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민족문제연구소 부천지부 원문보기 글쓴이: 바람과찻잔
활동 하면서 자주 접하는 문제라서..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공과를 저울로 달아서 평가한다구?-1-
초등학교 다닐때 쯤이니까 60년대 중 후반정도 됐을까요? 그때 우리 또래들 사이에는 국가에 공을 세워서 무슨 훈장같은걸 하나 타면 나중에 사람을 하나 죽여도 괜찮다는 요상한 소문이 퍼져 있었습니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가 있느냐며 웃을테지만 그때는 그런게 진짜처럼 들리던, 그래서 어른들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많던,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때야 그런 시절이니까 그렇다치고 인터넷이 세계를 하나로 묶고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실시간으로 접할수 있다는 대명천지 이 밝은 세상에서도 그런 요상한 논리가 통용된다는걸, 그리고 그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고 그옛날 내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진짜로 통용되어 이제는 마치 대한민국의 보편적 가치처럼 돼버렸다는걸 이번에 알고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우선 이 글부터 한번 읽어봅시다.
[동농(東農) 김가진. 1846년 안동부사 김응균의 서자로 태어나 문과에 급제한 뒤 공조판서와 충청도관찰사, 농상공부대신 등을 역임한 구한말의 개화파 관료. 일제에 남작의 작위를 받다. 그러나 일제의 조선 강점 음모가 본격화되자 독립협회 위원과 대한협회 회장을 맡으며 독립운동에 참여. 한일합병 이후에는 비밀결사인 대동단의 총재로, 3·1운동이 좌절된 이후에는 일흔네살의 노구를 이끌고 상하이로 망명. 그곳에서 임시정부 고문, 김좌진이 이끌던 군정서 고문 등으로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극도의 궁핍 속에서 생을 마감.
당시 그의 죽음을 보도한 1922년 7월7일자 <동아일보>의 기사는 이렇다.
"영원히 눈을 감지 못할 원한을 품고 만리타향의 망명생활 중에 세상을 떠났다. … 독립운동의 수령으로는 가장 연로한 사람으로, 상하이에 건너 간 이후로 고령은 거의 극도에 이르러, 팔십의 나이인데도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다가..... 이 세상을 마치었어라!"- (이상 '한겨레21' 1997년 8월 21일자 171호에서 요약)]
어떻습니까. 일제에 작위를 받을 정도의 고관으로 있다가 일제의 야욕에 분노, 과감하게 모든걸 버리고 독립운동에 투신했다...80 고령의 나이에도 하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독립운동에 진력하다 숨을 거둔다...감동스럽지 않습니까? 참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자신의 기득권 지키기에만 급급한 요즘 높은 사람들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얘기가 아닐수 없습니다.
그런데, 해방후 이분은 아예 독립유공자로 지정조차 되지 못합니다. 이분을 따라 망명해서 함께 독립운동을 벌인 큰아들 의한씨, '녹두꽃', '장강일기' 등의 책을 써서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며느리 정정화씨(91년 작고. 작년인가 '민예극단'에서 이분의 삶을 '아! 정정화'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연강홀에서 공연했지요), 광복군으로 활동한 손자 석동씨 등은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어 국민장 또는 애족장을 받았는데 말입니다.
그 이유를 정부(보훈처)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립운동 공적이 있다 해도 변절하거나 친일부역 등 흠결이 있는 경우 두가지 사항을 비교형량하여 서훈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동농이 독립운동을 한것은 사실이지만 일제의 남작작위를 받은 전력이 있는 등 친일행위의 비중이 더 크기 때문에 독립유공자로 추서하는 것은 신중할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독립유공 여부를 판단하는 정부의 공식기준이 "전에 한 일들을 이것저것 저울로 달아 무게가 더 나가는 쪽으로 결정을 한다"가 되는 셈입니다. 이거하고 저거하고 더하기 빼기를 해서 결정한다는 얘기지요. 얼핏 공정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과연 무슨 물건같이 무게로 달아질수 있는걸까요? 그게 과연 그렇게 비교해도 되는 일일까요? 한 인간에 대한 평가를 숫제 장사꾼 산법으로 따지는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우리는 여기서 그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던 수수께끼를 풀 단서를 하나 확인할수 있습니다. 그것은 이갑성, 최남선 등 초기에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변절한 사람들이 해방 후 독립유공자로 둔갑하게 된 경위에 대한 것입니다. 물론 동농의 경우와는 반대가 되겠지요. 독립운동을 하다 나중에 변절하기는 했지만 두가지 사안을 비교해보니 독립운동을 한 비중이 더 크더라... 뭐 이렇게 결정했던겁니다. 소위 정부의 '공식기준'에 의해서 말입니다.
정부가 생각하는 공정한 기준이라는건 결국 이런겁니다. 나중에 반민족행위를 하기는 했지만 초기에 독립운동을 할때의 공이 더크다. 그러니 독립유공자로 서훈되는게 당연하다.... 인권을 탄압하고 독재를 했을망정 경제를 발전시킨 공이 더크지 않느냐. 그러니 기념관을 짓고 추모하는것이 당연하다.... 일제에 협력한 사실은 있지만 예술적 성과가 더 크지 않느냐. 그러니 예술적인 성과만을 놓고 판단해야 한다....이거 어디서 많이 듣던 소리들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미당, 운보, 하다못해 조선일보에 이르기까지 과거얘기만 나오면 '그들'이 줄창 해오던 소리지요. 그런데 지금 보니 이게 '그들'만의 생각이 아니고 글쎄 정부의 공식적인 기준이었던 겁니다. 그러니 '그들'의 입장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관점으로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정부의 공식기준이 그러니 일반 국민들의 가치관도 그렇게 따라갔던 거고 그게 몇십년을 내려오면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굳어진거지요.
그런데 이 정부의 공식기준이라는게 얼마나 말도 안되는 얘긴지 한번 봅시다. 그런 기준이라면 이나라는 이런 나라가 되는겁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몇십 몇백억쯤 챙겨도 재임기간 중의 업적과 비교해서 처벌하든 말든 해야합니다. 쳐먹은 돈보다 업적이 더 무거우면 기념관도 세우고 해야합니다. 고위 공직자들이 남의 돈 좀 받아먹었더라도 그사람의 업적과 비교해 봐서 처리해야 합니다. 경찰관이 도둑질을 해도 그동안 도둑놈 잡은 공과 비교해서 처리해야 공평한 겁니다. 신문이나 기자들이 왜곡이나 날조 좀 하더라도 그동안 국민들의 알 권리를 위해서 애쓴 것과 비교해서 평가해야 합니다. 재벌들이 세금 좀 떼어먹어도 국가경제를 위해 그들이 고생한 것과 비교해 봐야 합니다....이게 어디 제대로 된 사람들이 사는 세상입니까. 이러니 훈장을 하나 받으면 사람 하나 죽여도 괜찮다는 얘기도 그냥 썰(說)만은 아닌거지요.
앞에서는 정부의 소위 '공식기준'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그리고 그런 기준대로라면 한발짝만 앞으로 나가도 요상한 결과가 나온다는 것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준을 가지고 두발짝 세발짝....앞으로 더 나간다면? 아마 우리나라는 역사에 길이 기억되는 나라가 될겁니다. 소돔이 괜히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나요.
도대체 이 기준의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요? 우선 '관점'입니다. 가령 폭행사건이 났을때는 당연히 가해자와 피해자로 갈리게 됩니다. 여기서 가해자의 입장과 가해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보는게 가해자의 관점이 됩니다. 가해자야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축소하려 할테고 그렇게 할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장황하게 늘어놓겠지요.
그러나 일반인들의 정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사건을 보게 됩니다. 인지상정인거지요. 또 법도 피해자의 관점에서 적용될수 밖에 없습니다. 피해정도가 결국 물증이 되니까 말입니다. 그런데 정부의 이 기준은 묘하게도 가해자의 관점으로 만들진겁니다. 정작 피해자인 국민들의 관점이 어디로 사라져 버린겁니다. 그러다보니 피해자인 국민들이 오히려 가해자의 관점으로 사안을 판단하게 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지게 되는거지요.
그리고 또 다른 원인은 처음부터 비교가 될수 없는 것끼리 서로 비교를 했기 때문입니다. 가령 누가 '쇳덩어리(鐵)하고 물하고 어느게 더 무거운지 비교해 보자' 한다면 그거 제정신으로 보는 사람 없을겁니다. 이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거지요. 쇠야 무게로 계량하는거지만 물은 부피로 계량하는거니까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는 정치고 경제는 경제일 뿐이지요. 이걸 어떻게 같은 저울에 올려놓고 무게를 비교할수 있겠습니까.
또 저울로 달수있는 거라도 여러가지 변수에 따라서 그 가치가 다 다르겠지요. 같은 포도라도 산지나 품종에 따라서, 또 계절에 따라서 값이 다 다릅니다. 이런저런 특성을 모조리 무시하고 뭉뚱그려서 저울로 달아서 비교를 하면 안되겠지요. 하긴 여기도 가끔 우리보고 '김대중 앞잡이'니 어쩌구 하는 사람들이 있더라만.......넋나간 X들......
이런 식으로 비교할수 없는 것끼리 비교를 해서 그 가치를 결정하다 보니까 어느새 정의니 신상필벌이니 하는 원래의 목적은 아예 사라지고 이해만 난무하는 기준이 돼버린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기회주의를 부추기는 기준을 국민들조차 옳은 기준으로 믿어 왔기때문에 이제는 아예 국민들의 보편적인 가치관으로 굳어지게 됐다는 점입니다.
자 여기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가 흔히 듣는 말 중에 "공과를 따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잘 잘못을 따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혹시 "공과를 비교한다"는 말을 들어본 사람 있습니까? 없을겁니다. 왜? 그런말이 없으니까! 말이 안되니까 말이 없는겁니다. 공은 공이고 과는 과지요. 오죽 답답했으면 성철스님 같은 분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외쳤겠습니까(?)
공과 과는 같이놓고 저울질을 할수 있는게 아닙니다. 공은 공대로 상을주고 과에는 벌을 주는거지요. 그런데 이걸 서로 비교해서 깔 건 까고 나머지를 가지고 상을줄지 벌을줄지 결정한다?......아니 독립유공자 심사가 무슨 술내기 나이롱 뽕입니까?
도대체 어떻게해서 이런 나이롱 뽕같은 기준이 만들어진 것일까요? 요거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아닐수 없습니다. 한국 현대사가 이처럼 일그러지게 된 원인이 모조리 여기에 엑기스로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뭐 해방후 이승만에 의해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다는 것 정도야 다 아는 사실일테니까 우선 부분적이나마 해방후 친일파들이 우리 현대사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부터 한번 살펴보겠습다.
우선 해방후 미 군정부터 자유당 초기까지 우리나라 경찰간부의 80%가 일제하에서 경찰노릇을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항일운동을 감시하고 독립군을 잡던 사람들에게 다시 대한민국의 치안을 그대로 맡긴겁니다.
일본군 장교출신인 박정희시대에는 더 말할것도 없겠지요. 60년대 중반까지도 경찰 고위간부의 30%가 일본경찰 출신들이 차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비율이 이렇게 준 것도 그사이에 무슨 숙청이 있어서가 아니고 나이가 들어 정년을 채우고 물러났기 때문입니다. 처벌은 커녕 중용되어 천수(?)를 다한거지요.
정부수립 후 자유당 12년 동안의 각료비율을 한번 볼까요? 자유당 정권 12년 동안의 장관은 국무총리를 포함해서 115명이었습니다. 이중에서 중임한 장관을 뺀 숫자는 96명입니다. 그런데 이 96명 중에서 친일전력이 있는 사람이 30명, 전체 장관 수의 31.3%를 민족반역자들이 해먹은 겁니다.
군의 경우에는 이보다 더 심했습니다. 이승만 정권 하 역대 육군참모총장 8명 전원이 일본군 장교, 하사관, 만주군(일본괴뢰) 출신이었습니다. 독립군 토벌하던 놈들이 대한민국을 지키는 육군참모총장을 돌려가며 해먹은 겁니다. 당연히 독립군이나 광복군 출신은 군에서도 박대를 받을수 밖에 없었지요.
이제 독립유공 여부를 심사했던 기관이 어떤 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살펴봅시다. 아래 글은 민족문제연구소에서 펴 낸 [실록 친일파]의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
"1962년도 문교부 독립운동 유공자 공적조사위원이었던 신○호(申○鎬)는 일제시 총독의 수사관(修史官)을 했던 인물이며, 이○도(李○燾)는 조선사편수회 촉탁을 한 사람이다. 63년 내각사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에 있었던 고재욱(高在旭)은 경성배영(京城排英) 동지회 및 전조선배영(排英)동지회연맹의 상무이사였으며, 유광열(柳光悅)은 황도언론의 맹장으로, 이○성(李○成)은 일제의 밀정설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68년 총무처 독립유공자 상훈심의위원이었던 백○담(白○澹)은 친일《기독교신문》의 편집위원으로 기독교 황민회의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이선근(李善根)은 만주제국협화회전국연합협의회에서 빈강성(濱江省)협의원을 수차 중임한 사람이다. 77년 원호처 독립유공자 공적심사위원인 이○상(李○相)은 조선어학회에서의 항일경력으로 77년 건국포장을 받았는데 이같이 독립유공자요 또 독립유공자의 공적심사위원이었던 그는 친일《만선일보》(滿鮮日報)에 적을 두기도 했던 인물이다."
한마디로 민족반역자들이 거꾸로 독립유공자를 심사하는 희대의 코메디가 우리가 사는 이땅에서 벌어졌던 거지요. 사정이 이러니 무슨 독립유공자 서훈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자기들의 안위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기준을 만들 필요가 있었겠지요.
그래서 나온 것이 바로 위에서 말한 '나이롱 뽕 기준', 즉 아무거나 뭉뚱그려서 무조건 저울로 달아 평가하는 기준이 만들어 진겁니다. 자. 이래놓으니 심사위원하고 좀 아는 친일파 놈들은 술처먹고 행패부리다 유치장에서 며칠 있었던 것도 졸지에 항일운동하다 그렇게 된걸로 둔갑합니다. 그래놓고 공(?)과 과를 비교하는 겁니다. 첨부터 짜고 했던거니까 결과는 보나마나지요. 이렇게 친일파나 그 일가붙이들이 하룻밤 사이에 독립유공자로 둔갑하는 반면 진짜 독립유공자들은 제대로 대우도 못받는 상황이 벌어진 겁니다.
모든 기준의 첫단추 격인 독립유공자 심사기준이 이렇게 되다보니 이제 다른 기준들도 그렇게 따라가게 됩니다. 그저 아무거나 마구 뒤섞어 저울에 올려놓는게 몸에 밴거지요. 최근의 박정희기념관을 짓네 미당에게 훈장을 수여합네 하는 것들이 다 그래서 나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 국민들도 그런 기준이 옳은 기준인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거고 말입니다.
그러니 이게 지나간 과거의 일만은 아닌거지요
, 그럼 이제 제대로 된 자와 저울을 가지고 몇가지 문제를 살펴봅시다. 젤먼저 조선일보부터 시작해야겠지요. 어쨌든 지들 말로 1등신문 이라니까. 솔직히 조선일보의 친일행위를 판단할때 조금 헷갈리기는 합니다. 우선 한 개인이 아니라 법인의 일이라는 점이 그렇고 창간후 몇차례 사주가 바뀌면서 그때마다 반일과 친일을 오락가락한 신문이라는 점이 그렇습니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헷갈리는 신문이기 때문에 판단하기도 헷갈린다는 말이지요. '초기에는 항일기사도 쓰는 등 반일신문이었다', '당시의 시대상황에서 먹고 살기위해 어쩔수없이 친일을 했다'는 그들의 핑계가 국민들 정서에 어느정도 먹혀들어가는 것도 다 그런 이유때문일 겁니다.
그러나 이런핑계 역시 위에서 말한 '나이롱 뽕 기준'을 적용시켜 만들어낸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봅시다. 나를 버리고 돈많은 사람의 품으로 간 옛애인이 찾아와서 "옛날에 너를 사랑했을때도 있었잖아"라며 친한척 합니다. 그때 '그래 맞아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야'.....이럽니까? 아니지요. 밸이 있는 사람이라면 낯빤대기에다 가래침을 뱉고 쫒아버리겠지요.
친일로 돌아선 그 순간부터 조선일보는 이미 민족을 배반한 신문일 뿐입니다. 뭐 전에 반일활동을 했느냐 마느냐 따위는 따질 필요도 없는거지요. 친일행위를 한 순간부터 그런건 다 없던 일이 돼버리는 겁니다. 이건 비교하거나 상쇄될 사안이 아니지요. 더군다나 민족을 배반한 이유가 궁색하게도 더 벌어먹기 위한 것이라면 단순히 민족을 배반한 신문이 아니라 민족을 팔아먹은 매국신문이라 부르는게 옳겠지요.
이갑성이나 최남선 정춘수같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이사람들은 3.1 독립만세 당시 민족대표 33인에도 끼는 등 초기에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사람들이지요. 그런데 일제말 이사람들은 돌연 친일로 돌아섭니다. 아마 "일본이 그렇게 쉽게 패망할줄 알았나?" 하던 미당과 같은 마음이었겠지요.
그 순간부터 그들은 변절자고 민족반역자가 될뿐입니다. 전에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더라도 그건 상쇄될수도 비교될수도 없는 문제지요. 굳이 비교를 한다면 전에 큰 일을 했을수록 오히려 더 가혹하게 단죄하는게 옳은겁니다. 그래야 저울추가 맞는거지요. 그런 사람일수록 이편에 입히는 피해도 더 크기 때문입니다.
이문제와 관련해서 보훈처의 독립유공자 심사를 맡았던 분들은 앞으로 길에서 송강호 만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겁니다. '넘버 3'라는 영화에서 보니까 송강호가 세상에서 젤 싫어하는게 배신, 배반때리는 거라구 하더라구요. 그러니 배반자를 유공자로 둔갑시킨 사람을 가만 놔두겠습니까. 혹시라도 길에서 송강호를 만나면 괜히 사인받는다고 알짱대지 말고 무조건 튀세요. 송강호 풍차돌리기에 허리부러질수도 있으니까.
미당과 운보는 경우가 조금씩 다릅니다. 미당은 생의 끈을 놓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행위가 옳다고 생각했던 사람입니다. 단 한마디의 참회나 속죄도 없었지요. 기껏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줄 알았나? 어디....'라는게 그가 죽을때까지 가지고 있던 생각입니다.
이건 옳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습니다. 그는 '글쟁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은겁니다. 불쌍한 사람이지요. 그러나 존경받을 만한 사람까지는 못되는 거지요. 역사속에서 그가 맡을 배역은 글쓰는 사람들 책상위에 거꾸로 세워놓은 비수역할 정도일겁니다.
운보는 만족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과거 친일행적을 인정하고 잘못된 일이라고 사죄를 했지요.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이정도의 반성이나마 하는 사람이 드믄 풍토에서 이건 이것대로 평가해 줘야 합니다.
그러나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는 대인의 풍모를 보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입니다. 그래서 얍삽한 미당같은 이들을 그야말로 형편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리고 다른 친일파들과 그 후손들을 정말 부끄럽게 만들수도 있었는데....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박정희를 두둔하는 사람들이 흔히 얘기하는게 그의 경제발전 업적입니다. 경제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느정도의 독재는 필요했다, 또는 독재를 한건 사실이지만 경제를 발전시킨 공이 더 크지 않느냐 뭐 이런 식으로들 얘기하지요. 그러나 죄송하게도 이건 대한민국의 헌법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위험한 생각입니다.
대한민국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입니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라는 말입니다. 민주주의의 반대가 무엇입니까. 많은 분들이 공산주의라고 하더군요. 그러나 민주주의의 반대는 독재, 또는 전제주의입니다. 결국 '독재는 불가피 어쩌구.....' 하는 생각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존립기반인 헌법을 부정하는 반국가적인 생각이 되는거지요. 한마디로 그렇게 얘기하는 사람들은 빨갱이와 생각이 별반 다를게 없다는 얘깁니다.
민주주의와 경제는 저울로 달아질수가 없는겁니다. 박정희는 그저 독재자일 뿐입니다. 경제를 발전시킨 공이 있더라도 그건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과는 처음부터 비교대상이 아닌 것입니다. 설령 억지로 비교를 한다하더라도 감히 비교조차 할수 없을만큼 민주주의의 가치가 월등하게 큰것 입니다.
박정희기념관 건립에 대해서는 두가지 조건만 충족된다면 반대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선 기념관은 경제에 대한 것에만 한정돼야 하며(물론 이것도 경제학자들의 정밀한 평가를 거쳐야 겠지요) 또하나는 같은 부지 내에 같은 규모의 박정희 독재사료관의 건립도 같이 추진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비교대상이 아닌걸 억지로 비교하려 하지말고 정치는 정치대로, 경제는 경제대로 따로 평가를 하자는겁니다.
이제 처음 제시했던 동농의 문제를 얘기해 봅시다. 동농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못한 가장 큰 이유는 일제에게서 작위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기록에 의하면 동농이 작위를 받은 것과 그의 친일행각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점이 분명히 나타납니다.
한국인명대사전(신구문화사), 국사대사전(백만사)의 김가진 항목에는 "동농은 작위를 거절했다"고 씌여 있습니다. 우리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그뒤 반납했다", 한국독립사(김승학)는 "받지 않았다"고 쓰여있으며 심지어 일제 또는 친일한국인이 쓴 것으로 보이는 <조선독립소유사 론>마저도 "일한합병 당시 대한협회 고문으로 합병에 반대의 태도를 취하더니, 합병후 작위를 주었으나 불락(不樂, 기뻐하지 않았다)하였다"고 씌여있는 것을 확인할수 있습니다. 이런 기록들로 미루어 동농은 작위를 받지 않았거나 받았더라도 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일제가 일방적으로 수여한 것이 분명한것 같습니다.
그러나 정부는 이런 것들을 깡그리 무시합니다. 그리고 그가 "죽을때까지 남작의 작위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근거에 의해서 그렇게 판단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가지 궁금한건, 그렇다면 도대체 동농이 어떻게 했어야 된다고 생각하는가 하는겁니다. 일본천황에게 내용증명이라도 보냈어야 한다는 얘긴지 아니면 중앙일간지에 공고라도 실었어야 반납한게 인정된다는건지 참 궁금합니다.
황장엽의 예를 생각해 봅시다. 그가 망명할때 북한에 비서직 사직서를 내고 왔나요, 아니면 망명후에 북한에 사직서를 보냈나요? 또 만약에 아직까지도 북한에서 그의 비서직을 그대로 두고 있다면 그는 망명한게 아닌게 되는건가요?
동농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순간부터 작위도 버렸다고 보는게 상식이지요. 자신이 싫다고 한게 분명한데도 '단지 일본이 기록을 없애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반납하지 않았다고 판단한다면 그건 그야말로 생떼에 지나지 않는겁니다.
그러나 이 사안의 본질은 그가 작위를 받았느냐 안받았느냐, 보유했느냐 반납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건 그들이 저울로 달기위해 억지로 만든 핑계에 불과합니다. 정말 중요한건 그가 진정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일했느냐 아니냐를 따지는 일이지요. 그깟 작위의 보유여부야 아무러면 어떻습니까.
무엇보다도 이건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민족과 조국을 위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죽음의 길을 택한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모든것을 버리고 민족을 위한 일에 몸을 바쳤다면 그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쓰다보니 별것도 아닌 글이 길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떤 행동을 할때, 혹은 이런저런 사회적 현상을 파악할때 아주 유용한 Tip을 하나 소개해 드리지요. 어디서 본 누구의 글인지는 생각나지 않지만 참 좋은 내용이라 생각돼서 항상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겁니다.
"무언가를 보는(판단하는) 기준에는 세가지 등급이 있다.
가장 아래 등급이 자신의 이해(利害)를 따져 판단하는 것이며
가운데 등급은 선악(善惡)을 따져 판단하는 것이며
가장 상급은 미추(美醜)를 가려 판단하는 것이다"
뭐 별로 특별한 얘기는 아닙니다. 그저 어떤일을 판단할때 자신에게 유리한가 불리한가로 판단하지 말고 옳고 그름이나 아름답고 추함으로 판단하라는 평범한 얘기일 뿐이지요. 그럼에도 이글이 특별하게 생각되는건 선과 악에 의한 구분, 즉 법이나 제도같은 것보다 아름다움과 추함에 의한 구분, 즉 '인간다움'을 더 윗자리에 둔다는 점입니다.
조금 달리 말한다면 옳은일이 항상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옳은일이 추할수도 있고 옳지않은 일도 아름다울수 있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지요. 이것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모든일을 판단하고 결정하는, 또는 법만능주의에 빠져있는 우리들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정말 필요한게 무엇인가를 일깨워주는 글이 아닐수 없습니다.
끝