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전에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 새 식구가 되었다.
강아지 이빨이 자라면서 어찌나 가족들 손가락이며 발가락을 물어대는 통에
강아지 껌도 좀 사고, 맛있는 저녁거리도 사야지…하고 남편과 함께 중동에 있는
홈플러스를 찾았다.
옥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남편은 나의 어깨에 손을 다정히 얹었다. 그리곤 함께 쇼핑 할 생각을 하니까
마냥 즐겁기만 하다는 듯 너무나도 다정한 애정표시를 했다.
"
난 당신과 함께 나란~히 이렇게 쇼핑 오는 게~ 어째서 이리도 기분이 좋은지~ 참말로 모르겄다~ 참말이다~~~"
남편은 이런 말을 하며 얼굴 가~득 행복한 웃음을 날렸다.
근데 막상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 입구로 가면서, 줄지어 서있는 카트를 보는 순간,
'아차! 동전이 없네!' 싶었다.
잠겨져 있는 카트 안에 동전 100원을 넣어야 카트를 사용할 수 있는데...
그러나 잔 꾀로 말하면 사막에 가서도 살 수 있다고 평소 자부해왔던 나였기에,
‘안내직원에게 부탁하면 열쇠로 열어주겠지’라고 편안히 생각하면서 난
열쇠를 주렁주렁 허리에 차고 입구에 서 있는 안내직원에게 다가갔다.
순간, 번개처럼 날아와서 내 앞을 짠! 하고 가로막은 남편,
"100원짜리 동전 또 안 갖고 왔나?" 하며 눈꼬리가 쭉 찢어졌다.
뭔가가 또 다시 시작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에 주눅이 들어
"응, 카드만 챙겨오고 동전은 못 챙겨왔네." 내 목소리가 순간 쪼그라들었다.
"머! 멋이라고?”
내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홈플러스안에 하늘을 찌르는 고함소리가 널리 널리 울려 퍼졌다.
“당신 대체 와 그라노? 동전 100원이 없어가지고 이게 무슨 짓이고 진짜?
에에이~ 참내야! 에에에에이~~~~~"
“……………………………………”
사람들 많은 데서 어떻게든 후딱 남편을 달래야지 싶어, 난 무척 성이 나 있는 남편에게
"안내원에게 얘기하면 열어줘~. 열쇠 차고 있잖아" 하고 달랬다.
내 대답을 들은 남편, 마치 그 말이 더더욱 몹시 신경질 난다는 듯, 얼굴색이 푸르락 붉으락 해가지고 목소리를 한층 더 높였다.
"아! 구차하게 직원한테까지 머 그런 부탁을 해! 얼렁 현금 인출해서 동전이나 바꿔와!
얼렁얼렁!! 이 사람이 어디다가 정신을 쏟고 다니노 어이? 이게 보통 일이 아이다. 보통 일이 아니여~~”
“…………..”
뭐가 그렇게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건지,
아까의 다정하고 여유로웠던 남편의 모습은 천년 묵은 여우가 꼬리 감추듯 순식간에 사라지고, 전혀 생판 딴 아저씨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일요일이라서 엄청 많던 카트들이 순식간에 동날 정도로 사람이 북적이는 곳에서
꼴랑 100원짜리 때문에 남편한테 꾸지람을 듣고 있으려니 정말로 이건 '참을 수 없는 시츄에이숀'이었다.
일단은 위기를 모면하려니 ‘내가 참자, 내가 참아’ 하면서
성질 더럽게 못된 남편이 시키는 대로,
현금 인출기로 쌩~~ 달려가서 지폐 뽑고,
안내데스크로 냉큼 가설랑 또 동전으로 바꾸고,
체력장 100미터 달리기보다 더 빨리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결국
귀한 100원짜리 동전을 카트에 밀어 넣었다.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얼마든지 여유롭고 부드러운 말로 할 수 있을 텐데...
애교로, 예쁜 얼굴을 무기로 집안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내 친구 경숙이!
경숙이 남편이라면 이때 어떻게 했을까?
아무리 화가 났더라도 이렇게 했겠지...
"당신 오늘도 동전 갖고 오는 거 잊어 묵었구나~. 좀 잘 챙기지 그랬어~.
담부터는 미리미리 챙기면 너무 좋겠당~ 괜찮아 괜찮아~~"
분명 이렇게 일절만 아름답게 부르고 끝냈겠지...
근데 같은 경상도 남편이라도 이렇게나 다르다니...
경숙이 남편은 경숙이보다 두 살이나 아래라서 그런지 항상 경숙이 말도 잘 듣고,
경숙이 목소리가 담장을 넘으면 넘었지 그 남편목소리가
담장 밖으로 넘어가는 일은 사전에 절대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먹은 성질인지 내 남편은 화만 났다 하면
그 차고 넘치는 씩씩한 기상이 하늘을 높이높이 찌른다.
"난 당신과 함께 나란~히 이렇게 쇼핑 오는 기 우째 기분이 이리 좋은지 모르겄당~
참말이당~" 이렇게 살랑거리며 헤픈 웃음을 한없이 내게 날려주던 방금 전의 남편은
대체하늘로 솟았나, 땅으로 꺼졌나?
평소엔 다정한 듯 하다가도, 화만 났다 하면 사람이 순식간에 돌변하는 게
어제 오늘만의 일은 아닌지라, 옛날 일들까지 모조리 머릿속에 오버랩되면서
저런 남자와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 생각을 하니 한심해서 눈물이 다 나왔다.
그때 나를 흘깃 쳐다본 남편, 되레 적반하장이다.
아직도 자기 화가 안 풀렸는데, 내가 눈물까지 보이니까
이 황당한 시츄에이숀을 어찌처리해야 될 지 모르겠다는 듯
카트를 몰고 쌩~~~ 하고 앞서 가 버렸다.
카트 보관소에서 고작 5미터밖에 안 되는 개 껌 파는 곳까지 10초면 올 거리를
장장 20분이 넘게 걸려서 도착했다.
아무 소리 없이 둘이서 개 껌만 이리 만지작 저리 만지작 거리다가
아무리 생각해도 성질이 나서 안되겠다.
100원짜리로 불거진 이 기이하고 엄청나게 무거운 침묵을 깨고 내가 말했다.
“돈 백 원 안 갖고 왔다고 이 난리를 피워야겠어? 돈 백 원짜리 하나 때문에???
그냥 집에나 가, 이런 기분으로 무슨 쇼핑을 해?”
하고 내가 시비를 걸었다.
그 말에 또다시 눈을 쪽 찢으며 날 째려보던 남편,
정말로 씽씽 바람소리를 내고서는 매장 밖으로 아예 나가버렸다.
평소엔 저 혼자 성내고 저 혼자 또 금방 사과하고 그렇게라도 하던 사람이,
이번엔 사과한마디 없이 바람을 시원하게 가르며 나가니,
뒤에 남은 난 진짜 멍~하니 황당하기만 했다.
집도 먼데 남편이 저 혼자 갔다 생각하니 갑자기 오기가 생겼다.
개 껌 하나 사서 카트에 툭! 던져 넣고 정반대 쪽에 있는 식료품점으로
총알같이 쌩~ 순간이동을 했다.
물만두도 사고, 돼지고기 양념불고기도 사고, 오늘따라 세일 마지막 날이라서
원플러스원 제품이 왜 그렇게 많은지 이것저것 생각 없이 막 퍼 담았다.
여자들이 스트레스 받을 때 쇼핑하면서 푼다더니 맞는 말인가 보다.
쇼핑봉지에 담으면 대여섯 봉지 족히 될 거 같았다.
들고 갈 일, 전혀 걱정도 되지 않았다.
사람이 오기가 받치니까 쌀 가마니라도 지고 못 가랴.
혼자서 차를 타고 집에 돌아갔을 남편 보란 듯이,
이렇게 무겁고 엄청나게 많은 짐을 들고도 쟌다르크처럼 위풍당당~하게 집에 돌아가야지
하고 벼르며 카운터 앞에 순서를 기다리고 서 있는데
누군가 옆으로 검은 그림자처럼 스으윽~~ 다가왔다.
“많이 샀나?…”
아까 바람을 가르며 혈기 충만해서 나갔던 남편이 다시 돌아와
한결 나긋나긋~ 순둥이같은 얼굴을 하고 내 옆에 서 있는 게 아닌가.
“나가서 담배한대 붓고, 당신 데리고 갈라고 밖에서 여~~~~~태 기다렸다.
내가 간 줄 알았을 건데, 갈 때 어떻게 들고 갈라고 이리 많이 샀나~.
아따 이여자 통크데이~~”
제풀로 민망했던지 좀 전에 뭔 일 있었냐는 듯
카트에 있는 물건을 실없이 이리 들었다 저리 내려놨다 한다.
그 실없는 짓이 하도 웃겨서 그냥 맥없이 웃음을 웃고 말았다.
내가 웃으니 내 눈치를 살살 보던 남편도 덩달아 웃었다.
“이자부터는 화 안내야 할 건데, 나도 성질을 못 참아서 탈이다.”
“그래~ 이제 제발 화 좀 내지 마라. 애기같이...
앞으로도 계속 이러면 진짜로 같이 안 살 거다”
“오케 오케! 인자부터 화 안내고 잘할게. 당신도 백 원짜리 잘 챙겨 오고~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느 새 처음으로 돌아와 있는 카멜레온! 에휴~~~
SBS 라디오에 보냈더니 2005년 9월6일 (화)방송에 나왔던 내용이에요.
그 때 MC였던 손숙 김범수씨랑 라디오 인터뷰했어요...ㅋㅋ
옛날 하나님 알기 전 일들이에요. 지금은 좀 더 성숙해졌지요. 배순매 집사
첫댓글 아이구.....하하하...한참을 혼자 웃었네요..
정말 정말 리얼하고 ,그래 나도 저런적 있었어, 할만한 내용이네요,
아마 ,아내,라는 직업을 갖고 사는 분들이면 거의가 공감 꾹...누르지 않을까 싶은데...ㅋㅋㅋ
그런 삶을 거치신 두분 집사님 지금 얼마나 원숙미 넘치고 멋지신데요....^ ^
ㅎㅎㅎ...저절로 웃게 하는 해피바이러스 의 내용입니다.
지금은 웃지만 저희도 그런일 종종 있답니다..그러면서 자라는거 같아요 하나님 앞에서...!!
ㅎㅎㅎ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