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 시 자 : daangoon (구자일) 게시번호 : 3749
게 시 일 : 2000/03/15 17:01:52 수 정 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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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일보 기사
분석의뢰 소조2점 '고구려 銘文' 학계 논란
지금까지 확인된 우리나라 금석문 가운데 가장 시기가 이른 연대가 나오는 고구려 명문(銘文)2점이 출현해 진위여부에 학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고구려연구회(회장 서길수·徐吉洙)는 최근 한 개인소장가의 의뢰를 받아 지난해말부터 분석중인 ‘정시(正始)7년’과 ‘수성왕(遂成王)10년’이란 연대가 보이는 소조(塑造·흙을 구워 만든 것)명문 2점을 언론에 공개했다. 북위의 연호인 ‘정시7년’은 서기 246년을, 고구려 차대왕(次大王)의 이름인 ‘수성왕10년’은 서기 156년을 각각 가리킨다. 고구려연구회측은 일단 ‘수성왕10년’명문도 ‘정시7년’명문과 같은 연대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 명문이 진품이라면 현존하는 고구려 금석문 가운데 연대와 주체가 분명한 ‘광개토대왕릉비’(414)보다 무려 168년이나 앞서는 가장 오래된 금석문이 되는 것이다.
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크기의 흙판에 새긴 ‘정시7년’명문에는 모두 50자의 글이 담겨 있으며, 옆면에는 인동초 같은 식물그림도 새겨져 있다. ‘수성왕10년’명문은 밑바닥 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의 크기로 아랫부분은 넓고 윗부분은 좁은 8각 기둥 형태에 86자의 글과 연꽃 무늬가 새겨져 있다.
서길수 회장은 “일제때 중국 지안(集安)에서 도굴된 1만여기의 고구려 무덤중 하나에서 나온 유물로 추정된다”며 “두 명문의 글씨체나 내용 등을 비교해 볼때 같은 곳에서 나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윗부분 양쪽 끝에 구멍이 나있는 ‘정시7년’명문은 못을 쳐 걸어뒀던 것으로, 8각기둥 모양의 ‘수성왕10년’명문은 무덤 안에 세워놓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그러나 두 명문은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유물일 여지도 남아 있다.
이들 명문을 처음 봤던 정영호(鄭永鎬·한국교원대교수)문화재위원은 “오래됐다는 느낌이 들었으며 조작됐을 가능성도 적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나 학계의 반응은 유물의 출토지가 불분명한데다 여러가지로 따져볼 것이 많다는 입장이다.
우선 명문의 해석에 관한 문제다. ‘정시7년’은 북중국을 제패한 위(魏)나라 관구검의 침입으로 고구려 수도 환도성이 함락되고 동천왕(東川王)이 동해안까지 피신했던 전쟁(244∼245)이 일어난 다음해이다. 고구려연구회측은 일단 ‘정시7년’명문은 관구검의 병란이 끝난뒤 흘계(訖繼)라는 인물을 보내 도읍을 다시 조영하는 내용으로, ‘수성왕10년’명문은 고구려가 현토(玄릟)를 비류(沸流)지역에서 몰아낸 것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파악하고 있다. 즉 무덤에서 나왔을 것이라는 추정과는 달리 이들 명문의 내용만으로는 묘지명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또한 묘지명의 경우 여러 장으로 구성돼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두 명문 모두 앞 뒤로 다른 판이나 8각 기둥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이 제기되고 있다. 이에 따라 소장자가 만일 관련된 자료들을 갖고 있다면 모두 함께 공개해야 할 것이라는 지적도 들린다. 어쨌든 전후 내용의 결락으로 명문 한자한자의 해석에 들어가면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다음은 명문에서의 표현상의 문제다. ‘정시7년’명문에 나오는 나라이름과 연호를 함께 쓴 ‘위정시(魏正始)’라는 표현은 기존 금석문 용례에선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정시(正始)’만 쓰거나 위나라를 표기할 경우 ‘대위정시(大魏正始)’라는 표현이 널리 쓰였다. ‘수성왕10년’명문에 나오는 ‘백제고구려(百濟高句麗)’라는 표현이나 ‘국태민안(國泰民安)’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구절을 ‘민태국안(民泰國安)’으로 쓴 점도 이해가 안되는 표현이다. 두 명문 모두에서 나오는 부족장이나 귀족으로 추정되는 ‘수(殊)·백수(百殊)’의 용어도 다른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두 명문에서 현대 중국어에 쓰이는 간자체(簡字體)가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의문이다. 특히 ‘수성왕10년’명문에 나오는 ‘호(護)’자는 ‘릟戶’자로 표현되어 있다. 중국에서 나온 간체자원사전 등에는 이 ‘릟戶’자를 중국 현대 공산주의 혁명시대 만들어진 ‘해방자(解放字)’로 설명하고 있다.
명문에 쓰인 서체도 문제가 된다. 두 명문 모두 초기 해서체로 쓰여졌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 고구려 수도에 세워진 ‘관구검기공비’나 후대의 ‘광개토대왕릉비’등이 예서체로 쓰인 것과 비교된다. 무엇보다 ‘수성왕10년’명문이 ‘정시7년’명문과 연대가 달리 2세기 중반에 작성된 것이라면 중국에서도 예서체의 극성기였던 후한시대에 고구려에서 해서체 글씨가 등장했다는 점에서 중국서예사를 다시 써야할 자료라고 김양동(金洋東)계명대교수는 주장했다. 이밖에 무덤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세월의 연륜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글씨가 너무 선명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고구려사 전공자인 서울대 국사학과 노태돈(盧泰敦)교수는 “전체적인 측면을 고려해 신중하게 접근해야 좋을 것 같다”는 입장을 밝혔다.
<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