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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레옹: 한글화작업실 나폴레옹 기술 장문 번역 부탁드립니다. 20번 부터 36번 마지막
초호기 추천 0 조회 354 10.03.04 23:58 댓글 37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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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0.03.05 00:11

    첫댓글 22번 능형진은 엠토와 내용이 동일합니다...

  • 작성자 10.03.05 05:42

    아 그렇네요. 능형진은 제외입니다.' ' 다시 수정했습니다 ;

  • 10.03.05 23:07

    20. 대량생산
    \n\n수공업 기반의 제조는 생산할 수 있는 갯수에 상한선을 갖게합니다. 상품 자체는 멋지게 만들 수 있으나, 전문 노동인의 수에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면, 물건을 많이 만들 수 있습니다.\n\n대량 생산은 기본적이고 반복적인 생산 임무를 기계화하고, 일을 단순 반복적인 임무로 분할합니다. 더이상 장인 기술공이 한 품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일을 단순 임무들로 분할해서 각 사람에게 임무가 주어지고 물건은 다음 작업을 위해 다음 사람에게 전달됩니다. 각각의 작업은 단순해서, 전문가를 대신에 기계와 공구가 사용됩니다.

  • 10.03.05 22:19

    \n\nMarc Brunel (1769-1849)은 프랑스 혁명 이후 영국에 데려온 프랑스인 엔지니어였습니다. 그의 활차 제조 기계는 당시 대량 생산의 전형적인 예가 됩니다. 그들은 영국 해군이 필요로 하는 수천개의 활차와 도르레를 비숙련 노동력이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 활차는 배의 항해장비에 없어서는 안될 부품이었습니다.

  • 10.03.05 22:48

    21.
    \n\n이것은 모병을 대규모로 관리하는 것이고, 군대를 일으키는 것을 아주 간단하고 값싸게 해줍니다; 연대에 필요한 천명의 사람이라도 즉시 낼 수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징집된 병사들은 신뢰가 가지 않거나 잘 훈련되어 있지 않게 됩니다:그들은 군대에 속해서, 총 사용법을 배우거나, 전투 현장에 있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저 무사히 귀향하고 싶어합니다.\n\n그들에게서 자원병이나 정규병과 동일한 수준의 규율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n\n혁명이 일어난 프랑스는 1798년의 "Jourdan Law"와 함께 징병을 도입한 최초의 국가였습니다. 20-25세의 모든 남자는 복무 대상이었으나, 면제도 많았습니다. 성직자와 몇몇 필수 노동자 그리고

  • 10.03.05 22:49

    관청 소유자들은 복무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군가에게 돈을 주어 대신 가게 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이 마지막 방법은 징병을 빈곤층과 농부계급에게 가중되도록 해버린 주범이었습니다. 얄궃게도, Jean-Baptiste 장군은 혁명 프랑스를 구한 제도를 만들었던 장본인이면서, 그의 안이한 견해때문에 공안 위원회가 그의 충성심을 의심하여 군대에서 내쫓겨 났습니다.

  • 10.03.06 19:47

    22.
    \n\n이 전술을 사용할 때, 보병 유닛은 단일 블락으로 전진하지 않습니다. 대신, 무리가 교대로 적군을 향해 앞으로 나가서, 멈추고 사격합니다. 한 무리가 사격할 동안, 다른 무리는 전진하거나 다음 일제 사격을 위해 장전합니다. 훌륭한 규율과 무기 훈련 또한 요구되어서 멈춘 중대는 어느때라도 필요할 때엔 사격을 가할 준비가 될 것입니다. 장교와 하사관이 조화를 잘 이루고 옆 동료에게 믿음을 가지게 하려면, 기동연습이 필요합니다.\n\n전진 사격은 오늘날에도 "교대전진"이라는 전진 방법으로 남아있습니다. 특히, 기갑 유닛을 위한 유용한 기술로써 탱크들이 서로 엄호사격을 할 때 사용됩니다. 첫번째 유닛이 미리 예정된

  • 10.03.06 00:07

    위치로 이동해서 "감시 유닛"이 됩니다; 이 전술로 정지 유닛이 약진하는 유닛을 엄호할 때, 엄폐 방어를 제공하기 쉽습니다. 추가적으로, 회전운동으로 균형을 유지하는 무기를 움직이면서 쏠 수 있는 장갑 차량들 자체가 딱 "전진 사격"의 개념이 되었습니다.

  • 10.03.06 23:26

    23.
    \n\n얇은 구리판을 물밑 목재 위에 붙여서, 수초와 좀을 막습니다. 배는 선저부가 좀먹지 않기 때문에 수명이 더 길고 엉망이 되지 않아 더 빠릅니다.유지 비용이 줄어들고 관리가 개선됩니다. 구리작업은 건조중 조선소에서 중요한 작업을 필요로 하기에 싸진 않습니다.\n\n역사적으로, 구리판 배를 영국 해군은 즉각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해군 본부의 심의는 구리의 값비싼 비용 때문에 연기되었습니다; 두번째 문제는 구리판 작업이 선체의 부식을 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바닷물과 구리판 그리고 고정시키기 위해 사용된 강철 볼트가 예상치 못한 반응을 일으킨 결과였습니다. 이것들이

  • 10.03.06 19:52

    커다란 배터리가 되고 강철 볼트는 그 화학반응에 의해 못쓰게 되어 선체가 산산조각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철제가 더이상 사용되지 않게되자, "구리 바닥"이 신뢰의 상징이 되었습니다:실패할 가능성이 없는 (재정적으로) 중요한 것. 구리판은 현대의 오염방지 페인트가 개발되기 전까지 사용되었습니다.

  • 10.03.06 23:22

    24.
    \n\n군단 편제는 추가적인 명령을 선보여, 직관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장군에게 직속 부하를 덜 배치함으로써 명령을 내리는 장군에게 도움을 줍니다. 수십명의 연대 지휘관을 직접 다루는 대신, 한 장군이 그의 군단 지휘관들에게 명령들을 내립니다. 그렇게 되면 장군은 많은 사람들을 다루는 짐으로부터 자유로워져서 전체적인 상황에 집중할 수 있습니다. 각 군단은 자체 보급과 행진 경로를 신경쓰면서 축소모형화된 군대처럼 움직입니다. 한가지 즉각적이고 두드러진 효과는 군대 이동의 속도 개선입니다. 왜냐하면, 각 유닛들이 이제는 세세하게 위치가 지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n\n사단들을 묶은 군단 편제는 나폴레옹 시대에

  • 10.03.06 23:23

    새로운 것이 아닙니만, 또다시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현존하는 개념을 극대화시켰습니다. 프랑스 혁명 전쟁에 뒤이어 프랑스 군대의 사단들은 "윙스"로 알려진 임시 집단으로 조직되었습니다. 윙의 지휘도 임시적이었고 소장의 책임이었습니다. 그 아이디어의 효율적인 진화는 “Corps D'Arm?e”(군단)을 자체 참모와 지속적인 지휘관을 갖춘 영구적인 대형으로 만들었습니다. 각 군단은 보통 자체 포병대, 군단 예비 포병대를 갖춘 적어도 두개의 보병 사단과 한개의 기병 여단을 가졌습니다.

  • 10.03.10 01:03

    25. \n\n'그랑 바테리'는 포병 전술의 하나로, 모든 가용한 대포를 하나의 포병 부대로 모아, 적 전선의 한 지점에 모든 화력을 집중시키는 것을 말한다. 집중된 화력은 적 대열과 건물을 분쇄할 수 있는 강력한 공격을 의미한다. 이렇게 집중된 화력은 전투에서 포병대의 정확도와 효율을 높이게 된다. \n\n당시 실전에서 그랑 바테리는 천재적인 새 전술이었고, 나폴레옹은 이를 활용하여 적군을 압도했다. 바그람과 보로디노에서, 적군 중앙 라인을 격파하거나 적의 역습을 물리치는데 각각 사용되었다.

  • 10.03.10 01:03

    모든 천재적인 전술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는 천재적인 대항 전술이 개발되었다: 웰링턴과 다른 장군들은 그랑 바테리의 사거리 훨씬 바깥으로 부대를 배치하기 시작한 것이다. 웰링턴은 워털루에서 부대를 사거리 훨씬 바깥으로 뺐을 뿐만 아니라, 직접 포화로부터 안전한 언덕의 이면에 배치하여, 대항 전술을 제대로 활용했다.

  • 10.03.10 01:10

    25. 집중 포격술 = '그랑 바테리'가 더 나은 듯한데요. 이거 거의 고유명사에요...Grand Armee 랑 마찬가지!(驛: 나폴레옹의 군단)

  • 작성자 10.03.14 11:45

    La Grande Armee (그랑드 아르메) 가 군대의 명칭이지만 백과사전에 대육군으로 표기되어 있기에..Grand Battery 역시 나름 의역해서 집중 포격술이라고 명칭을 정했습니다. 이점 양해부탁해요..

  • 10.03.10 09:28

    35.
    \n\n부싯돌은 열린 냄비안에서 불꽃을 일으킵니다; 그런 다음 화약을 점화시켜 머스켓총을 발사시킵니다. 격발기는 펄미네이트라 불리는 화학물질의 소량을 사용해서 필요한 불꽃을 일으킵니다. 펄미네이트는 충격을 주면 폭발합니다; 부싯돌이 느슨해지지도 않고 가루가 빗물에 스며들지도 않습니다. 대신 작은 구리 뚜껑이 총신으로 이어지는 튜브의 한쪽 끝에 끼워집니다; 격발 망치로 쳤을 때, 심지어 습한 날씨에서도 총은 발사됩니다.\n\n격발기 뚜껑은 사냥 문제의 해결책을 찾고 있었던, 스코틀랜드 성직자인 알렉산더 존 포사이스(1769-1843)의 발명품이었습니다. 주 장약이 터지기 전에 부싯돌의“냄비안 순간폭발”은

  • 10.03.10 17:12

    쏠 때 맞을지도 모르는 새를 놀라게 해서 굉장히 너그롭지 못한 방식으로 멀리 내쫓습니다. 수은 펄미네이트의 작은 점화 장약을 사용하고자 한 그의 똑똑한 아이디어는 날개달린 목표물에 경고없는 순간 폭발을 그에게 선사했습니다!

  • 10.03.10 17:14

    34.
    \n\n포구경이 커지고 다양한 폭발탄을 쏘게 되면서, 목재 전함들은 대단히 취약해졌습니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강철판을 목재 전함 선체의 두꺼운 늑재에 박았습니다. 선박의 늑재는 아직도 탄의 충격을 흡수하여 배를 방어하는 일부분입니다. 정교한 철판은 대단히 두껍고 무겁습니다 그리고 “장갑”함의 품질에 결정적 요소가 됩니다. 철주물은 본디 잘 부러져서, 보호 장치로써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n\n역사적으로, 강철판 함선은 완전한 철 구조의 장갑판과 증기 추진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철장갑"함이 아닙니다. 몇몇 목재 전열함은 겉표면이 강철판이었으나, 완전한 실험 성공물이 아니었습니다.

  • 10.03.10 11:00

    더 성공적인 것은 강철판 장갑을 두른 물에 떠다니는 포대였습니다; 이것들은 화력을 극대화할 의도를 가지고 얕은 물을 떠다닌 발사대였습니다. 항해 특성과 같은 다른 고려사항들은 부차적이었습니다. 포격이나 제한된 해역에서 방어 목적으로 사용된 그러한 포대들은 무시무시했습니다; 그것들은 바다에서 그 선원들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 10.03.10 12:53

    32.
    \n\n라이플은 특수병들이 전장에서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 사용되어야 합니다;이것은 특별하게 선발되고 고강도 훈련을 받는 척후병 유닛에게만 지급되는 흔한 이유입니다. 라이플과 활강 머스켓총과의 다른점은 총신안에 새겨진 홈에 있습니다:이것이 발사된 구슬에 회전력을 주고, 장거리에서 더 정확하게 합니다. 하지만, 전투시 장전할 때 관리와 집중이 필요하고, 전투 후 라이플을 청소하고 적절하게 재조정하는 관리와 집중이 필요합니다.\n\n1800년에 영국 육군은 서섹스주, 호르샴에서 실험적인 라이플 부대를 창설했습니다. 그들은 정확도가 뛰어난 무기인 에제키엘 베이커의 부싯돌 점화식 라이플을 갖췄습니다. 라이플병들이

  • 10.03.10 17:15

    서로 총구를 겨누었다는 것은 알려지 있지 않습니다. 그 모습은 사격자가 표준 브라운 베스 머스켓총을 사용했더라면, 자살충동을 느낄 멍청한 짓이었을 일입니다. 베이커로 무장한 병사들을 일컫는 녹색 군복의 라이플병들은, 그에 걸맞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 10.03.11 09:35

    31.
    \n\n서류업무와 사무원 그리고 행정가 없이 군대는 돌아갈 수 없습니다. 야전 지휘관은 명령 하달, 적 정보 수집과 병력에게 물자 공급이 잘되고 잘 먹이는 지원이 필요합니다. 장군의 참모는 상대적으로 젊지만, 믿을만한 장교들로 구성되어 있어 장군의 눈과 귀가 되어줄 수 있고 필요한 상황에서 그의 명령이 명료하고 신속한 형태로 확실히 전달되게 합니다. 장군의 참모가 행정처리를 해서 군대는 더 많은 파병 병력과 함께 이동할 수 있고 아까운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됩니다.\n\n역사적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다양한 장군들과 좋아하는 장교들, 신임하는 비서들 등등을 최대한 활용해 그를 돕게 했습니다.

  • 10.03.11 09:36

    루이 알렉상드르 베르티에 (1753-1815)는 나폴레옹의 수석 참모이자 황제가 아주 좋아했던 사람인데 이유는 명령을 확실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1814년 나폴레옹 퇴임후, 베르티에는 새로운 왕 루이 XVIII와 화해하고, 후에 1815년에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왔을 때 나폴레옹과의 합류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나폴레옹은 베르티에의 빈자리를 워털루 전투의 패배 원인중 하나로 꼽았습니다.

  • 10.03.11 10:49

    30.
    \n\n다른 많은 대포를 만들기 위해 바퀴와 포차와 같은 공통 부품을 사용하면,포 제조와 포병의 일이 더 쉬위집니다. 야전 수리는 파괴된 무기로부터 사용가능한 부품을 떼내서 피해를 입은 무기를 수리하게 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현역 무기는 다른 많은 포의 잔해로부터 만들 수도 있습니다.\n\n1764년에, 프랑스 포병 장교인 장 밥티스트 바케트 드 그리보발은 'Le syst?me Gribeauval'로 알려진 대량 생산된 화포 부품의 표준 체계를 만들었습니다. 그는 포차를 개량했고, 포 제조의 기초를 개선시켜서 구경당 부품들이 더 작아지고 가벼워졌습니다.\n\n프랑스군의 현존 시스템을 최대한 이용해서 효과적인 전투 부대로 만든 것은

  • 10.03.11 10:45

    바로 나폴레옹의 능력이었습니다. 보나파르트 역시 장군이 되기전에 포병 병과로 훈련을 받았습니다.

  • 10.03.11 11:26

    29.
    \n\n 야전 응급차는 치열한 전쟁터안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신속한 차량입니다. 물과 반창고 그리고 다른 의료 물자를 채워서 응급처치가 가능하게 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외과의사가 필요한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부상병을 후방으로 데리고 나갈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수술은 도축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이 신속한 지원은 유닛 보충 속도의 개선을 의미합니다.\n\n역사적으로, 기본 형태의 응급차는 몇세기 동안 있긴 했습니다. 로마의 백인대는 부상병이나 전사자를 회수할 튼튼한 병사로 된 팀들을 전투지로 딸려보냈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 전쟁때가 되서야 "응급차"라는 용어가 처음 사용되었습니다. 나폴레옹의 최고 주치의인

  • 10.03.11 11:23

    Baron Jean Dominique Larrey (1766 ? 1842)는 그가 "날으는 응급차"라 부른 기계장치를 선보였습니다. 전투가 끝날 때까지 부상자와 전사자를 빼내오지 못한다는 사실에 격노한 그는 기마포병의 탄약상자를 채택해서 부상병 치료를 위해 빠른 속도로 운반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는 결국 두개의 다른 버젼의 마차를 개발해서 전투지에서 부상병들을 후송하고 치료할 수 있게 했습니다.

  • 10.03.11 14:10

    28.
    \n\n현대식 군대의 모병 절차가 변화됨에 따라, 방법이 재평가되고 바뀔 필요성이 대두되었습니다. 이전 군대는 이따금씩 잘 훈련되고 규율이 엄격한 자원병들로 구성되어 왔습니다. 징집은 군 전략가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져줍니다: 군대를 효과적으로 잘 배치해서 탈영을 막고 병사들에게 싸움외에는 선택권을 주지 않는 최고의 방법은 무엇인가. 일단 이 새로운 모병 방법이 연구되고 발전되었기에, 새로운 군사 학교를 세워 이 급진적인 아이디어를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 징집병 제도의 창안은 적어도 이론적으론 프랑스 장군인 Jacques-Antonine-Hippolyte de Guibert 백작(1743-1790) 덕택입니다. 그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 10.03.11 14:09

    전술 작가로 1770년에 "전술학 개론"을 출간했고 그의 앞서나간 사회적 견해로 악명이 높습니다. 그는 대규모 징집("국민 총동원령"이라고 알려지게 됨)이 프랑스 군대의 제도가 되기 훨씬 이전에 그것의 더 좋은 점을 논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간단히 말해 프랑스 정부의 수석 군 참모 자리를 차지했습니만, 정부가 그의 급진적인 생각에 못미쳤음이 곧 드러났습니다.

  • 10.03.11 14:47

    27.
    \n\n국민동원령은 국가 또는 "자유"와 같은 모호한 이념을 위해 싸우도록 일반 대중을 선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회 정치적인 이론입니다. 병사들이 자유의지로 전쟁에 나갈 때 일반 보병을 뛰어넘는 고난을 감수하도록 설득시킬 수 있습니다: 물자와 음식과 무기의 부족을 극복하는 것도 싸움의 일부입니다. 믿음은 전투에서 강력한 도구입니다: 사람은 죽음앞에서도 생각을 고수할 것입니다. 동원은 민병대 유닛의 모집 비용을 줄여줍니다.\n\n역사적으로, 프랑스 혁명은 그 당시엔 그렇게 불리지 않았지만, 국민 동원의 최초 사례였습니다. 사람들은 혁명이론에 사로잡혔고 그 이름으로 고통을 견뎌내려 했습니다.

  • 10.03.11 14:47

    이 이념들이 외국 군주에 의해 위협을 받자 수호를 위해 사람들을 쉽게 일으킬 수 있었습니다. 정부에 의해 고무된 애국적이고 혁명적인 열정은 대단히 실용적인 효과를 냈습니다; 1799년까지 백만명의 사람들이 프랑스와 혁명을 위해 싸울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 10.03.11 15:27

    26.
    \n\n병참 체계는 적지에 간 군 병력들이 필연적으로 겪는 소모를 줄이는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필요 물자를 적절하게 공급받는 병사는 쉽게 죽거나 탈영하지 않습니다. 전방으로 머스켓총이나 화약을 쓰는 포신을 전달할 수 있는 체계가 보충병을 보낼 때도 똑같이 사용될 수 있습니다. \n\n화약시대 이전에는, 군대가 그들이 지나간 땅을 황폐시키긴 하지만 강탈을 통해서 자체 보급을 충족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강탈하기 거의 힘든 화약의 등장으로 바뀌었고 진군시엔 만들 수 없었습니다; 이동 체계와 창고가 절대적으로 중요해졌습니다.\n\n프랑스인이면서 나중엔 러시아 장군이된 앙투안 앙리 조미니의 저서가

  • 10.03.11 15:28

    물류의 이해 - 군병참 기술을 고급화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습니다. 그의 경력엔 은행가가 되는 훈련과 무기 제조업이 들어있습니다만, 그의 기술이 으뜸이 된 것은 스위스 전쟁부의 비서가 되어 전쟁 업무가 수행되는 방식을 재조정하는 책임을 맡을 때였습니다. 이것이 그에게 그의 조직적인 보급 업무를 위한 배경을 제공했습니다.

  • 10.03.11 16:52

    끝.

  • 10.03.14 01:21

    헉. 파오봇님 존경합니다.

  • 작성자 10.03.14 09:18

    수고하셨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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