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익 柳永益·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본지 편집고문
1919년 임정을 계승한 ‘대한민국의 정통성’ 헌법 前文에 明示
신속한 의사결정으로 효율적 국정 수행 위해 단원제-대통령제 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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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익 ·연세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 석좌교수·본지 편집고문 |
1948년 제헌헌법의 탄생과정에서 국회의장 이승만의 역할은 그동안 주목받지 못하고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젊은 시절부터 독립국가의 헌법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준비해 왔으며, 제헌국회 당시 국회의장으로서 헌법의 제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국사 시민강좌’ 제38집에 게재된 ‘대한민국 헌법의 탄생-이승만 국회의장의 역할을 중심으로’에서 발췌하여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헌법 전문의 수정이승만은 5월 31일 국회 개회식사에서 앞으로 세워질 대한민국이 1919년의 한성임시정부를 계승한 정부라는 자기 나름의 법통계승론을 상기시켰다.
그런데 헌법기초위원회가 마련한 헌법안 전문에는 그러한 취지의 문구가 결여되어 있었다. 이 점을 아쉽게 여긴 이승만은 7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아래와 같이 헌법안 전문에 법통계승 관련 문구를 첨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우리가 헌법 벽두의 전문에 더 써넣을 것은 ‘우리 대한민국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민족으로서 기미년 3·1 혁명에 궐기하여 처음으로 대한민국 정부를 세계에 선포하였으므로 그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자주독립의 조국 재건을 하기로 함’ 이렇게 넣었으면 해서 여기 제의하는 바입니다.”
국회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문 내용을 가다듬은 다음 7월 7일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민국은 3·1혁명의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고 되어 있던 전문의 서두를 “우리들 대한민국은 기미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로 바꾸어 통과시켰다.
이로써 역사의식이 남달리 강했던 이승만은 남한에 세워지는 새로운 국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한반도의 중앙정부라는 사실, 즉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헌법 전문에서 확인하고 넘어간 것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의 채택해방 후에 우후죽순같이 일어난 여러 정치단체들이 다투어 새 나라의 건국을 구상할 때 그들은 그 나라의 명칭을 어떻게 정하느냐에 대해 의견이 분분했다.
예컨대, 신익희가 주도한 행정연구회가 1946년 3월에 작성한 헌법 초안에서는 국호를 ‘한국’이라고 정했고, 유진오가 1948년 5월에 사법부법전편찬위원회에 제출한 헌법 초안에는 국호를 ‘조선민주공화국’이라고 칭했다. 그리고 1948년 6월에 국회헌법기초위원회에 제출된 유진오 안에는 국호가 ‘한국’으로 되어 있었다. 이 밖에 한민당과 시국대책협의회(대표 김규식·여운형)에서는 국호를 ‘고려공화국’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19년 9월 이래 한민족의 임시정부를 ‘대한민국 임시정부’라고 불러 온 이승만은 5월 31일 국회 개원식에서 ‘임시의장’의 자격으로 연설할 때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말문을 엶으로써 앞으로 건설될 새 나라의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예시했다. 그 후 6월 17일에 그는 독촉의 성명서를 통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할 뜻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국호 채택 문제는 헌법기초위원회 개회 벽두에 논란의 대상으로 부각되었다. 6월 3일 기초위원회 회의 표결에 부친 결과 ‘대한민국’ 안이 17표, ‘고려공화국’ 안이 7표, ‘조선공화국’안이 2표 그리고 ‘한국’안이 1표를 얻음으로써 ‘대한민국’안이 채택되었다.
7월 1일 국회 본회의에서 국호 문제가 재론되었다. 이때 이승만 의장은 “곧 국호문제 토론이 시작될 모양인데 국호가 잘 되지 않아서 독립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니 3·1운동에 의하여 수립된 임시정부의 국호대로 대한민국으로 정하기로 하고 국호 개정을 위해서 토론으로 1분이라도 시간을 낭비하지 맙시다”라고 ‘대한민국’안 이외의 국호 제기를 봉쇄하였다.
곧 이어서 실시된 표결에서 재석 188명 중 찬성 163표, 반대 2표로 ‘대한민국’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이렇게 이승만의 영향 하에 신생 공화국의 국호가 ‘대한민국’으로 무난히 결정되었던 것이다.
단원제 국회 구성안 채택새로 건설될 나라의 입법부(국회)를 단원제(單院制)로 구성하느냐 양원제(兩院制)로 구성하느냐 하는 것은 제헌 과정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진 문제 중 하나였다.
유진오는 애당초 헌법안을 기초할 때 양원제안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승만은 하루 빨리 정부를 세워야 하는 판국에 참의원 선거를 치를 겨를이 없으며 또 참의원 신설은 국가 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로 양원제를 반대하고 단원제를 주장했다.
6월 7일 그는 기자회견에서 양원제에 대한 반대 의사를 처음으로 표명했다. 그러나 6월 10일 헌법기초위원회가 자기의 의사를 무시하고 양원제를 택했다는 소식을 듣고 6월 17일에 독촉의 성명서를 통해 단원제안을 지지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렸다. 그러고 나서 6월 21일 그는 기초위원회 회의에 나타나 양원제 반대 의사를 재천명했다.
이승만의 완강한 반대에 직면한 헌법기초위원회는 결국 6월 22일 오전 회의에서 양원제를 단원제로 번안처리했다.
국회 본회의에서 일부 의원들 간에 국회에 상정된 단원제안을 양원제안으로 번안할 움직임을 보이자 이승만은 ‘정부를 수립한 뒤에 내일 모레라도 그것을 고쳐서 권리를 보호할 수 있으니 그것을 길게 토론하지 말고 하루 바삐 통과시켜서 정부를 조직하자’는 요지의 연설을 했다. 이 연설에 이어 치러진 표결에서 재석의원 176명 중 찬성 14표, 반대 119표로 양원제가 부결되고 단원제가 최종적으로 채택되었다. 요컨대, 제헌국회는 이승만의 강력한 주장에 따라 국회 단원제를 채택한 것이다.
대통령중심제 채택 1948년 헌법 제정 과정에서 최대 쟁점은 권력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제헌국회 의원들은 입법부(국회)와 행정부(정부)간의 관계를 영국식 내각책임제로 할 것인지 아니면 미국식 대통령제로 할 것인지에 대해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유진오는 내각책임제안의 채택을 적극 주장했다. 이에 반해 이승만은 내각책임제와 대통령(중심)제에 대하여 나름대로 독자적인 판단을 내리고 있었다.
그는 의원내각제는 군주국에 알맞은 제도로서 그러한 제도를 채택할 경우 ‘정당끼리 싸우느라’ 국가 운영이 혼란에 빠질 것으로 인식한 반면, 대통령제야말로 민중의 의사를 가장 잘 반영할 수 있는 진정한 민주주의제도이며 건국 초에 산적한 국정을 신속히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제도라고 보았다.
이승만이 내각책임제에 대한 반대의사를 분명히 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헌법기초위원회는 6월 11일 내각책임제 원안의 ‘내각’이라는 용어를 ‘국무원’으로 바꾸고, 국회가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되 임기를 5년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안을 채택하였다.
이승만은 6월 21일 오후 기초위원회 전체회의에 출두했다.
그는 “오늘날과 같은 혼란한 정치정세 속에서 내각책임제를 하면 권력의 안정이 안 될 것”이라고 말한 다음 “우리가 국권을 찾기 위해 40년 동안 싸워온 것은 백성에게 권리를 주자는 것이며 정당에게 권리를 주어서는 정당끼리 싸우느라 나라 경영은 하기 어렵다. 만일 이 초안이 국회에서 그대로 헌법으로 채택된다면 나는 그러한 헌법 아래에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임하지 않고 민간에 남아 국민운동이나 하겠다”라고 선언한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장해 버렸다.
그 다음날(22일) 오전 10시에 헌법기초위원회의 마지막 회의가 소집되었다. 이 회의에서 위원들은 내각책임제 번안 문제를 논의했다. 토론 결과 김준연, 조헌영, 정도영 등 한민당 의원들의 번안 동의가 22대 1이라는 절대다수로 통과되었다.
이상과 같은 우여곡절을 거쳐 대통령중심제를 특징으로 하는 헌법안이 7월 12일 드디어 재석의원 163명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통과되었다.
그후 7월 17일 국회의사당에서 열린 대한민국 헌법 공포식에서 이승만 의장은 “지금부터는 우리 전 민족이 고대 전제나 압제 정체를 다 타파하고 평등·자유의 공화적 복리를 누릴 것을 이 헌법이 담보하는 것이니”라고 선언함으로써 자기에게 부과된 역사적 임무를 완수하였다.
정리/김정은 기자 hycie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