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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정맥 12구간(유둔재 ~ 어림고개)
1. 산행일자 : 2008년 12월 27(토)
2. 산 행 지 : 무등산(1,186m) - 전남 담양, 화순
3. 출발일시 : 12월 27일(토) 05시 (시간엄수)
4. 출발장소 : 수원 월드컵경기장 정문 옆 여권민원실 앞
5. 호남정맥 12, 13구간 개요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에 있는 무동마을에서 백남정재로 올라 북산~신선대를 거쳐 광활한 초원지대로 내려서면 정맥길 날등은 무등산 정상을 향하지만, 미사일부대를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어서 별 수 없이 꼬막재에서 장불재로 이어지는 우회로를 따라야 한다.
장불재에선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인왕봉 입구의 군부대 철책앞까지 올라가서 무등산의 웅자를 감상하고 내림길 입석대 석간수로 식수 보충을 한 다음 안양산을 향하는 게 여러모로 산행의 묘미를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이번 코스의 압권으론 단연 무등산을 꼽을 수 있는데 해발1,187m의 무등산 최고봉인 천왕봉 일대는 서석대·입석대·규봉 등 수직 절리상의 암석이 석책을 두른 듯 치솟아 장관을 이룬다.
광주 광역시에 있으면서도 1972년에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이 산의 이름을 있게 한 무등산 유래는 광주의 역사만큼이나 다난한데, 광주의 옛 이름은 무진주(武珍州) 라고 해서 처음엔 무등산도 무진악(武珍岳)으로 부른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서석산이라 하기도 했는데 정상을 중심으로 서쪽에 서석대가, 남쪽에는 입석대가 위치하고 있어 암석미를 뽐낸다. 특히 서석대는 마치 수정 병풍을 둘러친 것처럼 아름다워서 "서석의 수정병풍" 이라고도 한다.
무등산이란 명칭은 고려 때 "무돌산"이 바뀐 것으로 "무돌"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라는 뜻에서 연유했다는 설과, 불교용어인 "無有等等"에서 비롯됐다고 하는 설이 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과 같지 않아서 무등(無等)한 것이고, 가장 높은 자리여서 무등해서, 결국 무등산은 불교적 가치를 높이기 위한 작명으로 보이며 실제로 무등산 자락에는 수많은 사찰과 고승들의 전설이 서려 있다.
지명 또한 지왕봉. 천왕봉. 인왕봉. 중머리재. 장불재. 서석대. 입석대..등등, 불교와 연관된 것들이 많다.
후반부의 936m암봉에서 안양산까지의 능선이 백마능선으로 불리게 된데는 유선형의 완만한 능선자락에 흰색의 억새초원지대가 형성되서 흡사 백마가 말갈퀴 휘날리며 달리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번 코스 가는길의 날등 동쪽으로 흘러내리는 남천, 장복천, 안심천은 모두 화순군의 동복땜을 거쳐서 주암호~보성강~섬진강으로 돌고돌아 광양만으로 빠져든다. 하지만 서쪽의 광주땜으로 고여든 물들과 무등산 이후의 골짝물들은 영산강 물길따라 곧장 목포앞 바다로 흘러간다.
6. 산행계획
[1]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 약 16.3km, 10시간 30분(무등산 서석대 왕복시간 포함) 정도 소요
[2] 구간별 산행 거리 및 산 높이
○유둔재(887지방도,270m)--1.5km--447.7봉--1.7km--백남정재(390m)--2.1km--북산(780m)--2.4km--무등산(1,187m)--1.5km--장불재(910m)--1.3km--936암봉--1.5km--안양산(853m)--1.2km--둔병재(420m)--1.6km--622.8봉--1.5km--어림(350m, 897번도로)
[3] 산행일정
(1) 산행 출발지 가는 길
○ 수원(05:00) ∼ 천안논산간, 호남고속 ∼ 백양사IC ∼ 1,15번도로 ∼ 담양(07:40/아침/08:20) ∼ 29,887번도로 ∼ 유둔재(08:50)
(2) 구간별 산행 시간
○유둔재(09:00) → 444.7봉(09:55/09:05) → 안부/송전탑(10:20) → 백남정재(10:50/11:00) → 650봉(11:45/11:55) → 북산(12:25) → 신선대(12:30) → 꼬막재갈림길(13:00) → 규봉암(13:40) → 석불암(13:45/점심/14:30) → 장불재(15:10) → [입석대(15:25)--서석대(15:45)--장불재(16:10)] → 936암(16:40/16:50) → 안양산(17:30) → 둔병재(18:00/18:10) → 550봉(18:40) → 622.8봉(18:55) → 임도(19:10) → 어림고개(19:30)
(3) 산행 후
○ 어림고개(20:00) ∼ 화순, 식사 및 숙박(20:30 ∼ )
[4] 탈출로 및 편의사항
○ 옛날순대집(061-381-1622, 대통암뽕순대),
○ 화순성(061-374-4663, 흑염소)
○ 전원식당(061-372-6004, 다슬기탕),
○ 청수천(061-371-2777, 한정식)
8. 산행의 실제
[1] 참 가 자 : 노승애, 박봉하, 설경자, 윤희원, 이용준, 장현옥(6명)
[2] 날 씨 : 맑음
[3] 산행일정
9. 산 행 기
[1] 산 행 전
지난 산행 구간 때까지 2달여에 걸쳐 담양지역의 산맥과 산을 오르내리고 호남정맥 중간 지점까지 통과했는데 이번 구간부터 담양지역을 벗어나 화순지역의 산들을 오르내리게 된다. 특히 첫 날 오르게 될 『무등산』은 「高麗史樂誌」의 기록과 같이 ‘광주의 진산(鎭山)인데 광주는 전라도에 있는 큰 읍성이니, 백성들은 이 산을 의지하고 편안히 즐겁게 지내며 無等山歌를 불렀다는 곳(無等山 光州之鎭 州在 全羅爲巨邑城 此山 民賴以安 樂而歌之)이다.
호남정맥 전 구간에서 최고봉이자 가장 절경을 이룬 곳으로 인구(人口)에 회자(膾炙)하는 山이다. 더하여 2004년 2월 1일(일 요일) 한배 산꾼들이 산행을 했던 곳이라 또 한 번 산행의 기회를 갖는 감회가 새롭다.
평소보다 늦게 카페에 참여 의사를 밝히고 많은 대원들이 함께 同行 하자고 은근히 촉구를 했는데 참여 인원이 다른 때보다 오히려 저조하다. 연말이고 워낙 이름난 산이라 한 번쯤 다녀갔을 것이고 또 정맥산행이라 무리를 하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출발 전날 기상 예보를 들어보니 산행 양일간 눈 · 비도, 바람도 없는 날씨라고 한다. 쌀살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가는 겨울 산행의 최상의 날씨가 예상 된다. 그래도 한겨울 산행이라 스펫치, 아이젠, 방한복, 보온물병 등 겨울 산행 준비를 하다 보니 평소보다 배낭 부피고 크고 물품 가지 수도 많다. 집사람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배낭을 꾸려 놓고 밤 11시를 넘겨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04 : 40분, 윤사장님 전화. 급히 배낭을 챙겨 내려가 승차를 했다. 이번 산행은 윤사장님의 차가 운행을 한다고 한다.
05 : 00시,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 도착했다. 함께 산행을 하기로 한 설부장은 고향 집안 행사로 어제 담양에 내려갔는데 그곳에서 합류한다고 한다. 시끌벅적한 출발 정경이면 좋은데 자주 참여했던 대원들마저 빠지니 다소 허전하다.
05 : 10분, 동수원 TG를 빠져나가 천안논산과 호남고속도로를 거쳐 백양사IC로 나와 1,15번 도로를 따라 지난 산행 때 아침식사를 했던 담양 옛날순대집(061-381-1622)을 찾았다.
두 번째 찾은 때문인가. 주인아주머니의 반김이 여간 아니다. 진한 국물에 돼지 내장과 순대를 푸짐하게 넣은 국밥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점심도시락까지 마련하여 오늘 산행 들머리『유둔재』로 출발했다.
[2] 산행 들머리 『유둔재』, 『447.7봉』오르는 길
09 : 10분경, 유둔재 오르는 입구에서 동생과 함께 나온 설부장을 만나 산행 출발지『유둔재』로 이동했다. 차 두 대가 정차해 있다. 우리와 같이 정맥 산행을 하는 산꾼들의 차인 모양이다.
고개 마루라 바람도 제법 심하게 불고 쌀쌀 했지만 우려할 만한 날씨는 아니다. 그래도 보온을 위해 단단히 옷을 차려 입고 정맥 표시기가 여러 개 달려 있는 숲속 길로 들어섰다.
잠시 숲길을 따라 오르니 묘가 나오고 표시기가 달려 있는 우측으로 진행하니 무덤 3기가 나온다. 비교적 완만한 오름이 이곳부터 급하게 변하며 다리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다. 약 8분여를 힘들여 봉에 오르니 마루금은 좌측으로 방향이 틀어지며 내림 길로 이어진다.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기 마련, 6분여를 내려오니 안부 4거리(320m)가 나오고 다시 완만한 오름 길로 변한다. 20여분을 숨을 조절하며 봉에 올라보니「독산 445, 1985」라 표시된 삼각점이 있다. 『447.7봉』에 올랐다. 유둔재를 출발한지 50여 분, 이마에 땀이 맺히고 숨소리도 거치러 진다. 잠시 휴식.
[3] 『百男丁재』
휴식도 잠시, 물 한 모금 마시며 등산복 내피를 접어 넣는 사이 출발이다. 앙상한 잡목을 헤치며 15, 6분을 내려오니 넓은 임도가 있는 안부(약 360m)가 나오고 송전탑이 우뚝 솟아 있다. 다시 오름 길, 420봉에 올랐다 내려선 곳이 사거리 안부다. 『백남정재』라고 쓴 작은 표지판이 놓여 있다.
이 재는 담양군 남면 경상굴 남쪽에서 무동리의 무동촌으로 넘어가는 고개로『百男丁터』또는 『무동촌재』라고도 하는데 예전에는 숲이 컴컴하고 도둑이 들끓어 장정 백 명이 있어야 넘을 수 있었다는 고개인데 새롭게 난 길과 자동차에 옛 명성을 내 주고 폐 길이 되 잡목 속에 성황당 흔적인 돌무더기만 남아있다.
[4] 650봉 오름 길
쉼 없이 『백남정재』를 통과하여 420봉을 지나 잠시 안부에 내려섰다 싶은데 급 오름으로 길이 바뀐다. 앞이 꽉 막혀 오름 길이 만만치 않을 것 같다. 산행 계획과 高度表를 보니 방금 내려선 안부(약400m 지점)에서 250m 급경사를 45분간 올라야 650봉에 도착할 수 있고 100m를 더 올라야 오늘 산행의 첫 고비 『北山, 780m』에 오르게 된다.
유둔재를 출발하여 오르내리기를 반복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닌데 빡시게 한 시간을 올라야 북산에 도착한다고 생각하니 앞을 가로막고 있는 산을 밀어낼 수 없는 답답함이 밀려든다. 그래도 가야할 길이고 올라야 할 산이라 다리에 힘을 불끈 주고 숨을 고르며 급경사를 오른다. 선두는 앞서 멀리 갔는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저 나무가 있는 곳까지 오르면 쉬었다 가리라 생각하고 그 곳에 도착하면 쉼을 접고 욕심을 내 또 오르고, 가다 힘들어 쉬리라 마음먹고 멈추면 앞 사람과 거리가 벌어져 쉼을 포기하고 또 오른다. 올라도 올라가도 오름 길이 끝나지 않는다. 오르다 잠시 멈추기를 서너 차례 거듭한 연후에 겨우 능선에 올랐다. 650봉에 오른 모양이다.
[5] 『北山』과 무동리(茂洞里)
힘들게 오른 봉이라 잠시 휴식을 취하고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배낭을 지고 일어선다. 내림 길, 안부로 내려서니 넓은 억새밭이 펼쳐지고 앞쪽에는 무등산의 웅장한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모처럼 대하는 억새 평전이라 사진 한 장 남기고 숲속으로 들어서 목장용 철선을 따라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급경사 길을 따라 오른다.
약 20여 분 후 무등산 직전봉인 780m『北山』에 올랐다. 선두로 온 대원들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팽개치듯 배낭을 내리고 물병을 꺼냈다. 苦盡甘來란 이런 때를 두고 이르는 말인가?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아보는 맛이 그저 그만이다. 세상 편안함을 독차지한 것 같다.
물 한 모금 마시며 가쁜 숨을 진정시키니 그제야 주변 사물이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군부대 통신 시설이 설치되어 있는 무등산 정상이 선명히 보이고 유둔재에서 북산까지 힘들게 올랐던 산줄기도 가늠이 된다.『北山』 정상에는 작은 돌탑과 태양열 시설물이 설치되 있다.
『北山』은 담양군 남면 무동리((茂洞里, 무동촌, 무동) 북서쪽에 있는 산으로 북처럼 생겼다고 한다. 「무동리(茂洞里)」는 북산 밑으로 ‘아이가 춤을 추는 형국’이므로 「무동촌(舞童村) 또는 무동(舞童)」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하며 조선시대에는 창평군 외남면(外南面)의 지역이었으나 일제 때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수구촌(守口村)을 합하여 무동리(茂洞里)로 정하고, 담양군 남면에 넣었다고 한다.
[6] 신 선 대(神仙臺)
힘들게 『북산』에 올랐으면서도 걸음걸이가 늦어 쉬는 시간이 그만큼 짧다. 그래도 대원들과 함께 간식을 나눌 수 있는 시간만큼 휴식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다. 15여 분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이다. 무등산이 바짝 눈앞에 있고 멀리 우리가 가야할 백마능선과 안양산의 모습도 한 눈에 들어온다.
북산을 뒤로한지 7, 8분 내려오니 거대한 입석이 층을 달리하여 무리를 이루고 있다. 허허벌판에 10여 m 높이의 입석이 무리를 이룬 것도 신기하고 직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세워진 입석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세웠다기보다는 석공의 능란한 손놀림으로 다듬고 치밀한 계획을 세워 돌을 세우고 정교하게 층을 쌓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만 그런가했는데 대원들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지 감탄사가 절로 터진다. 이름하여 『神仙臺』란다.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이리 저리 자리를 이동하며 立石群을 배경삼아 사진 촬영을 하다 보니 병풍처럼 둘러 있는 입석 가운데 무덤 한 기가 있다. 어느 신선의 무덤인가? 신선을 時空을 超脫한 奇人이니 무덤이 있을 리 만무하고 ----- 아마도 風水地理를 믿고 富貴榮華를 貪해 이곳에 무덤을 쓴 모양이다.
[7] 『꼬막재』갈림길
신선대의 절묘함을 카메라에 담고 내려오니 갈대의 바다다. 키 높이로 자란 갈대를 비집고 지나갈 때 마다 갈대 잎 갈리는 소리가 마치 合奏를 하듯 경쾌하고 가볍다. 갈대 속에 몸을 숨기고 나무 계단을 오르니 이정표가 나온다. 「광일목장 후면부(현위치) : 공원관리사무소 4.4km, 장불재 3.9km」라 표시되 있다. 『꼬막재』에서 『장불재』로 이어지는 무등산 일반등산로에 도착을 했다. 2004년 무등산 등산 때 이 길을 따라 산행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8] 무등산(無等山)은 어떤 산?
「무등산(無等山)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 담양군(潭陽郡), 광주시(光州市) 사이의 경계를 이루는 산이다. 높이는 1,187m로 산중에는 장군봉(將軍峯), 금당산(金堂山) 등 기묘한 형태를 이루는 기암괴석이 많으며 증심사(證心寺), 원효사 (元曉寺), 약사암(藥師庵) 등의 고찰과 고승들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산기슭에는 700여종의 고산대식물이 분포하며 특히 수박과 작설차(雀舌茶) 는 예로부터 널리 알려져 있다. 1972년 5월 도립공원으로 지정이 되었다.
『무등산』은 「무돌뫼, 무진악,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서석산(瑞石山)」등의 별칭을 갖고 있다.「무진악」이란 ‘무돌’의 吏讀音으로 신라 때부터 쓰인 명칭이며 ‘무돌’의 뜻은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이다.
무등산이란 명칭은 서석산과 함께 고려 때부터 불려진 이름으로, 비할 데 없이 높은 산 또는 등급을 매길 수 없는 산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무등산에는 수많은 볼거리가 많이 있는데, 어떤 것은 멀리서도 바라볼 수 있도록 우뚝 솟아 있는 것도 있지만, 어떤 것은 가까이 가서야 볼 수 있는 것도 있다. 무등산은 오르기에 가파르지 않다. 그래서 휴일이면 무등산의 경승을 즐기려는 인파가 끊이지 않으며 남녀노소 누구나 간편한 옷차림으로 산을 찾는다.
볼만한 풍경이 있는 구경거리는 서석대, 입석대, 세인봉, 규봉, 원효계곡, 용추계곡, 지공너덜, 덕산너덜 등이 있으며 전망을 즐기려면 중머리재, 장불재, 동화사터, 장원봉 등이 좋다. 이 중 화순 쪽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입석대, 규봉, 지공너덜, 장불재, 백마능선, 규봉암에서의 동복호 조망이 뛰어나다.”라고 「화순군청 문화관광과(www.hwasun.jeonnam.kr)」에서 소개를 해 놓았다.
또 「배현규」님은 登瑞石山(瑞石山에 올라)라는 시에서 無等山 절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신선 사는 곳을 어찌 다른 데서 찾으랴하늘은 시인에게 즐거운 하루를 주었으니저 아래 넓은 세상 끝없이 펼쳐있고산이 높아 五十州(조선시대 호남의 五十三 고을)의 으뜸이로세구름이 스친 돌들은 층층이 서있고비 없는 우뢰려니 물 흐르는 소리더라못 다한 흥취야 바다 구경 기약하고짚신에 죽장 짚고 백구를 찾으리라.<출처> 화순군 향토사료 / 화순의 옛 시
[참고자료] 무등산의 명칭
무등산은 해발 1186m로 도내 중심부에서는 제일 높은 산이다. 옛날 백제(百濟) 때의 이름은 무진악(武珍岳) 이었고 서석산(瑞石山), 서악(瑞岳) 은 고려때 이름이다. 언제부터 무등산이라 하였는지는 정확하지 않으나 불가(佛家) 에서 나온 산명이 아닌가 한다. 왜냐하면 반야심경에 이 무등이란 귀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부처께서는 절대평등의 깨달음, 즉 무등등(無等等) 을 설파한 바가 있다. 불교가 성왕하여 주교로 삼았던 고려 때에 이 무등산에는 360여개의 암자가 있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무등산의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절터의 기왓장이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사람에 따라 무등산의 유래는 이렇게도 말해진다. 옛부터 무등산의 산신은 아주 덕이 높아 어떠한 어려운 일이라도 정성껏 기도를 드리면 소원 성취한다 하여 먼 곳에서까지 이 산을 찾는 발길이 끊임없었다. 옛부터 기도는 무당들이 주재했기 때문에 무당들은 불교에 기생하여 절에 주로 머물렀으므로 무당들이 사는 산이라 하여 무당산이 무등산이 되었다고 한다.
혹 어떤 사람은 무덤처럼 생겼다고 하여 무덤산이라 하였다고 하나 상상적인 비약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전설로서는 이태조께서 혁명을 일으켜 이조를 창업하시고 전국 명산을 찾아다니며 백세천년 왕업이 이어지기를 바라고 억울하게 죽은 고려명신들의 영혼을 달래고자 팔도명산을 모두 찾아가 정성껏 삼일씩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그러자 전국 명산의 산신령이 나타나 모두 환희의 얼굴로 맞아주었는데 그중 가장 따뜻하게 맞아 주신 산신령이 현재 경남의 남해 금산이었다는 것이다. 이태조께서 현몽을 받고 고마움을 못 잊어 그 산을 비단으로 싸주도록 명하여 그 뒤부터 남해 보리암이 있는 산을 금산(錦山) 이라 하였다 한다. 그러나 무등산에서 정성껏 삼일 기도를 드렸으나 산신이 나타나 거절하여 이태조께서 노하고 <이 산은 등급 이 없는 무등(無等) 산이다.> 하여 이조시대부터 무등산이라 하였다는 말도 전한다.
무등산에 있는 바위들은 모두 입석으로 되어 있는 총석(叢石)으로써 그야말로 전국 어느 산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절경이다. 그중 층석이 모여 절경에 절경을 이루고 있는 규봉암은 別有天地 仙境이 아닐 수 없다. 옛 선인들의 기록에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전라도를 찾아온 명인달사들의 자취가 여기 저기 돌에 새겨져 있다.
[9] 『無等山 圭峰庵』
(1) 圭峰庵 가는 길
갈대로 덮인 길을 빠져나와 무등산 주 등산로로 진입을 했다. 산책로나 다름없는 평지 길로 무등산을 찾은 등산객과도 자주 어깨를 비켜간다. 약 30여 분을 편한 길을 걷다 잠시 너덜 오름길을 올라가니(약 10여 분) 파란 바탕에 「장불재 1.3km(진행방향) ← 규봉암(현위치) → 꼬막재 3.6km → 공원사무소 3.4km / 원효사(무등산공원)」라 빨간 점으로 표시한 距離 標識板 里程標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서 우측으로 약 10여 m를 오르니 『無等山 圭峰庵』현판이 걸린 2층 종각이 나온다. 아래층 출입구 계단을 밟고 올라보니 무등산을 찾은 등산객들이 다 이곳으로 모인 듯 붐빈다.
(2) 圭峰庵과 주변 경관
규봉암 입구 계단을 밟고 오르면 정면으로 「觀音殿」이 있고 좌측에는 「三聖閣」, 우측에는 요사체가 배치되어 있고 암자의 左 · 右와 뒤쪽으로는 立石이 병풍 같이 둘러 있어 마치 거대한 石宮에라도 들어 온 듯 절경을 이룬 곳이다.
①『규봉암(圭峰庵)』은 신라말엽 옥룡자(玉龍子)라고 하는 도선국사(道詵國師)께서 창건하였다. 고려 때 보조국사(普照國師)가 규봉암에 머물러 수도하면서 지금 순천 송광사의 절터를 찾아 수선사(修禪社)라 하여 절을 짓고 세상에 도를 폈으므로 뒷날 많은 국사를 배출하였다. 지금도 규봉암 옆에 돌로 지어진 석실(石室) 이 있는데 이 석실을 보조석굴(普照石屈) 이라 한다.
② 규봉암(圭峯庵) 은 해발 950m로 신비한 규석으로 되었다고 하여 이곳을 규봉암이라 하였는데 이 규암(圭庵)은 규봉암 입구에 서있는 3개의 바위기둥을 말한다. 그 이름을 살펴보면 제일 큰 돌기둥이 여래석존(如來石尊) 다음이 관음석존(觀音石尊), 미륵석존(彌勒石尊) 이라 부른다.
③ 그리고 십대석(十臺石)이 또 있는데 송하대(松下臺), 광석대(廣石臺), 장추대(長楸臺), 풍혈대(風穴臺), 청학대(靑鶴臺), 송광대(松光臺), 법화대(法華臺), 설법대(設法臺), 은신대(隱身臺), 계성대(偈聖臺)를 말한다.
④ 이중「풍혈대(風穴臺)」는 바위를 올라 돌 틈으로 끼어 나갈 수 있도록 되어 이 바위를 끼어 나가면 총각은 장가를 빨리 가고 지옥 길을 면한다고 하며 세 번 끼어 나가면 삼재(三災)에 든 사람이 그 액을 면한다 하여 이 절을 찾아 온 사람은 실제로 돌 틈을 끼어 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처녀가 풍혈대(風穴臺)를 끼어 나가면 시집을 가서 순산을 한다고 하여 ‘순산대(順産臺)’ 라고까지 하며 노인들은 극락을 간다고 하여 ‘극락대(極樂臺)’ 라고도 한다.
⑤ 그리고 그 옆에 「금강굴(金剛屈)」이란 굴이 있는데 이 굴을 다녀 나오면 죽어서 지옥의 삼악도 (三惡途)를 면한다고 하여 노인들이 시새워 촛불을 켜 잡고 이 굴을 찾아들어 가곤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에도 자세히 기록된 바와 같이 바위틈에서 떨어지는 약수는 참으로 신기하여 절을 찾는 손님에 따라 나오는 물의 양이 변하는데 수십 명 혹은 수백 명이 오면 갑자가 물이 더 많이 쏟아져 나온다고 한다. 스님의 말에 의하면 기도하러 오는 손님이 계행(戒行)을 잘 지켜 정성이 지극하면 물이 나오나 정성이 지극치 못하여 기도가 성취되지 못하고 불길한 경우에는 샘물이 말라 버림으로써 불길할 징조가 쉽게 판단된다고 하며 지금도 이 샘물을 약수로 마셔 효험을 얻었다는 위장병과 신경통 환자들이 많다고 한다.
⑥ 그밖에 석불암(石佛庵), 또는 지장암(地藏庵) 이라 하는 암자가 있는데 보조석굴 위 바위에 마애불(磨涯佛)로 새겨 모시고 있는 이 암자는 산신기도의 도량(道場)으로 이름이 높아 수백 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불심이 두터운 이들이 찾아온다고 하며 「지장암(地藏庵)」은 옆구리에 바위굴을 끼고 있는데 이를 ‘지공(指空) 너덜’이라 이른다. 이 너덜은 인도(印道) 의 지공선사가 여기까지 찾아와 좌선 수도할 때 이곳에 앉아 설법하였는데 바위가 모두 흔들거려 도력으로써 흔들리지 않도록 하였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이 바위에는 나무 잎이나 뱀이 없어 항상 깨끗한데 이 또한 지공선사 도력 때문이라고 한다.
⑦「지장암(地藏庵)」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바위가 즐펀히 있는데 메밀꽃 필 무렵이면 바위 빛깔이 모두 하얗게 변하여 흡사 메밀꽃이 피어 있는 밭과 같아 설경(雪景)처럼 아름답다. 이곳의 「門바위」는 김덕령(金德齡) 장군께서 궁마(弓馬)로써 武道를 연마할 때 삼십 리 밖에서 이 바위를 과녁으로 사용하였다는 전설이 있다. 또 『규봉암』에는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이 쓴 규봉사라는 현판이 이조 중엽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분실되었다고 한다.[참고자료] 화순 무등산 규봉암
규봉암(圭峰庵)은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산 897번지 무등산(無等山) 동쪽에 자리하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 송광사의 말사이다. 절 주변은 여러 가지 모양의 바위들이 솟아 있어 명승지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은신대· 삼존석· 십이대· 광석대· 풍혈대· 설법대 등의 기암괴석은 신라와 고려의 고승들이 수도했던 자리하고 전해진다. 절의 창건연대는 문헌에 보이지 않으나 의상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온다. 절에 전하는 설화에는 전생에 이곳을 찾은 적 있는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금생에 이곳에 와 바위 틈에서 흐르는 물이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음을 기이하게 여겨 절을 지었다고 한다.
신라말의 도선(道詵, 827~898)국사는 이 절의 은신대에 앉아서 조계산의 산세를 살펴 송광사의 절터를 잡았다고 하며, 고려 후기의 보조 지눌(普照知訥, 1158~1210), 진각국사 혜심(慧諶, 1178~1234)은 절 주변의 삼존석과 십이대에서 수도하여 득도했다고 한다. 또한 고려말의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도 이곳에서 수도했던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이처럼 규봉암은 신라· 고려시대의 고승들과 관련된 유서 깊은 수행도량으로 알려진 사찰이다.
한편 조선시대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규봉암’이라고 하지 않고‘규봉사’라고 적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고려 후기에는 상당한 규모를 갖춘 사찰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조선 중기의 고경명이 지은 '유서석록(遊瑞石錄)'에 의하면 당시만 해도 신라의 명필 김생(金生, 711~791)이 쓴 현판이 전해왔다고 한다. 그 뒤 언제인가 폐허가 되어버린 절을 1729년(영조 15) 3월 20일 이 지방 내서면 경산마을 출신인 연경(演瓊) 스님이 3년 동안 불사를 하여 사찰을 중건했다. 그러나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시 10년 동안 황무지로 방치되어 폐사가 되었다가 1957년에 주지 이한규가 대웅전과 함께 3동을 새로 지었다. 최근에는 정인(正因) 스님이 주석하면서 1995년에 대웅전이 중건되었고, 1996년 8월 21일에는 관음전 낙성식 및 후불탱화 점안식이 송광사 법흥(法興) 큰스님을 증명사로 하여 이루어졌다. 규봉암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석불암이 있는데, 이곳에 마애불이 모셔져 있다.
<출처> http://blog.daum.net/ommaha/15709157
[참고자료] 규봉암(圭峯庵)과 지공 너덜에 대한 옛 詩
<옛 詩 1> 규봉암(圭峯庵) / 김 극 기저 기괴한 돌들 무어라 이름 하리 높이 올라 바라보니 만상이 평화롭다.바윗돌의 모습은 비단을 잘라 세운 듯봉우리는 쪼아 세운 옥돌일레라.명승을 밟는 순간 속진이 사라지고그윽한 이곳에 도의 참뜻 더하여라. 是非 많은 속세인연 모두 털어버리고가부좌*로 성불(成佛) 의 길 찾아보리라.■ 註① 규봉암(圭峯庵) : 화순군 이서면 영평리 무등산의 동쪽에 자리 잡고 있다. 이절의 주변에는 각양각색 의 바위들이 수없이 솟아 선경(仙景) 을 이룬 아름다운 곳이다. 은신대(隱身臺), 삼존석(三尊石), 십이대(十二臺) 광석대(廣石臺), 풍혈대(風穴臺), 설법대(說法臺) 등의 기암괴석은 신라 고려 때의 고승(高僧) 들이 수도한 곳이라 전해지고 있다.② 가부좌(伽趺坐) : 부처님의 坐法으로 승려나 수행인이 좌선할 때 앉는 방법의 하나. 전가부좌, 본가부좌, 즉결가부좌나 같은 말이다. 먼저 오른쪽 발을 왼쪽 허벅다리 위에 놓고 왼쪽발을 오른쪽 허벅다리 위에 놓는다.
<옛 詩 2> 규봉에 이르러(到圭峯) / 기 대 승티끌없이 청정한 도량이여맑고 높은 하늘보다 더하리깊숙히 핀 꽃은 돌틈으로 기울고고목은 바위를 의지하여 서 있네해가 오르니 남쪽 바다가 넘실대고구름이 비키니 북두칠성 완연하다선경에 빠져들어 거닐다보니홀연히 신선도 나와 함께 있더라<출처> 화순군 향토사료 / 화순의 옛 시
<옛 詩 3> 규봉암(圭峯庵)에서 / 노산 이은상
규봉(圭峯) 높은 절에 종소리 끊어지고밤 예불 마디마디 달은 점점 밝아오네
삼존석( 三尊石) 십대(十臺) 를 돌아밤새도록 헤멜거나<옛 詩 4> 지공(指空) 너덜 / 육당 최남선사람의 근심 걱정 그지없이 많다해도이 돌 한 개로써 한 가지를 산다하면「 너덜」은 귀 아니 나서 씨도 아니 없어라. <옛 詩 5> 지공(指空) 너덜 / 노산 이은상
너덜겅 고해(苦海) 길을 다 같이 가옵건만 저 임 곧 예신 길은 분명하고 편하던가?진실로 그럴양이면 나도 이 굴에 드오리라.
[10] 지공(指空)너덜
느긋한 마음으로 휴식을 취하며 『규봉암』선경에 빠져든 것도 잠시, 갈 길이 바빠 『장불재』로 걸음을 재촉했다.
『규봉암』을 뒤로한지 약 7분, 너덜 지대에 도착했다. 『지공 너덜』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너덜’,‘너덜겅’은 암석 무너진 것이 산비탈을 덮은 것으로 한마디로 ‘돌바다’라고 할 수 있다. 너덜은 지구의 화산 활동이 활발했을 무렵 땅 속의 바위들이 솟아오르면서 용암이 되어 흐르다가 식어버리자 산비탈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와 쌓여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장불재에서 규봉(圭峯)까지 사이에 무수히 깔려있는 너럭바위돌이 지공너덜이다. 무등산에는 산의 서사면에 덕산(德山)너덜과 동남사면에 지공너덜 두 개의 너덜이 있다.
지공너덜은 무등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3Km남짓이나 돌바다를 형성하고 있다. 이곳을 지공너덜이라 부르게 된 것은 인도(印度)의 승려 지공대사(指空大師)에게 설법을 듣던 라옹(懶翁)선사가이곳에 수도하면서 명명한 것으로 지공대사가 여기에 석실(石室)을 만들고 좌선 수도하면서 그 법력으로 억만 개의 돌을 깔았다고 전해온다.
지공너덜에는 크고 넓은 바위 사이로 보조(普照)석실이 있는데 이곳은 한국 불교에 큰 빛을 남긴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송광사를 창건하기 전에 좌선한 곳이라 하여 보조석굴(普照石窟)이라고 부른다.
일설에는 수억의 많은 돌은 본래 상봉근처에 있는 돌무더기였는데 김덕령장군이 하루아침에 깨뜨렸다가 내던져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전설도 있다.
<출처> 광주 북구 문화원(gjbukgu.kccf.or.kr)
「懶翁禪師」는 「無等山石室」이라는 시에서 「단단한 이 집을 모두 뉘가 만들었을고아마도 천지 이전의 조화였으리사방에 텅빈 벽은 천년을 말하고해묵은 서까래 만년을 이어왔네높고 높이 솟았으나 무너지지 아니하고떨어질 듯 걸렸으나 떨어지지 않더라베풀고 용서하는 법계 크고도 넓으니시공(時空) 의 진리는 현묘할 뿐이네」라고 『지공 너덜』을 표현했다.
[11] 서석대와 입석대
지공 너덜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을 찍고 앞서 간 대원들의 발걸음을 쫓았다. 『石佛庵(붉은색 양철지붕을 한 농가형태 암자)』을 통과여 약 30여 분간 너덜 지대를 진행했다.
능선에 거대한 통신시설이 설치된 마루 직전의 쉼터에 도착했다. 정상 아래『立石臺』도 한 눈에 들어온다. 『장불재』직전 쉼터에 도착 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을 한참 넘긴 15 : 10분이다. 바위를 바람막이 삼아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아침 『옛날 순대집』에서 마련해 준 도시락을 꺼냈다. 밥과 돼지 머리고기가 싸늘하게 식어 먹기가 거북스럽다. 오늘 산행 종착지 『어림고개』까지는 5시간이나 남아 입안에 뱅글뱅글 도는 밥알을 억지로라도 삼키는 수밖에 없다. 보온병 물을 부어 물맛으로 점심을 먹고 나니 안에서부터 寒氣가 배어나온다.
느긋하게 휴식을 취할 念도 갖지 못하고 『서석대』와 『입석대』를 아니 볼 수 없다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2004년 산행 때 이미 다녀 온 곳이고 장시간 행군을 하듯 산행한 피로가 누적 되 배낭을 지키며 쉬기로 했다. 대원들이 출발했다. 식사 전 까지만 해도 사람들로 북적였는데 한 두 팀 쉼터를 빠져 나간다 했는데 적막감이 돌 정도로 조용하다. 양지쪽에 앉아 쉬고 있는데 윤사장이 되돌아왔다. 시간이 늦어 입산 통재를 하기 때문에 되돌아 왔다고 한다.
[참고자료] 서석대장불재의 고산초원을 해치고 동북쪽으로 약 900m쯤 올라가면 마치 거대한 병풍을 둘러 쳐놓은 것 같은 장엄한 돌무더기가 펼쳐져 있다. 이것이 유명한 서석의 수정병풍(水晶屛風)이다. 서석대(1,100m)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줄지어 서 있어서 저녁노을이 물들 때 햇빛이 반사되면 수정처럼 강한 빛을 발하면서 반짝거리기 때문에 ‘서석의 수정병풍’이라 했다고 전해진다. 무등산을 서석산이라 부른 것도 실은 이 서석대의 돌 경치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서석대의 병풍바위는 청명한 날이면 광주시가지에서도 그 수려한 모습을 바라볼 수 있고, 5월 하순쯤 이곳에 만개한 연분홍 철쭉꽃은 기암절벽과 어울려서 초여름 무등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다. 장불재에서 동쪽으로 약 400m쯤 오르면 정상의 서쪽 해발 1,017m지점에 입석대(立石臺)가 있다. 석축으로 된 단에 올라서면 5~6모 또는 7~8모로 된 돌기둥이 반달 같은 모양으로 둘러서 있는데, 이렇게 기이하게 생긴 돌모양은 다른 산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든 무등산만의 절경이다. 입석대의 이 바위기둥들은 대체로 화산폭발의 산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무등산에서 화산활동이 일어난 시기는 정확히 측정된 바 없지만 중생대 백악기 후기(대략 9천만년 전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출처> 광주 북구 문화원(gjbukgu.kccf.or.kr)
[참고자료] 입석대
석축으로 된 단을 오르면, 5~6각형 또는 7~8각형으로 된 돌기둥이 반달같이 둘러 서 있는데 이를 입석대라 부른다. 이런 절경은 다른 산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랜 세월의 풍상을 겪어 온 입석대는 석수장이가 먹줄을 퉁겨 세운 듯, 하늘에 닿을세라 조심스럽게 늘어서 있는 모습이 우람하기만 하다. 옛날에는 이곳에 입석암이 있었고 주변에는 불사의사, 염불암 등의 암자들이 있었다.
<출처> 광주 북구 문화원(gjbukgu.kccf.or.kr)
[12] 장 불 재
서석대와 입석대에 오른 대원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린지 50여분, 대원들 도착이다. 16 : 00시가 넘었다. 오늘 산행의 목적지(어림고개) 도착은 빨리 걸어야 밤 8 : 00시는 되어야 될 것 같다. 대장과 장부장만 목적지까지 가고 노부장, 설부장, 윤사장과 함께 『둔병재(18:00 도착 예정)』에서 산행을 종료하기로 했다. 앞으로 두 시간만 가면 오늘 산행이 종료 된다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가볍다.
쉼터에서 대장과 장부장을 보내고 나머지는 천천히 『장불재』에 올랐다. 『안양산』초입으로 거대한 통신 시설과 의자 등 몇 가지 편의 시설이 있는 넓은 고개 마루다. 시야가 툭 터져 우측으로 무등산 정상과 입석대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좌측으로 기게 뻗은 『백마능선』과 『936봉』, 그리고 『안양산』정상도 지척에서 보듯 선명하다. 이정표에는 「규봉암 1.8 , 서석대 0.9, 입석대 0.4, /산장 6.4 / 936암봉 1.3km, 안양산(853m) 2.8km」라 표시되 있다.
『장불재』는 광주시와 화순군의 경계가 되는 해발 990m의 능선고개 길이다. 규봉과 입석대, 서석대로 가는 유일한 등산로가 되는 곳이며 이전에 「동복」, 「이서」 사람들이 광주를 오갈 때 지나던 고갯마루이다. 정상을 향해 왼편에 서석대, 오른편이 입석대이고, 이서면쪽으로 능선을 따라 돌면 지공너덜과 규봉에 다다른다.
『장불재』는 「장골재」라고도 하는데 장골재라는 이름은 ‘長골’, 즉 ‘긴골’이라는 뜻이며 이 골 위에 있는 고개를 ‘긴골재’ 즉 ‘장골재’라고 불렀는데 여기에 장불사(長佛寺)가 세워지면서 한자로 음이 비슷한 장불재(長佛峙)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중머릿재에서 입석, 서석대와 규봉으로 가는 도중에 정상의 서남쪽으로 뻗은 해발 910m의 넓은 고산초원으로 우리나라 육지 평균고도 875m보다 더 높은 곳이 된다.가을철에는 사람 키를 넘는 희고 고운 억새밭이 마치 백마의 등처럼 넓고 길게 깔려 있어 고산미(高山美)의 극치를 이룬다. 그래서 등산인들은 이 갈대의 초원을 『백마능선』이라는 애칭으로 부르고 있다.
<출처> 광주 북구 문화원(gjbukgu.kccf.or.kr)
[13] 白馬稜線상의 『936봉』
무등산 정상을 배경으로 사진 한 장 남기고『936봉』향해 걸음을 옮겼다. 바람이 쓸려 사각대는 갈대 잎 소리가 경쾌하다.
KT 통신시설 정문앞에서 좌측으로 꺾어 10여 분 진행, 백마능선 첫 봉을 지나 완만한 능선을 따라 안부에 내려섰다 바위가 뾰족하게 솟은 『936봉』에 올랐다. 대장과 장부장이 안양산 중턱을 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최대한 속도를 내는 모양이다.
[14] 『安養山』에 올라
『936봉』 바위지대를 지나 안부에 내려섰다 오늘 산행의 마지막 고비 『안양산』을 치고 오른다. 다소 가파르기는 했지만 무리 없이 오를 수 있는 경사다. 어느새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들고 해는 길게 굴곡을 이룬 산 능선에 가까이에 접근 해 있다. 속도를 좀 내면 산 정상에서 落潮의 장관을 볼 수 있는 福을 누릴 것 같다.
숨을 몰아쉬고 억새와 철쭉의 앙상한 가지가 어우러진 좁은 길을 헤치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약 20분) 산마루에 올라섰다. 『안양산』정상이다. 시야가 툭 터지는 넓은 산 정상이다. 『안양산, 해발 853 m』정상석과「안양산 자연휴양림 1.2km / 수만리 3구 2.5km」방향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걸음을 빨리한 보람이 있어 구름 속으로 파고드는 낙조의 장관을 눈에 담고 황홀경에 빠질 수 있는 복을 얻었다. 손을 높이 들고 정상의 氣를 가슴으로 가득 받아들이며 열심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때마침 안양산에 올랐다 하산하는 부부 등산객을 만나 단체로 기념 촬영하는 기회도 얻고 ---- 몸과 마음이 훨훨 날아갈 듯 가볍다. 이제 하산할 일만 남았다.
『안양산』은 전남 화순읍 수만리에 있으며 이서면 안심리와 접하고 있는 해발 853m의 산이다. 화순 북서쪽 무등산의 한 위성봉 격인 산이다. 미끈하게 말 등처럼 뻗어 있어 백마능선이라 부르기도 한다. 안양산은 억새와 철쭉군락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는데 이 산 줄기가 호남정맥의 일부를 이루고 있어 정맥 종주꾼들의 입소문을 타고 전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안양(安養)이란 불교 용어로 ‘몸과 마음을 편안히 쉬게 한다.’는 뜻으로 산의 형상이 마음심자형으로 생겼다고 하는데 이런 산의 형상을 따『안양산』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15] 『안양산 자연 휴양림』과『둔병재(屯兵峙)』
안양산 정상을 뒤로하고 이정표가 「안양산 자연 휴양림」이 지시하는 방향 내림 길로 들어섰다. 급경사 내림 길로 굵은 밧줄도 설치해 놓았다. 발 끝에 힘을 주며 약 16, 7분을 내려오니 임도가 나오고 「정상 1.5km」표지목이 세워져 있다. 「안양산 자연 휴양림」이 멀지 않은 듯 불빛도 보인다.
이미 날이 어두워져 길을 분간하기도 힘들다. 18 : 00시를 좀 넘겨 『둔병재(屯兵峙)』에 있는「안양산 자연 휴양림」에 도착했다.
오늘 산행의 종착지인 『안양산자연휴양림(화순군 이서면 안심리)』은 1997년에 「진재량」소유의 민간 휴양림으로 68만㎡ 면적에 하루 3,000명의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휴양림 입구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이 주둔했던 『둔병재(둠병재, 屯兵峙, 안양산 남쪽에 있는 고개로 화순읍 수만리로 넘어간다.)』고갯마루이며, 고개를 기준으로 수령 40년의 편백나무와 측백나무, 삼나무 등이 인공림과 천연림의 조화를 이룬 곳이다.
휴양림에는 깊은 산의 청정한 계곡을 따라 내려온 물을 단계적으로 이용하는 인공폭포, 물놀이 터, 연못과 등산로, 산책로, 숲속의 집, 미로의 집, 잔디광장, 출렁다리, 삼림욕장, 숲속수련장, 체력단련장 등이 있고 자연관찰원, 야외교실, 표고버섯재배장, 식물원, 동물사육장 등의 교육시설과 숙박시설을 갖춘 곳이다.
<자료제공> 화순군청 http://www.hwasun.jeonnam.kr/
[16] 『어림고개』로의 마중
날이 어두워 휴양림은 둘러보지 못하고 휴양림 입구에서 택시를 불렀다. 택시 도착, 아침에 주차를 시켜둔 『유둔재』로 이동했다. 대장과 장부장이 약 40여분 후면 『어림고개』에 도착할 것 같다. 초행길이지만 ‘네비게이션’과 지도를 보며 산을 한 바퀴 돌아 간신히 어림마을을 찾아 고개 마루에 도착했다. 밖에 나와 보니 날씨가 너무 차고 어두워 지척을 분간할 수도 없다.
대장과 장부장을 기다리기 20여 분, 드디어 산마루에 불빛이 얼렁거린다. 잠시 후 두 사람 고개에 도착이다. 반갑게 맞이하고 차에 올라 화순읍내로 이동을 했다. 날이 어두워 두어 번 알바를 했단다. 어려움을 무릅쓰고 끝가지 목적을 이룬 두 대원의 의지가 놀랍다.
[17] 약산흑염소가든
화순 읍내 도착.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택시 기사를 통해 아림 해 둔 「약산흑염소가든(전남 화순군 화순읍 삼천리 505-11, ☎ (061)373-9292, www.yacksan.co.kr)」을 찾았다. 늦은 저녁 식사이기도 했지만 화순의 별미 흑염소 불고기가 감칠맛을 낸다. 흑염소 불고기에 이스리 잔을 부딪치니 산행의 고단함이 일시에 사라지는 것 같다. 흑염소로 보양을 해 내일은 기운찬 산행을 하리라.
2009.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