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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34강 (이 근호목사, 2009년 4월 10일-(2), 서울의존교회)
둘째시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지상에 있는 바벨탑, 아까 불쑥 튀어나온 도자기를 그렸는데, 이 세계에는 주님이 없습니다. 자기만 있으면 돼요. 내가 있는 그것만이 현실이에요. ‘어쨌든 내가 여기 있다.’ ‘만약에 내가 눈을 감고 죽어버리면 세상이 있든 없든 내가 눈감는 것과 동시에 세상도 없어진다’고 보는 거예요
하여튼 내가 중심이니까 ‘내가 여기 있다. 내 이름이 여기 있다.’ 내 이름의 영광, 이것만이 현실이라고 봅니다. ‘어떤 사람이 큰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 기분 안 좋아요. 그런데 ‘내가 부자가 되었다.’ 그러면 기분 좋아요. 기분 좋은 세상입니다. 내 원수가 잘되면 나쁜 세상이에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 현실을 내 중심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것은 내 이름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어요. 그래서 누굴 보내시는가? 주님을 보내셔서 주님에 의해서 세워진 나라가 되어 버리면 이 나라만 축복받고 나머지 자기 이름의 나라는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것처럼 ‘내이름을 믿는자는 생명을 얻지만, 아들이 있는자는 생명을 얻지만, 그렇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계속 그 위에 머물러 있다’ 고 되어 있어요.
요한복음 3:36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것을 집어넣고 현실이라 하자는 겁니다. 촌에 가면 플래카드에 붙어 있습니다. 제가 얼마전에 상주의 봉선이라는 마을에 간적이 있습니다. 거기 가니까 그 마을에 플래카드가 죽 붙어 있어요. 뭐라고 붙어 있느냐 하면, ‘○○○씨 문중 ○○파 ○○○씨의 차남 ○○○ 동국대학교 교수임용.’ 상주 읍내를 가니까 이런 플래카드도 있었어요. ‘아무개 경무관 승진’ 했다고. 또 우리동네에는 ‘아무개 자녀 서울대 합격’ 이라고 붙여 놓았어요.
어떤 사람도 ‘아무개 주님의 아들을 믿게 되었음’ 이라는 이런 플래카드는 안 붙잖아요. ‘드디어 아무개가 예수를 믿게 되었다’ 이런 것이 안 붙어 있다 이 말이죠. 지금 우리 동네는 플래카드 많이 붙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이 되어서 아미사에서 온통 붙여 놓았어요. ‘자비의 세상을 만들자’ 이런 것들 잔뜩 붙였습니다. 그 사람들 제가 보기에 돈 많이 들었어요.
아들이 없어요. 왜 아들이 없느냐 하면 하나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이 사고방식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알려준 거예요. 다른 민족한테는 낯설기 짝이 없어요. ‘무슨 그런 하나님이 다 있나? 무슨 하나님이 부자지간이 다 있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하나님과 아들 사이에 뭐가 성립됩니까? 약속이 있지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성립된 것이 약속이고, 그 약속이 퍼진 것이 약속의 계명이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만든 이 이스라엘, 아까 이야기 했지요? 뭘 보고 넘어갔다? 피보고 넘어 갔어요. 피를 보고 넘어 갔기 때문에 거기서 살아남은 이스라엘의 장자들은 거기서 끄집어 당겨서 이스라엘의 대표자가 되는 거예요.
‘모든 아들은 내게 돌리라’고 했으니까, 그게 이스라엘인데 그 이스라엘 그 집단이 시내산에 갔어요. 시내산에 가기 전에,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이 이스라엘이 뽑혀서 만들어져서 애굽에서 나오려고 할 때에 홍해 바다까지 따라온 군대가, 홍해가 자크 열리듯이 이스라엘만 통과시키고 다 죽었습니다.
그 때 나온 것이 출애굽기 15장에 ‘여호와는 용사시니 나는 너희들을 내 백성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거기서 나온 것이 뭐냐? 시편에 나옵니다. ‘이스라엘은 죽음에서 나온 백성’입니다. 이게 현실입니다. 오늘 현실이라는 말 많이 해요. 그게 마태복음 16장에 나옵니다. ‘내가 교회를 세우리니…’ 교회가 어떤 특징이 있다? ‘죽음의 힘이 더 이상 주장 못하는 집단’ 그게 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아픈 것 때문에 겁내면 안돼요. 교회는 죽어가는 것 때문에 겁내면 안되고 교회는 아프고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너무나 큰 충격과 기적으로 받아들이는 그 집단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그 교회가 교회되기 위해서 미리 있던 선배, 믿는 부모님들을 어떻게 했는가? 그것을 미리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주님의 고난에 먼저 동참케 해요. 어렵지요? 무슨 말이냐 하면 ‘주안에서’ 부모를 계명으로 섬기려면 그 계명이…, 여러분 피자위의 치즈가 녹으면 어떻게 돼요? 노랗게 치즈가 빵 속에 스며들지요? 그렇게 주님의 계명이 스민다는 말은 주님의 계명이 약속이 되어서 우리 속에 우리의 온 정신에 스며들어요.
왜? 무엇 때문에 그런데요? 어디에 있기 때문에? ‘안에’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한여름에 침실 문 다 닫고 F-킬러 뿌려놓고 다음에 문 열어놓으면 그 때 무슨 냄새납니까? F-킬러 냄새 나지요? 참, 사람들은 이 대목을 얼마나 오해하는지, ‘내가 계명대로 공경할게요’ 이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이 피자위에 치즈처럼 마구 우리한테 쏟아져야 되는 거예요.
약속의 계명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는 ‘고난에 동참’ 하게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24장 다시 봅시다. 누가복음 24장 26절은 아까 제가 안 읽었거든요. 아까 읽은 15,16절에 ‘그들과 동행하나 눈이 열리지 않았다’고 하고 여러분이 지금 떡을 먹고 있는데 떡을 먹을 때 눈을 떴습니까? 31절에 떡을 떼어 주실 때에 ‘눈이 밝아져’서 비로소 그들이 예수님을 알았잖아요.
그런데 그 중간에 26, 27절에 보면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증거했지요. 예수님 본인이 무엇을 근거해서? 지금 우리 보는 것과 같이 성경에 근거해서, 신·구약을 근거해서, 특히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근거해서 뭘한다?
예수님께서 왜 고난 받아야 했으며 왜 사흘 만에 부활해서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가? 그것을 설명하시는데 그 설명 당사자가 누구라고요? 예수님이 설명하죠. 저자가 직접 강의하는 거예요. 이 성경책 저자가 직접 강의하는데 그 강의하는 내용은 십자가 고난과 그리고 부활이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해석 할 때 어떤 구약의 어떤 율법도 어떤 선지서도 해석할 때 예수님의 이 십자가가 안 나오면 그 해석은 엉터리입니다. 어제 어떤 분이 저에게 따지기를 ‘왜 이 목사는 아프면 사람들이 기도 받는 것을 안 좋게 여기느냐?’ 그렇게 이야기 해요. 그래서 제가 이야기했지요. ‘반드시 하나님의 일은 그 결과가 성경과 일치되어야 합니다’라고 했어요.
듣고 보니 그 말이 맞거든요. 맞잖아요. 하나님의 일은 병이 잘 나았는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 열매가 성경에 일치되어야 되거든요. 가만히 듣고 있길래 한마디를 더 했지요. ‘어떤 것이 성경에 일치되는 것인가? 바로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병 낫기 위해서 무당 같은 그 예수쟁이에게 기도 받을 때에 ‘주여, 주의 고난에 동참케 하옵소서’ 라고 그렇게 기도를 받느냐, 이 말입니다.
여러분, 저한테 기도 한번 받아 볼래요? 이 성경의 주인공과 저자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직접 성경가지고 강의한 대목이 이대목이에요. 했을 때 그 내용으로 나오는 해답이 뭐냐? 자신이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그 고난가운데서 영광스럽게 부활해서 들어가는 거예요. 그것 외에 다른 것 나오면 전부 다 이단입니다.
‘어떻게 하면 병 낫고 어떻게 하면 복 받고’, 그게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겁니까? 예수님의 고난에 동참하려면 필이 뭐가 되어야 하느냐 하면, ‘자기부인’ ‘나 중심’을 버려야 됩니다. 제가 죽 이야기하는 중에 이렇게 했어요.
‘성경에 일치되는 것이 뭐냐,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에 대한 감사와 고마움, 구원해 주신 고마움, 특히 내가 나밖에 몰랐던 죄를 회개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지 그 외에는 아닙니다. 따라서 몸이 아파서 기도받을생각 하지 말고, 무당 같은 중매자를 찾지 말고 본인이 직접 주님한테 기도하라고.’
기도내용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주님, 제가 제 몸을 어떻게 관리해서 주께서 쓰시도록 해야 되겠습니까? 주께서 쓰실만한 몸으로 관리시켜 주옵소서’ 라고 그렇게 기도하시면 이제는 그 몸이 낫고 안 낫고 간에 그 과정자체가 이제는 더 이상 날 위한 몸이 아니고 주를 위해서 쓰여지는 것을 본인이 느낄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일입니다. 그렇게 하실 거죠?” 라고 물었어요.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을 했어요. 그래서 기도 안 받겠다고도 약속도 했고. 그렇게 약속을 했지만 그것은 인간의 약속이니까 두고 봐야 알겠습니다만. 오늘 본문 같은 경우에 문장은 간단합니다만 주님이 개입하면 신·구약 전체가 다 따라와요. 주안이 개입하면 신·구약 전체가 다 따라와서 주 안에 있다는 것은 신구약 전체의 내용이 F-킬라처럼 좍좍 뿌려서, 와, 냄새, 온 천지에 신·구약의 말씀냄새가 가득하게 퍼지는 거예요.
한 가지 예를 들게요.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는 말씀이 디모데전서에 나오지요. 이거 누가 지킵니까? 아무도 못 지키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 함께 있어서 주님께서 일을 벌리게 되면 어떤 황당한 일이 생기냐 하면, ‘주여, 저는 먹는 것 입는 것, 이것만 있으면 저는 감사합니다’라는 이런 황당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것을 저는 이렇게 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우리 속을 말씀천지로 만들어버린다.’ 아까 그 말씀을 무엇으로 비유했습니까? F-킬라.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이 내 영광 내 명예로 가득 찼던 이것을 F-킬라 냄새가 가득 넘치도록 할 때, 이것은 주님께서 여러분 속에 일하시고 계심입니다. 보통 어항은 금붕어를 키우지만 주께서 여러분을 어항으로 생각하고 주께서 여러분속에 말씀을 키운 거예요.
말씀이 동동 뜨게 만들어요. 아까 식혜 먹어 봤지요? 식혜에 뭐가 뜨던가요? 밥알이 뜨지요. 말씀이 여러분 속에 동동 떠서 “아, 이게 ‘좁은 길’이구나. 아, 이게 ‘두세사람도 나와 함께 있느니라’의 그 뜻이었구나. 아, 이것이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 뜻이었구나. 아, 이게 ‘남을 비판하지 말라’ 그 뜻이었구나.” 식혜에 밥 알갱이가 떠오르듯이 항상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사태와 사건을 만나면서 거기서 말씀이 동동 떠오르는 거예요.
세상에 나가서 여러 가지 일을 하면서도 만나는 여러 가지 일들을 통해서 ‘아, 내가 평소에 얼마나 돈을 사랑하는지 바로 이것이 일만악의 뿌리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식으로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융통성이 없어요. 자기말씀밖에 몰라요. 우리는 그것을 키우는 하나의 어항으로 사용하고. 세모든 네모든 어떻게 생겼든 관계없어요.
사람이 가난하다고 예수 잘 믿는 것이 아니에요. 부자라도 괜찮아요. 부자라도 말씀 떠오르고 가난해도 말씀 안 떠오르고 그래요. 중요한 것은 가난하냐 부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떠오르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 말씀을 제대로 해석한 주석 책이 제가 보기에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이 말씀의 내용이 뭔지 알아요? 서른 살 사시다가 돌아가셨습니까? 장수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80을 살아도 장수 안했다고 우기는 사람이 있어요. 약속이 없어요. 주가 없기 때문에 그런 욕심을 내는 거예요. 김 대중이는 아직도 살아 있는데, 왜 우리 어머니는 70도 못되어서 돌아가시게 했는가! 분명히 성경에 장수한다고 되어 있는데.
70은 80보다 적으니까 그것은 장수 못한 거잖아요. 그거? 장수 한 겁니다. 사고의 전환,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합니다. ‘땅에서 잘되고’ 라고 했지요. 사기 세 번 당했습니까? 네 번 안 당했으니까 잘 된 거예요. 제가 억지를 쓰는 것이 아니고 말장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성경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합니다.
감사가 나오는 인생보다 더 잘 된 인생 나와 보라고 하세요. 어떤 배우는 자존심상한다고 유서 써놓고 자살해서 죽었어요. 장자연인가 뭔가? 감사가 나오는 인생보다 더 잘 된 인생 나와 보라고 하세요. 어떤 사람도 평생 살아도 주님께 감사한 사람은 없었어요. 예수님 장수했습니까?
예수님이 서른 두해 살았다, 서른세해 살았다,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게 말하는데 서른 셋 사셨다 치고, 서른 세 살 살아도 완전히 엑기스입니다. 잘 사셨고 장수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그 전에 절벽에서 떠밀어서 죽이려고 한 경우들도 많았지만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그만큼 이라도 산 거예요. 만약에 주님이 150살까지 살았다고 하면 지금 우리는 150살 까지 살아보려고 애먹을 거예요.
만약에 주님이 150살 살았다면 142살 산 사람은 장수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 말씀 해석은 주님의 지혜가 있어야 이 모든 성경 말씀이 풀려요. 성경이 ‘땅에서 장수하고 잘된다’고 하니까 옆집에 불도닦는 사람이 90까지 살고 장수하니까 그놈의 불교신자를 이기는 식으로 해야, ‘불교신자 너는 90까지 장수했나? 우리엄마는 97이다.’ 이렇게 살아야 장수하는 것으로 확인하려 들어요.
제가 어느 설교시간에 했어요. 성도는 뭐가 없고? 원인이 없고 그 자체가 뭐밖에 없다? 결과밖에 없다. 무슨 결과? ‘주 안에.’ 오늘 다른 것 다 잊어버려도 이것 하나 기억하세요. 에프-킬라, 알갱이, 우리 속에 주님의 ‘장수하고 잘된다’는 말씀의 알갱이가 붕붕 떠 있어요. 몇 년 살든 관계없어요.
그것은 관계없고 열 살을 살든 스무살을 살든 30살다가 졸지에 죽든 간에 이미 그 사람은 잘된 것이고 장수하신 거예요. 뭘 더 욕심을 냅니까? 주님은 서른세살까지 살았는데. ‘주님, 제가 너무 적게 살았습니다. 제가 한 50까지는 살아야 되겠습니다.’ 이런 것을 안했어요.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이 대목을 지금 설명 안했습니다.
그것은 안하고 지금 하도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장수하고 잘 된다’는 이 대목을 가지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대목가지고 어떤 사람이 교회 나오다가 안 나오면 ‘거봐라. 졸지에 객사했잖아. 봐라. 그러니까 목사 말을 안 듣다가 저주를 받지. 목사는 말씀만 전하면서 장수하라고 하는데 목사 말 안 듣다가 죽었잖아. 저주 받았자. 집구석도 봐라. 꼬라지 좋다. 이혼하고 사기당하고 꼴 좋다. 이제부터 예수 믿고 부모를 섬겨야 된다’ 라고 이렇게 합니다.
여러분, 부모 잘 섬겨서 이 땅에서 세상적으로 잘되고 성공하는 것은 그것은 누구한테 그 이야기를 듣느냐 하면 국악인 김영임씨가 어버이날 늘 부르는 게 있어요. 회심곡, 그 가사보세요.
(회심곡중에서)
“억조창생 만민시주님네
이내 말씀 들어보소
이 세상에 사람밖에 또 있나요,
이 세상에 태어나 신 사람 사람마다,
홀로 절로 낳노라고 거들대며 우쭐대도
불법말씀 들어보면 사람마다 홀로 절로 아니 낳습니다.
제일에 석가여래 공덕받고
어머님전 살을 빌고 아버님전 뼈를 받고
일곱 칠성님전의 명을 받고, 제 석님전의 복을 빌어
석달만에 피를 모으고 여섯달만에 육신이 생겨
열달만삭을 고히 채워 이내 육신이 탄생을 하니
그 부모가 우릴 길러 낼제, 어떤 공력 드렸을까
진자리는 인자하신 어머님이 누웁시고
마른자리는 아기를 뉘며,
음식이라도 맛을 보고
쓰디 쓴것은 어머님이 잡수시고,
달디 단 것은 아기를 먹여
오육월이라 짧은 밤에 모기 빈대 각다귀 뜯을 세라,
곤곤하신 잠을 못다 주무시고,
다 떨어진 세살부채를 손에다 들고
왠갖 시름을 다 던지시고 허리둥실 날려주시며,
동지 섯달 설한풍에 백설이 펄펄 날리는데
그 자손이 추울세라 덮은데 덮어주고,
발치발치 눌러를 주시며 왼팔 왼젖을 물려놓고
양인양친이 그 자손의 엉둥 허릴 툭탁치며
사랑에 겨워서 하시는 말씀이
은자동아,금자동아 금 이로구나,
만첩청산의 보배동아 순지건곤의 일월 동아,
나라에는 충신동아, 부모님전효자동아,
동네방네위엄동아, 일가친척의 화목동아
둥글둥글 이 수박동아, 오색비단의 채색동아
채색비단의 오 색동아, 은을 주면 너를 사고,
금을 주면 너를 사 랴, 애지중지 기른 정을,
사람마다 부모은공 생각하면,
태산이라도 무겁지 않겠습니다.
아하아 아하아 아하하하 헤나네,
열의열 사십소사 나하하아 아하아.”
그 가사가 줄줄이 뭐냐하면 ‘부모한테 공경하면 나중에 극락가고 부모한테 공경안하면 이땅에서 복 없고 지질이 고생만 하다가 나중에 저주받는다’는 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진짜 어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한다’는 의미가 뭐냐? 만약에 이 말을 그냥 세상적인 윤리 도덕으로 본다면 이런 딜렘마에 빠져요.
교회 다니는 아가씨가 불도가 심한 시댁을 만나서 결혼하게 되었어요. 몰랐지요. 남편이 속였으니까. ‘결혼해도 네가 교회 나가게 해줄게’ 라고 해놓고는 결혼하고 나서는 입 딱 닦아 버렸죠. 그 아가씨는 에베소서 6장 1절을 가지고 고민에 빠졌어요. ‘부모를 공경하면 잘되고 장수하고’ 여기다 하나 더 집어넣었으면 좋겠어요. ‘자식이 잘되고 공부 잘하고’ 이것도 집어넣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따봉이죠. ‘학원 안다녀도 공부 잘하고’ 이런 것.
요새 부모한테는 애 공부가 최고 아닙니까? 그 새댁의 고민을 봅시다. 부모 말 듣고 교회를 안 나가면 그것이 공경인지, 부모 말을 거역하고 교회 나오는 것이 주안에서 공경인지, 도대체 주안에서 공경이 구체적이지 않으니까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그런데 해석은 반드시 뭐가 들어간다고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동등되시나 이땅에 오셨을 때 이 땅을 거치면서 뭘 받았습니까?
고난 받았지요. 예수님께서 이 땅을 거치면서 그냥 관광만 하시고 ‘경치 좋네’ 하시면서 그냥 가시면 뭐가 생기지 않습니까? 고난은 없었겠지요. 예수님께서 피자위에 있는 치즈처럼 녹아들어서 완전히 그들 삶속을 관통했지요. 관통하면서 받는 그게 뭡니까? 고난이잖아요. 예수님이 고난 받으면서 누구께 순종했습니까? 아버지하나님께 순종했지요?
제 말 맞지요? 그렇다면 ‘자녀들아, 주안에서 순종하라’ 하는 것은 혼자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누구와 함께 동행 한다? 주님이 함께 동행 하면서 그 자녀를 자신이 통과했던 길로 같이 데리고 가지요. 그게 무슨 길입니까? 좁은 길이지요. 좁은 길인데 여기서 공경이란 말이 무슨 뜻이냐? 공경이란 말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안 어려워요. 쉽습니다. 여기가 시내산입니다. 높으니까 여기에 구름이 산 할아버지가 구름모자 쓴 것처럼 구름이 걸쳐 있습니다. 이 구름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구름을 뚫고 모세가 올라갔습니다. 모세가 구름위로 올라가서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명이 뭐냐? 이 약속이 있는 계명입니다. ‘네가 부모를 공경하면 잘 된다’ 할 이 때의 부모가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으로 인하여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말미암아 고난받은 사람입니다.
여러분, 고난 받았다는 것은 구약에서 ‘고난 받았다’고 할 경우에 시편에 보면 ‘광야’를 통과했던 것을 말합니다. 광야를 통과한 거예요. 옛날에 철딱서니 없는 이 자식들이 무엇을 경험 못했는가 하면, 선배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광야생활 했던 것을 거쳐서 후손들이 비로소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에 오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여기 어린이들이 참 많은데 어떤 어린이들이건 간에 ‘엄마, 여기 교회 맞지? 우린 의존교회다’ 이렇게 교회 온 사람 누가 있습니까? 엄마가 ‘이교회로 나와. 이 동네에서 교회라고는 이것뿐이야.’ 이래서 왔잖아요. 엄마가 데리고 오니까 왔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애들이 자꾸 묻지요. ‘왜 안 되는데? 왜 다른 교회는 안 되는데?’
‘나중에 네가 어른이 되면 알려줄게’라고 하면서 나중에 ‘내가 이 교회 저 교회 다 가봤지만 말씀이 없고 복음이 없고…’ 하는 그 자체가 뭡니까?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무엇 때문에 비롯된 고난입니까? 광야는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체험시키는 체험교육입니다.
치즈가 피자 속에 녹아지듯이, 아무것도 없는데 그저 말씀 하나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말씀 따라 살았던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의존교회에 온 거예요. 그러면 의존교회가 그냥 생긴 것이 아니고 앞에 뭐가 있었다? 부모님들의 말씀중심으로 살았던 고난이 있을게 아닙니까? 그 과정을 신약에 오면 누가 하느냐? 바로 예수님께서 그대로 복사를 해서 가는 거예요.
처음에 예수님께서 40일 광야의 시험을 받았지요?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마지막 고난의 절정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쓴잔을 마실거냐, 말거냐'를 결정했던 십자가잖아요.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의 버림받는 것 없으면 천국문이 열리지 않습니다. 계속 닫혀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고난의 길을 가시고 계속 십자가의 길로 갔기 때문에 펑, 하고 뭐가 생겼느냐?
벽에 구멍 뚫리듯이 뚫렸어요. 이 의존교회를 바깥에서 보면 여기는 창문이 있어서 시커멓고 여기만 불이 켜져 있어요. ‘어? 불이 켜져 있네. 아하, 누가 오셨구나’ 하고 알지요. 천국과 이 지옥 같은 세상에 구멍은 오직 십자가만 구멍이 있어요. 이렇습니다. 이게 만약 벽인데 제가 십자가모습으로 펑 하고 뚫고 나가버리면 여기에 뭐가 남습니까?
제가 통과한 흔적이 구멍으로 뚫리지요? 이런 것 만화책에 많이 안 나옵니까? 사람이 벽으로 넘어지면 벽돌담은 그냥 있는데 넘어진 그 흔적이 윤곽 따라 그 대로 남고 사람은 사라지고 안보이잖아요. 예수님이 꽈당 하고 부딪히니까 그게 구멍이 되어서 유일하게 숨통이 트였다 이 말이죠.
그래서 십계명에서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뭐냐 하면 이 십계명을 실천한 장소가 광야가 아니고 어디냐? 나중에 광야생활 끝나고 난 뒤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이 십계명을 회상하면서 기억하면서 십계명을 지켜야 될 후손들에게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너희들이 홍해를 체험하지 않았지만 부모의 말을 순종하는 그것이 계시의 전달이고 약속사건의 되풀이고 반복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반복은 어떻게 하는가? 아까 만화 이야기 다시 합시다. 여기가 벽돌벽이고 그 뒤가 공간인데 예수님이 십자가지고 그 뒤로 넘어가면 그 십자가구멍이 열린다는 말이죠.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내가 다 이루었다 함이 아니고 어찌하였든지 이 십자가속으로 들어가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고 합니다.
주께서 어디로 데려간다? 주께서 자기가 통과했던 십자가로 데려간다는 말입니다. 벧전 2장 21절에 뭡니까? ‘그분이 십자가를 진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심이다’라고. 누가 당깁니까? 우리 속에 있는 에프-킬러, 말씀 때문에 죽고 말씀 때문에 살게 하는 거예요.
그것은 약속이 개입된 현실, 아까 처음에 이야기한 약속이 없는 현실, 신곡시장의 사람들, 돈만 아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이 개입된 현실입니다. 장사를 하더라도 범사에 감사하고 고맙고, ‘세상에 이것도 잘되는 거다. 내가 지금 사는 것도 장수한거야’ 이렇게 항상 하나님의 약속이 나오고 발산되는 그런 인생을 살라는 것이 주안에서 에프킬러의 삶이다 이 말이죠.
지금 제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그 때 그 부모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예수님께서 통과한 것으로 보는데, 부모들이 고난을 받으면서 약속을 지나면서 그들이 느낀 것은, 제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신명기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사는구나’ 그래 되는 거예요.
사실은 그 때 광야에서 하늘에서 말씀이 떨어진 것이 아니고 만나가 떨어졌어요. 만나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만나로 산다’ 이렇게 해야 맞는데 그것이 아니고 ‘사람은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으로 산다’ 해서 약속의 땅에 가면 뭐가 끊어지고? 만나가 스톱 되어요. 더 이상 만나가 오지 않아요. 요새 비 안오듯이.
만나는 안 오고 만나대신 뭐가 주어졌습니까? 모세를 통해서 십계명이 주어지는 거예요. 그러면 십계명에서 뭐가 쏟아집니까? 옛날에 광야에서 먹고 살았던 생명의 떡이 이제는 십계명을 통해서 쏟아진다 이 말이죠. 그럴 때 쏟아지게 하는 그 가정목사의 역할을 누가 해야 되는가? 광야를 경험했던 부모가 해야 되고 그 자식이 부모가 되면 다음 자식에게 또 전해서 전달 전달 되는 겁니다.
이렇게 전달 되는데 여기서 오늘 강의중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렇게 전달될 때 후손들이 그것을 어떻게 그게 말씀인지를 이해하는가? 크게 쓰겠습니다. 따라 해보세요. ‘차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부모들에게 말씀을 알려줄 때 ‘말씀 여기 있다. 받으세요.’ ‘예’ 이거 아닙니다. 말씀에 대해서는 극대극으로 말씀에 대해서 도전하고 ‘나는 말씀 싫어. 말씀 저리가’ 라는 자기의 더러운 본심을 극도로 보여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요.
그게 뭐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했음에도 불구하고 뭐가 없습니까? 물이 없어요. 누가 원망 안 해요. 다 원망하지. 그리고 고기가 먹고 싶은데 고기가 없어요. 고기를 찾을 길이 없어요. 원망하죠. 물없어서 원망하고 고기 없어서 원망하고 양식없어서 원망하고 거기서 나올 것은 뭡니까? 원망하는 백성과 그들을 용납하시고 만나를 주시는 하나님, 그 둘 사이를 뭐라고 합니까? ‘차이’죠.
이 차이가 뭘 낳았다? 우리 주님의 고난을 낳았지요? 그러면 주님의 십자가를 뜯어보면 뭐가 나와요? 양편으로 갈라진 것이 나오지요. 한쪽은 하나님의 너무나 너그러우심과 또 한쪽은 그 너그러우심을 이해 못하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께 달려들고 원망하는 인간의 욕심이 나오겠지요. 그래서 다윗은 말했지요. ‘주께서 원하는 것은 바치는 것도 아니고 드리는 것도 아니고’ 뭐다? ‘모친의 죄중에서 태어난 이 더러운 상한 심령을 하나님이 받으신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이 죄를 사하죠. 십자가를 뜯어보면 거기에 가해자가 있고 피해자가 있어요. 피해자가 누구냐? 예수님이고 가해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오늘날 우리 아닙니까? 그래서 ‘화로다 망하게 되었도다’ 하잖아요. 이사야가. 그리고 ‘주여, 나는 죄인중에 괴수입니다’라고 그것은 누가 이야기합니까? 이미 구원받은 사도바울이 디모데전서 1장에서 이야기하잖아요.
십자가를 뜯어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여, 이것은 장수도 아닙니다. 내 나이 90도 안되었는데 이게 무슨 장수입니까?’ 90된 노인한테 물어보세요. ‘90까지 오래 살았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미쳤나? 내가 아브라함만큼 살아야지.’ 이러고 있어요. 우리 장인어른 85살까지 사셨는데 장담했어요. ‘나는 200살까지 산다’고. 왜 성경에 ‘장수한다’고 약속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200살이 장수라는 것이 성경에 어디에 나옵니까? 그러면 스데반 집사는 저주받았네요. 스데반 집사는 인생 망쳤네요. 스데반은 얼마나 부모한테 애를 먹였는지 저주받았으면 돌에 맞아 죽었잖아요. 예수님께서 천국 문에서 스데반 집사 지옥가라고 발길로 찼습니까? 그것이 아니고 ‘아이고, 내 새끼야.’ 하면서 일어서서 스데반 집사를 반겼습니다.
스데반 집사를 가지고 다시 에베소서 6장을 뜯어봅시다. 나오지요. 그게 뭡니까? 돌에 맞아 죽어도 장수한 것이고 돌에 맞아 죽었어도 일 잘 풀린 거예요. 왜? 감사가 나왔어요. 감사 없는 인생은 살아도 산게 아닙니다. 그냥 자살 직전이고 비록 병원에 있어도 감사가 나오면 그것은 제대로 산다고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목사님, 그 감사가 어떻게 나옵니까?’ 따라해 보세요. ‘차이!’ 차이가 감사를 만들어요. 사람이 자기가 수준을 높여 놓았으니까 ‘주여, 적어도 이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니까 차이를 못 느끼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진짜 저주받아야 되고 진노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인간을 주께서 사랑하신 그 차이를 안다면….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 하면 내가 죄인인 것을 아는 순간 그것보다 더 즐거운 순간이 없습니다. 제 경험상도 그렇고 성경도 그래요. 가장 기쁠때가 언제냐? ‘나는 이유도 따질 것이 없이 무조건 죄인이야. 무조건.’ 그것도 웃으면서 ‘나는 죄인이야’ 라는 이것보다 더 신나는 일이 없어요.
자꾸 반대로 생각하니까. ‘나는 의인이기 때문에 저런 벌을 받아서는 안 되고 내 일은 잘 풀려야 되고 하는 일마다 다 잘 응답되어야 하고 …’ 자꾸 자기를 의인으로 생각하니까 그것이 마음의 무거운 짐이 되어서 작은 것, 어지간한 것에는 감사가 안돼요. ‘주여, 지금 이것도 나에게 복이라고 주시는 겁니까?’ 이렇게 퉁기지 감사가 안돼요.
그러나 어느 순간에 ‘나는 무조건 죄인이야. 날 때부터 죄인이야’ 하는 순간에는 ‘모든 것이 감사하고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고 ‘이것이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니라’ 라고 데살로니가후서 5장 16절, 17절 ,18절 5·16! 5·17! 5·18! 그렇게 태평하게 사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완전히 거지 나사로 아닙니까? ‘개야 핥아라. 그래도 나는 천당간다.’
얼마나 자기를 낮추었으면 얼마나 자기를 십자가에 죽기까지 낮추었으면 모든 것이 감사하겠어요. 모든 것이. 남편이 있다가 ‘어이, 이혼하자.’ 그러면 웃으면서 ‘그래. 이혼하자.’ 얼마나 감사해요. 죄인이 이혼하면 어떻고 뭐하면 어때요. 아무 의미 없잖아요. ‘도장 찍으려면 네가 내 대신 다 찍어라. 네 마음대로 해라.’
‘엄마! 이번에 또 꼴찌 했어.’ ‘잘했어. 참 잘한거야.’ 그 때 애들이 뭐라 합니까? ‘정말 미쳤어.’(♬) 성경에 사랑에 미쳤다고 하잖아요. ‘내가 사랑에 미쳤다. 내가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고 강도의 위험과 도적의 위험과 내 안에 가시가 있다. 그래도 내가 항상 감사하는 이유는 내가 이렇게 약한대도 불구하고 구원받았다는 사실,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바로 복음 전하는 능력자의 능력입니다.
차이에서 오는 능력입니다. 주님과 나하고의 비교, 그 차이에서. 그 차이를 유지하는 것이 뭐냐? 바로 계명이고 그게 성경말씀입니다.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도전입니다. 왜 우리가 평소에 먹을까, 입을까, 그런 것만 생각한다는 것을 뻔히 아시고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그것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할 말이 없게 만들어요. ‘그거 딱 내 이야기네. 주여, 우리가 그것 말고 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것 말고 할 것이 뭐가 있습니까? 애들 학원 보내는 것, 다 먹는 것 입는 것 때문에 하지 ‘얘야, 너 학원가서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이런 부모 없어요. 그렇지요? 보모님들이 우리가 학원갈 때 ‘그 나라의 의를 구하라’고 하던가요?
‘공부 잘해라. 공부 못하면 너 빌어먹는다.’ 이렇게 하잖아요. ‘너 공부 열심히 해야지. 안그러면 나처럼 되는데 너 또 부모 뒤 따라오면 안 돼. 너는 성공해야 돼.’ 그래놓고는 뒤에 하는 말이 ‘부모를 공경해라. 그래야 잘산다.’ 그 말이 잘못된 말이라니까요. 차이를 자녀에게 심어주세요. 그게 공경입니다. 자녀가 힘들어하거든 이렇게 하세요.
‘나는 너 보다 더 힘이 들었었다. 내가 클 때에는 휴대폰도 없었고, 김일 레스링할때도 집에 텔레비전 없어서 동네에서 모여서 봤다. 그래도 잘만 살았다. 라면 처음 나올 때 라면에 만족해서 눈물 흘렸다. 컵라면 말고 짬뽕라면 사달라는 그런 소리 하지 마라. 그냥 아무거나 처먹어. 나는 그런 것도 없었어.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었다.’
‘휴대폰 사 주세요. 우리 반에서 휴대폰 없는 사람 나밖에 없어요.’ ‘부모는 휴대폰 없다.’ ‘그거는 엄마 세대지요. 요즘 세상은 달라요.’ 이러지요. 휴대폰 사주세요. 사주면서도 애들에게 애를 먹이면서 휴대폰을 사줄 때 차이를 심어줘서 휴대폰 볼 때 마다 계명이 떠오르게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휴대폰도 없는데 나에게 이런 것이 있어서 참 감사하다’ 이렇게 되도록. 계명을 심어줘서 사주세요. 말씀을 사주세요. 휴대폰을 사주지 마시고. 이것 없고 있고가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개입된 현실은 휴대폰이 있고 없고 그런 것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앞에 뭐 보고 넘어간다? 피보고 넘어가는 거예요.
그 피가 치즈처럼 녹아져서 예수님의 십자가아픔이 속에 들어오는 거예요. 십자가아픔도 모르는데 무슨 피에 대해서 관심을 갖겠습니까? 만약에 아픔을 모르고 피를 보면 ‘하나님이 참 고마우시네’ 하고는 우리끼리 살게 됩니다. 주님의 아픔이 들어오면 ‘역시 내 행함도 아니고 내 의도 아니고 주님의 아픔이 주님의 그 십자가 고난, 그 찔리심으로 인하여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라고 주님과 나와의 차이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말씀 하나하나는 ‘공경한다’를 보면서 ‘이제 나 공경하니까 볼 필요 없다’ 그게 아니라 매일 같이 우리는 차이에 의해서 우리는 어느 쪽? 성경과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음을 우리로 하여금 또 깨우치게 만들죠. 히브리서 4장을 봅시다. 히브리서 4장 12,13절을 읽어보세요.
히브리서 4:12,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한목사님이 읽어보세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어떤 날선 검보다도 예리하여’ 말씀이 곧 뭐라고 했습니까? ‘검’이죠. 검과 도의 차이점이 있다고들 하는데 그런 것은 다 치우고 하여튼 우리를 찌르지요. 그 다음에 계속 읽어보세요.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다 찔러 쪼개고 남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남는 것은 없지요. 왜? 다 찔러 쪼개버렸는데 남는 것이 없지요. 자아가 없지요. 자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지요.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아멘!
제과점에 가면 반죽하는 기계 말고 으깨는 기계가 있어요. 반죽을 집어넣고 모터를 돌리면 그 안에 들어 있는 땅콩이고 뭐가 다 으깨지잖아요. 말씀 자체에 뭐가 달려있다? 칼날, 면도날이 달려 있어서 말씀이 들어와서 우리를 돌려버리면 모든 것이 산산조각 나서 ‘이것은 내 것, 이것은 내 것’ 하는 것이 다 깨져서 묽은 죽처럼 되어버리죠.
깨져서 죽이 되는데 그 죽이 뭐냐? 하나의 에프-킬러처럼 하나의 말씀의 덩어리가 되는 거예요. ‘아하, 말씀이 다녀갔구나. 얼마나 감사한지. 나는 의인인지 알았더니 나는 죄인 맞구나.’ 사람이 ‘죄인 맞구나’ 하는 그 순간부터 내가 지금껏 살아 온 것도 장수고 내가 잘된 것도 다 은혜이며 내 자식도 전부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고 모든 것이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다는 말이죠.
몇 초 동안? 3초 동안. 이게 더 어렵지 싶어요. 왜 사람이 이것이 오래 안 가느냐 하면 옛날 광야 때와 똑같아요. 물 마실 때 좋다고 찬양했잖아요. 현재 이 사건 해결되었다고 좋다고 하지만 그 다음 사건 나오면 또 우리는 화냅니다. 계속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만드는 사건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어요.
‘김 순애~!’ ‘예~!’ 변학도 앞에서 기생들이 부름 받고 나오듯이 우리가 죽을 때까지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속의 더러운 것들을 드러낼 수 있는 준비된 사건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범사에 무슨 뜻이 있어서 그래요. 그래서 죽 통과하면서 갈수록 우리는 주의 은혜로 우리 앞에 있는 십자가의 피로, 문설주의 그 피로 말미암아 공짜로 우리가 의인되고 구원받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부모님들이 애를 키울 때에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일곱 살만 되면 알아서 할 테니까 이제 고민 끝이겠지’라고 합니다. 일곱 살을 지낸 부모들은 다 압니다. 점점 더 암세포가 커졌다는 사실. 이제는 돈이 더 들어간다는 사실. 어릴 때는 분유를 먹여서 돈이 적게 들었지요. 이제는 밥을 먹으면서 더욱 문제가 커진다는 사실.
장가보내면 끝나겠지. 장가든 다음에는 며느리, 새 식구가 들어와서 무슨 더 큰일로 난리를 피울지 모릅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무자식이 상팔자라는 생각도 듭니다. 부모가 보여줄 것은 뭐냐 하면 부모 내부에 십자가고난이 담겨 있으면 자식은 부모의 고난을 통해서 자기의 고난과 더불어서 함께 의사소통이 될 때 공개되지 말래도 공개가 됩니다.
‘우리 아버지가 나한테 돈 준 것은 없지만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십자가를 알려줬다. 아버지는 체험을 했어. 나는 아직 체험을 못했지만 아마 아버지 가는 길이 내 길이고 주님 가신 길이지.’ 이렇게 공개 안 될 수가 없게 만드는 거예요. 여기서 조건은 뭡니까? 단, 그 자식이 성령을 받아야 된다는 것. 또 조건은 뭐냐? 아버지가 성령 받아야 된다는 것.
그러니까 결국 이 말씀은 누구한테 해당된다? 주 안에 있는 사람끼리만 해당되고 둘 중의 누구라도 주 밖에 나가면 공개하지 마세요. 아까 했지요. 주 밖에 있으면 뭐라고요? 하나님의 저주와 진노가 머물러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도가 심한 시부모에게 어떻게 해야 됩니까? ‘어머니, 저주 받습니다.’ 이렇게 해 줘야 부모 공경이죠. 그게 진정한 부모 공경이에요.
물로 말로 대놓고 그러면 좀 그렇지요. 그 대신 ‘어머니, 어머니는 절에 가세요. 저는 교회 가렵니다.’ 이런 말로 대신 할 수 있잖아요. ‘어머니 가는 길과 내 길이 달라요. 어머니는 차이를 몰라요. 하나님과 인간(죄인)의 차이를 모르지만 저는 차이를 알아요. 그래서 저는 주님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자기가 만든 신을 섬기기 때문에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날로 좁혀지지요.
요즘의 한국교회와 똑같잖아요. 성화론이라고 해서. 점점 더 도사가 돼요. 하나님과의 간격이 점점 더 좁혀져요. 좁혀지니까 자기가 신이에요. ‘나는 기도하는 은사 있다. 나를 건드리면 저주받는다. 나는 주의 사자다.’ 주의 사자는 천사를 가지고 주의사자라고 하고 목사를 자기고 주의 사자라고 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 목사 부인을 사모님이라고 했는지 참, 제가 농담삼아 제 아내에게 이런 소리 했어요.
‘여보, 당신 집사 할래, 안할래?’ ‘안한다. 사모님이 더 좋은데 뭐하려고 집사 하나?’ 언제부터 집사보다 사모가 더 높아졌는지 나는 도대체 모르겠어요. 누가 그렇게 정했는지 기가 찰 노릇입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집사가 되었든 사모가 되었든 죽음의 사자가 뭐 보고 넘어간다? 죽음의 사자는 융통성이 하나도 없어요. 사모를 했는지 그런 것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피 보고 넘어가요.
그 피가 예수님의 십자가고난이고 성령이 우리 속에 십자가고난을 알려줄 때, 그러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예수님이 고난을 알려줄 때, 주님과 우리는 의사소통이 되면서, 부모로 등장할 때, 그 예수 믿는 부모 속에서 동일한 십자가고난을 볼 때 우리는 그 부모를 하나님의 계시의 운반자, 계시의 매개체라고 여기고 그 부모에게 주님 대하듯이 잘 공경하는 거예요.
부모를 위하는 것은, 부모가 간직하고 있는 그 귀한 십자가고난이 증거 되기 위해서 부모에게 용돈 주고 도와주고 하시는 겁니다. 오늘 보니까 저쪽에 늘 앉으셨던 부모님 몇분이 오늘 아프신지 오늘 강의에 안 보이는데, 오늘 이 중요한 소리를 들었으면 참 좋았을 것인데 하여튼 그것도 사건입니다. 혹시 오늘 노인정에 놀러 가셨는지.
정리하고 마치겠습니다. 차이입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 기도가 엉망이고 주님의 기도가 옳다는 것, 그 차이를 느끼게 하고, 말씀이 들어와서 우리 가운데서 말씀이 떠오르도록 우리를 어항처럼 다룹니다. ‘저 사람을 용서 못하겠어.’ 하는 순간 갑자기 ‘용서하되 일곱 번 용서하라’는 말씀이 들어와서 ‘아하, 내가 참 얼마나 이기적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해서 차이를 느끼게 합니다.
그 차이가 있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그 차이를 십자가로 메꾼다는 그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주님의 공로만 증거하고 나는 그냥 죄인에 머물지요. 그렇게 주안에 있을 때 우리는 주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수 있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 안에 있다는 사실, 그 안에 있어서 주를 믿는다는 사실, 주안에 있어서 우리는 죽고 그리스도가 사신다는, 말씀이 살아 있고 주님이 살아 있고 우리는 죄로 말미암아 죽는자가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하나의 현실이기에 다른 현실 생각지 말고 광야 때처럼 주께서 동행하시는 현실, 우리의 소망을 하늘에 둘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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