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을 모두 보고, 솔직히 어느 관점에 초점을 맞춰야 할지 선뜻 결정할 수 없었다. '종교(신) 아래 인간'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자명하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 탓이다. 이런 생각이 든 가장 큰 이유는 위화감
때문이다. 두 작품에서 어머니(알암 엄마, 인애)는 종교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인다. 자식을 잃은 슬픔을 극복한 것도
종교, 생명이나 정신을 앗아간 것도 종교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이 <벌레이야기>인 이유는 '종교 아래 인간'은 무력한
벌레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영화 <밀양(Secret Sunshine)>의 경우, '작은 햇살에도 그분의 뜻이 깃들어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제목으로 사실상 '종교 아래 인간'을 나타내고 있다. 작은 햇살 한 조각에도 그분의 뜻이 깃들어 있다면
거의 모든 것에 깃들어있다는 뜻이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종교 아래 인간'
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구도 속에서 인간을 바라보고 생각하자 위화감이 생겨났다. 과연 '종교 아래 인간'인가.
아이를 죽인 것은 인간, 자식의 죽음에 슬퍼하는 하는 것도 인간. 종교를 권한 인간, 종교를 받아들인 인간, 신에게 용서받은
인간 … 처음부터 끝까지 '인간'의 이야기이다. 종교가 인간의 삶에 크나큰 영향은 미쳤으나 인간이 주(主)가 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종교는 그것을 전파하고 이야기하는 것이 인간인 이상 다른 의미가 부여될 수는 없다. 그분의 말씀을 인간이
전하는 순간 그 의미는 신에서 인간으로 퇴색된다.
영화 <밀양>에서 인애가 신에게 대항하는 모습을 보인 것은 정말로 신에게 대항하기 위함이 아니다. 인애는 아이가 죽은
충격과 범인의 온화한 태도를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그 충격으로 인해 정신이 붕괴된다. 신애가 보였던 이상행동은
정신의 붕괴를 막기 위한 방어기제로써 나타난 것이다. 따라서 신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행한 행동이라고 볼 수 없다. 신애
에게는 이미 그럴 만한 정신이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범인의 경우도 동일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범인은 살인을 하려던 것이 아니라 유괴를 통해 금품을 얻어내려고 했다.
즉, 살인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금품을 얻기 위해서는 살인을 저지를 수 밖에 없다. 자신의 존재를 알고 있는
아이를 함부로 놓아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범인이 원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안위를 위해 살인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죄책감과 자책감에서 자유로울리 없다. 어머니들이 그러하였듯 그도 종교에 몸과 정신을 맡길 정도로 구석에
몰려있었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마음이 전적으로 같을 수는 없지만 비슷한 상황이라고 여길 수 있다. 문제는 범인이
중교를 통해 용서를 받았다는 것인데, 이 또한 그러한 욕망에서 기인한 것이다. 종교를 믿으면서 자신의 죄를 알았고, 그것을
뇌우치려 했다. 하지만 혼자서 뇌우친다고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용서가 수반되어야 한다. 그 용서를 범인은 갈망했고 종교는
그 갈망을 들어주었다, 인간의 손을 빌려서. 종교에서 용서는 높은 자리에 위치해 있다. 신애에게도 범인을 용서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하고, 면회를 하고 신애가 이상해지자 용서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탓이라고 여긴다. 그만큼 용서라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러한 용서를 인간이 신의 이름을 빌려 행했다. 마음 속에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행한 것이다. 이것은 신애의 존재를 박탈하는 동시에 자신을 신에 가까운 위치로 격상시키는 행위이다. 그러한
의도가 없이 순수하게 구원을 위하여 행했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살펴보니, '종교 아래 인간'이 아니라 '인간 안에 종교'로 느껴지게 되었다. 종교가 인간을 휘두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종교를 휘두르는 것이다, 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