층석탑을 보존하고 있는 정림사지 외곽 / 바로 길 반대편이 백제초등학교 ]
[ 7700 부여백제초등학교 정면 ]
[ 7800 부여백제초등학교 벽면 길 ]
학교 정문으로는 학생들이 많이 등교하지 않는 이유로 정림사지가 보이는 후문쪽에서 캠페인을 했다.
[ 7900 백제초등학교 후문 ]
캠페인 초반에 선생님 한분이 다가오신다. 언듯 보아 하니 교장선생님이시다.
스티커를 건네 드리면서 ‘이런 이런 환경 캠페인을 하는데, 바쁘게 움직이다 보니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서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니 스티커를 꼼꼼히 살피신 후에
‘이런 것을 왜 혼자 와서 하냐?’고 하시면서, 학교에 와서 이야기를 하면 선생님들이
수업시간에 나눠주면서 교육을 시키면 더욱 효율적이라고 건의하시는 것이다.
상당수의 교장선생님들이 ‘휴지 떨어질 것에 대한 부담’으로 이러한 활동 자체의 무용성을
적극 피력하시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스티커에 의미를 두셨다.
아니나 다를까 캠페인 끝나고 백제초등학교 홈페이지 들어가서 조창호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을 살펴보니,
학생들 지도사항의 첫째가 ‘남을 배려할 줄 아는 학생’이고 그 다음 대여섯 항목이 넘어갈 때 까지 ‘인성’과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교장선생님의 인사말씀에는 흔히 ‘학습’과 ‘효율’과 ‘기술’ ‘경쟁’이 강조되곤 하는데,
그러한 대목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교장선생님의 교육방침에서는 우선순위가 한참
밀려나 있었다.
이러한 교장선생님이시다 보니 다른 대부분의 교장선생님들과 달리 ‘인간사랑자연사랑 스티커’에
적극적인 관심과 지지를 보이신 것이다.
교장선생님의 교육방침의 영향 때문인지 다른 여느 초등학교 학생들과 달리
스티커 나눠주면서 싹싹하고 예의 바른 아이들을 많이 접하게 되었다.
또한 바닥에 버려진 휴지도 거의 보이지 않았음은 교장선생님의 교육철학이
아이들의 행동 속에 잘 스며든 결과인 듯 했다.
스티커를 나눠준다는 소식을 듣고, 약 40여명의 아이들이 교실로부터 달려 나와서
‘가져가도 되냐’고 물을 만큼 유난한 관심을 보인 것도 그러한 영향 때문이리라.
이곳 백제초등학교에서 즐거운 경험을 이렇게 또 한번 할 수 있었다.
상가캠페인 활동
점심 먹고 나서 두어 시간 정도를 시내 상가를 돌면서 캠페인을 했다.
상가캠페인 활동이 늘 그렇듯이 우선은 ‘설문조사’ 형식을 취해서
‘간단한 질문인데 답변이 가능하시겠느냐?’로부터 시작해서 차츰 호흥을 이끌어 내는 중에
후반부의 집중적인 설명(환경파괴의 원인과 후손들 존립 가능성의 희박함, 우리의 책임,
일상적 삶의 자세 등)을 이어갔다.
어느 지역에도 늘 그러한 분들이 있듯이,
설명 말씀을 드리려니 ‘나랑 아무관계 없다’고 하시는 분이 한분 계셨고,
설문조사 하기 싫다고 하시는 분들이 세 분 있었는데,
길가는 학생들 다섯명과 손님을 기다리는 10여명의 가게 사장님 등과 집중적인 이야기를 나눴다.
그 중에 세 분이 환경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
그들은 환경문제가 마땅히 ‘우리들이 관심을 가져야할 문제임’을 공감하면서
‘어찌될 것인지 참으로 걱정이다’고 아파하셨다.
환경과 후손들의 미래에 대해서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귀찮게 여기는 분들을 대할 때는
참으로 큰 답답함이 밀려온다.
이들은 하나라도 더 갖고 높이려는 욕망의 아우라에 포섭되어서 오직 발끝만 바라보면서
스스로의 잘 먹고 잘 살 걱정에만 ‘매진’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누군가 ‘잘 먹고 잘 사는 것’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정된 자원의 문제로 인하여
타인의 굶주림과 결핍을 가져오게 되고, 이에 대해 하나의 땅덩어리에 살고 있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잘 먹고 잘살려는 의지’ 자체에 대한 상대적인 책임감을 가지는 것이 마땅한데,
먹고 살기 위해서 자신의 품에만 고개를 박고 살다 보면 그러한 큰 그림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이야기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하의 표현일 수 있지만,
우리의 ‘일상’적 소유와 소비수준으로 인해서(과거 300년 전에 비해 2000배 많은 에너지 소비)
환경이 파괴되고 100년 후의 후손들의 존립자체가 불가능한 현실은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지 않는가?
어쨋튼 이에 대해 철저한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이들을 대할 때의 답답함은 주체할 도리가 없는데,
가끔 그렇게 이해가 통하고, 파괴되는 환경을 자신들의 살이 깍아지는 듯이 아파하면서,
후손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분들을 대하게 되면 그러한 답답한 마음이 풀어지곤 한다.
설명을 끝낼 즈음에는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하루에 한명씩만이라도 이러한 지구적
위기상황을 공유시키자는 강조를 드리곤 하는데,
열심히 들으시면서 적극적으로 호응하시던 그 세분들의 경우에는 진지한 표정으로
이에 호응하셨다.
[ 7950 상가캠페인용 전단지 ]
부여에서 몇 일간 탈 없이 머무르고 난 후 서천으로 향하면서
잠자리를 제공해주셨던 부여군 농민회에 감사드린다.
2007년 10월 6일 충청남도 부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