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제 167호로 지정된 해남 윤씨의 종가 연동 녹우당은 호남지방 사대부의 대표적인 가옥으로 고산 윤선도가 시작에 정진했던 곳이다. 해남의 상징적인 고건축물의 오랜 역사의 흔적은 5백년된 늙은 은행나무에서부터 시작된다. 녹우당도 이 은행나무 잎이 바람에 떨어지는 모습이 비오는 것과 같다하여 녹우당이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현 건물로는 안채, 사랑채, 행랑채, 헛간, 그리고 안사당, 어초은사당, 고산 사당 등이 있으며 가옥의 좌측편에는 추원당이란 강당도 있다. 안채는 성종 3년(1472년)에 지어진 것으로 전하여지며 사랑채는 효종이 사부였던 고산에게 하사하여 수원에 건립했던 것을 고산이 82세 되던 1669년에 현 위치로 이건한 것이라고 하며 옥동 이서가 쓴 '녹우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사랑채의 상량문에 「함풍8년무년4월병오초8일계축시중주 상목양」이란 기록이 있어 철종 9년(1858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현존 5대봉사를 하고 있는 안사당은 순종 21년(1821년)에 세웠으며 1년 뒤인 순조 22년(1822년)에는 어초은사당을 중수하였다.
수정동
고산이 처음 은둔처로 정한 수정동은 현산면 만안리 미세마을 건너편 만안저수지 윗쪽 골짜기에 위치한 계곡이다. 지금 이곳은 바위산을 깨 건축자재로 쓰기 위한 채석장으로 변해 일반인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채석장을 지나 조그마한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가 올 때나 흐르는 실개천이 나오고 이 실개천을 이용하여 고산이 조영한 수정동유적이 나온다.
이곳은 고산이 기유년 53세 되던 2월 경상도 영덕의 귀양살이에서 풀리어 해남연동의 종가에 돌아온 후 산거생활을 위해 처음 찾은 곳이다. 이곳의 좁은 계곡을 따라 오르면 양쪽에 허물어진 축대가 있어 정자나 집을 짓기 위해 쌓아올린 것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병풍바위 바로 아래에는 축대중 가장 큰 규모인 높이 약 3m, 길이10m가량의 정자 터가 있으며 여기저기 기와 파편들이 흩어져 있어 기와를 얹은 정자 터가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가능케 해준다.
이곳에서 볼 수 있는 멋진 자연의 일부는 높이 약 10m, 길이 50m가량의 병풍바위다. 병풍처럼 길게 펼쳐져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보이며 이곳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물이 비폭이 되어 흐르고 있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그 수량이 적어 그 맛을 느끼기 어렵지만 비가 오면 병풍바위에서 떨어지는 비폭을 바라보며 시상에 잠겼을 고산을 생각하면 그의 낭만적인 조영감각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 비폭에서 부근 마을 사람들이 유두날 물을 맞았다고 하며 물을 맞을 때 마음씨가 나쁜 사람은 구렁이가 물을 막아버렸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금쇄동
고산은 경진년(54세)에 천연의 금쇄동을 발견하며 금쇄석궤를 얻는 꿈을 꾸고 며칠이 안되 꿈과 부합된 곳을 찾았기 때문에 금쇄동이라 하였다 한다.
고산이 찾아낸 금쇄동은 현산면 구시리 산 181번지에 있는 270~290m의 산 정상부에 있다. 서북쪽을 제외하고는 가파르고 험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인근에 사는 주민들은 보통 '산성안'이라고 부른다.
고정희생가
여성운동가 고정희는 해남군 삼산면 에서 태어난 시인이자 여성운동가로 삼산면 송정리 는 고정희가 스무살 무렵까지 그녀가 문학소녀로서의 꿈과 희망을 키우던 마을이다. 이러한 뿌리가 그의 초기시에 향토적 서정이 짙은 시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한 뒤 1975년 시인 박남수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연가》《부활과 그 이후》를 발
표하며 문단에 데뷔하였다. 허형만·김준태·장효문·송수권·국효문 등과 ‘목요회'동인으로 활동하였고,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여성문학인위원회 위원장, 시창작분과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1984년부터는 기독교신문사, 크리스찬아카데미 출판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편집주간을 거쳐 여성문화운동 동인‘또하나의 문화'에서 활동하는등 여성운동가로서의 사회활동도 적극적으로 하였다. 1991년 6월 9일 지리산 등반도중 실족사하였다.
1979년 첫시집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있는가>이후, <신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등의 시집이 있다.
송정리 에서 태어난 고정희는 이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동네인 봉학리 의 김남주와 함께 같은 시대에 서로 닮은 생애를 살다 간다. 삼산면 송정리 는 고정희가 스무살 무렵까지 그녀가 문학소녀로서의 꿈과 희망을 키우던 마을이다.
김남주생가
김남주 생가는 해남읍 삼산면 봉학리 에 위치하고 있다. 삼산면 봉학리 에서 이땅의 전형적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70년대 격변의 시기에 전남대 영문과에 입학 3선개헌 반대, 교련반대 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70년대 유신독재체제와 맞서 칼날같은 시를 쏟아내고 민주주의로 향하던 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내면서도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등의 옥중시집을 발표해 현실비판의 당당한 문학지평을 열어왔다. 그의 길지 않은 삶과 문학의 제적에는 70, 80년대 우리 정치사회사의 굴곡과 음영이 그대로 새겨져 민족문학의 큰별로 낮고 어둡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앞길을 밝혀 주었다.
김시인은 48년의 지난 세월동안 반외세 반독재투쟁 절규하는 시와 자기의 시같은 삶으로 맞서왔다. 그러다 여긴 투옥 생활을 끝낸 88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죽는 날까지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나는 나의 시가 오가는 이들의 눈길이나 끌기 위해 최신유행의 의상걸치기에 급급해 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나는 나의 시가… 호사가의 장식품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는 그의 시처럼 김남주의 시는 그가 함께 해야할 민중들의 삶속에서 등대처럼 반짝이는 현신타계의 힘이었던 것이다.
불의한 시대인 70년대에 유신독재체제와 맞서 그는 행동으로 뿐만아니라 칼날 같은 시를 쏟아냈으며 민주주의로 향하던 80년대를 옥중에서 보내면서도 '나의 칼 나의 피', '조국은 하나'등의 옥중시집을 발표해 현실비판의 문학지평을 열었다.
그의 짧은 삶과 문학속에는 70, 80년대 우리 정치.사회사의 굴곡과 음영이 그대로 새겨져 있어 민족문학의 큰 별로 낮고 어둡게 살아가는 민중들의 앞을 밝혀 주었다.
김남주시인은 48년의 세월동안 반외세 반독재 투쟁의 절규를 시와 삶으로 맞서왔다. 그는 투옥 생활을 끝낸 88년에는 민족문학작가회의 상임이사, 한국민족예술인 총연합 이사 등을 맡아 죽는날까지 민족문화운동에 힘을 쏟았다.
가학산자연휴양림
흑석산 (일명 가학산) 은 기암괴석과 철쭉이 조화롭게 어우려진 명산이다. 산세가 나르는 학처럼 생겼다하여 가학산이라고 부르며 비가 온후 물을 머금은 산의 바위가 검게 보인다고 하여 유래된 듯 하며 비가 온후 정말 산이 검게 보인다.
가래재-깃대봉을 잇는 등산로를 타다보면 마치 한마리의 학을 타고 비상하는 느낌을 갖게 되며 매년 5월에는 흑석의 위용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철쭉의 신비를 널리 알리기 위한
철쭉 대제전이 열리기도 한다. 계곡면 가학리(18km)에 위치하고 있으며 가학산에 올라 흑석산 에서 신거리쪽으로 내려가면 가학산자연휴양림으로 이동할 수 있다.
고천암철새도래지
고천암 갈대밭은 고천암호 에는 14Km의 둘레를 따라 갈대들이 광활하게 서식하고 있고, 해남읍 부호리에서 화산면 연곡리 까지 3Km의 갈대밭은 50만편으로 국내 최대의 갈대군락지이다.
또한 고천암 갈대밭에는 먹황새, 독수리 등 희귀조류는 물론 전세계 98%의 가창오리 가 겨울을 나면서 환상적인 군무를 하기도 한다.
허준촬영지
송지면 중리 해안가는 주변의 바닷가 풍경이 매우 뛰어나다. 이곳은 또한 신비의 바닷길로 유명해 대섬까지 바닷물이 빠지면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서 조개잡이 등으로 바다를 체험할수있다. 이러한 뛰어난 자연경관으로 인해 지난 2000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MBC드라마 ' 허준 '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이곳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함께 인기드라마 허준의 유배지 촬영장이 일약 인기관광지가 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고 있다. 이곳 송지면 중리 바닷가는 개발이 안된 순수한 어촌의 모습과 함께 천혜의 뛰어난 주변경관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허준 외에도 영화 '싸울아비'촬영 등이 이루어져 조그마한 어촌마을이 관광지가 되고있다.
관광안내
해남군 조류 생태관
철새들의 천국! 땅끝 해남으로 초대합니다. 해남은 간척지의 기온이 따뜻하고 넓은 농토와 바다갯벌이 오염되지 않아 먹이가 풍부하여 철새들의 새로운 서식처가 되고 있습니다. 살아 숨 쉬는 생태계의 보고(寶庫)인 이곳을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가족단위의 환경체험현장이 되도록 하기위해 “조류생태관”을 개관하게 되었습니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문화유적이 존재하는 한반도 최남단 해남에서 생애 잊지 못할 감동과 추억을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해남지역에 있는 성중에 가장 오래된 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옥녀봉토성(玉女峰土城)이다. 옥녀봉토성은 대둔사로 가는 길목인 해남읍 남연리와 삼산면 창리의 접경지역인 표고(해발) 200m 내외의 옥녀봉 정상에 있는 토축산성(土築山城)으로 삼한시대인 한시대의 성으로 추정되고 있는 곳이다...
삼산면은 삼산천 유역에서 형성된 비교적 넓은 충적평지를 끼고 있다. 충적평야의 주변으로는 해발 300m내외의 산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금산 마을 북쪽에 있는 해발 216.9m의 산은 서쪽으로 내려오다가 창리 부근에서 구릉성 산지로 바뀌면서 남동쪽으로 내려온다...
연정리 지석묘는 남해애 인접한 좁은 계곡 평지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삼봉산 기슭의 평탄한 대지상으로 국도 13호서에서 동쪽으로 50m 떨어진 곳이다. 지석묘 주위는 숲이 우거져 있으며, 바로 동쪽 산기슭하에 석정마을이 있다. 지석묘의 배치는 남북 35m, 동서 20m의 범위안에서 삼각형에 가까웁게 군집을...
이 유적은 해남군 화산면 방축리에 있다. 화산면 소재지에서 남서쪽으로 가는 포장도로를 따라 1㎞쯤 가면 낮은 고개가 나오는데 이 고개를 넘어가서 왼편으로 꺽어져서 올라가면 저수지에 못미쳐 고인돌군이 위치한다. 이곳은 선은산 서쪽 기슭 아래부분에 해당되며 53기의 지석묘가 북동-남서방향으로 군집을 이루며 놓여 있다. 이곳 지석묘군에는...
해남의 군곡리패총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차에 걸쳐 목포대학 박물관 발굴단에 의해 발굴이 실시되었다. 조개무지층이 겉으로 드러난 범위는 너비가 약 200m, 길이 약 300m에 이르는 서남해안지역에서 가장 큰 것이며 출토유물의 양도 많았다. 발굴은 구릉경사면에 위치한 패각층을 중심으로 조사되었으며...
북일면 소재지 남동쪽에 위치한 성마산(城馬山)은 3줄기 구릉으로 갈라져 남동쪽을 향해 길게 이어지는데 비교적 낮고 짧게 뻗은 중앙부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고분이 위치한 곳은 성마산 북동쪽 구릉이 동쪽으로 뻗어 고분의 북쪽 배후를 막아주고, 동쪽과 서쪽은 남동쪽을 향해 길게 뻗은 2줄기의 구릉과 이 구릉에서 뻗어나온 가지구릉이 고분을 에워싸 비교적 편안한 느낌을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