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산면의 서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 삼호리(이장 강봉관).
면소재지에서 진도방향으로 4km쯤 가다 옥동리에서 접어들면 옥
매산 밑에 아담하게 늘어선 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형성시기에 대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동국여지승람의 기록
은 마을이 600여년전부터 존재했음을 알게 한다. 동국여지승람 해남
현조에 보면 해남의 3원(三院)의 하나였던 삼지원(三支院)이 위치하였
다고 기록되어 있고 마을지명은 마을에서 보면 3개의 호수같은 바다
가 보인다고 해서 붙여진 것일 거라는 추측이다.
1690년경 제주양씨가 처음 입주하여 마을을 이룬 삼호리는 현재 60
여 가구 110여명의 사람들이 고추, 배추, 벼를 주작목으로 생활의 터
전을 일구며 살아간다.
삼호리를 지켜나갈 15명의 유치원생과 초등학생들의 떠들썩함은 마
을에 젊은이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30여명에 이르는 노
인들, 50대에서 20대까지 고른 분포의 연령대의 마을민들은 서로 도
와가며 화목하게 생활한다.
현재의 삼호리는 전형적인 농촌마을 이지만 얼마 전 까지만 해도 광
산촌이었다. 옥매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마을은 현재의 위치가 아
닌 옥매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었고 마을민들 대부분이 광산에서 일했
다. 일제시대 일본사람들에 의해 운영된 옥매광산의 옥석은 삼지원을
통해 일본으로 건너갔고 해방후 옥매광산의 쇠퇴로 마을민들은 삶의
터전을 산아래로 옮겨야 했다.
아직도 옥매산엔 광산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옥석은 공예
품으로 만들어져 명성을 떨치고 있다.
삼호리의 끝 삼지원.
20여년전 삼지원은 호황을 누렸다. 진도를 가기위해서는 삼지원을 거
쳐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과 자동차를 실은 철선은 진도와 삼지원을 분주하게 드나들었
고 많은 사람들은 삼지원과 삼호를 기억했다.
하지만 진도대교가 건설됨으로써 삼지원과 삼호는 사람들로부터 잊
혀졌고 지금은 모래운반선과 야적장이 선창을 메우고 있고, 삼지원을
찾는 사람들이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삼지원엔 맛깔스런 밥상
을 차려내놓는 식당 한곳, 19세미만 출입금지 표시가 붙은 가요주점
이 존재하고 있어 이채롭기까지 하다.
마을 참샘 물은 만병통치약 이었다. 샘물이 어찌나 시원하고 효험이
있던지 아픈 부위에 물을 맞으면 아팠던 것이 금세 나은다고 해 많은
사람들이 참샘을 찾았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아쉽게도 참샘은 주
변목장측의 폐쇄로 인해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바쁜 농사철이 한가해질 때 쯤 주민들은 바다에 나간다. 찰지고 깨끗
한 갯벌은 주민들에게 낙지, 게(화랑게), 감투(감퇴) 등 온갖 반찬거리
와 자그마한 푼돈을 마련해준다.
지금도 삼호감투는 맛좋기로 유명하지만 40여년전 혈도간척지가 생
기기전에는 얼마나 많은 감투가 있었던지 온마을 사람들이 감투메기
에 여념이 없었고 지금도 그 맛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삼호리의 감투
를 아쉬워 한다.
물좋고 인심좋고 경치좋은 마을로 손꼽을만 하지만 해질녘 ‘애∼앵
애∼앵’하며 무지막지하게 찾아드는 모기는 마을의 가장 큰 골칫거
리다. <옥매산 아래에 아늑하게 자리잡은 삼호리의 평화로운 전경.>
첫댓글 내가초등시절에,삼호에서철선타고,진도벽파진으로,소풍가던생각이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